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4-07 23:12:20

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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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제2대 주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정체 陳雲
간체 陈云
한국식 독음 진운
영문 Chen Yun
출생 1905년 6월 13일, 청나라 강소성 우장국[1]
사망 1995년 4월 10일 (향년 89세), 중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국 파일:중국 국기.svg
직업 정치가
종교 무교(무신론)

1. 개요2. 행적3. 생애4. 사상
4.1. 경제4.2. 정치
5. 가족 관계6. 기타7. 참고 문헌

1. 개요

중국의 정치가. 덩샤오핑, 펑전, 보이보, 양상쿤, 덩잉차오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며 중국공산당 2세대 리더, 대표 인물 중 하나이다.

2. 행적

1925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중국 공산 혁명에 한몫을 톡톡히 했고 중일전쟁 종결 시점에 이미 최고지도부에 진입해, 개혁개방 시기 당내 원로들 중에서는 당내 경력과 관록이 가장 앞서는[2] 인물이었다. 신중국 수립 이후에는 국무원 상무부총리를 맡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재정 및 경제 정책의 최고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이 당 주석 마오쩌둥의 부사수였다면 상무부총리 천윈은 총리 저우언라이의 부사수였던 셈이다.

덩샤오핑이 그의 대표 정책 개혁개방 때문에 경제 전문가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그는 당 관료들과 군부의 우두머리였고 최고지도자에 올랐을 당시에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국가주석이나 총서기 등을 자기 사람으로 세우고 간접적으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통치했다. 그리하여 경제는 마오쩌둥 시절부터 개혁개방 시기까지 쭉 천윈이 관장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실권을 잃었으나[3] 마오쩌둥의 사망과 사인방의 몰락 이후 복권되었다. 개혁개방 시대 초기에는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자 경제정책 총 관리자 였으며 개혁개방 후반기 시기에는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1대 주임 덩샤오핑을 이어 실질적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고문위원회[4] 2기 주임으로서 중국의 경제 개혁을 주도하며, 사실상 덩샤오핑과 동급의 당내 거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천윈은 당내 보수파의 수장으로서 천안문 사태와 동구권 붕괴, 급격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고조된 급진적 개혁개방에 대한 반대여론을 이끌며 덩샤오핑의 후계자인 후야오방, 자오쯔양을 밀어내는[5] 데 성공한다. 이후 천윈은 후계자를 자신의 노선을 따르는 장쩌민으로 교체해 덩샤오핑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천윈 등 보수파는 항상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역할을 하는 당과 군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군부와 여론을 등에 업은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통해 명분에서까지 우위를 점해 개혁개방을 당의 확고한 방침으로 못박으며 권력투쟁은 덩샤오핑의 판정승으로 끝이 난다. 그럼에도 천윈을 필두로 한 보수파는 남순강화 이후에도 여전히 당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개혁개방파와 보수파, 혹은 덩샤오핑파와 천윈을 필두로 한 반덩샤오핑파 사이의 대립은 지금까지도 당내 역학구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천윈/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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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상

4.1. 경제

천윈의 경제사상은 '균형 성장론'으로 정의된다. 그는 사회주의가 두 종류의 경제로 구성된다고 봤다. 하나는 공유제에 기초를 둔 '계획경제'다. 천윈은 경제 개혁을 추진하더라도 이 계획경제엔 절대로 손을 대지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하나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 생산하는 '시장조절'이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무한정 억압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 보유와 자율 시장활동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천윈의 원칙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새장경제론(鳥籠經濟論)'이다. 새장은 "계획"을 가리키며, 새는 "시장"을 가리킨다. 즉, 시장(새)은 허용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획(새장)이라는 일정한 범위내에서만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원래 황커청(黃克誠)이 처음 사용했고, 천윈은 황커청의 생생한 비유가 마음에 들어 공식석상에서 여러 차례 이를 인용해 계획과 시장 간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래서 새장경제론은 천윈 경제관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천윈은 '균형 성장'을 이루기 위한 비율에 맞는 발전을 주장했다. 그는 1954년경에 '4대 비율'과 '3대 균형' 개념을 제시했다. 4대 비율은 ① 농업과 공업, ② 경공업과 중공업, ③ 중공업 각 부문, ④ 공업 발전과 철로 운송 간의 비율을 말한다. 그리고 3대 균형은 ① 재정의 수입과 지출, ② 구매력(소비)과 상품 공급, ③ 주요 물자의 공급과 수요 간의 균형을 말한다. 천윈은 1978년 이후에 3대균형의 내용을 다소 변경해 경제 발전은 ① 재정 수입과 지출의 균형, ② 은행 수신과 대출의 균형, ③ 물자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1980년대 말부터는 외환 수지의 균형을 추가해, 이른바 '4대 균형'의 유지를 주장했다.

