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4 16:33:37

스페인 내전

스페인의 역사
-1 Historia de Españ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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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국 (1492년 ~ 1931년) 현대 (1931년 ~ )
스페인 왕국 제1공화국 스페인 왕국
-1 왕정복고
제2공화국 스페인국 스페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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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왕국 스페인공화국
망명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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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시기 1936년 7월 17일 - 1939년 4월 1일
장소 스페인 전역
원인 1933년 총선 이후 극심한 좌우대립.
교전 및 지원단체 파일:스페인 제2공화국 국기.png 스페인 제2공화국
파일:인민전선 당기.png 인민전선
전국 노동 연맹[1]
카탈루냐, 바스크 등을 비롯한 자치정부
코민테른
파일:국제여단기.png 국제여단[2]
파일:소련 국기.png 소련[3]
파일:멕시코 국기.png 멕시코[4]
파일:프랑스 국기.png 프랑스 제3공화국[5]
파일:스페인국 국기(1938~45년).png 스페인국
군부
CEDA
파일:팔랑헤당 당기.png 팔랑헤
왕당파
가톨릭 교회 및 바티칸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png 이탈리아 왕국[6]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나치 독일[7]
파일:포르투갈 국기.png 포르투갈 제2공화국[8]
지휘관 마누엘 아사냐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
호세 히랄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후안 네그린 로페스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훌리안 베스테이로
유이스 콤파니스
비센테 로호 유치
호세 미아하
후안 모데스토
후안 에르난데스 사라비아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메흐메트 셰후
호세 상후르호
에밀리오 몰라
프란시스코 프랑코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미겔 카바네야스
병력 보병 450,000 명
전투기 350 대
대포 200 문
보병 600,000 명
전투기 600 대
대포 290 문
피해 총 사상자 175,000명. 민간인 학살 5만명[9]. 총 사상자110,000명. 민간인 학살 11~13만명[10].
결과 스페인 국민군의 승리
영향 프랑코 독재 시작, 공화파에 대한 대숙청 자행.
Guerra Civil Española
1. 개요2. 전쟁 이전3. 내전 발발4. 내전 진행
4.1. 공화국의 상황4.2. 반란군의 상황4.3. 국제적인 연대를 통한 지원
4.3.1. 공화파에 대한 지원4.3.2. 반란군에 대한 지원
4.4. 게르니카 폭격
4.4.1.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4.4.2.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보는 주장
4.5. 내전의 종결
5. 결과6. 관련 문서7. 대중문화
7.1. 문학7.2. 회화7.3. 영화
7.3.1. 음악
7.4. 스페인 내전 관련 서적7.5. 관련 게임

1. 개요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는 게 낫다.
-공화파 정치가, 돌로레스 이바루리(Dolores Ibarruri)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용기를 내도 용기에 대한 급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로 스페인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스페인에서 벌어진 전쟁이자, 당대 주류 이념들의 격전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pa,_Death_of_a_Loyalist_Soldier.jpg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1936년 로버트 카파 촬영.[11]

2. 전쟁 이전

당시 스페인은 왕정의 무능과 정치적 부패 등으로 정세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스페인 제1공화정부터 스페인 내전 시점까지 무려 40여 차례의 쿠데타와 60여 차례의 정치적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군부는 심심하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다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사회가 혼란하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알폰소 13세는 이 쿠데타로 집권한 리베라 장군을 승인했다.

리베라 정권은 이내 닥쳐온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워진데다 리베라의 갖가지 실책으로 결국 공화주의자들은 물론 기득권층까지 리베라에게 등을 돌렸다. 리베라는 다시 군부에 지지를 호소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알폰소 13세는 분노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총선 실시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는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알폰소 13세가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스페인은 공화국이 된다. 이에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적 좌파정권이 출범했으나 기존의 기득권층인 지주들과 가톨릭 교회, 군이 중심이 된 보수파는 이들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 중 교회의 경우에는 보수파의 중심이 되었긴 했지만 당시 스페인 영토의 무려 3분의 1이 가톨릭 교회 소유였다는 낭설과는 다르게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는 1837년의 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교구 소유의 토지를 대거 매각했고, 이때 가톨릭 교회가 매각한 대부분의 토지는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의 소유가 되었다. 1936년 시점에서 가톨릭교회라는 조직 자체는 몰라도 개별 성직자는 절대 부유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토지는 일반 지주의 것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각 지역의 성직자들은 내전 발발시 양측 진영에 소속되거나 중립을 지키는 등 가톨릭 자체의 의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다.

어쨋든 1932년까지 2400만 인구 중 0.97%의 지주가 농지의 42%를 소유했고, 2%까지 올라가면 전체 토지의 65%를 소유했다. 1932년에 공화파에 의한 일부 농지개혁이 행해졌으나 단 9만 헥타르가 분배되었을 뿐이며[12] 보수 세력과 중도세력의 급격한 반발만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 했던 스페인 군부 또한 공화국 정권의 군부 개혁 노력에 반발에 극우화의 길을 걸었으며, 1932년에는 상후르호 장군을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 발각되어 실패했다.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공화파는 위기를 맞았고 결정적으로 노선의 차이로 인해 1933년 총선에서 공화파, 급진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연대가 해체되자 중도(급진공화당)와 우파들은 좌파를 밀어내고 정권을 교체했다. 급진당과 CEDA의 연합정권은 토지개혁을 중단하고 아사냐 정권의 각종 개혁정책들을 후퇴시켰지만, 군대를 동원해 무리하게 노조운동을 탄압하면서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아스투리아스 혁명). 설상가상으로 정치 스캔들이 겹치면서 지지가 바닥으로 치닫게 되자 1936년 바야다레스 정권은 코르테스(스페인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1933년 총선패배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좌파는 1936년 총선에서 우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동단결하기로 결정했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 좌파 및 디에고 바리오가 이끄는 공화주의 중도와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과격한 사회주의 좌파가 인민전선을 결성했다. 우파도 연합세력을 결성하고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진 끝에 선거 결과 불과 15만 표차로 인민전선이 초박빙 승리를 거두었다.

1936년 선거의 선거 연합은 다음과 같다.다시 좌파정권이 등장하자 우파들은 공공연히 스페인에서 러시아처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외치면서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군사행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카바예로의 사회주의노동당 역시 총선 패배 시 공공연하게 '인민전쟁을 통한 정권 탈환'을 해야 한다고 우파를 협박할 정도였으므로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았어도 내전 발발 가능성은 높았다.

이 점을 잘 아는 좌파정권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우파성향의 장군들을 스페인 본토에서 멀리 추방했는데 이 중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추방된 곳은 카나리아 제도였다. 그러나 프랑코 파 군인들이 이미 영국을 통해 프랑코를 귀환시킬 비행기편을 구해 놓고, 독일을 통해 병사들을 운송할 수송기와 함선들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쿠데타 발발 직후 프랑코와 당시 스페인 군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정예병들이었던 아프리카 군단 47,000명은 신속하게 스페인 본토로 건너올 수 있었다.

선거 후에 무력 쿠데타를 통한 정권 장악을 권고받은 CEDA의 힐 로블레스가 이를 거부한 후[23] 군부는 팔랑헤당과 단독으로 쿠데타를 준비했으며 이미 인민전선 정부에는 PSOE의 프리에토와 공산당의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아사냐와 총리 키로가를 비록한 정부 인사들은 이 정보를 무시했다. 한편 팔랑헤가 공화정부가 창설한 좌파 성향 조직인 돌격 경찰대 장교 세리아 중위를 암살하자 돌격 경찰대원들은 분노해서 스페인혁신의 안토니오 고이코에체아와 힐 로블레스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우파의 거두였던 칼보 소텔로를 암살한다. 군부는 이를 핑계로 7월 17일에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3. 내전 발발

¡Obreros! ¡Campesinos! ¡Antifascistas! ¡Españoles patriotas!... Frente a la sublevación militar fascista ¡todos en pie, a defender la República, a defender las libertades populares y las conquistas democráticas del pueblo!...

A través de las notas del gobierno y del Frente Popular, el pueblo conoce la gravedad del momento actual. En Marruecos y en Canarias luchan los trabajadores, unidos a las fuerzas leales a la República, contra los militares y fascistas sublevados.

Al grito de ¡el fascismo no pasará, no pasarán los verdugos de octubre!... los obreros y campesinos de distintas provincias de España se incorporan a la lucha contra los enemigos de la República alzados en armas. Los comunistas, los socialistas y anarquistas, los republicanos demócratas, los soldados y las fuerzas fieles a la República han infligido las primeras derrotas a los facciosos, que arrastran por el fango de la traición el honor militar de que tantas veces han alardeado.

Todo el país vibra de indignación ante esos desalmados que quieren hundir la España democrática y popular en un infierno de terror y de muerte.

Pero ¡NO PASARÁN!

España entera se dispone al combate. En Madrid el pueblo está en la calle, apoyando al gobierno y estimulándole con su decisión y espíritu de lucha para que llegue hasta el fin en el aplastamiento de los militares y fascistas sublevados.

¡Jóvenes, preparaos para la pelea!

¡Mujeres, heroicas mujeres del pueblo! ¡Acordaos del heroísmo de las mujeres asturianas en 1934; luchad también vosotras al lado de los hombres para defender la vida y la libertad de vuestros hijos, que el fascismo amenaza!

¡Soldados, hijos del pueblo! ¡Manteneos fieles al gobierno de la República, luchad al lado de los trabajadores, al lado de las fuerzas del Frente Popular, junto a vuestros padres, vuestros hermanos y compañeros! ¡Luchad por la España del 16 de febrero, luchad por la República, ayudadlos a triunfar!

¡Trabajadores de todas las tendencias! El gobierno pone en nuestras manos las armas para que salvemos a España y al pueblo del horror y de la vergüenza que significaría el triunfo de los sangrientos verdugos de octubre.

¡Que nadie vacile! Todos dispuestos para la acción. Cada obrero, cada antifascista debe considerarse un soldado en armas.

¡Pueblos de Cataluña, Vasconia y Galicia! ¡Españoles todos! A defender la República democrática, a consolidar la victoria lograda por el pueblo el 16 de febrero.

El Partido Comunista os llama a la lucha. Os llama especialmente a vosotros, obreros, campesinos, intelectuales, a ocupar un puesto en el combate para aplastar definitivamente a los enemigos de la República y de las libertades populares. ¡Viva el Frente Popular! ¡Viva la unión de todos los antifascistas! ¡Viva la República del pueblo! ¡Los fascistas no pasarán!

¡No pasarán!

노동자! 농민!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애국자들이여! 파시스트의 군사 반란에 직면하여, 모두 스스로 일어서 공화국과 인민의 자유 그리고 민중이 이루어낸 민주적 위업을 수호해야 합니다! 정부와 인민전선의 성명을 통해 인민 여러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습니다.

모로코와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아직 공화국에 충성하는 세력과 연합하여 파시스트 반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파시즘은 지나가지 못한다! 10월의 교수 집행자는 통과하지 못한다!'라는 기치 아래 스페인 모든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공화국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리고 공화국의 민주주의자, 군인들 그리고 아직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남아있는 모든 세력들이 힘을 합쳐, 군이 오랜 시간 자랑스레 지켜온 고결한 전통을 더럽혀 버린 파시스트 적들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전국토가 스페인을 공포의 심연과 죽음으로 처박아 버리려는 잔혹한 야만인들에게 분노하여 치를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페인은 지금 전쟁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민중이 거리로 나와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의 결정에 대한 격려를 보내며 파시스트의 반란과 반군을 쳐부수기 위한 투지에 불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여, 전투를 준비합시다! 여성들이여, 인민의 용맹한 여성들이여! 1934년 아스투리아스 여성들의 영웅심을 다시 불러내어 파시스트의 위협에 그늘진 당신의 아이의 삶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힘을 합쳐 투쟁합시다!

