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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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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布 | Lu 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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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작위 도정후(都亭侯) → 온후(溫侯)
→ 평도후(平陶侯)
최종직위 자칭 서주목(徐州牧) 겸 좌장군(左將軍)
성씨 (呂)
이름(布)
봉선(奉先)
생몰 기간 160년? ~ 199년 2월 7일[1]
고향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2]
가족 양아버지 동탁[3]
부인 엄씨
여씨

1. 개요2. 가족3. 정사 삼국지4. 삼국지연의
4.1. 무력4.2. 여포와 장비 중 어느 쪽이 더 강한가?
4.2.1. 여포가 장비보다 더 강하다는 주장4.2.2. 여포와 장비가 동급이라는 주장4.2.3. 결론
5. 평가
5.1. 무력5.2. 통솔5.3. 지력5.4. 정치5.5. 인격
5.5.1. 배신5.5.2. 색욕
5.6. 유비와의 관계
6. 여담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인중여포 마중적토 (人中呂布 馬中赤兎)
사람(장수) 중에서는 여포가 으뜸이고, 말 중에서는 적토마가 으뜸이다.
후한 말의 군벌.

2. 가족

  • 부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엄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삼국지집해》의 저자 하작은 위속이 여포의 내외 친척인 기록을 근거로 부인의 성씨를 위씨로 추정하기도 했다.
  • 딸: 여씨
  • 친척: 위속

여포의 친부모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여포가 동탁 밑으로 들어갔을 때 그를 아버지로 섬긴걸 보면 여포의 친아버지는 189년 이전에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지연의》에서 정원양아버지로 묘사하며, 여포의 두번째 부인과 으로 조씨[4], 초선이 나오지만 연의의 창작이다. 정원은 여포의 상관이었을 뿐이며 조씨, 초선은 연의의 가공 인물이다.

3. 정사 삼국지

3.1. 동탁 정권(낙양 ~ 장안에서)

동탁 정권에서 여포는 동탁의 호위무사 역할을 맡았다. 양아들이라지만 동탁은 여포를 자신을 지키는 호위무사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동탁은 누군가 자신을 비방하거나 암살하려고 했을 때 여포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였다. 만약 여포가 동탁을 죽이지 않았다면 반(反) 동탁 세력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3.1.1. 배신(1)

여포는 활쏘기와 기마에 능하고 완력이 남보다 뛰어나 비장(飛將)으로 불리며 사납고 용맹하여 병주[5]에서 복무했다. 병주자사 정원이 기도위가 되어 하내에 주둔하니 여포를 주부(主簿)로 삼아 크게 친근하게 대우했다.[6][7] 영제가 붕어하자 정원은 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가 하진과 함께 여러 황문들을 주살할 것을 도모하고 집금오에 임명되었다.

189년, 하진이 패망하고 동탁이 수도로 들어왔는데, 장차 난을 일으키기 위해 정원을 죽이고 그 군사들을 아우르려 했다. 동탁은 여포가 정원에게 신임 받는 것을 보고 여포를 꾀어 정원을 죽이게 했다.[8] 여포가 정원의 머리를 베어 동탁에게로 나아가니 동탁은 여포를 기도위로 삼고 매우 아끼고 신임하여 부자(父子) 사이가 되기로 맹세했으며 이후 여포는 점차 승진하여 중랑장에 이르고 도정후에 봉해졌다.

참고로 훗날 언급되는 여포의 딸의 혼사 건(198년)을 감안해볼 때에 이미 이때 아내와 딸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1.2. 배신(2)

이후 《후한서》 <동탁열전>에 따르면 낙양 사람 수백만을 장안으로 옮기는데 군대를 동원해서 몰아서 재촉하니 서로 짓밟히고 굶어죽고 시체가 길가에 가득했다. 동탁이 스스로 필규원 안에 주둔하고 궁궐이나 관청이나 민가를 모조리 태워서 2백 리 안에 남겨진 게 없었다. 다시 여포를 시켜서 황제들의 능과 공경 대신의 무덤도 파헤쳐서 진기한 보물을 거두었다.

<손견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처음 손견동탁을 토벌할 때, 양현의 양인에 도착하였다. 동탁 또한 보병기병 5천을 보내 맞게 하였는데, 동군태수 호진을 대독호로 삼고, 여포를 기독으로 삼고, 그 나머지 보병과 기병의 장교와 도독인 자가 아주 많았다. 호진이 성격이 급해 미리 선언했다.
지금 이번 출행에서는 응당 한명의 청수(손견)를 참수해야 군대를 정돈해 돌아간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듣고 그를 미워했다. 군대가 광성에 도착하니, 양인성과 수십 리 거리였다. 날이 저물자 군사와 말의 피로가 극심하여 응당 멈춰서 묵어야 했지만, 또한 본래 동탁에게 받은 명령서에는 광성에서 묵으며 말을 어루만져 먹이고, 밤에 진군하여 새벽을 틈타 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호진을 미워하고 꺼려서, 적들이 일을 망쳐주길 바랐지만, 여포 등이 선언했다.
양인성 성중의 적들이 이미 도주하였으니, 응당 추격하여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놓칠 것이다.
바로 밤에 진군하였지만, 성중의 수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어 엄습할 수 없었다. 이에 관리와 병사들은 주리고 목말라, 사람과 말이 극도로 피곤하였는데, 또 밤이 되니 진영에는 참호와 보루도 없었다. 갑옷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데, 여포가 또 깜짝 놀라 외쳤다.
성중의 적들이 나왔다.
군사들은 요란하게 달아나 모두 갑옷을 버리고 안장과 말을 잃었다. 10여리를 행군하여 적이 없음을 알자, 날이 밝아올 쯤 다시 되돌아와 병기를 수습하고 진격하여 성을 공격하려 했다. 성의 수비는 이미 견고하고 파놓은 참호도 깊으니, 호진 등은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후한서》 <동탁열전>에 따르면 동탁이 몸소 출전하여 손견과 제릉묘한에서 싸웠으나 동탁이 패주하고 민지에 다시 주둔한 뒤에 섬(陝) 지방에서 병사를 모았다. 손견이 낙양 선양성문에 진격하여서 다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가 또 격파되어 패주하였다. 손견이 곧 종묘를 깨끗이 하고서 여러 능묘를 정비한 뒤에 군사를 나누어서 함곡관을 나와서 신안, 민지간까지 가서 이(涞) 강을 경계로 동탁과 맞섰다.

동탁은 스스로 남들을 무례하게 대했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거동할 때 늘 여포로 하여금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그러나 동탁의 성정은 굳세면서도 편협해 화가 나면 후환을 생각지 않았다.

일찍이 여포가 사소하게 뜻을 거스르자 수극을 뽑아 여포에게 던진 일이 있었다. 여포는 용력하고 민첩하여 이를 피하고 동탁에게 사죄하여 동탁의 화 또한 풀렸으나, 이로 말미암아 은밀히 동탁을 원망하게 되었다. 동탁은 늘 여포에게 중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비와 사통하니 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하며 내심 불안해했다. 사실 단순 사통이 아닌 그렇고 그런 사통이었기 때문에 여포가 발각될까 두려워한 것이며 그 시비의 복부가 점점 커지니 여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불안해했다.

그 이전에 사도 왕윤은 여포가 동향 사람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튼튼하다하여 그를 두텁게 대우했다. 그 뒤 여포는 왕윤을 방문하여 동탁이 자신을 거의 죽일 뻔한 일을 말했다. 이때 왕윤은 복야 사손서와 함께 동탁 주살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여포에게 내응하도록 청했다.
여포: 부자(父子) 사이인데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왕윤: 그대의 성은 여(呂)이니 본래 혈연도 아닌데 거기다 지금 죽음을 걱정할 겨를도 없는데 무슨 부자지간이라 하시오?

마침내 여포가 이를 허락하고 손수 칼로 동탁을 찔렀다.

후한서》 <동탁열전>에 따르면 당시에 왕윤이 여포와 공모하고 복야 사손서를 포섭하여서 동탁을 처형하려 했다. 어떤 사람이 '여(呂)' 자를 베(布)에 쓰고서 등에 지고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포입니다."라고 노래하였다. 동탁에게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었지만 동탁은 깨닫지 못하였다. 192년 4월에 황제가 병에 걸렸다가 새로 치유되자 백관이 미영전에 모였다. 동탁이 조복을 입고서 수레를 타고 가는데 말이 놀라 뛰더니 진흙탕에 빠져서 다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동탁의 첩이 가지 말라고 했지만 동탁이 듣지 않고 곧 떠났다.

병사들이 늘어서서 길가를 가득 채웠다. 자신이 사는 보루를 지나서 궁궐에 다다르는데 좌우로 보병과 기병이 호위하여 사방을 방비하고 여포 등에게 명령하여서 앞뒤를 경호하게 하였다. 왕윤이 사손서에게 몰래 그 일을 알려주고 스스로 조서를 쓰게 한 뒤에 여포에게 주었다. 기도위 이숙과 여포가 한 마음으로 용사 십여 인에게 호위 병사의 옷을 입혀서 북액문 안에서 동탁을 기다리게 하였다.

동탁이 들어가려는데 말이 놀라며 가지 않으려 하니까 괴이하고 놀라워서 돌아가려 하였다. 여포가 계속 갈 것을 권하니 마침내 문에 들어섰다. 이숙이 으로 찔렀지만, 동탁이 속에 갑옷을 받쳐 입어서 극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팔만 다치고서 수레에서 떨어지면서 고개를 돌려 크게 소리쳤다.
동탁: 여포야! 어디 있느냐?!
여포: 조서를 받들어서 역적을 죽이러 왔다!
동탁: (크게 욕하며)이런 개자식(用狗)이?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여포가 기합을 넣어서 창으로 동탁을 찌르고서[9] 병사들을 다그쳐서 어서 베게 하였다. 주부 전의(田儀)와 동탁의 창고지기가 동탁의 시체 앞에서 애도하자 여포가 이들을 죽였다.

마침내 동탁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모두 세 사람을 죽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이후 <이각전>, <곽사전>에 따르면 동탁이 죽자 여포는 이숙을 시켜 섬(陝)으로 가게 하여 황제의 명령으로 우보를 주살하려 했다. 우보 등이 역격해 이숙과 싸워 이숙이 홍농으로 패주하자 여포가 이숙을 주살했다.

3.1.3. 왕윤과의 갈등

왕윤은 여포를 분위장군, 가절로 삼고 의례는 삼공에 비견되도록 하고(의동삼사, 儀同三司) 온후(溫侯)로 올려 봉하여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10]

《후한서》 <왕윤열전>에 따르면 애초에 왕윤이 동탁의 부곡(部曲) 사면을 의논하고, 여포 역시 수차례 그러도록 권한다. 그 뒤 의심하여 말한다.
이 패거리는 죄가 없고 그 주인을 따랐을 뿐이지만, 지금 흉악한 역적으로 일컫고 특별히 사면해준다면 스스로 의혹을 일으키게 하기에 족하니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니오.[11]
또한 여포도 동탁의 재물에 대한 처분을 두고 왕윤과 서로 의견충돌이 굉장히 심했는데[12] 정작 왕윤은 평소 여포를 가볍게 보고 검객으로 대우해서 이에 여포는 이전부터 그 공로에 기대어 스스로 자주 으스댔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왕윤에 대해 점차 불만이 쌓이고 거리감을 두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동탁 잔당에 대한 처리를 놓고 그렇게 왕윤과 여포와의 사이가 멀어지자 이틈을 노린 가후이각, 곽사 등 동탁의 잔당을 사주하여 난을 일으키자고 제안하자 이들은 마침내 서로 결탁한 뒤 돌아와 장안성을 공격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곽사는 성 북쪽에 있었다. 여포는 성문을 열고 군을 이끌고 곽사에게로 나아가 말했다.
군사들을 물리고 다만 우리끼리 몸소 싸워 승부를 가름하자.
곽사와 여포는 더불어 싸웠는데 여포가 로 곽사를 찌르자 뒤에 있던 곽사의 기병이 앞으로 와 곽사를 구했다. 이에 곽사와 여포는 각각 그만두었다.
여포: 공도 함께 가시지요.
왕윤: 국가를 평안케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니 만약 이를 이루지 못하면 몸을 바쳐 죽을 뿐이오.
동탁이 죽은 후 60일이 지나 왕윤 정권이 무너지고 마침내 이각 등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이각전, 곽사전 주석 한기에 따르면 여포는 군이 패하자 청쇄문 바깥에 말을 세워놓고 왕윤을 데려가려 했으나 그가 거절했다. 결국 여포는 기병 수백 기를 이끌고 무관을 나와 원술에게로 가려 했다.[13]

3.2. 방랑

이후 여포는 스스로 동탁을 죽여 원술의 원수를 갚았으므로 그의 덕을 보고자 하자 원술은 옛 일[14]이야 그러니해도 어쨌든 일단 죽은 손견을 대신할 칼잡이의 필요성과 동탁을 몰아내어 온후까지 되었으니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 여포가 원술이 자신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여겨 그의 영역에서 백성들 상대로 노략질을 해대는 바람에 내보냈다고도 한다.

이에 북쪽으로 원소에게로 가니, 원소는 여포와 함께 기주 상산국에서 장연을 공격했다. 장연은 여포와 마찬가지로 비장이란 별명으로 불렸기에 어떤 면에서는 비장끼리의 대결이었다. 장연에게는 정병 1만 남짓에 수천 기병이 존재했고, 여포에게는 적토마라 불리는 좋은 말이 있었다. 그가 친근하게 지내던 성렴, 위월 등과 함께 적의 예봉을 꺾고 적진에 돌진하여 마침내 장연군을 격파했다. 꽤나 싱겁게 여포가 장연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는데, 장연이 이끄는 흑산적 일파는 장연 개인의 용맹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비정규군인 반면 여포와 그를 따랐을 직속부대는 정규군 출신인만큼 병력의 질로 압도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만전》에 따르면 그 때 사람들이 말했다.
사람 중에 여포가 있고 말 중에 적토가 있다.[15]
그리고 군사들을 구해 더욱 늘리고 장졸들이 노략질을 일삼으니, 원소가 이를 근심하고 꺼렸다. 여포가 그 뜻을 알아채고 원소로부터 떠날 것을 청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는 자신이 원씨에게 공(功)이 있다하여 원소 휘하의 제장들을 업신여기며 오만하게 굴고 그들의 관직이 함부로 서치(署置)한 것이라 하여 족히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16] 여포가 낙양으로 돌아간다고 청하자 원소는 여포를 영 사례교위로 삼았는데, 겉으로는 응당 보내줄 것이라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여포를 죽이려 했다.[17]

원소는 그가 돌아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밤중에 장사를 보내 여포를 습격해 죽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다음 날, 여포가 출발하려 할 때 원소는 갑옷을 입은 병사 30인을 보내며 여포를 전송하는 것이라 말했다. 여포는 그들을 장막 옆에 멈추게 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장막 안에서 을 연주하게 했다. 원소의 군사들이 누워있자 여포는 머지않아 장막을 나와 떠났는데 원소의 군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중에 거사하여 여포의 이불을 베고는 여포를 죽인 것으로 여겼다. 다음 날, 원소가 알고 있는 사실을 캐어물어 여포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이에 성문을 닫았다. 여포는 마침내 군을 이끌고 떠났다.

그 일이 드러나자 여포는 하내로 달아나 장양과 합쳤다. 원소는 군사들에게 이를 추격하게 했는데 모두 여포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가 없었다.

여포가 원소를 버리고 장양을 좇으려 할 때 장막에게 들렀는데, 서로 헤어질 때 손을 잡고 맹세하니 원소가 이 일을 듣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 장막은 조조가 끝내 원소를 위해 자신을 해치리라 생각하고 내심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이전에 장막은 원소에게 축출당한 한복을 보호한 이력으로 원소와의 사이가 틀어진 상태였으며, 조조는 이 시절에 원소 연합의 일원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무시하지 못할 걱정이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장양과 그의 부곡(部曲), 제장들은 이각, 곽사의 현상 수배를 받자 함께 여포를 도모하려 했다. 여포가 이를 듣고 장양에게 말했다.
나는 경의 동향이니 경이 나를 죽이더라도 경에게는 미약할 것이오. 차라리 나를 산 채로 붙잡아 팔아넘기느니만 못하니, 그리 한다면 가히 이각, 곽사에게 지극한 관작과 총애를 얻을 것이오.
이에 장양은 겉으로는 이각, 곽사에 따르는 것처럼 했으나 실제로는 여포를 보호했다. 이각, 곽사는 이를 우려하여 다시 크게 봉하는 조서를 내리고 여포를 영천태수로 삼았다.

194년, 조조가 다시 도겸을 정벌하자 장막의 동생 장초, 조조의 장수 진궁, 종사중랑 허사, 왕해와 함께 조조에게 모반할 것을 공모했다. 진궁이 장막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연주는 군사들이 동쪽을 정벌하느라 비어있습니다. 여포는 장사로 싸움을 잘해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만약 잠시 그를 맞아들여 함께 연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장막이 이를 따랐다.

당초 조조는 진궁에게 군을 이끌고 동군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는데, 마침내 그 군사들로 동쪽으로 여포를 맞아 연주으로 삼았다. 군현이 모두 호응했고 다만 견성, 동아, 범현만이 조조 편에 남아 수비했다.

