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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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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한문 陸定一
한국식 독음 육정일
영문 Lu Dingyi
출생 1906년 6월 9일 청나라 장쑤성 우시
사망 1996년 5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상하이 난양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없음(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시기2.3. 국공내전 시기2.4. 중공 수립 초기2.5. 문화대혁명의 시련2.6. 말년
3. 저서4. 가족 관계5.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1931년 장시성 소비에트구에 들어가 공산주의청년단 총서기를 맡았고 대장정에 참가해 홍군 제1방면군 선전부장이 되었다. 중일전쟁 중에 팔로군 정치부장 겸 선전부부장을 맡았으며 1945년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위원에 선출되었고 국공내전 시기에 난징 중공판사처 주임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57년 5월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연설을 행해 당외인사들이 자유롭게 공산당을 비판하게 했으나 결과적으로 반우파 투쟁을 초래했다. 이후 문화대혁명류사오치 일당으로 간주되어 박해당했으나 문화대혁명 종식 후 복권되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루딩이는 1906년 6월 9일 장쑤성 우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창쩌우(陸澄宙)는 변호사이자 법관이었다. 루딩이는 1922년 상하이 난양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했고 1925년 19살 때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년 대하을 졸업한 그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난양대학 지부 서기와 상하이 법남구단위 서기를 역임했다. 또한 같은 해 추조단 중앙선전부에서 근무하며 <중국청년> 잡지 편집인을 맡았다.

1927년 5월, 루딩이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에 당선되었고 중앙선전부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7년부터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선전부장을 맡았다.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가 7월 15일에 국공결렬을 확정짓자, 루딩이는 런비스가 주재한 중앙 긴급회의에 따라 공산주의 청년 연대에 '당중앙에 대한 정치를 위한 의견서'를 채택했다. 이후 8.8 회의에 공청단 대표로 참석했고 반혁명 집단을 규탄하는 글을 여러편 쓰며 청년단 임원들을 격려했다.

1928년 초, 그는 상하이 공산당 본부의 명령을 받들어 광둥성 위원회에 가서 일하며 1000여 명의 청년을 동원해 홍군에 가담했다. 그후 1928년 가을에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선전부장을 겸임했다. 1928년 말 당의 결정에 따라, 루딩이는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중국공산주의 청년단 국제대표, 공산당 국제위원회 위원, 공산당 국제대표단 등을 맡았다. 또한 그는 취추바이, 덩중샤(邓中夏) 등과 함께 왕밍에 맞섰다.

1930년, 루딩이는 중국에 귀국한 후 연대 중앙선전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1931년 왕밍을 필두로 하는 28인의 볼셰비키가 중국 공산당을 장악한 후 중앙선전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중앙소구로 이동하여 중앙순찰관으로 근무한 후, 소구단 중앙국 선전부장에 배속되었다. 1934년 10월, 루딩이는 홍2군 간병부대를 따라 대장정에 참여했다. 1935년 1월 쭌이회의 이후, 그는 중국 공농홍군 총정치부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홍성> 신문의 편집장을 겸임했다.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후, 루딩이는 공산당의 동정 및 서정에 참가했고 홍1방면군 정치부 선전부장, 홍군 총지휘부 정치부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양대주력군 회합가', '타기병가(打騎兵歌)' 등의 노래 가사를 만들었다.

