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23:14:06

진주만 공습

진주만 공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Arizona_PearlHarbor.jpg
공습을 받고 화염에 휩싸인 USS 애리조나
명칭영어: The Attack on Pearl Harbor[1]
일본어: 真珠湾攻撃, ハワイ(布哇)海戦
날짜1941년 12월 7일
장소미합중국, 하와이 준주 오아후 섬 진주만
결과일본제국 해군 공습 성공
미합중국 해군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 상실
미합중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태평양 전쟁 발발.
교전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0px-US_flag_48_stars.svg.png 미합중국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제국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0px-US_flag_48_stars.svg.png 허즈밴드 E. 킴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0px-US_flag_48_stars.svg.png 월터 쇼트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야마모토 이소로쿠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나구모 주이치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겐다 미노루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구사카 류노스케
전력
전함 8척
순양함 8척
구축함 30척
잠수함 4척
기타 함선 50척
항공기 약 390대
항공모함 6척[2]
전함 2척[3]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항공기 441대
소형 잠수함 5척
피해규모
전사 2,334명
부상 1,143명
민간인 사상 103명
전함 4척 침몰[4], 1척 좌초, 3척 손상
순양함 3척 손상
구축함 3척 손상
기타 함선 2척 침몰, 1척 좌초, 2척 손상
항공기 188기 손실, 159기 손상
항공기 29기 손실, 74기 손상
잠수정 4척 침몰
잠수정 1척 좌초
전사 64명
포로 1명[5]

1. 개요2. 원인
2.1.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유
3. 전개
3.1. 일본의 준비3.2. 미국의 준비3.3. 선전포고 없는 전쟁
4. 불타오르는 진주만5. 진주만 공격 이후
5.1. 무사했던 전함 외 시설물들과 숙련된 승조원들5.2. 일본군의 하와이 상륙?
6. 뒷이야기
6.1. 최선의 전략과 오판6.2. 미국의 대노
6.2.1. 음모론
6.2.1.1. 반론
6.3. 일본의 설레발6.4. 추축국(樞軸國)의 대미 선전포고6.5. 관련인물들의 후일담6.6. 전후 일본 내부의 평가6.7. 소련
7. 창작물에서 묘사한 진주만 공습8. 트리비아9. 관련 어록



1. 개요

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
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
'''もしかすると、私たちは、眠れる獅子を触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어쩌면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
-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

1941년 12월 7일, 항공모함 중심의 일본군 해군 연합함대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 하와이 오아후 섬 진주만에 공습을 가한 사건. 이는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 된 일이기도 하다.[6] 미해군의 주요 해군기지였던 진주만을 일본 항공모함이 기습하여 정박해 있던 미해군 함대를 궤멸시킨 전투로, 해전에 있어서 항공모함 시대를 개막한 이정표로 본다.[7] 또 전술적으로는 완벽한 일본의 승리였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지옥길을 연 계기가 된 실책으로 평가된다.[8]

2. 원인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유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에 나온 이유로 일본제국은 미국과 전쟁을 결정한다. 이제 일본은 전쟁을 시작할 방법을 두고 논의를 벌이는데, 이때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쟁계획을 제안한다. 야마모토의 주장에 따르면 '그나마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방법' 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거기에 기지를 둔 태평양 최강의 함대인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최소한 괴멸 직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이 힘을 회복하는 동안 일본에게 없는 석유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를 점령하고 섬들을 요새화해서 미국의 공세 의지를 꺾고, 가능하면 더 이상의 결전없이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고, 정 안 되면 태평양을 종심(縱深)[9]이 깊은 전장으로 삼아 미국의 공세전력을 소모시켜 최종 결전에서 그들을 격멸하고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단, 이들이 놓친 점이 있었으니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말아먹고 앞으로 또 세계대전 하나를 말아먹을 계기인 전선이 이중화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10][11]

어차피 둘 사이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은 유럽 전선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태평양 전선으로 모든 여력을 돌릴 예정이었으며 일본의 점령지는 절대로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태평양 함대의 건조도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유럽 전선이 결판나기 전에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뒤, 적절히 협상하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 전선은 추축국이 매우 유리한 형세였으므로 그대로 종전된다면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일본은 미 대륙을 고립시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혹여라도 추축국이 패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병력이 분산될 때 결판을 지어야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즉, 미국과의 결전 자체는 충분히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이 모스크바까지 밀린 상태로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의 경제력이 초반에 입은 타격을 전부 복구하고도 남아돌 것이라고 당시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파일:해군 평형확장판.png 전쟁발발전 양국의 해군 평형

지형적 특성상 서로 간에 타격을 주려면 해군이 필수불가결했고 반대로 이것만 없으면 일본은 상당한 기간 동안 식민지의 점령을 공고히 하고 국제사회에서 이를 인정받을 기간을 벌 수 있었다.[12]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어도 적이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적이 나를 공격할 유일한 수단을 미리 잘라놓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13] 즉, 나를 공격할 도구인 적의 팔다리를 잘라놓고 회복되기 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그 당시 파악된 미국의 역량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있었으니 일본의 원래 의도대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와 거의 똑같은 사례가 독소전쟁인데 이 경우도 독일은 소련을 아주 호구로 여겨서 허접한 소련군 따위는 10주면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일을 저질렀지만 현실은 굳건히 버틴 소련에게 역으로 털리는 결말을 맞게 된다. 설사 적이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면전에서 상대방의 전력을 줄여놓는 것은 초반 전세의 승기를 잡고 후에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좀 더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히라타 신사쿠 제독이 1930년에 출간한 '우리가 싸운다면' 이란 책에서 일본이 먼저 미국의 하와이를 공습한다면 미군의 사기가 떨어져 미 해군이 괴멸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례가 당시 일본 군부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구상의 전제조건인,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일단 미국이 일본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일본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정치인들은 일본보다 유럽에 더 관심이 있었고 이는 심지어 진주만 공습을 당한 이후에도 유럽 전선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다.[14] 문제는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설치는 것을 미국이 계속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고 침략으로 먹은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는데 일본 군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물론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이쯤에서 미국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물러났겠지만 당시 일본은 그렇게 멀쩡한 나라가 아니었다.[15]

그리고 사실 독일과의 전쟁에도 주저없이 총력전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히틀러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인 것은 진주만 공습의 결과였다. 아무리 미국의 국력이 대단하더라도 총력전 태세 없이는 국력을 동원하는데 한계가 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총력전 태세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그 역할을 일본과 독일이 해낸 셈이다.

특히 적당히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면 진주만 공습은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협상에 응할 것인가 여부는 물론 전세에도 좌우되지만, 국민감정에 따른 여론에도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쟁에서의 유불리만을 고려했을 뿐 미국의 일반 국민 및 정치인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건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면 진주만 공습과 같은 방식을 협상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러일전쟁이 "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와 협상하는" 사례로 제시되기도 한다. 1904년 일본은 국력이 3~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러일전쟁을 벌였다. 유리한 전장상황을 배경으로 1905년 미국의 중재에 힘입어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고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전쟁 당시 모스크바까지 공격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 인근인 블라디보스토크도 전장이 아니었다. 주요 전장은 만주와 대한해협으로 국한되었다. 일본은 이 러일전쟁을 주목했고 그 대상이 미국과 태평양으로 변경되었으며 목표는 아시아로 확대된 것이다.[16] 물론 이번 전쟁의 중재자도 정해놨는데 그것은 진주만 공습 8개월 전인 1941년 4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본의 구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망하게 된다.
  1. 미국은 일본을 선공하지 않았고 무역봉쇄를 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중국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즉, 일본은 중국 침략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을 선제공격한 것이다. 이 전쟁은 당시 군국주의에 찌든 일본 군부가 정권을 몇 년 더 쥐는 데는 "피할 수 없었"을 지 몰라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관점에서, 아니 같은 일본 군부에서도 상식인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문제는 당시 일본제국을 지배하던 세력이 일본 군부, 그 중에서도 상식과 거리가 먼 파벌이었다는 것. 그리고 일본 국민들 또한 거기에 동조하는 상황이었으니 기존의 일본 군부가 실각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2. 위에 설명된 작전술을 봤을 때 가장 결정적인 패인은 바로 미국의 국력은 이미 일본 따위가 어찌 할 수 없을 수준으로 엄청났기에 일본이 미국의 팔다리를 잘라버려도 미국은 그것을 복구하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아니, 일본 따위가 아니라 당시 최강국의 하나로 여겨지는 영국이라고 하더라도 미국의 국력에는 못미친다. 가령 2차대전 동안 영국이 영연방과 타국에서 지원받은 수송선을 다 합쳐서 1,500만 톤의 수송선을 건조했는데 미국은 혼자서 2,500만 톤을 찍어냈다. 게다가 저짓을 하면서 주력함 수십척을 포함해서 수백대의 군함을 찍어낸 건 덤이다.
  3.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가 입장을 굽혔던 가장 큰 이유는 쓰시마 해전의 패배가 아니라 러시아의 내부 정치 사정이었다. 미국은 그런 약점이 없었고, 오히려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미국 역사상 전례없던 분노와 전쟁의지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국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을 몇 년 동안 문제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4. 일본은 점감요격작전을 세워 미국 해군을 잡으려 했는데 이 작전의 전제조건은 미국 해군이 수십년 전 1905년의 러시아 해군처럼 전함군을 몰고 와야했으나 미국은 전함 대신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해군을 운영했다.[17] 그리고 전함이라고 해도 제대로 정찰도 하지 않고 무모하게 진격하는 식으로 운용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지리적으로도 러일전쟁때는 러시아에 난점이 하나 있었으니 발틱 함대는 유럽에 있었는데 이 발틱함대가 거의 세계일주를 하다시피하며 쓰시마 섬까지 와야 했다. 그러니까 수만킬로미터를 항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태평양 전쟁은 그정도까지는 아니었다.
  5. 일본이 중재자로 지목한 소련은 친미적이지 않지만 당연히 일본과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소련 입장에서 당장 1년 전에 일본과 짧지만 수만 명이 죽고 다치는 대규모 전투를 치렀고, 일본은 엄연히 소련과 전쟁 중이던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때문에 미국과 일본이 소모전할 때 일본 좋으라고 나서줄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한창 독일과 전쟁 중일 때도 모스크바 전투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병력을 일본 국경에 배치해 두었고, 태평양 전쟁 말에 일본군이 완전히 밀린 뒤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포고할 때 일본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18]

3. 전개

3.1. 일본의 준비

미국과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일본군 수뇌부는 남방작전을 수립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였다. 하지만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남방작전 이전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먼저 공격해두지 않으면 남방작전 내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은 일본군 수뇌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당시 일본해군의 기본적인 대미작전 개념은 점감(漸減)전법으로 개전 후 서진(西進)하는 미군 함대를 잠수함과 항공기로 위치를 파악하고 잠수함과 항공기로 이들에게 1차 손해를 준 후에 이어서 순양함과 구축함 전대를 동원하는 야간전투에서 2차 손해를 준 후 전함간 포격전으로 미군 함대를 최종적으로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전안의 문제는 미군이 일본군의 예상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미 해군도 일본 해군과 유사한 작전개념안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선전포고를 먼저 하고 실제 전투는 나중에 진행할 경우 미군도 일본군과 비슷하게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군이 일본이 예상한 경로 그대로 진격하지 않고 남방작전을 하러 떠나는 일본군을 측면에서 때린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진격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일본 해군의 머리가 굳으신 높으신 분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어디까지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이 해군의 주력이라는 사상을 지녔던 다른 제독들도 반대 의사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무엇보다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관을 사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수뇌부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남방작전과 동시에 진주만 공습을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에 앞서 연구한 것은 바로 영국군이 실시한 이탈리아타란토 공습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과 타란토의 조건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어뢰를 통한 공격이 가능하며 400기 정도의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만 동원한다면 진주만 공습도 성공할 것이란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일본해군의 조종사들은 여름부터 철갑탄을 이용한 폭격과 뇌격훈련에 돌입하였다. 더불어 진주만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모형을 보여주면서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정확하게 미국의 전함항공모함을 식별할 수 있는 훈련도 병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정보계통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태평양 함대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요시카와 다케오라는 해군 소위 출신 첩보원[19]이 상주하여 어디에 항공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어느 군함이 어디에 정박하고 있는가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전달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함대의 모든 군함이 토요일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장 최적의 공격시간이 일요일 새벽이란 보고서를 올릴 수 있었다. 이상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 수뇌부는 1941년 11월 17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몇 가지 사정이 겹쳐서 결국 12월 7일이 최종적인 공격일로 확정되었다.

작전일이 확정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조직하였다. 무엇보다 작전이 노출되면 안 되었기 때문에 11월 22일까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쿠릴 열도 부근의 히도카푸만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항해 중에는 절대 무선교신을 해선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졌다. 게다가 승무원들에게는 어디로 가기 위해 모인다는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더불어 집결지인 히도카푸는 미국 첩보원들이 전혀 파악하지 못한 조그만 항구였다.

11월 26일, 군함들이 한 척씩 따로 빠져나가는 방식을 채택하여 진주만을 향해 닻을 올렸다. 더불어 항로 역시 민간상선이 전혀 다니지 않는 곳과 미국 정찰기가 비행하지 않는 곳 위주로 선정하여 항해했으며 선박이 배출하는 배기가스로 인해 발각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군함의 연료로 경유를 사용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20] 태평양을 우회한 함선도 있고, 동해를 지난 함선도 있으며 전파 발신을 통제하고 전신키를 봉인 할 정도로 신중하였다.

제1항공함대 비행대가 철수한 큐슈 남부의 각 기지에는 다음날 바로 큐슈 북부 방면 소재의 제12연합 연습항공대의 교육부대가 이동하여 바로 다음날 부터 쉬지 않고 연습하며, 항공함대의 비행대 이동이 없는 것 처럼 위장하였다. 또한 통신 방첩도 고려하여, 각 기지는 그 전날 까지의 통신량과 차이가 없도록 동일한 호출 부호로 연습문을 주고 받았다. 기동부대 편지는 모두 밀봉하여 그대로 두고, 진주만 기습 성공 소식이 전해 진 이후에야 배달하는 등 보안이 철저하였다.

히도카푸 만에 집결한 병력은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 급유함 8척등 총 31척이였다. 이제는 누설될 우려가 없다고 판단된 11월 22일 나구모 사령장관은 기동부대 모든 승무원에게 공격의 목표가 진주만이라고 알렸다.

각 항모의 탑재기 대수는 1항공전대 아카기, 카가에는 각 60대. 2항공전대 소류, 히류에는 각 50대. 5항공전대 쇼카쿠즈이카쿠에는 각 70대로 합계 360대였다. 모든 탑재기가 한번에 발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1파 189대, 제2파 171대의 파상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첫 발진은 일출 30분전으로 정했다.[21] 1차와 2파는 45분의 간격을 두고 발진하기로 하고, 발진 지점은 오아후 섬의 정북쪽 230해리.

