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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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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장
한문 谢富治
한국식 독음 사부치
영문 Xie Fuzhi
출생 1908년 8월 청나라 후베이성 홍안현
사망 1972년 3월 26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직업 군인, 정치가, 공안부장
종교 없음(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시기2.3. 국공내전 시기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2.5. 문화대혁명 시기2.6. 사망, 그리고 제명
3. 가족 관계4.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공안부장. 1930년 중국공농홍군에 참가하고 이듬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뒤 홍군의 정치위원으로서 활동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인민무력경찰대원을 역임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공안부장으로서 중앙문혁소조에 참여해 반혁명세력으로 지정된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홍위병의 만행을 방관, 방조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 및 군대가 홍위병을 제지하는 걸 금지해 중국 전역의 치안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후 중국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1909년 8월[1], 셰푸즈는 후베이성 홍안현 관진의 풍강사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생활했으나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소를 끌고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기도 했으며 목수 노릇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공궁한 살림 속에서도 때때로 서당에서 글을 읽으며 미래를 준비했고 청년 시절엔 친지들로부터 신문을 빌려 읽었다. 그 결과 그는 마을에서 식견이 비교적 넓으며 총명한 젊은이로 손꼽혀서 주위에 늘 그를 추종하는 젊은이들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1926년 10월, 셰푸즈는 18세에 고향에서 농민협회에 참가하여 토지분배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7년 7월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농민 운동은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그는 이에 맞서 1927년 11월 황마(黃麻) 폭동에 참가했으나 실패했고 농민협회의 핵심 멤버들이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셰푸즈는 급히 고향을 떠나 3년 동안 각지를 방랑했다.

그러던 1930년 2월, 셰푸즈는 자신의 고향 홍안이 홍군의 근거지로 변하자 즉시 귀향해 노동자 규찰대에 참가했고 같은 해 중국공농홍군 제1군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이 시기에 홍4군의 선전부대원을 맡아 정치사상이 의심되는 군 간부 및 병사 숙청 작업에 참여했다. 이때 그는 "모든 것을 과감히 의심하라!"는 슬로건을 제시했고, 장궈타오는 이에 대해 셰푸즈가 훗날 훌륭한 공산당원이 될 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32년 10월, 셰푸즈는 홍4군의 주력인 서정천 산변구의 연대 정치처 주임을 맡았으며, 뒤이어 홍9군 26사단 정치부주임, 홍4군 총정치부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홍4군의 간부로서 국민혁명군의 초공작전에 맞서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다가 1935년 10월 대장정이 개시되자, 셰푸즈는 홍4군의 장정에 참여해 쓰촨성-티베트 국경지대로 갔다가 홍4군이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당하자 홍4군 잔여 병력과 함께 옌안으로 도주했다. 그후 그는 옌안에서 항일홍군대학에 입학했으며 장궈타오의 무능을 맹렬히 비판했다.

2.2. 중일전쟁 시기

1937년 8월 25일 중국공농홍군이 팔로군으로 개편되었을 때, 셰푸즈는 팔로군 제129사단 386여단 772연대의 정치처 주임을 맡았다. 그리고 1938년에 제129여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1940년, 그는 백단대전에 참여하여 산간 지역을 수비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타이항(太行)군구 부사령관을 맡아 1942년 7월 경에 공세를 개시해 타이항 산맥 일대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으며 1942년 가을에 상당전투에 참가했다. 그후 그해 연말에 타이항산을 떠나 옌안으로 가서 중공타이항 제6위원회의 총서기를 역임했다.

2.3. 국공내전 시기

중일전쟁이 끝난 후, 타이항군구의 주력은 진기루예 야전군 태악종대로 개편되었고, 셰푸즈는 종대 정치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9월에 부대를 이끌고 출격해 국민혁명군을 습격하여 1만 4천여 명을 섬멸하고 19군단장 스쩌보(史澤波) 등 7명을 생포했다. 그해 12월, 그는 제8종대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1946년 7월에 제4종대 사령관 천겅(陳賡)과 협력하여 국민혁명군과 전투를 벌였다. 8월 9일, 그가 이끄는 8종대는 국민혁명군 39사단과 69사단을 격파하고 1만 2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5개의 현을 공략했다.

