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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 ||||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 → | 경험 대교류 운동 | → |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 |
류사오치 실각 | → | 홍위병의 준동 | → | 조반파 홍위병의 주류 등극 |
중국어: 全国大串连
1. 개요
1966년 8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전국의 중고등학생 및 대학생들이 베이징으로 상경해 문화대혁명의 교리를 교류하고 중국 전역에 전파한 운동. 베이징에서 창설된 홍위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운동이다.2. 배경
1965년 11월 해서파관 사건으로 베이징 시장 펑전, 정치국 후보위원 루딩이, 중앙서기처 주임 양상쿤 등이 실각했다. 마오쩌둥은 펑전, 루딩이, 양상쿤, 뤄루이칭이 쿠데타를 모의한 반당 파벌의 대표자라고 비난하며 중국 전역의 반당분자를 척결해야 한다며 혁명을 독촉했다. 이에 호응한 해방일보는 1966년 4월 18일 "마오쩌둥 사상을 받들어 위대한 홍기를 들어 문화대혁명에 적극 참가하자"라는 사설을 발표했고 1966년 "홍기" 8호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만세"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이후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5.16 통지>를 발표해 "당과 정부, 그리고 군대로 몰래 잠입한 부르주아들을 척결하자고 발표하는 한편 천보다, 장칭, 캉성, 야오원위안, 장춘차오로 하여금 중앙문화혁명소조를 구성하게 해 본격적으로 혁명을 지도하게 했다.1966년 5월 하순, 칭화부중의 몇몇 학생들이 "홍위병"이라고 서명한 소자보를 내걸었다. 그리고 6월 2일 칭화부중 교정에 "홍위병"이라는 서명이 기록된 대자보가 정식으로 게시되었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서명했다. 대자보 제목은 "무산계급 혁명 조반정신 만세"라고 씌여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혁명은 조반(造反)이다. 마오쩌둥 사상의 영혼은 바로 조반이다. 조반하지 않으면 100분의 100이 수정주의가 된다! 수정주의 학교 통치가 17년이 되었다. 지금 조반을 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인가? 우리들은 이미 조반을 한 이상 당신들을 따를 수 없다! 전투의 기미가 짙어지고 있다. 폭파통과 수류탄을 갖고 나가 대격투, 대결투를 벌이자! 무슨 ‘인정(人情)’이고, 무슨 ‘전면(全面)’인가, 모두가 힘차게 나아가자.
이렇게 등장한 홍위병이란 개념은 이후 전국 각지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으로 급속히 번져 너도나도 홍위병으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가 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학생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걸 방지하기 위해 1966년 6월 3일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8개 지시사항을 결정하고 이를 베이징대학 당위원회에 하달했다.
1) 대자보는 학교 안에서만 부착한다.
2) 회의는 공작이나 면학분위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
3)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것을 금지한다.
4) 학내외를 구별해 외국인의 참관과 외국학생들이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불허한다.
5) 비판대상을 적발하기 위해 집안을 뒤지는 등의 소란행위를 불허한다.
6) 비밀보호에 주의한다.
7) 구타를 불허한다.
8) 자리를 지키며 적극적으로 (학생들을)이끌어 나가도록 한다.
2) 회의는 공작이나 면학분위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
3)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것을 금지한다.
4) 학내외를 구별해 외국인의 참관과 외국학생들이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불허한다.
5) 비판대상을 적발하기 위해 집안을 뒤지는 등의 소란행위를 불허한다.
6) 비밀보호에 주의한다.
7) 구타를 불허한다.
8) 자리를 지키며 적극적으로 (학생들을)이끌어 나가도록 한다.
또한 류사오치는 장청셴(張承先)을 조장으로 한 공작조를 베이징대학에 급파해 당위원회 직무를 대행하게 했으며, 각 대학과 중학교에 공작조를 파견해 무질서한 학내활동을 바로잡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홍위병들은 공작조의 간섭에 반발했고 칭화대 학생 콰이다푸는 "공작조를 타도하고 홍위병이 권력을 되찾자"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내걸었다가 긴급 체포된 후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려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마오쩌둥은 1966년 7월 16일 장강을 수영으로 도하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후 수정주의자들과 부르주아의 흑풍을 쓸어버리라고 지시했고 류사오치 정권의 핍박을 받았던 콰이다푸를 위문했다. 그후 7월 24일에는 조어대 국빈관에서 지도부가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고 꾸짖으며 공작조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이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한 류사오치는 1만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집결한 대회당에서 자아비판 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고 덩샤오핑 역시 실각했다.