국민의 아들인 병사들이여! 진정한 공화국에 머물러 노동자들 인민전선의 군인들 그대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대의 동지의 옆에 서서 함께 투쟁합시다! 2월 16일의 스페인을 위해, 공화국을 도와 승리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모든 정파의 노동자들이여! 정부가 우리에게 쥐여준 무기는 10월의 피비린내 나는 교수 집행자가 승리하여 도래하게 될 수치와 공포로부터 스페인과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주저해선 안됩니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합시다. 모든 노동자들, 모든 안티파시스트 여러분은 이제부터 서로를 전우로 보아야 합니다.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의 인민들이여! 모든 스페인인들이여! 우리의 민주 공화국을 수호하고, 우리가 2월 16일에 이룩한 승리를 확고히 합시다.[24] 공산당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특히 노동자들, 농부들, 지식인 여러분이 공화국과 민중의 자유의 적들을 타도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어 낼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워주길 원합니다.

인민전선이여 영원하라! 안티 파시스트 연합이여 영원하라! 민중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파시스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NO PASARÁN!)[25]

- 돌로레스 이바루리 일명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 1936년 7월 19일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1936년 7월 18일, 반란군은 몰라 장군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령 모로코 및 스페인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 반란파를 통칭해서 팔랑헤당 또는 국가주의(Nacionalista), 혹은 반란파(Bando sublevado)세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자유민주주의가 연합한 공화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단일 정파는 아니었고 왕당파, 파시스트, 카롤리스타 등 여러 세력이 연합해 있었다. 물론 국민군내 대표적인 정당은 팔랑헤당이었다.

반란 자체는 수도인 마드리드 장악에 완전히 실패하는 등 성공적이지는 않았으나, 이걸 막을 공화군도 반란군에 참여한 것을 속인 반란군 지휘관에 의해 도시 밖으로 물러난 후 도시를 빼앗기는 등 마찬가지로 어수룩하게 행동했다. 여기에는 한국과 다른 당시 스페인 군사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한국처럼 특정 경계선에 병력이 모여 있는 게 아니고, 전국에 흩뿌려져서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수비대 병영이 있고 수비대 병력이 있었다. 당시 스페인에게는 딱히 대치하는 적성국이 없었기 때문이고, 한국사에서 굳이 비교할 상대를 찾으라면 일제시대에 동네마다 헌병 주재소가 있고 헌병이 주둔했던 모습이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 때문에 주둔군 지휘관의 성향 및 병사와 주민들의 대응 방향에 따라 각 지역에서의 초기 성패가 갈린 것이다.

이런 초기 혼란은 양측 모두 실전경험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페인군은 1898년에 치른 미서전쟁 이후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중립국이었고, 예외적으로 실전 경험을 보유한 부대는 에밀리오 몰라, 프랑코 등이 배속되었던 식민지 치안 유지를 위해 편성한 아프리카군뿐이다. 이들은 원주민 반란 진압 때문에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인 실전 경험이 있던 집단이다 보니 국가군의 초기 진공과 최종적인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하여간 양측의 허튼 짓으로 반란 자체는 실패에 가깝게 진행되었지만, 적어도 본토의 35% 정도가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당시의 지도를 보면 혼란의 극치라고 할 정도로 반란군 지배지역과 공화군 지배지역이 섞여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서 이후에 벌어질 결과를 생각해볼 때 공화국의 패배는 이 쿠데타 과정에서 이미 상당히 예정되어 있었는데, 사라고사, 세비야, 바다호스 등 내전 초기 국가군의 핵심 전략적 거점이었던 상당수 도시들에는 쿠데타 세력과 결사항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 계열 전투 노조원들 수만 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공화국 수상이었던 카사레스 키로가가 쿠데타 음모를 쿠데타 발발 이후 4일째까지 부인하고 또한 이에 대비하여 노조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라는 조언들을 듣지 않았고 결국 쿠데타군에게 (무기만 있었으면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한 것처럼 소수였던) 쿠데타군을 밟아버릴 수 있었던 좌익 전투 노조원 수만 명의 목숨과 대도시 여럿만 내 주고 말았다.

특히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하더라도 '붉은 세비야'라 불릴 만큼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전국적으로도 제3의 도시였던 세비야를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하고 케이포 데 야노에게 상실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비단 세비야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 지방 전체가 가난한 소작농들이 인구의 대부분이라 좌경화가 강한 지방이었고[26], 해군을 여전히 공화파가 잡고 있으며 이 당시 항공 기술은 대규모의 병력 수송에 부적합했으니 이 세비야의 쿠데타만 잘 막았으면 스페인 내전의 남부 전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안달루시아에서 깨적깨적 진군하는 국가군을 막느라 똑같이 낭비했던 전력을 파시스트 세력의 중심이었던 중부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비야를 먹지 못하면 세비야에서 차타고 한 시간 거리 정도 밖에 안되는 당대 스페인 최대의 군항이었던 카디스를 먹을 수 없고[27], 카디스가 없었다면 쿠데타 세력은 무슨 마법을 부려도 국가군의 핵심이었던 모로코 출신 아프리카 군단을 꾸역꾸역 스페인 본토로 실어나르지 못해 야전에서 공화파에 대해 우위를 점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갔으면 국가군은 뭔 짓을 해도 1939년 여름 이전에 전쟁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며, 이때까지 내전이 이어졌으면 우리가 잘 아는 나머지 유럽사의 흐름 때문에 더이상 내전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고, 스페인이 프랑코 통치 아래 40년간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군대의 질과 외부의 지원, 장비, 내적 통합 면에서 국가군에 비해 현저한 열세에 있었던 공화국 정부는 이렇게 초반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치자 전쟁 내내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4. 내전 진행

결국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의 수송기를 지원받은 프랑코 휘하의 정예병력이 본토에 상륙하면서 급속진격하자 반란군이 지배하던 영토가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공화정부군은 혼란에 빠져서 한때 수도인 마드리드의 일부지역까지 반란군에게 내주었지만, 소련에서 들여온 전차 등의 무기와 해외에서 몰려온 국제 여단의 분투로 간신히 프랑코의 진격을 막았다.

이로 인해 내전은 고착화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의 프랑코가 점차 내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코는 평소 상당히 굼뜨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의 공세가 성공하였다. 그 이유는 공화군의 자폭이었다. 공화군은 선전의 목적으로 공세를 추진하였다. 덕분에 알아서 병력과 장비를 까먹게 된다.

4.1. 공화국의 상황

앞서 언급했듯이 공화국은 사기는 높았으나 단결이 잘 되지 않았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은 타 지역과 달리 거의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남부의 지원없이 반군과 전쟁을 치르다가 박살났다. 심지어 프랑코와 싸우는 도중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혁명노선에 대한 견해 충돌로 같은 편끼리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이 내전에서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는데, 이 사건은 공화군 내 결속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ㅡ영화 <랜드 앤 프리덤> 등을 참고하면 좋다. 또 반란군 소속의 몰라 장군의 '제5열' 드립 이후[28] 전쟁이 진행될수록 공화국 내 분파들 간에 '우리들 가운데 제5열이 있는 것 같아'란 의심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그리고 제5열에 대한 두려움이 공화국 내의 소수파들을 찍어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공화군의 결속력은 더욱 막장의 바닥까지 떨어져간다. 위에서 서술한 바르셀로나 내전 같은 경우에도 양측이 서로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저놈들이 바로 제5열이다!!' 였으니 이래서야...

또한 군부의 지도력이 부재했으며, 결정적으로 반란군보다 전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군대를 지휘한 덕분에 가지고 있던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앞서 언급한 온갖 뻘짓을 하면서 말아먹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내전 발발 당시 정규군 영관급 이상 고위 장교 60%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29]했고, 지금까지 스페인의 국가헌병대 노릇을 하는 순찰 경찰대[30] 70%이상이 반군 측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전쟁 발발 이전 스페인군이 비교적 약군이었다 한들 당장 군사경험자와 무경험자의 차이가 이리 확실하게 나니 공화국 측은 처음부터 심각한 군재 부족에 시달렸고, 의미 있는 시도는 여러 번 했지만 끝까지 본질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프랑코 한 사람 밑에서 굳게 단결한 반란군에게 패배를 거듭하게 된다. 공화국 정부는 당시 국제 관계의 역학 자체가 아무리 공화국이 동정을 많이 사도 소위 말하는 '외교적 승리'라는게 불가능하다는게 뻔히 보이는 와중에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한 삽질성 과시용 공세를 한 번도 아니고,두 번도 아니고, 37년 중반부부터 브루네테, 테루엘, 에브로에서 세번이나 벌인 끝에 독일과 이탈리아제 무기로 중무장을 한 국가군이 쉽게 야전에서 공화군을 격파할 수 있도록 소중한 병력과 물자를 갖다 바쳤다. 공화파가 선전하거나 이겼던 쿠데타 당시 바르셀로나 사수, 마드리드 방어전, 하라마 고속도로 회전, 과달라하라 전투 같은 경우는 거의 대부분 내전 초기 공화국의 실제 군사력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군사적으로 공화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전투 노조 민병대원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도시, 마을에서 벌인 수비전이거나, 국가군의 의표나 혹은 이탈리아군과의 연계 과정에서 생긴 실수를 어찌 잘 노려 거둔[31] 경우였지, 일반적인 대규모 야전에서 공화국군은 끝까지 반란군을 상대로 열세를 극복하지 못 했다.

차라리 스페인 특유의 험한 산지를 이용해서 장기 농성전으로 들어갔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고[32], 실제로 38년 중순 발렌시아의 험난한 산지에 XYZ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설치해 국가군의 공세를 돈좌시킨 적도 있었던 만큼 그 실효성은 더 높았다.[33] 게다가 공화국의 수뇌부가 이렇게 바보같은 공세를 남발하기 시작한 시점 자체가 바르셀로나 5월 사태 이후로 원래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정파간 다양함이 사라지고 대중적 기반은 적었던 주제에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설친 공산당과 이와 손을 잡은 후안 네그린 총리가 스페인을 미니 소련화하며 일당 독재를 밀어붙이려고 난리치던 때였다.[34] 이전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전혀 없이 네그린과 공산당 쪽 지도부만 자기들끼리 짜고 전쟁을 해먹으려고 하니 이런 삽질을 태연히 저지른 것.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 건 공화국이 막상 비민주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니 제대로 망조가 났다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공화파를 지원했던 소련의 태도 또한 문제가 되었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에 따르면 후술할 추축국의 태도와는 달리 소련은 물론 공화군이 이기면 좋겠지만 애초에 개입할 당시만 해도 당장 서방 세계를 자극하기는 싫기도 하고, 그렇다고 스페인 공화정부 편을 안 들어주면 세계적으로 좌파들에 대한 지도력에 문제가 생기니 도와는 주되 최소한만 도와주자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리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지원과 달리 그 지원도 결국에는 스페인 공화정부가 가진 금괴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거기다 환율도 소련에 유리하게 정하여 환차익을 상당히 챙기기도 했다.[35] 거기에 더해 37년부터는 중일전쟁도 터졌기 때문에 주요 관심사가 그쪽으로 가버렸고 그 지원 역시 스페인이 애걸복걸해서 겨우겨우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은 장비와 물자의 부족으로 큰 문제를 겪었다. 무기를 구하기 힘들어 여기저기서 구한 규격이 제각각인 소총과 기관총, 기관단총, 권총들을 쓰다보니 총에 맞는 탄환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안 맞는 탄환을 장전했다가 총이 고장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36]

무기 뿐 아니라 식량을 비롯한 다른 물자에서도 공화군의 보급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반란군 편에 선 이탈리아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공화국 항구를 해상봉쇄했고, 귀중한 소련산 군수 물자들이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오지도 못한 상태로 이탈리아 잠수함과 군함들 사이에 껴서 지중해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일도 잦았다.