조조가 군을 이끌고 돌아와 복양에서 여포와 싸웠는데 조조 군이 불리하여 백 여 일을 서로 대치했다. 이 해는 날이 가물었고 황충이 일어 곡식이 부족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라 여포는 동쪽으로 가서 산양에 주둔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195년 여름, 여포의 장수 설란, 이봉연주 산양군 거야현에 주둔했다. 조조가 이를 공격하자 여포가 설란을 구원했는데, 설란은 패하고 여포는 달아났고 마침내 설란 등을 참수했다. 여포는 다시 산양군 동민현에서부터 진궁과 함께 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싸웠다. 이때 조조의 군사들이 적었는데 복병을 설치하고 기습부대를 풀어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니 여포는 밤중에 달아났다.

2년 사이에 조조는 여러 성들을 모두 되찾았고, 연주 산양군 거야현에서 여포를 격파하니 여포는 동쪽으로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장막은 여포를 뒤따르며 장초를 남겨 가속들을 거느리고 진류군 옹구현에 주둔하도록 했다. 조조가 이를 공격해 몇 달 동안 포위하여 함락하고 장초와 그 가속들을 참수했다. 장막은 원술에게 가서 구원을 청하려다 미처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무렵 <진군전>에 따르면 유비는 예주자사로 임명된 후, 진군을 불러서 별가로 삼았다. 이때 도겸이 병사하였으므로, 서주에서는 유비를 환영하였다. 유비는 가려고 했는데, 진군이 충고의 말을 했다.
원술은 아직도 세력이 강대하므로 지금 동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그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여포가 만일 장군의 뒤를 습격한다면, 장군은 설령 서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결국 간언을 무시하고 서주로 갔고, 원술과 충돌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는 유비를 만나보고 그를 매우 공경했다. 유비에게 말했다.
나는 경과 더불어 같은 변경 땅 사람이오. 나는 동탁을 주살하고자 한 것인데, 내가 동탁을 죽이고 동쪽으로 나오니 모두 나를 죽이려고 했소.
유비를 청해 장막 안의 부인의 상(床) 위에 오르게 하고는, 부인에게 절하도록 하고 술을 따르며 먹고 마시고 유비를 동생이라 불렀다. 유비는 여포의 말이 수시로 변함을 보고 겉으로는 태연한척 했으나 내심 언짢게 여겼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 사람 허탐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 그가 말했다.
장익덕(장비)이 하비상 조표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 천 명이 서쪽 백문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으로 향하면 단양군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금, 부곡(部曲), 제장들의 가족을 노획했다.

유비가 동쪽으로 가서 원술을 공격하자 여포는 하비를 습격해 차지하고, 유비가 되돌아가 여포에 귀의했다.

<선주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제장들이 여포에게 말했다.
유비는 여러 차례 언행을 이리저리 바꾸었으니 믿고 기르기 어렵습니다. 의당 조기에 도모해야 합니다.
여포가 들어주지 않고 이 일을 유비에게 말했다. 유비는 내심 불안하여 스스로 의탁할 것을 청하고, 사람을 시켜 여포를 설득해 소패에 주둔하기를 원했다. 이에 여포가 유비를 소패로 보냈다.

여포는 유비를 소패에 주둔하게 하고, 서주자사를 자칭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처음 서주에 들어왔을 때 원술에게 서신을 보냈다. 원술이 답서를 보내 말했다.
  • 지난 날, 동탁이 난을 일으켜 나의 문호(門戶)에까지 해를 입혔는데, 장군이 동탁을 주살하고 그 수급을 보내니 그 공이 첫째요.
  • 지난 날, 장수 김원휴(김상)가 연주에 이르렀을 때 조조에게 격파되어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소. 장군이 연주를 격파해 다시 내 면목을 세워주니 그 공이 두 번째요.
  • 유비가 거병해 나와 싸웠소. 내가 장군의 명령을 어김에 힘입어 유비를 격파했으니 그 공이 세 번째요.
장군은 내게 이 세 가지 큰 공을 세워주었으니 받들겠소. 장군은 여러 해 동안 싸우느라 군량이 부족하여 쌀 20만 곡을 보내니 맞이해 주시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응당 다시 끊이지 않게 보낼 것이오. 만약 병기와 싸움 도구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크건 작건 오직 명하기 바라오.
여포가 이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하비로 갔다.

<장굉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여포가 서주를 습격해서 서주이 되고 장굉손책과 같이 일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래서 여포는 장굉을 무재로 추천하며 편지를 써서 장굉을 보내도록 했다. 장굉은 여포를 싫어했고 또한 그에게 굴복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손책 역시 장굉을 중히 여기고 있었고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여포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장굉을 보내지 않았다.

원술이 장수 기령 등과 보병과 기병 3만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니 광릉에서 대패한 유비는 여포에게 항복하며 구원을 청했다. 여포의 제장들이 여포에게 말했다.
장군은 늘 유비를 죽이고자 했으니 이제 가히 원술의 손을 빌릴 만합니다.
여포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원술이 만약 유비를 격파하면 북쪽으로 태산같은 제장들과 연결될 것이니 나는 원술에게 포위당하게 되오. 구원하지 않을 수 없소.
곧 보병 1천, 기병 2백을 엄비해 급히 유비에게로 나아갔다. 기령 등은 여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을 거두고 감히 다시 공격하지 못했다. 여포는 패(沛) 남서쪽 1리 되는 곳에 둔치고 시종 군사를 보내 기령 등을 청하니 기령 등이 또한 여포를 청해 함께 먹고 마셨다. 여포가 기령 등에게 말했다.
현덕(유비)은 내 동생이오. 동생이 제군에게 곤란을 겪으니 이 때문에 구원하러 왔소이다. 내 성정이 어울려 싸우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나 다만 싸움을 화해시키는 것은 좋아하오.
여포는 문지기 관원에 명해 영문에 하나를 세우게 했다. 여포가 말했다.
제군은 내가 극의 가지창 부분을 쏘는 것을 보시오. 적중하면 제군은 응당 화해한 후 떠나고 적중하지 않으면 남아서 결투하시오.
여포가 활을 들어 극을 쏘았는데 극의 가지창 부분을 정확히 맞혔다. 제장들이 모두 놀라 말했다.
장군은 제왕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다음 날, 다시 연회를 베푼 뒤 각자 군을 물렸다.

3.3. 서주 점거 그리고...

여포가 비록 사납고 용맹했으나 꾀가 없고 의심하고 꺼림이 많아 그 무리들을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장들을 믿고 의지했는데, 제장들은 각각 뜻이 달라 스스로 의심하니 이 때문에 매번 싸울 때마다 패전이 많았다.

196년 6월, 밤중에 하내 출신인 여포의 장수 학맹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들을 이끌고 여포의 치소인 하비부로 쳐들어왔다. 청사의 합문 밖에 이르러 함께 함성을 지르며 합문을 공격했는데, 문이 견고해 들어가지 못했다. 여포는 반란을 일으킨 자가 누군지 몰랐기에 곧바로 부인을 이끌고 관을 쓰지 않은 맨머리에 옷을 갖춰 입지 못하고 측간으로 들어가 벽을 밀어내고 빠져나갔고, 도독 고순[18]의 군영으로 가 고순의 군영 문을 곧바로 밀어젖히고 들어갔다.
고순: 장군께서 말하지 않은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여포: 하내 놈들의 말소리였소.
고순: 이는 학맹이로군요.[19]
고순은 즉시 엄병(嚴兵)하여 하비부로 들어가 학맹의 군사들에게 일제히 궁노를 쏘았다. 학맹의 군사들은 어지러워져 패주했는데 날이 밝자 그들의 군영으로 되돌아갔다. 학맹의 장수 조성이 학맹에게 반기를 드니, 학맹은 조성을 찌르고 조성은 학맹의 한쪽 어깨를 찍었다. 고순이 학맹을 참수하고는 조성을 수레에 태워 여포에게로 보냈다. 여포가 묻자 조성이 대답했다.
학맹은 원술의 모책을 받들었습니다.
함께 모의한 자가 모두 누구인지 묻자 조성이 말했다.
진궁이 공모했습니다.
이때 진궁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얼굴이 붉어져 곁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였다. 여포는 진궁이 대장이므로 이를 불문에 부쳤다.
조성: 학맹이 늘 이에 관해 물었으나 저 조성은 여장군은 대장으로 비범하니 공격할 수 없다고 했으나 뜻밖에 학맹이 미쳐서 혹되어 그치지 못했습니다.
여포: 경이 건아(健兒)요![20]
조성을 잘 치료하고 보살폈고 상처가 다 낫자 학맹의 옛 군영을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하고 그 군사들을 거느리게 했다.

원술은 여포와 결탁해 원군으로 삼고자 하여, 이에 자신의 아들(원요)을 위해 여포의 딸(여씨)을 청하니 여포가 이를 허락했다. 원술은 사자 한윤을 보내 제호를 참칭한 일에 관해 여포에게 고하고 아울러 며느리를 맞이하고자 했다.

패국상 진규는 원술과 여포가 혼인으로 맺어지면 서주양주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는 것이니 장차 나라 전체의 어려움이 되리라 여겼다. 이에 여포에게로 가서 설득했다.
조조가 천자를 봉영해 국정을 보좌하니, 장군께서는 의당 그와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지금 원술과 혼인을 맺으면 천하에 불의의 이름을 덮어쓰게 되니 필시 누란지위가 있을 것입니다.
여포는 또한 원술이 당초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에 원망을 품고 있었으므로, 딸이 이미 길을 떠났으나 이를 뒤쫓아 되돌아오게 하여 혼인을 끊고, 한윤을 형구에 묶어 보내니 허도의 저자거리에 참수되어 목이 내걸리게 되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당초 천자(헌제)가 하동에 있을 때 손수 붓으로 판서를 써서 여포에게 와서 영접하도록 했다. 여포의 군에는 비축된 양식이 없어 능히 응하지 못하니 사자를 보내 글을 올렸다. 조정에서는 여포를 평동장군으로 삼고 평도후에 봉했는데, 사자가 산양의 경계에서 문서를 잃어버렸다. 또한 조조가 손수 서신을 보내 여포를 후하게 위로하고 몸을 일으켜 천자를 영접하여 응당 천하를 평정할 뜻을 품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조서를 내려 공손찬, 원술, 한섬, 양봉 등을 상을 걸고 체포했다.

진규는 아들인 진등을 조조에게 사자로 보내고자 했으나 여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사자가 당도해 여포를 좌장군에 임명하자, 여포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진등이 가는 것을 들어주고, 아울러 장(章)을 받들고 가서 은혜에 감사하게 했다.

진등이 조조를 접견하며 진술했다.조조가 말했다.
여포는 이리 새끼와 같은 야심을 가진 자로 실로 오래도록 기르기 어려우니, 경이 아니면 누가 능히 그 실체를 통찰할 수 있겠소.
이에 진규의 관질을 중(中) 2천석으로 올리고 진등을 광릉태수로 삼았다. 헤어질 때 조조는 진등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동쪽의 일은 경에게 부탁하오.
그리고 진등에게 명해 은밀히 부하의 무리를 모아 내응하도록 했다.

당초 여포는 진등이 서주목을 받아오기를 원했었는데, 진등이 돌아오자 분노하여 극을 뽑아 탁자를 찍으며 말했다.
경의 부친이 내게 조조과 협력하길 권하여 공로(원술)와의 혼사도 끊었소. 내가 구하던 것은 지금 하나라도 얻은 것이 없는데, 경의 부자는 나란히 지위가 오르고 권세가 중해졌으니 경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오!
진등이 태연하게 천천히 여포를 깨우치듯 말했다.
제가 조조를 만나 장군을 대우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아 고기를 배불리 먹여야 하니, 배부르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배가 고프면 부릴 수 있으나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릴 것이라 했습니다.
이에 여포가 노기를 풀었다.

여포가 크게 기뻐하며 다시 사자를 보내 천자에게 글을 올렸다.
신이 예전에 조조와 더불어 싸웠기에, 이제 조조가 폐하를 보위하고 보좌하니 스스로 뒤따르려 했으나 의심과 원한이 남아있을까 두려워 서주에 있으며 스스로 안녕하지 못합니다.
조조에게 답서를 보냈다.
내가 남에게 죄를 지었으나 손수 노고를 위로받고 후하게 칭찬과 장려를 받았소. 거듭 원술 등을 상을 내걸고 범인을 잡으라는 조서를 받았으니 나는 목숨을 다해 힘쓰겠소.
조조는 다시 봉거도위 왕칙을 사자로 보내 조서와 평동장군의 인수를 가지고 가서 여포를 임명하게 했다. 또한 조조가 손수 써서 여포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했다.
원술이 천자를 칭하니 장군이 이를 제지하고 원술의 장(章)이 통하지 못하게 했소. 조정에서는 장군을 믿고 있고 거듭 중임했으니 서로 충성을 밝히도록 합시다.
이에 여포가 진등을 보내 장(章)을 받들고 가서 은혜에 감사하게 하고, 아울러 좋은 인끈 하나를 보내 조조에게 답례했다.

원술이 분노하여 한섬, 양봉 등과 세력을 연결하고 대장 장훈을 보내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 지금 원술 군이 쳐들어온 것은 경 때문이오. 이 일을 어찌해야 되겠소?
진규: 한섬, 양봉과 원술은 졸지에 합해진 군사일 뿐입니다. 책략이 평소에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니 능히 서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제 아들인 진등이 이미 이를 헤아렸으니, 가히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여포가 진규의 계책을 채용해 사람을 보내 한섬, 양봉을 설득하길, 자신과 힘을 합해 원술 군을 공격하고 빼앗은 군자금은 모두 한섬, 양봉에게 준다고 했다.

《구주춘추》에 따르면 여포가 한섬, 양봉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원술이 반역하니 함께 토벌해야 하는데, 어찌 힘을 합해 도리어 이 여포를 공격하시오? 나는 동탁을 죽인 공이 있어 두 장군과 더불어 공신이오. 함께 원술을 공격해 공을 세울 만하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오.
한섬, 양봉이 이 서신을 받고 계획을 바꿔 여포를 따랐다. 여포가 진군하여 장훈 등의 둔영과 백보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이 동시에 공격해 열 명의 장수를 참수하고, 살상되고 물에 떨어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원환전>에 따르면 여포가 부릉(阜陵)에서 원술을 공격하자, 원환은 먼저 원술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여포에게 억류되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그 뒤 여포는 또 한섬, 양봉의 2군과 함께 양주 구강군 수춘현으로 향하니,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했다. 양주 구강군 종리현에 이르러 크게 노획하고 되돌아갔다. 회수를 건너 그 북쪽에 도달한 뒤 원술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귀하는 군이 강성한 것을 믿고 늘 호언하기를, 맹장, 무사들을 억제한다고 하셨소. 내가 회수 남쪽에서 한 때의 시간동안 거닐으나 귀하는 수춘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고 고개를 내미는 자 조차 없으니 맹장, 무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귀하는 큰소리 쳐서 천하를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천하인들을 모두 속일 수 있겠소?
여포 군이 모두 건넌 뒤에 원술이 친히 보병과 기병 5천을 일으켜 이를 이끌고 회수 가에 이르자, 여포의 기병들이 모두 회수 북쪽에서 크게 비웃은 뒤 되돌아갔다.

<선주전>에 따르면 양봉, 한섬은 서주, 양주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유비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유비는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고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되돌려 보냈다.

이때 동해 사람 소건이 낭야상이 되어, 서주 낭야국 거현를 치소로 삼고 성을 보전해 스스로 지키며, 여포와 서로 통하지 않았다. 여포가 소건에게 서신을 보냈다.
거는 하비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의당 서로 통해야 하오. 그리하지 않는 그대는 마치 스스로 황제 노릇하고 왕 노릇하는 것과 같소이다. 내 서신을 받거든 지혜로운 자들과 잘 의논해보도록 하시오.
소건이 서신을 받자 주부(主簿)를 보내 서신을 지니고 가게하고 좋은 말 다섯 필을 바쳤다. 그 뒤 장패가 소건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소건의 군수물자를 빼앗았다. 여포가 이 일을 듣고 친히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거현으로 향했다. 고순이 간언했다.
장군께서 몸소 동탁을 주살하여 위세를 떨쳤으니 자연 두려워서 복종할 것입니다. 가벼이 친히 출군해서는 안 됩니다. 혹 이기지 못한다면 명성을 손실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여포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장패는 여포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과연 성 위로 올라가 맞서니 여포는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군을 이끌고 하비로 되돌아왔다. 그 뒤 장패는 여포와 다시 화해했다.

<원환전>에 따르면 여포는 처음에는 유비와 친하게 지냈으나, 나중에 틈이 벌어졌다. 여포가 원환에게 유비를 꾸짖고 모욕하는 편지를 쓰게 하고자 했으나, 원환은 응하지 않았다. 여포가 두세 차례 그에게 강요했으나, 원환이 허락하지 않자 매우 화가 나서 무기로 위협하며 말했다.
이 일을 하면 살려주고,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원환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유비가 정말로 군자라면, 장군의 말에 치욕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유비가 교활한 소인이라면 장차 장군의 생각에 대해 보복할 것이니, 치욕은 이쪽에 있는 것이지, 그 쪽에 있는 것이 아니오. 하물며 나 원환이 다른 날 유장군(유비)을 섬겼던 것은 마치 오늘 장군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이치요. 만일 내가 하루 아침에 이곳을 떠나 장군을 욕하면 괜찮겠소?
여포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이후 <선주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198년 봄, 여포는 사람을 시켜 금을 지니고 사례 하내군으로 가서 말을 사오게 했는데, 유비의 군사들에게 약탈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여포는 중랑장 고순, 북지태수 장료 등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다.

