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1 16:58:24

조휴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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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의 대사마
조씨의 천리마(曺氏 千里馬)
조휴
曹休
시호<colbgcolor=#FFFFFF,#191919>장후(壯侯)
작위 동양정후(東陽亭侯) → 안양향후(安陽鄕侯) → 장평후(長平侯)
최종직위 대사마(大司馬), 영 양주목(領 揚州牧)
성씨(曹)
(休)
문열(文烈)
생몰 기간 ?년 ~ 228년
고향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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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3.1. 조휴가 만약 장수했다면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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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자 황족으로 는 문열(文烈)이다.[2] 예주 패국 초현 사람.

조조(曹操)의 족자(族子)[3]로 조부인 조정(曹鼎)은 조홍의 백부이다. 즉 조홍의 5촌 조카인 셈.[4] 방계 황족인 덕분에 직계 황족을 견제하던 조비의 총애를 받아 진군, 사마의, 조진과 함께 조예 대의 고명대신이 된 인물이다. 『정사 삼국지』의 본인 열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왕침의 『위서』에 의하면 조휴의 조부는 이름은 미상이나 오군태수를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조휴는 전란으로 인해 10대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떤 사람과 아버지 장례를 치렀다. 모친을 모시고 고향을 떠나 할아버지가 태수를 역임한 오군으로 이주했다.

조조가 거병하자 조휴는 이름을 바꾸고 형주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조조를 만났으며 조조는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의 천리마다."[5]라 말하고 조비와 함께 살게 하고 아들과 같이 대우했다.[6]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동작대에서 연회를 베풀고 활쏘기 대회를 할 때 맨 처음으로 과녁을 명중시키는 청년 장수로 처음 등장하는데 이 때 조조가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의 천리마다."라고 말한다.

2.2. 한중 공방전

조휴는 늘 정벌에 수행하여 호표기를 이끌었고 숙위(宿衛)했다고 한다. 주로 본거지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는 뜻이다.

218년, 조조와 유비한중을 두고 다툴 때 하변에 주둔한 오란을 공격하는 조홍의 군대에 기도위로 종군하여 조홍의 군무를 맡았다. 장비마초가 오란을 지원하여 조홍 군의 배후를 끊으려 하자 많은 이들이 이 의도를 의심했고 조휴가 말하길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聲勢)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그리곤 조휴는 오란을 급히 공격하여 격파하여 장비와 마초를 달아나게 했다.

조조가 한중에서 철수한 후 조휴는 오란을 격파시킨 공으로 중령군에 임명되었다.

2.3. 조비의 총애 (위나라 건국)

220년, 조조가 죽고 뒤를 이은 조비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이후에 영군장군에 임명되었고 동양정후에 봉해졌다. 하후돈이 죽자 진남장군, 가절, 도독제군사가 되었다. 임금의 행차를 내어 전송하여 조비가 수레에서 내려 조휴의 손을 잡고 헤어졌다.

손권이 장수를 보내 역양에 주둔케 했는데 조휴가 도착해 이를 격파했다. 또 따로 군사를 보내 강을 건너 무호에 있는 적의 둔영 수천 가(家)를 불태웠다. 이 공으로 정동장군·영양주자사로 승진하고 안양향후에 봉해졌다.

이 무렵 조휴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집[7]으로 가서 장사를 치르고 왔다. 조비는 조휴를 총애하여서 친히 그를 위로했다.[8]

2.4. 조비의 남정

222년 가을 9월, 정동대장군, 가황월에 임명되어 장료, 장패와 함께 동구로 나아가 오나라를 쳤다. 조인은 유수를 치고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은 남군을 공격했다. 이에 손권주환에게 조인을, 여범에게 전종, 서성 등을 지휘하게 하여 조휴, 장료, 장패를, 제갈근, 반장, 양찬에게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을 막게 했다.

겨울 11월, 큰 바람이 불어 여범 등의 병사 수천 명이 익사했고 조휴 등은 폭풍을 맞은 오나라 군대를 쳐서 격파했다. 남은 오나라 군대는 장강 남쪽으로 건너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은 하제의 군대에 의지했다. 하제의 군대는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무장하고 있었으며 조휴 등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조휴는 오나라 군대와 대치하며 장패에게 서릉을 습격하게 하여 수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나, 서성의 군대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했고 전종을 공격하게 한 윤로는 패사했다. 이 원정은 223년, 조인의 패배로 중단되었다.

226년 5월 16일, 조비가 위독하여 조진, 사마의와 함께 유조를 받아 조예를 보좌했다.

2.5. 석정 전투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자 장평후에 봉해졌고 오나라 장수 심덕을 격파하여 그 목을 베었으며 한종, 적단의 항복을 받았다. 이 공으로 식읍이 4백 호 늘었고 대사마로 승진했다.

228년, 조예는 두 길로 오나라를 쳐 사마의에게 한수, 조휴에게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이끌고 심양으로 진격하게 했다. 조휴는 주방의 거짓 투항을 믿고 윤허를 얻어 적진 깊숙이 환현까지 들어갔다가 참패하는 석정 전투가 일어난다. 이때 버린 군수 물자가 매우 많았으며 군사 1만 명이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혔고 가규가 군량과 병사를 주어 군세를 다시 떨칠 수 있었다.

<가규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략》에 따르면 조휴는 구원해준 가규에게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버리고 온 무기를 주워오게 했고 가규는 이에 반박했다.