1946년 9월 말, 셰푸즈는 린푸(臨浮) 전투에서 중일전쟁 시기 뛰어난 활약을 선보여 "천하 제일의 여단"이라는 칭송을 받던 국민혁명군 제1사단 제1여단을 섬멸하고 여단장 황정성(黃正誠)을 생포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산시성 남서부 전역에 참여해 진차지 군대의 뤼량(呂梁) 지역 진군에 협력하여 국민혁명군 2만 6천여 명을 섬멸했다. 1947년 7월, 셰푸즈는 진기루예 야전군 제4종대와 진기루예 야전군 제9종대, 제38군을 합쳐 '진사병단(陳謝兵團)'을 조직하여 황하로 남하하여 하남으로 들어갔다.

1947년 8월, 셰푸즈와 천겅이 이끄는 군대는 룽하이 철도를 절단했다. 그후 10월 하순까지 국민혁명군 3만여 명을 섬멸했으며 15개의 현을 점령했다. 그해 연말에는 23개의 현과 성을 추가로 공략했으며 만여 명의 국민혁명군을 섬멸했다. 1948년, 셰푸즈는 낙양에서 국민혁명군과 2차례 교전을 벌인 끝에 낙양 공략에 성공했으며 같은 해 5월 완서 전투, 완동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고 위산 해방구를 건립했다. 또한 11월엔 화이하이 전투에 진사병단을 이끌고 참가해 국민혁명군 제12연대를 섬멸했다. 1949년, 셰푸즈는 제2야전군 3병단 정치위원으로 부임했으며 양쯔강 도하에 참가했으며 충칭시 공략에 가담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셰푸즈는 중국 공산당 동구 당서기, 촨둥(川东)군구 정치위원, 중공 운남성위원회 제1서기, 서남군구 부정치위원, 원난군구, 쿤민군구, 인민무장군구 정치위원 등을 겸임했다. 또한 그는 1952년부터 중공운남성 제1서기, 원남성 인민정부주석, 서남군구 정치위원회 부서기, 원남군구의 사령관 겸 청치위원 등을 역임했다.

1955년, 셰푸즈는 상장 계급장을 수여받았고 이듬해엔 중국 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이후엔 국가공안부장을 역임했으며 공안부대의 사령관 겸 청지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1965년에는 국무원 부총리와 3기 국방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

2.5. 문화대혁명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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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시기 셰푸즈

1966년 8월, 셰푸즈는 공안부장을 맡는 동시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 비서관과 정치국 대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그는 문화대혁명에 적극 참여해 '반동분자'로 지정된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했다. 또한 그는 공안 고위 간부들을 모아놓고 "누가 맞아서 죽더라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라며 홍위병의 폭력 행위를 저지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으며, 캉성과 연합하여 '뤄루이칭(羅瑞卿)을 수반으로 한 지하 흑공안부 사건'을 조작해 공안기관 내 '반혁명분자'를 숙청했다. 다른 인민해방군 장성들과는 달리, 셰푸즈는 홍위병을 호의적으로 평가했고 그들을 제2의 군대로 육성시켜서 인민해방군과 동등한 자격으로서 혁명을 완수하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그의 지원에 힘입은 홍위병들은 중국 전역에서 활개쳤고 중국의 사회 질서는 마비 상태에 빠져들었다.

1967년 1월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각지에서 문혁소조가 지방 정부들을 대체했고, 급기야 베이징마저 혁명 위원회가 장악했다. 베이징 시장 펑전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았고, 셰푸즈가 그를 대신해 베이징 시장에 취임하고 뒤이어 혁명소조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문화대혁명의 광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1967년 7월, 우한 군구 사령관 천짜이다오가 보수파 홍위병들을 지지하면서 조반파 홍위병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이에 조반파들은 격렬하게 맞섰고, 우한은 보수파와 조반파 홍위병 간의 시가전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천짜이다오에게 물러날 것을 명령했지만, 천짜이다오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셰푸즈와 왕리는 천짜이다오가 명령에 복종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우한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7월 20일, 보수파 홍위병들은 셰푸즈와 왕리를 억류하고 뺨을 때리며 굴욕감을 줬다. (7.20 사건) 이에 인민해방군 3개 보병대와 특수 부대가 깉급 투입되어 우한을 포위했고, 천짜이다오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후 셰푸즈는 왕리와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와 7월 25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후 셰푸즈는 베이징 교사 대학의 정강산 코뮌테른에 500개의 소총을 공급하는 등 조반파 홍위병들에게 군사 무기를 대대적으로 지급해 혁명의 광기가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1969년, 셰푸즈는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위언이 되었고 같은해 중국 공산당 9기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1971년 화북 회의 이후 베이징시 위원회 제1서기와 베이징 군구 제1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2.6. 사망, 그리고 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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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일보 1972년 3월 29일자 1면 기사

