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감찰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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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75534> 행정원장 · 입법원장 · 사법원장 · 고시원장 |
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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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 ~ 24대 가오슝시장 | |
<colbgcolor=#e75534><colcolor=#ffffff> 중화민국 제10대 감찰원장 천쥐 陳菊 | Kiku Chen Chu | |
출생 | 1950년 6월 10일 ([age(1950-06-10)]세) |
중화민국 타이완성 타이베이현 뤄둥군 싼싱향 (現 이란현 싼싱향) | |
학력 | 스신대학교 (도서관학 / 졸업) 국립중산대학 (공공행정관리학 / 석사)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1] |
재임기간 | 제6대 노공위원회 주임위원 |
2000년 5월 20일 ~ 2005년 9월 19일 | |
제9대 가오슝시장 (현시합병 전) | |
2006년 12월 25일 ~ 2010년 12월 25일 | |
제1 ~ 2대 가오슝시장 (현시합병 후) | |
2010년 12월 25일 ~ 2018년 4월 22일 | |
제35대 총통부비서장 | |
2018년 4월 23일 ~ 2020년 5월 19일 | |
제10대 감찰원장 겸 국가인권위원회 주임위원 | |
2020년 8월 1일 ~ 현직 | |
경력 | 제2대 국민대회 대표 타이베이시청 사회국장 가오슝시청 사회국장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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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의 정치인. 뤼슈롄과 함께 대만 민주화 운동의 대모로 불린다.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출소 후 민주진보당의 창당멤버가 되었으며, 가오슝 시장, 총통부 비서장(한국의 대통령비서실장 격)을 거쳐 감찰원장(한국의 감사원장 격)을 맡고 있다.
대만의 시골에서 자라 표준 중국어는 더듬더듬 구사하며, 주로 대만어로 연설하고 있다.
2. 상세
이란현의 싼싱향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1969년 타이베이에 있는 스신신문전문대학(현 스신대학)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이란현의 대만성의원인 궈위신의 비서로 채용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궈위신은 당시 집권당인 중국국민당 소속이 아니었으며 중국 청년당[2] 소속이었다. 궈위신은 대만독립과 민주주의를 지지하였으며 그 밑에서 비서일을 하던 천쥐는 궈위신의 이러한 주장과 행동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배울 수 있었다.(청년시절 정치적 스승이자 은인이었던 궈위신(오른쪽)과 함께)
대만의 민주화와 독립사상을 배운 천쥐는 당외로 불리는 민주화 재야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는데, 이들과 모여 1979년 1월 인권보호위원회를 만들고 그곳에 창립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해 5월, 이들은 메이리다오 잡지사를 만들고 천쥐는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1979년 12월 10일 세계인권기념일에 맞춰 집회를 열었고 이를 중화민국군 헌병대가 진압함으로써 주동자들을 대거 투옥한 이른바 메이리다오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천쥐는 주요 주동자로써 구속되었으며 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정치범으로써 투옥되었다.
(1980년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군사법정에 출두한 모습)
1986년 장징궈의 사회유연화 정책에 따라 가석방된 천쥐는 민주진보당의 창립 멤버로써 입당하였으며 대만인권촉진회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인권운동과 정치범 석방운동에 앞장섰다. 1994년 천수이볜이 타이베이 시장으로 당선되자 타이베이시 사회국 국장으로 내정되어 재임하였으며, 1998년 셰창팅이 가오슝 시장으로 당선되자 가오슝시 사회국 국장으로 재임하였다.
2000년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당선되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자 새로 구성된 탕페이(唐飛)내각[3]에서 행정원 노동위원회 주임위원[4]으로 입각하였다. 이때 같이 입각한 사람이 차이잉원[5]이다. 장쥔슝(張俊雄) 1차 내각(2000~2002)과 유시쿤(游錫堃) 내각(2002~2005)에서도 노동위원회의 주임위원으로 유임되었다. 2005년 9월 노동위원회 주임위원에서 물러나 2006년까지 창롱대학(長榮大學) 위생연구소의 연구원 겸 객원교수로 초빙되어 잠시 정계를 떠나게 된다.
2006년 12월에 있었던 가오슝 시장 선거에 민주진보당 후보로 출마, 중국국민당의 황춘잉 후보를 1,106표차로 접전 끝에 누르고 당선되었고 2010년, 2014년 내리 3선에 성공했다.[,다만] 특히 2014년 선거에서는 홍콩 우산 혁명의 버프까지 받아서 68%라는 어마어마한 득표율로 3선에 성공. 2012년 대선에서 차이잉원이 패배하여 당주석직을 사임하자 주석 대리를 맡아 어수선한 민주진보당의 분위기를 잘 수습하였다.
제14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이 부총통 후보로 지명하려 했으나, 민진당 내부에서 여성 총통 후보가 나가니까 부총통 후보로는 남성이 나가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결국 천수이볜 총통 시절 위생서장 등을 역임한 천젠런 전 중앙연구원 부원장이 부총통 후보로 지명되었다. 천쥐 본인은 선대위원장을 맡아 차이잉원의 당선에 공헌했다.
2016년 11월 가오슝 시장 자격으로 수원시에 공식 방한하였다. 기사, 인터뷰.