1차 목표는 하와이 방면에 있다고 예상되는 항모 2척, 전함 8척이며, 2차 목표는 갑 순양함 10척, 을 순양함 6척, 구축함, 잠수함, 기타 보조함정이었다. 또한 미군의 항공 병력을 봉쇄하기 위해 하와이 방면의 6개 항공기지 공습을 제2항공전대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더 이상 미국과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본군 수뇌부는 작전시작을 결정하였고 12월 2일 나구모 제독에게 '니타카 산(타이완 섬의 최고봉 : 현재의 옥산)에 등반하라 1208(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암호문이 전달되었다.

12월 6일 현지시간 10시 30분.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전보를 보내왔다.
황국의 흥망이 이 정전(征戰)[22]에 있으니, 분골쇄신하여 각자 그 책임을 완수하라
각 함의 돛대에는 Z기가 게양되었다. '어망투척중'을 뜻하는 깃발로, 러일전쟁 때 동해 해전 이후 무려 36년만에 게양된 것이다. 원래는 함대에 물자가 부족할때 그걸 메꾸기 위해 물고기를 직접 잡아 식량조달을 하던때 걸던 깃발이었다.

3.2. 미국의 준비

미국은 비록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시켰지만, 이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였을 뿐 전쟁을 하기 위한 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태평양의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고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비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특히 필리핀에 주둔 중인 연합군과 일본 본토와 근접한 주요 섬들이 공격대상으로 예측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작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는 개전되기 직전에 가까웠던 터라 긴급히 작업을 시작했어도 공사기간 등의 문제로 개전 당시 제대로 된 준비가 된 지역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대서양에서 독일군유보트가 악명을 날리자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일부 전력을 차출하여 대서양 함대에 편입시켰다. 태평양 방면의 전력 강화도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현재 보유한 전력과 무기만 있어도 일본군 따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근성이 없어서' 미국이 금방 협상 테이블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일본이나 '쬐끄만 뻐드렁니쟁이들이 뭐 대단하겠어?'라고 일본을 얕잡아 본 미국이나…. 어차피 전쟁은 잘 싸우는 쪽과 못 싸우는 쪽의 대결이 아니라 삽질하는 쪽과 더 많이 삽질하는 쪽의 대결이라는 말도 있으니.

특히 일본 해군의 목표인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은 "어차피 걔네들 여기까지는 공격하러 못 와."라고 생각하면서 모두들 퍼져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면 필리핀이나 태평양 섬에 있는 아군들이 좀 고생할 거고 거기서 지원 좀 해달라고 무전 때리면 그때 가서 일본군과 좀 놀아주다가 오는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일본에서 보낸 첩보원이나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일본인들, 특히 당시 하와이 인구의 30%가 일본계였으므로 이들이 벌이는 사보타주가 문제였다. 이에 따라 몇 가지 조치를 강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오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러 매체에서 사골로 등장하는 항공기들을 특정 장소에 빽빽하게 배치하고 감시병을 둔 사례가 있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미국도 슬슬 붙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주력이 서서히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집결하자 미군은 일본군이 그들의 예상대로 남방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소수 관계자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주장하였지만 완전히 묵살되었다. 다만 일본 해군이 전통적으로 6개월마다 바꾸던 함대 호출부호를 12월 1일에 1개월만에 바꾼점에 불안을 느낀 킴멜 제독은 정보 참모로부터 일본 해군의 제 1,2 항공전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정찰기의 수량이 부족한지라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였다.

어쨌든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했기에 전방기지에 항공기와 병력, 물자를 배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2월 3일에는 당시 해군참모총장이던 스타크 대장이 일본대사관과 영사관에서 퍼플 암호 기계를 해독하고 있다는 초 극비사항을 일선 사령부에 알렸으며 공습 전날에는 회의도중 하와이의 일본 영사관에서 서류 소각과 암호기계를 파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킴멜 제독은 전쟁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만 판단해 버렸다. 다만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항공모함이 없는 동안 주력함대를 출항시키는것은 위험하고 판단하여 항공모함들이 돌아올때까지 육군 항공기들이 지키고 있는 진주만에 함대를 그대로 두었으며 이 조치는 미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12월 7일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3.3. 선전포고 없는 전쟁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전쟁으로 국제 외교사에 있어 보기 드문 사례지만 그 드문사례를 일본은 진주만을 앞서 러일전쟁 역시 선전포고전에 러시아 전함과 함대등을 공격했으며 전쟁이 아니더래도 조선에서의 군사적행위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는 비열한 방식이였다. [23]

선전포고 없이 벌인 공격이긴 한데 그래도 일본군이 이 당시에는 아주 맛이 간 건 아닌지 야마모토 제독은 선전포고를 한 후에 진주만 공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받아들인 일본 정부는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米国及英国ニ對スル宣戦ノ詔書)"란 이름의 선전포고문을 일본어 원문 발표한다. 그리고 따로 미국을 위한 선전포고문을 진주만 공습 직전에 주미일본대사관으로 보냈다. 이 문서는 총 14개 부분으로 이루어져있어서 일명 14 Part Message로 불린다. 처음 13개 부분은 영어로 적혀있었고, 마지막 14번째 부분은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정작 노무라 키치사부로[24]주미일본대사가 '14 Part Message'라 불리는 13000자 내외의 선전포고 번역문을 들고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찾아갔을 때는 워싱턴 D.C. 시각으로 7일 오후 2시. 암호문에는 공습 직전인 오후 1시에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라고 나왔지만 노무라 대사는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2시로 연기한 것. 이 시각은 하와이 기준으로 8시 50분인지라 이미 헐 장관이 1시간 전에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은 뒤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선전포고문이 5000자나 되는 장문이라 암호 해독이 늦었고 보안 인가를 받은 타자기를 다룰 인원이 없어서 보안인가가 있는 고위 관료[25]가 직접 독수리 타법으로 방금 해독한 선전포고문을 느리게 타자했기 때문이다. 원래 타자기를 다루는 사람이 외국인이었는데, 기밀문서란 이유로 관내의 모든 외국인들을 다 내보낸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 거기에 가장 중요한 일본군이 전쟁을 선포한다는 내용은 선언문 가장 마지막에 써 넣어 버려서 일본 대사관 직원들도 해독이 끝날 시점에야 전쟁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격 당시에도 선전포고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전포고문을 보낸 암호 해독이 늦어져서 공습 뒤에 미국 측에 선전포고문이 전달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더 웃긴 건 선전포고문을 처음 받았을 당시 주미 일본 대사관은 사실상 휴업 상태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대단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일반인도 뻔히 아는 상황인데 외교관들인 대사관 직원들이라면 더욱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대사관 직원들은 비상 근무는 커녕 평시 수준의 근무조차 하지 않았다. 오쿠무라 서기관이 암호문을 해독하느라 낑낑대고 있을 시각에 대다수의 대사관 직원들은 12월 6일(대사관이 있는 워싱턴 D.C. 기준)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로 전근 가는 직원의 송별 파티를 점심부터 오후 내내 하고 있었다. 물론 파티 후 주말이라며 일찍 퇴근해 버린 것은 덤. 그래서 안 그래도 느린 선전포고문 해독 및 정리가 더 늦어버렸다.
... The Japanese Government regrets to have to notify hereby the American Government that in view of the attitude of the American Government it cannot but consider that it is impossible to reach an agreement through further negotiations.
일본 정부는 미 정부[26]에게 미국 정부의 태도로 비추어볼 때 협상을 통하여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였음을 알려야 함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December 7, 1941.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선전포고문 마지막 문장.)

거기에 선전포고문인 14 Part Message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단히 엉망진창인데다(문맥이 안 맞는다든가 이리저리 헛소리만 잔뜩 들어 있다든가…) 결정적으로 선전포고문이 성립하려면 꼭 필요한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직접적인 언급(Declare, War, State of War 등)이 단 한 단어도 없다. 앞뒤사정을 모르고 보면 엄중한 경고로밖에 볼 수 없는 문장이다. 미군 측은 일본으로부터 오는 무선을 당연히 도청하고 있었고 14 Part Message를 일본 대사관보다 먼저 해독하는 데 성공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었고 그저 단교 선언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암호를 해독한 관계자들조차도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경고밖에 내릴 수 없었다.[27] 그리고 경고가 발령된 때는 이미 진주만이 공습을 당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I must say that in all my conversations with you...during the last nine months I have never uttered one word of untruth. This is borne out absolutely by the record. In all my fifty years of public service I have never seen a document that was more crowded with infamous falsehoods and distortions on a scale so huge that I never imagined until today that any Government on this planet was capable of uttering them.
▷ 진심으로 말하건대, 지난 9개월 동안 본인은 거짓된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이는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공직 생활을 50년 동안 해 왔지만 이런 문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악질적인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나머지 지구상에 이런 문서를 낼 만한 정부가 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런 상식에서 벗어난 작태를 목격한 헐 장관은 노무라 앞에서 분노에 차서 이렇게 일갈해 버린다. 그리고 축객령을 내려 버렸다. 외교관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만 갖췄지 이건 대놓고 폭언을 한 격. 그 정도로 심각했다.
JOINT RESOLUTION
Declaring that a state of war exists between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and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and making provisions to prosecute the same.
Whereas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has committed unprovoked acts of war against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refore be it Resolved by the Senate and House of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Congress assembled, That the state of war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which has thus been thrust upon the United States is hereby formally declared; and the President is hereby authorized and directed to employ the entire naval and military forces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resources of the Government to carry on war against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and, to bring the conflict to a successful termination, all the resources of the country are hereby pledged by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양원 합동 결의
일본 제국 정부와 미국 국민 사이에 전쟁 상태가 존재한다고 선언하고, 같은 혐의로 기소할 수 있는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반면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와 국민들을 상대로 이유 없는 전쟁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따라서 상원과 하원이 의회에서 결의한 바와 같이, 미국 정부와 일본 제국 정부 사이의 전쟁 상태는 여기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대통령은 여기에 의해서 고용을 허가받고 지시됩니다. 그는 미국의 모든 해군과 군사력 그리고 일> 본 제국 정부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할 정부의 자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충돌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하여, 국가의 모든 자원은 미국 의회에서 서약합니다.
- 미국 하원에서 발의되어 하원과 상원을 통과한 선전포고문.

반대로 미국 측은 일본부터 시작해서 추축국의 각 국가에게 차례차례로 선전 포고를 하고, 선전포고 권한이 있는 의회는 하원과 상원을 소집하여 선전포고문을 통과시켰다. 그 후 FDR이 서명을 완료하고 주일 미국대사관을 경유하여 주일 미국 공사[28]를 통해 일본 히로히토 앞으로 직접 보내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의회가 대통령에게 제출한 전문을 읽어 보면 필요 없는 헛소리는 하나도 없이 짧고 단도직입적임을 볼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미국일본제국은 종전 때까지 서로의 외교공관을 유지했다.[29]

일본은 진주만 이전에도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선전포고 없는 선공 전례가 많아 본건에서도 고의성을 의심할 만하다. 사실 위의 전달 지체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선전포고문이랍시고 써놓았지만 전쟁을 개시한다는 직접적인 문구가 없는 등 국제법상 선전포고문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설령 시간에 맞추었다고 해도 선전포고로 보기가 어렵다.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일본의 언급을 미국인들이 초월 해석해서 '이 정도면 개전 선포다'라고 인식해야 했을까?

4. 불타오르는 진주만

12월 7일 새벽 일본 연합함대는 하와이에서 북서쪽 370km 해상에 도착하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공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이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정보를 받았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태평양 함대에 항공모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가 소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크타운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깔짝대는 유보트 조지러 대서양에 가 있었고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으며 렉싱턴은 미드웨이 섬에 전투기 배달하러 간 상황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전투기 배달하고 전날인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열대폭풍 때문에 우회하느라 입항이 하루 늦어졌다.

나구모 제독은 미국이 공습을 눈치 채고 항공모함을 진주만이 아닌 다른 곳에 배치한 것 아니냐는 걱정을 했지만 미국 항공모함의 정보를 확인한 후에 움직일 정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차 공격대가 이륙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 후 2차 공격대가 준비를 마치고 이륙하였다.

사실 당시 미군 태평양 함대는 일본군의 이상징후를 두 차례 감지했으나 이것을 진주만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 첫번째 징후는 일본군 잠수함의 출연이었다. 공습직전 일본군은 갑표적을 파견하여 항공대의 공습작전에 호응하여 어뢰 몇 발 쏘고 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척은 좌초했고 최소 2척이 공습이 시작되기 전 진주만에 접근하다가 초계(哨戒) 중이던 구축함 위든과 소해정 콘돌에 걸려서 꼬르륵. 하지만 사령부에서 그 보고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판단하는 바람에 1차 기회를 날려먹었다. 당시 보고를 들은 사령관의 명령은 "그 풋내기 함장한테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다음에 다시 보고하게." 였다고.

    당시엔 어느 나라건 자국 해군 기지에 접근하는 미확인 잠수함은 무경고 공격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외국 영해 내에서의 잠수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 진짜 공격을 받았어도 일본은 할 말이 없었다.[30] 여기에 전장에 대한 예측이 안 되어있을 뿐 개전 자체는 머지 않았음은 확실했으므로 일본 잠수함의 접근을 발견했다 해도 그것이 진주만을 목표로 한 대규모 기습에 대한 경고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 두 번째 징후는 당시 진주만에 갓 설치한 육군의 방공용 레이더였다. 당시 전탐병들은 무수히 많은 점이 북서쪽에서 다가오는 장면이 포착된 것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보고를 하였지만 때마침 미 본토에서 B-17 폭격기 편대가 오고 있었으므로[31] 그들이 예정보다 빨리 날아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는 무시되었다. 이때 남은 명대사가 통제실 당직 장교의 "별거 아냐, 신경 꺼(Well, Don't worry)." 얼핏 보면 미국이 안이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당시의 담당자의 해당 상황에선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게 합당하다는 결론이 나와서 후일에도 문책을 받지는 않았다. [32]이런 결론이 나온 이유는 진주만 공습이 그만큼 의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12월 7일 오전 6시 00분. 각 항모의 해군비행사들은 머리에 하얀색 '하치마키' 를 질끈 동여매고 하나 둘 출격하기 시작하였다. 약 15분간 제 1파 공중공격대 183대가 이륙하였고, 공격 대형을 갖춘 후 오아후 섬으로 향했다.

최선두에는 비행총대장인 후치다 미쓰오 중좌의 빨간 바탕에 3개의 황색 줄이 그려져있는 비행기가 있었고, 뒤이어 그가 직접 이끄는 수평폭격대 49대가 위치하였다. 우측 500미터 떨어져 고도 200미터 아래로 무라타 소좌가 이끄는 뇌격대 40대, 좌측 500미터 떨어져 고도 200미터 위로는 다카하시 카쿠이치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51대, 그리고 이타야 소좌가 이끄는 제공대 43대의 제로센이 공격대의 상공을 경비 엄호하였다.