사실 해군은 내전 초기부터 거의 전부가 공화정부를 지지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처럼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수병들이 장교를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선에 장교가 하나도 없이 사병만 있다면 전투는 커녕 항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게 당연할 뿐더러, 무엇보다 지휘체계가 전무하므로 이 시점에서 스페인 해군은 그냥 무늬만 해군이 되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적극 지원을 받은 반란군이 공화국 해군을 제압하여 도리어 공화정부를 봉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의 부족으로 완전 봉쇄까지는 하지 못해서 소련이 보낸 무기들을 실은 선박들이 간간이 지중해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해상 수송작전을 지휘한 이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러시아 항공모함에 붙은 그 이름이 맞다.

공군도 거의 공화파 측에 남았다. 하지만 원체 전력이 빈약해서 큰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4.2. 반란군의 상황

공화파의 혼란한 상황만 본다면 상대적으로 일치단결된 반란군을 운좋게 지휘한 행운아 프랑코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장 반란군이라고 내부 단결이 그리 잘 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되려 반란군을 형성하는 왕당파, 카를리스타, 자본가, 팔랑헤는 모두가 이념적으로 상반되는 위치에 있어서 공화파보다 일찍 내분이 터질 뻔했으나 프랑코의 수완에 의해 다 찍어눌린 것이다. 구체적으로 팔랑헤만 해도 무솔리니식 좌파적 노동운동으로 시작해서 자본가 진영이나 좌우익 이딴 거 필요 없이 가톨릭 사회 가치관와 중세적 지방 자치가 이루어졌던 구시대로의 희귀를 원하는 카를리스타와 반목하고 있었고, 스페인 왕정 당시 부르봉 방계를 지지하는 카를리스타와 직계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정통 왕당파 또한 공존이 불가능한 입장. 국가군의 지도부 또한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화국을 원했던 반면, 카를리스타와 알폰소 13세파 왕당파들은 왕정 복귀를 원했는 등, 내부적 반목의 씨앗은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프랑코가 국가군의 내부적 반목 요인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굳힐 수 있었던 건 개인적 정치적 수완도 있었지만 운빨이 굉장히 컸다. 팔랑헤의 경우 개전과 동시에 감옥에 있었던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37]가 공화국군에 의해 사형당했고, 기존의 자본가 정당인 CEDA의 당수이자 자본가 세력 자체를 대표했던 힐 로블레스는 정치 투쟁에 관심이 없어 일찍이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38] 퇴위한 알폰소 13세나 카를로스파 왕위 사칭자였던 하비에르[39]의 경우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군부에 의해 귀국이 차단되었고, 범 보수 왕당파의 정치적 당수이며 우익 내에서 굉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호세 칼보 소텔로 의원은 내전 발발 직전 좌익 테러로 인해 암살당했다. 군부 내에서는 원래 국가군의 지도자였던 호세 상후르호[40]는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프랑코의 경쟁자들인 마누엘 고데드는 바르셀로나 쿠데타가 실패하자 공화파 민병대에게 체포된 후 총살, 에밀리오 몰라 또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몰라의 경우에는 장군인 주제에 엄청난 뻘짓을 벌여 전쟁수행능력이 꽝이라고 낙인찍힌 지 오래였던 데다, 자기 군복을 너무 실어서 비행기 무게 조정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라이프 2차 대전에 실려있다(...).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전쟁 끝날 때까지 동네 왕초 노릇하며 프랑코의 눈에 자주 거슬렸지만, 엘 카우디요[41]의 권좌를 위협할 그릇은 못 되었고 결국 전쟁 후 실권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왠지 굉장히 절묘한 타이밍에 비행기들이 많이 추락한거 같긴 한데,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밀리터리적 관점에선 저런 우익 진영의 수장들이 직접 몸으로 희생하며(...) 대규모 병력의 항공 수송이란 분야에서 초기 발판을 닦은 역사적 경험이다. 당시 항공 수송 기술 자체가 이만큼 초기적이고, 불안정했던 만큼 타이밍과 대상이 굉장히 미묘하긴 해도 새로 발견 되는 증거가 없는 한 딱히 프랑코가 수작질한거라 주장할 근거는 없다.

힐 로블레스, 케이포 데 야노 등의 인물들은 능력이나 카리스마 면에서 애초에 프랑코의 상대가 안 되었고, 각종 왕당파의 수장인 왕족들이야 외국에 망명해 있었지만, 우익 군부의 수장이었던 호세 상후르호, 스페인의 자생적 파시스트 팔랑헤의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범보수파의 정치적 수뇌였던 칼보 소텔로 등은 짬이나 연륜이나 카리스마나 능력이나 프랑코에 의해 하등 밀릴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이렇게 정적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반란군 내부 균열 또한 대패질이 되자 프랑코는 팔랑헤식 파시즘도 아니고, 왕당파나 카를리스타식의 봉건적 신정 정치도 아닌 자신만의 독재를 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데 리베라의 후계자 마누엘 에디야 등이 팔랑헤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당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자 마누엘 에디야도 숙청해버렸다. 뒤집어 보면 팔랑헤나 카를리스타나 프랑코에게 실컷 이용만 당한 채 배신당한 셈.[42] 공화파와 국가군의 내부적 단결에 있어서 핵심적인 차이는, 공화파는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당이 점점 세력을 불려 나갔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에 따라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 등 다른 정파들과 타협을 하든, 뒷통수를 치든 하는 식으로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갈등을 해소해야 했던 반면, 프랑코의 경우 애초에 민주주의의 탈을 쓰지 않았으니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정적들이 모두 죽었으면 그 세력들을 자기가 알아서 흡수하고 일부 팔랑헤 급진파 같이 말 안 듣는 애들은 콱 찍어 누르면 될 일이었다.

더불어 후술하듯 독일과 이탈리아, 포르투갈이 쏟았던 반란군에 대한 지원 역시 소련에 비하면 상당히 컸다. 새로운 사실을 여기에 쓰자면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오직 '프랑코 개인'에게만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프랑코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4.3. 국제적인 연대를 통한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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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잘 묘사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1930년대 파시즘의 세계적 연승에 두려워하던 전 세계의 좌파와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은 1936년 7월 쿠데타를 막음으로써 만주에서 독일, 에티오피아에서 루마니아까지 국제 파시즘 세력의 연승 행렬을 막은듯 보였던 민주 스페인에 열광적인 심적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는 전쟁에서 이기는 데는 전혀 도움 안 되는 정신적, 문화적 연대 정도에 불과했거나 아니면 개인, 잘해봐야 정당 차원에서 직접 가서 싸우다 죽는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대로 입때까지만 하더라도 파시스트들보다 중남미와 말과 문화가 직통으로 연결된 남유럽 지중해의 소련이 탄생하는 걸 더 두려워했던 열강 정부들은 쿠데타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거나, 국내 다른 세력들이 이들을 지지하는 걸 방조함으로써 프랑코와 파시스트들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 공화정부군과 반란군은 어느 한 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공화정부군은 수적 우위와 혁명에 대한 열기라는 점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가는 전투 부대였던 아프리카군이 프랑코 휘하에 있어 군사적으로는 박빙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1936년 가을, 국민군의 진격이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막혀 버리고 원래는 일시적 '쿠데타'였어야 할 충돌이 장기적인 '내전'으로 확대되면서 지금 상황에서 공화군이 역습을 가하면 바로 털려버린다고 후안 야구에는 심각한 걱정을 표했고, 공화국 대통령 아사나는 반대로 "주요 공업 지대, 대도시는 다 우리편에 있는데 저들(쿠데타군)이 어찌 전쟁을 지속한단 말인가?"하며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이웃국가인 포르투갈의 노골적 지원을 받고 있는 데 반해 공화파는 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분명 공화국이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합법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주국가에서는 제대로 된 지원은커녕 방해만 가득 받은 셈이다. 결국, 스페인 내전의 운명은 결국 스페인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외교전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4.3.1. 공화파에 대한 지원

스페인 정부는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중립정책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심지어 돈 주고 사겠다는 무기조차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며 판매를 거부해버렸다.

레옹 블룸 총재 아래 같은 연립 좌파 정권을 이루고 있었던 프랑스는 초기에만 해도 공화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려고 했으나 보수당 내각의 영국의 적극적인 반대와 자국 내의 극심한 좌우 갈등 때문에 '스페인 내전이 프랑스 내전으로 이어진다'라는 불안으로 결국 지원을 끊고 중립 태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레옹 블룸 내각은 적어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반란군을 지원하는 것만이라도 막으려고 영-불-독-이-미국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사태 비간섭 위원회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딴 거 무시하고 계속 지원을 해 줬다. 영국과 미국이 이를 암묵적으로 방관하여 결국 국제적 비간섭 정책은 반란군에게만 유리했다.

영국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집권 보수당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쇼들보다 소련산 공산주의를 더 경계했으므로 공화국을 돕기는커녕 프랑코를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운반한 비행기를 제공해주는 등 되려 은근히 국민군을 도왔다. 지브롤터 주둔군 사령관은 반란군이 이탈리아나 독일과 교신할 수 있도록 통신기까지 빌려주었다.

미국 또한 이때만 해도 고립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여론 자체는 공화 정부에게 호의적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며 결국 1937년에는 교전 중인 어떤 국가에게도 무기를 판매하지 못한다는 중립법을 통과시켰다. 이 와중에도 헨리 포드 등의 기업가들은 프랑코에게 거리낌 없이 헌금을 보냈고 텍스코 같은 석유 재벌들은 돈을 받지 않고 석유를 외상으로 보내줬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건너가 국제 여단에 투신한 사람들도 꽤 있었고, 전후 매카시즘 시절이 되자 반미국적행위 위원회에 한 번씩 붙들려 갔다.