천윈은 균형을 상실한 과도한 성장을 반대했다. 그는 재정 적자에 기반한 과도한 중화학공업의 투자, 철강이나 전력 등 전략 물자의 공급을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기반시설의 확충, 화폐 발행을 통한 자금 충당과 이를 통한 확장적인 재정의 운영, 과도한 외자와 설비 및 기술의 도입에 의존한 공업 건설 등은 국가 경제를 망치는 짓이라고 간주했다.

천윈이 이렇듯 균형 성장을 주장한 것은 중국의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80%를 점하는 현실을 고려한 데서 기인했다. 그는 이와 같은 “중국의 특수성”을 명확히 인식한 상태에서 4개 현대화를 추진해야 하며, "마르크스와 중국 혁명의 가르침에 따라" 농업, 경공업, 중화학공업 순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봤다. 그는 이와 같은 균형 성장이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빠르면서도 국가를 전반적으로 성장시키는 진로라고 주장했다.

4.2. 정치

균형과 균분 등 어지간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진보적이고 민주적이었던 경제 사상과 달리 정치적인 사상은 그 또한 독재국가의 최고위 권력자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가족 관계

천윈은 1938년 자신의 개인 간호사였던 위뤄무(于若木)와 결혼했다. 위뤄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앙 재경위원회 전문가 연락실의 비서로 활동했고 국가과학기획위원회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후 영양학과를 수강해 영양학자 칭호를 받았고 중국 영양학회 명예이사, 건강학회 명회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임신, 수유기 여성 영양 식단>, <학생영양> 등이 있다. 그녀는 2006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
  • 장녀 천웨이리(陈伟力, 1942년 1월~)는 중국 신기술 창업투자회사 부사장, 중국 국제기술지능협력회사 사장 겸 당서기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저장성 애심자선재단 이사장이다.
  • 장남 천위안(陈元, 1945년 1월~)은 칭화대를 졸업하고 국가개발은행 이사장 겸 제12회 전국정협 부주석을 맡았다.
  • 차녀 천웨이화(陈伟华. 1947년~)는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실험중학과 베이징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실험중학에서 역사교사를 지냈다.
  • 삼녀 천웨이란(陈伟兰, 1949년 4월~)은 전 국가행정학원 부원장이었다.
  • 막내 아들 천방(陈方)은 현재 중산실업그룹 사장이다.

6. 기타

고향 상하이시에는 기념관이 있고 4A급 여유경구로 지정되어 있다.#

7. 참고 문헌


[1] 현재 상하이시 칭푸구[2] 덩샤오핑은 당시 쓰촨성에서 구르고 있었다. 물론 덩은 천윈에게 없던 군 경력이 있었고 덕분에 최고지도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지만.[3] 다만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어서 그런지, 권부핵심에서 밀려나는 선에 그치고 덩샤오핑이나 양상쿤과는 달리 크게 고생하지는 않는다. 이는 천윈 역시 마오쩌둥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마찬가지였어도 덩샤오핑만큼 그의 유산 청산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4]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천윈, 덩샤오핑,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천윈이 원로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5] 물론 덩샤오핑 역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원로들이 설정한 한계치를 넘어 월권을 저질렀다고 판단해 그들의 사임을 요구한 천윈 등 보수파에 동의한 것은 맞다. 그러나 둘은 덩샤오핑이 직접 고른 후계자였던 만큼 그 역시 정치적 책임론과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