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중국 대륙'에 대한 내용은 중국 대륙 문서 참고하십시오.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을 나타낸 지도 (published by William Mackenzie in 1866)[1] |
1944년 중국을 표현한 지도. 'CHINA PROPER'가 중국 본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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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본토(中國本土, China proper)는 한족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중원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중국의 전통적인 영역을 지칭한다.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 대만 등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전통적으로 외지(外地)라고 여겨져오던 영토는 본토의 범위에서 제외된다.[2] 황하문명을 시작으로 중원에서 발흥한 중국문명은 하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족(본토 원주민)과 함께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제국을 형성해 왔다.[3]2. 표기
정체자 | 中國本土 | 漢地 | 內地 | 關內 | 十八省 |
간체자 | 中国本土 | 汉地 | 内地 | 关内 | |
한글 | 중국본토 | 한지 | 내지 | 관내 | 십팔성 |
영어 | China proper / Inner China |
3. 역사
한나라 / 당나라 / 송나라 / 명나라 |
지금도 만주와 몽골은 만리장성 밖에 있는 지역이고[4], 티베트와 위구르스탄도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대만도 만주의 청나라가 정복하기 전까지는 중국 본토와 통합된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 대만 등은 외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조는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오족공화와 중화민족을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변화하게 된다.[5][6] 중국이 벌이는 역사왜곡과 동북공정도 이러한 기조에서 시작되었다.
"만주"라는 지역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중국인이 거의 살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19세기 초 당시 만주의 인구는 약 100만~200만 명으로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던 빈땅이었고[7], 주민들 대다수는 만주족과 소수의 몽골인들과 압록강을 넘어온 조선인들 뿐이었다. 입관 이후 만주의 청나라는 자신들의 본토를 중국인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한족들이 만리장성 너머 만주로 이주하는 것을 엄금하며 만주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남하로 인하여 만주 땅이 러시아한테 빼앗길 위기에 놓이게 되자 청나라는 인구가 많은 한족들을 대거 만주로 이주시키게 된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 만주는 인구 없는 땅에서 1억 명이 넘는 인구밀집지역으로 변모하였다.
3.1. 한국사와의 관계
사실 중국의 역사에서 만주족과 몽골족[8]을 분리시켜서 한중 외교사를 바라본다면, 한국 전쟁을 제외하고는 한국과 중국이 전쟁을 치른 역사는 670년에 있었던 나당전쟁이 마지막이다.[9] 그 이후로 중국은 북방민족의 발흥으로 인해 만리장성 안에 틀어박혀 북방민족들의 지속적인 침략만 받게 된다. 만리장성 너머의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 북방의 민족들은 지속적으로 중국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원래 중국은 그 이전부터 만리장성 안에 틀어박혀 존속해왔었다. 중국에 대하여 흉노, 선비, 돌궐 등과 같은 북방민족들이 끊임없는 침략을 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도 마찬가지로 나당전쟁 이후로는 계속 북방민족들의 침략만 받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로 여요전쟁 (거란), 여몽전쟁 (몽골), 병자호란 (만주) 등 을 뽑을 수 있다. 그 밖에도 한국이 여진을 대상으로 침략전쟁을 벌인 사례(여진정벌, 4군 6진 개척)도 있다.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나라, 고려와 송나라, 조선과 명나라 등 한국과 중국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접경을 하지 않아 큰 충돌이 없었을 뿐더러 북방에 몽골, 거란, 여진과 같은 공공의 적을 두고 있었으니 동지애를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국의 접경국이 아니었던셈. 본토를 지키던 만리장성은 압록강이 아니라 베이징에 있다.[10] 사실 베이징이라는 그 도시 자체부터가 여진과 몽골이 중국을 지배했을 당시 자신들의 본토와 가깝다며 수도로 삼게 된 것이 그 시초가 되는 도시다.[11] 명나라 시절에는 중국이 요동을 점령하게 되면서 조선과 접경하게 되었다.[12] 그러나 어디까지나 요동은 전초기지 였을 뿐 중국 본토는 만리장성의 산해관 뒤쪽에 있다. 참고로 중국은 당나라 시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을 잠시 점령했다가 다시 발해에 의해 요동에서 퇴출된 이후로는 요동이라는 지역과 별 인연이 없었다.