198년, 여포가 다시 모반하여 원술 편에 서고, 고순을 보내 패(沛)에서 유비를 공격해 격파했다. 조조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선현행장》에 따르면 조조가 하비에 도착하자 진등광릉군의 군사들을 이끌고 군의 선두에 섰다. 이때 진등의 동생들이 하비성 안에 있었는데 여포는 진등의 세 동생을 볼모로 잡고 화친하기를 청했다. 진등은 뜻을 굳게 지키며 흔들리지 않으니, 진격하여 포위함이 날이 갈수록 급박해졌다. 여포의 자간(刺姦) 장홍(張弘)은 뒤에 처벌받을까 두려워하여 밤중에 진등의 세 동생을 이끌고 달아나 진등에게로 나아갔다.

조조가 친히 여포를 정벌해 그 성 아래에 도착하고 여포에게 서신을 보내 재앙과 복에 관해 진술했다. 여포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진궁 등이 스스로 죄가 깊었으므로 그 계책을 저지했다.[21][22]

《헌제춘추》에 따르면 조조군이 팽성에 이르자
진궁: 역격하여 편안히 쉰 군으로 지쳐있는 군을 들이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여포: 저들이 와서 공격할 때를 기다려 사수 속으로 몰아넣는 게 더 낫소.
조조군의 공격이 급박해지자 여포는 백문루 위에서 군사들에게 말했다.
여포: 경들은 서로 공격하지 마시오. 나는 응당 명공에게 자수할 것이오.
진궁: 역적 조조가 어찌 명공과 같습니까![23] 오늘 항복하는 것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는 것과 같으니 어찌 몸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허사, 왕해를 보내 원술에게 위급함을 고했다.
원술: 여포가 내게 딸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치상 패하게 되어 있소. 어찌 다시 와서 알리는 것이오?
허사와 왕해: 명상(明上)께서 지금 여포를 구원하지 않으면 실패를 자초하게 됩니다! 여포가 무너지면 명상 또한 무너질 것입니다.
이때 원술이 제호를 참칭했으니 이 때문에 그를 명상(明上)이라 부른 것이다. 이에 원술은 엄병(嚴兵)하여 여포를 성원했다. 여포는 자신이 딸을 보내지 않은 일로 원술이 구원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비단으로 딸의 몸을 얽어 말 위에 묶은 뒤 밤중에 친히 딸을 데리고 나가 원술에게 보내려 했는데, 조조의 군사들과 조우해 그들이 활을 쏘며 가로막아 통과할 수 없자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여포가 사람을 보내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고 스스로 천여 기를 이끌고 출전했다 패주하고 성으로 돌아가 보전하고 감히 출성하지 못하였고 원술 또한 능히 구원하지 못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는 진궁, 고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출격해 조조의 군량 수송로를 끊으려 했다. 여포의 처(엄씨)가 말했다.
진궁, 고순은 평소 서로 불화하니 장군께서 한번 나가시면 진궁, 고순은 필시 합심하여 함께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첩이 옛날 장안에 있을 때 이미 장군에게 버림받았으나 다행히 방서가 사사로이 첩의 몸을 숨겨주었으니, 지금 첩을 돌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포는 처의 말을 듣고 고민하며 결단하지 못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진궁이 여포에게 말했다.
조조가 멀리서 왔으니 사세상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 밖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안에서 성문을 닫고 수비하다가, 적군이 장군께로 향한다면 제가 그 배후를 치고, 성을 공격한다면 장군께서 밖에서 구원하면 됩니다. 열흘을 지나지 않아 적군의 군량이 다할 것이니 이를 들이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여포가 이를 옳게 여겼다.
여포의 처: 지난 날 조씨(조조)는 공대(진궁)를 어린아이처럼 귀하게 대했는데도 오히려 그를 버리고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지금 장군이 공대를 대우함이 조조보다 더 후하지 않은데, 성 전부를 그에게 맡긴 채 처자를 버리고 멀리 나가려 하십니다.
이에 여포가 그만두었다.

<순유전>에 따르면 조조의 군은 하비까지 이르렀는데 여포가 퇴각하여 굳게 지키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연이어 싸우다 보니 병사들은 피로해져 조조는 돌아가려 했다. 순유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데, 지금 세 번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니 그 예기(銳氣)가 쇠퇴하였습니다. 무릇 진궁에겐 지모가 있으나 더디니, 지금 여포의 기세가 다시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의 지략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면 여포군을 가히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기수와 사수를 끌어 성쪽으로 물을 대니, 성에서 물이 넘쳐나게 되었고 (조조가 참호를 파고 성을 포위한지) 이후 석 달이 지나자 위아래의 마음이 흐트러지니, 여포의 장수 후성, 송헌, 위속진궁을 포박하고 그 군사들을 이끌고 투항했다.

이 때 《구주춘추》에 따르면 당초 여포의 기병의 장수 후성은 객(客)을 시켜 말 15필을 방목하게 했는데, 객이 이 말들을 모두 몰고 떠나 패성으로 향하면서 유비에게 귀부하려고 했다. 후성은 스스로 기병을 이끌고 이를 뒤쫓아 말들을 모두 되찾아 돌아왔다. 제장들이 모여 하례하자 후성은 5~6곡의 술을 빚고 사냥해서 잡은 10여 두의 돼지를 내놓았는데 먹고 마시기 전에 먼저 돼지 반 마리와 다섯 두의 술을 가지고 여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장군의 은덕으로 잃어버렸던 말을 뒤쫓아 되찾았습니다. 제장들이 와서 하례해서 직접 술을 조금 빚고 사냥으로 잡은 돼지를 내놓았습니다. 감히 먹고 마시기 전에 먼저 작으나마 장군께 바칩니다.
여포가 대노해 말했다.
내가 술을 금했는데 경은 술을 빚어 제장들과 형제처럼 함께 먹고 마시니, 나를 죽이기로 공모라도 하는 것이오?
후성이 크게 두려워하며 떠났다. 빚은 술을 버리고 제장들을 되돌려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척을 지게 되었다.

결국 여포는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에 올랐으나 군사들이 둘러싸 위급해지자 끝내 내려와서 항복하니,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았고[24] 결국 이렇게 사로잡힌 여포는 흔히 알려진 대로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까지도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굴하게 간청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여포: 묶은 것이 너무 조이니 조금 느슨하게 해 주시오.
조조: 범을 묶는데 꽉 조이지 않을 수 없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 내가 제장들을 후대했으나 제장들은 위급해지자 모두 나를 배반했소.
조조: 경은 처를 저버리고 제장들의 부인을 사랑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 하시오?
여포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25]

《헌제춘추》에 따르면
여포: 명공은 어찌 이렇게 수척해 지셨습니까?
조조: 그대가 어찌 나를 알아보시오?
여포: 예전 낙양에 있을 때 온씨원에서 만났습니다.
조조: 그렇소. 내가 그 일을 잊었었소. 내가 수척해 진 것은 좀 더 빨리 그대를 사로잡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기 때문이오.
여포: 지금 나 여포로 하여금 힘을 다하게 한다면 공의 선봉이 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꽉 조이게 포박되어 있었으므로 유비에게) 현덕, 경은 빈객으로 앉아 있고 나는 사로잡힌 포로 신세가 되었구려. 느슨하게 묶어달라고 한 마디 해줄 수 없겠소?
조조: (웃으며) 어찌 내게 말하지 않고 밝은 사군(明使君, 유비)[26]에게 호소하시오? (여포를 살려주려는 뜻을 품고 포박을 느슨하게 해주라 명한다.)
왕필: (달려와 진언) 여포는 사나운 포로이고 그 무리들이 가까이 밖에 있으니 느슨하게 해주면 안 됩니다.
조조: 본래 느슨하게 해주려 했으나 주부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하겠소?

정사 삼국지 본전에 따르면 여포의 최후는 다음과 같았다.
여포: (청하며) 명공(明公)이 근심하던 것이 나 여포인데 이제 내가 이미 항복했으니 천하에 걱정할 게 없소이다. 명공이 보병을 이끌며 내게 기병을 이끌게 한다면 어찌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겠소이까?
조조: (의심하는 기색을 띤다.) 유 장군은 이에 어찌 생각하시오?
유비는 굳은 얼굴로 망설힘 없이,
유비: 명공은 여포가 섬기던 정건양동 태사의 일을 잊으셨습니까?[27][28][29]
라고 말하였고, 이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한서》 <여포열전>에 따르면 여포가 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30]이에 여포를 목매달아 죽였다.[31] 사후 여포는 진궁·고순 등과 함께 모두 효수되어 허도로 보내졌고, 그 뒤 매장되었다.

<장료전>에 따르면 조조가 하비에서 여포를 깨뜨리자 장료는 병사들을 정돈한 뒤 자신의 군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4. 삼국지연의

연의에서는 미남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정사에선 외모에 대한 서술이 없다. 또 연의에서는 여포가 방천화극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지만 방천극과 같은 형태의 무기는 송나라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하며, 살상용으로는 실용성이 떨어져 제사 의식용으로 주로 쓰였다. 그러니까 연의의 창작. 다만 극이라는 무기는 당시에 군대에서 자주 쓰던 무기여서 던지는 단극부터, 마상에서 사용하는 장극 등 종류도 다양했다. 여포가 극을 잘 썼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정사에서 여포가 을 세워서 을 쏘아 맞춘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착안하여 아예 여포가 극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모습으로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중국에서는 극은 기원전부터 몇백년동안 보병들의 주무기였다.

연의에선 3회부터 등장하며 정원이 여포의 양아버지로 나온다. 정사에서 여포가 양아버지로 섬긴건 동탁 뿐인데 여포의 의리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원도 양아버지로 설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숙도 여포와 고향 친구라는 설정이 붙었고 동탁의 적토마를 여포에게 주어 여포를 매수, 여포는 양아버지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 귀부한다.

5회에서는 화웅이 전사하자 호뢰관에서 출전해서 방열, 목순을 죽이고 무안국의 한 팔을 자른 뒤 공손찬을 밀어붙이며, 장비가 여포와 50합정도 겨루나 밀리지 않았다. 관우가 중간에 끼어들자 밀리기 시작했고 유비도 끼어들어 여포는 유비 삼형제와 3:1이 되자 못 버티고 도망친다. 이후 관우, 장비가 불세출의 무장으로 묘사되니 그들과 싸운 여포도 엄청 강하게 인식되었다. 본래 연의에서는 이 장면에서 유비의 무용이 뒤떨어진다는 묘사는 없으나 유비는 이후 무력을 강조하는 묘사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몇몇 판본에서는 유비가 망쳤다는 묘사도 나온다.[32]

장비가 여포를 욕한 유명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호뢰관에서 여포와 싸울 때 여포를 욕한 '삼성가노(三姓家奴)'. 성씨 셋 가진 종놈이라는 뜻이다.[33] 원래 여씨인데 양부로 정원과 동탁을 모셨기에 성이 여(呂), 정(丁), 동(董) 세 개라는 이유로 이렇게 욕한 것이다. 보통 이건 재혼을 여러 번한 모친에 대해 사용하는 욕이다.

그 후 8회에선 왕윤이 여포에게 금관(金冠)을 선물하고 여포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정사에서 여포는 금관을 썼다는 묘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 장면 때문인지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 여포가 더듬이가 달린 금관(金冠)을 쓰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34]

연의에서는 여포가 동탁을 배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왕윤의 미인계라고 설명하나, 초선의 존재를 포함하여 그것은 허구에 가깝다. 초선은 정사에서 여포와 눈이 맞은 시녀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 볼 수 있다. 연의에서 완전한 형태로 완성된 연환계는 여포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해준 장면. 당시에 이 에피소드의 서술 시 왕윤의 계략에 넘어간 것에서 여포를 띄워줄 의도는 없었겠지만, 초선을 되찾기 위해 동탁을 배신했다는 점이 사랑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정서에는 오히려 여포에게 낭만주의자라는 이미지를 더하게 되었다.[35] 그런데 여포는 연의에서도 이미 장가를 가서 딸까지 둔 유부남이라는 설정은 은근히 묻히거나 얼렁뚱땅 넘어가진다.

여포는 9회에서 동탁을 죽이지만 이각&곽사에게 쫓겨났고, 11회에서 서주를 공격하던 조조를 뒤치기하여 여포와 진궁은 연주를 차지하고 돌아온 조조군과 싸운다. 이 복양 전투에서 신캐 보정을 받은 허저가 여포와 20합을 싸워 밀리진 않았지만, 조조는 여포를 혼자서 꺾을 수 없다며 전위, 하후돈, 하후연, 이전, 악진을 보내면서 여포를 퇴각시킨다.

12회에서 조조에게 패배한 여포는 유비에게 의탁한다. 유비의 아랫사람인 관우손건 등이 "무엇이 아쉬워서 여포를 받아들이냐?"고 묻자 유비는 "나도 싫기는 하지만, 이러이러하여 어쩔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조표의 사위가 여포라는 설정이 붙었다.[36] 유비가 원술을 요격하러 나간 사이 평소 여포를 안 좋게보던 장비가 술에 취해 조표를 때리자 조표는 사위 여포에게 도망간다.(조표가 자기 사위 여포를 봐서라도 용서해달라고 비는데, 장비와 여포는 사이가 나쁘다는 걸 알면서 그랬다면 대놓고 장비를 협박하는 것이고, 몰랐다면 눈치없다는 것으로 작품에서 해석이 된다.) 14회에서 원술과 싸우던 와중에 여포가 서주를 점령하자 유비는 서주를 여포에게 맡기고 자신은 소패로 간다. 그 후 16회에 나오는 원문사극 장면은 실제 정사에서도 나오는 에피소드이되 거리가 얼마인지 안나오는 정사와는 달리 150보(약 180m)라는 거리[37]가 나와 여포의 궁술실력을 더욱 부각시켰고 신용을 잃었다는 원술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하늘의 뜻 운운하는 걸로 약간 각색이 되었다.

정사에서 여포의 본처는 성씨조차도 나오지 않았지만 연의에서는 엄씨라고 나온다. 연의에서는 기령이 '소불간친지계'라는 이름으로 원술의 아들과 여포의 딸을 혼인시키자는 계책을 내놓으며, 엄씨가 원술과 사돈이 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유비가 위험해질 것 같다고 여긴 진등의 아버지 진규가 병든 몸으로 직접 여포를 찾아가 반대한다.

나중에(18회 무렵) 서주성에서 장비가 말도둑질을 했을 때 여포와 장비가 리벤지 매치를 갖는데 여기서는 1대 1로 100합을 넘게 싸웠어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조조군+유비군에게 패퇴된 여포는 하비성에 고립된다. 진궁이 계책을 내지만 본처 엄씨와 첩 초선이 반대하여 무산된다.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원술이 딸부터 보내라고 하자 여포는 딸 여씨를 직접 업고 출전했다 패주한다.

19회에서 조조군이 하비성을 물에 잠기게 하자 여포는 심란해져서 매일 엄씨와 초선을 끼고 술만 마시다가,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자신이 심하게 초췌해진 것을 깨닫자 술을 끊고 금주령을 내린다. 그런데 이 때 후성이 말들을 도둑맞혔다가 되찾아온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축하하려고 술을 마시려고 했으나 여포의 금주령이 두려워서 여포에게 특별 허가를 신청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화난 여포가 사형을 명령했고 (판본에 따라) 후성이 바쳤던 술병이 깨지면서 술냄새가 돌자 더욱 분노했으나, 주변에서 간곡히 말린 덕에 곤장형으로 감형했다. 하지만 부하들 앞에서 곤장질을 당해 망신받은 것과 이제까지 여포에게 받아온 푸대접에 대한 원망이 폭발한 후성은 그날 저녁에 위문을 온 송헌&위속과 배신을 모의한다.

후성은 밤을 틈타 여포의 적토마를 훔쳐 투항했고, 조조는 이를 알자 여포를 잡을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다음 날 아침에 총공격을 명령한다.[38]여포도 이 사실을 보고받자 송헌과 위속 등 관리를 게을리한 장수들을 모조리 참하려 했으나, 조조군이 몰려왔기 때문에 뒤로 미루고 정신없이 방어에 전념한다. 하지만 워낙 격렬한 싸움이었던지라 피곤해서 잠깐 쉰다는 게 그대로 잠드는[39] 바람에 송헌과 위속에게 묶이고 만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부하를 시켜서 "여포를 잡았으니 들어와라"라며 알렸고, 조조군이 의심하며 들어오지 않자 여포의 방천화극을 던져서 여포를 생포했음을 알린다. 이에 조조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오면서 하비성은 난리가 났고, 조조군과 결탁하지 않은 진궁고순 등은 저항했지만 끝내 모조리 사로잡힌다.

여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고순과 조조와의 옛 우정을 깨끗이 정리한 진궁이 모두 당당히 죽음을 택한 뒤에 끌려왔는데, 여포가 앞서 둘과 달리 "이제라도 저를 받아주시면 한결 천하통일이 수월해지지 않겠습니까!"라며 목숨을 구걸하자 좌우 사람들이 여러가지 의미로 놀란다. 조조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고심하는 듯하다가 유비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유비는 "정원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단칼에 거부하고 조조도 여포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에 여포는 "이 귀 큰 놈아! 내가 원문에서 활을 쏴서 기령과 화해시켜준 일을 잊었느냐!"라며 정사와 달리 원문사극의 일화를 언급하며 유비를 비난하지만, 어차피 이는 여포가 자기 무력을 앞세워 성사시킨 억지 화해였기에 그때나 지금이나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 정사와 달리 참수형에 처해지고 목이 효수된다.[40] 반면 교대하듯 끌려온 장료의 경우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여포에게 죽는 것이 두렵냐, 추하지도 않냐며 일갈하고선 조조의 질문에도 기백있게 답하여 목이 달아날 뻔했으나, 관우유비가 말려 목숨을 건지면서 조조의 부하가 된다.