2.2. 중일전쟁 시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루딩이는 팔로군 총정치부 선전부장, 팔로군 전방본부 야전정치부 부주임 등을 역임했고 <신화일보> 화북지부를 지도했다. 1940년 말, 루딩이는 중앙의 명령을 받들어 옌안으로 돌아갔다. 1942년 4월, 루딩이는 <해방일보>의 <공부> 부간을 담당해 <실제로부터> 등 여러 문장을 작성했다. 그중 <신문학에 대한 우리의 기본 관점>은 상당한 파급력을 남겼다. 그는 신문들이 유물론적 반영론을 견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사실 존중과 혁명적 입장을 결부시켜야" 한다며 "신문의 사실은 혁명적 입장의 총수 아래에 있어야 하며, 정확한 '무산계급 신문관'은 언론 발표의 속도를 당의 요구에 완전히종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언론의 정론으로 굳어졌고, 현재까지 중국 언론이 정부에게 예속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루딩이는 옌안에서 정풍운동에 참가해 마오쩌둥의 독재 권력이 확립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1945년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장을 역임했으며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2.3. 국공내전 시기

1946년 1월 11일, <신화일보>는 루둥이의 "신문은 전체주의자들이 인민의 말을 듣지 않거나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인민을 속이는 나쁜 풍조를 없애야 한다"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괴벨스의 원칙은 모든 신문, 잡지, 방송, 영화 등을 완전히 통제하고 일치된 소문을 퍼트려 대중들에게 퍼트리게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다. 괴벨스의 손에 들어가면 신문은 그 의도아는 반대로 변하고 뜬소문이 진실을 대신하는 신문을 보는 국민들은 똑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어리석어진다. 독일을 보라. 히틀러를 따라 수천만명이 몰려다니지 않았는가!

신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국민대중 신문으로, 진실한 소식으로 인민의 민주를 계발한다는 사상을 국민에게 알려서, 백성을 총명하게 만들었다.다른 하나는 새로운 전제주의자의 신문으로, 국민에게 헛소문으로 백성의 사상을 폐쇄하고, 국민을 어리석게 만든다고 알려주었다. 전자는 사회에 있어서나 국가 및 민족에 있어서나 이로운 것이고, 이것이 없다면 문명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후자는 이와는 반대로 사회에 대해서, 인류에 대해서, 국가 민족에 대해서 일종의 독이 되고 피를 흘리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강철 칼이다."

1947년 1월, 그는 '전후 국제정세에서의 몇 가지 기본적 문제에 대한 해석'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미국의 반소 전쟁 구호에 관한 실제 의미는 미소 사이의 중간 지대 침략, 세계 규모의 통일전선 등에 관한전략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1947년 3월, 후쭝난(胡宗南)이 지휘하는 국민혁명군 33만 명이 섬북을 침공했을 때, 루딩이는 이에 맞서는 공산군 중앙 직할대 정위를 맡았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를 수행했다. 이 시기에 그가 집필한 작품들은 공산당 측의 중요한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금색의 낚시바늘>, <노산계> 등의 문장은 지금도 중국 대륙의 초중교 교과서에 채택되고 있다.

2.4. 중공 수립 초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루딩이는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장을 맡았고 중앙인민정부 문교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1954년 9월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정치국 후보위원에 당선되었다.

1956년 5월, 루딩이는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발표하여 당외 인사들의 공산당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한다는 마오쩌둥의 교시를 선전했다. 당외 인사들은 이러한 선전에 긴가민가하며 나서지 않았지만, 루딩이를 비롯한 공산당 핵심 인사들이 "말하는 것에 죄를 주지 않겠다."며 비판해도 좋다고 채근하자 1957년 4월부터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나 정작 공산당은 1957년 6월 반우파 투쟁을 단행해 이들을 우파로 몰아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이때 루딩이는 자신을 믿고 공산당의 정치를 비판했다가 탄압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어떠한 변호도 해주지 않았다.

1958년, 루딩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농촌 직업중학교인 장쑤성 하이안 직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59년에는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다. 1960년, 그는 중국 공산당 대표단 단원으로서 류사오치, 덩샤오핑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81개국 노동자 대표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1962년에 중앙서기처의 서기를 맡았고 1965년엔 문화부 장관을 겸임했다.

