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 ]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colbgcolor=#ee1c25><width=16%> 역사 ||역사 전반(홍콩) · 등용제도 · 세금 제도 · 연호 · 역대 국호 · 백년국치 ||
- [ 사회 · 경제 ]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colbgcolor=#ee1c25><width=16%> 경제 ||경제 전반(홍콩 · 마카오) · GDP · 경제성장률 · 상무부(투자촉진사무국) · 재정부 · 공업정보화부 · 중국인민은행 · 세무총국 · 중국 위안 · 중국증권 감독관리위원회(상하이증권거래소 · 선전증권거래소 · 베이징증권거래소) · 홍콩증권거래소 · 국가금융감독관리총국 · ECFA · AIIB · FTAAP · 세서미 크레딧 · 차이나 머니 · 아시아의 네 마리 용(홍콩) ||
- [ 문화 ]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colbgcolor=#ee1c25><width=16%> 문화 전반 ||문화 전반(홍콩 · 마카오) · 문화 검열(검열 사례 · 할리우드 블랙아웃) · 문화여유부(문물국) · 영화(목록) · 홍콩 영화 · 상하이물) · 드라마(목록 · 문제점) · 방송(CCTV · CETV · 라디오 방송 · 홍콩 · 마카오) · 신경보 · 중앙신문(인민일보 · 환구시보 · 광명일보 · 경제일보 · 해방군보) ·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 명보 · 미술 · 2021년 중국 규제 · 파룬궁 · 선전물 일람 ||
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 ||||
5.16 사건 | → |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 → | 경험 대교류 운동 |
중앙문혁소조 설립 | → | 류사오치 실각 | → | 홍위병의 준동 |
1. 개요
1966년 8월,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대학살극. 실제 폭풍이 불어온 자연재해가 아니라 홍위병들이 저지른 대규모 반달리즘, 학살행위를 뜻한다.당시 홍위병은 조반파가 존재하지 않았고[1] 고관 자체 또는 관료, 당 간부의 자제들과 그들이 다니는 북경 주요 대학 대학생들이 결성한 보황파가 중심이 되어 저지른 일이었다. 이들은 문혁을 삼반오반운동과 반우파투쟁의 연장선상으로서, 흑오류[2]와 우파 지식분자, 자본주의 관료 등을 타도하여 당의 지도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해, ‘혁명가의 아들은 혁명가고 반동의 아들은 개차반이다’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걸어 흑오류라 불리던 사회적으로 탄압받던 약자들이나 지식인, 교사들에 대해 린치를 가하는 것에 열중했다. 반면 이 사건 이후 결성된 조반파는 흑오류가 중심이 되어 이러한 혈통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지식분자가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문제는 특권을 누리는 관료계급과 무능한 당 간부에게 있다
붉은 8월(红八月)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965년 11월 해서파관 사건으로 오인소조가 해체되고 천보다, 장칭, 야오원위안, 장춘차오가 주도하는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성립되었다. 문화혁명소조는 1966년 6월 1일 선언을 통해 "괴물과 악마들을 척결하라"고 선동했고 베이징대학 서기 녜위안쯔가 베이징대학이 주자파들에게 점령당했다는 대자보를 내걸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사회비판의 목소리를 내었다가 류사오치가 파견한 공작조의 핍박을 받았던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우후죽순처럼 홍위병을 결성, 전국 각지에서 대자보를 내걸고 교수와 교사들을 타도하기 시작했다. 대자보로 시작된 '혁명적 조치'는 곧 조리돌림, 구타, 머리 깎기, 바보모자 씌우기, 제트기 형벌 등의 물리적인 제재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전국 각지에서 수천명의 교사들이 학생들의 공격으로 자살하거나 살해되었다.그러던 중 마오쩌둥이 73세의 고령의 나이로 1966년 7월 16일 유명한 장강 도하 수영을 감행하며 제국주의자와 수정주의자들의 검은 폭풍우를 쓸어내라고 지시했고[3] 콰이다푸를 비롯, 그간 류사오치 정권의 핍박을 받은 학생들을 위문하며 류사오치를 맹비난했다. 결국 공작조가 해체되었고 류사오치는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3. 전개
3.1. 류사오치의 항복
1966년 7월 24일 마오쩌둥이 조어대 국빈관 1층에서 잠옷 차림으로 당 지도층 인사들을 맞이했다. 마오쩌둥은 지도부가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고 크게 꾸짖었고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공작대가 해체되었고 1966년 7월 29일 인민 대회당에서 류사오치의 자아비판이 거행되었다. 대회당에는 1만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운집했고 칭화대학의 학생 지도자 콰이다푸가 특별 제공된 자동차를 타고 대회장에 입장했다. 이어 베이징대학 혁명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된 녜위안쯔도 입장했다. 마오쩌둥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무대 뒤편의 커튼 뒤에 앉아 있었다.단상 위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나타났다. 류사오치는 자신들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늙은 혁명가들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당시에 알지 못했다고 자아비판했다. 그 말을 들은 마오쩌둥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늙은 혁명가라고? 그보다는 늙은 반동분자라는 말이 더 가깝겠지."
