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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11대 부주석 한정 [ruby(韩,ruby=Hán)][ruby(正,ruby=Zhèng)](韓正, 한정) | Han Zheng | ||
<colbgcolor=#ee1c25> 국적 | 중화인민공화국 | |
출생 | 1954년 4월 22일 ([age(1954-04-22)]세)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쉬후이구[1] | |
학력 | 복단대학 화둥사범대학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
정당 | ||
현직 |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 |
주요 이력 | 제16기~18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상하이시 시장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대행)[2]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무원 상무부총리 | |
계파 | 상하이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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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2. 생애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츠시시에서 태어났다. 1979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푸단대학을 거쳐 화둥사범대학에서 학업을 마쳤다. 이후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지위가 계속 오르게 되었으며 16기, 17기, 18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오르며 중국공산당 내 주요 권력 서열에 반열하게 되었다.상하이 시장 및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를 맡게 됨으로서 인지도가 올랐고, 제19기 중국공산당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서열 7위에 발탁되며 국무원 상무부총리를 지냈다. 부총리 중 서열 1위인 상무부총리는 이 때까지 경제나 금융 정책을 맡아왔지만, 이 부분의 실세가 류허 부총리였고 한정은 외교안보 문제에 더 집중했다는 시각이 있었다. 경제분야에서는 리커창이나 한정을 총리나 경제부총리로 본다면, 대통령급인 시진핑의 최측근이자 경제참모인 정책실장격인 류허가 두 사람의 직급보다 낮지만 경제정책에선 힘이 매우 강했다는 평가이다.
3. 행보
줄곧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입적을 쌓다가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열리고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며 중국공산당 주요 서열에 첫 얼굴을 보였다. 이는 중국공산당 계파 갈등 내 공청단, 태자당 그리고 상하이방의 힘겨루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시진핑이 상하이 시 당위원회 서기였을 때 한정이 보좌한 경험이 있기에 발탁되었다고 보는 쪽이 더욱 우세하다. 19차 당대회 이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시진핑이 참석할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으나 이 사람이 대신 30명 가량의 대표단과 함께 특별대표로 참가하였다. 여기서 한정 부총리는 김영남 전 상임위원장과 접견했다고 한다.리커창 뒤를 이어 총리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이 있는 한편 20차 당대회에서 정계은퇴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는데, 2023년 3월 열린 전인대 14기 1차 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에서 빠졌지만 정계를 은퇴하지는 않고, 왕치산의 후임으로 국가부주석에 임명되었다. 한정은 정치국 상무위원 7인보다 낮은 당내 서열 8위였던 전임 왕치산과 달리, 왕후닝 정협 주석 바로 다음의 명목상 당내 서열 5위[3]로 호명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한정은 68세로 정년에 도달했음에도 정년에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사실상 은퇴를 강요당한 공청단파의 리커창, 왕양과는 달리, 국가부주석으로서 임기 5년을 추가로 보장받으면서 당내 서열도 7위에서 5위로 상승하였다. 상무위원단에서 빠지고 상징적인 직책인 국가부주석으로 이동하며 실권은 줄었지만, 여전히 시진핑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봐도 될 듯.
4. 여담
중앙 진출 이전에는 평생 상하이시에서 일했던 만큼, 중국공산당 정치계파로는 상하이방에 포함된다. 한정이 상무위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진핑이 상하이에서 일할 때 그를 잘 보좌했던 점[4]과, 성격이 모나지 않고 원만하며 윗사람을 잘 모시고 성실하다는 평이 있는 점 (나쁘게 말하면 예스맨) 등 때문에, 다른 파벌의 비토를 받지 않은 이유가 크다고 보인다.중국은 상무위원들이 전체 구역을 나누어 각기 지도하는데, 홍콩이 한정의 지도를 받는다. 즉, 현재 홍콩 행정장관의 직속상관이 한정이 되는 것이다. 원래라면 캐리 람 행정장관 - 한정 상무부총리 - 리커창 총리 - 시진핑 주석 순으로 보고가 올라간다. 실제로 11월 홍콩에서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진행되고 있었을 때 선전시에서 관료들을 다 모아서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2019년 11월 4일 홍콩의 캐리 람 행정장관이 한정보다 먼저 시진핑을 만나게 되는 일이 벌어진 바 있다. 이건 중국 국립전시컨벤션센터(상하이)에서 시진핑이 캐리 람을 직접 소환하면서 벌어진 일인데, 캐리 람은 기조연설만 하고 나갈 예정이었으나 시진핑이 캐리 람의 손을 잡고 회담장으로 끌고 들어가서(영상도 있다!) 강제로 회담한 케이스이다(...)
캐리 람은 11월 5일 한정에게 이 상황이 발생한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한 바 있다(직속상관을 건너뛰고 윗선을 먼저 만난 것이므로). 한정은 그 상황에 대해 양해한다고 밝혔지만, 당연히 기분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1] 본적지는 저장성 츠시시다.[2] 전임자 천량위가 사회복지기금 횡령등 비리(4조원대)로 해임되어 당시 부서기 겸 시장이었던 한정이 직무대행. 천량위는 18년형 선고 후 베이징 친청 교도소 복역 중[3] 다시 말해 정치국 상무위원단 내 서열 5, 6, 7위를 차지한 차이치, 딩쉐샹, 리시보다도 의전서열이 앞선다는 이야기이다.[4] 시진핑은 2007년 3월 전임 상하이 서기 천량위의 숙청 이후 구원투수로서 부임해오게 되었는데, 이 자리는 시진핑 입장에서는 위기를 잘 수습할 경우 단번에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등극하는 디딤돌일 수 있지만,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본인의 정치경력이 망가지거나 최악의 경우 숙청까지 감수해야 하는 독이 든 성배였다.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명을 받들어 천량위와 결탁한 상하이방 일파들의 여죄를 캐면서도, 틈만 나면 자신과 훨씬 가까운 리커창을 밀 게 뻔했던 후진타오가 책잡을 거리를 주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정은 상하이 토박이로서 현지 실정을 잘 모르는 서기 시진핑을 성공적으로 보좌해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쌓고, 다음 해 시진핑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어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때문에 상하이방임에도 불구하고 시진핑의 신임을 얻게 된 것. 상하이의 2인지였던 시장 한정은 서기 천량위의 비위행위를 모를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천량위 숙청 당시에는 좌천, 혹은 천량위의 뒤를 이어 숙청될 거라는 소문까지 도는 상황이었다. 그랬는데도 한정은 시진핑을 잘 보좌해 책임 추궁을 피하고, 오히려 다음 당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상하이 서기로 승진까지 해낸다. 한정 역시 본인 계파인 상하이방을 떠나, 관료 생활 최대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만들어준 시진핑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할 이유가 충분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