당시 일본기에는 레이더가 없었고, 총대장기에만 미국에서 직수입한 '크루시(Kruesi)' 라는 라디오 방향 탐지기 1대가 있었다. 후치다가 라디오 스위치를 키니 호놀룰루 방송국의 경쾌한 재즈가 크고 명료하게 들려왔다. 안테나를 이용한 방향 측정으로 무선 항법을 하였다. 이어진 호놀룰루 방송은 아침 일기예보를 하였다. "오아후 섬 날씨는 개었다 흐렸다 하겠으며, 산에는 구름이 끼겠지만 구름 높이는 3,500피트, 시야는 양호하며 북풍 10노트" 라는 중요한 항공 기상 정보를 제공하였다.
영화 진주만의 진주만 공습 씬

오전 7시 30분. 비행대는 한 대의 낙오도 없이 순조롭게 예정된 계획에 따라 비행 방향을 크게 우회하여 섬의 남서쪽에서 진주만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비행총대장 후치다가 전개 명령으로 1발의 신호탄을 쏘자 강하폭격대는 고도를 높여 급강하 준비를 하고, 뇌격대는 고도를 낮춰 어뢰발사 준비를 하였다. 또 수평폭격대는 맞바람이 좋기에 바람 아래쪽에 위치하였다. 단, 제로센 제공대는 속도를 올려 앞으로 나가 제공작전을 하여야 하나 신호를 보지 못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후치다가 다시 한 번 1발의 신호탄을 쏘자 그제야 제공대는 앞으로 나갔다.[33]

오전 7시 49분. 후치다 비행총대장은 전군 돌격을 명령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였다. 도쿄시간으로는 12월 8일 오전 3시 19분이였다.
제로센 제공대가 먼저 나아갔지만 공중전의 기미는 없었다. 지상의 대공포화의 움직임도 없었다. 기습 성공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도라 도라 도라}}}

오전 7시 53분 비행총대장의 명령으로 후방 전신석에 앉은 통신사 미즈기 토쿠신이치 1등 비행병조장은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그 유명한 암호명 "도라 도라 도라"를 사령부에 발송하였다.[34] 해당 암호는 호랑이란 뜻도 있지만 사실은 돌격을 뜻하는 '토츠게키(突撃)' 와 뇌격을 뜻하는 '라이게키(雷撃)' 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항공기에 탑재된 소형 전신기의 출력으로는 3000해리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모함인 항모 아카기는 물론, 도쿄 대본영에서도 직접 수신했다고 한다.

7시 55분. 다카하시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51대는 두 팀으로 나눠 있었다. 대장이 직접 이끄는 쇼카쿠 대는 히컴과 포드 섬 양 기지를 공격하고, 사카모토 아키라 대위가 이끄는 즈이카쿠 대는 휠러 기지를 공격하였다.

7시 57분. 무라타 소좌가 이끄는 뇌격대는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에 명중탄을 적중시킨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어뢰 공격을 하였다.

8시 정각. 비행총대장이 이끄는 수평폭격대 50대는 10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에는 9대가 각 1발씩 발사하면 1발쯤은 맞추겠지. 하는 생각으로 9대가 1개 팀이였지만, 명중률의 상승으로 5대면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1개 중대 5대 편제였다. 비행총대장이 소속된 제1중대가 포드 섬 동측 계류장 가장 북쪽에 있던 전함 네바다에 명중탄을 냈다. 그 순간 제2중대가 북쪽에서 2번째 위치한 전함 애리조나의 2번 포탑에 명중탄을 냈다. 화약고가 위치한 자리라 대폭발이 일어났다. 다른 편대에 진동이 올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이어 3번째 위치한 웨스트 버지니아와 테네시도 타올랐고, 4번째 위치한 오클라호마와 메릴랜드와 5번째 캘리포니아도 타오르며, 포드섬 동측 계류장 북쪽의 8대 중 무려 7대에 명중탄이 났다. 포드섬 남쪽에서는 펜실베니아 함만 타격을 입었다.

8시 30분. 이타야 소좌의 제공대는 적 전투기가 나타나지 않아 할 일이 없었다. 이에 6개 반으로 나눠 각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오아후의 북쪽에 있는 할레이와 육군 비행장에서 육군 제 47전투비행대대 조지 웰치 소위와 케네스 테일러 소위가 탑승한 P-40 전투기가 이륙하여 에바 해병대 비행장 부근에서 일본기와 조우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2대를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1기를 격추했다. 휠러 비행장에 내려 무장과 연료를 채우고 다시 이륙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2기 추가로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추가로 1기를 격추했다. 웰치 소위와 테일러 소위보다 먼저 해리 브라운 소위가 P-36을 타고 이륙하여 휠러 비행장에서 이륙한 제46전투비행대대의 말콤 무어 소위와 짝을 이루어 일본기를 요격, 브라운 소위는 이 과정에서 테일러 소위보다 먼저 오아후 섬 북쪽에서 일본기 1기를 격추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조종사로서 최초의 격추를 기록했다.

8시 40분.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 2파 공중공격대 167대가 도착하였다.

휠러 비행장에서 8시 50분에 제 46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36 전투기 4기가 이륙했다. 이들은 카네오헤 기지 상공에서 제로기 8기와 교전하여 제로기 2기를 격추하고 전투기 1기가 격추되었다. 휠러 비행장에서는 이날 약 25회에 걸쳐 전투기들을 출격시켰다.

8시 54분. 제 2파에서 에구사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78대가 공격 개시하였다. 진주만은 이미 불바다여서 검은 연기가 자욱해 목표물 확인이 어려울 지경이였다. 이때 1차 공격에서 살아남은 일부 미 군함이 대공포들을 발포하였는데 강하폭격대는 이 포격 불빛을 보고 공격하였다.

벨로우즈 육군 항공기지에 일본기가 공격해 왔을 때 제 44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 전투기 12대 중 3대만 발진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고 조지 화이트맨 소위는 이륙하다가 격추되어 전사, 한스 크리스티안 소위는 전투기 탑승 중 기총 소사를 받아 전사, 새뮤얼 비숍 소위도 이륙 직후 공격을 받아 격추되어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해안까지 헤엄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2파 대장 시마자키 소좌가 직접 이끄는 수평폭격대 54대는 히컴 해군 비행장 격납고, 일부는 포드 섬과 카네오헤 격납고를 공격하였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지만 20대가 탄환에 맞아 반복 공격시에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2파 신도 사부로우 대위의 제공대 35대는 1파의 제공대와 마찬가지로 할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1, 2파 전투가 모두 끝나고도 비행총대장 후치다의 기체는 계속하여 진주만 상공을 돌고 있었다. 전과 확인 때문이였다. 전과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공격해오는 미군기는 단 1기도 볼 수 없었다. 귀환한 후치다는 일단 전함 4척 격침은 확실하며 나머지 4척도 대파하였다고 보고하였다.
  •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 및 묘사들
"진주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군요. 그래서 후방사수한테 말했죠. "육군 새끼들은 대체 일요일 아침부터 뭔 짓을 하는 거야?"
{{{#!wiki style="text-align:right"
2차대전 다큐멘터리 『배틀360』 중에서.}}}
"우린 이렇게 말했지. "해군 새끼들 훈련 한 번 요란하게 한다"고."
{{{#!wiki style="text-align:right"
참전 용사의 증언 中.}}}
갑판에 있던 난 모든 게 불타는 것을 보고 소령님께 배가 불탄다고 보고했다. 소령님은 배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난 마지막으로 배를 떠났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고, 온몸이 불이 붙은 승조원들이 후갑판으로 달려가 뛰어내렸다. 그 결과 모두 죽거나 크게 다쳤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애리조나호의 수병 '얼 나이팅게일'.}}}

당시 미국 수병들은 일본 전투기가 진입하고 있음에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는 상당 수 수병들이 일본 항공기의 기습을 하와이 주둔 육군 항공대가 훈련 비행을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 폭격이 시작됐을 때도 어떤 수병은 감동하며 "와!! 훈련 한 번 존내 맛깔나게 하네!!" 라고 감탄하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폭탄이 떨어지자 그제야 적의 공격을 인지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것은 주둔중이던 미국 육군에게도 처음에는 해군이 훈련을 하는 것으로 오인 받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ttack_on_Pearl_Harbor_Japanese_planes_view.jpg
파일:pearlmap.jpg
위 : 일본 해군기가 전함열 공격 성공을 기록한 사진. 어뢰에 맞은 배는 웨스트 버지니아이다.
아래 : 공습 당시 미 해군 태평양 함대의 함선 위치

포드 섬 항공기지가 제일 먼저 폭탄에 얻어맞았으며 곧 포드 섬 인근에 정박 중인 전함—이것이 일명 전함 열(Battleship's row)—들이 폭탄과 어뢰를 얻어맞았다. 폭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뢰의 경우 평상시의 군항(軍港)에는 주요 함선 주변에 어뢰 방지용 그물이 설치된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진주만의 군함에는 어뢰 그물이 없었다. 어차피 진주만은 수심이 얕아서 어뢰를 쏴도 어뢰가 자세를 잡기 전에 진흙에 처박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달지 않았지만 일본은 이걸 알고 어뢰에 목재 부품을 장착하여 어뢰가 중간에 흙에 처박히는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 해군 항공대 참모 램지 중령은 방송실로 뛰어 들어가 총원전투배치(General quarters) 신호와 함께…
파일:external/worldwar2database.com/wwii1408.jpg
"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drill." / "진주만이 공습당했다, 이건 훈련이 아니다."

이라는 전문을 보내게 했다.

훗날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위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내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까지 전문이 그대로 전달된다.

제일 먼저 5발의 어뢰[35]를 얻어맞은 BB-37 USS 오클라호마는 20분 만에 전복되어 승무원 1,354명중 전사자 429명 부상자 32명이 발생했으며 비슷한 시각 BB-48 USS 웨스트 버지니아도 2발의 폭탄과 7발의 어뢰를 맞아[36] 필사의 데미지컨트롤[37]로 전복은 면했지만 침수가 심하여 착저(着底) 중이었다. 다만 공격 초기에 화재사고가 발생한걸로 오인하고 당직사관이 소화 및 인명 구조 요원 배치 지시를 내린 덕분에 공격 초기에 많은 인원이 갑판위로 올라와 오클라호마와 비슷한 공격을 받고도 인명피해는 오클라호마보다 훨씬 작았다. 승무원 1,541명중 함장 머빈 베닝언 대령을 포함해 전사자 105명, 부상자 52명이 발생했다.

그나마 BB-38 USS 펜실베니아가 1발의 폭탄 명중, BB-43 USS 테네시[38], BB-46 USS 메릴랜드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메릴랜드의 경우 공격당한 미전함들 중에서 가장 먼저 복귀하였다. 테네시는 1,666명의 승무원중 98명이 전사하고 6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메릴랜드는 승무원 1,604명중 4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BB-36 USS 네바다의 경우 어뢰 한 발을 맞았지만 신속한 조치로 피해 확산을 막았으며 필사적으로 응전하면서 어떻게든 진주만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함에 승함하고 있던 태평양함대 기뢰전단장인 윌리엄 펄롱 소장은 네바다가 탈출하다가 수로상에 있을지도 모를 일본군의 기뢰나 항공기의 공격에 격침될 경우 오히려 진주만으로 드나드는 진입로를 봉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좌초를 지시했다. 이에 네바다는 펄롱 제독의 지시에 따라 폭탄을 얻어맞으며 자력으로 좌초했다가 바닥이 단단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2척의 예인선이 다가가 네바다를 끌어내어 바닥이 단단한 곳에 재좌초시켰다. 어쨌거나 항구가 봉쇄당하는 상황은 면했다. 실제로 일본군은 항구의 봉쇄를 노리고 진주만을 탈출하려는 네바다에게 급강하폭격기를 집중시켰으므로 당시 펄롱 제독의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네바다는 승무원 1,354명중 60명이 전사하고 109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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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네바다와 예인함 호가

더불어 진주만 공습의 상징이 되어버린 BB-39 USS 애리조나도 카가와 히류의 항공대로부터 4발의 폭탄을 맞았다. 마지막 철갑탄[39]이 1번 포탑 근처를 뚫고 들어와서 2번 포탑의 탄약고 바로 옆에서 폭발했고, 7초 후에 탄약고가 유폭한다.

그 충격으로 해수면 아래의 함수부터 함교 앞 선저까지의 공간이 찢겨져 나가 포탑들이 있는 갑판과 분리되었고, 그 결과 배가 대각선 가로로 두동강이 났다. 당연히 함수부의 모든 설비가 파괴되었고, 부력이 지지해주던 힘이 사라진 전방 포탑 2기와 전방 마스트도 자신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앞으로 기울어져버린다. 그리고 폭발의 충격파로 함교의 장비와 시설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그 결과 용골이 절단되고 전투 갑판의 수평이 깨지게 되었고, 전함 운용에 필요한 장비마저 대부분 손상된 애리조나는 순식간에 폐함이 되었다.
애리조나 유폭 순간, 5분 34초부터. AH-5 USS 솔러스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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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켐벨 키드 소장

함교 바로 앞에 위치한 2번 포탑 탄약고의 유폭은 당연히 그 승조원들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애리조나에 승선했던 아이작 켐벨 키드 제독[40]과 함장인 프랭클린 반 바르켄버그 대령을 비롯해 승무원 1,511명중 1,177명이 전사했고, USS 애리조나는 21세기 현재까지의 미 해군 역사를 통틀어서 1척의 배로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하게 된다. 함교의 화재가 진압되고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러간 대원들이 발견한건 하정복 단추와 해사임관반지가 전부였다고 한다. 이로인해 폭발력이 엄청났음을 알수 있다.

애리조나 바로 옆에는 군수지원함(공작함) 베스탈이 있었는데 함교에 있던 함장 캐신 영 대령은 이 폭발에 바다로 날아갔다가 자력으로 헤엄쳐 돌아와 다른 배들을 구조했다.

전함 이외에도 순양함, 구축함, 기타 함선 등 여러 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주요 항공기지들도 공습을 당해서 많은 비행기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상태가 좀 멀쩡했던 몇몇 지상 기지에서 항공기를 날려 보내기는 했지만 미군 전투기들은 수적 열세로 인해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격추당했으며 이미 정신줄을 놔버린 대공포들이 마구잡이로 쏴대면서 오히려 팀킬도 벌어졌다. 게다가 다른 곳은 공격을 받고 있는데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비행장은 늦게야 상황을 알아차리는 등 이래저래 막장행보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2명의 육군 소위가 조종하는 P-40 전투기 두 대가 일본 해군 폭격기 몇 대를 격추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육상의 육해군 및 민간 시설, 차량 등도 공격받았다. 사상자 명단에는 민간인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도 사령부 건물에 날아온 딱 한 발의 기관총탄에 죽을 뻔 했다. 7.7mm 총탄 한 발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는데 그게 킴멜 제독의 가슴을 툭 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말 그대로 툭 하는, 지나가던 사람과 살짝 부딪힌 정도의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후임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과 대화하다가 이때를 회상하면서 "차라리 그 때 총탄 맞고 죽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함대 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금쪽같은 전력을 날려먹은 책임감에서 나온 말로 추정된다.

