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대 28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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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漢
(? ~ 44)
1. 개요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자안(子顔). 형주 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사람이다. 개인 성품이 질박하고 정이 많았으나 어렸을 적 집안 사정상 교육을 받지 못해 문장이나 말로 자신의 뜻을 잘 표현하지 못했다고 한다.2. 생애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집안 심부름을 도맡아하며 힘들게 지내다가 성년이 되어서는 현(縣)의 정장(亭長)이 되었다. 왕망이 전한의 정권을 휘어잡을 무렵, 오한은 법을 어기는 바람에 빈객들과 함께 어양군(漁陽郡)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부유하지도 않았던 오한은 수중에 돈이 금방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말장수가 되어, 연(燕)과 계(薊) 땅을 오가며 여러 호걸들과 교류하였다.경시 원년(23년), 녹림군이 일어나 경시제 유현(劉玄)을 옹립하고 왕망의 신나라를 몰아냈다. 경시제는 낙양을 점거하고 황제를 칭하는 동시에 대륙 각지에 사자를 파견해 순시하도록 하였다. 한홍(韓鴻)도 경시제의 명을 받아 사자가 되어 어양을 순시하였는데, 어떤 자가 한홍에게 말했다.
"오자안은 범상치 않은 자이니 그와 더불어 일을 계획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홍은 오한을 불러 만나보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완현 출신임에 기뻐하며 안락령(安樂令)에 임명하였다.한단(邯鄲)에서 왕랑이 황손 유자여를 사칭해 반란을 일으키고 하북 각 군현에 격문을 뿌려 북주(北州)의 민심을 현혹시켰다. 어양에도 왕랑의 격문이 도착했으나, 마침 상곡(上谷)에서도 상곡태수 경황(耿況)도 장수 구순을 보내 유수를 따르자 하니, 팽총은 고민에 빠졌다. 오한은 당시 하북에 원정나와 있던 유수가 장자(長者)라는 명성을 들어 흠모해왔던 관계로 팽총에게 유수를 따를 것을 설득했다.
"어양과 상곡의 돌기병대는 그 명성이 천하에 자자합니다. 주군께서는 어찌 두 군(郡)의 정예부대를 합하여 유공(劉公)을 따라 한단(邯鄲)을 치지 않으십니까? 지금이 바로 공을 세울 때입니다."
팽총은 오한의 말을 옳게 여겨 따르려 했지만, 팽총 휘하의 관원들은 대부분 왕랑을 지지하면서 다시 회의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한은 팽총에게 인사를 올리고 밖에 나와 복잡한 심정을 다스렸다. 그때 한 유생(儒生)이 그의 앞을 지나가자, 오한은 사람을 시켜 그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는 정보를 캐물었다. 유생은 배불리 먹은 후 말하길, 유수가 지나는 군현마다 귀순하지 않는 곳이 없고 한단의 왕랑은 사실 유씨(劉氏)가 아니라 하였다. 그의 말은 들은 오한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유수의 명령을 사칭해 어양군 각지에 격문을 붙이고, 그 유생을 팽총에게로 데려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똑같이 고하게 하였다. 유생의 말을 들은 드디어 유수에게 붙기로 결심하고, 오한, 종사 갑연, 호노현령 왕량에게 돌기병 3천여 명을 주어 유수에게 가라 명했다.오한은 남하하면서 그처럼 유수를 도우러 가던 상곡에서 보낸 경엄의 돌기병대를 만나 군사를 합쳤다. 그들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길을 가로막는 왕랑군을 격파해나갔다. 왕랑의 대장과 구경(九卿)과 교위(校尉) 이하 4백여 명을 사로잡고, 인수 125개, 부절 2개를 노획하였다. 또, 3만여 명을 참하면서, 탁군(涿郡), 중산(中山), 거록(鉅鹿), 청하(淸河), 하한(河閒) 등 총 22개의 현을 평정시키고 유수가 있는 거록군 광아(廣阿)로 향했다. 유수군은 처음에 군대가 다가온다는 보고를 받고 적으로 착각해 크게 놀랐지만, 이미 유수와 일면식이 있던 경엄이 앞장서서 이들을 안심시켰다. 뜻밖에 지원군을 받은 유수는 환대하였고, 오한을 포함한 상곡, 어양의 장수들을 모두 편장군에 임명하였다. 오한은 이후 유수를 수행해 한단성까지 뽑고 왕랑 세력을 멸하였다. 유수는 그의 공을 치하해 건책후(建策侯)의 호(號)를 하사하였다.[1]
경시 2년(24년), 경시제가 시어사 황당(黃黨)을 보내 소왕(蕭王)에 봉하고 유수를 행재소(行在所)로 소환했다. 당연히 이를 그대로 따를 리 없던 유수는 하북 평정의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허나, 경시제도 유수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험 삼아 일전에 심복인 상서령 사궁(謝躬)을 파견해 유수의 왕랑 토벌을 돕게 한 뒤 유수와 함께 한단을 점거하면서 그를 감시하도록 하였고, 측근인 묘증(苗曾)을 유주목에, 위순(韋順)을 상곡태수에 삼아 하북에 보냈다. 심지어 왕랑 토벌이 막 끝난 직후라 유수를 따르던 병사들 중 죽거나 다친 자가 많았으니, 어찌보면 유수에게 있어서 새로운 위기나 마찬가지였다. 유수는 유주에서 병력을 징집하고자 야밤에 은밀히 등우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등우가 말했다.
