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 三國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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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직들.삼국시대의 관직은 기본적으로 후한과 같다. 다만 난세이므로 군벌들이 임의로 각종 임시직을 설치하거나, 기존 관직의 권위가 이리저리 바뀌면서 혼란이 많은 편이다.
관직에는 녹봉이 지급되었으며 1년 기준이다. 품질(品秩)이라 하여 관위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며 단위는 석(石)이다. 도정하지 않은 곡식[1]을 주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7~8할 정도로 계산된다. 또한 중(中)이 붙은 것은 기준의 약 2배, 비(比)가 붙은 것은 그에 준한다는 뜻으로 8할 정도 된다. 정리하자면, 1천 석 기준으로 실지급량은 750석 정도이며 중 1천 석은 실질 1500석, 비 1천 석은 600석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2. 외조
2.1. 수상급
- 상국(相國): 신하로서 올라갈 수 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부르는 최고의 관직. 굳이 현대로 따지면 과거 군주제의 섭정에 가깝다. 황제의 옆에서도 칼을 들고 무장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본래의 뜻은 재상을 말하는 것이나, 승상보다 지위가 더 높으며 특별할 경우에만 임명된다. 사실 소하와 조참 등 몇몇 사람들(5명 이내)이 돌려가면서 임명되는 전설의 관직이었고 제후국의 국왕보다 높고 황제, 황후 다음 황태자와 동급이란 의견도 있을정도로, 너무 높은 직책이라서 그 이후부터는 계속 반쯤 영구결번처럼 공석으로 남아있다가 후한시대의 실력자 동탁이 헌제를 협박해서 임명된 관직이다.[2] 그리고 촉한에서도 황제 유비가 붕어한 뒤, 황제의 유언으로 승상 제갈량에게 상국 직위를 부여했으며[3] 조위 역시 부친 사마의와 형 사마사에 이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이며 서진의 태조인 사마소가 진공, 구석과 함께 조모로부터 상국 지위를 하사받았으며 아들 사마염이 조위를 멸하고 조환에게서 황위를 선양받을때까지 연임됐다.
- 승상(丞相): 천자를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리던 국가 최고의 관직으로 현대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진나라 때 설치하여 상국(相國)이라 불러 존칭했다. 한나라 초에는 조정과 왕국에 각각 승상을 두었는데 왕국의 경우에는 단순히 상(相)이라고만 칭했다. 무제(武帝) 때는 황권의 강화를 위해 내조(內趙)를 설치하여 모든 정책이 승상부를 통하지 않고 결정되기도 하였다. 후한 말기에 승상 제도가 폐지되어 대사도(사도)가 임시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필요에 따라 임시로 승상을 두기도 했다. 삼국 중에선 조위는 황제국으로 전환하면서 삼공직으로 다시 바꾸었고 촉한은 승상직은 있었으나 초대 승상 제갈량이 죽은 후에는 공석으로 사실상 영구결번 취급이었기에 건국시부터 나라 멸망까지 승상 제도를 일관적으로 유지한것은 오로지 손오뿐이다.[4] 삼국지에서 승상 벼슬을 받은 사람은 조조, 육손, 제갈량 등이 있다.
- 장사(長史): 진한(秦漢) 때 승상(丞相) 및 태위(太尉)의 속관으로 둔 관직. 또 이와는 별도로 진나라 때의 지방관으로서 군수의 속관으로 이 관직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나라 때에는 변경에 있는 군의 군승(軍丞, 부군수격)으로 이 직위를 두었다. 제갈량이 승상일 때 양의가 맡았다. 승상부 내의 다음과 같은 조를 관할한다. 각 조는 비이백석의 속관을 거느린다.
- 서조(西曹): 부(府)의 사(史)를 서용(署用)하는 일을 주관한다. 부의 인사담당관.
- 동조(東曹): 2천 석(二千石, 관질이 2천 석에 해당하는 고위관리; 군郡의 태수) 장리(長吏)의 천제(遷除, 승진임용) 및 군리(軍吏, 군대의 관리)를 주관한다. 이천 석 이하의 관리의 인사담당관.
- 호조(戶曹): 민호(民戶), 사사(祠祀, 제사), 농상(農桑, 농사와 누에치기)을 주관한다.
- 주조(奏曹): 주의(奏議, 상주하여 의논함, 상소문)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사조(辭曹): 사송(辭訟, 소송)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법조(法曹): 우역(郵驛, 역참)과 과정(科程, 법규정)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위조(尉曹): 졸도(卒徒, 군졸)와 전운(轉運, 물자운반)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적조(賊曹): 도적(盜賊)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결조(決曹): 죄법(罪法, 형벌)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병조(兵曹): 병(兵)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금조(金曹): 화폐(貨幣), 소금(鹽), 철(鐵)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창조(倉曹): 창곡(倉穀, 창고의 곡식)에 관한 사무를 주관한다.
- 황합주부(黃閤主簿): 여러 사무를 기록하며 살핀다.
- 녹상서사(錄尙書事): 궁정의 문서를 맡던 관직으로 후한 장제(章帝) 때 태부(太傅)와 태위(太尉)에게 이 직무를 겸하게 하여 시작된 관직이다. 화제(和帝) 이후 상설 기관이 되고, 그 관위(官位)는 삼공(三公) 위에 있었다. 즉 어린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그를 대신하여 집정하고 재상직을 겸하였다. 현대의 내각총리(內閣總理)와 같은 직책이다. 중상시 건석을 제거하고 하태후가 하진에게 내린 벼슬이며, 비의 사후 강유가 이 자리에 있었다. 다른 말로 영상서사, 평상서사, 성상서사 등이 있다.
- 대사마(大司馬): 본래 삼공의 하나로 진~전한부터 존재했으며 태위(太尉)와 동일시 되기도 하지만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나란히 대사마가 내려져 장군호의 앞에 붙게 되면서 탄생한 관직으로 엄연히 기원이 다르다. 이후 선제 시기 최고 권신이었던 대사마 대장군 곽광이 죽으면서 아들 곽현이 뒤를 이으면서 곽씨 일가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선제의 노력으로 앞에 대장군을 분리해 수여해 병권을 빼았기도 하였으나 전한대에는 외척보정의 공식 직함이 대사마 + X장군(고위무관직) (+ 영상서사)의 형태로 최고 권력자들의 관직이었다. 이후 후한 시기, 다시 사마가 태위로 바뀌고 삼공 직위의 권력 축소밑 외척보정들 역시 직함에 대사마를 제외하였지만 후한 말, 유우가 대사마에 임명되면서 태위와 별도로 존재하게 되고 이각이 잠시나마 대사마에 임명되며 승상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추게 된다. 헌제가 손책에게 내리려다가 조조의 반대로 무산된 관직이며 좌장군에 이어 한중왕이 되기전 유비의 최종 관직이기도 했다. 이후 후한이 몰락하고 조위시기 조인, 조휴, 조진 등 당대 최고 재상들이 대장군을 거쳐 대사마에 임명되면서 대사마는 군정을 관리하는 동시에 대장군처럼 병력을 통솔하며 전쟁을 치를 권한도 갖는 등 최고 통수권자로서 대장군과 삼공의 상위에 존재했고, 촉한의 상국 제갈량이 죽고 뒤를 이은 최고 재상 장완의 최종 관직이 대사마였으며 동오의 마지막 군권1인자인 육항의 관직 역시 대사마였다.
2.2. 삼사(三師)
황제의 스승으로 국가행정 최고 고문직. 실무를 맡는다기보다 공로 있는 이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황제를 보좌하여 회의를 주재하고 정책수립과 결정을 보필하였다.- 태사(太師):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최고의 관직. 태부의 위에 있었으니 명예직에 가깝다. 주(周) 시대의 삼공(三公)의 하나로 설치되어 주로 지육(智育= 지능의 개발과 지식의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담당했다. 첫 태사는 주성왕의 외조부인 강상이었다. 진(晉) 시대 이후 삼공은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전환했으나, 어느 왕조에서나 최고의 현직으로 예우했다.[5] 후한의 동탁이 이 직책을 맡았고 이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태사라 자주 불린다.
- 태부(太傅):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 최고의 현직으로 예우를 했으며, 삼공보다 위였다. 주(周) 시대에 태사, 태부, 태보의 삼공(三公) 중 두 번째 고위직이었고 주로 덕육(德育= 윤리의식을 높이고 정서를 풍부히 길러 주기 위한 교육)을 담당했다. 첫 태부는 주문공이었으며 섬현 동부 지역을 섭정으로서 다스렸다. 진(晉) 시대 이후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후한의 마일제가 이 직책에 있었고, 삼공이라 원술이 그를 억류해 관인을 인수한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 말년의 사마의가 이 관직이었다.
- 태보(太保):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 최고의 현직으로 예우를 했으며 역시 삼공보다 위였다. 주(周) 시대에 태사, 태부, 태보의 삼공(三公) 중 가장 낮은 고위직이었고 주로 체육(體育)을 담당했다. 첫 태보는 소공석이었으며 섬현 서부 지역을 섭정으로서 다스렸다. 진(晉) 시대 이후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서진의 왕상이 이 직책에 있었다.
2.3. 공경(公卿)
한나라의 공경 | ||||||||
삼공(三公) | ||||||||
사마 | 사도 | 사공 | ||||||
구경(九卿) | ||||||||
태상 | 광록훈 | 위위 | 태복 | 정위 | 대홍려 | 종정 | 대사농 | 소부 |
2.3.1. 삼공(三公)
한대의 중앙정치제도(漢代 中央政致制度)는 삼공구경(三公九卿)으로 구성되었는데, 삼공의 경우 국가의 대사를 맡아보는 최고의 관직이다. 전한 기에는 승상(承相)[6], 태위(太尉), 어사대부(御使大夫)가 이 자리를 차지했고, 후한 시기에는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도(司徒)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 사도는 주로 민정, 사마는 주로 군사, 사공은 주로 수리와 토목 부문을 담당했는데, 그 명칭은 후한 시대에는 대사도(大司徒), 대사마(大司馬), 대사공(大司空)으로 갈기도 하였으며 삼공이 삼사(三司), 삼사(三師) 등으로 개칭되기도 했다. 실무를 맡는다기보다 공로 있는 이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중에 국가행정 최고 책임자. 황제를 보좌하여 회의를 주재하고 정책수립과 결정을 보필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진~전한부터 존재했다. 어사대(御史臺)의 장이자 부승상으로 관리의 비행에 대한 감찰과 탄핵 임무와 황제의 비서역할을 하였다. 대사공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공융을 탄핵한 치려가 이 자리에 있었다.