대부분의 지원은 소련이 제공했다. 대량의 소련산 군장비 및 전투요원, 군사 고문단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는 공짜가 아니어서, 이들을 보내주는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은 당시 세계 4위의 금 보유국이었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괴(700톤, 당시 가치로 약 3억 5,000만 달러)[43]를 그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전세가 기울어지고 공화파가 가진 금괴가 떨어지자 스탈린은 지원을 끊었다. 그나마 한 지원이 있다면 스페인 공화파들의 부모 잃은 자식들을 소련에 데려가서 먹여주고 재워준 정도.[44] 게다가 위에 서술한 지원을 대가로 한 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농간질 또한 심각하게 부려서 도와준 만큼 해악도 심각하게 끼쳤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짜 '순수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적 동지들을 돕자는 의도로 원조를 보낸 나라는 최근의 멕시코 혁명을 겪고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필두로 한 전직 혁명가들이 집권했던 멕시코 밖에 없었다. 반란 발발 직후에 멕시코가 보내준 소총 2만 정과 탄약은 정말 모든 게 부족하던 시기에 도착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 그러나 이 또한 중립주의를 강경하게 밀어붙인 미국의 압력과 방해 공작, 그리고 멕시코 자체의 거리와 열강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한 지원 능력 때문에 판을 엎을 만큼의 힘은 못 되었다. 그래도 멕시코는 소련처럼 장사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내란이 끝난 뒤에 피난처도 제공해주었다. 공화파 출신 피난민들을 대거 받아주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정착할 길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주었으며, 망명 세대로 대표되는 스페인 문화와 예술이 나머지 서방으로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결국 1939년, 득의양양해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리기 직전 루즈벨트와 처칠은 스페인 공화국을 돕지 않은 걸 후회한다고 말했으나, 때는 이미...[45]

하지만 나머지 유럽과 미국이 스페인을 그냥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부 차원의 참가는 없었지만 개인 차원의 의용병은 다수였고, 이들은 국제여단을 결성하여 파시스트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국제여단군의 구성은 대부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좌파나 유대인, 미국의 경우 흑인 등이 포함된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었나, 단순히 스릴을 찾는 모험주의적인 동기로 참여한 사람들 또한 있었다. 특히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자국이 이미 파시스트들이나 우익 독재정에 넘어간 사람들은 스페인을 자국에서 싸우던 파시즘과의 전쟁의 연속으로 보았고, 스페인마저 넘어가면 진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굉장히 치열한 투지와 사기를 보여주었다.
  • 공화파 정부에 대한 국가별 지원병 수(약간 오차는 있을 듯)
    • 프랑스 제3공화국: 9,000명
    • 나치 독일+오스트리아 연방국: 5,000명
    • 이탈리아 왕국: 3,350명
    • 미국: 2,800명. 사망자 750여명.
    • 영국: 2,000명
    • 폴란드 제2공화국: 3,113명
    • 캐나다: 1,400명
    • 소련: 3,000명[46]
    • 헝가리 왕국: 1,000명
    • 발칸 반도 지역 국가: 2,095명
    • 노르웨이: 225명
    • 덴마크: 500명
    • 스웨덴: 500명
    • 벨기에: 1,700명
    • 기타: 5,000명
    • 이건 공화국 정부에 의해 정식적으로 집계 된 공화국 정규군 휘하에서 싸운 국제 여단원들만 친 것이고, 공화파 측에서 싸우되 공화국 정부 휘하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지휘 체계를 형성하여 싸운 POUM, CNT 등의 무장 노조 소속으로 싸운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비 소련 계열 사회주의 의용군 또한 대략 5,000명 전후 쯤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독립 노동당 소속 의용군으로 POUM 소속으로 싸웠던 조지 오웰과 아나키스트 CNT 산하 국제 의용병 부대였던 세바스티엥 퓌레 부대에 속했던 시몬 베이유.
안그래도 격렬했던 20세기 초중반의 복판에 자원해서 뛰어 들어간 사람들이니 국제 여단은 종전 이후로도 전 세계 좌익 운동 사이에서 일종의 역사적 성역으로 찬양받았는데, 뒷 배경이 이렇게 파란만장하니 그 운명 또한 기구했고, 이런저런 의미있는 일화 또한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 출신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의 지휘관은 하라마 전투에서 전사한 뉴욕 출신의 흑인이었던 올리버 로였는데, 이 사람은 정식 미군의 역사는 아니지만 독립 국가 형성 이후 미국의 전쟁사상 최초로 유색 인종이 백인 부대를 지휘한 경우로 역사에 남는다.

훗날 공산 불가리아의 독재자가 되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빨치산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2차 대전 이후 동독의 국가 지도자 다수 등 냉전 초기 동구권의 지도자들이 본격 국제 좌파의 간판들로 명성을 쌓은 무대 또한 국제 여단이었다. 특히 독일 출신의 의용군으로 구성 된 에른스트 탈만 대대는 훗날 나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일종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되어 대접받았다. 폴란드에서도 국제 여단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의 폴란드 점령기에 대독 투쟁에 나섰고,[47] 이들은 후에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의해 영웅시되었다.

아일랜드인 참가자가 300명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아무래도 지리적+언어적 편의성 때문에 영어 화자들이 중심인 제 11국제여단 영국인 대대에 편성되었는데, 여기서 십몇 년 전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IRA소속으로 싸웠던 베테랑 혁명가들은 그 당시 반대편 영국군의 대민 공포 전략으로 악명 높았던 Blacks and Tans 특수 부대 출신자들을 만나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저런 천하의 원쑤들과 이제 와서 서로 동지할 수 없다 노발대발했던[48] 부대원들의 반발로 인해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 중 하나이자 아일랜드 사회주의의 시조부쯤 되는 인물인 제임스 코놀리의 이름을 딴 코놀리 전열 (Connolly Column)이란 미국계 링컨 대대 소속 독립 부대로 재편성되었다.

4.3.2. 반란군에 대한 지원

아일랜드의 경우 깨알 같은 에피소드가 꽤 있다. 일단 국민전선에 자원한 600명은 극우파/파시즘적인 아일랜드 의용대였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정치집회당시 푸른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이것은 훗날 "청색 셔츠단"이라는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도 같은 방식의 복장을 입고 참전했다. 그런데 전선이 꼬여서 아군의 오인사격을 한번 받더니 놀라서 그냥 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와 같은 쌍방의 개입으로 인해 이 전쟁은 각국에게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이 되어버렸고, 서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을 연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이다.

4.4. 게르니카 폭격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도시로, 독일군 파견대인 콘도르 군단의 공습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폐허가 되었다. 이 폭격을 게르니카 폭격이라고 하는데, 폭격의 책임자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었다. 이 폭격이 의도적인 학살이었나 아니었나는 논란이 팽팽하다.

4.4.1.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

게르니카 지역은 공화군이 후퇴하는 길목에 있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상당수의 공화군이 방어를 위해 포진하고 있었다. 또한 폭격 목표는 민간인이 아니라 퇴각로에 있는 다리였다. 문제는 아직 기술이 부족했던 독일공군 선도기들이 다리를 못 맞추고 주변에만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점과, 그 때문에 발생한 흙먼지 때문에 후속 폭격기들이 목표를 제대로 못 잡고 '교량이 있을 예상 위치'에 마구 폭격을 해댔다는 점이다. 즉 의도적으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한 게 아니라 오폭이었다는 것이다.

정황을 보더라도 당시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던 만큼, 후퇴로의 다리를 놓아두고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안그래도 탄약 모자른데 실험하겠다고 떨구는건... 다만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물론 민간인 공격 자체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이 사는 도시에 피해가 발생할 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폭격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이러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물론 민간인이 사는 곳 옆까지 전장을 확대시켜 빌미를 제공한 공화군도 정당하다거나 잘한 건 아니다. 참고

4.4.2.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보는 주장

위와 같은 주장은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에서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의 해당사건 서술을 보면
1. 다리가 목표였는데 오폭한 거라고 주장한 이들은 콘도르 군단 전역자들이며 기상상태에 대한 그들의 증언도 틀린데다가,[50] 최초의 폭탄은 도시 중심가에 투하.
2. 다양한 종류의 폭탄이 사용.(소이탄과 대인탄이 돌다리 부수는데 필요한가?)
3. 국민파의 분리주의자들(카탈루냐, 바스크 등)에 대한 당시의 행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시범케이스로 찍었을 가능성 농후.
4. 인구 7천의 소도시에서 나오기엔 많은 사상자 수치라고 했으나, 비버의 저술에 따르면 타지에서 온 피난민이 몰려있었던 상황
으로 언급되어 있다. 물론 해당 서적에서 인용한 리히트호펜의 당시 기록에는 공화군의 후퇴저지, 교란이 주목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여담으로 폭격으로 인한 피해나 영향 자체는 게르니카 폭격보다는 전쟁 후반기에 있었던 이탈리아 공군의 바르셀로나 폭격 쪽이 더 심했다. 하지만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서방세계의 인종차별적 경향 때문에 관심을 못 받은 감이 있다.[51]

4.5. 내전의 종결

공화파가 제대로 된 지원도 못받고, 그나마 받은 지원도 뻘짓으로 날리면서 간혹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것에 반해서 프랑코는 앞서 언급했듯이 느리기는 했지만 목표지점을 결정하고 공세를 시작하면 성공했기 때문에 공화군이 장악한 지역을 하나씩 박살냈으며,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지역에서의 결정적인 공화군의 뻘짓 공세에 힘입어 마드리드가 포함된 스페인 본토 중앙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결국 공화군은 정부가 반란군에 밀려서 프랑스로 도망간 후 사실상 정부가 붕괴되었다. 당장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자들이 동료들을 숙청하는 꼴을 보다 못해 공화정부내 중도파들과 숙청으로 가장 피해를 본 아나키스트 등이 손을 잡고 프랑스에 있던 공화정부에 맞서 국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새 쿠데타 세력은 프랑코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의 승리 직전에 있던 프랑코가 협상따위를 제대로 응할 리 없었고, 결국 두 세력 다 똑같이 갈려나갔다. 따라서 더 이상 저항을 할 수 없었던 공화파는 1939년 4월 1일 프랑코에게 최종적으로 항복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는 완전히 패망했다.

5. 결과

전쟁 자체가 스페인의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우익 보수 세력의 반동으로 시작한 만큼, 쿠데타 직후 부터 국가군은 끔찍하게 많은 피를 뿌렸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좌익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강 소개하자면 내전에서의 전사자가 11만(반란군은 9만), 부상자 100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1만,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 2만 5천, 후방지역의 암살이나 처형 13만 이상.

내전 이후의 처형은 확실한 수가 남아 있지 않으나, 확실한건 1975년에 프랑코가 죽는 날까지 정치적인 이유의 사형 선고는 지속 되었다는 것이다. 내전 내내 국가군은 자신들이 한 지역을 장악 하면 그 지방의 자유주의자, 노조 가맹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식인들, 공화파 진영에 친지를 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싸그리 처형부터 하고 보았으며, 이러한 행위는 교회와 우익 매체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병적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는 축복을 받아 자행 되었다. 당장 무솔리니의 처남이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치아노 백작은 내전 종결 직후인 1939년에 스페인을 방문해 "세비야에서 80명 가량, 바르셀로나에서 150명 가량, 마드리드에서 200명 이상이 매일 총살 당하고 있다"고 충격을 표했으며, 1940년에 스페인을 방문한 나치 독일의 한 고위 관료 또한 그 잔인함에 충격을 금치 못 했는데, 그 고위 관료가 다름아닌 하인리히 힘러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마자 2차 대전이 터져 살아 남은 자들의 운명 또한 파란만장했다. 내전 이후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망명자의 수는 약 50만으로 절반만이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가 함락되자 프랑코와 히틀러 사이 협정에 따라 스페인으로 반송 되어 총살 당하거나, 아니면 나치의 강제수용소의 이슬로 사라졌다.[52] 나치의 프랑스 점령에도 살아 남은 망명자들은 그후 10여 년 이상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인다. 이 중에서 1만 3천명 가량이 2차 대전에 휩싸인 프랑스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으며, 샤를 드 골의 자유 프랑스 군단에도 3천명 가량 입대하였다. 이 중에서도 자유 프랑스군 제2 기갑여단 산하의 9 중대는 대부분 망명한 스페인 공화파 출신 병사들로 구성 되었는데,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파리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당시 해방군을 맞이하러 환호하러 나온 파리 시민들은 해방군이 "에보로", "테루엘", "게르니카", "바르셀로나 1936년 7월" 등의 이름이 도장 된 전차들 위에 공화파식 주먹 쥔 경례를 하며 인터네셔널가를 부르며 파리에 들어오는 관경을 보게 되었다.[53]

멕시코나 다른 중남미 국가로 망명한 공화파 인사들은 망명정부를 세워서 1975년 스페인 민주 정권이 성립 될때까지 저항했으며, 또 중남미 각지의 현지 좌파들에게 정치적, 전술적 교육을 해주어 훗날 냉전 시기 중남미 좌파 운동의 부상에 숨겨진 공로자가 되었다.[54]

거기에다가 공화파 고위 인사 1,000명 가량은 전쟁 말기 소련으로 탈출하여 그 중에서 수백명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서 독소전쟁에서까지 싸운 경력도 있다. 내전 당시 공화파의 가장 유명하고 명망 높았던 장군 중 하나인 엔리케 리스테르가 그러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가하고 티토의 빨치산들과도 협력하여 결국 스페인, 소련, 유고슬라비아라는 3개국의 군대에서 장군 계급을 딴 진귀한 기록을 새우게 되는 등, 공화파 잔당의 운명은 시대의 격조와 함께 이리 저리 파란만장했다.

