최근 수정 시각 : 2019-07-11 14:15:32

빌헬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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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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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폰 호엔촐레른
(Wilhelm Friedrich Ludwig von Hohenzollern)
출생 1797년 3월 22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888년 3월 9일 (90세)
독일 제국 베를린
장례식 1888년 3월 16일
독일 제국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재위 독일 제국의 황제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프로이센 왕국의 왕
1861년 1월 2일 ~ 1888년 3월 9일
배우자 작센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 (1829년 결혼)
자녀 프리드리히 3세, 루이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형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샤를로테, 프리데리케, 칼, 알렉산드리네, 페르디난트, 루이제, 알베르트
서명 파일:1280px-Wilhelm_I,_German_Emperor_Signature.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ilhelm1.jpg
초상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iser_Wilhelm_I._.jpg
실제 모습

1. 개요2. 즉위 전3. 통치4. 기타
4.1. 대중매체

1. 개요

Kaiser Wilhelm I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만 90세 총 33225일.)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

2. 즉위 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ilhelm_%28Heusinger%29.jpg
1810년 나름 풋풋한 왕자 시절의 빌헬름 1세.

1797년 3월 22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왕국 전통에 따라 어린 나이부터 프로이센 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이후 평생을 무인으로 보내다가 두살 위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아들이 없어서 후계자가 되었다.

1848년 3월 혁명 때는 강경 진압을(대포로 진압을 명령) 주장해서 '총알 왕자(포도탄 대공)'라는 별명을 얻었고 혁명군의 살해 위협에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하는데 이 당시 역시 강경 진압을 부르짖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눈여겨보게 된다. 당시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즉위 전 자유주의 성향을 띄었고 왕실이나 군부의 뜻과 따로 놀았는데 혁명이 터지자 진압에 주저하고, 혁명군에 굴복하게 되자 군부와 귀족의 많은 인사들이 겁많고 나약한 국왕에 실망하고 왕세제 빌헬름 왕자에 주목하게 된다. 결국 혁명이 나가리되자 다시 프로이센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 이후 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독일권 내 주도권 주장에 굴복하는 등 실망스런 통치 기간을 보냈고 결국 60세가 되는 해(1857년)에 정신병이 발작해서 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빌헬름 왕자는 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1861년 왕위에 올랐다.

3. 통치

즉위하자마자 평소의 지론대로 군대를 강화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징병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예산 문제로 하원과 충돌하자[1] 퇴위를 불사하며 평소 눈여겨 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전격 기용하였다. 당시 프로이센의 정치 체제를 보면 의회는 그저 세금을 내는 부르주아들의 푸념이나 들어주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왕권이 하원과 충돌하니 "아랫 것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왕 못 해먹겠다."라고 몽니를 부린 것. 이렇게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유명한 피와 쇠 연설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의회의 예산권을 대놓고 침해하고 군대 예산을 늘렸는데, 이것이 가능한건 역시나 총리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지 의회 따위와 수직관계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 군주제 전통에 길들여진 의회에서 더이상 강한 충돌을 원치 않아서이기도 했다.[2]

어쨌건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강력한 육군을 만들었다. 다만 대외 정책에선 빌헬름 1세와 다른 구상을 하는데 1862년 덴마크 위기 때는 독일 연방 의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해서 덴마크를 털었는데, 이는 민족주의란 아랫 것들의 상스러운 불순사상이라 생각하는 빌헬름 1세의 지론과 다른 것이었다. 빌헬름은 18세기 태생으로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데다가 평생 군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랫 것들이 입헌이고 자유고 민족주의고 뭐고 걍 정치 사상 자체를 가지는 것을 금기시했다. '왕권은 어디까지나 신이 통치자에 수여한 것이요(왕권신수설) 왕은 신에게 수여받은 왕권으로 통치하고 신민은 복종해야 한다' 같은게 그의 지론이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내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자, 프로이센 왕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봉장 역할이나 해야 된다는 지론덕에 비스마르크가 너무 막 나가는걸 자제시켰으나, 역시 또 현실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나자 생각이 바뀌었는지(...) 까지를 공격하고, 영토 할양을 꼭 받아내야 하며 또한 이겼으니 승자의 권리로서 빈에서 개선 행진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비스마르크가 밥통 싸들고 반대하자 뜻을 꺾는다. 이 결과 북독일연방을 조직하였으며, 이 정도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1868년부터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각해져서 역시 전쟁엔 소극적이었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나폴레옹 3세를 관광, 결국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ton_von_Werner_-_Kaiserproklamation_in_Versailles_1871.jpg

