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안칠자(建安七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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阮瑀
? ~ 212년
1. 소개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리이자 문학가이며 자는 원유(元瑜)로 연주 진류군 위시현尉氏縣 사람. 건안칠자의 일원으로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의 아버지.2. 생애
젊어서 채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건안 연간(196년 ~ 220년)에 조홍이 그를 서기(書記)로 삼고자 했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이후 조조가 진림과 함께 완우를 사공군모좨주(司空軍謀祭酒)로 임명하여 기실(記室)을 맡게 했는데, 그때 군사나 국가의 공문과 격문은 대부분 진림과 완우가 작성했다.
후에 창조연속(倉曹掾屬)이 되었고, 212년에 사망했다.
건안칠자의 일원답게 은사시(隱士詩) 등 여러 시부를 남겼는데, 조비는 원성현의 현령으로 지내던 오질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와 기가 매우 아름다워 읽으면 즐거울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양나라의 유협은 문심조룡에서 말안장에 기대어 편지를 썼다고 언급하며,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 제2권의 83번째인 산장에 앉아 읊다라는 부분에서 나오는 시에서 "완우는 그 뜻이 어떠할까"라는 구절로 언급된다.
2.1. 일화
어환의《전략》은 완우의 글솜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조조가 일찍이 완우에게 명하여 한수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는데, 그때 마침 조조는 가까운 곳에 나가있었고, 완우는 이를 수종하고 있었기에 말 위에서 초고를 작성하여 조조에게 바쳤다. 조조가 붓을 잡고 문장을 교정하고자 했으나 끝내 더하거나 줄일 수 없었다.
장즐(張騭)의《문사전》은 완우가 조조에게 출사한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조가 완우의 명성을 듣고서 벽소했으나 응하지 않자, 연달아 사절을 보내 재촉하니, 완우는 산속으로 도망쳤다. 조조가 사람을 시켜 산에 불을 질러 완우를 사로잡고 불러들였다. 조조는 당시 장안을 정벌하고 빈객들을 불러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완우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자 화가 나 그를 기인(技人)들의 대열로 가게 했다. 완우는 음악에 밝고 거문고를 잘 다루어, 곧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곡조가 빠르고 음성이 절묘해 당시 앉아있던 사람들 중 으뜸이었고 조조도 크게 기뻐했다.
배송지는 이 기록을 《왕찬전》주석으로 인용하면서도 내심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조목조목 반박했다.[1][2]《태평어람》249권에 인용된 《전략》에서는 완우가 조조의 기실이 된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3]
조홍이 완우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서기로 삼으려 했으나 완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조홍이 매질했으나, 완우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조홍이 이 일을 조공(조조)에게 아뢰자, 조공은 완우가 꾀병을 부렸음을 알고 사람을 시켜 완우를 불렀다. 완우는 몹시 두려워하며 조공에게 나아갔다. 조공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경이 조홍을 위해 글쓰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를 위해 쓰도록 하라."고 하니 완우가 “예.” 하고 대답하였고, 마침내 기실이 되었다.
3. 창작물에서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7에서 한시대회에서 시를 평가하는 역할로 나온다.3.2. 소설 비열한 성자 조조
조조가 아들의 재능을 시험하는 자리에서 시를 쓰는 승부에서 조비가 걱정하느라 시를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완우는 조비의 시에 대해 옹호하다가 조조의 분노를 사서 감옥에 갇혔다. 그러다가 손권을 공격하기 전에 조조의 명으로 손권에게 보낼 격문을 지은 후에는 걱정으로 병을 앓다가 사망했다.3.3. 화봉요원
진군과 함께 조조가 주석을 단 손자병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온다. 조조가 왜 굳이 조조병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지 의문을 품다가 필체를 알아보고 조조병법이 조조 뿐만 아니라 모사들이 각 한 편마다 병법을 지었음을 깨닫는다.3.4. 삼국지: 한말패업
군사 39, 무용 27, 지모 53, 정무 50, 인사 61, 외교 64의 능력치로 165년생으로 나온다.[1] 전략과 문장지에 따르면 완우가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조홍에게 굽히지 않았으나 조조의 부름에 즉시 응했기에 산에 숨어 있다가 불을 지르니 나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또 전략에 실린 조조가 형주 정벌에 나설 때 완우를 시켜 유비에게 쓴 편지, 마초 정벌 때 한수에게 쓴 편지가 자기 시대에도 남아있는데, 조조가 장안에 들어간 것이 마초와 한수를 격파한 이후의 일이니 완우를 처음 얻었을 때 조조가 장안에 있었다는 말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했다.[2] 또한 완우는 212년에 죽었고 조조가 213년에 위공에 올랐는데, 완우가 부른 노래에 대위(大魏)라는 표현이 나와 망령되다고 했으며, 또한 타인이 어찌 어지럽힐 수 있는가?라는 가사에 대해서도 말이 안 되는 것이 분명해 완우가 한 말은 반드시 이렇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3] 앞서 배송지가 문사전을 반박할 때 근거로 든 기록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