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34:49

원자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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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6대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
温家宝 | Wen Jiabao
파일:원자바오_0316wen1.jpg
<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간체자: 温家宝 / 번체자: 溫家寶 (병음: Wēn Jiābǎo)
한국 한자음: 온가보
출생 1942년 9월 15일 ([age(1942-09-15)]세)
중화민국 톈진시
국적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학력 중국지질대학 학사
정당
직업 정치인
전직 중화인민공화국 6대 국무원 총리
이력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파일:attachment/Corbis-DWF15-1198234.jpg
1. 개요2. 생애
2.1. 총리 전2.2. 총리 기간
2.2.1. 일가의 부패의혹
2.3. 퇴임 이후
3. 여담

[clearfix]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6대 국무원 총리.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과 콤비를 이루어 2003년 ~ 2013년 초까지 10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었다. 후진타오 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처럼 이공계 출신으로서 지도자의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원자바오 총리는 1960년 베이징 지질 학원(현 중국 지질 대학)에서 수학하고 14년간 현장에서 지질조사 업무를 맡은 경력이 있다. 그래서 지질학 분야에서는 전문성이 검증된 인물이다.

2. 생애

2.1. 총리 전

베이징 지질학원을 졸업하고 공산당 관료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원자바오는 1968년부터 82년까지 14년간 내륙 오지인 간쑤성에서 지질조사 업무를 맡았다. 오지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업무를 하면서도 성실하게 일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모습이 간쑤성 서기였던 쑹핑[1]과 쑨다광 지질광산부장의 눈에 쏙 들어 81년 간쑤성 지질국 부국장으로 영전한 뒤, 82년에는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 주임으로 임명되어 중앙에 진출하고, 83년에는 지질광산부 부부장(차관급)까지 올라오며 초고속 승진가도를 걷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파격적인 승진인데, 원자바오의 승승장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85년에는 당 간부들의 평균연령을 낮추기 위해 젊은 유망주를 찾고 있던 총서기 후야오방의 눈에 들어 총서기를 수행하는 비서실인 중앙판공청 부주임직에 임명되었고, 86년에는 만 44세의 나이에 총서기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격인 중앙판공청 주임을 맡게 된다.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를 맡으며 중앙서기처에까지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원자바오의 커리어는 변곡점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를 발탁한 후야오방이 실각하고 그 후임인 자오쯔양이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고 축출당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자오쯔양 총서기의 측근이었던 원자바오는 유혈진압을 앞두고 시위대를 말리던 자오쯔양 서기를 수행하며 외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파일:external/imgs.ntdtv.com/p6384002a229564480.jpg
천안문 사태 당시 자오쯔양 총서기. 옆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바로 원자바오이다.[2]

원자바오는 그의 상전인 자오쯔양이 가차없이 숙청되었음에도 중앙판공청 주임 직에 계속 유임되었는데, 이는 원자바오의 능력을 높게 본 덩샤오핑의 조치였다고 한다.[3] 자오쯔양이 해임된 뒤 장쩌민이 총서기가 된 뒤에도 원자바오는 93년까지 중앙판공청 주임 직을 계속 수행한다. 정치적 격량의 와중에 세 명의 총서기를 모시면서도 자리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원자바오가 처세에 무척 뛰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에 선출되었으나 이때부터 원자바오의 출세길은 완행도로로 옮겨가게 된다. 다음 해인 93년에 중앙판공청 주임에서 당 농촌공작영도소조 부조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당내서열상으로는 승진이 맞았으나 당중앙의 모든 주요업무와 기밀을 한손에 틀어쥔 중앙판공청 주임에서 농촌공작영도소조 부조장으로의 이동은 명백한 좌천성 영전이었다. 장쩌민이 상하이 서기 시절의 동료들을 불러들여 상하이방을 구축하던 시기였고 공청단으로 계파가 다른 원자바오가 밀려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4] 그러나 원자바오는 위기를 기회로 바꿔 당시 조장이었던 상무부총리 주룽지의 신임을 얻고 상하이방과도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며 다시 기회를 잡게 된다. 때문에 원자바오는 공청단 출신이면서도 장쩌민을 지근거리에서 모셨고, 주룽지의 지명을 받아 총리가 되는 등 상하이방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립파로 분류되게 된다.