- 어사중승(御史中丞): 어사대부(御史大夫)의 부관으로 감찰의 임무를 맡아보던 관직. 휘하에 시어사들을 거느려, 지서시어사(持書侍御史),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등 한나라 시기엔 총 5명의 시어사가 존재했고 위나라 시기엔 8명으로 늘었다. 서서가 위나라에서 어사중승을 역임했다. 본디 어사(御史)의 직분은 방국(邦國)과 도비(都鄙)에 속한 만민의 치령(治令)을 관장하여 총재(冢宰)를 돕는 것이며, 또 왕명이 있을 때 그 명을 문서로 작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나라의 어사대부는 총재를 계승한 승상을 보좌하며 백관을 규찰하며, 어사대부로부터 독립한 어사중승은 난대를 관장하며 각종 문서를 관리하고, 비법을 감시하고 감찰하는 업무를 맡는 것이다.[7][8]
- 사도(司徒): 삼공의 하나.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관직. 민정 일반과 교육을 관장했다.[9] 녹봉 1만 석. 사마(司馬), 사공(司空)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최고의 관직으로 주로 민정 부문을 담당했으며 실질적인 승상(丞相) 예우를 받았다. 녹봉은 4천 2백 석으로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동탁이 상국이었을 때 왕윤이 맡고 있었다. 촉한에서는 유비의 황제 즉위 후에 허정이 사도로 임명되었다.
- 태위(太尉): 삼공(三公)의 하나로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군사 방면을 담당했다.[10] 태위로 유명한 인물은 양수의 아버지 양표가 있으며, 가후, 만총과 사마의, 등애도 태위였다. 흔히 대사마(大司馬)와 동일시 되기도 하지만 주발이 처음으로 임명되었던 것이 태위이며, 전한시기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나란히 내려졌던 장군호로 탄생한 것이 대사마로 비슷한 역할을 했을뿐 기원이 다르며, 실권을 가지고 있던 대사마와 다르게 주로 명예직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위의 중신이자 위의 군주 조조-조비-조예 3대를 섬긴 고명대신 사마의는 역대 최강의 태위였고, 대장군에서 태위로 승격한 사례다. 당시 실권자인 대장군 조상 역시 사마의를 견제하여 태위에서 삼사의 하나로 지위로 따지면 삼공보다 높지만 실권은 전무한 태부로 승격시키는 꼼수를 부리기도 하는등 시대에 따라서 정확히는 누가 어떤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관직의 권한과 영향력도 달라졌다.
- 사공(司空): 삼공(三公)의 하나. 사마(司馬), 사도(司徒)와 함께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국가 최고의 관직으로서, 주로 수리(水利)와 토목(土木)을 담당했다. 녹봉은 4천 2백 석이었으며, 대사공(大司空)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조조가 자기 스스로 받은 관직이다. 그 밖에는 노육, 진군 등이 있다.[11]
2.3.2. 구경(九卿)
태상, 광록훈, 위위, 태복, 정위, 대홍려, 종정, 대사농, 소부와 그 속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태상(太常): 황실의 종묘와 제사를 주관.
- 태사령(太史令): 점복(占卜, 미래의 일이나 감추어진 일을 알기 위해 점을 치는 것)과 역법, 책력(=달력)의 편찬 및 황제에 관한 내용이나 각종 이변 등의 기록을 주관. 사기를 지은 사마천과 그의 아버지 사마담이 역임했던 직책이다. 녹 600석.
- 태의령(太醫令): 황실의 의료 행위를 담당한다. 녹 600석. 후한서 백관지에는 태의령이 태상부의 속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백관공경표에서는 태의령의 존재가 누락되어 있다.
- 태축령(太祝令): 국가 제례의 준비 및 진행을 담당. 녹 600석.
- 태재령(太宰令): 제사에 쓰이는 희생 제물과 기물을 관장. 녹 600석.
- 광록훈(光祿勳): 황실과 궁중 제관의 감시와 통솔. 태중대부(太中大夫), 광록대부(光祿大夫),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이 이에 속한다. 형주 점령 후 조조로부터 괴월이 받은 관직.
- 광록대부(光祿大夫): 조정의 고문직. 진나라 때 9경(卿)의 하나인 낭중령(郎中令)의 속관으로 설치된 것이 한무제 때 광록훈(光祿勳)의 속관으로 마련되었다. 삼공 다음가는 높은 종2품의 벼슬이었으나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다. 3등관. 녹봉 2천 석.
- 간의대부(諫議大夫): 광록훈의 속관(屬官)으로 황제의 주변에서 간의(諫議), 의론(議論)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품질(品秩)의 비(比)800석(石)이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제7품(七品)이었다. 진(秦)나라 때 간대부(諫大夫)라 부르던 것을 후한 시대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개칭하였다.
- 의랑(議郞): 광록훈 아래의 관직으로, 천자의 고문에 응하는 것이 임무다. 말이 좋아서 고문에 응하는 것이지 천자가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관직이다. 간의 대부와 동격으로 6등관. 녹봉 600석. 원래 문관 위주로 받는 관직이지만 의외로 손견도 이 관직을 받았다. 손견이 이 관직을 받은 이유는 조정에서 그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 정 반대로 그의 무력을 봉인하기 위해 손견에게 이 관직을 내렸다. 실제로도 이 관직을 받은 사람 중 상당수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대표적으로 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이 정태.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에도 이것과 동일한 보직이 있는데 그 보직이 바로 상황장교이다. 연구관은 일을 아예 안하는 보직이다.
- 위위(衛尉): 황실과 궁성 수비를 담당하는 사무직. 위나라의 신비가 역임했다.
- 태복(太僕): 황실의 가마와 말을 관리. 왕명의 전달과 시종직을 주무로 하던 관직. 진한(秦漢) 시대부터는 9경(卿)의 하나로서 천자의 어가(御駕= 임금이 타는 수레)[12]와 어마(御馬= 황제이나 왕이 말에 타는 것)의 관리를 맡는 직책으로 바뀌었다. 다만 병력을 휘하에 둘 수 없는 관직이기 때문에 동탁은 이 관직을 거절하려고 갖은 잔꾀를 부렸다.
- 정위(廷尉): 형법과 사법업무 주관.
- 대홍려(大鴻臚): 제후왕, 열후 및 주변 이족 군장들의 입조와 조공에 대한 출영과 접대를 맡던 관직으로, 원래 전객(典客)이라 하던 것을 무제 때 대홍려로 고쳤다. 장관을 대홍려경이라 한다. 유엽의 최종보직.[13]
- 종정(宗正): 황실 종실과 외척의 생활에 대한 감시와 책임. 원칙적으로 황족만을 임명했다.
- 대사농(大司農): 지방에서 중앙에 바치는 세금과 양곡(=糧穀, 양식으로 쓰는 곡식)을 관리하였다. 현재의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1등관. 녹봉 2천 석. 술취한 손권으로부터 우번을 살린 유기가 맡은 직책.[14]
- 전농(典農): 식량의 징수[15]와 감독을 담당했던 관직. 중원 각지에 두었으며, 대사농에 속했다. 낙양에는 2등관(녹봉 2천 석)의 전농 중랑장이 전농 도위와 함게 배치되어 있었다.
- 소부(少傅): 천자의 어의[16], 어물[17], 경비, 식사 따위를 맡아보는 관직. 경기가 이 자리에 있었고, 유비에게 제위를 권한 왕모가 이 자리에 있었다.
- 낭중(郎中): 소부(少府)에 소속된 상서랑중(尙書郞中)의 약칭이다.
2.4. 무관
후한의 군 편제는 군(장군)-부(교위)-곡(군후)-둔(둔장)의 편제다.- 대장군(大將軍): 병마의 대권을 관장한 최고의 무관직이다. 한무제 당시에는 대사마라는 관호를 붙여 대사마 대장군 식으로 불렀으나 관호는 폐지되었다.[18] 후한 광무제가 대장군(大將軍) 오한(吳漢)을 대사마(大司馬)로 삼고 경단(景丹)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아 그 지위를 공(公)의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전, 후, 좌, 우(장군)과 잡호장군(雜號將軍)은 그 숫자가 많은데 모두 정벌(征伐)을 주관하며 그 일이 끝나면 모두 파하였다. 순제(順帝)가 즉위한 뒤 황후(皇后)의 부친, 형제들을 계속하여 대장군으로 삼고 그 지위를 삼공(三公)과 같게 하였다. 그가 군(軍)을 거느릴 때에는 모두 부곡(部曲)을 둔다. 대장군의 영(營)은 5부(部)이다. 각 부(部)에는 교위(校尉) 1명이 있고 관질은 비(比) 2천 석이다. 부(部) 아래에는 곡(曲)이 있다. 곡(曲)에는 군후(軍候) 1명이 있고 (관질은) 비(比) 6백 석이다. 곡(曲) 아래에는 둔(屯)이 있다. 둔(屯)에는 둔장(屯長) 1명이 있고 (관질은) 비(比) 2백 석이다. 그중에서 교위(校尉)를 두지 않은 부(部)에는 다만 군사마(軍司馬) 1명을 두었고, 관질은 비(比) 천 석이었다. 또한 군가사마(軍假司馬) 1명과 가후(假候)가 있어 이들이 모두 부이(副貳, 부관)가 된다. 그중에서 영속(領屬,예속)하는 별영(別營, 별도의 군영)에는 별부사마(別部司馬)를 두는데 그 병력의 많고 적음은 각기 그때의 시의(時宜)에 따른다. 문(門)에는 문후(門候)가 있다. 수나라 때 한직이 되었다. 후한 영제 집권기에는 하진이 대장군이었고 하후돈, 강유가 대장군이었으며[19] 곽사는 스스로(…) 대장군으로 칭하고 다녔다. 원술이 칭제를 하자 꼴에 자기도 황제라고 휘하 중에서 장훈을 대장군으로 임명했으며 장거와 장순 역시 칭제를 하고 각각 장거가 가짜 황제, 장순이 가짜 대장군이 되었다. 대장군이라는 직함이 직함인지라 그 휘하의 병력은 해당 국가에서 가장 정예하고 휘하 장수도 가장 많았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하진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질서가 잡힌 체제하에서 발휘되는 대장군 관직의 진정한 위엄을 알 수 있다.[20]
- 도독(都督): 위문제 조비 때 각 주(州)의 군사와 자사(刺史)의 관원을 통활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 송서 백관지를 살펴보면 한나라의 자사와 태수는 상하관계가 명확치 않았다. 그 때문에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해서 지방군만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때, 중앙정부에서 독군어사(督軍御史)[21]를 파견했다. 위나라에 들어서면 한나라 시절 장군직을 남발하지 않고 독군(督軍) 권한을 가진 중앙관료들로 위기상황을 극복하던 시절은 끝났고, 일반적으로 장군직을 가진 무관들이 행도독독군(行都督督軍)을 겸하는 기묘한 형태로 발전 혹은 변화하게 된다.
송서 백관지에 따르면 후한의 광무제가 독군제사(督軍諸使)라는 형태로 체제를 구축한 관직(독군어사/감군사자)를, 조조가 '황제가 임명한 제반 관리'라는 의미의 제사를 떼고, 임시로 군을 독(督)한다는 독군을 붙여 행도독독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물론 조조가 무언가를 새로 만든 건 딱히 아니다. 광무제를 비롯한 한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이 틀을 닦아놓은 관제를 자신의 입맛 혹은 필요에 따라 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의 도독 제도와 조조가 기틀을 닦은 위나라 도독은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한다.