또한 프랑코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군부와 정치권을 점점 장악하여 결국 독재자가 되어 1975년에 늙어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지배했다.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 또한 냉전 당시 현지 좌파와 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중남미 현지의 우익 군사 독재자들에게 군사 밑 안보 고문을 파견하여 협력 했으니 어찌 보면 스페인 내전은 본토에서 끝나니 냉전 동안 옛날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반란군 주력부대 중 하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는데, 이들 식민지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살인, 강간, 약탈 등은 공화파와 관련된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테러였다. 내전 내내 국가군과 프랑코가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 하는 명분이 중세기의 레콘키스타를 본 딴 '국제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 세력으로 부터 스페인을 정화 하는 것'이었던는데 막상 북아프리카 아랍인 병사들을 대리고 와 스페인 민간인들을 쳐 죽인건 본인들이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일례로 반란군에서는 붙잡은 여자들을 무어인 병사들에게 노리개로 던져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행위를 외국 기자들에게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공화파 측의 잔혹 행위는 주로 가톨릭 교회를 상대로 자행 되었다. 근본적으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 교회는 우익 지주들과 뿌리 깊게 결합한 반동적 세력으로 인식 되어 좌익의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었고, 내전 이전 부터 과격 혁명 세력에 의한 교회 방화 사건 등은 심심찮게 터지곤 하였다. 쿠데타가 터지자 자연히 가톨릭 교회는 국가군 편으로 서서 국가군 점령지에서 자행 되는 동지들의 학살을 한치의 꺼리낌 없이 축성했고, 특히 카를리스타 세력의 민병대였던 '레케테'[55]는 "한 손에는 수류탄, 한 손에는 묵주"라 불릴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에 분개한 CNT, UGT, POUM 등의 혁명 세력은 눈에 보이는 교회란 교회는 속을 발랑 까 뒤집어 태워 먹고, 신부들을 학살하며, 감옥으로 쳐들어가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회답했다. 스페인 내전 종결 까지 7,000명 가량의 가톨릭 사제들이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반란 초기에 집중된 이 성직자 학살은 안 그래도 좌익 공화국을 탐탁치 않게 보았던 영국과 미국의 여론이 확실하게 스페인 공화국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효과를 불러 왔다. 정부가 무분별한 학살을 중단시켰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고착된 인상을 뒤집을 수가 없었다.
이는 막상 자신들도 바스크족 사제들을 실컷 죽이고 있었던 국가군이[56] 열심히 씹어 먹을 선전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래로 스페인 내전에서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순교자로 인정받아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 중인데, 요한 바오로 2세 때 459위, 베네딕토 16세 때 527위, 프란치스코 때는 2019년 1월 기준 889위가 복자품에 오를 정도로 복자가 된 순교자의 숫자가 다른 나라보다 많다.

무엇보다도 공화파의 유명한 큰 실수는 톨레도 공방전에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었다. 내전이 터지자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도시인 톨레도는 주변은 모두 공화파에 붙은 반면 현지 사령관이었던 모스카르도 대령이 우익이어서 혼자서 국가군 편에 붙었다. 이를 진압하려고 마드리드에서 공화군과 아나키스트 무장 노조원들이 톨레도로 쳐들어 와 산 꼭대기에 있는 요새만 빼고 다 점령했다.[57]. 톨레도 알카사르에 고립되어 치안대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농성하던 수비대장 모스카르도 대령에게 공화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처형하겠다." 라고 협박했는데, 모스카르도 대령은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나이라면 "그리스도 만세!"라고 외치고 당당하게 죽거라." 라고 작별인사를 했던 것이다. 사실 아들은 한 달 후 국민군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지만, 이 사건은 톨레도 구원 후 숭고한 미담으로서 국민군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톨레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옛 카스티야 왕국이 무슬림들을 몰아 내고 점령한 후 마드리드가 수도가 될 때 까지 수도로 삼았던 도시인지라 안그래도 우익 쪽이 침흘릴 상징성이 넘치는 도시였다. 이 이벤트는 결국 40년이 지나 프랑코 사후에도 어떠한 민주화나 체제 변화도 거부 하는, 언론에서는 '벙커'파 라고 불린 정권 내 극우꼴통들이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알카사르'라는 잡지 중심으로 결집할 만큼 당시 우파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했다.[58]

안 그래도 스페인 내전 초기 36년에는 주로 공화파의 만행들[59]을 고발하는 기사가 특히 많았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어서 공화진영을 일시적이나마 악당으로 만든 셈이다.[60]

스페인 내전 당시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의 확실한 차이점은 (일단 숫자는 둘째 치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국가군 점령지에서는 케이포 데 야노, 에밀리오 몰라와 같은 수뇌부들이 나서서 매일 라디오에서 "오늘은 빨갱이 1,000명을 죽였다. 내일은 빨갱이년 1,000명을 겁탈할테다! Detroit Madrid City"는 식으로 학살과 강간을 조장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 지거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학살과 '청소'를 지속하여 폭력을 하나의 체제로 만들었다. 국가군에서도 팔랑헤 좌파[61]는 노동자, 농민들이 좌파들에게 표 좀 던졌다고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 외에도, 후안 야구에[62] 장군 같은 거물급 인사 역시 공화파 지역 내의 민간인 폭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한 바 있었다. 다만, 팔랑헤 좌파는 이것 때문에 사망 플래그를 찍었고, 후안 야구에는 몇 주 뒤 복귀했지만 한 동안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옥에 갇혀야 했다.

반면 공화파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은 대부분이 혁명적 광분[63]과 피난민등을 통해 들은 국가군의 만행에 대한 보복적 성격으로,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통제가 닫지 않은 혁명적 민병대 집단에 의해 산발적으로 자행되었다. 전쟁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제적 동정적 여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공화파 수뇌부들은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 라르고 까바예로 총리, 돌레스 이바루리, 인달레시오 프레이토, 후안 가르시아 올리버 등의 지도부 인사들이 나서서 잘 통제되지 않는 지지자들에게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을 자제 할 것으로 촉구하였고, 실제로 해당 지역이 확실하게 공화국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면 혁명적 민병대들이 해체 되면서 막무가내 식의 인민 재판은 사그라들었다. 실제로 내전 중 총리가 되며 내전 초기 정권의 2인자였던 후안 네그린만 하더라도 밤만 되면 경호원 없이 사복 차림으로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시내를 돌아다니며 우익 인사들을 끌고 가던 민병대들을 직접 만류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위에서 나온 제5열 드립으로 인한 공포+대숙청 기의 소련으로부터 직수입한 비밀경찰+고문+공산당의 정권 탈취 기도로 인한 각종 팀킬행위[64]로 인한 만행들은 여전했다.

그래도 괜히 처칠 같은 우익 인사들 마저도 나중에나마 뒷북 치며 "공화국을 도와야 했었다." 라고 후회하며, 파시즘의 태생지였던 이탈리아는 2차대전 직후 국제 사회에서 복권되었지만 2차대전 당시 참전 하지도 않았던 스페인은 1950년대 후반까지 국제 사회의 왕따로 남았던 게 괜한 게 아니다. 2차대전 이후 30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화적 무드를 조성하려고 했던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프랑코의 스페인은 당장 역사적 기억 속에서 보여 준 야만적인 잔인함의 스케일이 쉽게 용서해 주고 새로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 주기에는 너무 컸으며, 또 그게 현재 진행형이었다.[65]

그리스 독립전쟁처럼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노먼 베순 등) 게르니카, 카탈로니아 찬가 등 스페인 내전을 다룬 여러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문화인"들의 참전이 전부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낭만적인 환상과 작품의 소재를 찾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왔을 뿐 실제 전투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작가 앙드레 말로는 한 무리의 폭격기를 동반하고 스페인에 갔는데, 공화파 지휘관에 의하면 말로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작가, 화가, 사진사, 여자, 어린이 등으로 다양했는데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앙드레 말로는 이런 작자들을 데려와서 각종 비용을 청구하고 사기나 쳐서 한 재산을 모았다고 하니... 이런 전쟁터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의 사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도 등장한다.

그래도 군사적 인프라가 막장이었으며 그나마 아프리카 식민지 군단 같이 믿음직한 제대로 된 전투 부대 자체가 없었던 공화국 입장에서 국제 여단의 개입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았다. 실제로 마드리드 또한 1936년 후반기에 들어 마드리드 꼼플루텐세 국립 대학교[66] 캠퍼스에서 건물 하나, 방 하나 두고 치열하게 싸울 만큼 함락 위기에 몰려 있었는데 이 때 국가군의 총공세를 막아 내고 결국 마드리드 포위를 풀어 낸게 방금 도착한 따끈 따끈한 국제여단 병사들이었다. 국제 여단원들 중에서는 1차 대전이나 전간기의 자잘한 분쟁에 참가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은 사람들도 많았고, 전시 경험이 없더라도 사기와 투지 하나는 엄청나게 치열했기 때문에 마드리드 공방전 당시만 하더라도 제 11 국제 여단은 무려 하루만에 30%의 전력을 상실하면서도 결국 국립 대학교를 비롯한 마드리드 시내를 사수할 수 있었다. 나중에 1938년 하순쯤 되자 누가 봐도 공화국의 패전이 확실시 되어 국제 여단원들은 이탈리아, 독일 같이 돌아갈 고향이 아예 사라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본국으로 돌려 보내졌다. 이 중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출신 여단원들은 자국내 여론이 공화국에 대해 동정적이라 국제 파시즘에 대항한 최초의 투사들로 환영 받았던 반면[67], 미국이나 스위스, 아일랜드 대원들은 자국의 중립 노선을 위반했다고 당국에게 붙들려 가는 등의 수모를 당했다. 아예 돌아가자마자 감방에 끌려가거나 총살 당하지 않을 조국 자체가 없었던 이탈리아나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병사들 같은 경우 전사하거나 프랑코 정권에게 잡혀 '조국'의 처절한 방기 속에 옥사하지 않고 프랑스로 탈출했던 경우 스페인 현지인 출신 망명객들과 똑같이 난민 수용 캠프에 억류 당했거나, 대전 발발 이후 프랑스 외인부대 같은 곳에서 투쟁을 지속하다 노르웨이 전역 같은 사지에서 총알받이로 굴려지며 대부분 생을 마감했다.

