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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P. 케네디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조셉 패트릭 케네디 시니어
Joseph Patrick Kennedy, Sr.
파일:Joseph_P._Kennedy,_Sr._1938.jpg
출생 1888년 9월 6일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
사망 1969년 11월 18일 (향년 81세)
미국 매사추세츠 히아니스 포트(Hyannis Port)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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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패트릭 조셉 케네디(아버지)
로즈 피츠제럴드(배우자, 1914년 결혼)
슬하 4남 5녀
조셉 P. 케네디 주니어(장남)[1]
존 F. 케네디(차남)
로즈 마리 케네디(장녀)
캐슬린 애그니스 케네디(차녀)
유니스 메리 케네디(삼녀)
퍼트리샤 헬렌 케네디(사녀)
로버트 F. 케네디(삼남)
진 앤 케네디(오녀)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사남)
학력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 학사/1912년 졸업)
종교 가톨릭
직업 정치인, 외교관, 사업가
소속

서명
파일:Joseph_P_Kennedy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성장 배경2.2. 출세로의 과정2.3. 과욕과 비극
3. 가족관계4.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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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셉 패트릭 케네디(조 케네디 1세)[2]는 미국의 정치인, 외교관, 사업가이자 사교계 명사였다. 역사에서는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로 유명해졌다.

2. 생애

2.1. 성장 배경

1888년 9월 6일 미국 매사추세츠보스턴에서 아일랜드계 3세로 태어났다. 그의 친조부인 패트릭 케네디(1823~1858)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와서 막노동만 하며 고생하다가 아들이자 조셉 패트릭의 아버지인 패트릭 조셉(1858~1929)이 생후 10개월일 때 콜레라로 사망했다. 그래도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였던 할아버지 대와 달리, 아버지 패트릭 조셉이 뛰어난 사업 수완[3]과 친화력으로 돈도 많이 벌고 보스턴 지역 내에서 상당한 정치적 기반을 쌓아 조셉 패트릭은 중상류층으로 유복하게 태어날 수 있었지만, 조셉 패트릭은 단순한 중상류층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를 원했다.

2.2. 출세로의 과정

1908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해 1912년에 졸업한 이후, 1914년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이자 당시 보스턴 시장으로 보스턴 정계의 유력인사였던 존 "허니 피츠" 피츠제럴드(1863~1950)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1890 ~ 1995)와 결혼했다.[4]

하버드 졸업 직후 처음에는 금융감사원으로 근무하다가, 1913년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설립한 은행인 콜롬비아 신탁 은행이 WASP 계열 자본에게 적대적 인수의 위기에 놓이자, 해당 은행의 대주주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지원 요청을 받고 막대한 자금을 차용하여[5] 인수합병을 저지했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은행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불과 25살로 당대 미국 최연소 은행장이었다. 이어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조선소의 생산관리자로 직을 옮겼고, 여기서 알게 된 중요한 인연이 당시 해군 차관이자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FDR. 1차대전 종전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주식 산업에 발을 들이는 한편, 1928년 10월 23일, David Sarnoff와 함께 RKO 라디오 픽쳐스를 설립, 영화 산업과 부동산 등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6]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마피아와의 연계설 등 많은 추문이 뒤따랐고, 특히나 금주법 당시 밀주를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는 의혹은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감자.영상[7]

한편 193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해서,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FDR의 주요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이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서 1934년 신설된 SEC(증권거래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된다. 1920년대 당시 광란의 주식 시장에서 온갖 작전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를 SEC의 수장 자리에 앉히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이라는 정계의 반발도 적지는 않았지만, FDR은 해당 인사를 강행했고, FRD의 기대에 부응해서 조셉 케네디는 주식 시장의 비정상적인 관행을 바로잡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1935년 해당 자리에서 사임한다.

이어서 1936년 루즈벨트가 재선에 성공하자[8] 미해상위원회(MARCOM)의 초대 위원장 자리를 거쳐 1938년에는 주 영국 미국대사가 되었다. 아일랜드계 출신으로서 개인적으로는 반영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영국의 정치인 및 상류층들과 사교계에서 매우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영국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미국의 최대 맹방인 영국 주재 대사직은 본인과 케네디 가문의 사회적인 입지를 높여줄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 [9]

그의 주영 대사 재임 시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륙의 정세가 매우 불안한 시기였는데, 고립주의를 신봉했던 조셉은 뮌헨 협정을 비롯한 네빌 체임벌린 수상의 대독일 유화정책을 지지했다.[10] 하지만 끝내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을 감행하자 유화정책 지지자였던 그의 입지는 약화되었고, 거기에 이런저런 처신상의 실수[11]까지 겹쳐서 영국 내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1940년 대사직에서 교체되어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2.3. 과욕과 비극

상술하듯이 조셉 패트릭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중상류층으로 나고 자랐지만 아일랜드계로서 차별을 많이 받은 탓에 단순 중상류층의 수준에서 만족하려 들지 않았고, 자식들을 많이 낳아 엄격한 교육을 통해 자식들을 엘리트로 키워 정계 및 재계로 진출하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케네디 가족의 분위기는 공부와 토론에 몰두하는 가정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자녀들은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 저녁 식사는 무조건 참석해야 했고, 매일 그날그날 있었던 시사나 역사 등등에 관해 토론하는 일상이 자리잡혔다.