2018년 4월 총통부 비서장(한국의 청와대 비서실장격)으로 임명되면서 가오슝 시장직을 사임했다. 11월에 치러진 가오슝 시장 선거에서는 민진당 천치마이 후보를 열심히 지원했으나, 예상을 깨고 국민당의 한궈위 후보가 당선되면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2019년 홍콩에서 불어온 반중기류를 타고 2020년 대선에서 차이잉원 총통이 재선에 성공했지만, 천쥐도 나이가 많이 들어서,[7] 4년 후 대선에 출마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차이잉원 정부의 2기 출범을 앞둔 2020년 5월에 총통부 비서장 직을 쑤자취안 전 입법원장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감찰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중국국민당에서 임명을 막기 위해 입법원을 점거해 실력행사에 나섰지만 1주일여간의 국회 공성전 끝에 임명동의안이 입법원을 통과했다.
3. 패러디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처럼, 자신의 캐릭터 마스코트가 있다. 양배추 인형 모습과 비슷.대만 만화 5도 쟁패에서는 모에화를 당했는데, "만화란 닮지 않은 꼴의 표현방식이니까요."라며 쿨하게 넘겼다. 이후 천쥐 시장은 오타쿠 혐의가 덧씌워졌다. 그래서 아래 같은 합성짤들이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대만 인터넷에서는 가오슝시의 옛 이름인 타카오와 엮여서 이런 합성짤이 만들어지고 있다.(...) 왼쪽은 칸코레의 타카오, 오른쪽은 푸강아의 타카오.
유희왕의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로도 합성당했다. 카드 이름은 '내맘대로 간다 천쥐'..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6 | 지방공직인원 선거 | 가오슝시장 | | 379,417 (49.41%) | 당선 (1위) | 초선 |
2010 | 5대 지방공직인원 선거 | 821,089 (52.8 %) | 당선 (1위) | 재선 | ||
2014 | 6대 지방공직인원 선거 | 993,300 (68.09 %) | 당선 (1위) | 3선 |
[1] 감찰원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으로, 원 소속 정당은
이다. 탈당을 했어도 민진당 내에서도 영향력이 강하다.[2] 1923년 창당된 중화민국의 두번째 정당이다. 국부천대 이후 다른 정당의 설립은 저지되었지만 그 이전에 세워진 정당인 중국청년당과 중국민주사회당(1932년 창당)은 허용되었다. 하지만 중국국민당의 일당독재에 두 정당은 힘을 쓸 수 없었으며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두 정당은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정당이 되었으며, 민주화 세력은 '당외'라는 이름으로 무소속연합을 이루어 지방선거에 출마하였다. 현재도 두 정당은 중화민국 정부에 등록이 되어 있으나 활동이 아예 없는 유령정당이다.[3] 대만의 정부구조는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 있다. 쑨원의 5권분립 사상 때문인데, 대통령제 국가에서 행정부 수반은 대통령인데 반해 대만에서의 행정부 수반은 총통이 아닌 행정원장이다. 총통이 행정원장을 지명하며 행정원장은 내각을 구성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정권의 시기구분 방법으로 당시 행정원장의 이름을 딴 내각을 붙이는 방법이 있다. 다만 국가수반과 행정수반이 나뉘어져 있는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국가와는 다르게 대만은 총통과 행정원장의 권한이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있지 않아 대만의 행정원장은 내각제 국가의 수상보다는 한국의 국무총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4] 한국의 고용노동부 장관[5]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 한국의 통일부장관[,다만] 가오슝 직할시는 가오슝 현과 2010년 합병되어 신 가오슝 직할시가 되었기에 대수는 리셋되었다.[7] 1956년생인 차이잉원 현 총통보다 6살이나 나이가 많다.
이다. 탈당을 했어도 민진당 내에서도 영향력이 강하다.[2] 1923년 창당된 중화민국의 두번째 정당이다. 국부천대 이후 다른 정당의 설립은 저지되었지만 그 이전에 세워진 정당인 중국청년당과 중국민주사회당(1932년 창당)은 허용되었다. 하지만 중국국민당의 일당독재에 두 정당은 힘을 쓸 수 없었으며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두 정당은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정당이 되었으며, 민주화 세력은 '당외'라는 이름으로 무소속연합을 이루어 지방선거에 출마하였다. 현재도 두 정당은 중화민국 정부에 등록이 되어 있으나 활동이 아예 없는 유령정당이다.[3] 대만의 정부구조는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 있다. 쑨원의 5권분립 사상 때문인데, 대통령제 국가에서 행정부 수반은 대통령인데 반해 대만에서의 행정부 수반은 총통이 아닌 행정원장이다. 총통이 행정원장을 지명하며 행정원장은 내각을 구성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정권의 시기구분 방법으로 당시 행정원장의 이름을 딴 내각을 붙이는 방법이 있다. 다만 국가수반과 행정수반이 나뉘어져 있는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국가와는 다르게 대만은 총통과 행정원장의 권한이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있지 않아 대만의 행정원장은 내각제 국가의 수상보다는 한국의 국무총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4] 한국의 고용노동부 장관[5]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 한국의 통일부장관[,다만] 가오슝 직할시는 가오슝 현과 2010년 합병되어 신 가오슝 직할시가 되었기에 대수는 리셋되었다.[7] 1956년생인 차이잉원 현 총통보다 6살이나 나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