한편, 독일은 이 전쟁에서 Ju87, Hs 123 급강하 폭격기, Bf 109, 1호 전차Pak 36, 88mm 대공포신병기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각 병기의 장단점을 파악하고(1호 전차의 부실함 등) 여기서 얻은 실전경험을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데 참고하여 이후 2차 대전에서 보여준 기동전의 기초를 닦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자국의 병기가 그럭저럭 활약하자 자만하여 이 전쟁의 교훈을 군대 개량에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 그래도 전차전은 그럭저럭 교훈을 얻었는데, 이 시절 전차들은 전차 자체의 성능도 그저 그렇고, 통신 기술이나 운용 교리도 미숙해 집단 운용은 개판이고 소규모로 보병대에게 붙어 지원해주는게 훨씬 효율적이였다. 전차 자체도 무장이 대전차전이 아닌 대보병전이나 지원에 좋았고. 이때 소련군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교리에 따라 전차들을 집중편제하고 있었는데, 이걸 보고 '이게 아니구나.' 싶어 전차사단을 해체하고 보병사단에 부속부대로 붙여준다. 그러다 독일군이 전차를 대규모로 집중 운용하며 연합군을 발라버리자[68] '아, 그때 그렇게 한게 맞구나.' 하며 다시 전차들을 집중시켰지만 제대로 되기도 전에 독일의 침공이 개시된다. 물론 초반부 발린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벌어진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으로 여기 참가했던 인력을 모조리 날려먹어 그 경험을 잘 활용하지도 못했다. 이 전쟁의 결과에 자만했던 점은 이탈리아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때 독일이 좀 이상한 짓을 하긴 했는데, 헤르만 괴링은 남몰래 무기를 공화군에게 팔아먹은 것.[69] 사족으로 이때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1차 대전 독일 에이스 중 하나로 당시 무기상인이었던 요셉 벨첸스(Josef Veltjens) . 게다가 이탈리아는 거의 무상으로 지원을 해 주었으나 독일은 스페인 광산의 채굴권을 착실하게 뜯어간 것도 나중에 스페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게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물론 공식적인 중립과는 별개로 18,000명 규모의 지상군과 수백명(실전 참가는 수십명)의 조종사를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동부전선에 파견하고 여러 항구들을 유보트 보급기지로 제공했다. 그나마 이들 의용군 병력은 독일의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한 1944년 초에 스페인 본국으로 귀환했다. 아이러니한게, 이 때 동부전선에 파견된 의용군의 상당수는 구 공화파 인사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이었다. 연좌제를 피하고, 수감된 공화파 인사들의 처우와 형기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참전한 것. 물론 이런 점을 악용해서 프랑코 정권이 반강제적으로 자원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프랑코의 2차대전기의 중립에 대해서는 프랑코의 현명한 줄타기라는 의견이 주류였으나, 비버는 이에 대해 프랑코의 무리한 요구(무기, 물자 이외에 북-서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거의 전부를 달라고 했다)에 히틀러가 질려서 성사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이 교섭이 프랑코의 중립을 위한 의도적인 어깃장이 아니라는 근거로 비버는 프랑코측의 당시 행적에 대해 기술했다.

후일담으로 내전 당시에 소련과 달리 깽판치지 않으면서 그나마 스페인을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했던 멕시코는 스페인 공화국이 망한 이후 수많은 공화파 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반-프랑코주의자/공화주의자였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뉘엘도 스페인 내전 이후 멕시코로 넘어가 커리어를 이어간 케이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과 같이 공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컸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자신의 초기 필모그래피에 스페인 내전 관련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70]

6. 관련 문서

7. 대중문화

7.1. 문학

7.2. 회화

7.3. 영화

7.3.1. 음악

  • Ay Carmela - 당시 인민전선 병사들이 불렀던 일종의 노래 형식이다. '룸바 라 룸바 라 룸바 라'와 '아이 카르멜라(때로 마누엘라라고 바뀌기도 한다)'의 후렴구를 특징으로 하며,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대표적으로 'Viva la Quince Brigada', 'El Paso del Ebro'가 있고 수많은 변종이 있다. 이 중 피트 시거, 크리스티 무어 등의 포크 가수들이 리메이크했고, 문명 5 스페인 테마로 쓰이기도 한 'Viva la Quince Brigada'[80]가 유명하다.
  • 더 클래시 - Spanish Bombs[81]