1997년 5월, 15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되었다. 1998년부터 농업, 상업 담당 국무원 부총리를 맡으며 이례적으로 중앙서기처 서기와 부총리를 겸하게 된다.[5] 1998년의 장강 대홍수에서 제방을 무너트려 대도시를 지켜야 한다는 건의를 받았음에도 제방 파괴를 보류하고 수위가 하락할 때까지 지켜보도록 한 신중한 판단으로 많은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중국공산당 내 여러 요직을 거친 뒤에[6] 주룽지의 추천을 받아 후임으로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가 되었다. 다만 동남 연해지방에서 경력을 쌓고 경제분야 차르라는 별명까지 얻은 경제전문가로서 과감한 시장경제 도입을 통한 개혁개방을 강조했던 주룽지와는 달리, 원자바오는 서북지방인 간쑤에서 초기 경력을 쌓았고 농업과 광업 전문가로서 속도조절과 균형발전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전임과 정책방향의 차이는 있는 편.[7] 상무위원단 내 서열은 통상적으로 총리가 맡던 2위가 아닌 3위였는데, 이는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실질적인 서열 1위와 2위를 독점하는 대신 형식적인 서열 2위 자리는 상하이방의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에게 돌아가도록 한 계파별 안배 때문이었다.

2.2. 총리 기간

총리 시절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중국 인민들에게 인기를 끌었는데, 부패의 최고 해법은 민주주의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원자바오는 "민주와 법제, 자유, 인권, 평등, 박애 등은 자본주의 특유의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 발전 과정에서 중국에도 형성된 성과이며 인류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가치관"이란 것을 강조하며 서방식 민주주의가 아닌 중국식 사회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입장이다.[8]

원자바오는 위의 사진에서도 나와있지만 당시 천안문 시위대의 요구에 우호적이었던 자오쯔양 서기의 최측근이었고, 자오쯔양은 장쩌민에 의해 좌천된 후 무수한 회유를 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지 않았던 사람이니만큼, 어느 정도 민주적인 개혁에 우호적인 사상을 가졌을 개연성은 있다. 이후에도 사회 국가주의적 성향이 짙은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과 대립되는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왕양 광둥성 서기의 광둥 모델을 적극 띄우는[9] 등 지속적으로 본인의 성향을 유지했다.

파일:attachment/Corbis-42-20086446.jpg
원자바오는 오래 된 국산 운동화를 즐겨 신고 버스를 타고 다니는 등 '서민 총리'로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했을 땐 쓰촨 성으로 직접 날아가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2011년 4월에 중국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비판했는데, 중국공산당 기관지가 2012년에 들어서 도덕적 상태가 양호하다고 반격했다. 뭔가 국민들에게 인기는 있는데 인기에 비해 실세 라인은 아닌 모양(...). 원자바오가 후진타오 계열인 공청단과 그나마 가깝다고는하나 파벌 싸움에서 거의 언급이 되지 않고 중립인걸 보면 딱히 조직을 만들지 않는 성격인 듯. 상하이 서기를 지내며 상하이방을 만든 장쩌민, 푸젠과 저장에서 오래 근무하며 자기 사단을 만든 시진핑과 달리 원자바오가 당중앙에서 주로 원로들을 모시며 참모 역할을 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원로들의 그늘 아래에서 자기 세력을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기도 했을 것이다.

2012년 전인대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정치개혁을 강조했다. 아마 중국 내 구태 정치인으로 대표되는 보시라이[10] 등 몇몇 수구파를 겨냥한 발언인 듯 하다. 임기 말에 이렇게 추진하는 거 보면 정말 개혁을 뼈저리게 느끼는 듯.

다만 그의 의도를 달리 보는 해석도 있는데, 보시라이로 대표되는 태자당 가운데서도 좌파 + 국가 중심주의 노선이 떠오르자 공청단의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서 자신의 최강점인 청렴을 통해 (혹은 태자당의 최약점인 부패를 통해) 공산당의 신주류가 될 태자당 세력을 미리 견제한 것이라는 견해다. 즉, 후진타오가 직접 하질 못한 걸 총리가 나섰다...라는 이야기고, 이 가설이 맞다면 보시라이 숙청을 주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시진핑 역시 태자당 우파로서 보시라이가 부담이었는지 결국엔 그의 해임에 동의했다.

파일:G4F86dI.jpg
일본에서 그 일있은 후,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간 나오토 총리가 후쿠시마오이대접해 먹었다. 원자바오 총리는 딱 한 입만 베어 먹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일단 주어진 양은 다 먹었다.

2.2.1. 일가의 부패의혹

임기가 말년에 접어들면서 퇴임을 준비하고 있던 2012년 11월, 뉴욕 타임즈에서 그의 일가가 3조 원대의 부정 자산을 모았다는 의혹 기사를 내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를 노리고 평소 원자바오의 언행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원로와 보수파들이 파면까지 거론하며 원자바오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원자바오는 자신의 재산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고 공직자 재산을 공개토록 하는 '양광 법안' 실행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그동안의 청렴 이미지에 금이 갈만한 스캔들이 벌어졌지만 민심을 잃진 않았는지 실각하진 않았고, 2013년 3월 전인대 마지막 정부 업무 보고 연설을 마친 후 이례적으로 1번이 아닌 3번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행동을 취했는데, 이 행동이 중국 네티즌들에게 감동을 줘 일명 총리의 삼국궁이라 불리며 그해 전인대의 스타로 나름 화려하게 총리 인생을 마감하였다.#

2.3. 퇴임 이후

이러쿵저러쿵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긴 하지만 중국에선 명 총리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또 자서전을 집필해 정치 개혁을 주장하면서 부딪혔던 반발 등 내막을 폭로하고, 뉴욕 타임스에 의해 까발려진 일가의 비밀 재산 문제를 해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내 중화권 매체 보쉰에선 이것도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까긴 했다만.(...)[11]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20세기에는 주은래가 있었고, 21세기에는 원자바오가 있다"라는 평도 한다.

