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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C512D><colcolor=#ffffff> 대만 제20·30대 행정원장 쑤전창 蘇貞昌(소정창) | Su Tseng-chang[1] | |
출생 | 1947년 7월 28일 ([age(1947-07-28)]세) |
타이완성 핑둥시 (現 핑둥현 핑둥시)[2] | |
학력 | 타이완성립핑둥고급중학교 (졸업) 국립대만대학 (법학 / 학사) |
재임기간 | 제8대 타이완성 핑둥현장 |
1989년 12월 20일 ~ 1993년 12월 20일 | |
제8대 타이완성 타이베이현장 | |
1997년 12월 20일 ~ 2004년 5월 20일 | |
제21대 총통부비서장 | |
2004년 5월 20일 ~ 2005년 2월 1일 | |
제20대 행정원장 | |
2006년 1월 25일 ~ 2007년 5월 21일 | |
제30대 행정원장 | |
2019년 1월 11일 ~ 2023년 1월 19일 | |
소속 정당 |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3 |
경력 | 타이완성의회 지방의원 제3대 입법위원 (민주진보당 / 타이베이현) 민주진보당 주석 |
링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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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의 정치인. 민주진보당의 원로 인사 중 하나이다.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는 영 신통치 않았지만, 지명직 고위공직에 임명되었을 때는 상당한 재능을 발휘한 관리형 리더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한국의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 독일의 자유민주당 출신 장관[3]들과 비슷한 케이스.
2. 상세
민주진보당 1세대 정치인 중 하나이다. 국립타이완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며, 군 복무를 위해 대만군 군법무관이 된 적도 있다.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에서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여 타이완성 지방의회 의원으로 1989년까지 활동한다. 1986년에는 민주진보당의 창당 주역 중 하나가 되고, 1989년에서 1993년까지 민주진보당 당적으로 본인 고향인 핑둥현에서 4년간 현장을 지냈다. 이후로는 타이베이현 입법위원(국회의원), 타이베이현장 등 여러 선출직 공직을 맡았다.
이후로 쑤전창은 임명직 공직은 민주진보당이 정권을 잡을 때 많이 맡았다. 주미 대만대표를 맡기도 하고, 천수이볜이 총통에 재선된 2004년에 총통부 비서장을, 2006년에는 행정원장(한국의 국무총리)에 차례로 기용되었다. 특히 행정원장 재직기에는 천수이볜 총통이 선거비용 등 기밀비 횡령이 드러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자, 그의 총통 잔여 임기가 만료되는 2008년까지 약 2년 동안 내정의 실질적 책임자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4] 말하자면 '비공식 총통 권한대행'을 맡았던 셈. 차이잉원 현 총통이 처음 총통 선거에 도전해 낙선한 직후인 2012~2014년에는 민진당 주석을 맡아 당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2016년 차이잉원의 총통 당선, 재집권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화려한 관직 경력과는 달리, 2000년대 이후 선출직 선거는 모조리 낙선하는 낙선의 아이콘 취급을 받고 있다. 2006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 낙선, 2008년 총통 선거 부총통 후보 출마 낙선, 2010년 타이베이 시장선거 낙선, 2014년 신베이 시장선거 낙선, 그리고 2018년에 2018년 대만 지방공직인원 선거에서도 또 신베이 시장후보에서 낙선했다. 그가 출마하는 타이베이와 신베이는 국민당의 지지가 강한 지역인 데다가, 그가 부총통 후보로 출마했던 2008년은 민진당이 몰락했던 때라 그렇다.
2019년 1월 라이칭더 행정원장이 사퇴하면서, 후임 행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천수이볜 시절 이후 약 10년 만에 다시 행정원장 직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2018년 11월의 지방선거 참패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차이잉원 총통으로서는 쑤전창이 과거 2006~2008년 행정원장, 2012~2014년 민진당 주석 시절에 보여줬던 관리형 리더십에 기대를 걸고 있는 듯. 한편으로는 가오슝에서 낙선한 천치마이가 행정원 부원장, 타이중에서 낙선한 린자룽은 교통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020년 1월의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그의 관리형 리더십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를 인정받아 차이잉원 2기 정부에서도 그는 행정원장에 유임되었다.
슬하에 딸이 셋이 있으며, 그중 장녀 쑤차오후이(蘇巧慧)는 신베이 제5선거구의 재선 입법위원이다.
2022년 11월의 지방선거에는 따로 출마하지 않았다. 해당 선거에서는 집권 민진당이 크게 패했고, 2개월만인 2023년 1월 19일 내각의 다른 장관들과 함께 사의를 전달했다. 이로써 4년만에 행정원장 직을 떠나게 되었다. 후임은 천젠런 전 부총통이 내정되었다.
3. 기타
- 목소리가 낮고 거칠어서 데스메탈 음악 같다는 의견이 많다.
- 전 대만단결연맹 주석인 쑤진창(蘇進强)과 이름이 비슷해서인지, 국내에서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실제로는 2013년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반대했다.http://tw.people.com.cn/BIG5/n/2013/1227/c14657-23961340.html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 제7대 타이완성의회 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5] | 당선 | 초선 | ||
1985 | 제8대 타이완성의회 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당선 | 재선 | ||
1989 | 11대 현시장 선거 | 핑둥현장 | | 228,481(54.28%) | 당선 (1위) | 초선 |
1995 | 제3대 입법위원 선거 | 타이베이현 | 571,658(40.67 %) | 당선 (1위) | 초선 | |
1997 | 제13대 현시장 선거 | 타이베이현장 | 571,658(40.67 %) | 당선 (1위) | 초선 | |
2001 | 14대 현시장 선거 | 874,495 (51.31 %) | 당선 (1위) | 재선 | ||
2006 | 제4대 직할시선거 | 타이베이시장 | 525,869 (40.89 %) | 낙선 (2위) | ||
2008 | 제13대 정부총통 선거 | 중화민국 자유지구 | 5,444,949 (41.55%) | 낙선 (2위) | ||
2010 | 지방공직인원 선거 | 타이베이시장 | 628,129 (43.81%) | 낙선 (2위) | ||
2018 | 지방공직인원 선거 | 신베이시장 | 873,692 (42.85%) | 낙선 (2위) |
[1] 이 영문 표기는 중국 남방인들의 부정확한 표준중국어 발음에서 유래한다. 그의 이름에 들어가는 貞의 표준중국어 로마자 표기(성조와 특수 부호 모두 생략)는 웨이드-자일스식으로 chen, 한어병음으로 zhen이다. 그러나 권설음이 없는 대만어 발음의 영향으로 표준중국어의 권설음을 설치음처럼 발음하는 식으로 웨이드식 ch(한어병음 zh)가 아닌 웨이드식 ts(한어병음 z)로 표기한 것이며, 운모의 en과 eng을 구분하지 못하는 대만인들의 언어 습관을 받은 것. 따라서 한어병음의 zeng에 해당하는 웨이드식의 tseng이 되어 버린 것.[2] 1950년 현할시로 격하.[3] 자민당은 1961년 이래로 총선에서 지역구 당선자 없이 기민련 또는 사민당 지지자들의 분리투표에 의존, 전원 비례대표 당선자로 연명해왔다.[4] 당시 국민당 등 야당을 중심으로 입법원에 총통 파면안(즉,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기도 했지만, 통과되지는 못했다.[5] 이 때는 야당의 설립이 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