훗날 케네디가의 저주라고 안 좋은 말들이 무성하지만, 후손들의 케이스라면 몰라도 자식들이 겪은 비극들은 대부분 조셉 패트릭 본인의 간접적인 요인 제공 때문이었다.
  • 자신의 성공과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 자식들 중 지능이 낮은 큰딸 로즈마리를 케네디 가문의 수치라고 여겨 1941년 전두엽 절제술을 당사자인 딸과 아내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시켜 놓고 수술로 인해 자아를 상실한 딸을 정신병원에 쳐박아 놓고 평생 찾지 않았다.[12]
  • 1944년 4월, 차녀 캐슬린이 조셉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하딩턴 후작 윌리엄 캐번디시 와 결혼했다. 케네디 가문에서 유일하게 참석한 사람은 오빠인 조셉 케네디 주니어뿐이었다. 그러나 결혼 4개월만에 남편 윌리엄이 2차대전에서 전사하였다.
  • 1948년, 차녀 캐슬린은 열 살 연상의 유부남인 피츠제럴드 백작과 연인관계가 되었고, 여행을 갔다가 항공기 사고로 프랑스에서 둘 다 사망했다. 향년 28세.
  • 본인과 가족들의 노력 끝에, 1960년 드디어 차남인 존 F. 케네디가 미국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기쁨을 맛보았으나, 얼마 안 되어 1961년 조셉 패트릭 본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우측 반신이 마비되고, 심각한 언어 장애를 앓게 되었으며[13] 2년 뒤인 1963년 11월 22일, 세기의 암살 사건으로 불리는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으로 참척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 거기서 그치지 않고, 5년 뒤인 1968년, 당시 유력 대선후보였던 3남 로버트 F. 케네디가 시리아계 이민자에게 암살되어 케네디 가문의 두 번째 대통령 배출은 물건너 갔고,[14] 살아 생전에 아들 3명과 딸 1명을 병사도 아닌 사고사나 암살 등으로 먼저 보내는 비극을 당했다. 이후, 그나마 암살을 피한 막내아들 에드워드 케네디가 차파퀘딕 사건으로 대권 진출이 불가능해진 후에야(다만 조셉 본인은 막내아들에게 닥친 불행은 전해듣지 못했다고 한다.) 1969년 11월 18일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15]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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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 그리고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자녀를 많이 낳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조셉 패트릭 케네디와 로즈 케네디는 당대 아일랜드계 미국인 출산율보다도 훨씬 높은 4남 5녀, 즉 총 9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그 중 4명은 비극적으로 사고나 암살 등으로 사망했고[16] 장수한 큰딸은 평생 요양병원에 갇혀 지내야 했다.[17]

그나마 암살된 삼남 로버트 케네디의 자녀가 워낙 많아서 케네디 가문은 지금도 별 탈없이 이어지는 중이다.

4. 대중문화에서

로버트 해리스의 대체 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나치가 유럽 대륙을 장악한 극중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960년대 초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치 독일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실제 역사에서 조셉 케네디가 나치에 대한 유화정책을 지지했던 것을 반영한 듯 하다.

2011년작 미국 드라마 <케네디가>(The Kennedys)에도 주요 조연으로 등장한다. 영국 배우 톰 윌킨슨이 조셉 역을 맡았다. 숙원이었던 아들 존의 대통령 당선을 이끌어내고, 아들의 집권 초반에도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지만 얼마 안되어 중단된다. 그러고는 실제 역사대로 뇌졸중에 따른 반신불수 상태가 되고, 아들 존과 로버트가 차례로 암살당하는 걸 지켜본다. 심지어 아내 로즈와의 사이도 좋지 못해서 공공연히 내연내를 끌어들이고,지체 장애가 있던 딸 로즈마리에게 무리한 수술을 강요해 상태를 돌이킬 수 없게 악화시키는 등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부정적인 모습들도 묘사되었다.[18]

대체역사소설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는 공황 직전 모든 주식을 처분하여 숏을 친 전설적인 투자자로 등장,미국의 광란의 20년대를 이용하려고 하는 주인공이 루스벨트의 소개로 만나 실질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대공황 직전 주인공의 조언을 받아들여 대규모의 공매도를 진행하였기에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을 내었을 것으로 보인다.