1차 공격대가 철수하고 약 30분만에 2차 공격대가 진주만 상공에 돌입하였다. 원래 항공모함을 처리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일본군으로서는 미 항모들이 죄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던 관계로 1차 공격대가 처리하지 못한 잔여 함선과 비행장을 공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무렵 미군은 이미 한 차례 공격을 받았으므로 운용 가능한 얼마 안 되는 전투기도 이륙시키고 대공포도 쏴대면서 맹렬히 대응하였고 그 결과 일본군은 예정된 목표물들은 공격하지 못하고 공격 가능한 임의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한편, 당시 서쪽에서 진주만으로 오던 USS 엔터프라이즈는 남쪽을 수색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일본 항공기가 남서쪽에서 접근했기 때문이었지만 정작 일본 해군은 북서쪽에 있었던 관계로 실패.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기들의 엄청난 항속(航續)능력 때문이었다. A6M의 경우 7시간의 비행이 가능했을 정도였는데 이 장거리 비행능력을 이용해 일본군은 전투기들이 일부러 빙 둘러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방법으로 항모의 위치를 숨겼다. 이러한 장거리 비행능력은 전쟁 후기까지 일본기들이 가진 유일한 이점이었지만 대신 저속으로 장시간 비행해야만 하므로 조종사가 피로로 인해 전투력 자체가 떨어지게 하는 문제점이기도 했다.[41] 또한 이 수색에 동원된 함재기 중 일부는 엔터프라이즈에 착함하지 않고 진주만 비행장으로 귀환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공포 부대의 오인사격으로 격추당하는 피해도 있었다. 물론 사전에 대공포 부대에게 통지했지만, 공습으로 인해 대공포 인원들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

한편 대공포 인원 중 도리스 밀러(Doris Miller) 수병은 2대의 일본군 항공기를 격추한 공으로 해군십자장 훈장을 받았다. 본래 도리스 수병은 대공포반이 아니라 전함 웨스트버지니아 호의 조리병이었다. 도리스는 흑인인데, 당시엔 인종차별이 극심해서 흑인은 조리병과 같은 비전투 병과에만 입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전 중 대공포 사수가 전사하자 자발적으로 나서서 대공포 사격을 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서 훈장을 받은 것이다. 이는 당시 흑인 수병 중 최초의 훈장 수여자이다. 다만 밀러 수병이 격추한 일본기는 없었다고 한다. 밀러 수병은 이후 타라와 전투 때 타고 있던 호위항공모함인 리스컴 베이(CVE-56)가 격침당할 때 전사했다. 2015년 오바마 정부 때 밀러 수병의 훈장을 명예 훈장으로 승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5. 진주만 공격 이후

히틀러 역시 '전쟁은 저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일단 극히 일부 독일 고위층을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 육군과 공군 장교들은 당시 10주 만에 소련을 정복할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에 준비하지 못했던 동계전투문제즉 모스크바 공방전레닌그라드 공방전이라는 매우 중요한 공방전을 위시로한 조기에 전투를 끝내기 위한 41년 동계 대공세에서 거센 소련군의 저항과 빈약한 겨울 장비로 일본이 뭘하든 거의 신경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겨우 알아차렸을때는 경악을 하면서 결국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질적으로 거의 대부분 육군을 체우고 있던 장교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군과 직접 싸워본 경험이 있는 장교들이었고 이들은 영국과 자유프랑스 망명정부가 미국을 끌여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대한 총통각하와 괴링덕분에 그들이 참전하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라는 반응. 특히 에르빈 롬멜은 영국해외 원정군의 역습을 제21기갑사단 2개의 연대로 물리친 직후 보도를 듣고 아내에게 "이제 올 것이 왔소. 동쪽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우리와 전쟁을 하게되었소. 앞날이 걱정이요"라고 편지를 보냈다. 할더 중장은 경악을 하며 일기에 하면 안될 짓을 했다고 기술했다. 일선의 독일 병사들의 반응도 당황스럽다로 대표된다. 180개의 연대를 6개의 연대가 전멸시키니까 360개의 연대가 다시 반격해오는 것에 지칠대로 지친 독일 병사들에게 대미전은 상상도 못할 악몽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최악의 케미가 되었다.[42]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대본영 육해군부 12월 8일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이 본 8일 새벽에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제국 육해군이 본 8일 새벽에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제국 해군은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하고, 싱가폴 그 외도 대폭격하였습니다.

대본영 해군부 오늘 오후 1시 발표・하나. 제국 해군은 금 8일 미명,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함. 둘, 제국 해군은 금 8일 미명, 상하이에서 영국 포함(砲艦) '페트렐'호를 격침함. 미국 포함 '웨이크'호는 동 시각 우리에게 항복함. 셋, 제국 해군은 금 8일 새벽 싱가포르를 폭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거두었음. 넷, 제국 해군은 금 8일 이른 아침 '다바오', '웨이크', '괌'에 있는 적 군사시설을 폭격함"
태평양 전쟁을 알리는 NHK라디오 방송.

한편 일본 함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것에 기뻐하고 있었으며 3차 공격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2항공전대를 이끌던 야마구치 다몬 소장과 몇몇 참모, 조종사들은 3차 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나구모 제독은 미군들이 정신 차리고 대비를 하고 있으므로 기습의 효과가 줄어들어 오히려 피해가 증가할 것이란 점과 미국 항공모함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공격 중지를 결정하였다.

모든 항모가 출항해 있다는 점으로 보건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실패가 된다. 나구모로서는 도상 연습에서 일본 함대에도 반수의 피해가 나올 거라는 결과도 있었고 야마모토 이외의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반대하는 작전을 수행했지만 운이 좋게도 함선의 피해가 없는 이 정도의 전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상술했듯이 해군 군령부에서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계속 반려하자 야마모토는 총사령관직을 사퇴하겠다며 반협박을 한 끝에 겨우 승인을 얻어냈었다. 사실 항공부대 지휘 경험이 전무한 나구모가 기습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도 그가 수뢰전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해군에서 손꼽히는 조함 전문가라는 이유였다. 요는 작전은 실패한다 해도 배는 어떻게든 살려서 끌고 오라는 생각으로 그를 임명했던 것이다.

나구모의 이런 결정은 전후에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나구모는 현재 일본에서는 전범 혹은 역적과 비슷한 위치다. 당장 일본의 태평양 전쟁 관련 서적에서 나구모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겁쟁이 혹은 새가슴 정도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당시 월등한 생산력을 가진 미국과 대결하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항모(航母)를 한 대라도 잃으면 큰 타격을 입는 데다가, 원래부터가 일본군은 강화를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는 몰라도 당시의 판단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레이테 해전과 같은 이후의 일본군의 작전을 봐도 이 판단은 나구모의 오판이 아니라 일본군이 가진 단기결전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부하들은 "좋다. 대장이 그만 하고 돌아가자고 하면 따르겠다. 그런데 돌아갈 때는 올 때 처럼 빙 돌아 가지 말고 중앙 항로를 타고 직진하자"고 건의하였다. 항공기 정찰을 통해 돌아가면서 진주만에서 보지 못한 적 항모 2척을 찾아 격멸하자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것도 기각됐다. 나구모 장관은 정찰을 경시하였다. 그냥 전력을 보존한 채로, 왔을 때 처럼 빙 돌아서 퇴각하였다.

나구모 제독의 지시에 따라 일본 함대가 신속하게 퇴각하면서 진주만 공습은 종료되었고 이 결정이 알려지자 일본 연합함대 사령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참에 태평양 함대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야마모토 제독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야 된다고 진언했지만 야마모토 제독은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는 나구모 제독의 결정이니 그게 최선일 것이란 이유로 묵살해버렸다.

기지로 복귀한 후 진주만 공격대원들은 그야말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신문에서는 대서 특필하였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직접 치하하였다. 그에비해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비교를 하자면, 진주만 공격 당일 별도로 출격한 특수 잠수정 10명 중 9명은 전사로 취급되어 2계급 특진을 받고 9군신(軍神)으로 모셔지며 장례도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나머지 1명인 공격대의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포로로 잡혔으나 일본군은 이를 기밀 취급하여, 공격대 정장 5명이 서명한 서장에서 서명을 지우고, 출격전 10명의 단체 사진에서도 삭제해 버렸다. 다만 이들이 전과가 0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중 공격대의 최대의 전과였던 애리조나 함 격침을 특수 잠수정의 전과로 돌렸다. 제3국을 통해 들어온 뉴스 사진에 애리조나 격침 사진이 들어왔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 국민이 열광하는 가운데 성대한 국장이 치려졌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2월 11일 표창장을 수여하며 이들에게 "무훈발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에 비해 공중공격대 55명에 대한 2계급 특진 소식은 없었다.(일본군은 전사자에 한하여만 특진이 가능하였다.) 최대의 전과인 애리조나 격침을 빼았기는 수모를 당하였다. 잠수정 공격대의 전과는 전혀 없었고, 공중 공격대는 1개 함대 자체를 괴멸시킨 대전과였음을 생각해 봤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차별이였다. 여기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표창장이 한참이나 지난 4월 15일에 나왔고, 그것도 잠수정 공격대 보다 한단계 낮은 "무훈현저"였다.

알고 보니 연합함대 참모였던 미와 요시타케 대좌가 "무훈발군"으로 상신 하였으나, 야마모토는 "나구모 장관이 더 적극적으로 연속 공격을 가했더라면 당연히 '무훈발군'이었는데, 한 번에 끝냈기 때문에 '현저'로 하라"고 한 것이다. 그외에도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중장이 자신의 일지에 "도둑이 작은 성공에 만족하여 달아나는 것 같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불과 30대를 손상한 수준에서는 전과의 확대는 매우 중요함"이라고 기록하는등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나구모가 한번의 공격으로 끝낸 것에 대해 매우 강한 유감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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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미 해군 장병들이 불타는 BB-48 USS 웨스트 버지니아 함에 접근하고 있다. 완파된 애리조나의 잔해

5.1. 무사했던 전함 외 시설물들과 숙련된 승조원들

일본 해군은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전함 전력을 굴리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정작 뻔히 보이는 데 있는 태평양 함대의 유류저장시설은 멀쩡했다. 사실 당시 이 시설에는 고작 정박시 두 달 치 분량의 연료만 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지만 4,500,000 갤런의 연료가 폭발했다면 인명피해는 고사하고 화재 진화가 불가능했을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주 적은 양의 연료가 있었더라도 이거 날리면 그 순간 잔존한 태평양 함대 군함들은 연료가 없어서 항구에 주저앉게 된다. 이럴 경우 미국 군함들은 공격은 고사하고 다시 공습이 날아와도 탈출도 못하고 항구에서 그대로 고철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연료도 미국 본토에서 느린 수송선으로 호위도 별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험하게 운송해야 한다. 거기다 유류저장시설이 살아 있으면 나중에라도 연료를 채워서 보급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완전히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남겨뒀던 셈.

여기엔 여러 요인이 겹쳤는데 우선 진주만 공습을 입안하였던 야마모토 대장과 겐다 중좌, 오니시 소장은 목표에 적의 함대의 균형을 무너트리기 위해 순양함들을 공격해야 한다는 등 약간의 견해차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목표를 진주만의 미 해군 함정과 지상발진 항공기로 잡았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 애당초 진주만의 중유저장소와 공창, 건선거와 잠수함 기지등은 목표가 아니였다. 이는 태평양함대가 남방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였다.

그 다음으로 작용한건 진주만을 살펴보고 온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이였다. 스즈키 소좌는 성실하게 미군의 전력을 파악하긴 했으나 오아후섬의 항공세력을 과다평가하였는데 그의 판단에 따르면 B-17 40대를 포함한 폭격기 140대,최신형이던 P-38을 포함한 전투기 270대,기타 45대로 판단하였는데 실제로 사용가능한 항공기는 143대에 불과하였고 신형인 P-38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런 정보부의 오아후섬의 항공세력에 대한 과다평가는 나구모 중장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기습으로 큰 피해를 주었음에도 아직 미군의 지상 항공세력이 충분히 반격을 가할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3차 공격을 감행한다는건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자세한 내용이 있다.

게다가 해군 공창과 잠수함 기지[43]도 아주 멀쩡했다. 사실 일부 드라이 독에 들어가 있던 배들은 폭격을 받았으나 독 자체는 무사했다. 게다가 잠수함 기지는 처음부터 폭격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서 공격 받아도 별 타격이 없었을 거라고 한다. 이 점도 치명적이었는데 격침된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제외한 모든 전함들은 인양되어 수리를 마치고 다시 전열에 복귀했기 때문에 진주만에서 침몰당한 전함은 5척이 아니라 사실상 2척이 된다.[44][45]격침된 전함인 애리조나는 완전히 아작나서 21세기인 지금까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고 오클라호마는 전복되면서 상부 구조물이 완전히 망가져서 인양된 후 해체를 위해 본토로 이송되다가 풍랑에 침몰되었다. 그리고 산호해 해전에서 중파당한 미 항모 요크타운이 신속하게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살아남은 드라이 독 덕분. 한편 이때 살아남은 미 해군의 잠수함들은 이후 사방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요크타운과 잠수함 함대가 미드웨이 해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등의 전장에서 일본 해군에 엄청난 손실을 입힌 걸 생각해보면….

그렇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70기가 넘는 함재기들의 공습에도 불과하고 미드웨이 비행장이 마비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해군 공창 같은 대규모 기반시설을 폭장량이 낮은 함재기들의 1회성 공습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46] 진주만의 대규모 기반시설들을 파괴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폭장량이 보장되는 중/대형 폭격기들로 지속적인 공습이 가해져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주만의 유류저장고는 단순히 커다란 하나의 시설이 아닌 54개의 탱크로 된 시설이며 중유는 끓는점이 높은 관계로 불이 붙기 어려워서 연쇄적인 유폭을 기대할 수가 없으며 미군의 대공포화와 남아있는 전투기들의 요격을 감안하면 충분한 타격을 주기란 무척 힘들다.

또한 3차 공격을 감행하고 나면 겨울인지라 해가 빨리 지는 관계로 야간 착함을 해야 하는데 필리핀해 해전에서 미군이 등화관제까지 무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야간 착함 과정에서 80기가 넘는 함재기 손실이 난 것을 보면 3차 공격을 감행할 경우 일본군의 함재기 손실이 엄청날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진주만 공습때 2차 공격 후 공격대가 귀환한 시간이 12시 15 분 가량인데, 그날 하와이의 일몰은 5시 12 분이였다.

거기에 비록 3,000여명의 희생자를 내긴 했지만 숙련된 승조원들이 다수 살아남은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만약 출항하여 해전을 벌였다면 대부분의 함정이 침몰하고 숙련된 승조원 2만여 명을 잃을거라 추산하였는데 정박 중 그것도 일요일이라 다수의 승조원들이 상륙(외출, 외박)을 나가고 영외자들의 경우 당직자 빼고 육상 거주지에서 쉬고 있는 상태에서 공습을 받았기에 대부분의 승조원이 살아남을수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급팽창하는 미 해군의 근간이 되었는데 2만명에 달하는 숙련된 승조원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면 미 해군의 어려움이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분명히 전술적, '단기' 전략적으로는 매우 완벽했다. 괜히 완벽한 기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태평양 함대의 전함을 불구로 만든 것은 좋았으나 운이 나쁘게도 항공모함이 거기에 없었는데 당시엔 몰랐으나 나중엔 이게 거대한 실책으로 돌아왔다. 더불어 미국에게 반격의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이는 바로 몇달 후에 둘리틀 특공대로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를 대놓고 폭격당하면서 단 한 대의 폭격기도 격추를 못 시키는 치욕을 당할 뿐 아니라, 나중에 미드웨이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47]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초래함으로써 '장기' 전략적으로는 대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48]

5.2. 일본군의 하와이 상륙?

