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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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제13대 주석 왕양 [ruby(汪, ruby=Wāng)][ruby(洋, ruby=Yáng)][1] | Wang Y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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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55년 3월 12일 ([age(1955-03-12)]세) 중국 안후이성 추저우시 |
| 국적 | |
| 학력 |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정치경제학 학사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 정당 | |
| 현직 |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
| 주요 이력 | 제19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제17기~제18기 중앙정치국 위원 제16기 정치국 후보위원 광둥성 당위원회 서기 충칭시 당위원회 서기 |
1. 개요
중국의 정치인.2. 상세
중국공산당 내 최고권력기구인 정치국의 상무위원 7인 중 한 명이었다. 주로 민생경제와 대외무역 등 경제라는 분야에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시절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최경환과 만나기도 하였고,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경제인대표단과의 만남에서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 그의 독보적인 행동과 사회주의적 경제관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시진핑의 신뢰를 이끌어낸다고 언론에서 보도된 적이 있다.3. 생애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숙주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79년 중앙당학교 입학해 중국공산당 안후이성 위원회에서 경력을 쌓아갔다. 2007년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및 광둥성 위원회 서기직을 맡으며 중국공산당 내 권력의 중추에 진입했다.광둥성 당서기 시절 시장자본주의적 정책(광둥 모델)을 펼치며 마오주의적 정책(충칭 모델)을 펼친 보시라이와 경쟁했다. 알다시피 보시라이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형을 살다 가석방되며 목숨만 부지한 신세인 반면 나왔고 왕양은 정협 주석으로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으니 둘의 경쟁은 왕양의 승리인 셈. 여담으로 보시라이의 전임 충칭시 당서기가 왕양이다.
2020년 중국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국무원 총리 취임이 유력하다는 예측이 많았으나 예측과는 달리 은퇴했다.
3.1. 2025년
5, 6월에 접어들며 왕양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시진핑이 권력을 잃고 사실상 사임이 유력하단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시진핑의 후임으로 왕양이 거론되기 시작한것이다.일설에는 시진핑이 8월에 열리는 4중전회에 사임을 선언할 것이며 후임 중국 공산당 당 총서기겸 국가주석에 왕양, 국무원 총리에 후춘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장유샤가 오르는 집단지도체제가 될 것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미 은퇴한 왕양이 복귀해 당 총서기 직무대행을 맡고 있단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4. 평가
18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에 오르게 되며 리커창이 총리로 있는 국무원의 부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이후 차기 상무위원회의 유력한 후보 중의 한명이였으며 예상과 비슷하게 19차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회 입성을 하게 되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직을 맡게 되었다. 광둥성 서기직 시절에는 중국 내에선 그나마 정부의 개입이 적고 친시장적인 광둥식 모델을 내세웠다. 또한 우칸촌 사태 당시 주민들의 의사로 뽑은 촌장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행보를 통해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비교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며 개혁적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정치적 계파로는 공청단에 속한다.2022년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중국 국무원 총리로의 등극이 유력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특히 2022년 중-하반기 이후, 20차 당대회 전까지 양안관계의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과제로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예상이 무색하게 20차 당대회에서 물러나 은퇴하게 되었다.
2025년 시진핑의 권력약화와 실각설이 맞물리면서 복귀설이 꾸준히 나오고 있고, 시진핑의 후임으로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을 승계하는게 유력하단 말까지 나오고 있다. 다만 70세로 고령인점을 감안해 2년정도 재임후 후춘화에게 승계하고 물러날거란 관측도 나온다.
5. 여담
- 이름의 한국식 한자어 독음과 중국어 발음이 '왕양'으로 같다.
[1] 왕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