정사에서는 여포가 죽은 후 여포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연의에서는 엄씨, 초선, 여씨 등 여포의 가족들은 허도로 이송되었다고 나온다. 그럼에도 여포의 가족들은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4.1. 무력

일단 일본에서는 여포가 삼국지 독보적 최강의 무장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이고 한국에도 가장 주류적인 해석으로 퍼져 있다.[41] 중국에선 관우를 더 쳐준다는 말도 있으나 정작 중국이나 대만 측에서 나온 각종 매체, 예컨대 삼국군영전이나 드라마 삼국지[42] 등에서도 여포가 최강으로 나오는 거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드라마 같은거야 묘사를 받아들이기 나름이라지만 게임 같은 건 수치가 구체적인데 사실 중국에서 나온 게임 들에서도 괴물같은 관우 장비 등보다도 여포가 조금이나마 더 무력이 더 높게 나온다. 만약 진짜로 관우가 최강자라고 인식했으면 중화권 게임 등에서도 관우가 더 무력이 높았을 것이다.[43]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연의 내에서 여포와 장비는 50~100합 이상을 2번이나 호각으로 겨뤘는데, 판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관우와 장비의 첫 대면 때 둘이 합을 겨루는 장면에서 해당 싸움을 본 유비는 "저 사내(관우)가 장비를 어린아이처럼 다룬다"고 평했다.[44] 일단 확실한 것은 연의에서 직접 누가 최강이라고 서술된 부분은 없다.

관우와 여포의 전적은 삼영전여포 때 장비와 함께 2:1로 싸우다가 유비가 합류하면서 3:1로 싸운 것이 유일하고, 둘이 일기토를 벌인 적이 없기 때문에 직접적인 무력 비교는 어렵다. 반면 장비의 경우 삼영전여포 초반에 50합을 겨루었고, 제대로 싸우지는 못했지만 서주성에서 대치한 적도 있으며, 소패성 앞에서 무려 100합을 겨루는 등 사실상 라이벌 구도를 이룬다.[45] 따라서 여포와 장비의 무력을 비교하는 것이 무력 논쟁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4.2. 여포와 장비 중 어느 쪽이 더 강한가?

여포가 정말 장비보다 강한지 아닌지는 이전부터 쭉 논란거리였고 때문에 아래의 문단에서도 한쪽의 의견이 맞다 틀리다를 단정짓지 못하고 여포가 장비보다 강하다는 의견과 장비와 동급이라는 의견을 모두 적었으니 참조할 것.

4.2.1. 여포가 장비보다 더 강하다는 주장

위의 내용대로, 흔히 알려진 '여포 > 유비 + 관우 + 장비'라는 식으로 여포가 독보적인 최강자라는 인식은 분명히 연의의 묘사와 상충되는 잘못된 인식이 맞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참전한 시점에서 점점 힘겨워하다가 뒤를 이어 유비까지 참전하자 결국 셋을 어쩌지 못하고 도망치기 때문 그러나 그 점을 감안해도 여러 가지 정황상 여포가 관우나 장비보다 근소하게 위라고 볼 수 있다.
飛抖搜神威, 酣戰呂佈. 八路諸侯見張飛漸漸槍法散亂, 呂佈越添精神. 張飛性起, 大喊一聲. 雲長把馬一拍, 舞八十二斤青龍偃月刀,來夾攻呂佈, 三匹馬丁字兒廝殺. 又戰到三十合, 兩員將戰不倒呂佈.[46]
가정본 삼국지연의에서
飛抖擻精神, 酣戰呂佈. 連鬥五十余合, 不分勝負. 雲長見了, 把馬一拍, 舞八十二斤青龍偃月刀, 來夾攻呂佈. 三匹馬丁字兒廝殺. 戰到三十合, 戰不倒呂佈.[47]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일단 위의 50합을 주고받은 후에 관우가 합류한 건 모종강본인데 가정본의 묘사는 장비가 어느 정도 선전하긴 했으나 결국 창 다루는 법이 흐트러지고 반대로 여포는 사기가 올랐다고 묘사된다. 그리고 장비가 열세에 몰린 것을 보고 관우가 합류한 것이다. 물론 상당히 격전을 벌였음에도 여포는 장비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열세에 내모는 데에 그쳤으므로 흔히 생각하는 여포 > 장비+관우+유비의 이미지는 확실히 아니지만 어쨌거나 장비가 열세에 몰렸다는 건 어쨌든 장비보다는 여포가 더 강하다는 말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삼국지연의는 모종강본이므로 실제로 가정본을 보고 여포 최강설을 미는 사람은 얼마 없다.

따라서 다시 위에 언급된 모종강본 내용을 돌아보면, 장비와 여포가 50합을 팽팽하게 주고받는 과정에서 관우가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 참전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딱히 관우 참전 전이나 관우 참전 후나 여포가 밀렸다거나 하는 묘사가 없고, 관우와 장비가 30합을 협공해서 여포를 쓰러뜨리지 못했다고만 할 뿐이다. 여포가 수세나 열세에 몰렸다는 주장은 여포와 관우, 장비의 무력이 엇비슷하다는 정황에 근거한 추측일 뿐이다. 원문에서는 확실하게 명시된 바가 없다. 설령 여포가 열세에 몰렸다고 가정해도, 무려 만인지적이라고 불리는 장비와 관우를 상대로 그들의 합동공격을 막아내며 30합을 더 버텨낸 것이다. 장비 + 관우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내며 30합을 버틴 여포가 그들보다 위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점은 오호대장급 장수 2명을 동시에 상대한 건 여포가 유일하다. 물론 마초, 방덕 등도 여러 명의 장수들과 겨뤄본 기록이 있고 관우 역시 1:2 정도는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오호대장급 장수가 2명 이상 덤빈 경우는 없다. 기껏해야 관우나 장비가 허저[48] + 서황이나 장합 등 조금 못한 장수들을 동시에 상대한 것뿐이다. 애초에 다구리 맞으면서도 그걸 다 막아내고 별다른 상처 하나 없이 도망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인 것이다. 한 사람과 싸우기도 바쁜데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다 받아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포는 자신과 버금간다는 장비를 상대로 50합을 받아낸 상태에서 관우가 합류하자 30합을 받아냈고 후에 유비까지 합류하자 그것도 받아내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도망간 것이다. 조조의 여섯 장수와 싸울 때도 당해내지 못했다고는 하나 잠시 동안 동시에 상대했다는 묘사가 있다. 게다가 이들이 듣보잡도 아니고 허저 전위 하후연 등 조조군 내에서 쟁쟁한 맹장들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비록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더라도 여러 명을 동시에 상대해 상처 하나 없이 도주했다는 것은 그만큼 여포의 강함을 돋보여주는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서주에서 장비와 100합의 리벤지 매치를 가진 끝에 무승부를 내기도 했으나, 이는 둘이 쉽게 승부를 가를 만한 실력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둘의 실력이 완전히 일치하다고 볼 수는 없다. 또는 여포가 서주에서 주색에 빠져 몸이 점점 망가져서 실력이 떨어진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아예 근거 없는 추측만은 아닌 게, 뒷부분에서 여포가 주색에 빠져 얼굴이 상해진 것을 발견하고, 이 때문에 금주령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적 장치, 외면적 면모를 보면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는데 여포는 적이고 관우, 장비는 아군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포함 각종 문자, 영상 매체에서 아무래도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군보다 적군이 더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심리적으로 독자들은 관우, 장비는 주인공인 유비의 동생들이므로 배신의 염려도 없고 언제든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지만 여포는 유비의 적인 데다 배신을 밥 먹듯 하므로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렇다 보니 독자들로 하여금 무력 측면에서는 무적이라고 굳게 믿었던 관우, 장비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강적이 나오니 은연중에 "여포만 없으면 관장이 최고다.", "다른 장수들은 그래도 관장이 질 거란 생각이 안 드는데 여포는 다르다."는 긴장감이 조성되고 이게 곧 여포의 고평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실제 역사상 여포면 몰라도 소설상 여포를 독자들이 자연스레 고평가 하는 것이 오히려 작가의 의도일 수 있는 것이다.

4.2.2. 여포와 장비가 동급이라는 주장

삼영전여포 때에 여포가 유관장 삼형제를 동시에 상대해 냈으니 여포가 그들을 합친 것만큼 강하고, 연의에서 최강급으로 묘사되는 관우와 장비에 유비까지 합친 것만큼이나 강하니 당연히 압도적인 최강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건 세부적인 묘사를 무시한 것이다. 이미 장비와 싸울 때 무려 50합을 겨루며 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이 싸움을 용과 범이 싸우는 것 같다면서 흔히 치열한 승부를 묘사할 때 쓰는 비유를 쓰고 있다. 그리고 관우가 참전하자 여포는 30여 합을 더 싸우지만, 이때 여포는 당황하여 관우의 언월도와 장비의 장팔사모를 간신히 쳐냈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관우가 참전한 시점에서 밀리고 있었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유비가 참전해 비스듬히 공격해 들어가자 이제 더 견디지 못하고 유비를 공격하는 척해서 틈을 만들어 빠져나간 것이다. 그러니까 장비 한 명으로도 이미 여포와 맞먹었는데, 도저히 승부가 나지 않자 관우와 유비가 옆에서 거들어서 쫓아낸 승부였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이런 세부적인 묘사를 빼놓고 그냥 3:1로 싸웠다는 대략적인 상황만 놓고 보니까 여포를 최강으로 취급하는 의견이 나오는 것이다.

연의에서 여포가 관우와 장비보다 혹은 둘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다는 직접적인 묘사는 등장하지 않으며, 여포의 무력은 딱 장비와 맞먹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포가 서주에 막 왔을 때 유비가 양보하려는 서주목 자리를 덥석 받으려다가 관우와 장비가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보고 찔끔하여 끝끝내 사양했으며, [49] 나중에 조표의 도움으로 서주를 뺏으러 왔을 때는 장비가 술에 만취한 상태였음에도 장비의 힘을 경계하여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50] 이를 보면 여포 스스로도 결코 관우와 장비를 자신 보다 아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의 삼영전여포에서조차 장비가 먼저 여포와 50여 합 이상을 겨루었지만 승부가 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패에서는 장비가 홀로 여포와 100여 합 이상을 겨뤘으며, 마치 하늘과 땅이 요동치는 것 같다는 비유를 통해 굉장한 명승부임을 묘사하고 있다. 장비가 실수할 것을 두려워한 유비가 군사를 물려서 승부는 나지 않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장비가 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니 유비도 둘의 실력을 엇비슷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복양성에서 조조가 여섯 장수를 동시에 보내 여포와 싸우게 했다고 하여 여포가 여섯 장수와 맞먹는 무력을 지닌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다섯이 오기 전에 이미 허저 혼자서도 20합을 겨루며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으며, 다섯이 합류하여 6명의 장수들이 동시에 덤벼들자 당해내지 못해 겨우 도망쳤다고 묘사된다. 6명과 대등하게 싸운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여섯 명 역시 보통 장수는 아닌 걸 감안해야 하며 여섯 명을 상대로도 도망칠만한 무력을 지녔다는 근거로 볼 수는 있겠다.

거기에 위 내용도 어디까지나 '여포가 장비나 관우보다 더 강하다고 볼 수도 있다'라는 것이지, 여포가 더 강하다고 확정 지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여포 말고는 명장들 다수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상황에 처한 인물이 없기 때문에 같은 조건에서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해석하면, 여포는 방어하는 기술이 뛰어나 다수를 상대로 버티기를 특별히 잘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51]

무엇보다도 소패성에서 여포와 장비가 100합을 겨룬 것은 둘이 동등하다는 것 외에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물론 삼국지연의가 파워 밸런스를 철저하게 따지는 작품은 아니어서 전투력 우열에 모순도 많이 발생하긴 한다.[52]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00합이나 겨루는 승부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고 하나같이 명승부로 표현되며, [53] 용과 범이 싸우는 것 같다거나 하늘과 땅이 요동치는 것 같다는 거창한 묘사는 여포와 장비의 대결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작가가 둘을 동등하게 묘사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충분하다.

4.2.3. 결론

결론을 내리자면 '여포와 장비의 무력은 거의 엇비슷하나, 해석에 따라서는 여포가 장비나 관우보다 근소하게 더 강한 최강으로 볼 여지도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그러한 인식이 주류다'라는 것이 되겠다. 적어도 여포>유비+관우+장비 라는 해석처럼 여포가 독보적으로 강하고 동시대에 맞수가 없다고 단언 할 정도의 최강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 시리즈 역시 양쪽 해석을 맞춰서 여포는 대체적으로 무력이 절대적인 100이고,[54] 장비는 99~98, 관우는 99~97이다. 일단 수치상으로는 여포가 최강은 맞지만 관우와 장비하고 거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나온다.[55][56]

5. 평가

여포는 효호(虓虎, 포효하는 범)의 용맹을 지녔다. 그러나 특출한 지략은 없었고 경박하고 교활하게 반복(反覆, 언행을 이리저리 바꿈)하여 그의 안중에는 오직 이익 밖에 없었으니,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자가 이멸(夷滅, 멸망)되지 않은 적이 없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평가
원술은 탐욕스러웠고 여포 또한 반복무상(反覆無常,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일정하지 않거나 일정한 주장이 없음을 이르는 말) 하였도다.
후한서의 저자 범엽의 평가
洪水滔滔淹下邳 (홍수도도엄하비) 홍수가 도도히 하비성을 덮치니
當年呂布受擒時 (당년여포수금시) 그해 여포가 사로 잡힐 때다
空餘赤免馬千里 (공여적면마천리) 천리를 달리는 적토마 주인을 잃고
漫有方天戟一枝 (만유방천극일지) 방천화극 한 자루 버려졌네
縛虎望寬今太懦 (박호망관금태나) 묶인 범이 겁먹어 관용을 비니
養鷹休飽昔無疑 (양응휴포석무의) 매를 기를 때 굶기란 옛말 틀림없구나
戀妻不納陳宮諫 (연처불납진궁간) 아내를 사랑하다 진궁 간언 안 듣더니
枉罵無恩大耳兒 (왕매무은대이아) 부질없이 귀 큰 녀석 은혜 모른다 욕하네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여포의 최후를 노래한 시

삼국지의 군벌들은 사서들마다 평가가 갈리는등 복합적인 면이 있는데 여포만은 유독 정사, 야사 가리지 않고 모두 뛰어난 무력과 그에 걸맞지 못한 최악의 인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5.1. 무력

여포는 효호(虓虎, 포효하는 범)의 용맹을 지녔다.
진수
여포는 활쏘기와 기마에 능하고 여력(膂力-완력,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 비장(飛將)으로 불리었다.
여포전
여포는 장사(壯士)로 싸움을 잘해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善戰無前)
진궁, 장막전
여포는 연의상으로도 실제 역사상으로도 탁월한 무예 실력을 뽐낸 맹장이다. 심심하면 일 대 일 대결이 난무하는 연의와는 달리, 정사 삼국지에서 특정 장수를 평할 때는 일반적으로 군 지휘관으로서 종합적인 군사적 재능에 대해서 거론하지 일신의 무용을 세세하게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57] 그러나 여포는 예외적인 케이스인데 그의 무예 실력을 묘사한 기록을 보고 있으면 과연 사람 중에는 여포, 말 중에는 적토(人中呂布 馬中赤兎)[58]라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진궁은 장막과 반란을 일으킬때 여포를 일컬어 선전무전(善戰無前)[59]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여포는 젊었을 때부터 힘이 세고 민첩하며 궁마술이 뛰어나 한무제 때의 명장인 이광에 비유되며 당대 사람들로부터 비장(飛將)[60]이라 불렸다. 홧김이었다지만 역시 뛰어난 무인인 동탁이 날린 단극을 쳐낼 정도로 민첩했으며, 곽사와 일 대 일로 대결하여 부상을 입혀 물러나게 만들어 승리했다. 이 대결은 정사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진짜 일 대 일 대결인데, 연의에서의 찌질한 모습과는 달리 실제 역사상에서 곽사는 이각과 더불어 동탁 휘하에서 여포보다 지위가 높은 장수였으며[61][62], 수백의 병사만으로 수만의 군대를 유린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무서운 맹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한 전적이다.

관우정봉, 문앙처럼 직접 적진에 돌진해서 아예 전세를 뒤집을 정도로 일기당천의 포스를 보여준 기록도 있다. 원소의 객장 시절에 장연과의 싸움에 투입되었을때 여포는 휘하에 있는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정예 기병 수천이 포함된 장연군 1만의 군세에 수차례 돌격해 장연군을 격파했다. 후에 원소와 사이가 틀어져서 하내장양에게 의탁하러 갈 때 원소가 이를 괘씸히 여겨 추격병을 보냈는데 이 추격병들이 여포를 무서워해서 공격할 엄두를 못 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것을 보면 여포의 무력은 당대 이미 최강급으로 정평이 난 듯싶다.