1972년 3월 26일, 셰푸즈는 오랫동안 시달려온 위암이 악화되어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63세. 3월 29일 오후 셰푸즈 추도대회가 베이징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천안문 광장, 신화문 등에 조기가 계양되었다. 추도사에서 셰푸즈는 중국 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자 인민에게 충성한 전사이며 겸손하고 소박하고 신중하며 공명정대하고 성실하게 인민을 위해 봉사했으며 필생의 정력을 바쳤다고 묘사되었으며, 그의 불행한 죽음은 중국 공산당과 중국 인민군의 중대한 손실이라고 밝혔다. 추도식이 끝난 뒤 셰푸즈의 유골은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사인방의 몰락으로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뒤, 문화대혁명에 깊이 관여했던 셰푸즈에 대한 비난이 폭주했다. 1980년 10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1기 3중전회에서 셰푸즈에게 바쳤던 추도사를 폐기하고 셰푸즈의 정치적 품성이 열악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 린뱌오, 장칭 등의 당권 침탈에 참여했고 중범죄를 행했다고 비난하며 그의 대표적인 범죄로 다음 두가지 사항을 제시했다.
1. 1966년 5월 44명으로 구성된 합동공작반을 베이징시 공안국에 파견했는데, 한달 후에는 그 숫자가 313명으로 늘어났다. 베이징시 공안국 1600여 명이 합동공작반에게 박해받았고 72명이 투옥되었으며 베이징시 지도 간부 13명이 모함을 받아 박해를 받았고 베이징시 제2서기 유인(刘仁), 덩퉈(鄧拓), 베이징 부시장 우한(吴晗) 등이 박해로 사망했다.
2. 1967년 1월 13일 중국 공산당 중앙국무부는 셰푸즈의 지시하에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에서 공안업무를 강화하는 데 관한 몇가지 규정'(공안 6조)을 발표했다. 이 문건에 따르면, 마오쩌둥과 린뱌오를 공격하는 것은 모두 '현행 반혁명', '현행 반혁명 논거'로 간주되었다. 이 공안 6조로 인해 1968년 1월 운남성의 1만 4천명이 박해로 사망했고, 2월에는 인민해방군 내 34만 6천여 명이 박해받았고, 그 중 1만 6천여 명이 사망했다.

1980년 10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심사보고서에 따라 셰푸즈의 당적이 박탈되었고 셰푸즈의 유골은 바바오산 혁명공묘에서 파헤쳐졌다. 그리고 그해 11월 20일,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사건'에 관한 재판 과정에서 셰푸즈는 주범 중 한 사람으로 판정되었으며 1981년 1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재판소는 그를 '린뱌오, 장칭 반혁명집단'의 주범으로 확정했다.

3. 가족 관계

셰푸즈의 부인 류샹핑(劉湘屏)은 1920년 9월 생이며, 산시성 해현 사람이다. 중일 전쟁 초기에 셰푸즈와 결혼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촨둥 민정청 부청장과 당서기, 쿤밍시 당서기, 농기부 기획재무국장, 8기부 종합국장을 역임했다. 1973년 1기 혁명위원회 부주임을 맡았으나 1976년 10월에 해임되었고 1985년에 공산당 당적이 박탈되었다.

맏딸 류샤오친은 인민문학출판사 <당대(當代)>의 편집자였으며, 현재는 은퇴했다.

4. 참고 문헌


[1] 일부 자료에서는 9월 26일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