다시, 송서 백관지를 인용하면 '지절도독(持節都督)은 정해진 원리가 없다. 전한 시기 사자(使)를 보낼 때 처음으로 지절(持節)이 있었다. 광무제 건무(建武) 초, 사방을 정벌하며, 처음 임시로 독군어사(督軍御史)를 두었고, 일이 끝나면 파하였다. 한헌제 건안 중 조조가 상(相)이 되자 처음으로 대장군(大將軍)을 보내 군을 감독(督軍)하게 하였다. 건안 21년(216년),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오며, 하후돈으로 하여금 26군을 도독하게 한 것이 이것이다. 조비가 즉위하고 황초(黃初) 2년(221년, 진서는 3년), 처음으로 도독제주군사(都督諸州軍事)를 설치하였고, 간혹 자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황초 3년(222년)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 조진을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가황월(假黃鉞)로 삼아 내외의 제군을 총통하게 하였다. 조예 시절 태화(太和) 4년(230년), 사마의가 촉을 정벌할 때, 대도독(大都督)의 칭호를 더하였다. 조모 정원(正元) 2년, 사마소를 도독중외제군(都督中外諸軍), 이윽고 대도독을 더하였다. 진나라 때는 도독제군(都督諸軍)을 상(上)으로, 감제군(監諸軍)을 다음(次)으로, 독제군(督諸軍)을 하(下)로 삼았다. 사지절(使持節)을 상(上)으로, 지절(持節)을 다음(次)으로, 가절(假節)을 하(下)로 삼았다. 사지절(使持節)은 2,000석(二千石) 이하를 죽일 수 있었으며, 지절(持節)은 관위가 없는 이만 죽일 수 있었으나, 만약 군의 사무(軍事)라면 사지절(使持節)과 같았고, 가절(假節)은 오직 군의 사무(軍事)상 군령을 범한 이만 죽일 수 있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 변화한 '도독'을 살펴보면 대장군, 대도독(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은 큰 독군과 작은 독군을 모두 통솔한다. 큰 독군은 거기장군/사정장군/사진장군 등 고위무관이 도독독군을 겸하고, 작은 독군은 잡호장군/편장/비장 등 고위장군들의 부장이나 장군보다 낮은 중하위 무관이 도독독군을 겸한다. 장군직과 도독독군이 점점 남발 되면서 지휘서열의 정리 또한 동시에 진행된다. 지역/주/군 단위의 대규모 군사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도독 독군 휘하에 더 작은 단위로 실동부대를 지휘하는 도독독군이 또 있다. 예컨대 동독형주사(도독형주제군사) 관우는 도독 조루를 독했다.
정식으로는 한나라 군인 조조군의 경우는 아주 애매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26군을 독했다는 복파장군/전장군 하후돈과 주령, 그리고 기병을 독했다고 하는 별부사마 조인, 7군을 독한 좌장군 우금 등이 있다. 주령, 노초, 장합의 3군을 독했다는 행도호장군 하후연의 경우 위략에 따르면 하후연은 관중도독(도독관중제군사)이다. 이게 직설적으로 표현된 게 아니라 "하후무가 하후연의 자리를 이어 관중도독이 됐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략의 기록을 그대로 쓰면 하후연의 최종 관직명은 '한나라 정서장군 도독관중제군사 하후연'이 된다. 한나라 관중 총사령관은 정서장군 도독관중제군사 하후연이고, 한나라 관중 참모장은 정서사마 곽회, 한나라 관중 실동부대장은 평적장군 도독독군(?) 장합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연구자들 가운데서는 조조가 어느 시점에서 도독독군을 상당히 체계화했다고 여기고 있다. (사정/잡호)장군이 제군을 별도로 독했다던지, 잡호잡군이 잡호장군 다수를 독했든지, 잡호장군이 편장군/비장군을 독했다든지 하는 케이스들이다. 이 경우도 과도기적인 도독독군의 분류에 속한다고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조조도 어느 시점에서는 정서장군 도독관중제군사로 도독독군을 체계화했다는 주장인데 문제는 이걸 뒷받침해주는 제대로 된 기록은 위략이 유일하다. 다만 잡호장군이 잡호장군을 독하려면 추가적인 지위가 필요한 건 분명하다. 위략의 '하후연 관중도독+반드시 필요한 지휘체계 정리'가 근거가 된다. 한편 도독독군이 남발되면서 그 고하는 앞에 붙은 장군호 혹은 군호의 높고 낮음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잡호장군이 잡호장군을 독하는 게 이상하긴 하니까. 조조가 사정장군의 관질을 2000석으로 올리면서 도독독군을 겸임시켰다. 이러한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한나라의 사정장군은 광무제가 내전을 벌이던 시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잡호장군과 동렬이었다. 조조는 사정장군의 지위를 관질 2000석인 준구경급 정도로 올렸고 특수한 기능을 가진 소수의 일부 잡호장군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잡호장군보다 윗줄에 놓이게 된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조조는 상급도독, 사정장군 도독독군이 하급도독, 잡호장군 도독독군(?)을 독하게 했으며 조비 시대엔 대장군, 대도독이 상급도독인 사정장군 도독독군을 독했다. 손권의 경우 보국장군 대도독 육손이 하급도독인 좌부독/우부독 전종과 주환을 독했다. 유비의 경우 동독형주사 전장군 관우가 (하급)도독 조루를 독했다.
오나라에서는 주유, 노숙, 여몽, 육손으로 이어지는 대도독 라인이 유명하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한 관명이 아니라 산관(散官)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 표기장군(驃騎將軍): 대장군 다음가는 무관직. 일곱 장군 가운데 우두머리로서 녹봉은 4천 2백 석이었다. 총사령관 격인 대장군 아래 표기(驃騎), 거기(車騎), 위(衛), 전(前), 후(後), 좌(左), 우(右)의 일곱 장군이 있는데, 표기장군은 일곱 장군 중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관위(官位)는 삼공의 아래였고, 삼국시대에는 제2품(二品)이었으며, 독립적인 부서(府署)를 설치하여 장사(長史)·사마(司馬)·종사중랑(從事中郞) 등의 속관(屬官)을 두었다. 삼국시대에는 속관(屬官)이 증가되어 따로 군사(軍師)·참모(參謀)·문하독(門下督)·주부(主簿) 등이 있었다. 수나라 때는 응양랑장(膺揚郞將)으로 명칭이 바뀌어 차차 권한이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무산계(武散階)의 명칭으로 화했다. 곽거병이 최초이며, 조홍, 마초, 이엄, 오반이 표기장군이었다. 또한 손권이 후한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관직이기도 하다.
- 거기장군(車騎將軍)[22]: 동한 삼국시대 때 상설(常說)되었던 고급장군(將軍)의 명칭으로 중앙 상비군을 통솔하고 정벌전쟁을 관장하였고 기병을 통솔하는 무관직이다. 원래 한무제 때 비롯된 공신의 명호였으나 동한 삼국시대 때 표기장군(驃騎將軍) 다음가는 무관직이 되었다. 품질(品秩)의 비(比) 1만 석(石)이었다. 동승, 조인, 장비, 오의, 장합[23], 공손연이 맡은 자리.[24][25]
- 위장군(衛將軍): 궁성의 수비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무관직. 어위군 또는 어림군(모든 종류의 금군통칭))을 총괄한다. 위위의 명령을 받는다. 제갈첨이 위장군이었다.
...라고만 적혀있는 종전의 설명대로라면 그냥 호위무관 1 정도로 인식 되기 쉽지만, 사실 위장군은 표기장군, 거기장군에 준하는 위상으로 2품계의 무관직이었으며,[26] 사정장군이라 불리는 정동, 정서, 정남, 정북장군들, 사진장군이라 불리는 진동, 진서, 진남, 진북장군들보다 위계상으로 높은 품계였다.
- 사방장군(四方將軍): 좌장군, 전장군, 우장군, 후장군을 의미한다.
- 좌장군(左將軍): 동한과 삼국시대에 상설되었던 고급장군(將軍)의 명칭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의 아래에 있었고, 그 관위(官位)는 구경(九卿)의 다음이었다. 전(前)·후(後)·좌(左)·우(右) 등의 네 장군 중에서 좌장군(左將軍)이 가장 높았고 그 다음이 전장군(前將軍)이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 최소한 조조와 유비가 각각 왕위에 오를 당시엔 전장군을 더 높게 쳤다고 보는게 타당하다.[27]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제3품(三品)이었으며, 독립적인 부서(府署)를 설치하여 일을 처리하였고, 속관(屬官)도 있었다. 녹봉은 2천 석(石)이었다. 오랫동안 유비의 직위였으며[28] 우금의 항복 전 직위이다.[29]
- 전장군(前將軍): 대장군 아래 일곱 장군 가운데 하나. 선봉을 맡은 부대의 장군이다. 녹봉 중 2천 석. 관우, 장료와 만총의 직위였다.
- 우장군(右將軍): 서열은 좌장군, 전장군 다음이었으며 반장, 서황의 최종보직이다. 제갈량이 1차 북벌에서 결국 패퇴한 뒤 스스로 책임을 물어 승상자리에서 우장군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3차북벌 이후 다시 승상자리로 복직한다.
- 후장군(後將軍): 이름이 아주 거시기하지만 후방을 담당하는 보직이다. 원술, 황충의 직위였다. 발음때문에, 일부러 앞에 군을 붙여서 후군장군이라고도 부른다.
- 사정장군(四征將軍): 정동, 정서, 정남, 정북장군을 의미한다. 부의 개설 관리 권한을 갖고 있는 막강한 외정사령관이다. 품계는 2품이다. 그 위상은 동, 남, 서, 북 순이다.
- 사진장군(四鎭將軍): 사정장군이 외정사령관의 역할이라면 사진장군은 반란 진압을 주 임무로 하는 장군직이다. 이들도 역시 부의 개설과 관리 임용권한이 있다. 사정장군과 마찬가지로 진동장군, 진서장군, 진남장군, 진북장군의 형태로 존재한다. 후한 말 마등이 정서장군으로, 한수가 진서장군으로 임명된 사례가 있지만, 사정과 사진은 같은 방위에서는 병설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30] 다만 후한말 관직을 사고파는 행위 때문에 이런 장군직도 팔려나가 수시로 병설되고는 하였다. 사정장군의 위상이 사진보다 훨씬 높았다.
- 사안장군(四安將軍): 진서 직관지에 따르면 위나라 초에 설치되었다. 사진장군과 같이 반란 진압 및 내정 안정을 주 임무로 하는 장군직으로 마찬가지로 부의 개설과 관리 임용권한이 있다. 사진장군과 마찬가지로 안동장군, 안서장군, 안남장군, 안북장군의 형태로 존재한다. 사진장군의 위상이 사안보다 높다.