"제가 한가할 때 오한과 더불어 여러 번 말을 섞어 봤습니다. 그는 용기와 지략이 뛰어나 다른 장수들 중 그에게 미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유수는 그 즉시 오한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지절을 내려 북쪽 10개의 군(郡)에서 돌기병들을 더 징집해오라 명했다. 경시제의 심복인 유주목 묘증은 유주 산하 모든 군들에게 오한이 와도 협조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내 오한이 20기를 거느리고 우북평군 무종(無終)에 이르렀다. 묘증은 그래도 겉으로는 아군인 자신을 오한이 해칠 리 없다 생각해 무방비한 상태로 도로로 나가 오한을 영접하였다. 하지만 오한은 이미 묘증이 온갖 방해 공작을 해올 것임을 예상해 그가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참수해 버리고, 그의 지역으로 들어가 휘하 관원과 병력을 전부 흡수하였다. 오한이 묘증을 베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온 유주를 진동시켰다. 유주의 모든 성읍들은 두려움에 떨며 마치 바람에 휩쓸리 듯 오한에게 복종했다. 이리하여 오한은 어떠한 저항이나 방해 없이 무사히 유주에서 병력을 징집하여 유수에게로 돌아갔다. 당시 유수의 군대는 청양(淸陽)에 주둔해 있었는데, 오한이 끌고온 병력과 말이 매우 많은 것을 본 유수의 제장들은 서로 수군댔다."설마 저것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겠는가?"
그러나 오한은 대장 막사에 들어가 곧바로 모든 병부를 유수에게 바쳤다. 이를 본 장수들은 유수 앞으로 나아가 자기 휘하에 오한이 가져온 병력과 말을 나누어 배속시켜 달라며 청하였다. 이에 유수는 장수들에게 말했다."그대들은 본래 오한과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또 청하는 것은 어찌 이리 많단 말인가?"
유수의 말에 제장들은 모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애당초, 사궁이 경시제의 명을 받아 6명의 장수들과 함께 유수를 도우러 왔을 때, 그도 왕랑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이기지 못해 큰 도움이 안되었다. 심지어 사궁의 비장은 자신의 상관만 믿고 지역을 약탈까지 한데다, 사궁 본인도 유수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유수는 사궁이 무척 못마땅해 그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으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시간이 지나면서 유수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진 사궁이 자신의 수만 대군을 이끌고 한단을 떠나 업(鄴)에 주둔하려 했다. 이때 유수도 사견(射犬)에 주둔해 있는 도적 무리를 정벌하기 위해 한단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유수가 사궁에게 말했다.
