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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G2(Group of two)는 미국과 중국을 가리키는 외교 및 국제정치학 용어로, 중국어로는 양국집단(两国集团)[1]으로 번역한다.'미국과 중국이 세계 2강의 나라'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정치적인 조어이며, 특정한 회의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실제 주요 7개국 정상회담이나 주요 20개국 회의는 존재하지만 'G2 회의'라는 회의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G2란 사실상 미중(美中) 또는 미중관계, 미중정상회담의 동의어인 셈이다.
2. 유래
이 용어는 미국의 전직 공무원 출신 경제학자이자 싱크탱크 PIIE의 창립자인 프레드 버그스텐의 기고문에서 유래됐으며 전직 공무원이란 프레드 버그스텐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 주류학계에서 연구된 개념은 아니며 미국 내에서 G2라는 용어는 거의 쓰지 않는다.현재 일부 중국인들은 자국의 경제성과를 내부 요인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으나 냉정하게 말해서 중국의 부상은 중국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며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다. 195~60년대 자력에 의한 대약진 운동같은 경제부흥 계획은 철저한 실패와 재앙으로 끝났으며 1970년대 미국의 대소련 포위 전략에 의해 미국의 시장개방과 자본투자가 없었다면 중국의 경제부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3. 논란
- 이 용어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었다
G2는 미국의 정재계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로, 이 용어의 함의는 글로벌 패권국인 미국의 전략 타겟으로 소련, 일본에 이어 중국이 록온(Lock-On)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용어에서 '중국과 미국이 세계 2강'이라고 정의한 것은 중국의 경제적 성과나 국력 지표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아니며, 단지 정치적 수사로만 조어되었다. - 중국은 자국을 G2로 인정하지 않는다중국은 이날 통과된 법안들에 대해 "자국의 발전을 억제하려는 조치"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9일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미국이 중국에 선진국이라는 모자를 강요하는 것은 중국의 발전 성과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발전을 억제하기 위해 개도국 지위를 박탈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개도국으로서 중국이 누리는 합법적 권리는 미국 의회가 입을 놀린다고 취소되는 게 아니다"라고 비난하면서 "미국은 중국이 개도국이라는 기본 상황을 없앨 수 없고, 민족 부흥을 향한 중국의 확고한 발걸음도 막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중국 개도국 지위 박탈' 美상원 외교위서 법안 통과…中 반발" 중앙일보 2023.06.09 보도 #
중국에 비우호적인 미 정부 인사에 의해 중국에 이로운 목적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닌 게 명백했기 때문에 중국은 G2라는 개념을 미국의 올가미(口蜜腹劍)쯤으로 여겨 공식적으로 G2개념을 거부했으며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중국의 의무와 기여를 요구하면 한결 같은 중국의 공식 입장은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라는 것을 국제사회에 어필하여 국제부담을 회피하고 있다. 만약 중국이 G2개념을 받아들이면 UN 분담금에서부터 교토 의정서의 이산화탄소 감축, 공적개발원조(ODA) 수혜 중단, 관세 최혜국 대우 중단 등 국제사회에서 부담이 커지게 된다. 이런 혜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예를들어 알리바바 무료배송도 우편발전지수(PDI)차등 혜택으로 중국이 1세계 우체국에 배송료를 부담시키고 무임승차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중국이 세계 2강" 이 아니라, "중국은 아직 선진국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개발도상국(이니 각종 규제 예외사항을 유지해 달라)"이다.## - 이 용어를 중국의 저력이라는 의미로 쓰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G2는 2003년 골드만삭스의 짐 오닐 회장에 의해 만들어졌다가 14년이 지나 쓰임이 다하자 창시자로부터 버려진 브릭스(BRICs)처럼 실제 현상을 반영해서 생겨난 개념이 아니라 특정 목적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내(정부)에서는 자기들을 스스로 G2라고 자처한적 없거나 아니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민간에서는 중국공산당이 경제위기를 맞아 내부구심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통치전략으로 중화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에 경도된 일부 소수파들이 G2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이 단어는 미국에서는 사장된 용어인데다가 상술하듯 용어 자체를 적대적으로 여기는 중국 내부에서도 잘 쓰이지 않으며,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도 인지도가 높지 않다. 이를 '미국과 중국의 2강 구도' 라는 식으로 즐겨 쓰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일본의 경우 G2 하면 'G2 가설(G2論)', 즉 중국이 미국과 경제를 양분할 것이라는 이론의 표제명 정도로 여기며, "중국이 이런 환상을 가지고 있다!" 또는 "이런 중국의 패권주의와 확장정책을 경계하자!" 처럼 상당히 부정적, 냉소적인 뉘앙스로 사용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주로 미중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 친중파 정치인, 교수들과 언론에 의해 자주 사용되면서 G2라는 용어가 대중화되었다.