8월 3일,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를 작성했다. 이를 전해들은 홍위병 100만명이 8월 18일에 천안문 광장에 집결했다. 마오쩌둥은 이들과 면담하면서 거리낄 것 없이 혁명을 집행하라고 독려했다. 이에 홍위병들은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을 단행, 8월 말까지 매일 100여 명을 살해해 총 1700여 명을 죽였으며 수많은 교수들이 홍위병에게 탄압당해 목숨을 잃거나 자살했다.
하지만 9월 초부터 베이징의 광풍이 잦아들었다. 홍위병의 공공연한 폭력행위가 감소했고 경찰도 다시 본연의 임무에 복귀했다. 시민들은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 맞추어 도시를 단장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혁명을 이렇게 종식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비록 펑전 등 베이징 내 "독립 왕국"을 타도하긴 했지만 중국 전역의 "독립 왕국"은 아직 건재하다고 생각했고, 이들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린 투사들이 혁명의 불꽃을 전국에 확대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리하여 1966년 8월 말부터 경험 대교류 운동이 전개되었다.
3. 경과
1966년 8월 하순,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혁명의 교리를 전파했다. 이에 매일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중난하이의 당사를 찾아와 지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톈진의 학생은 베이징을 향한 100km에 달하는 여정을 도보로 떠나며 혁명가를 부르고 마오쩌둥 어록의 구절을 읽었다. 이후 8월 28일에는 각 지방에서 14만여 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마오쩌둥은 8월 31일 천안문 광장에서 홍위병을 접견했다. 그는 홍위병들에게 그들의 혁명적 경험을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휘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9월 5일, 국무원은 마오쩌둥의 의사를 받들어 홍위병에게 교통비와 숙박비를 무료로 해주기로 하고 열차를 긴급 투입해 베이징에 가려 하는 홍위병들을 운송하게 했다.9월 초, 전국의 홍위병들은 베이징에 와서 혁명의 교리를 배우라는 마오쩌둥의 지령에 따라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상하이 한 곳에서만 서른 대의 버스가 수많은 홍위병들을 한꺼번에 실어서 베이징으로 이동했고 수백만 홍위병들은 열차에 몸을 싣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전국의 학교에서 수도로 파견할 대표단을 선출했다. 대표단은 어깨에 메는 무명 가방과 알루미늄 보온병, 찻잔, 칫솔, 수건 등을 갖췄고 마오쩌둥 어록을 주머니에 넣었으며 지역 위원회의 정식 소인이 찍힌 공식 소개장을 몸에 지녔다. 이렇듯 국가의 공인을 받은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는데, 어떤 이들은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밥 공기만한 크기의 마오쩌둥 배지를 자신의 살점에 박아넣기까지 했다.
홍위병은 일종의 지위의 상징이 되었고 청년 학생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대상이 되었다. 처음 홍위병 조직의 지도자는 당·정·군 영도자녀들의 간부였다. 그들이 부모 세대에게서 구한 휘장 없는 녹색 군복을 입고, 게다가 그 시절엔 귀한 테릴렌으로 만든 붉은 완장을 차고는 위풍당당하게 홍위병 대오를 이끌었으며,“붓을 들어 칼과 창으로 삼아 마음과 힘을 합쳐 반동을 물리치자”라는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며 거리에서 시위를 할 땐 모두들 찬탄해 마지 않았다. 홍위병들은 수업을 받을 필요도,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다. 전국 어느 곳이나 가도 되었고 기차, 버스, 배 모두 공짜로 탔다. 어딜 가나 정부가 지정한 홍위병 접대소가 있었고, 먹는 것도 돈이 들지 않았다. 용돈이 필요하면 학생증이나 홍위병 증명서만 있어도 수시로 접대소에서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대표단들이 기차에 오르면서 입석이 기본일 정도로 사람으로 메어터졌다. 심지어 다른 학생의 무릎에 앉은 학생도 있었고 좌석 등받이나 마주보는 한쌍의 좌석 중간에 설치된 작은 테이블에 앉은 학생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 통로에 웅크리고 앉았고 어떤 학생은 짐을 올려놓는 선반에 드러누웠으며 어떤 이는 화장실에 비집고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때때로 강도가 들이닥쳐 학생들의 물품을 약탈하기도 했고 너무 많은 학생들이 탑승한데다 위생 상태가 매우 안좋아서 전염병이 창궐해 많은 학생들이 베이징에 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또한 학생들은 자리를 놓고 서로 주먹다툼을 벌였고 몇몇 사람들은 혼란을 틈타 무임승차를 감행하기도 했다.