대회 막바지에 커튼이 갈라지고 마오쩌둥이 단상 위에 나타났다. 흥분한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마오 주석 만세를 연호했고 마오쩌둥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몰랐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대단히 당황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거느리고 객석 전체에서 쏟아지는 숭배를 받으며 퇴장했다.
3.2. 홍위병의 폭주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행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령 사람을 때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에게 맞으면 맞을 만하기 때문이다."
1966년 7월 28일 장칭의 교시
1966년 7월 28일 장칭의 교시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은 칭화대학 부설 중학교의 학생들에게 친전을 보내면서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뜻의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문구를 남겼다. 마오쩌둥의 지원사격을 받은 학생들은 곳곳에서 <홍기>, <동풍>따위의 이름을 지어 홍위병을 조직했다. 8월 4일, 칭화대학교 부설 중학교 학생들은 교장과 교감을 흑방의 우두머리로 몰아 조리돌림하여 곤봉과 채찍, 허리띠로 구타했다. 이어 베이징 사범 대학 교감 볜중윈이 학생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하고 조리돌림당하고 강제로 흙을 먹는 등의 고문을 당했다. 8월 5일 오후, 홍위병들이 볜중윈을 포함한 학교 관리자 5명을 억류하여 잉크를 뿌려 모욕을 준 다음에 대못이 박힌 곤봉으로 마구 폭행했다. 볜중윈이 몇시간에 걸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자 홍위병들은 볜중윈을 쓰레기차에 버렸다. 2시간 후에 볜중윈은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이미 목숨이 끊어진 후였다.
8월 13일, 베이징 공인 체육장에서 수만명의 홍위병들이 운집한 가운데 군중집회가 열렸다. 홍위병들은 5명의 민간인을 체포하여 홍위병을 위협한 죄로 구타하고 채찍으로 때려 고문했다. 군중집회에는 저우언라이와 왕런중을 비롯한 고위 정치가들도 참여했으나 홍위병들을 막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어 베이징 제101중학교에서 홍위병들이 10여명의 교사들을 체포, 달군 석탄재 위를 기어 다니게 했고 베이징 6중학교에서는 홍위병들이 취조실을 설치, 닥치는 대로 사람을 고문하여 인간의 피를 담은 후에 <적색 테러 만세!>라는 구호를 벽에 썼다.
3.3. 사령부를 포격하라
이 와중에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를 소집, 류사오치가 독재를 휘두르고 부르주아 계급과 제휴했다고 맹비난했다. 원로들은 마오쩌둥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에 마오쩌둥은 8월 6일 린뱌오를 호출했다. 린뱌오는 류사오치와 원로들을 맹비난하며 "폭풍을 만들고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서 세상을 뒤집어 엎자."라고 외쳤다. 총회 마지막 날의 비밀투표에서 중앙위원회는 11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 류사오치를 부주석에서 실각시키고 린뱌오를 유일한 부주석, 새로운 2인자로 선출했다. 펑전과 펑더화이가 정치국에서 탈락했으며, 장원톈과 루딩이가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탈락했다. 대신에 쉬샹첸, 녜룽전, 예젠잉 등 원수들이 정치국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신임 베이징 제1서기 겸 시장 리쉐펑(이설봉), 공안부장 셰푸즈, 동북국 제1서기 쑹런충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던 캉성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신임 선전부장 타오주와 마오쩌둥의 비서 천보다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8월 8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당내 권력자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했다. 소위 <16조>라 불리는 총회의 성명이 발표되기 3일 전인 8월 5일, 마오쩌둥이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이름도 유명한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마오쩌둥은 8월 7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참석자들에게 대자보를 보여주었고, 참석자들은 경악하였다. 회의가 끝난 이후 공작원들이 이를 붉은 종이에 붓으로 베껴써서 중난하이 인근의 수영장 쪽 식당 바깥에 붙이면서 세상에 공포되었다. 문제의 대자보는 1년 후인 1967년 8월 5일, 인민일보 1면에 게재된다.