- 안동장군(安東將軍)
- 안서장군(安西將軍)
- 안남장군(安南將軍)
- 안북장군(安北將軍)
- 사평장군(四平將軍): 사진장군, 사안장군과 같이 반란 진압 및 내정 안정을 주 임무로 하는 장군직이다. 이들도 역시 부의 개설과 관리 임용권한이 있다. 사진장군, 사안장군과 마찬가지로 평동장군, 평서장군, 평남장군, 평북장군의 형태로 존재한다. 사안장군의 위상이 사평보다 훨씬 높았다.
- 효기장군(驍騎將軍): 전한 한무제 때 상설(常說)되었던 고급장군(將軍)의 명칭으로, 효기교위의 기마 원정군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이광이 효기장군을 맡은바 있다. 다만 촉한과 동오에서 이 관직을 설치하지 않았다. 위원제 시절에는 상국 사마소가 상국부에 두어 친군을 지휘하였다. 밑에 장사(長史), 사마(司馬), 공조(功曹)를 두었으며, 부서를 설치하여 일을 처리하였으며 진나라시절에는 영군, 호군, 좌우위, 유격대와 함께 상설 6군으로, 황궁의 호위를 맡았다. 품계는 4품이었다. 조인이 조조가 위공 및 구석에 삼으라는 표에 이름을 적었을 때 관직이며[31], 유식, 진랑의 최종 관직이며, 조창이 오환족을 토벌할 때 행(行) 효기장군이었다.
- 잡호장군(雜號將軍): 원래 한나라에서 대장군, 거기장군, 표기장군 외의 장군은 죄다 잡호장군이었으며, 그나마 그 3장군도 상설직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잡호장군은 도요장군(度遼将軍) 같은 관질 2000석의 특별한 기능을 담당한 소수의 잡호장군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임시직이다. 《송서》에서는 어환의 말을 인용하여, 본디 후한에서는 편 · 비장군급이던 사정장군 칭호를 무제가 질 2천 석(태수, 자사와 동급)으로 만들었고, 문제가 삼공에 버금가는 관직으로 올렸다고 한다. 유명한 잡호장군으로 복파장군이 있으며, 가장 유명한 복파장군 둘을 가리키는 이복파사(二伏波祠)는 마원과 노박덕을 가리키는 말이다. 후한 말기 손견이 오랑캐를 치는 장군이라는 뜻으로 토로장군을 받았다. 촉한은 한의 후예를 칭해서 그런지 정말로 사방장군이나 사정, 사진장군도 잡호장군호마냥 위아래가 불분명하고 비상설직이었다. 심지어는 거기장군이나 표기장군도 좌, 우로 나누어 임명하였다.
한나라군의 통솔권자는 한황제로 모든 군령권은 황제에게 있다. 군사행정/군인사권이 포함되는 군정권 또한 황제로부터 나온다. 대장군/표기장군/거기장군/위/좌우전후 사장군/사정장군/잡호장군/편장군/비장군 등 모든 무관들은 황제의 군령권을 빌려서 행사하고, 장군부를 개설하는 데에 필요한 개부권은 물론이고 속관을 임명하는 데 필요한 군정권 또한 황제로부터 위임받았다.
전한시대 장군직은 모두 비상설직이었다. 대장군/표기대장군/거기장군/위장군 또한 본래 비상설이고 <좌우전후> 장군 또한 필요하지 않은 경우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급된 장군들은 밖으로 동정서벌 북벌남정하고, 안으로는 황제의 국방고문이자 조정대신으로 상설화되었다. 한나라 시기에 <좌우전후> 장군이 설치됐을 때는 삼공 다음가는 관직인 위장군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쳤으나, 난세로 접어들어 사정장군(사정/사진/사안/사평)이 대두되면서 그 지위가 점차 애매해진다. 지방 수령의 반란, 민란, 해적 혹은 이민적의 침입이 일상화되고, 한나라가 망조가 들면서 전란과 민란의 시대가 된 후한 말기는 임시 외직인 장군직이 남발되게 된다. 그 결과 전술한 고위장군들은 상시 설치되는 형국이 됐고, 그걸로도 모자라 수많은 장군직들이 새로 만들어지게 된다/
장군에게 수여되는 형용사를 명호라고 하지만, 상기 사료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명호 대부분이 실제 임무와는 상관 없이, 주로 무위와 무용을 현창(顕彰)하는 미칭(美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명호는 전한(前漢) 이래, 보정대신인 재상이 임명된 공(公)에 버금가는 장군인 대장군, 표기장군, 거기장군, 위장군 및 구경에 버금가는 좌우전후 장군(합쳐 사장군이라 부른다)과 구별되는 잡호장군의 총칭이다.
단, 잡호장군 중에서도 일정한 기능과 역할이 부여되어, 특별한 지위를 획득한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환이 이르길, "사정장군은 위무제가 설치했으며, 관질은 2,000석이다. 황초 연중, 그 지위가 삼공에 버금갔으며, 후한에서는 사정장군이 편장군, 비장군, 잡호장군과 동렬이었다."라고 한 것처럼 이른바 도독 제도와 결합된 사정장군(정동, 정서, 정남, 정북) 및 사진장군(진동, 진서, 진남, 진북), 사안장군(안동, 안서, 안남, 안북), 사평장군(평동, 평서, 평남, 평북) 등이 이에 속한다. 또한 이상 십육장군호를 사정장군이라 총칭하기도 한다. 어환의 말에 따르면, 후한에서 사정장군, 잡호장군, 편장군, 비장군의 관위는 기본적으로 동렬이었다.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 하군대장군(下軍大將軍),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남중대장군(南中大將軍),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이상은 2품 잡호장군)[32]정촉장군(征蜀將軍), 정로장군(征虜將軍), 진군장군(鎭軍將軍), 진호장군(鎭護將軍), 안중장군(安衆將軍), 안이장군(安夷將軍), 안원장군(安遠將軍), 평구장군(平寇將軍), 평로장군(平虜將軍), 평적장군(平狄將軍), 평난장군(平難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 호아장군(虎牙將軍), 경거장군(輕車將軍), 관군장군(冠軍將軍), 도료장군(度遼將軍), 횡해장군(橫海將軍) (이상은 3품 잡호장군)건위장군(建威將軍), 건무장군(建武將軍), 진위장군(振威將軍), 진무장군(振武將軍), 분위장군(奮威將軍), 분무장군(奮武將軍), 양위장군(揚威將軍), 양무장군(揚武將軍), 광위장군(廣威將軍), 광무장군(廣武將軍), 영삭장군(寧朔將軍), 좌적사장군(左積射將軍), 우적사장군(右積射將軍), 강노장군(强弩將軍) (이상 4품 잡호장군)응양장군(鷹揚將軍), 절충장군(折沖將軍), 호열장군(虎烈將軍), 선위장군(宣威將軍), 위원장군(威遠將軍), 영원장군(寧遠將軍), 복파장군(伏波將軍), 호위장군(虎威將軍), 능강장군(凌江將軍), 탕구장군(蕩寇將軍), 소무장군(昭武將軍), 소열장군(昭烈將軍), 소덕장군(昭德將軍), 토역장군(討逆將軍), 파로장군(破虜將軍), 토구장군(討寇將軍), 선덕장군(宣德將軍), 위로장군(威虜將軍), 포로장군(捕虜將軍), 진오장군(殄吳將軍), 진이장군(殄夷將軍), 양열장군(揚烈將軍), 건충장군(建忠將軍), 입의장군(立義將軍), 회집장군(懷集將軍), 횡야장군(橫野將軍), 누선장군(樓船將軍), 복토장군(復土將軍), 충의장군(忠義將軍), 건절장군(建節精軍), 익위장군(翼衛將軍), 토이장군(討夷將軍), 회원장군(懷遠將軍), 수변장군(綏邊將軍) (이상 5품 잡호장군)
- 군사장군(軍師將軍): 유비가 제갈량에게 준 직위이다. 형식상으로는 잡호장군에 해당하지만, 한중왕 즉위 이전 유비의 공식적인 지위는 한실에서 받은 좌장군 직이었고 군사장군은 좌장군부의 사무를 총괄하는 실세였다. 이점을 무시하고 단순히 관등이 낮았다고 제갈량의 유비군 내 위상이 안한장군 미축이나 다른 구신들보다 낮았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큰 착각이다.[33] 정사에서는 방통도 받았는데, 연의에서는 방통을 '부군사장군'으로 강등시켰다.
- 무위장군(武衛將軍): 궁정의 경비를 주임무로 하는 무관직으로 한말의 승상 조조가 무위영을 두고, 위의 문제는 무위장군을 두어 근위병을 관장하게 했다.
- 편장군(偏將軍): 지위가 낮은 장군직. 녹봉 2,000석으로 태수와 같다. 보조적인 임무를 담당하던 역할에서 비롯된 이름이었으나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되어 독자적인 지휘권의 유무와는 상관없다. 관우가 조조의 휘하에 있을 당시 받은 관직이다. 또한, 적벽대전 후에 주유, 조운이, 형주를 빼앗은 후에 여몽이 봉해진 관직이다.[34] (5품 상설장군)
- 비장군(卑將軍): 최하위 장군직. 밑으로 중랑장, 교위 등의 계급이 있다.[35] (5품 상설장군)
- 중랑장(中郞將): 황제의 호위와 궁중의 경비를 맡은 광록훈(光祿勳)에 속하는 무관직. 3등관. 녹봉 2천 석. 근위 여단장(近衛 旅團長)쯤 되었는데, 밖으로 정벌을 나갈 때는 부절을 받아서 관구사령관(管區司令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식은 하북의 황건적을 토벌할 때, 새로 설치된 북중랑장(北中郞將) 직책에 임명받았다. 황보숭은 좌중랑장(左中郞長), 주준은 우중랑장(右中郞將)이었다. 중랑장에는 이밖에도 오관(五官), 호분(虎賁), 우림(羽林)의 세 직책이 있었는데 모두가 동격이었다. 중랑(中郞)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조가 승상일 당시 맏아들 조비가 부승상 겸 오관중랑장이었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장사를 평정하러 갈 때 제갈량이 황충에 대해 언급하며 황충이 중랑장이었다는 말을 하며, 정사에서도 황충은 중랑장이었다. 또한 조조가 장비를 포섭하려고 중랑장을 줬다는 언급이 있다.
- 교위(校尉): 둔병(屯兵)을 맡아 보는 관직. 한무제 때 성문교위(城門校尉)와 사례교위(司隷校尉)의 두 교위가 처음 생겼으며, 그 후 차차 무관직으로 변하여 한직(閑職)이 되었다. 녹봉 2천 석.
- 기도위(騎都尉): 광록훈(光祿勳)에 속하며, 중랑장과 같이 황제를 호위하는 기병의 관직이다. 한무제 때 생겨났으며, 세습직으로 녹봉 비 2천 석을 받는다. 황건적의 난 시점에 조조가 조정에서 기도위로 임명된 적 있으며, 장료, 양봉, 이숙도 기도위를 거쳤다.
