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교황 비오 9세 사이의 다툼에 관한 독일 언론의 풍자화[1] |
1. 개요
Kulturkampf(쿨투어캄프)[2]근대 이후 성립된 세속 국가들이 정교분리를 내세우면서 교회, 특히 가톨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일어난 정치적 알력을 일컫는 단어. 넓게 보자면 문화 투쟁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제1공화국이 가톨릭을 금지하고 사제들을 추방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3]까지 약 150년 동안 전 유럽에 걸쳐 일어난 현상이지만 일반적으로 '문화 투쟁'이라고 하면 독일 제국 시기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 왕국과 교황 비오 9세 사이의 다툼을 의미한다.
2. 내용
2.1. 배경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자신들의 주도 하에 독일 제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자적인 역사가 길었던 바이에른 왕국과 라인란트를 비롯한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여전히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통일 독일에 대해서 마뜩찮아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해서 가톨릭 중앙당이 제국의회에서 세를 불려나갔고 이들은 국가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교회를 국가의 통제 밑에 놓으려고 했던 비스마르크의 정국 구상과는 대립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중앙당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갔다.[4] 이러한 와중에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지지층인 프로이센 왕국의 왕실인 호엔촐레른 가문 융커 계층 사이에서도 교회에 온건한 접근을 주장하는 세력보다는 '이 참에 교회에 본 때를 한 번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으면서 상황은 두 세력 간의 치킨 게임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이런 반감은 독일 통일의 와중에 불거진 갈등 때문에 뿌리가 깊어졌다. 독일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있다고 보았으며, 600만 명의 오스트리아인(주로 가톨릭 신자)을 배제하는 프로이센 주도의 '소독일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 1871년 이후 가톨릭을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제국의회에서 야당에 포진한 3대 소수 민족(폴란드인, 알자스인, 덴마크인) 중 2개 민족 대표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더 깊어졌다. 비스마르크는 동프로이센의 폴란드인 가톨릭 신자 250만 명의 정치적 '불충'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와 교회의 네트워크가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에 깊이 연루되었다고 의심했다.
이 같은 우려는 새로운 국민-국가 내에서 전보다 더 파괴적인 요인으로 잠재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새롭게 일군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기적'이거나 역사적으로 진화한 통일 국가가 아니라 4년간 외교 전쟁 끝에 나온 고도로 인위적인 산물이었다.[5] 프로이센의 역사에서 종종 그랬듯, 군주제의 성공은 인상적인 모습 못지않게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었다. 너무 빠른 시간에 합쳐진 신생 제국은 쉽게 흩어질 수 있으며, 내부로부터의 분열을 막아줄 정치적·문화적 응집력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런 불안이 과장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실감하는 것이었다. 이런 풍토에서 가톨릭을 국가적 단합을 방해할 가장 무서운 국내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였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3-764쪽
이 같은 우려는 새로운 국민-국가 내에서 전보다 더 파괴적인 요인으로 잠재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새롭게 일군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기적'이거나 역사적으로 진화한 통일 국가가 아니라 4년간 외교 전쟁 끝에 나온 고도로 인위적인 산물이었다.[5] 프로이센의 역사에서 종종 그랬듯, 군주제의 성공은 인상적인 모습 못지않게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었다. 너무 빠른 시간에 합쳐진 신생 제국은 쉽게 흩어질 수 있으며, 내부로부터의 분열을 막아줄 정치적·문화적 응집력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런 불안이 과장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실감하는 것이었다. 이런 풍토에서 가톨릭을 국가적 단합을 방해할 가장 무서운 국내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였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3-764쪽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장된 불안으로 보일 수 있어도 당시 비스마르크 입장에서는 '소독일안'에 냉담하며 소수민족인 알자스인과 폴란드인의 신앙인 제국의 가톨릭이 신생 독일 제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자유주의 노선의 신문과 잡지는 가톨릭 신자들을 (자유로운 양심을 가진 남성 납세자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유주의 세계와 반대되는) 비굴한 꼭두각시 집단으로 묘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형화된 반교권적 이미지로 가득한 동물우화집이 나올 정도였다! 자유주의 잡지에 실린 풍자화 중에는 교활하고 마른 예수회원과 호색하고 살찐 사제들 그림이 많았다.(성직자의 새까만 옷은 만화가들이 기교를 부리기 쉬운 대상이었다). 이런 그림은 교구사제가 고해성사를 맡는 걸 비난하거나 수녀들의 성적 예의범절을 의문시함으로써 가부장적 핵가족을 신성시하는 자유주의의 믿음을 표현했다. 새로운 가톨릭 질서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이 맡은 중요한 지위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과 사제의 독신(혹은 비독신) 생활에 대한 그들의 호색적인 관심을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은 반가톨릭 운동의 형성에 결정적이라고 할 '남성성'에 대한 (늘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뿌리 깊은 집착을 드러냈다.[6]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4-765쪽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4-765쪽
가톨릭교회를 비난하는 가운데 자유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비스마르크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185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파견된 기간에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가톨릭 신앙이 남부 독일에서 가장 큰 '프로이센의 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세기 중엽의 가톨릭이 점점 로마 중심으로 전개되는 흐름에서, 가톨릭의 복고적인 경건주의와 보란 듯이 자행되는 성지순례, 공개적인 축제의 광경을 목도하며 그는 극도의 혐오감을 품었다. 실제로 그는 이런 모습이 "지극히 혐오스럽고 교활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위선적인 가톨릭 신앙"으로서 "주제넘은 교리를 하느님의 계시로 왜곡하고 우상숭배를 속세를 지배하기 위한 기반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7] 이런 의혹에는 다양한 시각이 뒤섞여 있었다. 가톨릭 복고 특유의 현상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경건주의적인 영성으로 두드러진) 프로테스탄트적인 경멸, 일종의 어중간한 독일 관념론, 그리고 심리를 조종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교회의 능력에 대한 (거의 편집증과 구분이 안 되는) 정치적 불안 등 등.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2-763쪽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2-763쪽
마지막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비스마르크 개인의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카톨리시즘에 대한 경멸이다.