특히 유비에게 쳐들어 온 원술의 장수 기령을 돌려보내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이미 술을 먹은 상황임에도 활을 쏘아서 세워놓은 극(戟)의 끝을 명중시킨 기록은 여포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표징하는 에피소드이다. 이는 소설인 연의뿐 아니라 정사에도 엄연히 기록되어 있으며, 여포는 이 일화 때문인지 천자문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천자문의 구절 중에서 "포사(布射)"가 바로 여포가 활을 잘 쐈다는 뜻이다.

조조에게 붙잡혀 끌려왔을 때 조조에게 "명공(조조)께서 보병을 이끌면, 제가 기병을 이끌고 힘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발언을 하여 일순간 조조조차 솔깃하게 한 점과 소수 기병으로 장연의 본대를 괴멸시킨 점에서 여포가 우수한 장수이자 기병이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당시 중원의 중국인들한테서 유목 민족의 기병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했고 실제 중원의 기병대에 비해 유목 민족의 기병대가 월등하게 강했다. 특히 여포는 흉노가 활동하던 변방 지역인 병주 출신이라 좀 더 우수한 기마술을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포의 무예는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분명하나 삼국지연의를 통해 상당 부분 과장된 것도 사실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그가 벌인 일기토는 곽사를 이긴 것이 유일하다.[63] 그리고 삼국지연의의 내용도 2차 창작 등을 통해 과장되어서 받아들여진 내용이 많다. 적어도 연의 안에 직접적으로 여포가 최강이라고, 혹은 관우나 장비보다 강하다고 서술된 장면은 없다.[64]
  • 호로관에서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를 한꺼번에 상대했다는 삼영전여포 일화는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다. 애초에 삼영전여포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장비 혼자와 싸울 때는 대등했으나 관우가 참전하자 밀리기 시작하고 유비까지 참전하니 막기에만 급급하다가 도망간 거다. 이 장면은 유관장 삼형제의 콤비네이션을 띄워주기 위해 들어간 장면이지 여포의 무력만을 띄워주는 장면이 아니다.
  • 또한 바로 직전에 방열, 목순, 무안국, 공손찬을 상대한 것도 허구다.
  • 조조의 장수들인 허저, 전위, 하후돈, 하후연, 이전, 악진 6명을 한꺼번에 상대했다는 것 역시 허구다. 사실 허저 혼자 대등하게 맞붙고 있는데 다른 5명이 합세하니 여포가 도망간 것이지 제대로 상대한 것도 아니다.
  • 여포가 정사에서 실제로 벌인 1 대 1 대결은 앞서 언급된 곽사와의 싸움이 유일하다.
  • 조조가 마초를 보고 감탄하여 "지난날의 여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허구다.

간혹 '인중여포 마중적토(人中呂布 馬中赤兎)'를 최강에 대한 칭호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보다는 적토마와 비견되는 여포의 모습에 대한 찬사거나 아니면 '비장'으로 불렸던 흑산적의 장연과 교전했을 당시 활약에 대한 감탄의 표현에 가깝다. 왜냐면 만인지적, 관장지용과 달리 '인중여포 마중적토'는 과거 유래나 후대에도 용례가 있는 것이 아닌 일시적인 표현이다. 정사에서도 딱 한 번만 등장하는데, 장연을 공격하기 직전 '여포에게 적토마라는 좋은 말이 있었다'는 문장에 주석으로 달린 것이다. 결국 정립된 표현이 아닐 뿐더러 당대 최강으로 해석하기엔 표현의 사용 시점이 너무 한정적이며 단발성이다.

정리하자면 여포의 무력은 당대에도 명성이 높아서, 힘이 세고 무기를 잘 다루며 특히 기마와 궁술에 아주 능했단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궁병이라는 존재가 전근대의 전쟁사 이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무시무시했던 존재인지 생각해본다면, 말을 타면서 활을 쏠 수 있는 능력에다 그러면서도 비장이라고까지 불린 여포의 전투력은 실용적으로 대단히 무시무시했던 수준이었을 것이다. 냉병기를 다루는 솜씨도 정사에서 몇 안되는 일기토에서, 그것도 합의를 거친 대결에서 승리를 거뒀으니 운이 개입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높은 실전성을 지닌 기술로 당대에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은, 종합적인 전투력이 대단히 높았던 인물이었다.
다만 연의에서의 무력은 심하게 과장된 느낌이 있고, 거기서 또 몇몇 2차 창작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 사이에서 좀 말도 안 될 정도로 부풀려졌다. 전쟁은 격투기가 아니라 순위를 매기긴 어렵지만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본다면 여포는 연의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다른 장수들을 모두 압도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5.2. 통솔

뛰어난 일신상의 무예처럼 전술가야전 지휘관으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나, 총사령관으로서의 측면은 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진 못하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적은 부대를 이끌고 기동할때는 높은 기량을 가진 장군이지만 거느리는 군사 숫자가 많아질수록 시야가 형편없어지는 총사령관이었다.

정사 기준으로 보았을 때 연주 공방전 초반에 당대 군재 최강자 조조를 상대로 야전과 수성전에서 연거푸 패퇴시키고 장막의 배신으로 근거지인 연주를 거의 다 잃다시피한 조조를 더 최악의 위기로 몰아붙였던 케이스처럼 전술적으로 엄청난 면모를 자주 보였고 탁월한 일신의 무용을 앞세워 전황을 반전시키는 등 당대의 이름난 맹장으로 칭송받을 만한 일화도 적지 않게 있다. 또 진궁장막에게 조조한테 반기를 들 것을 설득하며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싸움을 잘하는 여포를 앞세우면 능히 조조를 몰아내고 연주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것을 보면 실제로 무장으로서 당대의 평가도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조금 더 뒤인 적벽대전 직전 손권이 과거 조조의 맞수들을 열거하면서 손권, 원술, 원소, 유표 등과 더불어 여포를 조조의 맞수로 인정하고 있다. 이로 볼때, 여포는 적어도 아예 우격다짐으로 자기 무력만 믿고 돌격만 하는 얼간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야전에서의 지휘관이나 전술가로서의 역량 자체는 당대 최상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러한 빛나는 커리어와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국을 살피는 판단력이 부족해서 소부대를 이끌며 개인 전술 위주로 싸울 때는 탁월했지만, 대규모 부대를 이끌며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릴 용인력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형편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총사령관으로서는 낙제나 다름없었다. 큰 그림을 볼 판단력이 너무 떨어져서 즉흥적으로 강자에게 빌붙고 약자를 배신하였고, 몇 번 전투에서 이긴들 그게 전략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해서 전술적 역량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는데다가, 심지어 멘탈 상태에 따라 군재가 극과 극을 오가는 심각한 하자가 있기도 했는데, 잘하는 것 같다가도 뜬금없이 별 생각 없이 경솔하게 행동해 제 무덤을 파거나,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겁을 집어 먹고 일을 그르친 기록이 많아서 애초에 용맹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의아한 대목이 많다. 삼국시대 최강의 무장 중 한 명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한 연의의 설정에 의구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 동탁 휘하에서 반동탁 연합군과의 싸움에선 그냥 대놓고 X맨이었다. 호진의 부장으로 참전한 양인 전투에서 갑자기 손견이 기습해온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혼자 지레 겁을 먹고 오인 보고를 해 자기 진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패배를 자초했다. 본인 주장대로 일찌감치 배신할 생각이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만 여포 배신의 원인은 동탁의 시비와 사통한 게 들통날까봐 두려워서였고 이후의 행적을 보았을때 과연 배신하려고 고의 트롤링을 한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 동탁 사망 후 여포는 왕윤의 편이 되었는데 이각곽사 무리에게 일 대 일 대결을 걸었다. 이에 곽사가 나와서 여포와 단기접전을 떴고 그 결과 여포가 이겼다. 일 대 일 대결에서 패배한 곽사는 재빠르게 성 안으로 들어간 뒤 성문을 걸어잠궜다. 이후 여포는 이각곽사군과 공성전을 벌였는데 여포는 이각과 곽사에게 크게 패하여 정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도망쳤고 이 전투에서 여포의 편에서 싸운 서영이 전사했다. 이후 여포는 원소 방향으로 도망갔다,
  • 원소의 객장 시절 장연과의 싸움에서 본인 직속 소수의 기병대만으로 잘 싸워 큰 성과를 올렸다. 정사에 주석으로 붙은 조만전의 구절로 여포를 상징하는 표현인 "인중여포 마중적토"는 장연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여포의 무용을 칭송하기 위해 여포를 당대 최고의 명마라는 적토마에 비유한 것이다.
  • 조조가 도겸과 싸우러 나간 사이 장막, 진궁 등과 공모해 뒤치기로 조조의 근거지 연주의 대부분을 빼앗았다. 그리고 조조와의 복양 전투에서 야전과 수성전 모두 연거푸 승리를 거두며 조조를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비록 최종적으로 조조에게 패배해 연주를 상실했다고 하나 흣날 조조가 자신의 군사적 업적 중 원소, 여포와 겨뤄 싸워 이긴 일을 자랑으로 삼았을 만큼 여포의 전술적인 능력, 야전 능력은 확실했다.
  • 연주 공방전 당시 초반 조조를 두 번이나 패퇴시키는 등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도 승씨현에서 반기를 든 듣보잡 호족 이진에게 격파당해 초반 승기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 연주에서 조조와 싸울 때도 갑자기 복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겁 먹고 물러난 기록이 있다.
  • 유비가 원술과 싸우는 사이 서주를 뒤치기로 빼앗았다. 이것만큼은 명백한 배신이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 학맹의 반란 때 겁을 먹고 도망쳤다가 고순이 뒤늦게 해결했다.
  • 원술의 대군이 몰려왔을 때도 진규가 양봉과 한섬을 회유해 군영이 혼란스러워지자 격파한 적도 있다. 제대로 세력을 가진 군사 집단과 싸워 이긴 것은 원술 정도이며 이 때도 진규가 한섬과 양봉을 회유해 내분을 일으킨 덕이다. 더구나 원술의 파멸은 순착적으로 여포의 파멸로 이어졌으니 전략적 고려가 없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 고순이 말리는 것도 무시하고 태산 일대의 소규모 군벌 장패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패한 적도 있다. 앞에서 보인 군사적 성과를 보면 의외로 약할 때는 너무 약했는데 후술할 여러 문제점들이 원인이었다.
  • 조조가 서주로 공격해오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하비성에 갇혔을 때도 항복하려고 하다 진궁이 말리는 등 초인적인 무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겁을 먹고 상황을 그르치거나 전략적 고려 없이 행동한 적이 너무 많다.

한마디로 일시의 용맹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상황이나 승기를 잡고 몰아치는 상황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변수가 발생하거나 역공을 당하면 멘붕에 빠져 수습하지 못했다. 또한 무용에만 의존하고 용인력과 전략성이 떨어지다 보니 위치가 올라 지휘할 수 있는 군사 숫자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더 약해지는 면모를 보였다. 일신의 무예는 뛰어났을지는 몰라도 지휘관으로서는 거의 빵점. 결과적으로 보면 소수 기병대의 기병대장 내지는 소부대 돌격대장 정도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무력 단락에 언급된 것처럼 여포가 자신이 기병대를 이끌면 도움이 될 거라고 어필하자 조조가 솔깃했던 것이 그 조조가 보기에도 여포가 돌격대장이나 기병대장으로서는 쓸만하지 않을까 고민했다는 이야기.

5.3. 지력

여포는 무술 실력도 뛰어나고 전투에서의 지휘 능력도 제법 있었으나, 전략을 짜거나 계략을 세우는 등의 총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희한하게도 여포의 첫 관직은 문관이었음에도[65] 그런 티가 거의 안 나는 편이다.

연주에서 조조는 서주에서 연주까지 오는 동안 험지를 통해 전혀 견제하지 않은 것을 보고 여포를 금방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초전에서 패배했고 이는 여포의 전술 능력 및 여포군의 전력을 너무 얕본 생각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전략적인 차원에서 여포의 능력을 높이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조조가 하비로 여포를 치러 왔을 때에도, 진궁이 조조군이 이제 막 도착해 지쳤으니 여포가 본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고, 자신과 남은 무리가 성에서 호응하는 식으로 지친 조조군을 치자고 권유하나 여포는 아내의 말을 들어 따르지 않았고, 쉴 시간을 번 조조군과 싸웠다가 대패해 성안에 틀어박혀 농성을 하게 됐다. 여포가 이런 식으로 강대한 군세가 오는데도 제대로 막거나 견제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한두 개가 아니며, 이를 보면 여포에게는 최소한의 전략적, 작전적 식견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의에서는 이런 점이 한층 더 부각되어 전형적인 '힘은 쎄나 머리는 나쁜 놈' 으로 아예 이미지가 굳어진다. 그나마도 연의에서는 진궁의 의견을 들어 조조를 궁지에 몰았던 적도 있으나, 정사에서는 그런 기록조차도 없다.[66]

하지만 정원의 휘하에서 주부라는 문관직을 겸임했다는 점, 그리고 영웅기에서 기록한, 소건에게 보낸 편지 내용[67]양봉, 한섬 에게 편지를 보낸다던지[68],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 말한 내용[69]을 보면 춘추전국시대 고사의 내용도 인용할 줄 아는 등 의외로 완전 무식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껏해야 옛날 일을 몇 개 언급한 정도라서, 문관직인 것까지 더해서 고려해 본다면 최소 한문을 쓰고 읽을 줄 알며 완전 멍청이는 아닌 수준 정도는 된다는 것이지, 여포가 한문을 읽는 것을 넘어서는 학식을 갖추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으니 어느 정도는 공부를 하고 최소한의 책 정도는 보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한문을 읽고 쓸 정도를 넘어서는 학식을 갖추었다고 하기에는 저 예시들이 다 이상하거나 부족하다.

첫째로 문관직은 앞서 말했듯이 당시 문관 무관의 구분이 희미했고, 그것을 떠나 정원의 커리어는 변경의 맹장이고 그 정원이 발탁한 여포의 커리어나 당시의 배경 역시 아무리 봐도 그 맹장을 보좌할 무장 유망주를 뽑은 것이지 문치를 보좌하려고 뽑은 기색은 없다. 할당된 TO를 꼬아 가면서 기용하는 거나 직책과 업무가 다른 일은 현대에도 많이 발생하는 일이다. 커리어뿐만이 아니라 행적을 봐도 여포는 배운 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유비와 처음 만났을 때 부인을 불러 술을 따르게 한 행동은 당시의 문관다운 교양을 쌓은 인물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아마 여포는 유비에게 의탁하는 처지에서 첫만남이라 잘 보이겠다고 이런 행동을 한 거 같은데, 잘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유비가 눈살을 크게 찌푸릴 만한, 즉 문관다운 교양이 있다면 절대 안 할 행동을 한 것이다. 저 사례 뿐만 아니라 여포의 전반적인 행적들을 봐도 예절과 교양 학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없고 오히려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만 그득하다. 여포의 행적을 보면 제왕학, 정치학, 용인술 등을 배운 듯한 느낌이 전혀 없다. 막장으로 유명한 원술조차도 회귤육적 등의 언행을 보면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않아서 문제지 최소한 이런 이치에 대해 잘 알고는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포는 그런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둘째로 편지 내용은 일단 여포가 편지를 직접 썼다고 가정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여포는 사인으로서 편지를 보낸 것도 아니고 한 주를 다스리는 공인으로서 편지를 보냈는데, 당시 중국의 한 주라는 게 엄청 커서 사실상 나라 하나급이니 직접 썼을 리가 없다. 담당관 혹은 여러 담당관들이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을 통해서 쓰고 여포는 핵심 참모들과 함께 최종 검수를 한 정도였을 것이다. 직접 썼다면 여포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장가거나 서예가 정도여야 말이 되는데 그러한 언급은 정사 어디에도 없다.

마지막으로 조조에게 사로잡혔을 때 제환공과 관중 얘기를 했다고 해서 특별히 학문이나 지력이 뛰어나다곤 할 수 없다. 만약 여포가 대화 도중에 흐름에 따라서 물 흐르듯이 고사를 언급했다면 대화를 구성하는 재치나 지적인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제환공 이야기는 즉석에서 고안했다기보다는 사실 사로잡혀서 조조에게 끌려나오기 전까지 혹은 이미 농성하고 있을 때부터 머리 속에서 최대한 구상한 결과일 것이다. 또한 관중과 제환공 이야기, 즉 자국 역사의 큰 틀은 당대에도 누구나 다 아는 상식 수준이고, 학문보다는 차라리 설화나 이야기에 가깝다. 속담을 인용한다고 학식이 높다고는 할수 없는 것이다.