- 행군사마(行軍司馬): 장군의 보좌관. 한나라 때 설치되어 부내(府內)의 사무를 총괄하는 한편 출정 때는 참모가 되어 장군의 부직(副職)이 되었다. 별명을 군사마(軍司馬) 또는 군사(軍司)라 칭했으며, 당나라 시대 이후에는 출정할 때 장수 및 절도사(節度使) 밑에 반드시 행군사마가 있어 군대의 요직을 차지했다. 녹봉 1천 석.
- 아장(牙將): 원수의 직할부대를 지휘하는 부대장.
- 졸백(卒伯): 무관직 하위 라인의 관직으로 오늘날의 분대장과 동일하다. 휘하 병력도 5~10명 사이로 딱 분대급이다. 졸백보다 낮은 계급이라고는 부하가 없는 무관인 기사와 보사밖에 없다. 조운이 원소의 군대에 입대했을 때 원소가 조운에게 이 관직을 주자 조운은 이에 불만을 품고 원소의 군대 입대를 취소했다.
- 마궁수(馬弓手) 및 보궁수(步弓手) / 연의: 명칭은 송나라 시대에 현위 밑에서 치안을 담당했던 '궁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장거, 장순의 난에 세운 공으로 유비가 평원 현령이 되었을 때, 관우, 장비가 마궁수와 보궁수가 되어 병사들을 훈련시켰다.[38]
- 보사(步士): 무관직 최하위 관직. 그냥 병졸이다. 기사는 그나마 말(馬)이 한 마리씩 딸리지만 보사에게는 창이든 검이든 꼴랑 무기 하나밖에 지급이 안 된다. 기사가 오늘날의 하사라면 보사는 오늘날의 이등병에 해당된다.
3. 내조(황제 직속)
3.1. 문관
- 내조(內朝): 일종의 황제의 비서직으로, 이 내조의 업무는 상서와 시중으로 나뉘어 처리하였다.
- 상서(尙書): 상서성(尙書省)의 천자와 조신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를 맡아보던 관직. 상서령(尙書令) 밑에서 정무를 분장하였다. 원래 일종의 비서관격이던 것이, 후한 때부터 점점 중요한 지위로 되어 육조로 갈리어 각각 직무를 달리하였다. 전한에는 정원이 4명이었다가 후한 광무제가 이천석조를 둘로 나누고 객조를 남북으로 나누어 6조가 되었다. 나중에는 이 벼슬이 차차 높아져서 당나라와 송나라 때는 중앙 정부의 수위(首位)에 앉아 6부(部)의 장관이 되었다가 뒤에는 중앙 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청나라 말기에 상서는 대신으로 아름이 바뀌었다.
- 상서령: 상서성을 총괄하는 대신이며, 한헌제 때에는 순욱의 직책이었다. 한대 이후로 사실상 명예직으로만 남은 삼공과 달리, 실무를 관장하는 상서령의 위치는 점점 중요해졌으며, 촉한에서는 대장군에 대비되는 문관의 수장이었다. 조조는 순욱 사후 화흠을 상서령으로 임명하면서 비서령이라는 관직을 쪼갰고, 조비가 이를 다시 중서와 비서로 쪼갠 후 중서성을 중심으로 재편했다. 남북조 이후로는 사실상 권한이 재상에 이르렀으나 당고조 때에 이세민이 역임하였다고 태종 즉위 이후 폐지되고, 좌우복야가 상서령의 집무를 분담하게 된다.
- 복야(僕射): 관청의 주인, 또는 장의 직위. 진나라 때 시작되어 한나라로 계승되어 군인, 궁인(宮人)상서(尙書), 박사(博士) 등에 모두 복야가 있었으나, 그 후 상서복야 외에는 모두 폐지되고 이것만이 전문직이 되었다. 6등관. 왕윤과 공모해 동탁을 제거한 사손서가 상서복야였다.
- 상시조(常侍曹): 공경(公卿)들의 사무를 주관.
- 이천석조(二千石曹): 군국(郡國)의 이천석(二千石,태수와 상相)에 관련된 사무를 주관.
- 민조(民曹): 모든 관리들이 상서(上書)하는 사무를 주관.
- 객조(客曹): 외국(外國)의 이적(夷狄, 오랑캐)들에 관련된 사무를 주관.
- 승(丞): 각 조에 좌승과 우승이 1명씩 있었다. 상서좌승(尙書左丞)은 관리와 백성들의 장보(章報, 상주) 및 추백사(騶伯史)를 주관한다. 상서우승(尙書右丞)은 관리들에게 인수(印綬)를 내리며 서임하는 것 및 지필묵(紙筆墨) 등의 여러 재용(財用, 재물) 고장(庫藏, 창고에 저장된 물품)을 주관한다. 품질은 사백 석이다.
- 시랑(侍郞): 36명이고 관질은 4백 석이다. 조(曹) 하나마다 6명씩 있고 문서의 기초(起草, 초안)를 짓는 것을 주관한다.
- 령사(令史): 18명이고 관질은 2백 석이다. 조(曹)마다 3명씩 있고 글쓰는 것(書)을 주관한다. 뒤에 극조(劇曹, 업무가 많고 바쁜 조曹)에 3명을 늘려 도합 21명이 되었다.
- 시중(侍中): 소부의 아래 관직이다. 항상 천자를 수행하면서 고문에 응하고, 거동시는 가교 뒤를 기마로 따른다. 녹봉 2천 석. 천자를 시중하고 어가(御駕)와 어의(御衣) 등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때 설치된 것인데 위진(魏晉) 이후에는 문하성(門下省)의 대신을 시중이라 칭했다.
- 사예교위(司隸校尉): 치안을 담당하던 관직으로 한나라 때는 13개 주 가운데 낙양이 있는 한 주만은 특별히 자사(刺史)를 두지 않고 사예교위를 두었다. 따라서, 수도와 그 주변의 모든 범죄자를 검거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으며,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력은 삼공을 제외한 모든 대신과 맞먹었다. 또한, 지방 관청에 대한 감독권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어떤 부서에도 속하지 않고 황제로부터 직접 임무를 부여받아 결과를 황제께 직접 하였다.(감찰감독) 원소는 이 직책을 바탕으로 하북에서도 실권을 쥐었다.
- 하남윤(河南尹): 서울시장 격. 하남은 낙양이 속한 군으로, 전한 때에는 일반 군이었으나 후한 때 낙양이 수도가 되면서 하남윤으로 격상되었다. 녹봉 중 2천 석. 하후돈이 초창기 이 직위를 맡았다.[39]
- 중부연리(中部椽吏): 하남윤의 속관으로 각 현을 순회하는 감독관인 독우는 각 군마다 모두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부로 갈라 관할을 달리하였던 것 같다.
- 주부(主簿): 공부(三公府)에서 군(郡)에 이르기까지 각 관청에 두었던 문서나 기록을 담당했던 관리. 대장군(大將軍)의 막하(幕下)에는 황각주부(黃閣主簿), 사예교위(司隷校尉) 밑에는 주부가 있었다. 한중공방전 당시 양수가 맡은 자리. 의외로 여포도 정사에서는 정원 휘하에서 주부를 지냈다.
- 비서랑(秘書郞): 궁중의 도서 및 문서를 담당하던 관직. 비서는 원래 천자가 비장하는 서적이라는 뜻이다. 비서 낭중도 같은 같은 관직이었으며, 명문 자제로써 임용하였는데, 보통 관리의 첫 출발은 비서랑으로 들어가는 것이 통례였다.
- 중서령(中書令): 궁중의 문서를 맡아보던 중서성(中書省)의 직책. 한나라 무제 때 환관에게 상서성의 업무를 하게 하기 위해 설치했으나 무제 사후 폐지되었다가 조위때부터 부활하였다. 위 문제 때부터는 비서성을 중서성으로 고쳐 상서성을 점점 대신하였으며 중서성의 장관으로 추밀에 관해서도 다루게 했다. 비서랑과 비슷하다. 상서성은 전국 민정을 총괄하는 정책의 실행기관, 중서성은 황제 가까이에 있으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이라 한-위-진 교체기 황제의 성씨 따위가 아닌 체제 그 자체의 변화와, 그것이 가지는 역사 발전 단계에서의 의미/방향성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 중서의 변혁사라고 볼 수 있다. 중서는 본래 내조(內朝)에 속하는 기구로 상서와 함께 황제와 외조(外朝) 사이의 문서 출납을 관리했으나, 광무제 이후 상서가 외조로 분리되어 좀 더 실질적인 업무를 맡게 됨으로써 중서는 내/외조의 연결을 독점하는 중핵이 되었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후한 말 황제의 눈과 귀를 막은 환관의 전횡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 중서를 포함한 내조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한나라 때 중서는 사실 그 독자적으로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이런저런 환관 내조 기관의 일부에 불과했던 게, 위나라 때 내조가 본래의 폐쇄성(즉, 사인 계급에 대한 배타성)을 상실하며 외조와 구분이 유명무실해지는 과정에서 과거 내조 기관에 가까운 폐쇄성을 유지한 '최후의 내조'로 남은 것이 이 시기 중서의 위치를 독보적으로 만든 것이다.
때문에 그런 체제의 타파를 추구한다는 공통의 목표하에 조씨와 호족 세력이 손을 잡음으로써 성립된 조위는 '탁류'로 변질된 내조 권력의 원류 - 즉 환관과 외척을 정치 무대에서 배제시키는 것을 사실상의 국시로 삼고, 그들의 전유물이었던 내조 관직을 사인(=호족)에게 전면 개방하였는데 조예 사후, '삼소제'의 시대에 이르러 황제권의 약화와 동시에 중서는 그 존재감을 크게 상실하는데,[40] 이후 결국 사마씨가 조씨로부터 옥좌를 찬탈해 세워진 진나라에서 중서의 자리는 주류 대호족 세력에게 넘어가고 만다. 일단 서진의 초대 중서감이 그런 대호족 세력의 간판과도 같은 순씨 가문의 순욱이었고, 그 이후에도 (장화를 제외하면) 그 자리를 거쳐간 인물들은 화흠의 손자 화이, 노식의 현손 노심 등 쟁쟁한 호족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
즉 정리해 보자면 환관의 전유물이었던 한대의 중서가 황제(조씨)의 측근/수족의 역할에 철저했던 위대의 중서를 거쳐 마침내 주류 대호족 계층이 진출,장악한 서진의 중서로 완성된 셈인데 이러한 중서의 변화는 결국 한말 당고의 금 이래 호족 사대부 계층 전체의 비원 - 즉 자신들이 가진 향촌 지배력에 걸맞은 중앙 정부 내에서의 발언권과 입지 확보라는 과제가, 조씨와의 팽팽한 연립 정권이었던 위나라를 거쳐, 끝내 자신들의 계층에서 황제를 배출해 내고 만 진대에 이르러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그 전개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보인다.
- 태자사인(太子舍人): 태자를 가까이 모시는 시관. 후한에서는 태자 소부에 속하여 궁중의 숙위에 임하였다. 양가의 자제 중에서 선발 임용하였다. 조모를 시해한 성제, 성쉬가 태자사인이었다.