마오쩌둥을 직접 보게 된 홍위병들은 이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베이징 3여자 중학교에서 홍위병들이 교장을 때려죽였고 학생 주임을 고문하여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베이징 사범대학 산하 중학교에서 교사들이 끓는 물을 끼얹는 고문을 당했고 베이징 교육대학 산하 중학교에서도 홍위병들이 교사를 때려죽였다. 홍위병들은 교사들을 붙잡아 못과 배설물을 삼키게 하고 서로 따귀를 때리게 강요했다. 비단 교사들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의 눈에 거슬렸던 지식인들도 타도 대상이 되었다. 중국 국가의 가사를 작성했었던 희곡작가 톈한이 길거리로 끌려나와 조리돌림 당한 후 린치되었고[4] <낙타상자>의 저자인 67세의 라오서도 베이징 8중학교[5]에서 몰려나온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과 고문을 당한 후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흥분한 홍위병들은 태도가 불량하다고 그를 밤새도록 구타하고 다음날 아침이 밝아서야 풀어줬다. 수치를 이기지 못한 그는 그길로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정작 쑹빈빈은 나중에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주동했던 본인의 과거[6]를 뒤로한 채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대학 교수, 성공한 사업가등 출세가도의 코스를 착착 밟았다. 그러나 집안 배경이 되고 이미 엄청난 유명인사[7]로 등극한 쑹빈빈과 달리 이러한 집안배경도 없고 선동되었던 대다수의 홍위병들은[8] 이후 숙청되어 상산하향 운동[9]으로 농촌으로 내려가 인생이 사그라졌다. [동아일보]中 100만 홍위병의 상징… 쑹빈빈, 48년만에 참회//[연합뉴스]"공산당 혁명원로 딸의 '문혁 과오' 사과는 위선적"
3.4. 반달리즘과 대학살
"베이징이 부랑자 세상이 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좋은 사람이 항상 다수다. 나쁜 사람은 항상 소수다. 어떻게 부랑자 세상이 된다고 하는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들이 몇개월 동안 난리를 피워도 간섭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견결하게 다수가 좋은 사람을 믿어야 한다. 나쁜 사람들은 100분의 몇 밖에 안된다.
1966년 8월 20일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린뱌오의 발언.
1966년 8월 20일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린뱌오의 발언.
8월 19일, 베이징 제2중학교의 홍위병들이 사방에 대자보를 붙이고 베이징의 유서깊은 식당과 상점들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경 오리 구이 전문점 전취덕은 제2, 제25, 제63 중학 홍위병들이 몰려와 점거하고 부르주아 요리라고 공격하면서 간판을 파괴하고 북경오리요리점으로 강제 개명했다. 그리고 가게 안의 산수화들을 모조리 찢어발기고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어록을 붙여놓았다. 유명 마파두부 식당인 진마파두부반점도 공격당해 홍위병들은 진마파 세글자가 구사회 봉건용어라고 파괴하고 마파두부를 마랄두부로 부르게 강요했으며, 문승반점으로 가게 이름을 바꾸었다.
중앙미술학교 부속 중학 홍위병들은 서화점 영보제를 공격하여 인민미술출판부 제2소매부로 개칭하였고, 동안시장은 동풍이 서풍을 제압한다는 뜻의 동풍시장으로 개칭당했으며, 동인의원은 공농병의원이 되었다. 장안가는 동방홍대로, 동교민항은 반제로로, 소련대사관이 있는 양위로는 반수로로 개칭되었다. 8월 23일, 베이징시 문화국의 경극 도구들이 약탈당해 공묘 앞에서 불살라졌으며, 30여명의 예술가들과 베이징시 문화국 책임자들이 조리돌려졌다.
이어 지역 주민 자치조직인 혁명 위원회가 홍위병들의 사냥도구로 전락, 홍위병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일반인들을 닥치는대로 고발했다. 주로 출신성분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고발된 이들은 홍위병들의 고문을 당해 일가가 몰살당하는 일이 흔했고 도시 전체가 조리돌림과 구타로 가득찼다. 베이징 전체에서 7만 7천명이 불순분자들로 지목되어 베이징시에서 추방당했고 한 사람을 죽이고 나면 그 가족들이 보복하는 일을 예방하는 이유로 나머지 가족들을 죽이는 일이 흔했다. 프랑크 디쾨터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어떤 사람은 곤봉에 맞아 죽었고 어떤 사람은 작두칼에 베이거나 철사 줄에 목이 졸려 죽었다. 전기에 감전되어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거꾸로 매달린 채 채찍질을 당했다. 여덟살 짜리 한 소녀와 그녀의 할머니는 생매장을 당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살인자들은 나중에라도 복수할 수 있는 사람을 남겨 놓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자식을 포함한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도 허다했다. 대부분의 시체는 사용되지 않는 우물이나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어떤 곳에서는 악취가 너무 심해지자 주민들이 시체를 파내서 연못에 버리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46페이지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46페이지
하지만 공권력은 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홍위병의 학살을 도와주었다. 일부 인민해방군 장교들은 살인사건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며 개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이는 공안부장 셰푸즈의 개입 때문이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우리는 홍위병을 지지해야 한다. 홍위병과 대화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라. 그들에게 명령하지 말라. 그들에게 악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들이 흥분해서 누군가를 때려죽인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8월 말까지 매일 100명이 살해되었고 8월 26일 하루에만 126명, 8월 27일에 228명, 8월 28일에 184명, 8월 29일에 200명이 살해되어 절정을 이루었다. 결국 9월 말까지 1770명이 살해되었다.