7.4. 스페인 내전 관련 서적

7.5. 관련 게임


[1] 따지고 보면 일개 노동조합 주제에 왜 독자 세력으로 이름 올리고 있냐 싶겠지만, 전쟁 당시 아나키스트 CNT는 이념에 충실히 따라 처음부터 공화국 정부에 협력만 하지 지휘 같은 건 하나도 안 받는 독자적인 군대인 연맹 민병대 (Milicia confederal)을 가지고, 혁명의 과격성을 멈추려는 공화국 정부에 반발하고 마침 PCE에 숙청당할 위기에 몰린 POUM 등이 가세해 독자적인 지휘 체계인 카탈루냐 반파시스트 민병대 중앙 위원회(Comité Central de Milicias Antifascistas de Cataluña)라 불린 독자적인 지휘체계까지 가지고 전쟁을 수행했다. 이걸 강제로 중앙 정부군에 편입하려다가 터진 사태가 바르셀로나 5월 사태인데, 결론적으로 5월 사태에서 정치적으로 중앙 정부에게 패했어도 CNT 전국위원회는 군제 재편입에 버틸 수 있는 곳에서 최대한 버티며 결국 내전 끝까지 카스티야-라만차, 카탈루냐 북부에 있었던 CNT의 혁명 공동체와 독자적인 민병대는 무장해제 되지 않았다[2] 미국,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폴란드 제2공화국,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자유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 50여 개 국가에서 의용병들이 왔다.[3] 군사 고문단 및 정보요원, 전차 전투기등의 무기 지원[4] 라사로 카르데네스 대통령과 당시의 제도혁명당이 좌파 성향이여서 식량 및 무기 지원을 했다.[5] 일시적인 군사통행권과 공군 비행기 및 조종사 제공[6] 육해공군 지원군 파병[7] 콘도르 군단을 비롯한 공군 지원 및 군사고문단[8] 의용군 파병 및 물자 지원[9] 공화파 지배지역 내부에서 학살된 국민전선 지지자들[10] 국민파 지배지역 및 점령지에서 학살된 공화파 지지자들[11] Spanish Loyalist at the Instant of Death. 사진의 주인공은 공화파 알코이 민병대원 페데레코 보렐 가르시아(Federico Borrell García, 1912.1.3.~1936.9.5, 24)이며, 겨우 23살 난 사진 기자 카파는 이 사진 하나로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되었으나 사진 조작 유무를 둘러싸고 죽을 때까지 의심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사진 어디에도 총을 맞은 흔적이 없다는 점이 그 원인이었다. 오죽 열받았으면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사진(이것은 확실하게 인정받았다)을 찍으면서 그 오욕을 갚았다.[12] 이나마도 비경작지를 분배한 것이다.[13] 인민전선의 주도 분파이지 상대적으로 좌파를 담당하였으며 카바예로 그 자신의 과격한 성향과 혁명 운운한 발언 및 UGT(노동자 총연맹)의 잦은 파업과 폭동으로 인해서 우파에게 가장 위협스러운 정당이었다. 내전 당시 총리나 장관을 맡은 대표적인 인물인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와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후안 네그린, 훌리안 베스테이로 등이 소속된 정당이다. 프리에토와 베스테이로는 비교적 온건하고 공산당과의 협력을 반대했고(다만 CNT를 너무 싫어한 나머지 네그린 정부 초반에는 공산당과 손을 잡는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과격하고 공산당과의 협력을 중시했으나 점차 소련의 괴뢰나 다름없고 동지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던 공산당의 활동에 회의를 느꼈지만 그가 공산당의 압력으로 물러난 후 집권한 네그린은 온건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의 협력을 주도해서 공화정부를 소련에 팔아넘겼다는 비판을 받는다. 주로 노동계층이 지지기반이었다.[14] 인민전선의 2인자 역으로 내전 당시의 대통령이 아사냐가 이끄는 비교적 중도적인 정당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스페인의 혼란상을 이끌 지도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아나키스트 CNT나 공산당 등 과격주의자들의 부상을 막지 못했다. 카탈루냐 공화좌파라는 동맹정당이 있었으며 주로 지식인 계층과 공화주의자들이 지지기반이었다.[15] 인민전선에서 상대적으로 우파를 담당하였으며 원래 진보정당이었던 레룩스의 급진공화당이 반동적 성향의 CEDA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며 뛰쳐나온 정당이었다. 주로 진보적인 사업가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지지기반이었다.[16] 원래는 세가 약했으나 내전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서 세력을 대규모로 팽창하였으며 겉으로는 공화국 내각의 중요직책을 차지하지 않았으나, 스페인 주재 NKVD와 소련군의 위협으로 실질적으로 공화정부를 조종하였다. 후에 CNT, POUM 등의 공화국 내의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네그린과 협력하며 공화정부를 내분과 타락으로 몰고가서 멸망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카탈루냐 공산당이라는 동맹정당이 있었다. 사실 이들도 그렇게까지 타락한 집단은 아니었고 디아스와 이바루리는 개인적으로 숙청 대상 인사들을 구조한 적이 있었으나 소련 고문단의 악행이 매우 심했다. 오죽하면 내전 막판에 고문단이 모스크바로 철수하자 스페인 공산당원들마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그러나 고문과 살해등의 범죄 증거를 숨기기 위해서 스탈린은 대숙청 기간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고문단과 NKVD요원 대부분을 숙청한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에서 행패부리자 소련 돌아오자마자 똑같은 방법으로 모가지(문자 그대로) 날아간 구 볼셰비키 원로중 하나가 러시아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던 블라미디르 안토노프-오브셴코[17] 초반에는 트로츠키주의 성향이 있었으나 후에 트로츠키와 결별했으며 CNT처럼 공산당에게 매우 큰 팀킬을 당해서 사실상 당이 붕괴하였다. 당수인 닌도 마드리드 NKVD 본부로 끌려가서 고문 끝에 살해당한다.[18] 반동적 보수정당들의 연합체이며 가톨릭을 주된 정체성으로 삼은 교권주의적 정당이었다. 1933년 선거에서 좌파 정권의 혼란과 분열을 틈타서 의회에서 다수석을 차지했지만 대통령인 알칼라 사모라가 힐 로블레스를 싫어했기에 레룩스의 급진공화당에게 총리직과 주요 장관직을 주어서 권력이 없는 상태였지만 급진공화당의 여러 추문과 정권의 불안정성으로 1934년쯤부터는 정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1931년~1933년의 공화주의적 개혁을 폐지한다. 그러나 끝내는 알칼라 사모라와 레룩스가 힐 로블레스의 반동적 정책들을 거부해서 결국 1936년에 선거를 치루게 되었으며 알폰소 왕당파의 스페인 혁신(RE)과 카를리스타의 전통적 교우회(CT), 카탈루냐 부르주의의 카탈루냐 연맹(LC)과 국민전선을 구성해서 지주, 자본가 및 가톨릭 교회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인민전선에게 패배했다. 초기에는 교권 보수주의적 성향이었지만 점차 반공화주의적 유사 파시즘적 정당이 되었으며 결국 선거 패배이후에는 힐 로블레스가 지도력을 잃으면서 당이 와해되어서 내전 중이었던 1937년 프랑코의 명령에 의해 팔랑헤당과 통합되었다.[19] 한때는 혁명적이고 반교권적이었으나 우파로 전향한 레룩스가 이끈 정당으로 1933년 권력을 잡은 후 점차 기득권에 매몰되어서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되었다. 1936년 대규모 부정부패 스캔들로 결국 스페인 정치 불안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당내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공화연맹을 따로 창설해서 인민전선을 구성했으며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CEDA와 협력했다. 주로 자본가들이 지지했다.[20] 보수적 공화주의 정당으로 원래 이름은 자유공화우파였다. 중도우파적 성향이었지만 당의 애매한 정체성과 노선으로 당내 보수파가 분당해서 보수공화당을 만드는 등 쇠퇴하다가 결국 1936년 선거를 계기로 무너졌다. 대통령 알칼라 사모라도 아사냐로 대체되었다.[21] 1932년 자유공화우파 내의 분란으로 생긴 정당이다. 역시나 별 존재감 없이 있다가 1936년 선거에서 무너진다.[22]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은 정통 파시즘 정당이어서 CEDA와의 협력을 거부한 끝에 1936년 선거에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았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내전 발발 이후 비록 당수인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화정부에 사형당했지만 CEDA의 몰락에 힘입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나 프랑코의 계략에 의해서 정통 파시스트들이 숙청당한 끝에 CEDA, 왕당파, 카를리스타, 군부와 강제 통합되어서 국민생디칼리즘 공세평의회 스페인 전통주의자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Sindicalista: FET y de las JONS이 되었다. 약칭으로 통합팔랑헤당이라고도 하며 그 이후에는 정통 파시즘적 성향이 많이 약해졌다.[23] 비슷한 성향의 포르투갈 UN(Estado novo)의 살라자르와는 달리 힐 로블레스는 선거 패배 이후에는 같은 우파진영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이에 따라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칼보 소텔로에게 지지층을 빼았겼다(소텔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심지어는 소텔로 암살 의혹까지 받았다) 내전 이후에는 조용히 포르투갈로 망명했고 웃기게도 적이었던 망명 공화정부 인사들과 교류하기도 했다.[24] 2월의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파시스트들이 쿠데타를 감행했다.[25] NO PASARÁN, 이 말은 안티파 사이에서 유명한 구호가 된다. 이에 맞서서 반란군 측은 "우리는 통과했다(HEMOS PASADO)!"라는 구호를 내놓아 대항했다.[26] 이랬으니 물론 내전 도중, 그리고 이후 우파 세력의 가장 집중적인 학살이 벌어진 지방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지주 귀족 가문들이 기업화된 다국적 농업 회사로 바뀌었을 뿐 안달루시아 지방의 토지 분배 문제나 경제적 낙후성 등은 현대까지 와서도 해결 안 된 채 결국 심각한 인구 유출을 겪고 있어 안달루시아에서 현대까지 끼치는 스페인 내전의 그림자는 한층 더 짙지만 그래도 프랑코 사후로는 주도 세비야와 말라가, 그라나다 등이 관광거점으로 떠오르면서 어느 정도 살아난 편이다. AVE 역시 최초 개통이 세비야였을 정도로 나름대로 중앙정부에서 신경써주기도 했다.[27] 사실 원래 대항해시절만 하더라도 세비야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강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19세기 정도에 세비야의 항구기능은 거의 사라졌고 카디스와 말라가가 대신에 뜨기 시작했다. 다만 말라가는 세비야 기준으로 카디스보다 훨씬 더 멀리(도로교통으로 세비야ㅡ말라가는 1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있으며 말라가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려면 결국 카디스 그리고 지브롤터 앞으로 지나가야 한다.[28] 몰라가 마드리드 공세를 앞두고 기자들에게 "우리에게는 공세에 참가할 4개 부대 외에도 전투가 시작되면 마드리드 안에서 봉기할 '제 5열'이 있다!!" 라고 허세를 부린 데서 유래된 말. 몰라의 마드리드 공세 자체는 탈탈 털렸고 제5열 그런 것도 전혀 없었지만, 이후 '제 5열'은 공화군 내에서 일종의 도시전설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다른 나라에서도 오열(五列)은 첩자, 간첩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미션 임파서블의 원작이었던 TV 드라마 시리즈의 국내 방영 당시 제목이 "제5전선"이었다.[29] 프랑코는 반란 참가를 거부한 장교들을 잡히는 대로 사살했다. 심지어 프랑코의 사촌도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절했다가 총살당했다고 한다.[30] Guardia Civil 고속도로를 비롯한 광역시외의 경찰력을 담당하는 군경 조직이다. 비슷한 시기 도심의 소요사태는 돌격 경찰대 (Guardia de asalto)가 담당했는데 순찰 경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들은 아무래도 시내에 거주하니 가족 친지 관계 등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와 더 가까울 수 밖에 없었고, 공화국 정부가 직접 창설한 조직이니 대부분이 공화파에 잔류하여 초기 공화파의 몇 안되는 소중한 군사 경험자 집단이었고, 또 이로 인한 괘씸죄로 패전 이후 프랑코 정부에게 해산당한 다음 무장 경찰대 (Policia Armada)라고 하는 조직으로 대체 되었다. 그리고 이 무장경찰대는 프랑코 사후 민주화 과정에서 그 노골적인 억압성, 정치성 때문에 해산 당하며 현대 스페인의 보통 경찰화가 이루어졌다. 덤으로, 이 돌격 경찰대는 호세 칼보 소텔로를 암살함으로써 내전을 결정적으로 일으킨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 집단이기도 하다.[31] 마드리드 외곽의 카스티야 라만차 일대의 고속도로를 둘러싼 전투 중 공화국이 크게 승리한 과달라하라 전투가 대표적이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역포위당할 때까지 열심히 두들겨 맞으면서 미끼 역할을 하며 분투했던 공화파 부대는 바로 같은 이탈리아인들이 주축이 된 공화 인민군 제12 국제 여단 가리발디 대대였다. 참고로 이탈리아는 무식하게 대대적인 전투 병력을 파견해서 남의 내전에서 투자는 더럽게 퍼부었는데 막상 건진건 하나도 없었던 결과, 2차대전 본무대가 시작되자 스페인에서 낭비한 예산, 병력, 물자를 만회하지 못하고 그 전설적인 졸전을 펼치게 된다. 이에 반해 프랑코의 다른 열강 후원자인 나치 독일의 경우 콘도르 군단이라는 명칭으로 항공, 기갑 분야에서 소수의 특수 인력, 특수 부대 중심으로 보냈기에 그다지 많은 비용을 쓰지 않았으나, 히틀러가 군대를 보내고 싶었더라도 당시 독일에 파병할만한 병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32] 크게 보면 북쪽의 피레네 산맥과 칸타브리아 산맥, 남쪽의 과다라마, 시에라모레나 산맥 지대로 중부의 고도는 높고 평평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 메세타에 자리 잡은 카스티야, 그리고 험한 산지로 바스크,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같은 대도시들이 있는 지방들이 분리되있다. 당연히 이런 지리적 조건도 전쟁 과정에 반영되서 카스티야 일대에선 수도 마드리드행 고속도로, 주요 거점을 두고 회전이 많이 벌여졌고, CNT 중심의 북부 전선은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을 방불케하는 산악, 고지대 점령전이 주된 형태였다[33] 물론 이러한 공화국의 일련의 공세들이 삽질이 아니라 국가군의 병력과 전력을 분산시켜 마드리드에 대한 압박을 줄인다는 전략적 당위성이 있었던 작전들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허나 전략적으로는 그런 계산이 말이 된다 쳐도, 전술적인 측면에서 경험없고 미숙했던 공화국 지휘관들의 삽질로 거하게 말아먹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34] 모스크바에 기반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공산당은 스페인에서 겨우 1921년에야 창설됐고, 그 세력도 다른 비소련계 좌파에 비해 세력이 현저히 적었다. 이 당시 대중적 기반과 동원력을 기준으로 두면 좌파 중에서 가장 지분이 컸던 건 정규 노조원 50만, 방계조직 2백만의 세력을 자랑했던 아나키스트 CNT였고, 그 뒤로 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그 휘하 UGT가 있었다. 