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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colbgcolor=#F0C420><colcolor=#ffffff> 황종희
黃宗羲
파일:황종희.jpg
이름 황종희(黃宗羲)
태충(太沖)
이주(梨州)
출생 1610년 9월 24일
대명 절강성 소흥부 여요현
사망 1695년 8월 12일 (향년 84세)
대청 절강성 소흥부 여요현
국적 파일:명나라 보.svg 대명대청

1. 개요2.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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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말청초의 대학자로, 절강성 여요현(餘姚縣)[1] 출신이다. 양지선천성과 그 일원성을 강조한 관념론적 의지주의를 제창해 양명 우파인 강우학파 계열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생명이 약동하는 스피노자식 유심론을 주로 삼고 있으므로 그 사상이 자연 역동적이고 변혁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명이대방록>에서 전제 군주제와 세습을 비판하고, 유교의 전통적인 군주 민본(君主民本)을 뛰어넘어 민주군객(民主君客)을 부르짖은 사상가이기도 하다.

황종희 정률이라는 말로도 유명하다. 정률(正律)이라는 것은 거의 공식 같은 것이다. 중앙 정부에서 세금을 낮추어도 오히려 지방 정부가 더 늘리기 때문에 조세 부담은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2. 사상

태어나면서 사람은 각기 사적이고 각기 자기 이익을 도모한다. 천하에 공적인 이익(公利)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도모하지 않고 공적인 해악(公害)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누군가 나와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며, 자기 자신의 손해를 손해로 여기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손해를 해소하게 하였다. 이 사람의 수고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보다 천만 배이다. 무릇 천만 배의 수고를 하고 자신은 그 이익을 향유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그 누구라도 그런 자리에 서고자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군주직에 대하여 곰곰이 헤아려 보고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 허유(許由)와 무광(務光)이 그들이다. 들어갔다가 다시 떠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요(堯)와 순(舜)이 그들이다. 처음에는 들어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떠날 방법이 없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우(禹)가 그러하다. 어찌 옛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과 다른 바가 있어서 그리하였겠는가? 편안함을 좋아하고 수고로움을 싫어하는 것은 역시 인지상정이었던 것이다.
有生之初,人各自私也,人各自利也,天下有公利而莫或興之,有公害而莫或除之。有人者出,不以一己之利為利,而使天下受其利,不以一己之害為害,而使天下釋其害。此其人之勤勞必千萬於天下之人,夫以千萬倍之勤勞而己又不享其利,必非天下之人情所欲居也。故古之人君,量而不欲入者,許由、務光是也;入而又去之者,堯、舜是也;初不欲入而不得去者,禹是也。豈古之人有所異哉? 好逸惡勞,亦猶夫人之情也。

후대의 군주들은 그렇지 않다. 천하의 이익과 손해에 관한 권한이 모두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천하의 이익을 모두 자기에게 돌리고 천하의 해를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려도 된다고 생각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사적인 이익[自私自利]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의 지극히 사사로운 이해를 천하의 지극히 공적인 이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오래 지나면서 안주하여 천하를 막대한 산업으로 여겨 자손에게 전하여 무궁토록 누리게 하려 하였다. “내가 이룬 성취와 작은 형이 이룬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많은가?”라는 한고조의 말은 이익을 좇는 속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옛날에는 천하의 인민이 주인(主)이고 군주는 객(客)이어서, 군주가 일생토록 경영하는 바가 다 천하를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의 인민이 객이 되니, 천하에 편안히 기댈 곳이 하나도 없는 것은 모두 군주 탓이다.
後之為人君者不然,以為天下利害之權皆出於我,我以天下之利盡歸於己,以天下之害盡歸於人,亦無不可。使天下之人不敢自私,不敢自利,以我之大私為天下之大公。始而慚焉,久而安焉,視天下為莫大之產業,傳之子孫,受享無窮,漢高帝所謂「某業所就,孰與仲多」者,其逐利之情不覺溢之於辭矣。此無他,古者以天下為主,君為客,凡君之所畢世而經營者,為天下也。今也以君為主,天下為客,凡天下之無地而得安寧者,為君也。