8월 24일에는 만력제의 시신이 보존된 정릉 박물관을 흥분한 홍위병들이 공격해 만력제의 시신을 비투회에 끌고 나와 조리돌린 후 투석형으로 박살내서 불태우고 고고학 자료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희대의 반달리즘을 저질렀다.
3.5. 결과
베이징을 피바다로 만든 마오쩌둥은 이어 전국 각지의 홍위병들에게 전국적인 경험 교류를 촉구했다. 이로 인하여 경험 대교류 운동이 벌어져서 1200만명의 홍위병들이 베이징으로 상경했는데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기차 태워주는 엄청난 비용은 모두 마오쩌둥이 국고로 대주었다.결국, 홍위병들의 준동으로 인해 치안을 비롯한 모든 국가행정이 완전히 마비되기 시작했고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반달리즘이자 정치적 탄압인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 참고문헌
- 로더릭 맥파커 외, 중국 현대정치사 : 건국에서 세계화의 수용까지 1949~2009(서울: 푸른길, 2012).
- 로스 테릴, 마오쩌둥(서울: 이룸, 2008).
- 로스 테릴, 장칭 : 정치적 마녀의 초상(서울: 교양인, 2012).
- 백승욱,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조반'의 시대(서울: 그린비, 2012).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上(서울: 문학사상사, 2001).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서울: 민음사, 2017).
-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 :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下(서울: 까치글방, 2008).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2권 하(서울: 서교출판사, 2014).
- 프랑크 디쾨터,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파주: 열린책들, 2017).
- 현이섭, 중국지 :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 평석 下, 대란대치편(서울: 인물과사상사, 2017).
5. 관련문서
- 해서파관 사건
- 5.16 사건
- 경험 대교류 운동
-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 경서빈관 대소동
- 2월 역류
- 3월 흑풍
- 7.20 사건
- 67폭동
-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
- 571 공정
- 9.13 사건
- 닉슨-마오쩌둥 회담
- 비림비공운동
- 정돈사업
- 천안문 사태
[1] 조반파가 조직으로서 성립된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 2개월 후인 1966년 10월의 일이다[2] 반동분자, 우파, 지주 등으로 지목되어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 또는 그들의 자식을 이르는 말이다. 당연히 중공 사회 내에서 최하층에 속해 박해받는 대상이었다. 조반파는 이러힌 흑오류들이 결성한 것이다[3] 여담으로 신화통신은 마오쩌둥이 세계 수영 신기록을 무려 4배나 되는 속도로 경신했다고 칭송하였고 마오쩌둥에게 아부하려는 건지 조롱하려는 건지 세계프로마라톤 수영협회는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수영대회에 초청했다.(...)[4] 이때문에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국가를 연주할 때 가사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5] 이 학교는 현재도 푸싱먼역 근처에 있다.[6] 쑹빈빈은 선동당해서 사회의 광기에 휩쓸렸던 대다수의 홍위병이 아니라 '집회를 주동하며 선동질로 대중과 중국 사회의 광기를 부추기고 이끌던' 홍위병이다. 괜히 집회의 여파로 인해 살해된 사람의 남편이 쑹빈빈의 사과 주장에 위선이라고 일갈한게 아니다.[7] 쑹빈빈과 마오쩌뚱의 대면은 문화대혁명의 상징적인 장면중 하나이다.[8] 국내 언론에서 자꾸 홍위병을 하나로만 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현실에서 홍위병들도 엄연히 급이 있었다. 잘나가는 공산당 혁명원로, 당 간부의 자제 출신의 홍위병들과 일반 저소득층, 농민, 빈민 홍위병들[9] 적잖은 배경이 있는 사람들도 휩쓸려져서 가긴 했지만 배경있는 자들의 상당수는 다시 복권되어 사회에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