조휴는 가규가 늦게 온 것을 꾸짖고 조정에 상주하여 가규를 모함했으며, 가규도 돌아온 뒤 상주했다. 조정에서는 비록 가규가 옳지만, 조휴가 종실로 중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아무에게도 잘못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조휴는 석정 전투의 패배에 대해 글을 올려 사죄했는데 조예는 조휴를 위로하고 예우와 포상을 더욱 늘렸다. 하지만 패배와 조예의 자비로움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분함에 결국 등에 등창이 생겨 죽었다. 이에 조예는 조휴의 시호를 장후라 하고 아들 조조(曹肇)가 뒤를 이었다.

3. 기타

2010년, 중국 뤄양시에서 조휴의 묘가 발굴되었다. 시신은 남녀 한 쌍이 있었고, 조휴 본인과 그의 부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현재 뤄양의 박물관에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조휴 무덤 방문기

3.1. 조휴가 만약 장수했다면

조비가 자신의 형제는 지독하게 견제하였지만[9], 황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방계 황족들은 총애했는데 그중 한명이 조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조위 황실 입장에서는 조휴의 허무한 사망이 무척이나 안타까운데, 조휴와 조진이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고 나자[10] 방계 황족들 위주로 채워넣던 최고 사령관 라인에 구멍이 생겼고[11], 그 빈 자리에 수차례 전공을 올렸던 사마의가 들어가게 된다. 이후 사마의는 군에 종사하면서 수차례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내며 체급을 키웠고, 끝내 조예의 탁고대신이 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같은 탁고대신이면서 방계 황족이기도 한 조상에게 밀려나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았으나 절치부심한 끝에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 일파를 숙청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어 조위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다.

다만 고평릉 사변까지 그가 살아있을 수 있었냐는 의문 부호가 뜨는데, 기록에 따르면 조휴는 10대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과 오군으로 내려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조조가 거병하자 형주를 거쳐 조조에게 합류했다고 하는데 거병 시기를 반동탁연합 직전으로 잡는다면 189년 12월이다. 이걸 기준으로 조휴의 생년을 역산해보면 조휴가 10대 초반에 조조에게 합류했다고 가정시 사마의와 동년배정도 되고[12] 10대 중후반에 합류했다고 가정하면 그보다 나이가 더 올라가는데[13] 고평릉 사변 당시 사마의의 나이가 69세였다. 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몇살정도 많을걸로 예측되는 조휴가 그때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당시 의료 수준을 고려했을시 어렵다고 봐야한다.

물론 이 가정은 고평릉 사변을 기준으로 했을시고 조예가 사망하는 239년을 기준으로 할시 조휴의 나이가 50후반에서 60초반쯤 되는건데 이건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조상과 함께 조예의 탁고를 받은 인물이고 그 조상이 여러번 실정을 일으켜 명분을 제공해 멀쩡한 탁고 대신이 본인만 남았다는 점인데, 이때 조휴가 조상이나 사마의 대신 조예의 탁고를 받았다면 사마의가 설 자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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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후이성 보저우시[2] 소설가 이문열과 한자가 똑같다.[3] 글자 자체로의 의미는 같은 종족의 아들이며, 유복친(有服親 - 이 사람이 죽으면 내가 상복을 입는 친족)이 아닌 조카뻘 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가장 먼 유복친인 8촌 형제를 족형제라고도 하기 때문에, '족자'란 말은 9촌 조카로 볼 수 있고, 유복친이 아닌 조카뻘 되는 사람 중 가장 가까운 촌수가 바로 9촌이기도 하다.[4] 1970년대 안후이 성에서 발굴된 조정 묘에서 조휴의 조부 이름이 조정이며 이 사람이 조홍의 백부이자 하간국 상을 지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후한서 등에는 조정이 조등의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어 기록이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5] 조씨 일족의 병권 장악을 중요시하던 조조에게 족자인 조휴는 좋은 카드로 보였던 것 같다.[6] 정확한 합류 시점은 불명. 꼭 조조 거병 직후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조가 천자를 봉대할 때 형주에 있던 인재들(순유, 두습, 조엄 등)이 유입된 것을 보면 조휴도 이 때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조휴의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조의 장남인 조앙이 176년 이전에 태어났고, 조비가 187년에 태어난 것을 보면, 조휴는 당시 조앙과 비슷한 나이대일수 있다.[7] 조씨의 본적인 초현이다.[8] 조휴가 모친상을 당했을때 조비는 자기중심적 총애를 하는데 조휴에게 상복을 빼앗고 억지로 고기를 먹였다고 한다. 이에 조휴는 더 상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9] 조창은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독살이 의심되고, 조식은 조비는 물론이요. 조예한테 까지도 견제를 받았다.[10] 조휴가 228년, 조진이 231년에 졸했다. 하후상은 조휴보다도 빠른 225년에 사망했다.[11] 당시 조위 정치의 특징인데, 십상시하태후를 몸소 겪었던 조조가 외척과 환관이라면 치를 떨었던지라 그 둘은 일찌감치 권력에서 배제한 탓이다. 조위는 이들을 대신하여 황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방계 황족들에게 군권을 쥐어주었고 조진과 조휴, 하후상까지 나름대로 역할을 하며 황실을 보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서진 역시 이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정책을 취했는데 세심하게 방계들을 관리하던 조위와는 달리 막강한 권한을 쥐어준 후 방치해 버렸고 끝내 조왕 사마륜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수도 낙양으로 진군. 헬게이트를 열고 만다.[12] 사마의는 179년생이다.[13] 호표기를 이끌고 조조의 정벌을 수행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0대 초반보다는 10대 중후반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 일단 최초로 호표기가 기록에 나오는건 204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