1962년 광저우 회의에서. 저우언라이와 천이 등은 지식인의 절대 다수가 이미 노동 인민의 지식인이므로, 더 이상 '자산계급 지식인'이라는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루딩이는 마오쩌둥의 의중을 읽고 "지식인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자산계급 지식인'의 멍에를 벗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루딩이와 저우언라이는 논쟁을 아주 심하게 했고 서로 고집을 부리며 양보하지 않았다. 이에 당 중앙은 루딩이의 의견을 따라 지식인들의 멍에를 벗기는 것을 중단했다. 그러나 몇년 후, 그 자신이 바로 그 멍에를 뒤집어쓰게 된다.

2.5. 문화대혁명의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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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탄대회에게 끌려가 홍위병들에게 모욕당하고 있는 루딩이.

1964년 7월, 당 중앙은 문화혁명5인소조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소조장은 펑전이었고, 루딩이는 후보위원이었다. 그후 루딩이는 문예계 정풍, 학술 비판 등 문화선전을 지도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던 1965년 여름, 야오원위안이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罢官)>을 비판하며 우한이 대약진운동을 비난했다고 고발하는 장문의 논설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발표했다. 이에 1966년 2월 3일, 펑전은 확대회의를 개최해 기존 멤버 외에 왕리, 판뤄이(范若愚), 후셩(胡繩). 야오전(姚溱), 정톈샹(鄭天翔) 등을 참석시켜 이 문제를 논의했다.

사실 야오원위안의 논설은 마오쩌둥이 직접 3번 교정해줄 정도로 깊숙하게 개입된 것이었지만, 펑전, 루딩이 등 문화혁명 5인 소조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은 의논 끝에 우한과 야오원위안 간의 논쟁은 학술 논쟁이지 정치 문제가 아니라는 내용의 <당면 학술 토론에 대한 문화혁명 오인소조의 보고 제강>, 이른바 2월 제강'을 작성해 마오쩌둥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1966년 3월 17일 항저우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펑전, 우한 등이 자산계급 문화를 전파했다고 맹비난하며 계급투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3월 27일, 마오쩌둥은 캉성장칭에게 베이징 시당위원회와 중앙위원회 선전부가 악인을 보호하고 혁명에 반대했으니 해체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캉성이 마오쩌둥의 이러한 의사를 저우언라이에게 전달했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즉각 펑전이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고 주석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고 비난하며 펑전을 가택에 연금시켰다.

소조장이었던 펑전이 이 꼴이 되었으니 후보위원이었고 펑전의 뜻에 적극 따랐던 루딩이가 무사할 리 없었다. 1966년 2월, 장칭과 린뱌오는 상하이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장성들 앞에서 "문학 영역과 대다수 교수들이 우리의 정치적 견해를 지배하려는 흑방 역할을 해왔다."고 맹비난했다. 루딩이를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루딩이를 따르는 이들을 비난한 것이었으니 그 목적이 루딩이 제거라는 것임은 분명했다. 이후 마오쩌둥이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이 쿠데타를 모의한 반당 파벌의 일부라고 비난했고, 루딩이는 5월 초 가택연금되었다.

1966년 5월 4일, 린뱌오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루딩이의 아내 엔웨이빙(严慰冰)이 자신에게 아내 예췬(葉群)이 불륜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딸 린리헝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익명의 편지를 보낸 것을 힐난했다. 루딩이는 당황해하며 변명했다.
"옌웨이빙이 익명의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녀와 나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논의한 바 없었으며 나에게 보여준 적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린뱌오는 책상을 후려치며 외쳤다.
"거짓말! 어떻게 자기 아내가 한 일을 모른단 말인가?"

루딩이가 대꾸했다.
"남편이 부인이 한 일을 모른다는 게 이상하단 말입니까?"

그러자 린뱌오가 격분했다.
"너 이 새끼, 한방에 죽여버리겠어!"