"저는 사견에서 도적들을 쫓아 반드시 격파시키겠습니다. 그리하면 산양(山陽)에 머물고 있는 우래적(尤來賊)은 놀라 분명 도망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위력으로 도망쳐오는 이들을 쳐 흩으려 버린다면, 필히 그 도적들을 사로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궁은 알았다 답하고는 업에 도착해 도적들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유수가 마침내 사견에서 청독적을 무찌르니, 과연 유수의 말대로 산양에 있던 우래가 유수를 피해서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척후로부터 보고를 받은 사궁은 대장군 유경(劉慶)과 위군태수 진강(陳康)을 남겨 업을 치키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장수들과 도망치는 도적들을 융려산(隆慮山)까지 추격하였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도적들이 산을 끼고 필사적으로 항전하자 사궁은 끝내 대패해 병력 수 천을 잃었다. 한편, 유수는 사궁이 업을 비운 틈을 타 오한과 잠팽을 보내 업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한은 말 잘하는 이를 뽑아 진강을 설득하게 하니, 진강은 사궁과 유경의 가족들을 전부 사로잡고 성을 들어 투항했다. 융려에서 막 패전한 사궁은 경황이 없어 진강의 배신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오한이 무방비하게 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궁의 목을 베어버리고 미리 숨겨놓은 복병을 일으키자 지휘관을 잃은 사궁의 병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이렇게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경시제의 부하들을 전부 제거한 유수는 더욱 세차게 하북의 도적 무리들을 몰아붙였다. 오한은 유수를 따라 전장에 나설 때마다 항상 5천의 돌격기병대를 거느리고 앞장서서 먼저 적의 진영을 휘저어 격파시켰다. 유수가 오한을 필두로 13명의 장수들을 보내 우래적을 완전히 궤멸시킨 전투를 마지막으로 하북이 평정되자, 오한은 제장들과 함께 유수에게 존호를 사용하라 여러 번 권하였다.
건무 원년(25년) 6월, 유수가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호현(鄗縣) 남쪽에 제단을 쌓아 황제를 칭하고 군신들의 관직을 재편하였다. 광무제 유수는 평소 도참사상을 신봉해 예언을 믿어 왔기에, 그에 따라 평적장군 손함(孫咸)을 대사마에 앉히려 하였다. 장수들은 눈에 띄는 공적도 없는 손함이 군대 내에서 어찌 보면 제일 중요한 직책인 대사마가 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발하였다. 광무제가 한발 양보하여 이번엔 장수들에게 적합한 인물을 추천해달라 하니, 경단과 오한이 그 후보에 올랐다. 이에 광무제는 오한을 대사마에 삼고 무양후(舞陽侯)에 봉했다.
그 해 7월, 대사마에 임명된 오한은 건의대장군 주우, 집금오 가복, 정위 잠팽 등 11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나아가 낙양성을 포위하였다. 오한은 낙양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으나 현한의 좌대사마 주유(朱鮪)가 성을 굳건히 수비한 탓에 2개월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주유 휘하에서 일했던 잠팽이 성벽 앞까지 가 주유를 투항하도록 설득하니, 주유는 성을 들어 광무제에게 항복하고 부구후에 봉해졌다.
건무 2년(26년) 정월, 오한은 대장이 되어 주우, 가복, 대사공 왕량, 대장군 두무, 양화장군 견담, 편장군 왕패, 기도위 유륭, 마무, 음식(陰識), 총 9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업성 동쪽 장수(漳水) 상류에서 단향적(檀鄉賊) 공격해 크게 격파하니, 투항한 자만 10여 만에 달했다. 광무제는 사자를 통해 오한에게 새서(璽書)를 하사하여 광평후(廣平侯)로 개봉하고, 광평(廣平), 척장(斥漳), 곡주(曲周), 광년(廣年) 4개의 현을 식읍으로 더했다. 그러나 오한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군을 진격시켜 업성 서산(西山)의 여백경(黎伯卿)과 하내(河內)의 수무(脩武) 등 아직 남아있는 자잘한 도적들을 모두 격파했다. 광무제는 수레를 타고 친히 오한의 진영으로 행차해 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동년 4월, 광무제의 명령을 받들어 완(宛), 열양(涅陽), 역(酈), 양(穰), 신야(新野) 등의 여러 성을 쳐 모두 함락시켰다. 하지만 오한은 이 과정에서 병사를 통제 못하고 지나가는 지역마다 약탈을 벌이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파로장군 등봉(鄧奉)의 고향이 신야였는데, 그는 광무제와의 알현한 뒤 잠시 고향에 들렀다가 자신의 고향을 약탈하는 아군을 목격한 것이다. 물론 점령군의 약탈은 혼란기에 흔히 발생하는 일이었으나, 대사도 등우, 광무제의 매형인 상산태수 등신 등, 광무제의 거병 초창기부터 멸문을 무릅쓰고 아낌없이 지원해준 등씨들의 고향이 바로 신야였다. 이런 처우에 눈이 돌아가버린 등봉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 즉시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거느려 자신의 상관인 오한의 군대를 습격했다. 오한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크게 놀라 패주했으며, 등봉은 난을 일으켜 육양(淯陽)을 점거하고 인근 도적들과 연합해 남방의 골칫거리로 전락한다. 결국 오한이 이기지 못하니, 광무제가 친정에 나서서 난을 진압하고 등봉을 붙잡아 참수하였다.[2]
등봉의 난이 정리된 후, 오한은 다시 진격을 개시하여 황우수(黃郵水)에서 남군(南郡)의 군벌 진풍(秦豊)과 싸워 승리했다. 때마침 영천군의 도적떼 토벌을 마친 편장군 풍이와 합세해 창성(昌城)에서 오루적(五樓賊)의 장문(張文) 등의 무리를 전멸시킨 뒤, 신안(新安)에서 동마적(銅馬賊), 오번적(五幡賊) 등을 공파하였다.