그의 관심사는 황제 드립이나 독일 민족 통일 따위는 아무 흥미가 없었고, 오로지 프로이센과 왕권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 독일 내 복수 주도권(Dual power) 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했지 오스트리아를 아예 배제하려는 것은 그의 구상과 거리가 멀었다.. 폭도떼의 나라(?) 프랑스를 쳐바른건 그도 원하던 바였으나, 황제 자리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3] 비스마르크의 설득이 잘 먹히지도 않아서 비스마르크가 뒷공작으로 독일 제후 중 빌헬름 1세와 친한 바덴 대공이[4] 직접 빌헬름에게 황제 자리에 올라달라고 요청한데다가 30여개 군주국 군주들이 직접 와있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 추대에 화답한 것. 사실 황제 자리도 '독일 제국의 황제(Emperor of Germany)'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그런 식이면 제후왕들이 얄짤없이 신하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을 거라는 비스마르크의 설득 때문에 독일 황제(German Emperor)가 수여된 것.[5]

실제 그는 취임식 아침까지 비스마르크에게 독일 황제(German Emperor) 자리는 타국 군주가 오면 의전상 각국 왕실 근위 연대 소속으로 수여하는 '명예 대령'직에 불과하며(...) 자신의 관심사는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군대 뿐이며 칭제 선언으로 프로이센이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처럼 비스마르크와 항상 뜻이 일치한 것은 아니며 갈등도 있었지만,[6] 빌헬름 1세는 자신보다 비스마르크가 나라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에게 맡기는 인내심을 보여줘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몇몇 경우에서는 빌헬름 1세의 의견이 더 옳았던 것으로 훗날 판명되기도 했다.[7] 그러나 공적 관계와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비스마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4. 기타

33세 때 14살 연하인 작센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8] 결혼이 늦은건 자신의 육촌 폴란드 귀족 여성과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신분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반대로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폴란드는 망해서 나라가 없어졌...긴 한데 프로이센은 다름아닌 그 분할의 당사자이자 그 분할된 영토를 차지한 수혜자인데...(...)

무려 90세까지 장수했다. 한 보름 더 살았더라면 만으로 91세 채우는데. 이는 서구의 남성 군주 가운데 무슨 공국, 대공국, 자치령 등의 군소국 군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살은 것이며[9] 근대 이후 남성 군주 가운데서는 세계에서 가장 장수한 것이다. 하지만 선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서 즉위했던 만큼 늦게 즉위하여 나무 위키의 실제로 장수한 왕들에는 오랫동안 없었다. 소국을 제외하고는 엘리자베스 2세가 만 [age(1926-04-21)]세를 넘겨 기록을 경신하여 현재 진행형이고, 동시대를 살았던 프란츠 요제프 1세(87세)가 3등이다. 다만 재위 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만 68년으로 캐바르기 때문에 괜찮다.[10] 아시아에선 태국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88세까지 열심히 추격(?)하다가 2016년 10월 13일에 사망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매우 연장된 현대에도 이렇게 90세까지 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장수한 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1px-Bundesarchiv_Bild_102-00625A%2C_Kaiser_Wilhelm_I._mit_Sohn%2C_Enkel_und_Urenkel.jpg
4대가 한 사진에 담겨있는 모습. 그러니까 빌헬름 1세가 안고 있는 갓난아기가 증손자다. 다시금 말하지만 언제 인물이냐면 나폴레옹 1세 시대의 인물이다. 삼촌과 그 조카와 모두 맞서 싸웠을 정도니...[11] 프랑스의 전성기와 몰락 그리고 신흥 강국인 독일의 부상이라는 산업 혁명과 궤를 같이 한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순환을 모두 살아서 목격한, 말 그대로 역사의 산 증인이다! 98세까지 장수한 고구려장수왕을 연상케 하는 수준.

후임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아들 프리드리히 3세였으나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죽고(아버지가 워낙 늙어서 그렇지 이미 57세였으니 요절은 아니다. 흠좀무.), 혈기왕성한 손자 빌헬름 2세가 29세의 나이로 뒤를 잇는다. 참고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독일 통일을 빌헬름 1세의 업적이라며 전국 각지에 동상을 세우고 대제(大帝,Der Große) 칭호로 높혔으나, 독일인들은 다 누구의 공적인지 잘 알고 있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담으로 오늘날 독일에서 프로이센 군주 중에 Der Große(大) 칭호를 사회 전체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은[12] 대선제후(大選帝侯) 프리드리히 빌헬름프리드리히 대왕 정도 뿐이다.