린뱌오가 이성을 잃고 루딩이게 달려들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뜯어말려 자기 자리에 도로 앉혔다. 그후 루딩이는 중앙서기처 서기,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또한 1966년 5월 16일에 문화혁명 5인소조는 해체되었고 천보다가 소조장, 장칭이 부소장, 캉성이 고문, 후보위원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로 구성된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수립되었다. 이후 6월 27일 오후 4시, 인민대회당 안후이청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이 소집한 민주인사 좌담회에서 펑전, 루딩이, 뤄루이칭, 양상쿤 문제를 논의했다. 류사오치는 펑전, 루딩이, 뤄루이칭, 양상쿤을 반당그룹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자본주의의 씨앗을 틔우려했다고 비난했다. 이후 당 중앙은 9월 30일 루딩이에 대한 '격리반성' 결정을 공식 발표하여, 육정일은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그후 루딩이는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규탄대회에서 온갖 비판과 구타를 당했다. 1968년 4월 하순, 루딩이은 친청교도소로 옮겨져 수감되었다. 1975년 중국 공산당 중앙 75호 문건은 루딩이을 계급 이기분자, 반당분자, 간첩 혐의를 적용해 영원히 당적을 박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문건은 전국으로 발송되었고, 루딩이는 감옥에서 나와 베이징을 떠나서 먼 외지로 가야 했고 월 200위안의 생활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루딩이가 자신에게 주어진 세 가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자, 그는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1976년 말 교도소 병실에 입원했다.

2.6. 말년

1979년 6월 8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루딩이를 복권시키기로 결정했다. 그후 1979년 6월, 루딩이는 전국정치협상회의 5기 2차 회의에서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또한 같은 해 9월 중국 공산당 11기 4중전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0년 3월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고문에 임명되었고, 1983년 6월 전국 정치협상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부주석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제12, 13차 중앙고문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96년 5월 9일, 루딩이는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아들 루더쩡(陸德證)의 증언에 따르면, 루딩이는 임종 전에 "아이를 학교로 보내라. 백성이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라는 유언 두 마디만 남겼다고 한다.

3. 저서

  • <루딩이 문집> (1992)

4. 가족 관계

1. 첫번째 아내 탕이젠(唐义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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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이젠은 루딩이보다 3살 어리며, 허베이 우창 금구진에서 한의사 집안 자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14살에 후베이성 여자 사범 학당에 들어가 서적을 탐독했고 신해혁명 이후 중국 사회에서 발생한 '신문화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이후 그녀는 192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하고 뒤이어 국민당에 가입햇으며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단행할 때 허베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전단을 살포해 시민들에게 북벌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가 국공결렬을 채택하자, 탕이젠은 중국을 떠나 소련으로 갔다. 이후 손중산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당시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루딩이를 만났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직후 친밀해졌고 1929년에 결혼했다. 1930년 여름 루딩이가 먼저 상하이로 귀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탕이젠도 상하이에 와서 공산주의 청년단 연대 중앙선전부장인 루딩이와 함께 근무했다. 1931년 봄, 두 사람은 상하이 국민당 특무의 추적을 피해 지하에 숨은 저우언라이에게 은선처를 제공했다.

1931년 5월, 탕이젠은 중앙 소비에트구에 가서 일하고 싶다는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자 루딩이와 헤어진 후 허수헝(何叔衡)과 함께 부녀로 분장하여 샨터우에 상륙한 후 비밀 교통로를 따라 민서에 도착했다. 그해 7월, 국민혁명군은 중앙 소비에트에 대한 3차 초공작전을 개시했다. 탕이정은 이에 맞서 싸우는 소비에트 정권에 협력했고, 얼마 후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에서 도망쳐 온 남편과 재회했다. 그해 9월 소비에트 중앙국 선전부장으로 승진한 루딩이는 예핑 부근에 가정을 꾸렸고 첫 여자아이를 그곳에 낳아 이름을 "예핑(叶坪)"이라고 지었다.