한편 베이징은 너무 많은 학생들이 몰려오면서 이를 감당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홍위병의 방문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300만 명의 방문객이 베이징을 찾았다. 이들을 무료로 먹이고 재워야 하다보니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갔고 베이징 인근 농촌에 거주하는 농민들은 식량을 강제 징발당하는 등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또한 도시의 위생 환경도 매우 안좋아졌다.상하이 출신의 한 학생은 중화 전국 총공회의 베이징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사무실 바닥이 쓰레기와 딱딱하게 굳은 배설물로 뒤덮인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꼴이 무언가? 여기가 혁명의 성지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설상가상으로 베이징으로 몰려온 홍위병 사이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전국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보인 홍위병들은 음식이나 숙소, 도난 문제로 툭하면 싸움을 벌였다. 몇몇 싸움에서는 수십명의 홍위병들이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고 허리띠를 휘둘렀다. 어떤 학생은 건물 4층에서 내던져 머리가 깨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홍위병들은 붉은 태양, 혁명의 조타수 마오쩌둥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이러한 곤경 따윈 개의치 않았다.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8월 18일, 8월 31일 군중 대회를 개최한 후 추가로 여섯번의 홍위병 사열식을 거행했다. 1966년 11월 26일에 열린 행사를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은 총 1200만 명의 홍위병을 사열했다. 하지만 홍위병들이 워낙 많이 와서 천안문 광장으로도 전부 다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마오쩌둥은 지붕이 없는 지프차를 타고 도시 곳곳을 돌아가면서 200만 명의 학생들을 사열했다.
사열 대회 준비는 매번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홍위병은 한밤중에 여러 무리로 나뉘어 행진하거나 6천대에 달하는 대형 트럭을 타고 광장으로 이동했다. 대회는 절대로 사전에 공지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단 한벌 뿐인 옷을 세탁해버린 학생들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그대로 입고 길을 나서야 했다. 공안 요원들은 학생들을 상대로 몸수색했는데 어떤 학생은 주석을 암살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머리핀을 압수당했다. 학생들은 지시에 따라 열을 맞추어 앉았다. 각각의 무리마다 별도로 자리가 배정되었다. 화장실을 찾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변에 젖은 땅이 이내 질퍽거렸고 많은 학생들이 서로에게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마오쩌둥이 등장하면 학생들은 벌떡 일어나 까치발로 목을 길게 잡아뺀 채 주석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마오 주석 만세!"를 외치며 앞으로 몰려들었다.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에서는 마오쩌둥을 만나 감격한 학생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쏟아져나왔다.
"오늘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마침내 나는 위대한 지도자 마오 주석을 만났다!"
하지만 일부는 학생들의 이같은 흥분에 함께 하지 않았다.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최초의 홍위병 사열 대회에 참가했던 왕릉펀은 외국어 학원의 독일어과에 재학했을 때 배웠던 아돌프 히틀러의 뉘른베르크 궐기대회 연설과 린뱌오의 연설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한달 뒤 그녀는 주석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화대혁명은 대중 운동이 아닙니다. 총을 찬 한 남자가 대중을 조종하고 있는데 어떻게 대중 운동이겠습니까?"
이 19살짜리 여학생은 곧 체포되어 13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또한 어떤 학생들은 뚱뚱한 체구에 약간은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손을 들고 있는 남성이 혹시 대역 배우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고 광기에 휩싸인 동료들에게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며 홍위병들의 엄청난 열기에 묻혔다.