- 태중대부(太中大夫): 궁중의 의론(議論)을 맡아보던 관직. 진(晉)나라 때 비롯되었으나 수나라 이후부터 단순한 산관(散官)이 되고 말았다.
- 환관(宦官): 거세(去勢)된 남자
고자로서 궁중에서 벼슬을 하거나 유력자 밑에서 사역되던 자로 시인(寺人)·엄관(官:奄人)·정신(淨身)·내수(內竪)·중관(中官)·혼시(寺)·환시(宦寺)·환자(宦者)·황문(黃門) 등의 이름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별칭으로 내시(內侍)라 하였고, 영어에서는 그리스어에서 연유하였다는 ‘eunuch’가 해당된다. - 중상시(中常侍): 상시(常侍)라 불리기도 한다. 궁중의 일을 관장하는 황제의 사부(私府)인 소부(少府)에 속해있는 관리다. 환관직종 중 최고위직이다. 시종장(侍從長)과 비슷하다. 십상시(十常侍)는 10명의 상시를 말한다.
- 황문상시(黃門常侍): 원래 황문이란 궁문(宮門) 또는 궁서(宮署)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한과 삼국시대에는 급사황문시랑, 황문시랑, 황문랑, 소황문, 중황문, 황문감 등으로 분할된 벼슬이 되었다. 주로 환관이 맡아 환관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으나 황문시랑 같은 경우 환관이 아닌 사람도 맡은 일이 많아서 마냥 그렇게 보기도 곤란해졌다. 삼국지연의에는 황완의 아들 황규가 맡은 직책.
3.2. 무관
- 성문교위(城門校尉): 낙양의 열두 성문을 지키는 교위. 사마 1명, 문후 12명을 거느린다. 녹봉 2천 석. 동탁을 제거한 최열의 최종보직.
-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 후한말에 십상시들이 세운 황실 경비병들을 이끈 여덟 교위를 의미한다. 우두머리는 십상시 중 한명이었던 상군교위 건석이었다. 중군교위 원소, 하군교위 포홍, 전군교위 조조, 조군좌교위 조융, 조군우교위 풍방, 좌교위 하모, 우교위 순우경이 속했다.[41]
- 점군사마(點軍司馬): 팔교위 아래 계급으로 중규모 부대의 장.
-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将): 오관중랑장은 궁중의 여러 대문을 지키고 숙직을 담당하며 밖으로 나갈 때는 전쟁용 수레나 기마부대로 들어가는 자를 관리한다. 조비가 태자로 책봉되기 이전의 직책인데 부승상과는 다르다.
-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황제의 호위를 맡은 5중랑장의 하나다. 주(周)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近衛官)으로 출발한 관직. 한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을 호분중랑장이라 일컬었다. 원래는 전한기 초창기에는 없다가 14대 황제인 평제 원년에 기존의 4중랑장에서 추가 창설한 직책이다. 그러나 남북조시대 이후 이 칭호가 남용되어 무게를 잃어 가다가 당나라 때는 중급 장교 정도의 지위로 떨어졌다.
- 우림중랑장(羽林中郞將): 황제의 호위를 맡은 5중랑장의 하나다. 선제 원년때 3중랑장에서 추가 창설되었다.
- 좌중랑장(左中郎将):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将)과 더불어서 전한기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3중랑장 직책중 하나였다.
- 우중랑장(右中郎将): 좌중랑장과 마찬가지로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将)과 더불어서 전한기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3중랑장 직책중 하나였다.
- 오교위(五校尉): 동한말(東漢末)에 설치된 관직. 도성을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북군의 휘하다. 북군중후 아래에 둔기, 월기, 보병, 장수, 사성의 오교위가 설치되어 각기 영을 거느렸다. 품질(品秩)은 비(比)2,000석(石)이고, 4품(四品)이다.
- 효기교위(驍騎校尉): 오교위 중 하나다. 한나라 초에 설치되어 수나라 이후 폐지되었다. 근위 기병과 숙위병을 전문적으로 관장하였다. 동한(東漢) 초기에 둔기교위(屯騎校尉)를 고쳐서 효기교위(驍騎校尉)라 하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옛날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후에 다시 효기교위로 고쳤다. 삼국시대에는 또 다시 옛 명칭을 사용하여 둔기교위라 하였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원리는 127명이고 병사 칠백인을 지휘하였다. 삼국지연의에는 화웅이 이 직책을 받고 사수관을 지켰다. 신삼국에서는 조조가 유비와의 대화에서 '난세가 없었다면 나는 효기교위로 늙어죽겠지'이라고 언급이 된다.
- 월기교위(越騎校尉): 오교위 중 하나로 도성 밖에 주둔하는 군대를 통솔한다. 근위 기병과 숙위병을 전문적으로 관장하였다. 월(越)이 월인(越人)을 말하는지, 초월(超越)을 뜻하는 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원리는 128명이고 병사 칠백인을 지휘하였다. 동탁 암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오부의 자리.[42]
- 보병교위(步兵校尉): 오교위 중 하나로 보병을 담당했다. 숙위병을 관장하였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원리(員吏, 인원이 규정된 吏)는 73명이고 병사 칠백인을 지휘하였다. 죽림칠현의 1인인 완적이 보병교위를 맡은 적이 있어 완보병이라 불렸다.
- 장수교위(長水校尉): 오교위 중 하나로 오환기병을 담당했다. 다른 오교위는 사마가 한 명인 데 반해, 장수교위는 장수사마와 호기사마가 각각 따로 있었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원리(員吏, 인원이 규정된 吏)는 157명이고 병사 736인을 지휘하였다. 동승과 공모한 충집의 관직이나, 다른 기록에는 월기교위로 나온다. 제걀량의 동생 제갈균이 이 자리에 있었다.[43]
- 사성교위(射聲校尉): 오교위 중 하나로 궁병을 담당했다. 숙위병을 관장하였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원리는 129명이고 병사 칠백인을 지휘하였다.
- 부자사(部刺史): 지방행정관 관리에 대한 감찰감독으로 그 대상은 군수의 일반 행정과 호적에 대한 감사하였다.
- 봉거도위(奉車都尉): 천자를 호위하여 천자의 수레에 배승하는 근위 기병의 장. 녹봉 2천 석.
- 영군도위(領軍都尉): 호군과 함께 근위병을 지휘하던 무관.
- 산기상시(散騎尙侍): 천자의 수레에 배승하는 근위관. 정한 예식에 맞지 않을 때 간언하는 것을 임무로 했으며, 사인(士人)으로써 임용했다. 태수와 겸직한 경우도 있는데 맹달의 경우 조비가 맹달에게 이 관직과 상용태수 관직을 같이 내렸다.
- 시강(侍講): 천자 또는 황태자의 학문을 지도하던 관직.
- 집금오(執金吾): 궁성의 주변을 순시하며 경위와 방화를 맡던 무관직. 전한 때에는 구경에 속했으며, 녹봉은 2천 석이었다. 연의에서는 동탁이 황제가 되면 이숙에게 이 자리를 준다고 헛된 공약을 내걸었다. 장패의 직위며, 가후도 이 직위를 받은 적이 있다.
- 영군(領軍): 중령군(中領軍)이라고도 한다. 호군과 함께 금병을 지휘하던 무관직. 위나라 조조(曹操)가 처음으로 이 관직을 설치했다.
-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 오환족을 관리하며 오환족에게서 병력을 차출하여 지휘할 수 있다.[44]
-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郞將): 선비족을 관리하며 선비족에게서 병력을 차출하여 지휘할 수 있다.
-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郞將): 흉노족을 관리하며 흉노족에게서 병력을 차출하여 지휘할 수 있다.
4. 속관
- 공부시랑(工部侍郞): 부(工部)는 영조, 공작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시랑(侍郞)은 성의 차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공부의 장관(長官) 상서(尙書)의 부직(副職)이었다. 동한(東漢)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이런 관직명이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자복(王子服)이 이 관직을 지냈다고 하였다.[45]
- 낭관(郎官): 각 관청에서 문서의 일을 맡던 관직이다. 한나라 때에는 시랑(侍郞)과 낭중 (郎中)을 낭관이라 했으나, 당나라 이후 낭중과 원외랑(員外郞)을 낭관이라 칭했다. 한나라 때에는 상서(尙書; 장관)의 보좌를 겸했고 후에 각 사(司)의 직무를 주관했다. 8등관. 녹봉 400석.
- 종사(從事): 보좌관에 대한 총칭. 한나라 때 자사인 속관이던 별가(別駕), 치중(治中), 제조, 공조(功曹), 부종사 등이 모두 종사였고, 또 각 부(部)군(郡)국(國)에도 종사가 있었다. 원소의 심복 저수가 있던 자리.
5. 과거, 천거직
- 수재(秀才): 과거의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 한국 조선조의 진사에 해당한다. 다시 제2단계인 과거에 통과하면 거인(擧人)이라 했다. 전한(前漢) 때부터 각지방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군태수(郡太守)가 관리후보로 조정에 추천하는 제도가 생겼는데, 이 제도에 따라 추천된 사람을 수재라고 했다. 후한(後漢) 때에는 광무제의 이름이 수(秀)였기 때문에 이 글자를 피해 무재(茂才)라고 했다. 문관 임용제도가 확립된 명나라 이후부터 첫 단계의 과거에 합격하면 부(府)나 주(州), 현(縣)의 학생원(學生員)이 될 자격과 함께 다음 단계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는데 이들을 수재라고 했다. 그러나 후한 당시에는 뒤에 나오는 효렴(孝廉)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수재는 빛을 잃고 있었다. 유비가 원담을 무재로 천거한 적이 있다.
- 효렴(孝廉): 효도와 청렴한 사람을 지방관이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선 사람을 말한다. 한나라 무제 때 시작된 제도였으나, 명나라 이후에는 과거에서 천거된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광무제 때 상서랑(尙書郞)의 결원이 생기면 효렴에서 보충하였다. 이게 대단히 위험한 관직이었던 게 효렴은 태수가 1개월에 1명씩 천거할 권한이 있었는데 자기가 효렴으로 천거한 사람이 사고를 치면 연대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조조 나이 20세에 오른 관직. 무제기에는 한수의 부친이 조조와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다고 하는데, 조조가 이례적으로 빨랐다고 보면 된다. 다만 조조는 당대 최고의 환관인 조등의 의붓 손자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인맥으로 얽히고 섥혀 이런 게 충분히 가능했다. 손견은 장사태수가 되자 환계를 효렴으로 천거했는데 훗날 손견이 사망하자 환계는 자신을 효렴으로 천거해 준 손견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 유표의 진영에 찾아가서 손견의 영구를 되찾아왔다.
6. 여관(女官)
- 미인(美人): 한나라 시대의 궁중 여관(女官) 계급으로 녹봉은 2천 석을 받았다. 명나라 때까지 존속하다가 폐지되었다. 헌제의 어머니 왕미인이 유명하다.