5.4. 정치

여포는 무엇보다 용인력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사람을 다루는 데는 영 빵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군주의 자리에 오르려면 무턱대고 쌈박질만 하는것 보다는 사람을 잘 다뤄야 하기에 군주로서의 그릇은 영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전투에서 패한 친구 이숙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처형한 것과 충성스럽고 훌륭한 장수인 고순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병사를 빼앗아 자신의 친척이기만 할 뿐 능력이라곤 조금도 검증되지 않은 위속에게 주는 등 함부로 대한 것. 하지만 그렇다고 위속을 확실히 신뢰한 것도 아니어서 싸움이 있자 다시 위속의 군사를 고순이 이끌게 하는 등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운 면모만 보였을 뿐이다. 조조하후돈과 같은 과도한 친인척 편애가 존재하지만, 조조가 하후돈을 비롯한 친족들을 편애한 것은 확실하게 병권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확고한 목적이 있던 군부 장악책이었다.게다가 조조의 친인척들은 실제로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하후돈은 연의에서 이미지와 달리 이렇다할 무공은 없지만 항목에서 나와있듯이 인품이 훌륭하고 통솔력이 뛰어나 후방지원 면에선 더할 나위없는 인재였으며, 연의에서 다소 너프된 조인이나 하후연은 손꼽히는 맹장들이었다. 원래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요직에 쓴 것이니 이를 친인척 편애라고 보기도 힘들다. 마찬가지로 의형제(혹은 형제처럼 친밀한)인 관우와 장비를 요직에 쓴 유비의 용인술도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조조는 그렇게 직책을 맡긴 부하들을 확실하게 신뢰했다. 반면에 여포는 너무 변덕스러웠고, 그렇다고 해서 유비처럼 뛰어난 장수를 기용해 충심을 얻고 능력을 이용하는 용인술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을 보였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순은 아무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고 뒷날 여포가 조조와 싸울 때도 끝까지 함께 했으며 결국 항복하지도 않고 죽었지만, 위속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송헌, 후성 과 함께 진궁을 잡아 조조에게 항복했던 것을 보면 여포의 사람 보는 눈이 정말 한심한 수준이었다.

외교 정책도 정말 한심한 수준이었는데, 대국적인 판단 능력 자체가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좌충우돌하며 기반이 달랐던 진궁을 비롯한 연대 세력들과 부하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고, 모반이 일어나며 부하들 사이에 내분이 생기기도 한다. 고순과 진궁이 패망 직전까지 둘이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은 여포에게 둘도없는 충신이었던 고순 입장에선 여포를 배신하려 한 진궁이 미덥지 못하게 보이는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론 여포가 군주로서의 자질 부족이 주요 요인이다.

그나마 장굉을 무재로 추천하여 자신의 수하로 삼으려고 한 노력은 있지만, 장굉 본인이 여포를 싫어했고 그 장굉의 상관인 손책이 거절해서 실패했다.

후한서 기록에 의하면 왕윤과 함께 동탁을 제거하고 장안을 장악했을 땐 동탁의 병사들을 사면하고 동탁의 재물을 신하, 장교들에게 하사해야 한다는 옳은 간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왕윤은 듣지 않았다.[70]

5.5. 인격

성격이 좀 많이 이상한데, 전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기가 잘해 준 것만 기억하는 자기 합리화적인 성격과 자기가 남한테 피해를 준 것은 전혀 기억하지 않는 굉장히 자기 중심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단순히 이기적이거나 욕심이 많은게 아니라 현대 정신의학에서 진단하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들며 거기다 부하들의 아내에게도 손댄 것을 본다면 부하들과의 관계에서도 좌충우돌한 것은 마찬가지. 정사에서의 장료는 여포가 항복할 당시에 다른 곳에 파견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굳이 섬기던 사람을 죽인 조조에게 가서 항복한 걸 보면 장료도 여포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71]

또한 전투 때 나약한 면모를 제법 보인 적이 있는 것을 보면 유리멘탈일 가능성도 높다. 전반적으로 영웅이라고 보기에는 지극히 소인배스러운 인격의 소유자이자, 현대기준으로 봐도 이기적이고 민폐를 끼치는 인물이다.

5.5.1. 배신

문자 그대로 배신아이콘#으로 비슷한 시기에 여포처럼 여러 세력에 의탁하던 유비는 자신이 속한 세력에 대해 뭔가 아니다 싶으면 조용히 떠났을 뿐이고 직접 손해를 입힌 적은 유장 외에는 없는 데 반해[72], 여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통수, 통수, 통수 뿐이었다.
  • 초기에 정원을 섬기다가 동탁의 후한 대우에 이끌려 정원을 죽인다. 배신과 뒤통수로 점철된 인생을 산 여포지만 동탁의 경우는 일단 본인이 이전까지는 그 역적놈이랑 붙어 먹었다는게 골때리지만 어쨌든 역적을 처단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고, 조조와 치고 받고 싸운거나 원소, 원술, 유비의 경우는 난세라서 그랬다고 둘러댈 수라도 있었으나 정원의 경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사에서는 연의와 달리 그가 여포의 양아버지가 아닌 그냥 상관으로만 나오니 패륜까지는 아니였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당시가 난세였다고는 해도, 자신을 천거해주고 잘 대해 준 상관을 별 불화가 없는데도 상큼하게 배신하여 죽이는 것도 역시 또라이 짓이긴 마찬가지.
  • 동탁과 사이가 틀어지자 황명에 의해 역적을 친다면서 동탁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이 부분은 실드의 여지가 꽤 있다. 물론 동탁과 사적인 의리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미 동탁이 여포에게 홧김에 창질을 하며 목숨을 위협했던 시점에서 애매해졌다. 연의에서는 동탁이 여포를 양아들로서 대단히 신뢰하고 우대했다고 그려지고 실제 역사상에서도 대체로는 잘 해줬지만 잠깐 욱했다고 자기한테 창을 던졌으니 여포 입장에선 불만이 있을 법도 했다. 여포 역시 반동탁 연합군과의 대결에서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오인 보고를 하는 등, 동탁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여포에 대한 동탁의 신뢰가 갈수록 떨어진 건 이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동탁의 최측근은 여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같은 양주 출신으로 오랫동안 동탁을 섬긴 이각곽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탁은 워낙 개막장을 쳐놓은 역적이자 후세에까지 길이 길이 남을 최악의 악당이기에 여포의 동탁 척살은 확고한 대의명분을 등에 업고 있었다. 하지만 여포가 동탁을 처단한 건 이런 대의명분에 감화돼 개과천선한 게 아니라 동탁의 시비와 사통한 게 들통날까봐 두려워서였기에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이유로 동탁을 죽인 것이다.
  • 애초에 원씨 일족이 몰살당할 때 여포가 동탁의 부하였음을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그를 좋아할 리 없는 원소, 원술 형제가 일단 그를 받아들였으나 정작 여포는 이후 그들을 대할 때 자신이 동탁을 죽여서 원씨의 원수를 갚아줬다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모자라 원술의 영토에서 약탈을 일삼기까지 하고 그의 부하들이 원소의 영토에서도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원소의 부하들을 업신여겼다.
  • 자신에게 잘해준 유비의 뒤통수를 쳐서 서주를 빼앗았다.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여포가 진정 비판받아야 할 대목인데도 불구하고 연의에서 여포가 자신의 양아버지인 정원과 후대한 동탁을 차례로 배신한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묻히는 경향이 있다. 실제 역사상에서 정원은 여포를 우대했다곤 하나 여포 입장에선 그냥 윗사람 정도였고, 동탁은 여포와 부자지간이라고는 해도 여포가 배신을 때린 시점에서 이미 여포에게 창을 날리는 등 부자관계가 결단났으며,[73] 무엇보다 동탁은 천하의 역적이며 악당이기에 여포가 그 나름대로의 대의명분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를 배신한 건 여포가 조조와의 연주공방전에서 패퇴하고 갈 곳이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베푼 호의를 저버린 케이스이기 때문에 실제론 더 패악성이 짙다고 볼 수도 있다. 장비의 삽질로 여포에게 서주를 뺏기는 연의와 다르게 실제로는 조표를 비롯한 구 도겸군 세력 일부(단양병)가 여포와 결탁해 유비가 없는 틈을 타 서주를 빼앗은 것이다. 이는 그 어떠한 명분도 없을뿐더러 가장 어려운 상황에 도움을 준 은인을 배신한 것이기 때문에 질이 매우 더럽다. 더도 덜도 아닌 그냥 뒤치기다. 유비는 하루아침에 기반을 잃고 원술과 여포 사이에 끼여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 진등, 미축과 같은 서주의 토호들은 일찍부터 유비를 지지해왔고 청주 북해의 공융도 유비를 인정하고 넘어갔다. 유비가 서주 구원으로 단박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지지를 굳건히 한 상황에서 조표 등 구 도겸 사병 일파야말로 서주 사람들의 의견과는 맞지 않는 세력이었으며 이 와중 장비와 조표의 싸움에 콩고물 떨어지는거 없나 주워먹으러 온 여포는 그런 서주 사람들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 든 것이다. 괜히 여포가 죽고 유비가 서주에 돌아오자마자 수만의 군세가 모인게 아니다.
  • 여포가 유비를 도와준 원문사극의 일화도,실상 여포가 유비를 배신하지만 않았으면 유비가 그 지경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니[74] 그렇게 고마운 것도 아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걸 은혜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거다.
  • 유비가 소패에 간신히 정착하고 나서 다시 힘을 얻는 듯 하자 여포는 이걸 꺼려서 또 유비를 공격한다. 결국 유비는 서주 대학살을 일으켰던 조조 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위 원문사극 및 소패에 정착한 유비를 여포가 꺼려 공격한 일화와 관련해 자치통감에 재미있는 구절이 존재한다. 출처는 권중달 역 자치통감 7권에서 발췌. 원술의 명령으로 유비를 치러 온 기령, 여포, 유비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여포의 말.
"현덕은 나 여포의 동생인데, 여러분들에 의해서 곤란하게 되었기에 와서 그를 구원하는 것이오. 나 여포의 성격은 부딪쳐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싸우는 것을 떼어놓기를 좋아할 뿐이오. "
위의 말을 한 후 원문사극의 일화로 기령은 물러나고 유비가 소패에 간신히 정착했는데
유비가 군사를 합하여 1만여 명을 얻었는데, 여포가 이를 싫어하여 스스로 군사를 내어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가 패배하여 도망쳐서 조조에게 갔다.
참고로 위 두 일화는 같은 페이지에 서술되어 있다. 여vs포

그렇게 여포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 눈앞의 이득에만 눈이 멀어 남들을 쉽게 배신하고 남의 뒤통수만 쳐댔으며 약속을 하면 어기는게 일상이니 인망이 땅에 떨어진 것도 당연하다.

백문루의 상황에서도 여포는 정신을 못차리고 유비에게 한 마디 해주라고 부탁하거나 조조에게 내가 조공을 위해 싸우면 천하가 평정된다는 식으로 자기가 두 사람에게 저지른 패악질을 까먹은 듯한 태도를 보인다. 유비가 정원과 동탁의 일을 기억하라고 조조에게 말한 것이 괜한 이유가 아니다.[75] 애초에 조조가 진심으로 여포를 살려 줄 생각이 있었으면 유비에게 묻지도 않고 곧바로 살려두었을 것이고 조조라고 여포에게 당한일을 잊었을리도 없는 만큼,조조도 어차피 죽이고 싶어했는데 여포에게 직접 피해를 입은 유비의 의견을 통해 여포를 죽여야 하는 명분을 사람들에게 공고히 인식시키려고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또한 이 무렵의 조조는 유비를 매우 후하게 챙겨주면서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던 시기였기 때문에 여포를 죽일지 살릴지 같은 중요한 일도 유비의 견해를 경청해주는 모양새를 갖춰 유비의 마음을 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76]

5.5.2. 색욕

초선이라는 캐릭터로 인해 로맨티시스트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실제 여포는 성적으로 대단히 방종했던 인물로 보인다. 애초에 초선은 반 허구의 인물이고, 그 이전에 실제 인물인 동탁의 시비와 통정하던 시기의 여포는 이미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일단 여포가 남의 여인들을 탐내다 척을 지게 된 사례가 꽤 많다. 초선의 모델이 된 동탁의 시녀와 통정했다[77]는 기록부터 시작해 자신이 군벌의 수장이 된 후에 부하의 아내들과 간통했다고 서술되는 기록도 있다.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조조에게 사로잡혀 자신을 살려두고 수하로 두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설득하는 시점에 조조가 언급하길 여포는 부하들의 아내를 사랑했으면서 어떻게 부하를 후대했다고 할 수 있냐고 했다. 강제로 겁탈했다는 표현은 없긴 한데, 간통 자체만으로도 당시 여포는 일개 장수의 신분도 아닌 한 세력의 지도자이기에 충분히 지탄받을 행동이다. 지도자가 조직의 불화를 어떻게든 줄이려고 사사로이 다른 부하의 아내와 간통을 벌인 부하에 대해 조직 내 불화를 초래했다고 책임을 물어도 모자랄 판에 지도자가 앞장서서 조직 내 불화를 일으키고 다닌 꼴. 게다가 부하들을 보호해야 할 위치에 있는 주군이 되려 부하 아내들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파렴치할 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증오를 받게되며 그들의 충성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78]

심지어 여포의 미화 근원이 되는 초선을 등장시킨 연의에서도 여포는 호색한이라고 못박은 바 있다. 왕윤의 연환계도 여포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시도가 가능했던 것. 또한 여포는 초선와의 스캔들 시점에서 이미 아내와 딸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조표의 딸을 아내로 취했기에 초선에 대하여 일편단심인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초선의 지위는 첩이었는데, 나중에 취한 조씨의 지위가 차처(둘째 정실)로 더 높았다는 점에서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79] 여기에 유비 앞에서 아내를 불러낸 것도 성적으로 방종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현대 시점에서 보면 당시 사람들이 지나치게 꽉 막힌 것도 있지만, 부하의 아내들을 탐했다는 기록에 이르면 당시는 물론 현대 시점에서도 용납이 어려운 합법드립 수준. 난세이다 보니 별의별 해괴한 일이 다 있었지만 적의 포로나,전쟁의 전리품,남편 없는 과부도 아닌 자기 부하의 아내들을 탐했다는 기록은 드물다. 당장은 좋았을지 몰라도 이런 무분별한 처신은 그의 형편없는 용인술과 더해져 부하들의 원망과 배신을 불러왔다. 여포를 직접 간통으로 디스한 조조도 유부녀를 좋아했고 그때문에 전위조앙이 죽는 결과를 초래했긴 하지만 이들은 죽은 적장의 과부이거나 첩 아니면 전리품 같은 개념이었지, 자기에게 충성하는 부하들의 아내를 건드려서 공연히 후환을 만들지 않았다. 김품석원균이 좋은 대접받기가 힘든 것도 똥별인 것도 있지만 권력으로 압박하여 부하의 아내들을 탐했다는 것임을 생각하면, 도무지 두둔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연의 집필 당시 항우의 인물상을 가져오다가, 초한지에서 우희 한 사람만을 사랑하다 저물어간 항우의 모습까지 덩달아 같이 가져오게 되면서 비슷하게 묘사된 걸로 보인다. 그외 항우와 여포는 성격적으로도 비슷하고, 같은 명마를 두르며 전투를 휘젓는 맹장으로 묘사된 바 있다. 허나 이같은 비교는 항우한테도 모욕인 게 항우도 비록 성격이 개차반이라 학살들을 저지른 바 있고 본인의 단점들이 발목을 잡아 비록 비참하게 패망하긴 했지만 야전사령관 내지 지휘관으로서의 전술 역량은 고금을 통틀어 유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고 유리멘탈이 의심되고 오인보고나 하며 동탁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한 여포 따위보다는 훨씬 뛰어났으며 호색한 기질에 방종맞은 성격이였던 여포와 달리 항우에게 여자라고는 평생 우미인 한 명 뿐이었고 그와 별개로 공손하고 자애로운 태도를 지닌 청렴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큼 분명 장점도 있는 사람이었고 그를 컨트롤할 숙부 항량이 일찍 죽어서 항우가 망하게 된 거다 라는 최소한의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여포는 쌈박질 하는 거 말고는 장점도 없고 그 쌈박질조차 항우의 하위호환에 불과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 호색한 부분을 묘사하는 창작물은 많지 않다. 여포를 의리 없는 인간말종으로 묘사하는 창작물에서도(가령 삼국(드라마)의 여포라든가) 여포의 불륜 행위를 묘사하지 않거나, 아예 여포를 초선 하나만 좋아하는 순정남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여포가 그렇다. 심지어는 진삼8에서 여포의 딸인 여령기가 주역 플레이어 캐릭터로 등장하자 초선과의 로맨스를 마치 알고도 속아준 것이고 초선의 뜻을 존중해 혼인조차 하지 않는 플라토닉하면서도 대인배스러운 관계로 윤색해버렸다. 창작자 입장에서는 이것마저 사실대로 기술하면 여포라는 캐릭터가 3류 악당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5.6. 유비와의 관계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보면 두 사람에게서 살펴 볼 수 있는 다소 이중적인 면모나 여러 특이점 때문에 의구심이 들게 되는데, 이유는 정사에도 적혀 있다시피 인의의 대명사인 유비가 여포의 죽음을 거들었고, 또한 인간 통찰의 대명사인 유비가 인간 관계에 처음으로 실책을 했던 사례이기 때문이었다.

정사를 기준으로 여포는 이미 정원, 동탁을 연달아 배반한 전력이 있어서 배신의 명수인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진군이 여포의 배신을 미리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능력이 있는지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던 유비를 제대로 등쳐먹는데 성공했다는 것. 이는 유비의 지배를 탐탁치 않아하던 조표와 허탐같은 서주 호족들이 거들어서 가능한 것이기는 했지만 이들이 굳이 여포를 선택한 것은 연주에서 조조를 버리고 독립하려던 진궁, 장막같은 연주 호족들이 여포를 바지사장으로 써먹으면 되겠다고 판단한 것과 같은 이유로 보인다.