홍위병들은 베이징 뿐만 아니라 혁명의 성지로 지정된 장소들을 방문했다. 엔안에 홍위병의 행렬이 이어졌고 마오쩌둥과 혁명 동지들이 피난처로 이용했던 동굴 속 거주지에 수많은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후난성 사오산에 있는 주석의 출생지에도 역시 홍위병들이 찾아왔으며 주석이 자란 황토 벽돌집, 주석이 다녔던 학교, 주석이 젊었을 때 일광욕을 즐겼다는 오렌지 나무들로 뒤덮인 길고 좁은 형태의 오렌지 섬은 수많은 이들이 몰려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마오쩌둥이 천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국민혁명군과 맞서싸웠던 징강산에도 홍위병들이 잇달아 찾아왔다. 12월 부터 매일 6만여 명의 홍위병이 찾아왔고 한달 뒤에는 방문객이 원주민보다 서른 배나 더 많아졌다. 그 결과 징간산 일대는 초토화되었고 인민해방군 소속 헬기들이 음식과 약품 상자를 투하해야 했다.
또한 홍위병들은 대장정 팀을 조직해 홍군의 대장정 진로를 따라갔다. 그들은 홍군의 발자취를 쫓으며 선배들이 겪었던 고생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혁명의 계승자로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때로는 대열의 선두에서 걸어가는 홍위병이 대장정 팀의 이름이 적힌 홍기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작은 판자에 주석의 말씀을 적고 자신의 배낭에 부착해서 뒤따라오는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이들도 있었다.
이렇듯 수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한곳으로 몰리는 일이 벌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전염병이 창궐했다. 특히 뇌수막염이 치명적이었다. 뇌와 척수를 감싸고 있는 보호막에 염증이 생기는 이 질환은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 전염되었다. 1966년 8월 베이징에서 뇌수막염이 처음 발병했고 2, 3달 뒤 베이징 전역에 퍼졌다. 또한 학생들이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혁명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뇌수막염 역시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데다 학생들을 무료로 먹이고 재우느라 엄청난 재정 손실을 보고 현지 주민들이 막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1966년 12월 21일 무료 숙식과 여행을 폐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무료 여행이 폐지되었음에도 여전히 여행을 즐겼고 뇌수막염은 지속적으로 창궐해 수많은 이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대부분의 병원은 뇌수막염을 치료할 약은 고사하고 마스크도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수많은 간호사와 의사들은 마스크도 쓰지 않고 뇌수막염 환자를 치료하다가 감염되었다. 전염병 예방 및 치료를 감독해야 할 보건부는 주자파를 색출하려는 홍위병들에게 포위되어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서 의료 시스템을 제대로 집행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은 미국의 의료 지원 제안을 거절하다가 1967년 2월 항생제가 너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서유럽과 아시아의 제약 회사로부터 수백 톤의 의약품을 구입했고 뇌수막염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전국적인 임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통제 센터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때는 너무 늦어 16만 명이 넘는 이들이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1967년 2월 3일과 3월 19일, 중공 중앙은 두 차례에 걸쳐 전국 경험대교류 운동을 중단하라는 통지를 내렸고 각 지역 안내소는 속속 철거되면서 대교류 운동은 7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무임승차, 무료 숙박을 감행했고, 이 여파는 1967년 말까지 이어졌다.
4. 결과
경험 대교류 운동이 개시된 이래, 120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베이징으로 몰려들어 8번의 군중 대회에 참석해 마오쩌둥의 연설을 접했다. 상경한 이들 홍위병은 대부분 마오쩌둥의 접견과 중앙문혁의 지지를 받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고향으로 돌아간 뒤 현지 간부들을 공격했다. 현지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던 간부들은 마오쩌둥의 비호를 받는 홍위병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누구도 홍위병들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홍위병들은 막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고 중국 전역은 홍위병들의 만행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5. 참고 문헌
- 문화대혁명: 중국 인민의 역사,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민음사
- 문화대혁명, 야부키 스스무, 영남대학교 출판부
-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천이난, 그린비
- 문화대혁명의 감성적 기원과 전개, 김창규,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 홍위병 조직의 태동에 있어서 마오쩌둥의 영향, 김기효, 중국사학회
- 홍위병과 공작조 등장... 문화대혁명 비극 중심에
- 초법적 홍위병들의 행위에 마오 “그들의 열정 인정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