한편 진주만에서는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미군들이 잔뜩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활동가능한 군함들을 바다로 내보내서 일본함대에 대한 수색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공습에 대한 노이로제가 생겨서 비행기만 지나가면 피아식별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대공사격부터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아군의 대공포에 파손되거나 격추된 전투기도 여럿 있었다.

미국이 조금만 생각했다면, 일본군이 제정신이라면 그렇게 철벽같이 요새화된 섬에 상륙할 리가 없다는 걸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인데, 결과는 상륙이 아니라 공습이었다. 당시 기습을 당한 미국의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하와이 자체의 방어력도 어마무시 그 자체였다. 미국은 45년 초부터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드넖은 본토에 단 1개의 전투사단도 남겨두지 않고 전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으로 파견하고 본토 방어는 주방위군에게 맡겼다. 그러나 진주만에는 종전 그 순간까지 1개 육군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진주만 공습 당시에는 2개 육군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병대 빼고도 말이다. 그리고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 섬은 미국이 20세기 초부터 공을 들여 요새화시킨 세계 최강의 요새였다. 일본군이 하와이를 상륙하는 것보다 차라리 미 본토에 상륙하는 게 더 현실성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참조

6. 뒷이야기

6.1. 최선의 전략과 오판

기습을 통해 빈사상태로 만들어버린 뒤 유리한 조건하 강화를 맺겠다는 전략이 최선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공격 대상이 미국이라는 점인데, 미국의 경제력은 진주만 공습의 손실은 전혀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쩔어줘서 전략적으로 크게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과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뒤통수를 친 일본의 행동이 생각보다 큰 공분을 사 전면전을 강요당하는 것 외에 협상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일종의 균형추 역할을 했던 소련이다. 41년 6월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근방까지 밀렸으나, 거대한 영토에서 나오는 잠재력과 연합국측 가담은 소련의 국력이 점차 나치 독일을 능가하게 하였다. 결국 독일이 패망, 일본이 기대한 추축국의 정치적 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즉, 최선의 전략이었는지 모르나 상대를 잘못봤고 상황도 최악으로 흘러간 것이다.

셋째로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태평양의 지배권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대서양의 경우, 사실상 압도적인 주역이었던 영국이 독일+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집중하게 되면서[49], 또한 유럽 전체가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소모되면서 결과적으로 그 바다의 지배권은 미국이 가지게 된다.

이외에 결정적이라 볼 수는 없으나 진주만 공습시 전술적 오판 중 하나로 언급된 항공모함과 유류창고를 파괴하지 못했다는 점,[50] 그로 인해 공습 4개월 뒤 곧장 수도인 도쿄를 비롯 주요도시에 보복공습을 허용한 점을 들 수 있다.[51]

6.2. 미국의 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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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격노한 미 정부가 국력의 10%를 태평양 전선에 썼다"고 알려져 있고 일본보다 독일을 때려잡는데 더 많은 국력을 쏟아부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소련이라는 막강한 동맹의 존재에도 독일을 때려잡는 데 투입된 물자와 병력, 피해도 훨씬 많았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국력 10%설은 거짓이다. 당시 미 해군이 실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루고 나서 당시 일본군이 만만히 볼 세력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는데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자 미 육군 쪽에서 "미드웨이에서 이겼으니까 이제 유럽 쪽에 집중해도 되지?"식의 뉘앙스로 보급 우선권을 주장했다. 이에 1942년 12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유럽으로 보내지만 말고 우리한테도 보내주세요, 징징"거리는 근거로 댔던 게 연합군의 전체 전쟁자산중 15%정도만 태평양 방면에 투입된다는 것인데 이것도 정확한 산출이 아닌 왜곡이 살짝 들어간 수치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당시 미 육군은 지중해 방면에 집중하려 했던 처칠에게 반감을 가진 상태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싫은 말을 하지 않아서 자국의 대통령을 확실히 설득 할 수 없었던 미 육군은 이 보고서를 지지했다.[52] 결국 보급권을 가지고 갈등하던 미 육해군이 처칠이라는 공공의 적(?)앞에선 한데 힘을 모은셈. 그런데 그것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10%로 변질되어서 사실인 양 통용되고 있다. 다만 전쟁이 끝날때까지 미국이 투입한 군사력이 전체의 3할을 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왜곡이나 진실이나 전력을 다하지 않은 미국에게 일본이 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 해군의 주력함들은 거의 태평양쪽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전쟁 발발 이후 해군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전력을 태평양으로 차출하기도 했으니[53] 적어도 해군의 경우에는 오히려 태평양이 주 전장이라고 봐야한다. 대서양에는 크릭스마리네가 잠수함을 제외하면 별볼일 없는 상대인데다가 동맹인 영국 해군이 크릭스마리네를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 :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what's going on here?)
미국 : 저랑 상관 없는 일이예요. (it's not my problem.)

일본이 투다닥 달려와 깽판을 치고 달아난다.

미국 : 하, 이제 저랑 상관 있어졌네요. (ha...now, it's my problem.)
10초로 요약한 미국의 선전포고.[54]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 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의 첫 부분.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항목 참조. 참고로 이 부분은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 인트로 영상에도 나온다. 유튜브 자동재생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 the Japanese language will be spoken only in hell."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진주만 공습 전날에 진주만에 입항할 예정이었다가 열대폭풍으로 하루가 늦어져서 공습이 끝나고 나서 도착한 후 진주만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윌리엄 홀시 제독의 말.[55]

우리는 일본군을 다시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주만 공습 직후 니미츠 제독의 말.

공습 전까지는 무의미한 전쟁은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지지를 받았다. 루즈벨트를 중심으로 히틀러가 얼마나 또라이인지 아는 사람들은 추축국과 싸워야 한다는 의견을 폈지만, 대다수의 미국 국민들이 20년전 유럽에서 지옥그 지옥불에 딸려온 연옥을 겪어봤기에 고립주의자의 의견에 더 동조하고 있었고, 미국 전통의 외교정책인 먼로 독트린에 따라 "우리한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괜히 끼어들 필요없다"라는 주장이 강했다. 그러나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에 선빵을 날리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은 고립주의자들이 말하던 "무의미한 전쟁"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잠자던 거인을 '잠에서 깨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빡돌게 만든 셈. 아닌게 아니라 공화당의 대표적 고립주의 정치인들은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백악관으로 연락을 넣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일종의 충성맹세와 함께 전쟁 수행에 대한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고립주의파의 대두였던 한 공화당 의원은, 기자들 앞에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일본 놈들을 철저하게 때려 눕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정계의 고립주의 계열은 사실상 소멸, 와해되었다.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며[56]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분노한 미국 국민들은 계층을 총망라해서 앞 다투어 입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자진입대율은 90%에 이르렀는데 특히 공수부대나 해병대 같은 일부 월급도 높은 특수전투병과는 지원율이 100%을 넘기며 경쟁적으로 입대했다.[57] 심지어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한 사건까지 있었다. 자원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배우나 운동선수 같은 유명인사들도 많았는데, 조 디마지오처럼 위문공연을 다녔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폭격기 승무원이였던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58]나 해군 대공포 사수 밥 펠러처럼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중에서도 몇 명이서 항해국[59]장이던 니미츠 제독을 찾아와 해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은 "해군을 위한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 달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다만 일부 국회의원들은 진짜 참전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60]거기에 물량공세가 더해졌다.
  • 유일한 참전 반대표는 공화당의 지넷 P. 랜킨(Jeannette P. Rankin)이 던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국회의원이자 반전주의자였던 랜킨은 이전임기인 1917년때도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하나였다. 1940년에도 이전임기처럼 랜킨은 "전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는 말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때는 국민적인 분노가 1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컸던 상황이라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서 신변보호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제도"라며 맞섰고 한국 전쟁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이런 의미 있는 반대도 기려져 사후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에 랜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61]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니미츠 대장으로 교체되어 일본 해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전함들이 죄다 상실된 까닭에 항공모함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너무 심하게 털려버려 쓸 수 있는 전력이 빈약한데다 항공모함조차 상실하게 될까봐 휘하 제독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니미츠 제독은 이들을 무마하고 작전을 입안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며, 일본군의 대응도 거의 없어서 전과다운 전과는 거의 거두지 못했고 일본의 남방작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아무 짓도 못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없지는 않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 가능성을 없앤 산호해 해전이 당시 미 해군의 대표적인 활약이다. 하여간 이때의 충격이 무척 강렬했던 탓인지 지금도 미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 편제와 함께 강력한 대공망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항공모함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으로 진주만이라는 대성과를 거두었던 일본군은 점점 항공모함의 활용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에서의 소모전을 거치면서 항공모함과 함재기들과 숙련병들이 다 수장되는 바람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분노는 인종차별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났는데, 바로 일본계 미국인들을 죄다 수용소로 몰아버린 것.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여담으로 이승만이 1939년 11월에 집필을 시작하여 1941년 여름에 내놓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통해 '조만간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출판 직후에는 무시당했으나,[62]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은 재발굴돼 예언서로 유명해졌고, 저자인 이승만 역시 미국에서 선구자로 인지도를 높였다.

6.2.1. 음모론

그 외에도 진주만 공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에 이것은 루즈벨트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2차대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 진주만을 방치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생겨났다. 이 음모론은 루즈벨트의 4선 저지를 위해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 후보 진영에서 주장한 것이었는데 정작 이 주장을 들은 미국민들의 반응은 이뭐병.[63] 당연히 선거도 관광당했고 다음 선거에서도 민주당 해리 S. 트루먼에게 또 발렸다. 훗날 한도 가즈토시 같은 일본 학자들이 주로 주장했으며 데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정설로 등장해서 엄청나게 까였다.

위에서 서술된 것처럼 '진주만 공습을 미리 알고도 일부러 방치했다'는 설은 가능성이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일본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엄청난 대공황에 의해 국가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64],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여한 것을 경제적으로 알맞은 선택이라 보지 않았다. 그들이 목격한 1차 대전의 참혹함은 덤. 그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고립주의가 만연한 상태였고,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원치 않아했다. 예를 들어 미국 민간 함선들이 대영제국으로 향하다 독일 U보트에 의해 침몰해 다량의 희생자가 발생해도 보상금 정도만 받고 끝내려 했을 정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미국이 대공황의 여파에서 빠져나오도록 하기 위해 뉴딜 정책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으나 뉴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실효성에는 다분한 의문이 있던 상태였고, 미국의 경제 상황은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절대로 좋아졌다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시기에 참전한다는 것은 국민들의 커다란 반대 역시 불러올 게 뻔했다.

하지만 그 고질적인 미국의 불경기가 생산과잉 및 그에 따른 고용부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던 루즈벨트와 그의 장관들은 안 그래도 뉴딜 정책의 약발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고질적인 생산과잉과 고용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후 미국이 얻은 경제적 효과는 실로 엄청났으니까[65]. 하지만 갑자기 커다란 명분도 없이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조치는 미국 국민의 여론을 악화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에[66] 진주만에 대대적인 공습이 들어올 거라는 소식에 그것을 여론을 돌릴 하나의 기회로 보고 그냥 공습을 진행하도록 놔뒀을 가능성도 있다. 상위 작성된 대로 그냥 일본 함대가 진주만에 접근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냥 그 함대를 씹어먹어버리고 진격했다가는 미국 여론에게 엄청난 뭇매를 먹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재선도 당연히 실패할 테고.

이 항목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알 수 있듯이 진주만을 절름발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급소인 지상의 원유 공급 시설에는 어떠한 피해도 없었고, 많은 수의 전함들이 인양되어 수리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바로 옆 항구에 정박해 있던 지원함선인 유조선 역시 어떠한 공격도 받지 않았다! 공습 직후 미국은 분노했고, 미국 여론은 참전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참전 후 넘쳐나는 전쟁 특수로 미국의 불경기를 이끌고 있던 과잉생산, 과잉재고 및 그에 따른 실업 문제는 얼마 되지 않아 말끔히 없어져버렸고, 미국은 또다시 엄청난 호경기를 맞게 된다. 그것뿐만 아니라 악한 세력에 맞선다는 도덕적인 입장에 설 수 있게 되고 전쟁 후 미국의 국제적인 위상은 초강대국 급으로 높아졌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개인의 지지율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 4선에 성공한 유례없는 일을 성공시킨 것은 덤. 여러모로 미국이 정말 진주만 공습 예고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점.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역사 편에 따르면 1941년 초 일본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그루(Joseph Grew)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미국 정부에 알렸지만 "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쏠린" 미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67]

대놓고 노렸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공격이 들어올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장소나 방법, 피해 규모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개전 직전 미일 양국의 험악한 분위기를 보면 미국이 참전을 아예 유도하지 않았으리란 보장도 없으니.
6.2.1.1. 반론
우선 중요한 항공모함들을 미리 빼두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바뀐 주장으로 항공모함이 주력이 된 이유는 진주만에서 전함들이 다 털려서였다.[68] 그 당시 미군의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전부 다른 곳에서 정비나 임무 중이라 흩어져 있었으며 진주만에 들어올 예정이던 항공모함 한 척은 예정대로라면 공습 전날에 들어왔어야 했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서 우회하느라 공습 당일에도 못 들어왔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항공모함은 해상작전의 보조격으로만 활동했고 해군력의 주력은 진주만에서 가라앉아 버린 전함들이었다. '즉 항공모함이 중요하니까 빼놓은 게 아니라, 비행기 수송이나, 수리를 이유로 당시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없었고, 박살난 태평양 함대가 운용할 수 있는 게 항공모함뿐이라 급하게 항공모함만 가지고 운용했는데 의외로 항공모함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전력이었던 것을 발견한 것. 천대받던 항공모함들이 항공기의 발전으로 성능이 올라갔고, 전함들이 전투 불능이 되서 주전력이 될 기회를 얻어 실전을 치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는 항공모함이 전함을 보조하는 편성이였으나, 태평양 전쟁 중반쯤 되면 전함들이 항공모함을 보조하고 호위하는 편제로 변화한다. 여담으로 일본 역시 야마토무사시 같은 대형 전함들을 아끼기 위해 꽁꽁 숨겨두고 항공모함을 들이밀었는데 훗날 미군은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전력을 모조리 털어먹고 강제로 전함 위주 교리를 하도록 해준다.