4. 유사 예
미국과 중국을 지칭하는 G2라는 용어는 2005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국제 정세상 양강 구도는 역사적으로도 몇 번 있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 혹은 전간기의 미국과 대영제국을 G2로 칭할 수 있다. 현대에 종종 거론되는 예로는 아래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4.1. 미국과 소련
자세한 내용은 미소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냉전은 군사, 외교,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소련이 경쟁한, 명명백백한 양강 구도였다. 본문의 G2는 어느 정도 정치적인 관점을 담은 용어인지라 논란이 있는 반면, 냉전 당시에 미국과 소련은 세계를 휘어잡는 2개의 초강대국이었다는 점은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 1945년 이후 미국과 소련은 두 국가 모두 초강대국으로서 당시 소련은 현재의 중국보다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력과 우주항공 측면에서 서로 비교우위에 위치하고자 경쟁하였고 우주 경쟁은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20세기는 서로 이념이 다른 미국과 소련의 긴장감이 팽배했기 때문에 제3차 세계 대전이 두 국가 사이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염려가 가득했다. 미국-중국 패권 경쟁은 "정말 잘 안 풀리면 전쟁까지 갈지도 모른다"라는 정도의 우려지만, 냉전 시기에는 이미 대놓고 서로 적국으로 간주했고 당장 다음날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2]
1991년 12월 25일 소련의 붕괴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러시아의 등장으로 미국과 소련의 길었던 40여 년의 대립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현재까지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치는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4.2. 미국과 일본
자세한 내용은 미일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미국과 일본 양국은 경제적인 패권을 두고 강하게 대립하였고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러한 양상이 두드러졌다.
추축국 3국 중 하나인 일본 제국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했다. 하지만,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에 따른 전쟁특수와 일본의 제조업 발달로 인해 일본은 금세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1964년 아시아 최초인 1964 도쿄 올림픽 개최 및 신칸센 개통, 1970년 1970 오사카 엑스포 개최 등 다양한 국제 대회를 유치하여 일본은 전 세계에 경제적 부강을 과시하였다. 1960년대에는 유럽의 전통 강대국인 영프독, 1980년대에는 무려 소련을 넘어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아시아 유일의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3]
일본의 경제는 특히 1980년대에 급속하게 성장하여 마치 멈출 줄 모르는 증기기관차 같았다. 당시 도쿄의 땅값은 어마어마하게 올라 도쿄의 땅을 다 팔면 미국 대륙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농담까지 돌았다. 일본의 엄청난 경제 성장에 당시 세계 1위 경제대국인 미국은 상당히 위협감이 들었다. 당시 세계 상위 50위 시가총액 순위도 일본 기업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일본의 경제는 미국의 70%까지 따라잡았다. 그리고 미쓰비시가 1989년에 미국의 부와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의 록펠러 센터를 인수하자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4] 1인당 GDP도 1986년 미국을 추월하고 북유럽 국가, 스위스, 룩셈부르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5] 당장 일본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좌지우지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될까 상당히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그런 와중에 1985년, 미국은 일본과 플라자 합의를 맺으며 1980년대 중후반 거품경제가 시작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92년 거품이 꺼지면서 잃어버린 10년[6]을 겪게 되며 미일 간의 경제 라이벌전은 미국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거품경제가 붕괴됨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여 수많은 파산기업이 속출했다. 결국 일본은 계속된 경제 침체를 겪어 2010년에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중국에게 내주고 3위로 밀려났으며, 2024년에는 독일에게까지 3위 자리를 내주고 4위로 떨어졌다.
단, 미일 간의 경쟁은 어디까지나 경제 분야에 한정된 양상이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전방위적으로 경쟁을 치르는 미소, 미중 관계와 다른 아주 제한적인 경쟁이었다. 애초에 일본은 미국이 이끄는 제1세계의 일원이었으며, 냉전 내내 주일미군에 국방을 의존하고 장기 집권한 총리들이 미국과의 관계가 긴밀한 등 정치적으로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미일관계에는 분명한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만약 일본이 정말 미국과 전면적인 경쟁관계였다면 플라자 합의에 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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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어로는 기수 2를 '이(二)'가 아니라 '양(兩, 两)'이라고 하며(ex: 일국양제), 集团(집단)은 영어의 'Group'에 대응한다.[2]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일반인도 아니고 미국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가 "다음 주를 살아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이다.[3] 다만 이스라엘은 이미 일본의 경제발전 전부터 선진국 수준이었으며, 홍콩과 싱가포르 역시 1980년대 초에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4] 다만 이후 거품이 꺼지자 다른 빌딩과 함께 매각했다.[5] 아이러니한 것은 1인당 GDP 순위 상으로는 버블 경제 후가 버블 시기보다 더 좋았다.(...) 잃어버린 10년 시기 일본의 1인당 GDP는 세계 3~4위 수준이었다.[6] 물론 기간으로만 치면 잃어버린 10년, 20년, 30년... 이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쪽은 '잃어버린 1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