공산당은 저어어 멀리 동떨어진 3위 수준의 세력밖에 없었고, 그나마 이것도 본인들 입장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쑤인 트로츠키주의 계열 POUM을 위시로 한 비소련계 공산주의 정당들과 위태위태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구도를 한번에 뒤집은게 바로 나머지 '자유' 진영의 방기와 소련의 지원이다.[35] 이 과정에서 소련의 눈에 띈 사람이 당시 공화정부의 재무장관이었다 나중에 총리가 되는 후안 네그린이다.[36]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도 주인공이 파시스트군 기병을 사살한 뒤 그 기병이 가지고 있던 신품 독일제 기관단총에 자기가 가진 탄환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생략된 장면.[37] 변호사 출신의 팔랑헤 창시자로 알폰소 13세 때 군사 독재를 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장남이다. 쿠데타 소식이 터지자마자 공화국 정부에게 체포당해 알리칸테의 감옥에 수감되었고, 프랑코가 포로 교환이나 석방을 위한 자금 마련, 심지어 팔랑헤의 국제적 석방 여론 조성마저 차단하여 결국 1936년 11월 처형당했다. 프랑코가 이 양반을 싫어했던 인물은 전통적 우파 권위주의 성향 프랑코에게 순수 파시즘 성향의 데 리베라는 과격한 혁명 사상으로 인해 영 거슬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38] 이 양반은 자신이 집권했던 1933~36년 사이 선거로 당선 된 우파 정권 때는 때 맞추어 부흥한 국제 파시즘의 기세를 타 본인도 우익 독재 비스무리하게 밀어붙이려고 했으나, 애초에 뒷심이나 전투적인 결단력 같은 건 부족했던 사람이라 자기 지지층이 처음에는 팔랑헤, 그 다음에는 프랑코에게 홀랑 넘어간 이후 망명지에서 세월을 보내며 되려 같이 망명 중인 공화파 인사들과 함께 반 프랑코 모의를 꾸미는 등 별 짓을 다 했다. 그러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정계 복귀를 노렸지만 끝내 실패하고 늙어 죽었다.[39] 그런데 이쪽은 부르봉-파르마계, 다시 말하면 원래는 이탈리아 출신이라서 망명이라고 하기도 거시기하다.[40] 이 사람은 대단한 친독일 인사였다. 어쩌면 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스페인이 독일과 연합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망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일찍 찾아온 전쟁" 편은 이 사람이 죽지 않고 뮌헨 협정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해서 2차 대전이 일찍 벌어진 시대를 그리고 있다.[41] 직역하면 'The Leader'라는 의미.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자기 자신을 대령이라 칭한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42] 왕당파가 배신당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유는 결국 프랑코의 후계자는 왕당파측이 지지하던 알폰소 13세의 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되었기 때문. 반대로 왕당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배격한 체 프랑스 혁명 이전 신정적 봉건 자치사회로 희귀라는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비전이 있었던 카를리스타는 배신당한거 맞다.[43] 이마저도 답이 없는 것이 돈을 루블로 환전하면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계산하여 그 과정에서도 수익을 얻어내었다.(...)[44]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자 이 스페인 고아들은 소련인 고아원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참호를 파고 재빨리 엄폐해서 당시 소련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45] 스페인 제2공화국은 4월 1일에 프랑코에게 항복했고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은 9월 1일에 있었다.[46] 이는 전체 참전 병력으로, 실제 단 한번도 단일 인원이 800명을 넘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47] 특히 돔브로프스키 대대원(Dąbrowszczacy)들은 위의 마드리드 방어전에도 참여한 역전의 용사들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산주의 성향의 반독 빨치산인 인민군(Armia Ludowa)과 역시 공산주의 성향의 폴란드 인민군(Ludowe Wojsko Polskie)에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48] 역시 켄 로치 작품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원한이 가시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49]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분할하여 식민지로 만든 상태였다. 즉 "모로코 지원병"은 다른 나라의 지원병들처럼 스스로의 명확한 의사에 의해 참가한 병사가 아니라 원래 스페인 식민당국이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식민지에서 모집한 현지인 외인부대이다. 스페인 정부는 내전 전에도 의도적으로 이들을 본토의 반란 진압 임무에 투입하고는 했는데, 이들은 평소 식민지 종주국인 스페인인들로부터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아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복수할 기회가 생기면 한없이 잔인해졌다고 한다. 프랑코 휘하에서 공화정부와 싸우기 위해 투입된 내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50] 바람 때문에 오폭이 된 거라는 주장을 했다.[51] 실제로 백인들 사이에서도 인종차별적인 경향은 강했는데, 영국이나 독일, 북유럽인들이 백인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했고, 그 다음 프랑스(물론, 국가적 위상을 보면 프랑스는 이탈리아, 스페인보다야 훨씬 나았지만)와 오스트리아인, 헝가리인, 그다음이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체코, 폴란드인들, 최하층 취급을 받던 이들이 러시아인들과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발칸인들, 유태인들이었고, 아랍인과 이란인, 인도인은 민족적으로 코카소이드 계열임에도 외려 유색인종 취급 받는 등 같은 백인 계열로 인정 받지도 못 했다. 흔히 말하는 이탈리아군의 졸전 드립 역시 어느 정도는 이러한 경향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WASP 항목을 참조하면 좋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도 이 영향을 받은 바 있다.[52] 대부분은 정치범과 외국인 전쟁 포로들이 수감 된 마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떨어졌다.[53] 스페인 공화파 망명 난민들이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이토록 관계가 깊었던 덕에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는 서방 내에서도 프랑코 혐오증이 강했으며, 샤를 드 골 또한 개인적으로는 프랑코와 더 가까운 우익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잔류한 망명객들을 후하게 대하며, 프랑코 정권을 피하여 계속 도망 나오는 난민들을 적극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아서 활동하는 반프랑코 레지스탕스와 후일 부상한 ETA의 활동을 묵인해 주는 등 스페인 공화파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현재 까지도 매년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여 치루어지는 파리 해방 기념 행사 때는 꼬박 꼬박 프랑스 삼색기와 더불어 스페인 공화파의 공헌을 기리는 공화국 삼색기가 같이 진열된다.[54] 단적인 예로 체 게바라가 유년기 정치적 의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게 아버지가 매일 같이 집에 불러 같이 놀던 공화파 망명객들이었다고 회고했다.[55] 다만, 레케테는 그런 가톨릭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민진영에서는 가장 포로에 대한 대우를 제대로 한 군사집단이었다. 그리고 내전 발발 이전에는 카를리스타들의 전통적인 지방자치적 전통을 스페인 군부의 중앙 국가주의에 대치되는 우익 내의 맞불로 쓰기 위해 공화 정부에서 이들을 무장시키고 훈련 시킨 전적이 있어 모로코 용병대 다음으로 국민진영에서 정예로 꼽히기도 했었다. 스페인 현지의 미디어 묘사나 당대의 평가에 따르면, 레케테는 군사적으로는 정예인데 인간은 대체로 나바라 지역의 농촌 출신자가 많아서 그런지 그나마 좀 순수한 집단, 팔랑헤는 군사적으로는 그닥 유능하지 않은데 후방에서 사상정화랍시고 약자나 괴롭히는 못된 집단 기믹을 보였다. 정작 사상적 스펙트럼이나 행동하는 코드(가령, 서로를 동무라고 지칭하거나 노동자의 상징인 푸른색을 자기 제복 색깔로 하거나, 인민전선의 인사법인 팔뚝질을 활용하거나) 팔랑헤가 가장 공화 진영과 유사하다는 것, 내전 이전에 CNT와 연대를 모색했던 점은 잊고서. 실제로 모 영화에서는 레케테 출신 장교와 내전 이전 공화진영 쪽에서 일한 여자가 아무 생각없이 연애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때 부터 뭔가 친좌파적인 색체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우익 진영 내분 중 쩌리가 되고 1976년 몬테후라 살인 사건에서 꼴통 극우 경찰들에게 테러 당해 빡칠대로 빡친 카를리스타들은 아예 공개적인 사회주의 정당으로 전향한 후 공산당과 합작으로 현재 스페인의 통합 좌파당을 만든다. 애초에 저 쩌리가 된 이유도 저런 '빨갱이 정화에 소극적이고' '자유주의의 사상적 독약인 휴머니즘'이 의심 된다는 이유, 즉 나머지 국가군과 달리 그나마 자국민 학살하는 도살자 처럼 굴지 않는다는 이유였으니 카를리스타들 입장에서는 분통 터질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현대 카를리스타들은 친가톨릭, 친왕정이면서도 또 자본주의와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오묘한 좌파 중에서도 이단아로 분류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재밌는 것이 그 옛날 19세기 카를리스타 내전이 벌어졌을 당시 이들은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방과 연계하기도 했다.[56] 내전 당시 바스크 자치 공화국은 이념적으로는 우익이었지만 공화국 정부에게 자치권을 약속 받아 공화국 편에 섰으며, 따라서 나머지 공화군과 다르게 군종 사제, 군인들의 축성 등 종교적 영향력이 여전히 유지되었다.[57] 도시 자체가 옛날 옛적 로마 제국이 산 위에 새우고, 몇 세기 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무슬림들이 산 주위로 성벽을 쌓아 놓은 구조이다[58] 현재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의 군사 박물관 역할을 하며 사건의 장본인인 모스카르도 본인도 그곳에 묻혀 있는데, 무덤에 왔다가는 사람들마다 침 뱉거나 헌화 하려는거 둘 중 하나여서 이걸 막으려고 주변 경비들의 신세가 참 피곤하다(...). 이제는 스페인도 엄연한 민주 국가니 파쇼 독재자를 위해 싸운 인간을 대 놓고 기릴 수는 없고, 또 그렇다 해서 엄연히 프랑코 정권의 계승자인 현 스페인 왕국이 아예 프랑코와 국민군을 버릴 수는 없으니 또 아예 부정도 못하고... 여러모로 아직도 스페인에서 스페인 내전은 과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역사라는 걸 명백히 보여주는 장면이다.[59] 당시 공화 진영은 그래도 민주제다 보니 언론 통제가 거의 없었고, 외국 기자들도 훨씬 많이 가 있었다. 거기다가 다들 피난이다 뭐다 정신이 없다보니, 자기가 경험한 만행을 과장하는 경향도 상당했다. 마지막으로 유언비어까지 파다하게 퍼졌으니...[60] 물론 이런 이미지는 공화진영의 선전전+게르니카 폭격을 포함한 국민진영의 무자비한 학살+내전 막판에 벌어진 안슐루스 등으로 순식간에 상쇄된다. 이미지 효과가 공화정부에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못 되어서 그런 거지...[61] 얘들은 한때 아나키스트들과 손잡으려고 했던 경력이 있었고, 코드 역시 이들과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가 그 경력 때문에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 진영 내의 다른 집단에서 경원시 되었다.[62] 국가군 진영 내에서 막대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명망이 높던 장군이었다. 당시 스페인에 파견된 콘돌 군단의 독일군 장교들은 은근히 스페인 장교들을 한 수 아래로 취급하던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도 후안 야구에 만큼은 인정했다.[63] 특히 1936년, 37년에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 내전 이전에도 정치 테러 등 낌새는 있었지만, 이 때는 말 그대로 도시 등 후방은 감옥이 제 기능을 상실하는 등 다소 무법천지였다고 한다.[64] 비공산당계 병사들은 장비나 의료지원을 안 해준다거나 전공을 제대로 대우 안한다던가[65]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러한 2차 대전 이후 스페인 내전에 대한 나머지 세계의 기억과 이에 따른 프랑코 치하 스페인의 고립을 "민주 스페인에 대한 자유 세계의 철저한 방기와 무시는 전후 자유주의의 양심에 남아 있었던 마주하기 걸끄러운 오점으로 남았다"라고 표현했다.[66] 위치나 위상이나 딱 스페인의 서울대학교라 보면 된다. 이공계와 자연과학에선 최근 마드리드 자치대학의 위상이 더 높지만 역사성은 그 기원은 15세기 말까지 올라가는 꼼플루텐세와 비교할수 없다[67] 물론 이것도 사회 일반에서 그랬다는 거지, 영국의 보수적인 정부는 국제 여단원들을 빨갱이 취급하고 훗날 2차대전 중에도 국제 여단 복무 경력이 있으면 무조건 간부로 승진 하는걸 금지 시키는 등 탄압은 여전했다[68] 전차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겹쳤지만.[69] 그래도 팔아먹은 무기는 구식. 공화정부가 무기를 사는데 경험이 없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사기를 많이 당했다.[70] 데뷔작인 크로노스악마의 등뼈. 그리고 비교적인 최근작인 판의 미로.[71] 카를리스타들의 지도자[72]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 악마의 등뼈는 멕시코인데 주인공은 스페인 내전 피난민이다. 감독 본인 가족은 스페인 내전과 관련 없지만 아는 사람들 중에 스페인 내전으로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73] 스페인 내전 자체를 다룬다기 보다는, 내전 이후 지식인들의 절망감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풀어냈다.[74] 이쪽도 에리세와 비슷하다.[75] 스페인 내전이 주제라기보다는 스페인 내전과 그 이후 프랑코 집권기를 보낸 무통증을 앓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76] 스페인의 국민적 시인. 스페인 내전에 의해 사살당했다.[77] 2011년에 개봉한 실화 기반의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78] 배경 자체는 현대 스페인이지만 주인공 욱스발의 아버지가 스페인 내전 때문에 멕시코로 망명했었다.[79] 작중 주인공이 암살해야 하는 타겟인 스추카가 공화파 진영에 자원하여 싸웠다.[80] '15여단(국제여단 중 아일랜드인들이 15여단에 속했다고 한다) 만세' 정도의 뜻이다.[81] 인민전선의 병사들에 관한 노래다. 3집 "London Calling"에 수록되어 있다.[82] 2차대전기 전략게임으로 제일 빠른 시작년도가 1936년도이다.[83] 1차대전에서 독일 동맹이 승리한 대체역사모드로 여기선 3등분된다.[84] 동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대체역사모드로 여기선 무려 4등분된다.[85] 카이저라이히내의 연합국 승리를 가장한 소설책을 바탕으로 만든 모드로, 여기 역시 4등분된다.[86] 스페인 내전을 바탕으로한 보드게임.[87] 위 보드게임의 확장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