퇴임 이후 비교적 조용히 지내는 편인데, 출간을 예고했던 자서전을 다시 안쓰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리고 이래저래 여러 루머가 떠돈다. 자식들이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말리지 못한 데 대해 ‘중대 착오’라며 후회의 뜻을 밝혔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한걸로 볼때 자식 농사는 실패한 듯도 보인다.

이후 학생들에게 강연 등을 하며 노후 생활을 보내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물러나고 시진핑 체제가 들어서면서 중국의 민주화는 한층 더 요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명백히 중국공산당의 원로인지라 시진핑도 원자바오에게 대놓고 정치 보복을 가할 정도로 막 대하지는 않고 있다. 공산당 100주년 행사에도 시진핑과 함께 주석단에 오른 것을 보아 사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2021년 마카오에서 발행되는 잡지 오문도보에 원자바오가 2020년 사망한 어머니에 대해 쓴 글이 실렸는데, 한가지 눈에 띄는 점은 이 글에 대해 위챗에서 공유 금지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이다. 시진핑 체제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3. 여담

젊었을 적 하루 공부 시간의 절반을 중국 고전을 공부하는데 썼으며, 훗날 이 고전 실력을 바탕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특히 당나라 시를 좋아한 것으로 보이는데, 공직자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시인 이상은의 시구절을 인용하며 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강론하기도 했다.

처음 총리로 발탁됐을 때, 중국 당국이 한국 기자들에게 한국의 바둑 기사 이창호의 기국과 흡사한 유형의 인물이라 설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국 정치인들 중에서 특히 인품이 훌륭한 인물로 유명하다. 검소한 사생활과 솔선수범하는 태도 덕분에 재임 기간에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주은래에 비유되었다는 중국 내 평가가 나온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인터넷상에서 그를 우회적으로 언급할 때에는 텔레토비, 즉 톈셴바오바오(天线宝宝)라고 불린다고 한다. 후진타오는 금호타이어 링크, 즉 진후룬타이(錦湖輪胎) 혹은 당근(후뤄보), 저우융캉은 캉스푸[12], 보시라이는 출신대로 충칭훠궈(火鍋)라고 불린다고 한다. 넷상에서 종종 이렇게 지칭되는 이유는 역시나 명불허전인 중국의 금순공정 때문.

의외로 타이완에서도 원자바오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이완의 일부 인사가 원자바오의 양안관계 개선 노력을 높이 사서 2016년 지룽그의 동상을 세웠다. 설립자의 변으로는 '대만을 사랑하는 이는 대만의 영웅으로 충분히 불릴 자격이 있다'라고.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 양안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2010년 초반에 가장 상승 가도를 달렸다.[13] 다만 아직까지 양안은 적대 관계인지라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아 하루 만에 철거 위기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김영남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의 동상을 인천에 세운 격이라나... 결국 얼마 못 가 설립자가 자진 철거했다.

200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강연을 했는데, 강연 도중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신발을 던져서 당혹스러운 일을 당한 경험이 있다.[14] 다행히 위험 순간을 포착한 경호원들이 잽싸게 막아섰고 원자바오 본인은 양팔로 잽싸게 막아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바오는 자신에게 신발을 던진 일본인 유학생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대인배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등 평소의 성품 그대로 온화하게 대처했으나, 실제로는 분명 당황했을 듯. 여담으로 이때 이 상황을 TV로 보던 원자바오의 모친이 충격을 받고 이후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2006년 4월23일 충칭시 광다 과학기술원 목축연구소를 방문하여 “나에게 꿈이 하나 있다. 모든 중국인, 특히 어린이들이 매일 우유 1근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자 중국에서는 중국의 체육영웅인 육상선수 류샹이 홍보대사가 되어 대형 광고판을 내세우고 후난성에서는 대장정에서 이름을 딴 ‘우유 장정’ 운동을 여는 등 전국적인 캠페인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로 인하여 1년 동안 탈지분유 표준 가격, 액상우유 선물 가격 등 국제 우유 가격이 무려 두 배 가까이 올랐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치즈버터 등 유제품 가격도 동반하여 급상승했다.