'왜 유비가 배신으로 유명한 여포를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는 일단 이 시기에 여포와 유비에게는 '조조'라는 '공공의 적'이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유비는 사람들의 추대로 서주를 차지했지만 조조의 두 번에 걸친 대깽판으로 서주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유비로서는 비록 신의는 없지만 무장으로서 검증된 여포를 그냥 뿌리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음에도 조표를 비롯한 구 도겸파는 유비에게 적대적이었고 조조에 의해 초토화 되어 나가리가 된 서주의 상황으로는 조조의 재침을 겪으면 막기 어렵다고 판단해 여포를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라는 가설이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유비가 여포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전략적으로 이득이 될지도 알 수 없다. 여포가 비록 근거지가 없이 떠도는 장수로 전락했다고 해도 여전히 휘하에는 장료, 고순이라는 용맹하기로 이름높은 동료 무장들과 잔여 병력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여포가 역적 동탁을 죽이고 여기저기서 명성을 날린 '이름값'이라는게 또 만만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가 근거지를 내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결국 갈 곳이 없는 여포는 정말 필사적으로 유비를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싸운다 해도 근거지를 갖추고 있는 유비가 훨씬 유리하겠지만, 여포의 공격에 병력 손실이 누적이 된다면 유비의 앞날은 알 수 없으며 조조, 원술과 같은 강적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포를 적으로 돌리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며 여포가 만일 서주의 군현을 약간이나마 점령하여 기지를 만들고 원술 등의 후원을 받아 세력을 유지한다면 유비에게는 내장에 우환이 박히는 격이다.[80] 그럴 바에는 차라리 대인의 풍모로 여포를 받아들여 여포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었을 수 있는 것. 그 시기에 유비보다도 몇 배는 군사력이 강했던 원소조차도 여포와의 정면 대결은 피했으며 조조 또한 여포를 처리하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것을 보면 조조, 원소보다 훨씬 군사력이 약했던 유비가 여포와 싸우는게 오히려 무모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당시의 관례를 보는 시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후한말의 난세에는 이러한 류의 객장(客將)이 자주 등장했는데, 여포 이외에도 유표에게 의탁한 장수, 공손찬, 조조, 원소에게 의탁한 유비 본인, 장로유비에게 의탁했던 마초를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객장을 받아들이는 군웅 역시 객장들을 경계했고 이들간에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객장이 존재했다는 것은 전반적으로 의(義)로서 따져볼 때 자신에게 의탁하는 객장을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술의 경우에는 원씨 가주로서 여포가 동탁의 수하였을 때 원씨 일족을 죽였다는 구실이 있었고, 원소는 대놓고 거부하기는 어려워서 겉으로 받아들이고 암살자를 보내는 식으로 뒷치기했다.

즉, 여포가 의탁하러 왔을 당시에는 유비로서는 여포가 설사 의심스럽다고 해도 여포를 배척하지 못할 이유가 더 많았다. 나중에 배신했으니 '여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은 다소 결과론적인 생각인 것. 또한 제아무리 유비가 사람 보는 눈에 도가 텄다고 해도 여포랑은 제대로 본 적도 없고 아는 거라곤 오직 소문으로 들었던 행보뿐인데 여포란 놈이 어떤 놈인지 어떻게 정확하게 알겠는가? 좀 생활해 봐야 사람 보는 눈이 통할텐데 그러기도 전에 받아들이냐 마냐의 갈림길에 놓였던 측면도 있는 것이다. 여포 때문에 근거지를 잃고 죽을 뻔하고 진군도 유비의 밑을 떠나버렸으니 명백한 실수가 맞긴 하지만, 뒤집어서 보면 여포를 받아들여 빚을 지워둔 덕에 여포가 유비를 죽이지 않고 객장으로 거둬들여 소패에 두었으니 빚을 지워두길 잘 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아무튼 자기의 목이 더 위험해서 만만한 유비를 방패막이로 세울 셈이긴 했지만 어쨌던 원술이 대군으로 침공했을 때 유비와 기령의 싸움을 막아주는 등 아주 드물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여포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번번히 뒤통수를 치면서 사방에서 어그로를 끌어모았다.