그래서 군주가 천하를 아직 얻지 못했을 때는, 천하 사람들의 간과 뇌를 도륙내고 천하 사람들의 자녀를 이산시켜 자기 한 사람의 재산을 늘리려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나는 본래 자손을 위해 창업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천하를 얻은 뒤에는, 천하 사람들의 골수까지 착취하고 천하 사람들의 자녀를 이산시키며 자기 혼자의 음란과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당연시하여 “이것은 나의 재산에서 나온 이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하의 큰 해악은 오직 군주일 뿐이다. 만약 군주가 없다면 사람들이 각기 사적 이익[自私自利]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어찌 군주라는 직책을 설치한 도리가 본래 이와 같았겠는가!
是以其未得之也,屠毒天下之肝腦,離散天下之子女,以博我一人之產業,曾不慘然,曰「我固為子孫創業也」。其既得之也,敲剝天下之骨髓,離散天下之子女,以奉我一人之淫樂,視為當然,曰「此我產業之花息也」。然則為天下之大害者,君而已矣。向使無君,人各得自私也,人各得自利也。鳴呼,豈設君之道固如是乎!

고대에는 천하의 사람들이 그 군주를 사랑하고 받들어 아버지에 비기고 하늘에 견주었어도 진정 지나치지 않았다. 지금은 천하의 사람들이 군주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원수처럼 보고 독부(獨夫)라고 이름하는데, 참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졸렬한 선비들(小儒)은 얼빠진 모양으로 군주와 신하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 빠져나갈 데가 없다고 하여, 걸이나 주와 같은 폭군까지도 (신하인) 탕과 무가 주살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고 하고, 망령되이 백이숙제에 관한 근거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는 (걸과 주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파멸하여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마지 썩은 쥐고기인양 보는 것이다. 도대체 저 위대한 천지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유독 저 한 사람, 저 하나의 성씨만 꼽아서 편애할 리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왕은 성인이고, 맹자의 말은 성인의 말이다. (자신을) 아버지와 같고 하늘과 같다는 헛소리(空名)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노리는 것을 금지시킨 후대의 군주는 하나같이 성인의 말에 불편함을 느끼고 맹자를 문묘에서 폐위하여 끌어내렸는데, 이것은 졸렬한 선비들이 야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古者天下之人愛戴其君,比之如父,擬之如天,誠不為過也。今也天下之人怨惡其君,視之如寇讎,名之為獨夫,固其所也。而小儒規規焉以君臣之義無所逃於天地之間,至桀、紂之暴,猶謂湯、武不當誅之,而妄傳伯夷、叔齊無稽之事,使兆人萬姓崩潰之血肉,曾不異夫腐鼠。豈天地之大,於兆人萬姓之中,獨私其一人一姓乎?是故武王聖人也;孟子之言,聖人之言也。後世之君,欲以如父如天之空名禁人之窺伺者,皆不便於其言,至廢孟子而不立,非導源於小儒乎?

하지만, 비록 후대의 군주가 과연 이 산업을 보전하여 영원토록 전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이미 (천하를 자신의) 산업처럼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산업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누가 나(군주)만 같지 않겠는가? 끈으로 단단히 묶어놓고, 자물쇠로 잠가놓아도, 한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천하의 저토록 많은 이들이 이 자리를 가지고자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길어야 몇 대 만에, 짧게는 자신의 당대에 그 혈육의 파멸이 자기 자손에게 닥치게 된다. 예전에 (송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영원히 제왕의 집안에서 환생하지 않기를 기원했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은 자신의 공주에게 말하기를 "너는 하필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느냐!"라고 하였으니, 비통하구나! 이 말이여. (송과 명의) 창업군주가 건국하던 때에 천하를 차지하려는 욕심을 품었음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후손의 비참한 처지에) 고개 숙여 눈물짓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雖然,使後之為君者,果能保此產業,傳之無窮,亦無怪乎其私之也。既以產業視之,人之欲得產業,誰不如我?攝緘縢,固扃鐍,一人之智力不能勝天下欲得之者之衆,遠者數世,近者及身,其血肉之崩潰在其子孫矣。昔人願世世無生帝王家,而毅宗之語公主,亦曰:「若何為生我家!」痛哉斯言!回思創業時,其欲得天下之心,有不廢然摧沮者乎!