1932년 초, 탕이젠은 홍군 위생자재 공장장을 맡았다. 그해 9월, 중앙 군사위는 총 위생부를 설치했고, 탕이젠은 산하의 약제국장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루딩이가 '우경주의에 치우쳤다는 비난을 받고 중앙 선전부장에서 쫓겨나자, 그녀 역시 현 직책을 잃고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녀는 얼마 후 당국에게 체포되어 끌려가고 있던 덩샤오핑을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간수에게 덩샤오핑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고 닭 2마리를 사서 덩샤오핑에게 이를 먹게 했다. 그후 1932년 하반기, 그녀는 중앙 소구로 돌아와 루딩이와 재회했다.

1934년 11월, 탕이젠은 민서에 파견되었던 푸젠성 위원회의 마오쩌탄 일행을 따라 대장정에 참가했다. 그녀는 11월 20일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샤오딩(小定)이라 지었으나 멀리 피난가는 와중에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없어서 10여 일 후 아기를 이웃 집에 맡기고 자신의 대오로 돌아갔다. 1935년 1월 중순, 부대 상황이 날로 험악해지자, 그들은 강서 방향으로 이동하여 진의의 부대를 찾기로 결정했다.대오가 두 산이 마주보고 있는 외나무다리를 지날 때, 누군가가 추격병을 막기 위해 다리를 부수었는데, 오히려 행방이 폭로되었다. 국민혁명군 35사단이 포위공격을 가해오자, 탕이젠은 천리오모(陈六嬷)소비에트 복건성 위원회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동지는 본토 사람이니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동지께 은팔지를 드릴 테니 남편에게 전해주십시오."

이후 탕이젠 등 20여 명의 사람들은 끝내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 국민혁명군은 그녀를 회유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1935년 1월 31일 새벽, 탕이젠은 총살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26세였다. 훗날 아내가 장렬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루딩이는 보름 넘게 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로 밤을 지샜다고 한다. 그는 훗날 당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반달 넘게 잠을 못 잤다. 그 뒤로 큰 경사나 큰 슬픔에도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2. 두번째 아내 엔웨이빙(严慰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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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웨이빙은 1918년 장시성 우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시를 잘 지었고 말도 잘했다. 국립중앙대학교 중국문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한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했고 머지 않아 중일전쟁에 참가했다. 1938년 천윈의 중재로 루딩이와 결혼한 그녀는 아이 셋을 낳았다. 그러던 1966년 봄, 왕푸징 백화점에서 쇼핑하던 중 린뱌오의 아내 예췬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 그러자 예췬은 노발대발하며 욕을 퍼부었고 엔웨이빙은 이에 맞서 말다툼을 벌였다. 이후 그녀는 총군사부를 찾아가 예췬의 행태를 고발했지만, 총군사부는 그녀를 진정시킬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일로 예췬에게 원한을 품은 옌웨이빙은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왕광(王光)'이라는 익명으로 서명한 편지를 작성하고 발신지를 "예췬과 나는 동창이라서 어딘지 알고 있다."라고 하며 "정원 골목"이라고 기술했다. 그녀는 이 편지에 예췬이 린뱌오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남자와 성관계를 맺었으며 결혼 후에도 불륜을 일삼았고 딸 린리헝은 사실 린뱌오의 자식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자식이라고 적었다. 그녀는 이 편지를 린뱌오를 비롯한 여러 당국 기관에 배포했다.

린뱌오는 글씨체를 보고 루딩이의 아내 엔웨이빙이 적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후 린뱌오는 그녀가 보낸 편지를 근거로 루딩이를 반혁명분자로 몰아갔고, 옌웨이빙은 1966년 4월 체포되어 13년간 옥고를 치렀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 궈잉(过瑛)은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난징 감옥으로 끌려갔다가 1968년 겨울에 옥중에서 죽었고, 엔웨이빙의 세 여동생 역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친청감옥에 갇혔다.

1978년 12월 석방된 옌웨이빙은 1982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했고 1986년 3월 15일 베이징에서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5.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