다른 것을 제쳐두고라도 명분이 필요했다면 상식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당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엄청난 피해를 입을 필요까지는 굳이 없는 것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비록 미 해군의 군함들이 일본군함보다 속도면에서 열세이기는 했지만[69] 당시 진주만의 미 해군전력은 전함 8척에 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등 일본군 전력과 비등한 규모였고 전투기도 400여 대 정도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육상 대공포대와 비행장 등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방어전인 것을 생각해보면, 진주만 공습 직전에 초계를 하고 방어태세를 갖추기만 했더라도 피해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기습 선빵을 맞는다는 시점에서 전쟁 명분은 충분히 서기 때문에 미리 공습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주방어를 하면 되었지 루즈벨트 입장에서는 굳이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다. 실제로 훗날 미군은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이 공격받아 경미한 피해를 입은것을 과장해서 베트남전에 참전할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박살나서 6개월간 패전을 거듭 필리핀 등지에 지어놓았던 요새, 장비, 병력을 신나게 날려먹고 엄청나게 후퇴하고. 그 6개월 뒤인 미드웨이 해전으로 겨우 공세를 저지시키고 음모론자의 주장대로 미국이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한 것은 1년 뒤인 과달카날 점령 이후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국력을 총동원했는데도 일본군에게 반격을 시작하기까지 1년은 걸렸는데 루즈벨트가 아무리 명분이 필요했어도 이런 도박을 했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음모론의 근거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첫째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정말로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던 드라이 독이나 원유 공급 시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해군의 지휘관들이 지원시설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공습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70]. 만약 이런 시설의 공습이 이뤄졌다면 태평양 함대는 더 오랜 시간 진주만에 발이 묶였을 수도 있고, 추가 공습에 의해 궤멸당할 위기에 빠졌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연합군은 동남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교두보들은 물론 무방비 상태였던 호주와 뉴질랜드도 모두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떤 지도자도 전쟁에 참전하고자 이런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진주만에서 가라앉거나 손상을 입은 전함들이 1차 대전부터 사용되던 구형 전함이라고 하지만 당시 미 해군의 주력함들이었다. 진주만이 공습당했을때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은 건조중이었고 노스캐롤라아나급은 취역했으나 함체의 진동이 문제가 되서 실전 투입을 미루고있는 상태였다.[71] 그리고 그렇게 가라앉은 전함들이 정말로 쓸모가 없었으면 비싼 돈과 인력을 들여가며 굳이 인양해서 수리+개장해서 다시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함만 공격하고 보급시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이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하되 하와이의 보급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 광범위하고 복잡한 합의를 하고, 더불어 보급시설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에 하와이와 태평양 함대의 정밀 지도같은 중요정보를 넘겨줬다고 봐야하는데 상식선에서 이해하기도 힘든 음모론이다.

둘째로 일본이 위협적인 행동을 거듭하자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은 미국 정부도 이미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전포고 이전부터 일본 본토에 가까운 섬들의 방어태세를 강화한 것도 그런 이유다. 미국이 한 '실수'는 전쟁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설마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점과, 첫 공격을 일본이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미군 기지를 놔두고 일본에서 한참 떨어진 태평양 복판의 하와이의 진주만에 첫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점이다.

셋쩨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참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진주만 공습을 사전에 알았으면서도 일부러 '묵과했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공허한 주장이라는 점이다. 현실 정치나 군사는 게임이 아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진주만 공습을 알았다면 이는 대통령에게 바로 보고되는게 아니라 정보기관이나 외교관을 거쳐 국무장관과 국무회의라는 복잡한 정식 절차에 따라 해당 부처에 보고된다. 보고 과정에서 사실을 알게된 모든 중간 관료들의 입을 대통령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또는 적의 공습이 예상된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를 듣고도 대응하지 말라고 막을 수 있을까? 둘 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진주만 공습은 '쟤들이 설마 여길 때리겠어' 라고 모두가 상식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기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6.3. 일본의 설레발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의 견제가 사라진 일본은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의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를 점령했다. 이후 미국에게 충격을 선사했다고 본 일본은 향후 전략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부터 일본 외무성에서는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대한 준비작업을 시작했고, 이에 대본영, 육군, 해군, 야마모토 제독 모두 평화협상을 일본이 먼저 제안하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반대했으나, 미국이 평화협상을 제안해오면 받아줘야 한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본대로 미국은 역사상 전례가 없던 분노 속에서 칼을 갈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 정계와 군부는 이보다 더 큰 충격을 줘서 미국이 협상장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건 동의했으나 그 방법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우선 일본 육군은 자기들이 점령한 동남아의 방어를 굳히고 지배를 공고히 하면, 동남아 점령으로 막강해진 일본제국의 힘을 상대하기 부담스러워진 미국이 협상하러 나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72] 해군은 호주 점령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점작요격 따위 때려치고 하와이를 바로 점령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호주는 처음부터 점령을 위한 병력 및 물자가 모자랐고 하와이는 보급선 유지가 안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육군, 해군, 이소로쿠 제독이 각각 자기들 주장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와중에 미국의 항공모함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공습을 하고 있었고[73] 이 모습을 본 야마모토 제독은 미 항공모함이 가장 큰 적이라 결론을 내리고 미국의 항공모함을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미드웨이를 공격하지만...

6.4. 추축국(樞軸國)의 대미 선전포고

일본과 동맹관계이던 독일이탈리아는 4일 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 사태는 추축국 최대이자 최후의 삽질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물론 이 선전포고가 없었다고 해도 미국은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무기지원, 경제원조 등을 넘는 수준의 대대적인 참전은 일본 패망 전까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주만 공습이 있는 상황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미국이 일본보다 독일과의 전쟁을 우선시하는 것은 미국 국민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진주만 공습이 터지고, 아돌프 히틀러환호작약하며 선전포고를 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곧바로 카이텔과 요들에게 달려가서 환호하면서 소리쳤다.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74] 이 생겼다."[75]
ㅡ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360P

독일은 이 선전포고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해주기를 바랐지만, 일본은 1945년 8월에 소-일 불가침 협약이 만료되어 소련의 공세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 평화를 유지했다. 웃긴 것은 독일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무기를 팔아 일본군을 골탕 먹였다는 것. 물론 의도는 중국 공산당을 국민당을 이용하여 없애기 위해 지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일본을 더 위협적인 적으로 봤었기 때문에 문제, 아예 장제스 휘하 부대는 중일전쟁 전부터 독일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군사고문관으로 한스 폰 젝트 장군까지 파견된 판이었다.[76] 물론 동맹을 맺고 일본의 요청에 따라 위의 조치는 동맹을 맺은 1936년을 전후하여 거의 시정되었으니 동맹을 의도적으로 엿먹인 것은 아니다.

히틀러의 반응과 별개로 독일 상당수의 육공군상급장교들이나 하급 장교들을 비롯한 일반 사병들은 공식 방송이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로 정황이 없었다. 41년 12월당시 최대 공방전이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이 진행 중이었고 그외에도 독일군의 빈약한 동계전투 준비로 소련군의 전전선으로 부터 반격을 받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독일은 일본이 소련 뒤를 쳐서 극동 소련 정예군을 붙들어 주기를 바랬으나 일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소련은 이 겨울 동안 긴급수송으로 극동 정예군을 투입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만큼 당시 동부전선은 급박하게 전투가 전개 중이었기 때문에 상급장교들이 일본이 동쪽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든 신경쓸 상황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독일 해군은 이전부터 미국과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찬성하는 편이었는데 이미 대서양에서 미국과 독일 해군간의 대립이 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77] 그리고 추가적으로 일본이 극동영국군을 공격해 영국해군의 시선을 인도양으로 끌어주어 고전을 하고 있던 독일 해군의 상황을 개선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오히려 일본은 극동영국 해군을 박살내긴 했지만 인도양보다 미국의 반격으로 인해 태평양 방면으로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인도양 방면의 얼마 안되는 극동영국해군은 살아남았고 미국이 일본해군을 상대하는 동안 영국은 안심하고 지중해의 크릭스마리네+이탈리아 해군을 심해끝까지 털었다. 이에 더하여 선전포고 이후 미국은 어느정도 상황이 나아질때마다 꼬박꼬박 유보트 사냥하러 해군을 지원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군사 동맹은 동맹국이 3자로부터 공격받았을 경우 원조의 의무가 부여되지만 동맹국이 3자를 공격했을 때 원조의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각자 선제공격했기 때문이지 주축의 동맹이 연합에 비해 특별히 약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련의 경우에는 폴란드 분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독일의 우호국이었으니…. 즉 '동맹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외교가 따로 놀았다는 것이 문제. 거기다 6호 전차 티거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유럽에 있던 독일, 이탈리아와 완전히 반대편인 아시아에 있던 일본 사이에는 소련이라는 장애물이 있어 어떻게 상호 지원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다로 가자니 보급 문제도 문제인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연합군의 해상 세력에 완전히 궤멸될 판이었다.[78][79] 그리고 일본은 이전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에서 처들어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일본이 착해서는 당연히 아니고 소련군한테 크게 데인 적도 있었고 이미 중국, 미국과 싸우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전선을 늘릴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 크다. 그래도 양국은 동맹국이랍시고 어떻게든 기술지원을 해주었지만[80] 양쪽 다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어쨋든 히틀러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는데도 힘들어 죽을 려는 상황에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영국세력을 축출하지도 못했는데 아무생각없이 루즈벨트가 바라던대로[81] 선전포고를 하면서 파멸을 앞당겼다.

6.5. 관련인물들의 후일담

한편 눈 뜨고 당한 허즈밴드 킴멜 대장은 2계급이 강등되어 소장으로, 월터 쇼트 육군 중장도 1계급 강등되어 소장이 되었고 둘 다 불명예 퇴역, 즉 아예 예비역 소집 대상에서조차 제외당했다. 다만 이등병 강등, 모든 명예 몰수 등 그야말로 군대에서 완전추방당하는 공식적인 불명예전역은 아니고 판단 미스로 기습을 불러 경계에 실패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징계로 2계급 강등한 뒤 나이가 있어서 어차피 예비역 소집은 불가능한 상태라 그냥 강등 후 강제전역시킨 것인데, 이게 진주만공습 대처 미스라는 배경과 겹쳐서 사실상 불명예전역으로 간주된 것이다. 단 킴멜 제독은 본래 소장계급이었고 대장이 부임하는 자리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부임시키기 위해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시킨 것이라, 어차피 사령관에서 다른 직책으로 이동하면 다시 소장으로 환원될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의미의 강등과는 다르다. 후임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 역시 소장 계급에서 임시 진급해 부임했다가 이후 정식 대장 계급이 되고 원수까지 달았다. 따라서 이들은 퇴역군인으로써의 혜택은 제대로 받았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라 계급 강등 후 전역당한 것 자체가 오명인지라 본인들 스스로 명예회복에 힘썼고, 그들 사후에 유족들 또한 명예를 회복해달라며 계속 대통령에게 청원을 냈다.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면 무죄가 되어 명예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둘도 억울했는지 군사재판을 자진해서 신청하는 걸로 시작해서 거절당하고 전역한 뒤에도 계속 회고록을 펴내서 자신들을 스스로 변호했고 이들이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르포작가들의 책도 자주 나왔다. 그래서 1999년 미국 상원은 이를 받아들여 투표에 부쳤는데 찬성 52 반대 47이라는 아슬아슬한 결과가 나와 이들의 계급을 회복시켜주도록 대통령에 권고했으나 당시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물론 후임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도 거절했다. 물론 유족들은 승복하지 않고 계속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일단 현재까지는 되지 않았으며 이들은 따라서 퇴역(retired) 소장 신분으로 되어 있다.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 공격과 연이은 남방작전에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한 공을 세웠지만, 야마모토와 달리 일본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6개월여 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면서 나구모는 항공모함 부대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역에 참가했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상처뿐인 승리[82]를 거둔 끝에 결국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수상함대 사령관직을 이어가다가 사이판 전투에서 자살했다.
  • 이 이면에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의 불편한 관계가 있었다. 애초부터 나구모는 전함을 중시하는 함대파의 핵심 인물중 하나였던 터라 조약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야마모토와는 이전부터 대립하던 사이였다.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연공서열 때문에 앉게 된 것[83]이어서 나구모 스스로도 이 자리를 불편해했고, 나구모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야마모토 역시 이런 상황을 그리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당시 일본 해군내에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진주만 공습을 전후로 더욱 심해졌다. 진주만 공습을 강하게 반대했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나구모였으며, 이후 진주만에서 3차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온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진주만 공습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야마모토의 불만이 반영되면서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공이 격하되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바로 해임해버리고 싶었지만 승리한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는 커다란 후폭풍이 닥칠게 뻔했고, 이후 남방작전의 공이 더해지자 나구모를 끌어내릴 명분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속사정 때문에 연합함대 내에서 나구모의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으며, 남방작전 이후의 전략적 행보에 대해 육군에서 주장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지지했다가 연합함대 내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나구모가 항공전 분야에 무지했던게 역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으로 이어지자 야마모토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선에서 만족하던 터였지만...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와 진주만 공격을 공중에서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후치다 미쓰오 중좌[84]는 모두 전후까지 살아남았다. 둘은 해군병학교 동기였고 매우 친한 친구로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이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둘 다 진주만 공습 직전인 10월 15일자로 중좌로 승진하였다. 이들은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가 아카기가 격침될 때도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두 사람 모두 대좌까지 진급했고, 겐다는 항공자위대의 막료장(참모총장)까지 지냈고 후에 자유민주당 소속 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록히드 스캔들로 수뢰혐의로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후치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 때까지 지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보도를 하는 한편 귀환한 부상병들에게 연금생활을 강요했으며 이에 후치다는 전쟁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패전 후 진주한 미군 조종사에 의해 기독교를 접하고, 선교사가 되어서 간증하러 1970년대 한국도 방문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회고록을 펴내면서 태평양 해전사 연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한 <진주만 공격 총대장의 회심>이라는 회고록을 내어 진주만 공습의 준비와 전투 과정을 잘 증언해 놓았다.[85]

한편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연합함대 참모장 쿠로지마 카메오 대좌는 소장으로 전쟁을 마쳤고 전후 기업가로 변신했다.

6.6. 전후 일본 내부의 평가

지금도 정신 나간 극우꼴통이나 역사의식이 부족한 일본인들은 이 공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ch 등에서는 혐한초딩들이 "우린 전함과 전투기를 가지고 세계최대 규모의 전쟁을 치른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라고 자위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다.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한 막장스런 비열함은 불가침조약을 상큼하게 씹고 소련을 기습공격한 독일의 야비함만큼 먹고 들어가준다.