그러므로 군주라는 직분의 (본래적 의미가) 명백히 드러나면 요순의 시대처럼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를 양보하니, 허유나 무광 같은 이들도 아주 특출난 경우가 아니다. 군주라는 직분의 (본래적 의미가) 명백히 드러나지 않으면 저자거리를 메운 사람사람마다 모두 욕심을 낼 것이니, (그래서 고대가 끝난 이후로) 허유나 무광 같은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군주라는 직분의 (본래적 의미를) 명백히 밝히는 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잠시의 쾌락과 무궁한 비애를 교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분명히 알 것이다.
是故明乎為君之職分,則唐、虞之世,人人能讓,許由、務光非絕塵也;不明乎為君之職分,則市井之間,人人可欲,許由、務光所以曠後世而不聞也。然君之職分難明,以俄頃淫樂不易無窮之悲,雖愚者亦明之矣。
- 황종희, <명이대방록> '군주에 대하여' (原君)

어떤 사람이 "형태가 없는데도 보고, 소리가 없는데도 듣고서"[2] 그 군주를 섬긴다면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신하라고 할 수 없다. 자기 몸을 죽이면서까지 군주를 섬긴다면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역시 신하라고 할 수 없다. "형태가 없는데도 보고, 소리가 없는데도 듣는 것"은 아버지를 섬기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몸을 죽이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는 것의 최고 표준이다. 그래도 신하라고 하기에 부족하다면 신하의 도리는 어떻게 한 이후에나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저 넓은 천하는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신하와 관리를 두고서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가서 벼슬하는 것은 천하 백성을 위한 것이지 군주를 위해서가 아니며, 만민을 위한 것이지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천하 만민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그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군주가 태도나 말로써 나를 강제하더라도 복종하지 않겠다. 하물며 형태가 없고 말도 없는 데에서랴! 그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조정의 관직에 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하물며 내 몸을 죽이면서까지 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군주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군주가 태도나 말로 드러내지 않는 기호와 욕망이 있을 때, 내가 따라서 그것을 보고 듣고 한다면 이것은 환관이나 궁녀의 마음이다. 군주가 자기를 위해 죽고 자기를 위해 망할 때, 내가 (이것에) 따라서 죽고 망한다면 이것은 사적으로 총애를 받는 자나 하는 일이다. 이것으로 신하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다.

세상의 신하들이 이런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신하는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군주는 나에게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주가 나에게 인민을 나누어주고 다스리게 한다고 하며, 천하 인민을 군주 주머니 속의 사사로운 물건 정도로 생각한다. 지금 사방이 시끄럽고 혼란하며 민생은 초췌하여 우리 군주를 위태롭게 하기에 충분하니, 이것을 다스리고 기르는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사직의 존망에 관계없다면 사방의 시끄러움과 혼란, 그리고 민생의 초췌함은 비록 직무에 충실한 신하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하잘것없는 걱정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저 옛날의 신하는 이런 (천하를 위하고 만민을 위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저런 (군주를 위하고 일성一姓을 위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대개 천하의 치란(治亂)은 일성의 흥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근심과 즐거움에 있다. 그래서 걸주가 멸망한 것은 곧 치세(治世)가 되는 까닭이며, 진(秦)나라와 몽고가 일어난 것은 난세가 되는 까닭이다.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의 흥망은 치란과 관계가 없다. 신하가 백성의 재난을 경시하면 곧 군주를 도와서 흥하게 하고 군주를 따라서 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신하의 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커다란 나무를 끄는 것과도 같아서, 앞에 있는 사람이 '어기' 하면 뒤에 있는 사람이 '영차' 하는 것과 같다. 군주와 신하가 함께 나무를 끄는 사람인데, 만일 손으로 나무를 동여맨 줄을 잡지 않고, 발로 땅을 디디지 않고, 나무를 끌어야 할 사람들이 나무를 끄는 사람들 앞에서 그저 웃으며 놀기나 하고, 뒤에서 나무를 밀어주어야 할 사람이 그것을 좋다고 하면 나무를 끄는 일은 할 수 없다.