4.1. 대중매체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주인공 덕분으로 생긴 나비효과로 보오전쟁의 승리를 일거에 무효로 만들게 되는데 프랑스 제국과의 전쟁으로 프로이센 왕국이 패배하자 오스트리아가 국경에 대군을 편성하는 등 양면전쟁을 격게되자 급한 불을 끌려고 독일연방의 주도권을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주고 그 여파로 패전도 패전이지만 과거의 패전국 오스트리아가 독일연방에서의 영향력을 증대를 하는 등. 대내외적의 악재로 마침내 혁명이 일어나 호엔촐레른 왕가와 귀족이 과거의 적대국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면서 현재로써는 두고 보아야 하지만 사실상 호엔촐레른 왕가의 마지막 국왕이 된 상황이다.
원래 역사보다 빨리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연방 공화국발 서유럽 금융공황으로 인해 입헌군주정 수용 조건이나마 프로이센의 왕정 복고가 일어나면서 왕족,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귀족들과 같이 함께 복귀될 듯하다.

복귀는 했지만 보불전쟁의 나비효과로 패전국에다가 나라에서 쫓겨나다 원래 역사보다 빨리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까지 보게되면서 정치적 일선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1] 사실 징병 기간도 문제지만 예비군 지휘를 현역 장교에게 맡기는 문제가 더 컸다. 예비군들에게 반동 정치 성향을 강요할 우려가 있다하여서... 군 병력 증강은 오래부터 제기된 문제로 인구가 1815년보다 많이 늘어서 편제를 늘려야된다는데는 부르주아들도 공감은 하고 있었다.[2]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이런 독단성은 이후 반대파와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데 한몫 한다.[3] 애초에 서양에는 황제 = 천자라는 개념도 없고, 동양식 칭제 드립도 없다...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조차도 1848년 혁명 세력이 바친 독일 황제관은 '돼지들의 관'이라며 거부했고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의 '시민의 왕'은 폭도떼들이 수여한 수치스러운 직위라 경멸했으니 나폴레옹의 황제 드립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겠나 설명이 필요한지(?).. 이 시대 높은 분들에게는 절대 권력을 긍정하는 토머스 홉스 조차도 불순 사상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아래 사람이 '위임'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왕권 신수설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4] 1848년 혁명 진압시 바덴 대공의 요청으로 6개월간 바덴 대공국에서 프로이센 군대가 체류한적이 있는데 이때 친구가 되었다.[5] 독일 황제 자리는 프로이센 국왕이 세습하지만 소국 제후와 프로이센의 법률적 위치는 제국 내에서 동일하다. 황제, 황후, 황태자는 있지만 나머지 프로이센 왕실 구성원은 프로이센의 왕자(Prince of Prussia)를 써야지 독일 제국의 황자는 아니었다.[6]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조회 불출석(...) 등 초강수도 서슴지 않았다.[7] 예를 들어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사이가 안 좋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동유럽 외교 정책에서 두 사람은 크게 대립하였는데, 이 외교 정책은 비스마르크이기에 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곧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소리. 이후 손자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비스마르크를 내쳤다. 그리고 결과는... 이 외에도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를 제 앞가림 못하는 과대 평가된 나라라고 지적했는데 이 점은 1차 대전에서 입증되었다.[8] 역대 프로이센 국왕 중에서 (첫) 배우자와의 나이 차이가 가장 많다.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마지막 부인과 28살 차이였지만 이건 3번째 결혼이라... 참고로 아들 프리드리히 3세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는 10살 차이였고, 손자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황후는 1살(연상연하 커플) 차이.[9] 필리프 에른스트(1663년 ~ 1759년)라고, 호엔로에 - 발덴부르크 - 쉴링스퓌어스트의 제후가 96세까지 산 경우가 유일한 예외다.[10] 살아있는 전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 6일 여왕에 올라 2019년 5월 기준 만 67년을 넘겼다.[11] 다만 나폴레옹 1세와 맞서 싸웠을 때에는 10대의 어린 나이였다.[12] 즉 한국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