6. 여담

  • 삼국지연의에서 여포가 당대 최강의 무장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한 덕분에 한국에서 여포라는 호칭은 최강의 무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현대에는 싸움은 잘 하지만 머리가 딸리는 사람을 종종 여포에 비유하곤 하는데,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구본택의 별명 중 하나가 여포다. 다만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지 외에도 다른 역사 및 군담소설들도 제법 인지도가 있기 때문에 항우를 무력본좌로 쳐준다.
  • 사회생활이나 대외 활동에는 어려움을 겪는 루저이나 인터넷이나 집 안에서만 잘난척, 센척하는 사람을 방구석 여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집 안에서는 여포지만 집 밖에서는 유선이라고 첨언하기도 한다.[81] 그런데 여포가 무력은 뛰어나지만 보신주의+겁쟁이 성향이 다분한 걸 보면 어떤 면에서는 고증된 호칭이다. 긍정적인 의미로는 특정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사람들을 (해당 분야)여포 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리그 오브 레전드의 정글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챔피언을 '정글 여포'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 우스갯소리로, 여포가 죽은 이후 중국의 양궁이 몰락했다는 농담도 있다. 리우 올림픽에서 중국의 양궁 선수들이 한국 양궁 선수에게 패배한 뒤 "옛날에 우리 중국의 선조들은 방천화극을 휘두르면서 활 잘쏘던 여포같은 영웅들도 많았는데 그의 후예들은 다 어디 갔느냐?" 라면서 중국의 패배를 한탄하는 댓글이 나온 적도 있다.
  • 여포의 진짜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고, 여포의 비중이 높은 창작물에서도 그의 친부에 대한 설정이나 묘사는 보기 힘들다.그나마 언급이라도 되는 드라마 삼국 같은 곳에선 아예 여포 손에 죽은 것으로 나오는 등 취급이 영 박하다.그나마 아예 기록이 없어서 창작의 자유가 높기는 하지만.
  • 여포가 쓰고 다니는 깃털 둘 달린 모자를 자금관(紫金冠)이라고 한다. 진삼국무쌍이나 토탈 워: 삼국 등에서도 쓰고 나온 아이덴티티. 현대 들어서 만들어진 창작은 아니고, 본래 고대부터 존재하던 모자였다. 그렇다고 실제로 여포가 쓰고 다녔는지는 불분명한데, 당대의 기록이나 묘사로 남은 것이 없기 때문. 다만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지을 당시에는 이미 여포의 아이덴티티로 확립되어 있었던 듯 하다. 참고로 동아시아 문화에서 자금관을 쓰고 나오는 메이저급 캐릭터가 하나 또 있으니 바로 손오공. 서유기 본편에 용왕에게서 자금관을 상납받은 내용이 직접 등장하고, 제천대성 미후왕 시절 삽화들은 자금관을 쓴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후 긴고아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다보니 일반인에게 있어 자금관을 쓴 캐릭터는 여포로 여겨진다. 이 자금관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또 있는데 이른바 '호로관 메뚜기'.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여포가 쓴 자금관은 깃털이 유독 과장되어서 마치 곤충, 특히 메뚜기더듬이를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서양권에서는 그리스 신화아레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절대적인 힘을 가졌으나 아군과 적군 가릴 것도 없이 싸움을 즐기는 이기적인 행적도 비슷하기 때문. 초선처럼 아프로디테라는 눈이 맞은 여자가 있다는 점도 동일. 노린 건지 몰라도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8의 전투 테마와 13의 여포 개인 테마곡 을 행성(관현악)중 하나인 'Mars, The Bringer Of War'를 편곡하였다..
  • 소노다 삼국지의 영향으로 여포가 이민족이라고 주장하는 창작물 속의 설정이 한국 삼국지 팬덤에서 마치 정설인 것처럼 퍼져있었지만 당연히 소노다 삼국지 내에서만 통용되는 설정일 뿐이다. 이 설정을 진짜라고 믿은 사람들이 가끔 언급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살이 붙어서 근거로 여포가 이민족이 많이 살았던 병주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기도 한다. 김운회는 여포가 이민족인 흉노족 출신이고, 이민족이라서 멸시와 폄하를 받았다는 것으로 주장했지만 논파당하고 사라졌다. 김운회의 사이비적인 주장 때문에 여포 이민족설은 유독 한국에서만 횡행했는데, 정작 중국에서는 삼국지 관련 역사 기록 어디서도 여포를 이민족이라고 하지 않았다. 여포와 관련이 깊은 정사 삼국지의 진수와 후한서의 범엽은 출신이 혈통이 불확실한 인물들은 모호하게 언급하거나 아예 모른다고 했지만 출신이 확실한 인물은 확실하게 적어놓았다.[82] 여포는 병주 오원군 구원현(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출신인데 여기가 후한에서 북방국경선이였고, 흉노와 선비족 영토와 인접한 접경지대이기는 하지만 거기 출신이라고 흉노나 선비족이라는 주장은 억지부리기에 불과하다. 결정적으로 여포 스스로가 자기를 이민족이라고 하지도 않았음에도 김운회는 여포를 이민족이라고 우겼다. 물론 이민족에게 친화적인 행동을 많이 취했던 변경 출신으로서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공산 정도는 있겠지만, 이것도 가능성일 뿐 실제로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로 치면 함경도 출신 사람들은 여진족과의 교류가 잦았다는 정도이다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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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력 기준. 음력으로는 198년 12월. 유비보다는 연상이나 조조보다는 연하이다. 사망당시 40세 남짓.[2] 오늘날 내몽골자치구 바오터우시 서쪽 부근. 병주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나 위치상 상당히 벽지다. 흉노가 활동하던 영역에 있다.[3] 정원을 양아버지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연의에서의 설정이고 정사 기준으로는 상관이다.[4] 조표의 딸.[5]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6]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병사를 통솔하는 부곡사마였다고 한다. 주부와 부곡사마 두 직위를 겸임했을 가능성이 있다.[7] 정사에서는 정원이 여포의 상관으로 나온 반면, 삼국연의에서는 정원이 여포의 양아버지로 각색되었다.[8]삼국지연의》에서는 황제를 위시해 정권을 농락하려 하자 정원이 군사를 일으켰고 서로 맞붙었는데, 여포가 혼자 일당백의 활약을 하자 동탁이 수십 리나 도망친 뒤 여포와 동향인 이숙을 보내 자신의 명마인 적토마를 보내주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적토마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없다.[9] 연의에서는 동탁의 목을 찔렀다고 언급된다.[10]정사 삼국지》, 《후한서》, 《자치통감》 모두 분위장군(奮威將軍)이라고 하지만 유독 《송서》 백관지에서만은 여포가 분무장군(奮武將軍)이었다고 쓰고 있다. 아무래도 비슷한 최하의 장군직급인 잡호장군인 데다가 위(威)와 무(武) 비슷하게 생긴 글자라 송서에서 오류가 난듯하다. 어쨌거나 분위장군의 뜻은 위력을 떨치는 장군이라는 거창한 칭호지만, 실상은 명예직으로 즉 의례를 비롯한 격식은 삼공이라는 조정의 최고 위치로 대우하며 체면을 세워 주고, 실질적인 권한은 제어하려고 한 것.[11] 이는 여포가 스스로 동탁을 죽인 후 양주인을 두려워하고 꺼리었고 양주인들도 모두 여포에 원한을 품었다고 할 수 있다.[12] 여포는 공경, 대신, 장교에게 나누어 주자고 왕윤에게 제안했다.[13] 이때 아내와 딸은 놓고 가야 했으나, 지인이 후일 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14] 당연하겠지만 그도 그럴 것이 반동탁 연합군이 봉기할 무렵 당시 여포는 원외, 원기 등 원씨 일가를 살육한 동탁과 붙어먹고 있었으니 원술 입장에선 절대 좋아할 리가 없다.[15] 이건 여포가 아니라 적토마를 띄우는 말이라는 해석도 있다.[16] 원소의 수하들은 원소가 내리는 관직을 받았는데 여포 자신은 황제가 직접 내린 관직을 받았다고 무시한 것이다.[17] 원소 문서에도 언급된 내용이지만, 원소가 직접 내린 관직을 멸시한 행위는 원소의 정통성을 직격으로 무너뜨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소에게 관직을 내릴 권한은 없었으니, 정통성이 아니라 역모죄로 몰아가도 할말이 없을 일이다.[18]영웅기》에 따르면 고순은 사람됨이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선물을 받지 않았다. 칠백 여 군사를 거느렸으나 천 명이라 일컬었는데, 갑옷, 싸움 도구가 모두 잘 연습하고,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격파하지 못함이 없으니 함진영(陷陳營)이라 불렀다. 고순이 매번 여포에게 "장군께서 몸을 움직이실 때 치밀히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잘못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라고 충언했으나 여포는 그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않았으며 또한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는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 고순을 소원하게 대하고 위속이 안팎의 친척이라 하여 고순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 그러다 싸움이 있게 되자 영을 내려 위속이 거느리던 군사를 고순이 이끌게 했는데 고순은 또한 끝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19] 이는 여포의 군대가 통일된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장수들이 각자 스스로의 고향 출신 병사들을 운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즉 여포군은 병주파를 중심으로 여러 무리들의 수장들로 이루어진 연합이라는 것이다.[20] 즉 이는 연주반란이 실패할 당시 여포를 합류한 진궁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를 처형하면 오히려 제2의 학맹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도 없을 것을 우려했다.[21] 조조 입장에서 진궁은 반란을 획책한 배신자이기 때문. 물론 여포도 거기 동참한 건 마찬가지인데다가 신의 없기로는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상태라서 그냥 항복해도 진궁보다도 우선해서 죽여야 하는 제거 1순위다. 그런데도 항복하고자 했다니 역시 여포다.[22] 상황파악 자체가 전혀 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조에게 사로잡힌 이후에도 유비한테 한 짓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자기를 죽이라고 했다고 쌍욕을 퍼부운게 여포니 말이다.[23] 서주대학살 직후인 만큼 조조의 쓰레기 인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후였다. 진궁에게는 연주호족들을 잔인하게 죽인게 더 마음에 남았겠지만.[24] 북정기에서는 하비성이 3겹성이며 백문을 대성, 즉 외성의 문이라 했고, 수경주는 백문이 남문이라고 했다. 즉 백문루는 마지막 보루가 아니고 여포는 성의 최전방에서 싸우다 항복한 걸로 보인다.[25] 판본에 따라 여포가 후성, 송헌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이 놈들! 내가 너희들을 평소 후대했거늘 나를 배신하는 것이냐!" 라고 소리치지만 후성은 "그런 말은 평소에 장군이 총애하던 여자들에게나 하시오. 나는 장군에게 곤장 백 대를 맞은 기억은 있어도 후대를 받은 기억은 없소." 라고 시크하게 대꾸하거나, 송헌과 위속이 "장수와 병사들을 거지 대하듯 하던 놈이 바로 여포 네놈이 아닌가?! 그러고도 우리를 후대했다니,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려고 하는 후성을 매질한 것도 잘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냐!" 라고 맞쏘아붙이자 여포가 부들부들 떨며 할 말을 잃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26] 조조와 유비는 동급이고 여포는 패장이므로 그들보다 아래다. 그런데 여포가 유비를 자로 부르는 것은 그와 맞먹으려는 것이다. 이에 조조가 유비를 명사군이라는 극존칭으로 높여 부름으로써, 여포에게 "네가 자로 불러대면서 맞먹으려는 이 사람이, 네놈 목숨줄 쥔 나한테 명사군 소리를 듣는 분이시다." 하고 꼽을 주는 것.[27] 이것은 여포를 죽이라 권하는 것 외에도 여포를 이름으로 불러 완전히 하대함과 동시에 정원의 자와 동탁의 관직명으로 높여 이들을 배신하고 죽였던 여포를 유비가 엿먹이는 장면이다. 동탁의 관직은 상국이 맞지만,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고 장안으로 부득이하게 천도하면서 일종의 레임덕이 생기자 동탁 본인이 한발짝 물러나며 태사를 자칭했다.[28] 원래 동양에서 이름(휘)를 함부로 부르는 것은 매우 무례한 짓이다. 당장 정원과 동탁처럼 자 아니면 직위를 붙이는 것이 옳은 호칭인 것. 여기서는 물론 유비가 예의범절이 부족해서 여포를 이름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애시당초 예의를 몰랐으면 동탁과 정원도 마찬가지로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상술했다시피 여포를 완전히 하대하겠다는 것이다.[29] 드라마 신삼국에서는 아예 유비가 조조에게 '정원, 동탁, 왕윤은 여포에게 큰도움이 됐으니 공께서 그의 네 번째 아버지가 되어주십시오'라고 말해버려 조조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려 고민을 거두고 여포의 처형을 명한다.[30] 정사 삼국지에서도 기록이 비슷하지만 귀 큰 놈(大耳兒)이라는 표현이 수정되어있다.[31] 드라마 신삼국에서는 십자가 나무판에 꽁꽁묶어 석궁으로 쏴 죽는것으로 나온다.[32] 다만 힘이 달린 여포가 유비를 찌르는 시늉을 하였고 관우, 장비가 놀라 유비를 보호하려 하자 그 틈을 타서 여포가 도망쳤다는 묘사가 있다.[33] 호뢰관에서 여포가 무쌍을 찍고 공손찬을 끔살하기 직전, 난입한 장비가 가로막자 여포는 기백은 꽤나 있지만 차림새가 누추해서 일반병인줄 알고 "졸병은 저리 비켜라!"하고 그냥 무시하자 장비가 "애비성을 셋이나 가진 천하의 상놈아!”라고 외치며 반격을 하고 빡돈 여포가 목표를 장비로 바꿔서 싸우게 된다.[34] 흔히 여포의 관을 속발관(束髮冠)이라 부른다. 연의의 여포를 모티브로 한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여포도 머리에 더듬이 장식을 하고 나오는데, 제작진의 설정에서는 산새 깃털로 만든 翎子(링즈)라고 언급된다.[35] 정사에 나오는 제장들의 아내와 사통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은 것도 크다.[36] 그럼에도 연의에서 여포의 처첩은 엄씨초선만 등장하는데, 삼국지연의 모종강본 기준 16회에서 여포의 가족에 대해 설명할 때 조표의 딸은 여포의 둘째 부인이었지만 일찍 죽었다고 한다.[37] 명나라 시절에 궁술 훈련 거리가 120~150보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 살았던 나관중이 이걸 참고해서 원문사극의 거리를 정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궁술 훈련때의 표적은 넓은 과녁이라 화극의 가지와는 적중 난이도가 차이가 너무나 크다. 참고로 이 거리는 조선에서도 똑같이 적용했기에 현대 국궁에서도 120보를 환산한 145m를 표준 거리로 규정한다.[38] 드라마 신삼국에서는 초선이 병이나서 간호하려고 밖에 조조군이 지금불리하니, 밖에 나가서 진을 치자는 진궁의 간청을 거부하는것으로 나온다. 아마도 초선과 여포의 관계를 더 끈끈하게 해주려고 그런것같다.[39] 몇몇 판본에서는 그 여포가 지친다는 건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송헌과 위속이 몰래 마취약을 섞은 걸로 각색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듯하다는 의견과 이게 더 여포에게 비참한 짓이라는 의견으로 나뉜다.[40] 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서는 여포가 초췌해졌음을 깨닫는 장면이 진궁이 직접 들이민 거울에 자신의 망가진 몰골을 보고 경악하는 걸로 바뀌었으며, 이후 초기와 달리 광대뼈가 두드러져 핼쑥해진 모습으로 계속 그려진다. 최후도 모든 병사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목이 매달리기 직전까지 '승상께 잘 말씀드려 보겠다'라며 헛된 희망을 품었으나, 결국 '승상께서는 이미 승상부로 들어가셨소'라는 처형관의 싸늘한 대꾸와 함께 받침으로 쓰던 나무토막이 빠지면서 허공에 뜬 여포의 발만 나오는 허망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41] 일본 게임 제작사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와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도 여포의 무력이 최강이라는 설정도 이런 연유다. 오죽하면 동탁 토벌전에서 아예 여포를 피해서 동탁만 치라는 대사까지 나올정도.한국도 이런 관점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다. 단편이긴 하지만 이말년 시리즈에서도 여포가 혼자 유관장 삼형제를 괴멸시키다 못해 아예 원소군 전체를 패퇴시키는 묘사가 있다. 삼국지 10의 도전모드에서 여포토벌전에서는 여포가 호로관에서 원소, 마등, 손책 연합군과 맞붙어 일 대 일로 주요 대장들을 박살내고, 삼국지 11 결전제패 모드에서도 뜬금없이 여포 혼자서 셋을 물리쳐야 하는 장면이 있거나 삼국지 13 동영상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1:3로 싸우고 장비의 공격을 한손으로 막아내거나 장비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며 장비를 죽이기 직전까지 가는등 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이 중에 절정이 창천항로인데 나름 연의를 배제하고 역사 위주로 반영했다고 말하는 주제에 무슨 여포가 한번 뜨면 군대가 괴멸당하고 병사들이 죄다 모랄빵이 나서 싸우지도 못하는 등 묘사가 제정신이 아니다.[42] 84부작 삼국지, 삼국, 무신 조자룡 외 여포가 등장하는 대다수의 매체. 그나마 84부작 삼국지에선 관우와 장비 둘 정도는 상대할 수 있는 정도로 묘사되지만 84부작 삼국지 에서도 장비를 상대로는 근소 우위를 점했고 삼국에선 아예 장비를 죽일 뻔 했으며 삼국군영전 4 인트로를 보면 여포가 성벽에 창을 한번꽂자 사다리와 거기에 매달린 병사들이 다 떨어져나가고 성문이 한방에 열리거나 여포가 유관장에게 덤비라고 손짓으로 도발하는 모습도 나온다. 진짜로 중국인들이 여포를 최강자라고 인식을 안 했다면 중국 매체에서 이런 묘사가 나올 리가 없다.[43] 여담이지만 중국계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여포의 무력보다는 관우가 장비보다 무력이 높다는 것이다.[44] 다만 해당 싸움은 판본에 따라서는 등장하지 않기도 하며, 극의 초반부 장면이니만큼 둘의 우열을 명확하게 가리는 장면은 아니기는 하다. 일단 전반적으로는 극중에서 관우의 위상이 장비보다 좀 더 높게 묘사되기는 하지만, 관우 스스로 "내 동생(장비)은 나보다 대단해서 저 정도 수준의 적장(안량)의 목을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한다."고 언급하는 장면도 있다.[45] 연의 내에서 여포가 100합이 넘도록 싸우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유일한 상대가 장비이며, 이런 장비와 100합이 넘도록 겨룬 인물 역시 여포와 마초 둘 뿐이다. 특히 마초는 그 용맹과 무예가 여포 못지 않다며 조조가 혀를 내두른 맹장이다.[46] 장비는 위엄을 떨쳐 여포와 격전을 벌였다. 여덟 제후가 장비를 보니 창법이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여포는 점점 사기가 올랐다. 장비는 흥이 돋아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운장이 말을 내몰아 82근의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여포를 협공했다. 세 말이 정(丁) 자가 되어 싸웠다. 또 30합을 싸웠으나 두 장수는 여포를 쓰러뜨리지 못했다.[47] 장비는 정신을 차려 여포와 격전을 벌였다. 50합을 싸웠으나 승부를 가를 수 없었다. 운장이 이를 보고 말을 내몰아 82근의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여포를 협공했다. 세 말이 정(丁)자가 되어 싸웠다. 또 30합을 싸웠으나 두 장수는 여포를 쓰러뜨리지 못했다.[48] 오호대장군마초와 동급.[49] 물론 관우나 장비 중 한 명도 아니고 둘이 동시에 보고 있던 것에 찔끔한 것이니 여포가 관우나 장비하고 1:1로 밀린다는 근거는 안 된다. 다만 위에 나온 삼영전여포로 인해 알려진 여포> 유비+관우+장비 설을 부정하는 근거는 된다.[50] 물론 여포가 술에 취한 장비에게 질까 봐 안 덤볐다고 보기는 힘들고, 어차피 성은 점령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부상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장비에게 덤빌 필요를 못 느꼈다고 봐야 할 것이다.[51] 여포의 공격적인 성격을 감안하면 어색함이 느껴지는 해석이기는 하다. 하지만 본인의 성격과 전투 방법이 꼭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논리적인 오류는 없다. 다만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여포의 무예가 관장보다 월등히 높지 않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버리고 거기에 작위적으로 짜 맞추는 경향이 큰 것은 사실이다.[52] 대표적으로 기령은 관우와 30합을 겨루었지만, 장비에게는 불과 10합만에 패배하고 사망했다. 또한, 장합은 마초를 상대로 20여 합만에 도망쳤는데, 정작 마초와 100합 이상을 겨룬 장비를 상대로는 50합을 넘게 겨뤘음에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 밖에도 안량을 상대로 20합만에 도망친 서황이 후일 형주에서는 안량을 일격에 참수한 관우와 수십합 이상을 겨룬다거나, 조운과 50합 이상 겨뤘던 문추가 관우를 상대로는 겨우 3합 겨루고 쫄아서 도망치는 등 같은 장수라도 상황에 따라서 무력이 오락가락한다.[53] 장비 VS 여포, 마초 VS 허저, 장비 VS 마초, 관우 VS 황충, 관우 VS 방덕 정도가 전부다. 하나같이 연의에서 손꼽히는 명승부들이며, 여기 언급된 7명은 전부 작중 일 대 일 대결에서 무패를 기록한 세계관 최강급의 명장들이다.[54] 다만 삼국지 7에서는 예외적으로 98로 나왔다. 그래도 전체 1위였다.[55] 단 무기를 포함하면 여포는 무력 108, 장비는 103으로 5 이상 벌어진다. 물론 장군들의 무력은 무기를 포함하지 않는 기본 수치임이 옳으나 기본 무력에서 고작 2~3차이가 나는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한방에 베어버렸는데 여포와 장비가 무기 제외 2, 무기를 포함하면 5나 차이가 난다는 건 거의 억지에 가까운 능력치 배정이다. 하지만 이는 코에이가 심할 정도로 여포를 편애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연의에서 말도 안 되게 무거운 청룡언월도,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사모가 무력을 5 올려주는데 그냥 개량형 창인 방천화극이 8을 올려줘야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개인 무력은 관우, 장비보다 +3, +2 높지만, 관장의 무기 보정으로 합계 무력이 여포와 비슷해지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물론 적토마 보정도 있기 때문에 무기에서 밀릴지언정 전체보정을 더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56] 일본에서는 관우나 장비보다 여포를 더 높이 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장 FGO에서도 삼국지 출신 영령은 빙의체에게 주도권을 맡긴 제갈공명과 사마의를 제외하면 여포, 진궁, 적토마, 장각 정도다. 다만 중국에서 관우를 신으로 숭배하기 때문에 실장하기엔 타입문에서 부담스러워 하며 여성이거나 여성으로 TS하거나 특이한 각색을 한 중국 출신 영령이 중국에서 검열 당하면서 개명한 예도 있다. 그래서 Fate/Samurai Remnant에 관우 대신 주유를 등장시켰다.[57] 조조의 1대 경호실장 전위, 2대 경호실장 허저가 개인의 무용에 초점을 맞춘 장수평을 받았다.[58] 이 유명한 표현은 실제로 《조만전》에 언급되는 구절이기도 하다.[59] 싸움을 잘해서 앞을 막을 자가 없다는 뜻[60] 그간 정사 삼국지 오역 때문에 여포가 비장으로 자칭하고 다녔다고 잘못 알려졌지만, 《삼국지》 여포전에서도 "(여)포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힘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니, 비장이라 불렸다(布便弓馬,膂力過人,號為飛將)"고 확실히 명시되어 있다. 다만 관직명 같은 건 아니고, '이야 저 놈 완전 날아다니네?' 라는 뜻 정도의 별명이다.[61] 이각과 곽사는 동탁이 서량에서 거병할 때부터 함께한 부하였고 여포는 정원 휘하였다가 배신하고 넘어온 자이니 과연 동탁이 누굴 더 우대했을 지는 명약관화다. 또, 동탁 사후 동탁의 군대를 정비하고 조조를 물리친 모습을 봐도 용인술이나 정치적인 혜안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또 그게 본인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망정 장수로서의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62] 당장 동탁 사후 동탁의 병사들을 규합한 게 바로 이각과 곽사였다. 여포는 오히려 이들에 의해 쫒겨나고 왕윤은 사망했다.[63] 다만 연의와 달리 정사에선 일기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싸움 방식이다. 따라서 한 장수에게 일기토 기록이 있다는 자체가 드물다.[64] 참 모순적인 것이 관우는 연의에서 창작된 결투 장면들을 들먹이며 거품이라고 폄하받아온 기간이 꽤나 있으나 여포 역시 창작된 결투 장면이 많음에도 그가 거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65] 사실 이 시대에는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희미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문관이 책략가라는 것은 연의에서의 일이지 정사에선 책략과는 동떨어진 행정 업무를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66] 계락이 있다면 하후돈 인질극 정도인데, 주체가 여포인지는 확실치 않은데다가 이건 하후돈의 무능력과 인품, 한호의 합리적인 냉철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일화라는 게 반전이었다.[67] 전단, 악의의 고사를 언급.[68] 내용인 즉슨 너희가 황제를 호위한건 엄청난 공인데 왜 원술같은 놈이랑 일하냐?나도 동탁을 죽인 충신인데 그러지 말고 같이 원술 죽이고 공을 세우자는 내용이다.[69] 제나라 환공이 자신을 죽일뻔했던 관중을 기용한 사실을 언급.[70] 사실 이건 왕윤이 너무 고지식한 유학자였기 때문이었다. 왕윤은 아예 동탁의 무리들을 싹쓸어 버릴 요량인 듯했지만 동탁 사후에도 그의 복심이라 할 만한 이각, 곽사, 장제, 번조가 남아있던 상태에서 동탁의 군대를 흡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각의 무리들을 사면한 것도 아니다보니 가후의 꼬드김에 넘어가면서 오히려 반격해 역으로 왕윤이 참살당하게 된다.[71] 사실 장료도 고순과 취급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72] 공손찬의 경우 존경받는 황족 유우를 살해하여 인망을 잃은 폭군으로 전락해 스스로의 신세를 망쳤기에 유비 뿐 아니라 조운, 전예 등 여러 인물들도 공손찬 곁을 떠났기에 유비가 공손찬을 배신했다고 보기 어렵다. 원소의 경우는 관우의 참(斬)안량 이후 남쪽으로 떠나 유벽, 공도의 무리에 합류했으나 이건 원소와 논의한 후 간 것이다.(유비는 원소에게 조조 토벌의 명분이었는데 전쟁이 벌어진 이상 붙잡아둘 이유도 없어서 보내주었으며, 유비 쪽에서도 관우 일로 인해 입지가 좁아서 원소군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유표에게 의탁했을때는 이미 유표쪽 중신들이 유비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유표 사후 유종이 후계자가 되었을 때 유표의 세력을 유비가 차지하자는 건의를 물리치며 의리를 지켰다.(원래 유기가 이어받아야 할 자리였으므로 유기의 후견인 격인 유비가 끼어들어 몫을 챙길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그나마 유장을 배신한건 사실이지만 이미 유장의 신하들 중 법정을 비롯한 상당수가 유장의 통치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미 유비에게 붙은 형국이라 명분은 어느정도 충족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중엔 유장이 유비 반대파의 의견에 따르게 되면서 점점 유비에 대한 대우가 박해지고 재대로 된 지원도 없이 이리저리 굴리다가, 유비가 시킨 것도 아닌 장송의 밀서를 보고 지레 겁먹어 유비를 공격한 것은 유장 쪽이었기에 유비에게도 명분은 있었으며,이후 서촉을 차지한 후에 유장을 포함한 일족들을 살려주는 한편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노후 자리를 마련 해주는 등 최소한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여포는 자신의 상관이자 연의에선 양부인 정원, 동탁을 무자비하게 살해했고 자신을 받아준 유비를 내쫓는 등 온갖 진상짓을 다했다.[73]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자치통감에는 '동탁은 어디를 가든 늘 여포를 대동하여 자신을 시위케 했다. 이로 인해 동탁의 여포에 대한 신임은 더욱 깊어져 부자간의 서약을 맺기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다.[74] 여포가 뒤통수치기 전까지 유비는 원술과 대등하게 맞서고 있었다.[75] 때문에 드라마 삼국을 비롯한 몇몇 창작물에선 여포가 '내가 원문에서 활 쏴서 네 목숨을 구했는데 이렇게 배신하냐!'고 여포가 발악하자 참다 못한 유비가 '네가 날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이 꼴은 안 됐을 텐데 왜 이제 와서 그러나?' 하는 식으로 반박해 여포가 아무 말도 못하는 장면도 나온다.[76] 원래 조조와 유비는 같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거병했던 적이 있어서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다. 조조가 유비를 자기 휘하에 넣으려고 한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라는 말.[77] 상사의 직속부하와 다툼이 생긴다거나 시비를 함부로 건드리는 건 아무리 친밀한 수하라 할지라도 상사의 권위에 대해 우습게 아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어서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이다.[78] 게다가 여포의 세력은 성격상 원래 출신인 병주 병력과 동탁 휘하에 있을 때의 중앙 병력, 장막과 손잡으며 얻은 연주 병력과 유비 뒤치기로 얻은 서주 병력 등이 뒤섞여 있는 상태라서 화합과 통솔이 세력 그 자체의 존속과 직결되는데도 이런 짓을 했다. 비슷하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혼성 방랑군벌 유비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휘하의 모든 사람들을 충심으로 똘똘 뭉치게 해놓은 걸 생각하면 리더로서의 격이 비교 자체가 안 된다.[79] 다만 이 부분은 초선은 부모도 모른 채 왕윤 밑에서 자랐고 연환계에 자원하면서 동탁의 첩이 되었기 때문에 나름 삼공 대접까지 받았던 여포의 정실이 되기에는 신분이 너무 안맞아 보이는 것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에 재혼이나 낮은 출신이 큰 하자는 아니었지만 초선은 나관중이 창작한 인물이고 명대의 기준으로 이 조건은 첩 이상은 될 수 없었다.[80] 사실 조표 같은 구 도겸의 잔당들이 처음부터 딴 마음을 먹고 유비에게 여포를 들이자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비는 도겸의 은혜를 입은 만큼 그 부하였던 이들의 말을 함부로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81] 재미있게도 연의 등지에서 라이벌 격으로 엮이는 장비도 인터넷에서 어그로를 끄는 사람을 장판파 장비 납셨다는 식으로 비유하기도 한다.[82] 대표적으로 유비는 중산정왕의 후예로 황족이 확실하다고 했으며, 조조는 양할아버지가 환관들의 정점에 있던 조등이며, 마초는 마원의 후손이고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들이 이민족과 혼인을 반복하였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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