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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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10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리잔수 [ruby(栗,ruby=Lì)][ruby(战,ruby=Zhàn)][ruby(书,ruby=shū)](栗戰書, 율전서) | Li Zhanshu | |
국적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50년 8월 30일 ([age(1950-08-30)]세)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스자좡시 핑산현 |
학력 | 허베이사범대학 학사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정당 | |
주요 이력 | 중앙 보밀위원회 주임 중앙 판공청 주임 헤이룽장성 당 부서기·성장 허베이성 당 상무위원·비서장 공청단 허베이성 당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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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前 정치인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석 및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인 중 한 명이었다.2. 생애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에서 태어났다. 본인의 연고지인 허베이성에서 공산당에 가입하여 그곳에서 경력을 시작하였다.3. 행보
줄곧 허베이성에서 중국공산당 입적을 쌓다가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고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며 중국공산당 주요 서열에 첫 얼굴을 보였다. 태자당으로 분류되는 리잔수는 관료생활 초기, 1980년대 허베이성의 우지현 서기를 지내던 시절 이웃한 정딩현의 서기였던 시진핑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리잔수의 초기 경력은 잘 풀린 편은 아니었다. 93년 허베이성 비서장 겸 상무위원(차관급)에 선출되어 기세좋게 시작했으나, 그 자리에서 서기인 청웨이가오의 눈 밖에 나면서 한직을 맴돌게 된다. 2002년 11월, 1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2007년 10월, 17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그쳐 만 60세가 되는 2010년 이후에는 은퇴해야 할 상황이었다.그러나 2008년 정치국 상무위원과 국가부주석직에 오르면서 사실상 차기 후계자로 내정된 시진핑에 의해 리잔수는 급속도로 발탁되어, 2008년에는 헤이룽장성 성장, 2010년에는 이례적으로 중앙위원이 아닌데도 구이저우성 당서기로 고속승진하여 차기 지도부 진입을 눈 앞에 두게 된다.
2012년에는 시진핑의 부름을 받아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발탁되었으며, 바로 후진타오 시절에 중앙판공청 주임이었던 링지화를 대신해[1] 시진핑의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인 판공청 주임 직책을 넘겨받으며 시진핑의 최측근 자리를 꿰차게 된다.[2] 이후 2012년 11월, 18대 당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위원은 아예 건너뛰고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이후 5년 동안 중앙판공청 주임을 지내면서 시진핑의 정적 숙청에 큰 역할을 했다. 이윽고 19대에는 서열 3위인 전인대 상무위원장 직책을 차지하고 정치국 상무위에 진입해, 최고 지도부의 반열에 들게 된다.
홍콩 기본법에 대한 최종 해석 권한은 원래 전인대에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리잔수는 2020년 5월 27일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불리는 전인대 결의 통과를 주도하였다. 때문에 시진핑, 홍콩과 마카오를 담당하는 상무위원 한정과 함께 리잔수는 홍콩 민주화운동 탄압에 대해 최종적 책임을 져야 하는 인사 중 한 명이다. 당시 리잔수는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의 의미를 설명하는 인터뷰에서, 반분열국가법과 홍콩 국가보안법 등의 영향으로 타이완 독립운동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등의 반분열국가법 위반 행위를 엄벌에 처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리잔수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차이잉원 중화민국 총통에 대해 "대만 독립을 주장하며, 정세를 오판하고, 끊임없이 하나의 중국에 대한 도발을 하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기사
2022년 9월 15일 총 66명의 대규모 수행단을 대동해 내한한 뒤 다음날인 16일 윤석열 대통령을 만난 뒤 양국간의 우호를 강조했다. # 같은 서열 3위고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리잔수와는 회담을 가진 것이 최우방 미국 하원의장의 방한에도 전화통화만 해 패싱 논란이 일어난 것과 대비된다는 평가가 있다. #
20차 당대회에서 은퇴가 확정되면서, 한국 방문이 사실상 리잔수의 마지막 대외활동이 되었다. 당대회 시점에서 67세로 은퇴할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시진핑에 의해 사실상 강제로 물러난 리커창, 왕양과는 달리, 만 72세 리잔수의 은퇴에 정치적 해석을 덧붙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자타공인 최측근으로서 시진핑의 임기 내내 든든한 우군이었던 만큼 은퇴 후에도 당 원로로서 시진핑을 측면에서 지원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당대회 도중 후진타오 강제 퇴장 논란이 일어났을 때 후진타오가 리잔수의 앞에 놓인 서류[3]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며 실랑이를 벌였고, 이후 퇴장을 요구하는 경호원과의 대치를 불안하게 지켜보다가 후진타오를 부축했고 왕후닝이 제지하는[4] 사건이 있었다.
4. 기타
중앙판공청 주임과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지내던 시절, 중국 정치계에서 왕치산과 더불어 시진핑의 오른팔로 불릴 정도로 지도부 내 위상이 높았다. 물론 둘 다 은퇴하게 된 20차 당대회 이후에는 다 지나간 이야기.[1] 18차 당대회를 치르기 전인 2012년 8월에 주임 자리를 넘겨받았으니 교체가 이례적으로 빠르게 이뤄진 것이다. 나중에 드러난 것처럼 링지화가 3월 아들의 페라리 사고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덕분에 가능했으며, 시진핑은 빠르게 중앙판공청에 자기 사람인 리잔수를 심어 이른 정국 장악에 성공하는 큰 행운을 누린 것이다.[2] 중앙판공청 주임은 총서기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만큼 젊고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에게 맡기는 자리인데, 재미있게도 리잔수는 시진핑보다 3살이 더 많다.[3] 이 서류가 투표와 관련된 것이었으며 절차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는 설, 원래 합의와 달리 서류의 정치국원 명단에 후계자로 밀던 후춘화가 빠진 것을 보고 항의했기 때문#이라는 설 등 문건의 정체를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물론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폐쇄성을 감안하면 실제 진상은 영영 알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4] 시진핑 직계인 리잔수가 후진타오와 계파는 달랐어도, 본능적으로 전임 주석이자 당의 최고 원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기 위해 나섰다는 해석이 있다. 시진핑이 앉아만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일어서 후진타오를 부축하려 한 리잔수를 왕후닝이 제지했고, 후진타오가 퇴장당하는 와중에도 오히려 공청단파의 리커창과 왕양은 앞만 쳐다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구체적 해석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어도, 이 장면을 보며 시진핑 독재의 시작을 실감했다는 것은 지켜본 이들의 공통적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