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3 00:18:10

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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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대중문화에서의 계투

1. 개요

계투()는 중국의 오래된 악습으로, 인접한 두 주민 집단이 폭력조직처럼 무기를 들고 서로 죽도록 싸우는 것을 말한다. 즉 단체 현피 패싸움내지는 스케일이 좀 작은 준(準) 내전 정도 된다. 정체자로는 械鬥, 간화자로는 械斗라고 쓴다.[1]

2. 상세

계투에서 계(械)는 무기를 뜻한다. 즉, 오늘날로 치면 연장이다.

중국대륙에다가 인구도 많았기에 선진적인 군현제를 실시하고도 공권력이 구석구석까지는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치안문제가 생겨도 지역민들이 알아서 자경단을 꾸려 해결하다보니 집단 간의 이해득실을 놓고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일이 잦았다. 또한 삼국시대 삼국통일을 달성한 사마씨진나라팔왕의 난으로 막장화되고 영가의 난으로 중원이민족에게 정복당하면서 한족들이 대거 남쪽으로 피난을 갔으며, 이후 이민족이 중원을 침략해 초토화시키는 일이 반복되며 그렇게 삶의 터전을 잃은 유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면(대표적으로 객가), 당연히 원주민과의 갈등은 필연적인데 원주민, 심지어 한족이더라도 지역이 크게 다르면 말도 안통하는데다 이걸 중재해 줄 공권력마저 미약한 상황에선 생존 자원[2]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과 생사결을 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게 된다.

객가건 원주민이건 삶의 터전 때문에 목숨을 건 싸움이니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패싸움과 달리 날붙이가 기본 사양이므로 구하기 쉬운 공구인 중식도손도끼부터 시작이다. 계투에 회칼이나 각목같은 거 들고 나왔다간 쪽도 못쓴다. 어떻게든 무력에서 우위를 점하려다 보니 대도나 자루가 긴 월도 같은 본격적인 병장기까지 직접 만들어 갖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무기까지 난무하니 사람이 상하지 않고 끝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계투 상대에게 대항하기 위해 집을 요새화하는 경우도 흔했다. 계투가 심하거나 도적떼가 들끓었던 지역에서는 아예 집과 요새를 겸비한 건물을 지어놓고 살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푸젠성토루로, 둥글게 두꺼운 을 쌓아 높이를 3층 높이 이상으로 만들고 층을 나누고 벽으로 방을 나눠서 그냥 마을 사람 모두가 거기서 산다. 출입용 문은 두꺼운 철문 단 하나 뿐으로 정말이지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다. 화약 무기가 나오기 전에는 공성 병기를 투입하지 않으면 도무지 뚫을 방법이 없을 정도. 심지어 토루 내부에는 우물이 있고 이 동네는 산악 지대이다. 민간인이 산다는 것만 빼면 거점 방어용 요새나 다름없다. 토루를 소개하는 글 이런 패싸움의 규모가 워낙 커서 관청에서도 세금 잘내는 조건으로 묵인했다고 하니 거의 전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 때는 객가 세력과 토착민 세력 간에 계투가 무려 12년 간 벌어져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렇게 사상자가 많아진 이유는 양측 다 용병을 고용해서…패배자들은 죽거나 해외에 쿨리로 팔아버리기도 했다. 물론 쿨리로 팔지 않는 경우에도 식솔들은 청나라 국내의 기생집, 사창가기생, 창녀로 팔리기도 했다.

이러한 패싸움은 현대에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 # 중국은 지역간 악감정이 다른 나라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수준으로 강력한데 부대낄 일은 많은 탓이다. 심지어 중장비를 동원해(!) 계투를 벌인 사례도 있다.# 특히 공장이 많고 산업이 발달한 중국 1선 도시(베이징·상하이·선전·광저우), 또는 2선 도시(톈진·칭다오·청두·난징·하얼빈) 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온 농민공들, 특히 허난성 출신에게 매우 적대적인데, 이들이 외지인을 혐오하는 이유도 이 계투의 원인과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공장에 일하러 온 이민자 수가 워낙 많으니 이들이 뭉쳐서 싸우기 시작하면 원주민들이 자원을 잃고 쫒겨나는 수가 생기니까. 그 천하의 중국공산당 독재정권도 계투만큼은 없애지 못했다.

심지어 서슬퍼런 중국 경찰조차도 계투가 벌어지면 몸을 사릴 정도다. 구태여 싸움을 막으려고 하기 보다는, 싸움이 끝난 후 뒤처리하는 경향이 크다. 관무불가침의 실제 예시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무림의 원한관계에 현지 관청이 끼어들어봤자 오히려 같이 원한을 사서 비명횡사할 수있으니 그냥 말릴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민무장경찰이나 인민해방군이 출동해서 무력을 써봤자 무력을 쓴 인원들도 피를 보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결판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후처리만 하는 모양. 목숨은 소중하니까

3. 대중문화에서의 계투

무협소설에 흔히 나오는 싸움이 바로 이 계투이다. 중국 패싸움에서 괜히 무기가 등장하는 게 아니다. 현실판 무협지쟁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무협에 등장하는 '무림'이란 단어부터가 이 계투에서 그 모티브를 딴 것이다. 이 무장 자경단이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 '문파'의 기원이다.

초한전기에서 등장한다. 작중 배경인 패현 풍읍에서 주인공 유방이 이끄는 사수정 마을 청년들과 옹치가 이끄는 동악정 마을 청년들이 서로 자기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동네 개울을 두고 패싸움을 벌이는데[3], 정면대결한 1차전에서는 머릿수도 무기도 부족한 사수정 쪽이 개털리고 후퇴했지만 2차전에서는 유방이 잘 알고 지내는 현청 서기 소하한테 말해서 몰래 관군을 불러놓고 일부러 무기 없이 빈손으로 나가서 털리는 바람에 무기를 들고 나온 동악정 쪽만 전원 특수상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어서 관아로 잡혀가고 개울물은 사수정 쪽 차지가 된다. 역시 중국에선 꽌시가 최고


[1] 참고로 정체자로 검색하면 기록화나 흑백 사진 등의 사료가 많이 나오고, 간화자로 검색하면 현대의 생생한 사진 자료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2] 경작지, 농업 용수 혹은 관개 시설, 목재[3] 마침 싸우러 가던 유방 일당과 도중에 마주친 현청 형조 관리 조참이 수상한 분위기를 눈치 채고도 '패싸움은 불법인거 알지?'고 한마디만 하고 묵인하는 깨알같은 고증은 덤. 진나라 때가 오히려 현대보다 폭행에 대한 법적 처벌이 더 심했던 걸 생각하면 꽌시 면에서 더더욱 적절한 고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