건무 3년(27년) 봄, 오한은 건위대장군 경엄, 호아대장군 갑연과 함께 하내군 지(軹) 땅 서쪽에서 청독적을 대파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해 4월에는 갑연 등 7명의 장수들을 인솔하여 광낙(廣樂)에서 양왕(梁王) 유영(劉永)의 대사마 소무(蘇茂)를 포위하였다. 이때 수양(睢陽)에서 반란이 일어나 유영을 영접하였고, 수양을 손쉽게 차지한 유영은 주건(周建)에게 10만여 군사를 주어 광낙을 구원하게 했다. 오한은 군사를 나눠 일단 잠팽 혼자 수양으로 보낸 뒤, 경기병을 이끌고 주건의 대군과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무릎에 부상까지 입었다. 오한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철수시켰고, 주건의 군사들은 광낙성 안으로 들어갔다. 휘하의 장수들이 오한에게 말했다.
"큰 적이 바로 앞에 두고 공(公)께서 부상을 입어 누워계시니 장병들이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오한은 상처에 붕대를 감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소를 잡아 장병들을 배불리 먹이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적의 무리가 비록 많다고는 해도, 저들은 모두 약탈을 일 삼는 도적 무리에 불과하다. 옛 말에 이런 자들을 가리켜 이르길, 「승리를 해도 양보할 줄 모르고, 패배를 해도 서로 구하지 않는다.」라 하였으므로,[3] 절의를 좇아 행동하고 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무리가 아니다. 지금이 바로 제후에 책봉될 수 있는 기회이니, 제군은 힘껏 싸우도록 하라!"
오한의 말에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 격앙되었다. 다음 날이 되고 주건과 소무가 병력의 우세를 믿어, 오히려 성에서 나와 오한의 군영을 포위하였다. 오한은 황두(黃頭), 오하(吳河) 등 4개의 부대에서 정예병을 선발해, 3천 기의 오환 돌기병과 함께 출격할 준비를 하고 나머지에게는 별동대가 출발하는 순간 북을 크게 울리도록 지시했다. 오한이 군영 문을 열어 젖히고 돌진하자, 주건은 병력을 앞세워 저지하려 했으나 대패하고 군사를 돌려 성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하였다. 오한은 성문 앞까지 이들을 추격해 한번 더 대파하니, 주건과 소무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오한은 두무와 진준을 광낙에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서둘러 수양에서 유영과 싸우고 있는 갑연을 도우러 갔다. 하지만 오한이 수양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유영은 죽고 갑연이 수양은 탈환한 상태였다. 유영의 잔당들은 도망쳐서 그의 아들 유우(劉紆)를 양왕으로 옹립했다..건무 4년(28년) 4월, 광무제를 따라 업성으로 갔다. 업에 도착한 광무제는 오한으로 하여금 왕량, 진준을 거느리고 임평(臨平)에서 오교적(五校賊)을 치게 하였다. 오한은 임평으로 가 오교적을 섬멸하고, 도망치는 도적을 쫓아 기산(箕山)에서 이들을 한 차례 더 무찔렀다. 그 후, 오한은 북진하여 청하(淸河), 장직(長直) 두 군(郡)을 평정하고, 평원군(平原郡)에서 오리적(五里賊)도 토벌했다. 일찍이 평원군 격현(鬲縣)에서 다섯 가문의 호족들이 힙을 합쳐 광무제가 임명한 현장(縣長)을 사로잡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오한의 휘하 장수들은 내친 김에 그것까지 진압하자며 입을 모았다. 그러나 오한은 이들의 청을 기각하고는 말했다.
"격의 반란은 모두 그 수장(守長)의 죄이다. 감히 경거망동하여 병사를 보내는 자는 누구든 베어버리겠다."