- 귀인(貴人): 황제 비(妃)의 관명(官名). 첫째가 황후(后)이고, 둘째가 귀인, 셋째가 미인(美人)이었다.
- 번비(藩妃): 지방을 다스리던 제후의 아내.
7. 지방관
후한의 지방관제가 이 망조를 가속시켰는데, 한나라는 주가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행정구역이라기보다는 지방구분에 가까운 행정구역에 가까웠기 때문에 태수(太守)에게 군(郡)의 모든 치안, 군사, 행정 권한이 비중된 반면에 태수를 감찰할 주(州)의 자사(刺使)는 권한이 미약했다. 본래 진나라에서는 군(郡)에 행정과 재판을 맡는 태수(太守), 치안과 군사를 맡는 도위(都尉), 군의 업무를 감찰하는 감어사(監御史)의 3명의 지방관이 부임시켰다. 후한의 관료제는 이 체계가 점점 간략화 된 것인데 전한에서는 군의 감어사가 폐지되어 상부 행정 단위인 주(州)에 부임하여 각 군을 순시하며 감찰하는 자사(刺史)로 바뀌었고, 후한에서는 도위도 폐지되어 태수가 군의 행정, 재판, 치안, 군사를 모두 겸하게 된다.이렇게 태수의 권한이 너무 강해지자 자사의 감찰이 무력해지는 폐단이 나타나는데, 자사가 호족과 결탁하여 반 군벌화된 군 태수에게 맞아죽거나 쫓겨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명목상으로는 상급자인 주자사가 실제로는 하급자인 군 태수에게 호구로 취급 받게 된 것이다. 아예 자기 주의 자사를 잡아다 쳐죽여버린 손견, 공손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실 자사와 태수의 상하관계가 좀 애매한 게 사실로 심지어 자사가 태수보다 녹봉의 석고도 낮았다.
이걸 막으려고 자사에게 주의 광범위한 군사 행정 권한을 몰아주고 자사를 주목(州牧)으로 강화시켰지만 오히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주목(州牧)이 주(州)라는 거대한 단위의 전권을 틀어쥘 수 있게 되면서 지방관이 군벌처럼 되는 문제가 더 심해져버린 것이다. 애초에 이 제안을 한 유언 자체가 익주를 사유화 할 생각으로 진언한 것이었으니 이 제도가 적용된 다른 지역도 동시에 막장으로 치닫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상 각 주의 주목과 태수가 봉건제의 영주나 다름 없는 강력한 권한을 쥐게 된 것이다. 실제로 유언과 유표는 주목이 되고 나서 군벌이 되었고 유표는 아예 자기가 황제임을 선언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나라의 기본적인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 군(郡): 후한 행정구역의 기본단위. 각 군에 태수(太守)를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태수 밑에는 태수의 업무를 보조하는 승(丞)이 있었으며, 승 밑에는 승의 업무를 보조하는 장사(長史)가 있었다.
또한 군의 병무를 맡아보는 병조연, 군의 인사를 담당하는 치중연, 군의 세금을 담당하는 부조연, 군의 토목을 담당하는 공조연 등이 있다. - 국(國): 왕국(王國)의 줄임말로 태수가 아닌, 황자(皇子)가 봉해진 군. 황자를 왕(王)이라 하며 왕은 명예직이고 실질적으로 국을 다스리는 사람은 국상(國相)이다.
- 속국(屬國): 이민족(異民族)이 모여 있는 군. 태수가 아닌, 도위(都尉)가 임명되었고, 속국은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지 않았다.
- 현: 군의 아래에 있는 행정구역. 일만 호(戶) 이상의 현에는 현령(縣令)을, 일만 호 이하의 현에는 현장(縣長)을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현령 밑에는 현령을 보좌하는 현승이 있었다.
- 후국(侯國): 열후(列侯)가 봉해진 현이며, 현령 또는 현장의 역할을 하는 상(相)이 임명되었고, 상 이하의 관직은 그 후국에 봉해진 열후가 임명하였다.
7.1. 주(州)
- 주목(州牧): 13주의 장관인 자사를 '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한 때는 주(州)장관의 명칭을 목이라고 했으나 후한 때는 자사(刺史)로 바꾸었는데 황건적의 반란이 일어난 중평(重平) 5년 자사라는 명칭을 다시 목으로 환원하였다. 자사는 원래 군사권이 없었고 비상시에 한해 칙령(勅令)에 의해서 군을 움직일 수 있었으나 목은 처음부터 군사권을 쥐게되어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렇게 권력을 쥔 주목은 군벌로써 자리를 잡아 할거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후에 일어나는 삼국 시대를 일으키게 된다. 후한 영제 시절 유언(劉焉)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 주자사(州刺史): 2등관. 녹봉 2천 석. 각 주를 담당하는 감찰관이다. 진(秦)대에는 각 군마다 감어사가 부임했지만 한대에는 주자사가 여러 군을 동시에 담당했다. 감찰직이다 보니 원래는 군권이 없다. 하지만 삼국시대는 난세이다보니 군벌이 주자사를 자칭하면서 군사권을 가지는 경우가 흔했다. 또한 군벌들이 주자사를 제멋대로 임명하면서 같은 주에 동시에 여러 주목과 주자사가 존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주는 원소와 조정에서 임명한 자사, 공손찬이 임명한 자사 총 3명이 동시에 존재했다. 황제도 아닌 자가 어떻게 자사를 임명하느냐 하는 의문점이 생길 수 있는데 후한 말에는 천거가 횡행했고 관직의 경우도 유력한 군벌이 먼저 임명해 놓은 뒤 황제에게 표를 올리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황제도 아닌 자가 관직을 임명하는 것이 가능했다. 일례로 원술이 이런 식으로 손견에게 관직을 준 적이 있다. 칙령으로 각 주군(州郡)의 장(長)을 감찰하던 관직. 한나라 초에 설치되었으며, 후한 시대에 이르러 지방 행정의 변천에 따라 그 호칭이 여러 번 변했다. 위진(魏晉) 시대에 자사는 주목(州牧)과 동격이 되어 지방의 최고 행정관이 되었다. 유표는 왕예의 후임으로 형주자사로 부임했는데 부임시기에 마침 유언의 건의로 주자사에서 주목으로 직위가 바뀌었고 유표는 자기 마음대로 형주자사의 치소를 무릉에서 양양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 별가(別駕): 각 주(州) 자사(刺史)의 보좌관으로 정식 명칭은 별가종사사(別駕從事使)이다. 한때 장사(長史)로 명칭이 바뀌기도 하였다. 한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언제나 자사를 따라다니며 주내를 순찰했기 때문에 이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전풍이 별가종사였다.
- 치중(治中): 각 주자사의 보좌관으로 정식 명칭은 치중종사(治中從事)다. 관리의 임용을 담당한다. 사예교위의 경우 공조(功曹)라는 이름을 쓴다. 관도전투 당시 심배가 치중으로 후방을 담당했다.
- 부조(簿曹): 각 주 자사의 보좌관으로 정식 명칭은 부조종사(簿曹從事)다. 재물과 곡식을 관리한다.
- 병조(兵曹): 각 주 자사의 보좌관으로 정식 명칭은 병조종사(兵曹從事)다. 병사를 관리한다. 상설직이 아니다.
- 가좌(假佐): 각 주 자사의 비서 혹은 서기. 주부(主簿, 합하(閤下)의 사무를 총령, 문서 검토), 문정장(門亭長, 州正을 주관), 문공조서좌(門功曹書佐, 選用을 주관), 효경사(孝經師, (효)경 시험을 감독), 월령사(月令師, 시절의 제사 주관), 율령사(律令師, 법률 평정), 부조서좌(簿曹書佐, 장부 주관), 도관서좌(都官書佐), 매 군국마다 전군서좌(典郡書佐)가 1명씩 있어 각각 1郡의 문서 주관. 장익이 유비의 서좌 출신이였다.
7.2. 군국(郡國)
삼국시대에는 지방행정제도가 군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군에는 태수를 두고, 국에는 상을 두었다. 태수와 상은 실질적인 동급의 지방장관이라 할 수 있다. 태수의 녹봉은 2천 석. 태수의 아래에는 태수를 보좌하는 부태수에 해당하는 관직인 승과 장사가 있었다.- 태수(太守): 지방의 군(郡)을 다스리던 관직. 원래 군수(郡守)라 칭하던 것을 한나라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 그 후 역대 왕조가 이 직책을 두었으나 수나라 이후에는 군을 주(州)로 개칭했기 때문에 자사(刺史)로 명칭을 바꾸었다. 핵심 지방 행정관으로 관질은 이천 석. 후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세금을 가장 잘 뜯는 관직이라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직종이고 속된 말로 태수가 일등 신랑감이었다. 어찌나 부정부패가 횡행했는지 매관매직이 성행했을 때 태수는 위의 삼공보다도 공정가가 훨씬 비쌌고 태수를 매관매직으로 꿰찬 관리는 온갖 능력을 총동원해서 세금을 뜯을 수 있는 최대한 뜯어낸 후 다른 사람에게 태수 자리를 팔아먹는 짓이 반복되었다.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결국 장각의 주도하에 거록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만다.
- 상(相): 삼국시대에는 지방행정제도가 군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군에는 태수를 국에는 상을 두었다. 한漢 왕조는 군국제를 택하고 있어서 왕이나 제후가 봉토를 받기도 했는데 이를 국國이라고 하였다. 즉, 황족에게 영지를 내려 왕으로 봉하면 관리도 함께 보내 행정을 보게 했다. 이 관리를 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황족의 왕은 명목상의 존재이고 실제로는 중앙에서 파견된 집정관인 상이 모든 실권을 쥐고 행정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황족의 영지는 군과 동격이므로 상의 지위는 태수와 비슷했다. 공융이 북해상, 포신이 제북상이었으며 황건의 난에 공을 세운 조조도 제남상에 봉해졌고 유비 역시 평원상을 역임한 바 있다.
- 승(丞): 태수의 보좌관. 군이 변경에 있을 때에는 장사(長史)라 하였다. 여러 조(曹)의 연사(掾史/병조/치중/공조/부조)를 거느린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동서조를 제외한 조들이 있다고 한다. 동서조 대신 공조사(功曹史)가 있어 공로 있는 자를 선서(選署,뽑아서 임용함)하는 것을 주관했다. 오관연(五官掾)이 공조(功曹) 및 여러 조의 사무를 처리했다. 제갈량의 부친 제갈규가 태산군의 승을 지냈다.
- 북도위(北都尉): 각 군의 방비와 치안을 맡아보는 무관직. 녹봉 2천 석.
- 좌도위(左都尉): 군의 치소가 있는 현의 방어를 맡아보는 무관직. 녹봉 1천 석.
- 우도위(右都尉): 군의 치소가 있는 현의 치안을 맡아보는 무관직. 녹봉 1천 석.