4. 지리
4.1. 생태계
중국은 땅이 넓고 지형과 기후도 다양해 여러 야생동물들이 서식하는데 특히 중원이나 강남, 쓰촨분지에는 다른 지역에선 찾아 볼수 없는 종들이 서식한다. 과거에는 기후가 따뜻하고 문명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현재 동남아시아등 열대지방에서만 사는 종들은 물론이고 같은 화석으로 기록된 종들까지 베이징 인근등 중국 본토에까지 있었지만 남획과 기후변화로 멸절된 경우가 많았다.* 화석이나 문헌상 기록으로 남은 종:기간토피테쿠스, 스테고돈, 한유수쿠스, 군자긴팔원숭이, 인도코뿔소, 자바코뿔소, 수마트라코뿔소, 양쯔강돌고래, 완셴호랑이
* 포유류:집쥐, 곰쥐, 등줄쥐, 멧밭쥐, 멧토끼, 대왕판다, 레서판다, 아시아흑곰, 시베리아족제비, 노란목도리담비, 유라시아수달, 작은발톱수달, 사향고양이, 아무르삵, 남중국호랑이, 북중국표범, 너구리, 승냥이, 사불상, 아기사슴, 꽃사슴, 사향노루, 산양, 타킨, 멧돼지, 아시아물소, 긴팔원숭이, 황금들창코원숭이, 히말라야원숭이, 북부돼지꼬리원숭이, 아시아코끼리
* 조류:백한(조류), 금계, 따오기, 꿩, 참새, 까치, 까마귀, 매, 부엉이, 독수리, 공작
* 양서파충류:양쯔강악어, 양쯔강대왕자라, 자라, 물왕도마뱀, 바다악어, 도마뱀, 구렁이, 비단뱀, 도마뱀붙이, 남생이, 개구리, 도롱뇽, 중국장수도롱뇽, 두꺼비
* 어류:주걱철갑상어, 붕어, 잉어, 메기, 가물치, 뱀장어
* 곤충류:메뚜기, 파리(곤충), 모기, 바퀴벌레, 딱정벌레, 사마귀, 나비, 나방, 거미, 벌, 말벌
* 포유류:집쥐, 곰쥐, 등줄쥐, 멧밭쥐, 멧토끼, 대왕판다, 레서판다, 아시아흑곰, 시베리아족제비, 노란목도리담비, 유라시아수달, 작은발톱수달, 사향고양이, 아무르삵, 남중국호랑이, 북중국표범, 너구리, 승냥이, 사불상, 아기사슴, 꽃사슴, 사향노루, 산양, 타킨, 멧돼지, 아시아물소, 긴팔원숭이, 황금들창코원숭이, 히말라야원숭이, 북부돼지꼬리원숭이, 아시아코끼리
* 조류:백한(조류), 금계, 따오기, 꿩, 참새, 까치, 까마귀, 매, 부엉이, 독수리, 공작
* 양서파충류:양쯔강악어, 양쯔강대왕자라, 자라, 물왕도마뱀, 바다악어, 도마뱀, 구렁이, 비단뱀, 도마뱀붙이, 남생이, 개구리, 도롱뇽, 중국장수도롱뇽, 두꺼비
* 어류:주걱철갑상어, 붕어, 잉어, 메기, 가물치, 뱀장어
* 곤충류:메뚜기, 파리(곤충), 모기, 바퀴벌레, 딱정벌레, 사마귀, 나비, 나방, 거미, 벌, 말벌
4.1.1. 생태계 파괴
19세기 직전만 해도 중국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였지만 20세기가 들어서 인구증가로 인해 서식지 파괴나 남획, 또한 야생동물을 식용이나 약재로 쓰는 문화로 인하여 인해 남중국호랑이나 참새등 흔한 일부 동물들도 정치적인 이유로 무분별하게 남획되고 급격히 감소해 멸종위기에 처해 지면서 멧돼지, 너구리, 쥐, 비둘기, 메뚜기, 바퀴벌레, 모기, 파리 등 유해조수나 해충들이 번성해 농작물 피해나 위생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샨샤댐 건설이나 강의 오염으로 인해 고유종에 속하는 여러 민물고기종들도 사라지고 있는 상태이며 양쯔강돌고래, 양쯔강대왕자라, 주걱철갑상어 등은 멸종상태이다.5. 관련문서
[1] 만주, 몽골, 티베트(칭하이성 암도 지방 포함), 위구르스탄, 타이완섬 등 역사적으로 외지로 취급되어 왔던 영토가 빠져있다.[2] 그 밖에도 윈난성 등이 있다. 다만, 윈난성은 명나라에 편입된 이후로는 본토의 일부로 여겨져왔다.[3] 요나라(거란제국), 금나라(여진제국), 원나라(몽골제국), 청나라(만주제국) 등 중국문명을 침략하여 중국을 지배한 정복왕조도 있지만. 그들 역시 중원을 장악하면 중원을 근거지로 삼았고, 한족들도 노예계급이 되든 관료가 되든 제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물론 중국의 본토를 자신들의 원래 본토로 여긴 것은 아니었고, 이들에게는 중국에서 축출 될 시 다시 되돌아갈 자신들의 진짜 본토가 따로 존재했었다.[4] 만주와 몽골은 엄연히 만리장성 밖에 있던 외지로서 지금도 만리장성은 베이징까지 가야만 볼 수 있다.[5] 비슷한 개념이 청나라 말기부터 있긴 했지만 중국인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이는 "황제 아래 신민들은 모두 한 가족"이라는 의미로 좀 다른 의미였다.[6] 그리고 지금도 중국은 오족공화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내선일체를 연상시킨다.[7] 1750년에는 인구가 약 100만 명, 1812년에는 인구가 170만 명, 1842년에는 인구가 300만 명 정도였으나, 봉금 정책이 풀린 1897년에는 인구가 700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8] 거란도 몽골족의 일부로 분류된다.[9] 발해-당 전쟁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했던 관계로 한중전쟁이라 정의하기 애매하다. 그리고 사실 고려시대 때는 홍건적과 같은 중국계 반란군과 대규모 전쟁을 치른 적이 있다. 그러나 중국왕조의 침략은 아니었고, 몽골군에 의해 본토에서 요동으로 쫓겨난 중국의 농민봉기군이였다. 이것을 정식적인 한중전쟁이라 정의해야 할지는 사람 마다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다.[10] 베이징 근처가 아니라 진짜 베이징 안에 있다.[11] 참고로 중화민국의 헌법상 수도는 '베이징(북경)'이 아니라 '난징(남경)'이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