2.2. 전개
먼저 선전포고한 측은 가톨릭이었다. 교황 비오 9세가 '진보, 자유주의, 근대 문명과의 타협을 거부할 것'을 신자들에게 지시하자 이에 비스마르크는 1871년 7월 프로이센 왕국 내 문화청의 가톨릭 부서를 철폐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성직자들에 대한 정부의 관리를 강화할 것을 명시한 법안[8]이 라이히스탁에서 통과됐다. 이듬해인 1872년에는 예수회의 독일 내 활동을 금지한 데 이어 1873년에는 악명 높은 5월법(Mai Gesetz)를 통과시켜 버렸다. 5월법으로 인해 독일에서 사제 서품 후보자가 사제 서품을 받으려면 독일 정부가 주관하는 역사, 철학, 문학 시험[9]을 통과해야 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징역형과 고액의 벌금이 부과되어 정부의 교회 통제가 한층 강화됐다. 비스마르크의 강공은 그칠 줄을 몰랐다. 1874년 공교육 기관에서 종교 교육이 오로지 국가에 의해서만 실시될 수 있도록 규정됐고 세례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종부성사 등의 성사를 교회가 주관하는 것까지도 막아 버렸다. 가톨릭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875년이 되면 독일의 모든 수도원을 폐업[10]한 데 이어 교황령에 거주하던 독일 제국 외교관까지도 철수하여 독일 제국과 교황령이 단교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해졌다.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서 독일 가톨릭 교계는 격렬히 반발했고 그 덕에 1870년대 후반이 되면 대다수의 주교들이 추방되어서 독일 내 교구 중에서 주교가 존속한 교구가 주교가 추방된 교구보다 적을 지경이었다.[11] 가톨릭 교계는 모진 탄압에도 교황을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중앙당의 세는 문화 투쟁이 시작되기 전보다 오히려 커져갔고, 급기야 공석이 된 주교 자리를 정부가 임의로 임명하려고 시도했다.[12]
1878년 말에 프로이센의 가톨릭 주교 중 절반 이상이 망명을 하거나 투옥되었다. 1,800명이 넘는 사제가 감금되거나 망명했으며 1,600만 마르크의 가치가 넘는 교회 재산이 압류되었다. 1875년 들어 첫 4개월 동안에만, 사제 241명과 가톨릭 신문사 편집장 136명, 가톨릭 평신도 210명이 벌금을 물거나 투옥되었으며 신문사 20곳이 몰수되었다. 또 가톨릭 건물 74개 동이 수색당했고 가톨릭 정치 활동가 103명이 추방되거나 억류되었으며 가톨릭 협회와 클럽 55개가 폐쇄되었다. 1881년에 가서는 프로이센의 전체 교구 중에 사제가 없는 곳이 4분의 1이나 되었다. 이것이 수 세대 동안 독일의 정치와 공공생활의 골격을 형성한 '문화투쟁'(Kulturkampf)이 절정에 올랐을 때의 프로이센 모습이었다.[13]
이 시대에 유럽에서 종파 문제로 갈등을 겪은 국가가 프로이센만은 아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서 가톨릭과 세속 자유주의 운동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경우는 유별났다. 다른 어디에서도 가톨릭 기관과 구성원들을 그토록 체계적으로 억압한 곳은 없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1쪽
이 시대에 유럽에서 종파 문제로 갈등을 겪은 국가가 프로이센만은 아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서 가톨릭과 세속 자유주의 운동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경우는 유별났다. 다른 어디에서도 가톨릭 기관과 구성원들을 그토록 체계적으로 억압한 곳은 없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1쪽
이러한 억압은 가톨릭 바깥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1870년대 중반에 가서, 자유주의 좌파는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이 운동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급진적인 반교회 운동의 조치는 독일 보수주의에서 '성직자' 분파를 형성한 많은 프로테스탄트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이들은 '문화투쟁'의 진정한 희생자는 가톨릭 교회나 가톨릭 정치가 아니라 종교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5-766쪽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5-766쪽
그동안 정부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다툼을
2.3. 해소
비스마르크는 겉으로는 여전히 배짱을 부렸지만[14] 안으로는 교회와 적당한 선에서 화해를 하기 위한 접점을 찾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비스마르크가 5월법을 주도한 교육부 장관을 해임해 화해의 제스쳐를 취하자 중앙당 역시 화해의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교황이 강경한 원칙주의자였던 비오 9세에서 외교적이고 타협주의자였던 레오 13세로 바뀐 것도 두 세력 간의 화해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뮌헨과 빈에서 양측은 두 차례 회담을 가졌고 독일 제국이 점차적으로 반 가톨릭 법안을 폐지하기 시작하면서 문화 투쟁도 마침내 끝을 보게 되었다.2.4. 결과
