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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괴뢰국 | ||
국기[1] | ||
和平建國 화평건국 | ||
주황색 부분 | ||
1938년 ~ 1940년 | ||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 통합 이후 | |
중화민국 | 왕징웨이 정권 | |
상해시대도정부 | ||
<colbgcolor=#b0313f><colcolor=#ffffff> 국가 | 경운가[2] | |
수도 | 난징시 | |
정치 체제 | 공화제 | |
국가원수 | 행정원장(량홍즈) | |
통화 | 화흥권(華興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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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이 난징 전투 끝에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 이후, 이 지역의 행정을 통치하기 위해 1938년 3월 28일에 성립한 일본 제국의 괴뢰국.2. 역사
일본군 중지나방면군은 난징 전투 이후에 북지나방면군이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며, 북중국의 행정을 통제하게 되자 그를 본떠 난징과 그 주위 일대의 지역을 통제할 정부의 성립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새 정부에 정책적 지원 뿐만 아니라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세부사항을 담은 계획의 입안과 더불어 장기적으로는 북지나방면군이 설립한 괴뢰 정부인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신정부와의 통합안까지 담은 계획도 작성하며 차근히 정부수립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일본군은 우선 정부수립을 위해 그 지역의 정치 지도자, 군사 지도자와 접촉하며 정부수반직에 올릴 이를 찾고 있었다. 일본군은 처음에 중화민국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탕사오이와 접촉하였다. 그는 일본군의 정부수반직 추대 요청을 즉각 수락하였다. 하지만 도리어 일본군이 그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는데, 그는 임시정부와 유신정부가 그를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군은 이 요구를 섣불리 수락하지 못했고, 결국 탕사오이가 접촉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이리의 지시로 암살당함으로서, 이 논란은 종결되고 말았다. 결국 일본군은 안휘군벌 출신의 량훙즈와 접촉하였고, 그와 다른 지도자 후보들을 도쿄에서 접촉하여 누구를 수반직에 앉힐지를 정하기로 하였다.량훙즈의 모습[3] |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청사 정문 모습.[4] |
하지만 정부의 활동은 일본인 고문단에 의해 세심하게 감독받고 있었고, 주민들은 일본인 고문단이 사실상 통치한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활동이 사실상 괴뢰국으로 단정지어져 정부의 권위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현지 친일 지주들이 정부의 명령을 이행하기 거부하며 그로 인해 제한적인 행정력이 발휘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타파하려 정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정책이 실시되었지만, 일본군대 내의 북지나 방면군과 중지나 방면군 사이에 알력이 유신정부의 이러한 활동을 제약시키고 있었고 또한 일본이 사사건건 관여함에 따라 당초 구상보다 제약된 범위에 적용된 유신정부의 정책은 실패하기 일쑤였다. 또한 중국인에 의한 친일 정부에 대한 반일 행동도 몇차례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사건은 1939년 6월 10일 난징 주재 일본 영사관에 가해진 독극물 테러였다. 그날 영사관에서 열린 연회에서 독극물에 의해서 행사에 참여한 모든 주요 인사들이 중독되었으며, 중독이 가장 심했던 두 명의 일본 영사관 관리는 죽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 당시에 중국인들이 침략자인 일본군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영한다.
그러다가 왕징웨이 공작에 포섭된 왕징웨이, 천궁보, 저우포하이 등이 상하이로 넘어와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를 포괄한 신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면서 1940년 3월 30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립, 유신정부는 왕징웨이 정권에 흡수되었다.
3. 행정
일본군은 성, 도, 현의 삼급 지방 행정 체제를 유신정부에 설립하고, 성 정부를 유신정부의 권한을 위임받은 최고 기관으로 정했다. 1938년 5월 28일 유신정부는 일명 '성 정부 조직 명령'을 공포하고, 성 정부를 전보다 더 막강한 유신정부의 법 테두리 이내에서의 독자적인 입법권한까지 부여하였다. 같은 해 6월 28일에는 '도 조직 명령', '특별시 조직 명령'을 통해 난징과 상하이를 특별시로 승격시켰다.4. 군사
유신수정군의 모습 |
정식명칭은 유신수정군(維新綏靖軍)으로, 량홍즈와 일본군이 임명한 내각진 중 한명이었던 런위안다오가 유신수정군의 조직임무를 맡아 1만명을 조직하였고 시간이 지나 1939년에는 3만명으로 늘어났다. 군대의 장비는 형편없었고, 훈련도 부족하였기에 일본군에게 이 군대는 만주군처럼 그 지역의 치안을 맡길 정도의 군대로 취급받지 못했다. 한편 유신정부는 군관학교를 구성해 초기 생도만 수백명 정도를 모았는데, 장제스의 군대인 국민혁명군에 복무 경력이 없는 장교진을 육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해군의 규모는 소규모로 몇 척의 작은 선박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주로 강과 해안가를 순찰하기 위한 용도로 창군되었고, 국민혁명군을 배신한 친일 장교진을 중심으로 해군이 꾸려졌다. 공군 또한 창군될 계획을 가지고 일본으로부터 훈련 글라이더 몇 대를 들여왔으나, 왕징웨이 정권이 성립될 때까지도 공군이 갖춰지지는 않았다.
[1]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국기인 오색기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종종 위와 같은 화평건국에 횃불을 넣은 경우도 있었다.[2]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국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3] 위안스카이의 심복으로, 위안스카이가 죽고 나서는 안휘군벌 돤치루이와 함께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장쭤린의 봉천군벌에서도 활동했으나 북양정부가 국민혁명에 패배하자 톈진, 다롄, 상하이 등으로 이주하며 생활하다 일본과 접촉하였다. 중일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19일 한간 혐의로 조사통계국에 체포되어 1946년 6월 21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같은 해 11월 9일 총살당했다. 향년 65세.[4] 난징 총통부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