더 흥미로운 건 우익들이 피해자 코스프레 할때 태평양 전쟁과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강제로 유도하여 일본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인 일이라고 정당화하며 여기에서 헐 노트를 만능 카드로 내세운다.[86]

6.7. 소련

흥미로운 점으로는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가 소련으로 새어나갔다는 사실이 있다.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를 알아내 소련에 보냈기 때문. 조르게는 독일침공도 미리 알고 보고했었던 성과가 있으니 보고 자체는 믿었겠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진주만 공습과 미국참전의 시작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불명이다. 당시 미국이 유럽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소련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진격하는 등, 제 코가 석자라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혹은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해서 자신들의 랜드리스 보급선을 막는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르게가 빼낸 일본군 남방작전은 소련에 큰 도움이 됐다. 조르게는 "모스크바가 함락되지 않는 한은 일본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타전했다. 소련은 그 정보를 접하고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정예사단중 일부를 열차로 실어 와서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일본은 독일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소련을 후방에서 공격하겠다고 독일에게 알렸었는데 일본의 행동으로 결국 독일의 모스크바 공략이 더 어렵게 됐으니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의 팀웍은 커녕 팀킬도 이런 팀킬이 없었을것이다. 만일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지 않고 독일과 손발을 맞춰서 소련을 동시에 공격했더라면 두 동맹국은 소련의 광활한 영토를 사이좋게 둘로 나눴을수도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7. 창작물에서 묘사한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공습이어서,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창작물에선 직간접적으로 1번 이상은 언급하는 편이다.
진주만 공습 자체를 묘사한 창작물로는 다음의 예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미국의 고립주의를 깨트린 중요한 분기였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에서 분기하는 대체역사의 가능성들에서 중요한 트리거중 하나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 하와이 말레이 충해전: 1942년에 만들어진 일본 전쟁 영화로 일종의 해군 입대를 권유하는 홍보 영화에 가깝지만 후반부의 진주만 공습씬은 볼만했다.
  • 태평양의 폭풍: 1960년 당시 일본 명 배우들이 다수 동원된 영화로 초반부에 진주만 공습하는 씬이 잠깐 나오는데 마치 하와이 말레이 충해전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 도라 도라 도라: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창작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 벽람항로: 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함선 모에화 게임답게 도입부인 1장이 진주만 공습을 모티브로 했다. 아예 1장 챕터 이름이 일섭은 '도라 도라 도라'고, 그 외의 서비스 국가들에서는 '진주만을 기억하라'로 나온다.
  • 진주만: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공습 장면은 매우 화려하고 고증에 맞게 잘 표현했으나 빈약하고 지루한 분위기의 스토리 때문에 영화 자체는 혹평을 받았다.
  • 패러독스 사의 2차 대전 배경 대전략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선 역사 재현 테크 트리인 국가 중점 트리에서 진주만 도박(Pear Harbour Gambit)이라는 이름으로 묘사했다.
진주만의 해군 기지는 일본에겐 손쉬운 타겟입니다. 함대를 주둔 시킴으로서 태평양의 우리 군사력을 과시할 것입니다. 일본이 이런 과감한 조치에 도전 할 수 있을까요?
연구 조건이 국가 중점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일본에 대한 무역 차단) 완료. 하와이에 주력함 7척 이하 주둔시 실행가능으로 사실상 일부러 취약한 해군 기지에 주전력처럼 보이지만 잃어도 치명적인 타격은 아닌 함대를 방치시킴으로써 일본의 공격을 유도하는 도박을 했다고 위의 음모론를 차용했다.
다만 최근 DLC와 패치에서는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와 '진주만 도박' 중점이 사라지고 디시전 발동시 대동아공영권 상대로 전투력이 오르거나 일본의 미국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는 '전쟁 계획 주황'과 태평양 섬들의 방어력과 해군기지를 늘려주는 '태평양 방어' 중점이 기존 대일 국가중점들을 대채했다. 아마 미국이 진주만 공습을 유도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음모론이 설득이 없어서 그런듯 하다.

8. 트리비아

  • 진주만과는 별개로 일본은 나머지 연합군인 영국, 네덜란드에는 진짜 선전포고조차 안 하고[87] 전쟁을 벌여버렸다.
  • 야사에 의하면 독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이런 게 바로 전쟁이다. 우선 공격부터 하고 선전포고는 나중에 하면 된다"고 크게 기뻐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런데 히틀러는 선전포고를 안 한 수준이 아니라 불가침조약이나 평화협정 같은 것도 다 무시하고 쳐들어갔고 독소전쟁 내내 선전포고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진주만 공습보다 먼저이므로 저 야사는 사실일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다.
  • 진주만을 폭격한 뒤로 캐나다나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전쟁 끝날때까지 차별당하고, 감옥에 갇혀있었다.[88]
  • 한편 진주만 공습이 알려지자, 일본 전 국토는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고, 일본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일본 해군에 자원 입대를 하러 몰려들었다. 이는 일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진심으로 지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일본 국민들은 전쟁을 원치 않았는데, 군부가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따른 희생양이라는 주장은 자신들의 잘못과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짓된 핑계일 뿐이다.[89]

9. 관련 어록

우리는 진주만을 향해 진격했고, 나는 암호를 크게 외쳤다. 도라, 도라, 도라
야마모토 이소로쿠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른다."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한 독백.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가루가 돼버리겠지."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고 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반응[90]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진주만 공습을 부관으로부터 보고 받은 어니스트 킹 제독의 반응

우리는 질리가 없다. 우리는 3000년동안 결코 패배한적이 없는 국가를 동맹국으로 두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의 소식을 듣고 아돌프 히틀러가 한 말