1871년에 프로이센 가톨릭 신자들은 23%만 중앙당을 지지했지만, 1874년에는 이 비율이 45%로 늘어났다.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이 빚은 참화에 상당 부분 덕을 본 중앙당은 사회 환경에 깊이 뿌리박은 상태에서 이때까지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던 가톨릭 신자들을 동원하고 당과 정치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일찌감치 세력을 떨쳤다."[15] 다른 정당은 비가톨릭 진영에 포진한 그들의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점점 중앙당을 따라 했지만, 1912년에 가서야 이들은 중앙당의 대도약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이때도 중앙당은 사민당 다음으로 제국의회에서 세력이 막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과 보수당 소속의 의원 대다수는 여전히 사민당과 손을 잡는 데 신중했기 때문에 중앙당은 가장 강력한 원내 세력이 되었다. 이런 결과는 비스마르크가 1871년에 문화투쟁을 전개했을 때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70쪽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70쪽
비스마르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가톨릭 중앙당의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1]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 베를린과 로마 사이(Zwischen Berlin und Rom). 교황: 방금 수는 언짢지만, 아직 게임은 안끝났네. 아직 나에게는 묘수가 있지. 비스마르크: 그것도 마지막이 될 걸세. 어차피 몇 수 안에, 적어도 독일에서는, 자네는 외통수 상태가 될 테니까 말이다.[2] 독일어 단어인 Kultur(문화)+Kampf(투쟁). 고유명사가 되어 아예 영어나 프랑스어 등 다른 유럽어에서도 자국어로 번역하기보다 이 단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쓴다.[3] 특히나 스페인은 가톨릭 세력의 뿌리가 워낙 깊었기 때문에 1930년대의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가톨릭 신부들이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많은 수의 신부들이 학살에 개입했다. 물론 공화파도 사제와 수도자들(+가톨릭 단체에서 활동하던 평신도들도)을 무차별 학살한 것은 마찬가지다.[4] 이는 단순히 정교분리 뿐만이 아니라 중앙당이 친노동자 성향을 띄었던 점도 큰 몫을 했다. 가톨릭은 산업혁명 시기에 '전통'을 고수하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해 왔는데 중앙당도 이러한 입장을 따라서 자본가를 비판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할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보면 반공적이면서도 노동조합에 호의적인 당시 가톨릭교회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5] (책 속 주석) Lerman, Bismarck, p. 176.[6] (책 속 주석)Michael Gross, The War Against Catholicism. Liberalism and the Anti-Catholic Imagination in Nineteenth-century Germany (Ann Arbor, MI, 2004); Rosín Healy, The Jesuit Spectre in Imperial Germany (Leiden, 2003)[7] (책 속 주석)Pflanze, Bismarck, vol.1.,p. 368, and vol.2,p.188.[8] 이 법에는 사제들이 정치적으로 불온한 언동을 할 경우 처벌을 가할 수 있게 명시됐다.[9] 정부 측에서는 이를 문화시험(Kulturexamen)이라고 명명했다.[10] 유일한 예외가 바로 병원의 역할을 맡던 수도원.[11] 총 교구 중에서 3분의 1 정도 되는 수의 교구만 살아남았다.[12] 주교직은 교황의 권한으로 임명되는 성직이니 가톨릭교회가 분노할 만 했다.[13] (책 속 주석)Margaret Lavinia Anderson, Windthorst. A Political Biography (Oxford, 1981), 특히 pp. 130-200; David Black bourn, Marpingen: Appartitions of the Virgin Mary in Bismarckian Germany, 1871-1887 (Oxford, 1993), pp. 106-20; Ronald J. Ross, The Failure of Bismarck's Kulturkampf. Catholicism and State Power in Imperial Germany, 1871-87 (Washington, 1998), pp. 49,95-157.[14] 이 때 비스마르크가 제국의회에서 했던 연설이 ''카노사에는 절대 가지 않을 겁니다!''였다.[15] (책 속 주석)Jonathan Sperber, The Kaiser's Voters. Electors and Elections in Imperial Germany (Cambridge, 1997); Margaret Lavinia Anderson, Practicing Democracy. Elections and Political Culture in Imperial Germany(Princeton, NJ, 2000), pp. 69-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