- 독우(督郵): 한나라 때 태수(太守), 군수(郡守) 등의 보좌관으로 설치된 관직으로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어 소속 현을 보살피며 순찰하게 하였다. 각 현(縣)의 행정 감독을 주 임무로 하였다. 당나라 때 폐지되었다.
7.3. 현(縣)
- 현령/현장: 현의 장관. 현이란 군 다음 가는 행정구역으로서[46] 대체로 한 군에 열 개 정도의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만 호 이상의 큰 현의 장관은 현령(縣令), 그 이하의 현의 장관은 현장(縣長)이라고 하였다. 녹봉 천 석. 현장의 경우는 삼백 석.
- 승(丞): 현(縣)에 소속된 관리. 문서와 창고 및 감옥 일을 맡았다. 현령/현장 밑의 관직. 문서와 창고, 감옥을 관리하였다. 승 밑의 조는 군의 경우와 대개 같았으나 오관연(五官掾)을 정연(廷掾)이라 하여 사무를 맡았다.
- 위(尉): 현(縣)에 소속된 관리. 도적이 발생하면 이를 쫓아 체포하는 일을 담당한다. 대현에는 좌위와 우위가 있었다. 황건의 난 때 공을 세운 유비의 첫 직책으로 안휘현의 현위를 받았으나, 독우와의 마찰로 스스로 내팽겨친 자리. 현아래 향, 정의 장관을 맡는다.
8. 작위
자세한 내용은 이십등작 문서 참고하십시오.- 왕(王), 공(公), 후(侯): 공이 있는 신하를 제후로 봉할 때 공적이 큰 사람은 현(縣), 정(亭)에, 공적이 작은 사람은 향정(鄕亭)에 봉하여 그곳 지명을 덧붙여 부르게 했다. 오정현의 제후(諸侯)인 오정후(烏亭侯)로 손견이 받은 작위로 훗날 아들 손책, 손권도 물려받는다. 유선 역시 등애에게 항복한 후 안락현의 제후인 안락현공(安樂縣公)의 작위를 받는다. 관우도 관도대전 당시 조조에 의해 한수현 한수정[47]의 제후인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하여졌고 이는 후에 둘째 아들 관흥에게 물려지게 된다.[48]
9. 종친
- 부마(駙馬): 원래는 천자의 부마(副馬)를 다스리는 관직이었으나, 왕의 딸 공주의 남편이 계속 이 벼슬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임금의 사위"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정식 명칭은 부마 도위. 대표적 인물로는 조위의 하후무가 있다.
10. 막부
자세한 내용은 막부(중국) 문서 참고하십시오.11. 외부 링크
[1] 도정하지 않은 곡식이 보존 기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2] 나중에는 스스로 태사로 직위를 낮추기는 하지만. 유비가 사로잡힌 여포를 두고 동탁을 동 태사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3] 다만 제갈량의 실제 직책은 승상이기 때문에 그냥 이 기록의 경우엔 '재상의 다른 명칭'으로 부여했다는 의견이 많다.[4] 정확하게 손오는 삼공과 승상이 둘 다 있었다.[5] 공통적으로 공로가 많은 원로 대신들에게 수여한 것으로 직책에 따른 직무는 없었고 사실상 칭호에 가까웠고 그냥 품계가 아주 높았다. 다른 예로는 명나라 초기, 홍희제때 종5품에 불과했던 내각대학사(명·청시대의 재상급 직책, 약칭: 대학사)들의 품계를 올려주기 위한 방법으로 과거 왕조들에서 썼던 태자삼공(태자태사/태부/태보)/삼고(태자소사/소부/소보)를 도입했는데 각각 정1품, 종1품 관직으로 이후의 명, 청시대의 대학사들은 이 직책들을 겸했다.[6] 형식적인 위치만 삼공이지 실질적인 위상은 삼공보다 위다.[7] 지방의 군대를 감독하는 임시직 중의 하나인 독군어사 역시 그 명칭을 살펴보면 '군(軍)을 감독하는 어사' 로서 군사(軍事)에 대한 규찰과 감독을 행한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8]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관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암행어사라는 관직이었다.[9] 오늘날로 따지면 민정수석과 같은 벼슬이다.[10] 현재로 비유하면 국방부장관 및 차관과 역할이 똑같다.[11] 현대의 직책으로 비유하자면 건설교통부 장관의 자리이다.[12] 근현대에서 교통수단 발전으로 오토바이, 자동차, 열차, 비행기도 왕실에서도 사용하는 경우가 있어서 어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3] 유엽은 대홍려로 좌천된 이후로 근심을 하다가 병사한다.[14] 고평릉 사변이 벌어졌을 때, 사마의의 반대파이자 조상의 심복이었던 환범도 위의 대사농으로 재직중이었다.[15] 徵收, 법적 근거에 의해 국가가 납부기일에 납세의무자에게 조세를 부과하고 납세 의무자로부터 국가가 이를 수납하는 것.[16] 御衣, 임금이 입는 옷[17] 御物, 임금이 쓰는 물건[18] 대표적으로 곽광이 있다.[19] 촉한은 후한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건국 직후 유비가 마초와 장비를 각각 표기장군과 거기장군에 임명했으나, 대장군 직위는 훗날 제갈량이 죽고 장완이 임명되기 전까지 공석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불명이지만 이 자리에 임명되었어야 할 관우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사방장군 임명 당시에 볼 수 있듯 관우는 유일하게 유비의 신하 중 가절월을 제수받아 가절을 받은 저 둘보다 우위였기 때문에(가절월을 받은 신하는 가절을 받은 신하까지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 촉한 건국 후에도 당연히 저 둘보다 위 직위인 게 자연스럽기 때문.[20] 조운은 사후에 유선에 의해 대장군으로 계급이 추서되고 순평후에 봉해진다.[21] 독군어사 역시 그 명칭을 살펴보면 '군(軍)을 감독하는 어사'로서 군사(軍事)에 대한 규찰과 감독을 행한다. 다만 군사를 통솔하는 권한을 줄 때는 절을 주는, 지절에서 나오는 것으로 확인된다.[22] 가끔 차기장군으로 번역되는 사례가 있다.[23] 단 장합은 명목상의 명예직이다. 당시 위의 거기장군은 요동의 공손연이었으며 정서장군은 하후연 사후 공석이었다. 친족이 아니여서 실제 거기장군 직위를 줄 수는 없지만 공적이 있으니 이런 직위나마 주겠다는 의미.[24] 참고로 거기장군은 황실 외척이 자주 받는 직위다. 동승은 외척이 아니지만 딸 동귀비가 헌제의 후궁이었고, 장비의 두 딸은 장녀가 유선에게 먼저 시잡갔다가 요절한 후 둘째 딸도 유선에게 시집갔다. 오의도 과부였던 여동생이 유비의 정처가 되었다.[25] 장익과 요화도 거기장군을 맡았는데 장익은 좌거기장군, 요화는 우거기장군이었다.[26] 직속상관이 바로 위위였다.[27] 이는 위왕 조조 밑에서 같은 시기에 각각 전장군/좌장군에 오른 하후돈/우금, 한중왕 유비 밑에서 전장군/좌장군에 임명된 관우/마초의 위상과 전후 벼슬을 보면 알 수 있다. 하후돈의 경우 조조의 하북 평정 당시 건무장군->복무장군으로 벼슬이 올랐고, 우금은 같은 기간에 비장군->편장군으로 벼슬이 올라 그보다 낮은 직위였다. 게다가 하후돈은 위나라가 황제국이 된 직후 초대 대장군 직위에 오를 정도로 명백히 조위 세력의 2인자였다.(하후돈이 죽고 나서 조인이 거기장군에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촉한 진영의 경우 마초는 군벌 출신으로 유비 휘하에 들어왔기에 예우 차원에서 장비보다 높은 벼슬을 주긴 했으나, 관우보다도 높다고 보긴 어렵다. 그 근거는 사방장군 임명 당시 마초는 좌장군 겸 가절에, 관우는 전장군 겸 가절월에 임명되었기 때문. 가절은 전시 군령을 어긴 이를 죽일 권한을 갖고 있는데 가절월은 가절과 지절, 사지절의 권한을 포함하며 가절을 지닌 장수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명확히 가절보다 상위 권한이다. 즉 좌장군>전장군이라고 본다면 원래 우금보다 벼슬이 높았고 그 이후에도 더 높은 직위였던 하후돈이 갑자기 사방장군 임명할 때만 우금보다 벼슬이 낮아졌고, 더 낮은 직위인 관우가 더 높은 관직인 마초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모순이 생겨버린다. 이를 고려하면 최소한 저 두 경우는 확실히 전장군>좌장군이라고 봐야 모순 없이 설명이 된다.[28] 좌장군 의성정후 예주목이라는 직함이 그것이다.[29] 최종직위는 안원장군.[30] 즉, 정동장군이 존재한다면 진동장군은 뽑지 않았다는 것이다.[31] 효기장군 안평정후 조인[32] 위나라 한정[33] 조선의 경우에도 언론기관인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관료들 간에 다투며 파벌이 생겨난 것이 붕당의 시작이 됐다.[34] 오늘날의 군대 계급으로 따지면 대령 내지는 준장의 계급이다.[35] 편장군과 마찬가지로 최하 계급은 대령, 최대 계급은 준장으로 동일하다.[36] 조조의 부하인 이통이 받은 관직[37] 흑산적 두목 중 도승이 원소에게 투항해 임명된 관직[38] 오늘날의 군대 보직으로 보자면 부소대장 내지는 소대장의 직책과 똑같다.[39] 후한의 장수 주준도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거기장군 겸 하남윤으로 임명되었다. 오늘로 보면 현역 장성인 사단장, 군단장이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어 민정업무까지 도맡는 격이다.[40] 이 과정에서 사마씨에 저항한 최초의 항거가 중서령이었던 이풍의 주도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특기해 볼 만하다.[41] 이 서원팔교위 중 건석은 하진에 의해 살해되었고 전군교위 조조와 중군교위 원소는 자신의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 반면, 우교위였던 순우경은 한때 동급이었던 원소의 휘하로 들어가 그의 수하로 있던 도중 관도전투에 참전하여 오소를 습격당한 후에 포로로 붙잡힌 후 처형된다.[42] 태사자의 아들 태사향도 상서, 오군태수를 역임한 뒤 오의 월기교위를 지냈다.[43]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관 및 경찰청장 직위에 해당한다.[44] 위의 염유가 오환에 머물러 있을무렵, 오환족과 선비족의 힘을 빌어서 이 자리를 강탈한 적이 있다. 후에는 조조에게 귀순하여 오환족을 토벌하는 데에 협력한다.[45] 삼국지(三國志)·촉서(蜀緖)·선주전(先主傳)의 주석에 따르면 왕자복(王子服)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이 아니라 장군(將軍)이었다.[46] 춘추전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쭉 이어져 내려온, 중국사에서 상존했던 최장수 겸 개근 행정구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7] 관우 본문에 나오지만 한수정이 따로 있는것으로 추측된다.[48] 단 관흥이 이어받은 것은 잘 안알려졌고 보통 한수정후 하면 관우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