(중략)

어떤 사람은, 신하는 자식과 함께 칭하며 신자(臣子)라고 하지 않는가?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자식은 기(氣)가 통하며, 자식은 아버지의 몸을 나누어 (자신의) 몸을 이룬다. 그러므로 효자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날마다 그 기를 가까이해서 오래되어도 통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불효자는 몸이 나누어진 이후 날마다 멀어지고 소원해져서 오래되면 기가 서로 같지 않게 된다.

군주와 신하의 명분은 천하 국가라는 입장에서 생긴 것이다. 나에게 천하의 책임이 없다면 나는 군주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나가서 군주를 섬길 때 천하 백성을 위한 것으로 일을 삼지 않으면 군주의 노비가 된 것이고, 천하를 위한 것으로 일을 삼으면 군주의 사우(師友)인 것이다. 그런즉 신하라고 하여도 그 이름은 여러 차례 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은 진실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 황종희, <명이대방록> '신하에 대하여' (原臣) 中

<명이대방록>이란, '새벽 방문을 기다리면서 기록함'을 의미한다. 즉 , 지금 점령한 집권자들을 몰아내고 누군가가 황종희가 바라는 이상사회를 가져다주길 바라면서 쓴 책이다.
군주는 사람들의 필요로 인해 생겨난 자리이며, 따라서 천하의 주인은 백성이고 군주는 객(客)이라고 봤다. 같은 원리로 특정 가문의 군주 세습을 비판했다. 천하가 군주를 정해줘 이 군주는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명나라의 특정 가문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실정은 공적 이익이 아닌, 사적 이익 추구이며 천하가 이러한 군주를 정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신하와 군주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아니라 '천하의 이익'을 매개로 묶인 철저한 비즈니스적 관계라 주장했다. 즉 천하의 이익이 아니라면 애초에 남남인 관계이므로, 혈연적 인연인 부모 자식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황종희가 살았던 당시는 명나라였지만, 그 이후인 청나라도 <명이대방록>을 금서로 여겼다. 이 책에는 명나라와 청나라를 언급하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도 금서로 여긴 이유는, 황종희는 군주제 자체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착취하고 통치하는 군주들이 사실은 근거가 없는 왕권이라는 황종희의 주장은 그 때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물론 황종희가 현대와 똑같은 민주주의를 외친 것은 아니고, 엘리트주의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 예로 양명 좌파격인 태주학파의 민간 강학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는 태주학파를 극도로 미워하였고, 심지어 명나라가 '현성양지'를 주장한 왕기(王畿)와 태주학파 때문에 멸망하였다고까지 했다. 황종희는 신사 계층이 국가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지식인들의 여론을 수렴할 수 있는 학교가 중요하고 국가는 학교의 여론을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민간 강학을 극구 반대한 점에서 이 '학교'란 당연히 근대 국민 교육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전문 지식인 계급의 것이다.

여담인데 간신배 위충현을 비난하던 아버지 황존소가 무고하게 잡혀들어가 고문당해 옥사했는데 오래 안가 그의 아버지를 고문해 죽인 허현순과 최응원의 심리에 증인으로 10대 시절에 불려나갔다. 그런데 증언을 끝내고도 나가지 않던 황종희는 일갈하며 허현순에게 달려들어 준비한 송곳으로 마구 찔러버렸다. 관리들은 허현순이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야 황종희를 떼어놓았으나 그러자 황종희는 최응원에게 달려들어 수염까지 뽑으며 분노했다고 한다.

[1]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위야오시.[2] 이 구절은 <예기> 곡례 상에 있다. 의미는 '어린이가 부친의 형상을 보지 못하고, 부친의 음성을 듣지 못했는데도 부친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황종희가 묻는 것은, 부모를 대하는 태도로 군주를 대하는 것이 신하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