The Red Order: First Days of Eurasia는 본인이 직접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지만 나치에 유화적이었고 영국에 대한 지원 역시 철회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케네디의 강경한 고립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보내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의 지원이 부재해 독일의 유보트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만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조지프 케네디는 태평양 우선주의 원칙을 채택해 대서양 함대까지 대일본 전선으로 투입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영국과 자유 프랑스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전후에 유럽 공산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1] 1915 - 1944,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해군 복무 중 전사.[2] 그의 손자이자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은 조 케네디 2세, 조 케네디 2세의 아들은 조 케네디 3세로 불린다.[3]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이에서 일종의 사교의 장 역할을 겸한 술집을 운영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아버지 P.J. 케네디도 그렇고 조셉 본인도 그렇고 술장사를 통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지만, 정작 케네디 가문은 술을 즐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4] 이 때문에 존 F. 케네디의 가문에 대해 언급할 때는 친할아버지 패트릭 조셉 케네디보다는 외할아버지 존 피츠제럴드가 더 인지도가 많은 편이다. 패트릭 케네디의 경우에는 존 피츠제럴드와 달리 본인이 정계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주요 아일랜드 계파간 이해관계를 막후에서 조정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참고로 사돈 관계로 맺어지기 전까지 패트릭 케네디와 존 피츠제럴드의 관계는 그렇게 우호적인 편은 아니었는데, 패트릭 케네디는 존 피츠제럴드를 '너무 경박한 인물'이라고 마땅찮아 했고, 존 피츠제럴드가 보스턴 시장으로 출마하려고 처음 시도했을 때는 막후에서 이를 저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존 피츠제럴드는 딸의 결혼을 반대하다가, 후술할 조셉 케네디의 은행장 등극 이후 결혼을 승낙했다고(...)[5] 하버드에서 쌓았던 막대한 인맥이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때 그가 차용한 약 4만5천불 정도였는데, 1세기의 인플레이션을 거친 현재는 약 130만불 정도의 가치.[6] 1960년 기준으로 케네디 가문의 재산은 2억 5천만 불(현재 기준 25억 불 수준)에 달해서 미국의 부호 가문들을 언급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수준이었다.[7] 다만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런저런 비윤리적인 방법(가령 각종 작전주)을 통해서 돈을 벌기는 했어도, 밀주 산업을 통해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학계에서 전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모양.#[8] 1932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재계 및 아일랜드 이민자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루즈벨트 지원 활동을 벌였다.[9] 둘째딸 캐슬린 케네디가 영국의 지체 높은 귀족가문의 후계자인 캐번디시 후작과 눈이 맞은 것도 이때의 일. 영국 성공회의 열렬한 후원자이자, 아일랜드 총독으로 부임해서 아일랜드인들을 때려잡은 선조들을 두고 있는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하겠다는 둘째딸로 인해서 조셉 본인과 부인은 뒷목을 잡았지만(...)[10] 반면 아들이었던 존. F. 케네디는 아버지와는 달리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유화정책에 부정적이었고, 영국의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을 다룬 그의 하버드 학부 졸업논문을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해 화제를 모았다.[11] 미국 언론에 '영국은 이제 끝났다'라는 발언을 남기는 한편, 독일의 폭격이 지속되자 런던 교외로 이주해버리면서 영국 내에서 그의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여기에 그의 장남이었던 조셉 케네디 주니어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FDR의 3선 도전을 거세게 반대하는 한편, 조셉 본인도 FDR의 3선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백악관과의 관계도 예전같지 않아져버렸다.[12] 형제•자매들도 로즈마리의 근황을 조셉 패트릭 케네디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1961년 이후에나 알게 되었고, 1969년 조셉의 사망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되었다.[13] 역설적이지만 이 뇌졸중 이후로 JFK는 정치적 부담없이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 이전까지는 '백만장자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의식해서 조셉 본인이나 JFK나 서로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으나, 심각한 언어 장애를 겪게 되면서 말을 못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조종한다는 비난은 이제 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14] 조셉 본인은 로버트의 1968년 대선 출마가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15] 한편 차남인 존 F. 케네디의 암살 당시에는 그의 장모이자 로즈 케네디의 어머니(즉, 존 F. 케네디의 외할머니) 마리 조세핀 해넌(Mary Josephine Hannon)도 살아있었기에 장모 또한 외손자녀를 셋이나 잃은 참척을 겪게 되었다. 1년 후인 1964년 99세로 타계했다.[16] 장남 조셉 패트릭 주니어는 전사, 차남 존과 삼남 로버트는 암살, 차녀 캐슬린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17] 어떻게 보면 조셉 패트릭 케네디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부적절한 방법을 써서 의도치 않게 자식들과 후손들을 비극으로 내몬 장본인이었고, 뇌졸중을 비롯한 만년의 불행도 그에 따른 뒤늦은 대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18] 이러한 일들로 분개한 아내 로즈는 나중에 조셉이 뇌졸중으로 반신불수 상태가 되자 소극적인 요양으로 일관하며 뒤늦은 복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