[1] 이후 당 조직부장을 거쳐 정치국 상무위원직까지 역임한다. 같은 방식으로 쑹핑의 주목을 받아 간쑤에서 발전소 업무를 하다 발탁되어 초고속으로 승진한 인물이 이후 원자바오와 함께 짝을 이루게 되는 후진타오다. 다만 공청단 중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당중앙의 비서직에 배치된 원자바오와는 달리 후진타오는 공청단 제1서기직을 역임한 후 구이저우와 티베트의 성위서기를 맡으며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걷게 된다. 때문에 둘은 같은 공청단파에 속하면서도 정치적인 입장과 배경은 미묘하게 다른 편.[2] 이때 자오쯔양의 한 말이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였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자오쯔양은 막후 실세 덩샤오핑에 의해 당 총서기직에서 해임됐고, 이후 종신 가택연금을 당해 죽기 직전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3] 후야오방은 공청단의 거두였고,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가차없이 숙청당했으니 후야오방의 직계인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등도 당연히 밀려나는 게 정상적인 수순이었겠으나, 어찌보면 중간에 끼인 실무진이자 당의 미래였던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 보수파 원로들조차도 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의외로 이들은 보호를 받으면서 4세대 최고지도부로 등극하게 된다.[4] 장쩌민에게 중앙판공청 주임 원자바오는 말이 비서실장이지 사실상 당 원로들이 박아놓은 감시역이나 마찬가지였던지라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원자바오의 후임 주임으로는 장쩌민의 장자방으로 불리며 시진핑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이후 엄청난 활약을 한 장쩌민의 최측근, 쩡칭훙이 부임해오게 된다.[5] 원래 국무원 업무와 당 업무는 같이 맡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부총리직을 맡으면서도 서기처 서기 직을 유지하며 중앙당 업무에도 깊게 관여했다는 것은 원자바오의 권한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6] 다만 원자바오는 쑹핑의 눈에 들어 간쑤를 떠난 뒤 20년을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 입성의 필수요건으로 일컫어지는 지방 성장, 서기직을 전혀 지내보지 못했다. 다만 그런 약점은 후보서기부터 해서 중앙서기처에 15년씩이나 있었고, 권부핵심의 중앙판공청 주임을 7년이나 지냈기 때문에 상쇄될 수 있었다. 공청단 중앙에서 활동하며 지방 실무를 경험할 기회가 적었던 다른 공청단 관료들과는 달리 간쑤성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업무를 하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물이기도 하고.[7] 이는 선부론에 의거해 동남 연해지방이 성장을 주도했던 장쩌민 시기와는 달리, 서부 내륙지방의 균형발전에도 신경쓰며 지역간 빈부격차의 심화를 완화해 보려는 공산당 지도부의 의도가 담긴 인선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후진타오도 상하이 서기 출신인 장쩌민과는 달리 간쑤성에서 초기 경력을 쌓은 뒤 구이저우와 티베트 서기를 지냈다.[8] 물론 본질적으론 민주주의에 좀 더 가깝게 가자는 말이라 이조차 거부하는 반대파들 견제를 고려한 말장난일 수도 있다. 사실 원자바오가 중국식 민주주의를 주창할 것도 없는게, 이미 중화권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영웅 취급받는 쑨원이 제시한 중국식 삼민주의가 있다. 하지만 원자바오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은 쑨원의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수립된 정권이기 때문에 쑨원 개인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삼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하여튼 이 중국식 사회 민주주의마저 후진타오-원자바오 시대 이후부턴 무너지기 시작해, 아니나다를까 중화인민공화국은 마오쩌둥 이후 다시 일인 철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9] 기사에는 경제적인 측면만 나와있지만, 광둥 모델은 정치적 측면에선 민주주의 요소를 상당히 가지고 있다.[10] 홍위병 출신이기도 하다.[11] 보쉰은 기본적으로 망명객들이 운영하는 반중 황색 언론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까는 게 당연하다. 또 이 매체는 찌라시성 기사도 많은데 보시라이 몰락을 보도하면서 장쯔이의 성매매설을 보도했다가 고소미에 걸려 보상금과 사과를 한 바 있으며, 장쩌민이 체포되었다며 합성 사진을 올렸다가 얼마안가 허위로 밝혀지기도 했다.[12] 대만라면 업체로 중국 라면 시장을 휘어잡은 브랜드다. 현재는 우육면 레스토랑을 열고 있다.[13] 2000년대 초반 소삼통, 2000년대 후반 대삼통을 통해 양안간 직접 교류가 가능해진 탓에 있다. 참고로 소삼통을 주도했던 이는 다름아닌 현 민주진보당 출신 총통인 차이잉원. 현재 중국 당국에서 차이잉원에게 정치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걸 생각하면..[14] 영국에 유학을 온 일본인 유학생이었고 혐중 감정이 굉장히 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