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당태종(626-649 재위)이 23년에 걸친 치세 동안 위징 등 신하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 '정관(貞觀)' 자체가 당태종 시기의 연호다.[1] 8세기 초에 오긍(670-749)이라는 역사가가 정리, 편찬했다.동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고대 역사를 거울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의 득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제왕학 서적이지만, 당나라 초기의 사회 제도와 문화를 이해하는 사료도 된다.
2. 내용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당태종 치세 동안 신하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일종의 대담집으로 10권, 4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권은 군치론, 규간론, 감계론, 태자론, 공덕론, 수신론, 학예론, 민생론, 국방론, 군덕론으로 그 내용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군치론: 군주와 정치를 논한다, 군주는 군주의 도리를 깨우치고 정사의 요체를 터득해야한다.
- 규간론: 옳은 도리로 간하는 것을 논한다, 현신(賢臣)을 임용하고 옳은 간언을 구하고 구했다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한다.
- 감계론: 본받을 만한 규율을 논한다. 군주와 신하 모두 법과 예에 따라야하며 특히 관원을 선발하고 공신에 대우해줄 때는 엄격해야한다.
- 태자론: 태자에 대해 논한다. 태자의 위계를 바로하고, 태자로 하여금 스승을 존경케하고 엄히 가르치며 적극적으로 규간하게 해야한다.
- 공덕론: 공덕, 즉 사회질서에 대해 논한다. 인의한 통치를 해야하며 충의를 권장하고, 효도와 우애를 다하며, 공평무사해야하고, 신의를 지킬 것을 권해야한다.
- 수신론: 자기관리에 대해 논한다. 검약하고 겸양하며 측은지심을 가지고 지나치게 취미를 즐기지 말고 언어는 신중해야 한다. 참사[2]를 자중하며 허물은 지적받은 즉시 고치며 사치와 방종을 경계하고 탐욕을 자제해야한다.
- 학예론: 학문과 예술에 대해 논한다. 유학을 숭상하며 문학과 역사에 통달하고 예절/의례와 음악을 중시해야한다.
- 민생론: 민생에 대해 논한다. 본업인 농사를 장려하고 형을 행할 때는 엄벌보다는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사면은 신중해야 하며 공물과 조세를 줄이고 상업의 폭리를 제한해야한다.
- 국방론: 군사에 대해 논한다. 정벌은 신중해야하며 최종수단인 정벌 이전에 변경에 안정에 힘써야한다.
- 군덕론: 군주 개인의 행동거지/윤리에 대해 논한다. 행차할 때도 민폐를 최소화해야 하며 잡다한 놀이에 치중하지 않고 미신에 휘둘려서는 안되며 군주가 될 때의 초심을 잃지 말아야한다.
3. 특징
오긍이 8세기 초에 정관정요를 썼음은 분명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논란이 있다. 현재의 통설은 오긍이 709년 당중종에게 한 번 정관정요를 바쳤고, 729년 당현종에게 약간 다르게 다듬은 판본을 다시 한 번 바쳤다는 것이다. 당송 시대에 이미 서로 다른 판본들이 돌아다녔다. 현재 유통되는 것은 대체로 15세기 명나라 때 정리한 판본에 근거하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관정요 판본이 1370년(홍무 3)에 나온 것일 정도라 어쩔 수가 없다.등장인물들이 명신들인 데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주로 다루므로 동아시아 제왕학의 바이블이자 끝판왕이라고 불린다. 덕분에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국왕과 신하들의 필독서였고 그만큼 애독한 사람들도 많다. 간단히 예를 들어 보자면
- 당나라 현종, 문종이 애독했다. 특히 당현종은 치세 전반에 개원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말아먹었다.
- 당나라 선종은 아예 주요 문구를 발췌해서 병풍을 만들었다.
- 금나라 세종은 이 책을 인쇄까지 했다. 인쇄술이 아직 최신기술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 청나라 건륭제도 이 책을 매우 좋아했다. 이 사람도 당태종 뺨치는 사람이다.
- 고려 광종도 애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 조선 세종은 대군 시절 이 책을 읽으려다가 태종에게 꾸지람을 들었다.[3]
- 에도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메이지 덴노를 비롯한 에도시대 쇼군, 덴노들도 정관정요를 열심히 읽었다.
- 마오쩌둥, 덩샤오핑, 시진핑 등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들도 애독했다고 한다. 특히 마오쩌둥 어록은 사실상 공산당판 정관정요라 봐도 될 정도.
사실 제대로 된 동아시아 국가의 군주치고 읽어 보지 않은 이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4. 비판
국가주의적 요소가 제법 들어있고 유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에 유학자들 가운데에서는 대학연의가 차라리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관정요에선 신하의 말에 귀기울이는 성군 당태종의 모습만 쭉 나오는데, 청나라 고증학자 조익(趙翼 1727-1814)은 대놓고 "태종이 신하들 간언 들은 건 즉위 최초 때밖에 없다."라고 비판했다. 즉 정관정요는 실제 태종의 모습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당나라 시기에 당황실이 내세운 프로파간다물 성향이 강함을 전근대 학자들도 알았고, 이 때문에 바람직한 책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5. 외부 링크
[1] '정요(政要)'는 '정(政)치의 요(要)체'를 의미한다.[2] 삿된 말.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음모론, 유언비어, 가짜뉴스, 악의적 루머.[3]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고 어느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지만 왕통을 계승할 수 없는 충녕대군에게 태종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태종은 왕실의 후계를 자신처럼 유혈사태를 겪을 일 없이 적장자인 양녕대군에게 곱게 물려주고자 책벌레 충녕을 최대한 정치와 먼 분야에 관심하도록 유도했는데, 대표적 일환이 바로 정관정요를 압수하고 금지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정관정요가 제왕학의 교과서이다 보니 가장 대표적인 정치서적인 정관정요만큼은 못 읽게 했던 것. 하지만 결국 큰형이 폐세자되어 새 세자로 책봉되고 왕이 되면서는 세종 역시 정관정요를 읽고 교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