[1] The Battle of Pearl Harbor[2]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즈이카쿠, 쇼카쿠[3] 공고급 순양전함 기리시마, 히에이[4] 웨스트버지니아캘리포니아는 인양 후 수리하여 복귀, 애리조나는 폭침으로 손실, 오클라호마는 인양 했으나 복귀 포기하고 스크랩을 위해 이동중 태풍에 손실[5] 갑표적 중 1척의 정장사카마키 카즈오 해군 소위로, 태평양 전쟁 중 최초의 일본군 포로라는 타이틀을 지닌다.[6] 다만 시간상으로 볼 때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일본군 육군의 말레이 반도 코타발루 상륙이 맞다. 여기서 영국군과 교전한 게 진주만보다 약 2시간 일찍 일어났으며 따라서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려면 미국이 아닌 영국, 네덜란드 등에게도 했어야 했다. 개중에는 '그 늦게 보낸 선전포고조차도 영국이 아닌 미국에 보냈다'라며 진주만을 개전 타이밍으로 잡는 것에 대해 '일본의 선전포고 없는 선제공격에 대한 책임회피 언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 모양. 어쨌건 일본에서는 동시다발적인 침공을 계획했고 그 중에 가장 임팩트가 큰 전투가 진주만이어서 대부분 진주만을 태평양 전쟁의 개전으로 보고 있다.[7] 일본 역시 일단은 항공모함을 해전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쓰게 되었고, 미국이 항공모함 중심으로 함대 편제를 짜게 된 데는 이 때 전함들이 대부분 박살난 게 크다.[8] 정확히는 남방작전을 포함하여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국제정치적 고려 결여가 실책에 해당한다. 물론 이 공습이 없었더라도 미국이 결국은 참전했을 것이나, 일말의 협상의 여지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사실 작전을 입안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또한 진주만 공습이 정치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며, 그 밖에 여러 측면에서 연합군에 대한 적대 행위 중에서는 의외로 가장 일본군이 공을 들인 축에 속한다. 사실 전술적으로는 성공한 작전이었고 전쟁을 피할 수 없었으니 전략적으로도 먹혀들어갈 작전이었다. 진주만 공습에 대해 일본이 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내린 실수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크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일본의 팽창을 용납하지 않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일본이 진출하고자 하는 동남아 지역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이 이미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미국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이 3국과 협상하는 것이 이득인 관계로 일본과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일본과 손을 잡고 동남아시아를 점령한다는 것은 서방 동맹을 무시하는 격이 되므로 일본은 이점을 크게 고려하여 진주만 공습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복수귀가 된 미국의 무시무시한 폭격으로 돌아오게 된다.[9] 군대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10] 그리고 이렇게 벌어진 원인도 애초에 육군이 제공한 것이다. 육군이 중화대륙(왜 중국이라고 하지 않고 중화대륙이라고 하는지 하면 저 당시의 중국은 마치 춘추전국시대마냥 각지에서 군벌들이 열강들과 이권다툼을 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국공합작으로 유명한 장제스마오쩌둥 역시 원래 군벌들 중의 하나였고.)을 다 잡아먹겠다는 행동을 하자 당시 중화대륙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던 미국과 영국, 프랑스, 특히 미국이 중재자로 나서서 일본에 더이상의 침략 행위를 자제하라고 했는데, 이걸 일본이 무시한 것이 원인이다.[11] 더군다나 독일은 1차대전 당시에는 육군만 따지면 세계 1위, 해군도 세계 2위에 드는 강국이었고 2차대전 당시에도 탑3 안에는 항상 들었던 전력으로, 각각 전쟁 중반에 러시아(동부 전선), 전쟁 초반에 프랑스(서부 전선)을 정리하여 전선 축소까지 해버리고도 패배했다. 그리고 양차대전 때 각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이탈리아같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동맹국이 많이 존재했다.[12] 어디까지나 추축국이 패배하지는 않았어야 하지만[13] 실제로도 이런 선제 기습은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재미를 봤던 전략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이 청나라와 당시의 러시아와는 비교도 안되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 해군은 그 특성상 큰 군함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괴멸 상태가 되면 당연히 복구에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소요된다. 따라서 미국이 주간 항공모함이라고 불릴 만큼의 배를 찍어내는 무시무시한 공업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였다면 태평양함대의 괴멸로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일본이 오래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동안 상황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14] 단, 이런 방침과 별개로 해군은 병력을 태평양으로 거의 몰빵해서 대서양에서는 대잠 임무에 투입할 구축함이 부족해서 영국한테 대잠 어선을 빌려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15] 물론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그 정도로 어그로를 끌지는 않았고 사전에 자제했을 가능성이 크지만.[16] 일본은 제국주의 초창기인 1900년대부터 아시아주의를 표방하였다.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에 위치한 일본이 조선이나 중국을 침략할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다. 일본이 독일을 도와 소련을 공격해야 했다는 가정이 어려운 것은 소련은 아시아에 대한 지분이 없었고 반대로 연합국인 인도의 영국이나 필리핀의 미국, 베트남의 프랑스,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가 지분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확대를 위해 추축국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시기를 재다가 전격적으로 미국을 공격한 것이다.[17] 이 원인은 일본 자신들이 제공했다. 바로 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전함의 팔다리를 잘라버린 것. 남은 건 항공모함 밖에 없었고 마침 태평양 함대를 지휘하던 니미츠 제독은 항공모함의 능력에 상당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기에 항공모함을 적극적으로 운용했다. 게다가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이 폭풍을 만나 예정일보다 진주만에 하루 늦게 도착한 것도 한몫했다.[18]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서에서도 나와있지만 소련은 일본이 소련을 통해 서방국과의 중재자 역할을 해달라고 매달리는 일본을 전혀 본체만체하다가, 1945년 8월 8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사토 나오타케 일본 대사를 만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전달함과 동시에 소련 주재 일본 대사관의 모든 통신망을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이미 잡병이 되어 미국 3개 사단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관동군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밀고내려갔다.[19] '모리무라 타다시(森村正)'라는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진주만 일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으로 보내 공습이 성공하는 데 일조하였다.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간 이후에도 정체를 들키지 않고 종전 후 일본으로 무사히 귀국하였다. 더 자세한 정보는 링크 참조.[20]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활동한 군함들의 연료는 중유를 많이 사용했다. 이는 당시 군함의 주기관이던 증기터빈에 증기를 공급하는 보일러가 중유 사용을 전제로 설계된 데서 연유한다. 무엇보다도 중유는 경유에 비해서 불순물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가격도 저렴했기에 디젤기관에 비해서 많은 연료를 소모하는 증기터빈기관에 안성맞춤이었다. 덤으로 보일러와 경유는 상성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아서 2차대전 후 세계 각국의 해군이 중유 대신 경유를 연료로 사용할 때 보일러 사고가 빈발하여 상당히 골치를 앓았다. 당시 해군에서 경유는 디젤-전기추진을 채용한 잠수함에서나 사용했다.[21] 12월 초 하와이의 일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오전 6시 30분. 도쿄시간 오전 2시[22] 정벌전쟁[23] 절차 자체에서도 확실하게 일본이 비열한 행동한 것임을 먼저 지적하고 적는다. 다만 미국은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어서 알고 있었고 이것이 일부 호사가들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유가 되었다. 내부 통신이 어떻게 오갔건 간에 선전포고는 공식 통로로 상대국에 전달해야 효력이 있고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지 상대가 암호를 방수할 걸 예상하고 하는 멍청한 나라는 없고 그런 변명이 인정되지도 않는다. 안 그래도 공격 직전에 전달하겠다는 의도부터 꼼수인 판에 그것도 실패했으니 여러 가지 의미로 두고두고 까이는 것. 그런데 문제는 저 암호를 해독했어도 그 내용이 워낙 모호해서 그냥 경고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로 그랬다는 것이다. 즉 당시의 미국은 이미 그 선전포고를 (일본 대사관보다 먼저) 해독하고 있었음에도 내용의 모호함으로 인해 그것이 선전포고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군에서도 조심하라는 경고만 보냈고 그것을 보냈을 당시는 이미 늦어서 진주만이 공격받은 뒤였다.[24] 윤봉길 의사가 던진 물통 폭탄에 한쪽 눈을 잃었던 그 사람 맞다. 훙커우 의거 후 외교관으로 전향했다.[25] 당시 1등 서기관이던 오쿠무라 가츠조라는 인물로, 일본의 항복 후 더글러스 맥아더히로히토가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26] 구어체 표현으로, 중대한 외교 문서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결례이다. 선전포고문 전체에서도 "American Government"와 같은 비형식인 명칭이 여러 번 등장한다. 심지어 번역본을 보내기 직전에 상대방을 "America"라고만 호칭하는 것은 모호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묵살되었다.[27] Prange, Goldstein, and Dillon, At Dawn We Slept, pp. 424 and 475[28] 주일 미국대사는 일본제국이 정부청사 및 황거 출입금지를 통보해 주일 미국대사관 안에서 억류되었다.[29]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미국외교공관을 유지함으로써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반면, 나치 독일소련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서로 대사관을 추방시켰다. 나치 독일은 영국과는 공관을 유지했지만 소련과는 아예 단교 및 외교공관 폐쇄를 결정했고, 소련 역시 독소전 발발 1주일 후 주소 독일대사관을 폐쇄해 대놓고 서로를 멸망시키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30] 동맹국 잠수함이라도 훈련이나 긴급수리가 필요한 손상으로 인한 후송 등의 이유로 사전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면 영해에 들어온 순간부터 부상하여 수상 항해를 해야 한다.[31]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는 아예 북쪽으로 220km, 동쪽으로 3도에서 잡았다고 묘사된다. 굳이 거기서 기나긴 보고 체계를 거쳐 본토에서 오고 있을 B-17 편대에게 직접 확인할 일도 없었거니와, 레이더 상에선 그냥 점으로 보일 테니 속을 만도 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했을 뿐인 전탐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32] 사실 이런 경우에 현명한 판단과 착오는 정말 한 끝 차이이기도 하다.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의 예에서 보듯이.[33] 그런데 강하폭격대가 이걸 신호탄 연속 2발로 착각하였다. 신호탄 연속 2발은 공격 개시였다. 뇌격대가 먼저 공격을 개시해야 하지만 이 착각으로 뇌격대와 강하폭격대는 동시에 공격에 들어갔다.[34] 49분에 있었던 공격 개시 신호인 '도 도 도' 랑 헷갈려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 모스 전신부호상 장음은 "쓰", 단음은 "도"였다. '도라 도라 도라'와는 전혀 관계 없다.[35]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7a.htm The Honorable Brad Henry, Governor of Oklahoma, delivers his remarks during a joint Oklahoma Memorial Committee/National Park Service dedication ceremony for battleship Oklahoma (BB-37) on historic Ford Island. The memorial honors the 429 Sailors and Marines aboard who lost their lives after being hit by five torpedoes and capsizing at Pearl Harbor on 7 December 1941.[36]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8a.htm West Virginia (BB-48) shown here on 17 June 1942 being made seaworthy for the trip to the mainland for permanent repairs. The extent of the damage to the port side above the armor belt is evident in these two photos. The shallow depth running of the torpedoes and the initial list of the ship concentrated most of the damage above the side protective armor belt of the ship. A total of seven torpedoes and two bombs (modified 16"armor piercing naval shells fitted with fins) struck the ship during the Japanese attack.[37] 배에 빵꾸가 나서 물에 잠기거나, 폭격으로 화재가 발생할때 다른 구역으로 화재, 침수가 번지지않게 막으면서 응급수리를 하는것이다. 각종 자재들로 구멍을 막고, 불을 끄고, 유폭 위험이 있는 탄약과 기름을 옮기고, 가연성 자재, 전기는 차단하는 그런 것을 말한다.해군출신 위키러라면 소화, 방수 훈련으로 익숙할 것이다.[38] 테네시는 피해가 적었음에도 대개장을 받아 1943년 5월에 복귀했다.[39] 일반적인 급강하에 쓰이는 철갑폭탄으로는 관통이 불가능하여 나가토에 사용된 철갑탄을 개조하여 급강하가 아닌 수평 폭격으로 관통시켰다.[40] 'Isaac C(Campbell). Kidd'.이 사람의 이름은 현재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100번째 함선의 함명이 되었다. 트랜스포머 2에서 장착된 레일건으로 데바스테이터를 아작냈던 그 함선이다.[41] 일본군의 대표적인 에이스사카이 사부로조차 이런 장기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적 전투기의 종류를 잘못 파악하여 죽을 뻔한 적도 있을 정도다.[42] 사실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랜드리스 등으로 1차대전 초기 때처럼 무기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럽 전선과 동아시아 모두 미국 본토와 한참을 떨어져 있던 데다가, 미국인 대부분이 '설마 감히 미국을 공격하겠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일본은 그 미국을 공격하는 미친짓을 감행했고, 이에 그간 전력을 본의아니게 숨기고 있던 미국이 제대로 빡쳐서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가동하면서 희대의 팀킬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독일의 기술에 미국의 자본이 결합한, 미국 회사의 독일 자회사들이 많았는데 Deutsche-Amerikanische petroleum (DAPG) 등 이들 상당수는 독일의 전쟁수행에 크게 도움을 줬었다. 즉 공습 이전까지 이들 미국계 독일회사를 이용,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 미국 기업들의 계획이 진주만 공격으로 틀어지게 되고 결국 독일의 전쟁수행까지 방해받게 된다.[43] 니미츠가 태평양 함대 잠수함대 지휘관 시절 본토에서 잉여 물자를 끌어다가 지었다.[44] 미국과 영국 해군 항공대가 공동으로 구레를 두들겨서 일본의 잔존 군함들 거의 대부분을 갈아버린 1945년의 구레 군항 공습을 갖고 정신승리하는 것도 이것과 대조해보면 그냥 정신승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45] 이것을 놓고 미국의 수리능력이 뛰어났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꼭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것이, 타란토 공습 때의 이탈리아도 침몰한 전함 3척 중 2척을 수리해 현역에 복귀시켰다.[46] 가령 영국은 독일의 유보트 기지를 파괴하기 위해서 5.4톤의 항공폭탄 톨보이까지 동원했었다.[47] 미드웨이에서의 피해가 좀 크긴 했지만, 치명적이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가장 큰 건 1942년 후반부터 벌어진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이다. 괜히 과달카날 전선동부전선쿠르스크 전투와 동급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48] 같은 섬나라임에도 전투에선 자주 패배하지만 전쟁에선 이긴다는 영국과 비교되는 일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일본이 벤치마킹한 프로이센을 계승한 독일제국, 나치 독일도 전장의 승리에 집착해서 전쟁의 패배를 불러오는 공통점은 흥미로운 요소다.[49] 이탈리아 해군도 절대 무시할 존재가 아니다.[50] 유류창고는 시야 방해를 이유로 파괴하지 않는 뻘짓이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유류탱크가 54개나 되고 기습의 이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를 모두 파괴하는건 불가능했다. 애시당초 공습의 목표는 전함과 항공모함, 그리고 진주만의 항공세력이였다. 항공모함의 경우는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진주만 공습의 최우선 목표물 중 하나에 그들이 있었다. 그저 작전 당일까지도 그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고 마침 당일에 모두 진주만에 없었을 뿐.[51] 해당 공습을 당한뒤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을 태평양 멀리 밀어내기 위해 미드웨이 해전을 감행해야만 했다.[52] 당시 미 육군의 마셜 장군은 1943년에 프랑스에 상륙해서 1944년에 독일을 항복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53] 이 때문에 윈스턴 처칠어니스트 킹이 영국을 말아먹는다고 킹을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54] 어덜트 스윔로봇 치킨 중 미니 에피소드인 <li'l hitler>. 내용을 요약하면 히틀러가 유럽을 전부 먹어치우는 동안에도 신경쓰지 않던 미국이 일본에게 빅엿을 먹고 전쟁에 참가한다는 내용이다.[55] J. Bryan (1947). Admiral Halsey's Story. Whittlesey House. pp. 75–76. ISBN 978-1-4325-6693-7.[56] 후술하겠지만 모든 의원이 전쟁에 동의하는 이 와중에 혼자 반대를 누른 이 의원은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래 내내 전쟁을 반대해온 여성의원.[57] 물론 그렇다고 병역비리를 저지른 인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진 입대율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이용해 군대를 빠진 놈들도 있다. 그 때문에 전후에 엄청나게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58] 폭격기 승무원으로 전후 준장까지 진급했다.[59] 당시 미 해군의 인사사령부 역할도 맡는 부서였다.[60] 전쟁 이전에 하원의원 재직중에 해군소령으로 복무했는데 진주만 공습이 터졌고 주로 감독관으로 활동했다.[61]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랜킨 스스로 각오한 엄청난 자충수여서, 1942년 중간선거를 포기하고 정계은퇴를 해야했다. 상술한 한국전 및 베트남전 반전운동은 정치인이 아닌 사회운동가로서 했다. 1차대전 참전에 대한 반대투표때는 높아진 인지도를 바탕으로 상원의원에 도전했었는데 완전히 상황이 반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랜킨의 선거구인 (공화당에게 매우 유리한) 몬태나 주 제1선거구는 랜킨이 은퇴한 1943년부터 선거구가 사라지는 1993년까지의 50년 중 겨우 4년, 즉 선거로는 단 2번만 공화당이 이겼으니 당 입장에서는 피해가 컸다.[62] 《대지》의 작가 펄 벅 등 아시아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일제의 팽창욕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어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극찬하기도 했으나 당시 미국은 관동대지진 때 수많은 시민들이 기모노를 입고 뉴욕에서 일본을 돕자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로 와패니즘 정서가 위나 아래로 깔려있었기에 대부분은 헛소리로 치부했다.[63] 위의 선전포고문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되지만 선전포고문을 먼저 입수하고 먼저 해독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문서 내용이 워낙 애매모호해서 별다른 대응책을 수립하지 못한 상황이었다.[64]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미국은 전쟁물자 판매로 엄청난 경기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전쟁물자 재고가 쌓이고 돈이 주식시장으로 모여들다가 워낙 거대했던 쌓아놓은 자본 덕분에 10년 후에서야 주식시장이 터지고 대공황이 왔다.[65]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과 아시아 전역이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있었고 특히 유럽은 새로운 위협이 된 소련의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유럽을 보호하기 위한 마셜 플랜을 구상 유럽에 복구물자및 구호품을 대량생산해서 수출하게 되고 아시아 역시 미국의 영향력을 받고 엄청난 구호물자를 받게 되어 미국의 경제력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66] 이 당시만해도 미국내의 여론은 "옆집 싸움에 우리가 왜 간섭함? 그냥 놔두셈."이었다.[67] 한편 조셉 그루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과의 국교를 스스로 단절한 때까지 주일대사로 근무했으며 개전 즉시 억류되었다가(둘리틀 특공대의 공습 당시에도 아직 억류되어 있었다) 미일간 합의에 의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모잠비크)에서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키치사부로, 대미 특사 쿠루스 사부로 등과 교환되어 반 년 간의 억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68] 당시 미국의 전함이 총 16척이었는데 그중 8척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었다. 운이 좋아 인양, 수리할수 있었던거지 거함거포주의가 만연했던 해군들 시각에선 해군력의 절반이라고 해도 무방한 규모가 전멸 가능하게 놔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69] 일본군은 급유함과 잠수함 말고는 28노트의 카가가 가장 느린 함이었다.(게다가 카가 역시 원래 항공모함이 아닌 전함이었다가 개장해서 항공모함이 된 것이니....) 미국 전함은 거의 21노트 정도. 거기에 상당히 까이는 새장형 마스트를 필수적으로 장착했다.[70] 실제로 일본군은 이후에도 지원함보다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우선 공습한다[71] 사우스다코타급 전함들은 1942년 4월부터 취역하기 시작한다.[72] 정확하게는 육군은 더 이상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을 확대하는 것보다 이미 교착 상태인 중일전쟁을 마무리 하고자 이런 주장을 했다. 태평양 전선은 바다를 끼고 작전을 하기 때문에 해군이 주연이고 육군은 조연 취급을 받는 반면 중일전쟁을 승리한다면 온전히 육군의 공적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73] 대표적인 게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킨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백주대낮에 도쿄를 공습한 둘리틀 특공대가 있다..[74] 역사상으로 보면, 그 무서운 몽골 제국도 어쩌지 못한 일본이었고, 러일전쟁도 일단 이겼으니 당시로서는 얼씨구나, 불패국 일본이구나 하고 판단해도 당장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은 거의 운빨로 이긴 것이기는 하나 당시 대마도 등에서 상대한 일본 잡병들이 아니라 일본의 주력군과 싸운다면 보급문제와 산지가 많은 일본에서 기병이 잘 활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혼슈는 물론 큐슈도 제대로 점령, 유지하기도 힘든 수준이다. 또한 임진왜란 역시 일본의 완패가 아니고 전략적인 패배이다(일본은 조선 전토 점령에 실패했고 하삼도 점령 또한 결국 실패했다). 어쨌든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패했으니 저 주장은 일단 거짓이다. 다만 확실히 해둘 것은 단순히 조선이 멸망을 모면했다고 승리한것이 아니라 전쟁의 전황을 바꾸고 실재로 반격에 들어감으로서 승리할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전개를 따라가 보면 전환점이 존재하는 전형적인 반격전 양상을 보임을 알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전술적으로는 조선의 승리가 아니지만 일본의 승리도 아니다. 전쟁 후반부 주도권은 오히려 조선군이 쥐고 있었다.[75] 처칠은 동일한 소식을 듣고서도 상반되고도 낙관적인 결론에 도달해서, "3천년동안 한번도 진 적이 없다고? (징크스란게 원래 깨지라고 있는 것이니)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번 되었군" 이라고 말했다. 사실 처칠은 이전부터 어떻게 해서든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76] 심지어 중국군이 슈탈헬름(흔히들 나치 독일 철모 하면 떠올릴 그 철모)까지 착용한 사진까지 있다! 후일 중국군이 한국 광복군을 원조하면서, 광복군이 독일군의 장비를 들고 나오는 해프닝까지….[77] 이런 이유로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는미국의 선박이라도 봐주지말고 공격해야 한다는 되니츠를 오히려 히틀러가 반대할 정도였었다.[78] 사실 이런 지정학적 사항은 독일과 일본에 둘러쌓인 연합군의 주력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연합군은 북대서양 서부와 대서양 남부 전체 그리고 인도양 서부의 수상함 세력에서 완벽한 우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미의 북서대서양에서 출발한 수송선이 남동대서양으로 쭉 내려와서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 서부의 이란에 하역하여 지상으로 옮기는 어마어마한 여정의 운송로를 실행이라도 할 수 있었고 또한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하던 시기에도 소련측 배는 태평양을 통해 미국발 비전투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기에 사정이 훨신 나았다.[79] 일본 해군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에도 인도양 동쪽의 제해권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물론 그 정도라도 영국은 똥줄이 타들어갔지만. 정확히는 양쪽 다 더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에 가깝기는 하다. 일본은 다시 태평양쪽으로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고 영국도 유럽 전선이 급하다보니...[80] 믿기 힘들지만 일본도 군함 건조기술을 독일에 전수해주기도 했다. 바로 그 유명한 그라프 체펠린. 그런데 하필이면 원 모델이 아카기라....[81] 진주만 공습이전 미국의 참전론자들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것을 주장했다[82] 함정 피해는 미군이 컸지만 항공력의 피해는 일본군이 더욱 컸고, 이후 일본 항공모함 부대는 재건에만 매달려야 했다.[83] 연공서열만 아니었으면 나구모보다 먼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앉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레이테 만 해전에서 윌리엄 홀시 제독을 항공모함 즈이카쿠로 낚은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이다.[84] 아카기의 비행대장. 항공모함에서 지휘하는 비행단장은 중좌, 직접 비행하며 지휘하는 비행대장은 소좌이다. 후치다는 소좌 계급으로 항모 아카기의 비행대장이였다. 그러나 기존의 함장/비행단장이 비행대를 지휘하던 방식 대신, 공중에서 항모 4척의 비행대 전체를 통합지휘할 필요성 때문에 후치다가 실질적으로 비행대를 총 지휘하였고, 공습 직전에는 중좌로 승진하였다.[85] 후치다는 회고록 초안에 '전 진주만 공중 공격대 총지휘관, 현 기독교 평신도 전도사'라고 직함을 썼는데, 출판사 측에서 '공중'이라는 단어를 빼놓아 "진주만 공격 총대장은 나구모 주이치인데? 얘는 누구?"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출판사 측의 네이밍 마케팅? 책에는 다른 중요한 순간에는 하느님이 직접 자신에게 나아갈 바를 귀뜀해주어 난관을 해쳐나갔다고 했는데, 유독 진주만 공습에만은 이러한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다.[86] 이것이 헛소리라는 건 당시 중일전쟁을 벌인 주체가 누구이며, 열강들의 중화 대륙에 대한 이권다툼이 왜 중요했는지만 논해도 답이 나온다. 중요한 건 중일전쟁, 누가 시작했는지만 봐도 답이 나온다.[87] 자국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대한 선전 포고를 발표했지만 선전 포고문을 영국측에 전달하지 않았다.[88]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속 시원한 일이지만 이말은 즉, 한국-중국인들도 차별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89] 애초에 1905년 러일전쟁의 와중에 포츠머스 회담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국민들은 러시아로부터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 및 30억 엔의 배상금을 받기 전까지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며 히비야 폭동을 일으킬 만큼 제국주의의 열망에 불타 있었다.[90]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막대한 피해를 입자 전세계가 미국을 안타까워 했지만 유일하게 처칠만이 미국이 참전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