오한은 격현에 격문을 보내 문제의 현장을 압송하게 하고 사람을 보내 그 곳의 백성들에게 정중히 사죄하였다. 반란을 이끌었던 다섯 가문의 호족들은 매우 기뻐하며 즉시 무리를 거느리고 나와 귀항하였다. 이를 본 제장들이 감탄하면서 말했다."싸움 없이 성을 함락시키다니, 저희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 해 겨울에는 경엄, 한충대장군 왕상과 함께 평원군을 침노한 부평적(富平賊)과 획색적(獲索賊)을 쳤다.건무 5년(29년) 2월, 도적들이 5만 무리를 거느리고 오한의 군영을 야습하여 군중(軍中)이 놀라 혼란스러웠으나, 오한은 그대로 누운 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군사들도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병사들이 안정되자 오한은 일어나 정예병을 선발하고 도적들에게 반격을 가해 크게 이겼다. 대패한 도적이 달아나니, 오한은 잔당을 추격해 무염(無鹽)을 지나고 발해(勃海)에서 이들을 다시 한번 격파하고 4만여 명을 항복시켰다. 또, 광무제가 해서왕 동헌(董憲)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도성(桃城)에서 반란자 방맹(龐萌)과 양나라의 유우, 소무 연합군을 격파했다. 방맹과 유우가 동헌에게로 도망치자, 광무제는 친히 팽성(彭城)과 하비(下邳)를 치러 가고 오한에게 별동대를 주어 동헌의 근거지인 담성(郯城)을 공격하게 했다. 오한은 약 한 달만에 담성을 함락시키고 동헌과 방맹을 추격해 구성(胊城)을 포위하였다. 양왕 유우는 어디로 도망칠 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그의 부하인 고호(高扈)에게 목이 베이고 오한에게 바쳐졌다.
건무 6년(30년) 정월, 오한이 드디어 구성을 함락시키고 해서왕 동헌과 동평왕 방맹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그동안 대륙의 동남쪽을 어지럽히던 유우, 동헌, 방맹의 수급을 모두 얻은 오한은 경사로 개선하였다. 얼마 안가 외효가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오한은 장안 서쪽에 주둔해있다가 경엄, 갑연 등이 농(隴) 땅에서 외효군에게 패하자 광무제의 명령에 따라 경엄, 풍이, 채준을 제외한 나머지 장수들을 인솔해 장안으로 들어갔다.
건무 8년(32년) 봄, 중랑장 내흡이 외효의 영역인 약양(略陽)을 기습해 빼앗았다. 약양은 외효의 도읍인 기(冀)로 통할 수 있는 요충지라 장안에 주둔해있던 오한 등은 서둘러 약양을 향해 달려가려 했으나, 광무제가 장안에 직접 행차하여 오한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 해 4월, 광무제가 장안에서 군대의 정비를 마치고 서쪽으로 출병했다. 오한도 광무제를 수행해 외효의 영역을 차례차례 점령해나갔다. 외효는 전세가 불리해 서성(西城)에 들어가 농성하면서 광무제의 회유를 모두 거절하였다. 농에 있던 광무제는 인질로 잡아놓은 외효의 장남 외순을 참수하고 오한과 잠팽을 서성을 보내 포위하도록 하면서 오한에게 조서를 내렸다.
여러 군(郡)에서 모인 병사들은 단지 앉아서 식량을 소비할 뿐이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가 탈영이라도 하게 되면 다른 병사들의 사기에도 영향이 가 결국 패배하게 될 터이니, 그대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마땅히 물러나도록 하라.
그러나 오한 등은 공을 탐해 식량이 날이 갈수록 줄어듦에도 계속 남아 서성을 공략하였다. 결국, 양식이 떨어져 병사들이 피폐해지고 탈영병이 하나둘 속출하니, 공손술의 구원군이 서성을 구하러 오자 패배해 장안으로 퇴각하였다.건무 9년(33년) 6월, 광무제의 명을 받아 왕상, 주우 등과 함께 5만여 병력으로 고류(高柳)에서 노방의 부하 가람(賈覽)을 쳤으나 흉노의 구원병으로 인해 전세가 불리하여 상산군(常山郡)으로 퇴각했다. 광무제는 왕상, 주우, 왕패 등만 상산군에 남게 하고 오한은 돌아오게 하였다.
건무 10년(34년) 정월, 광무제로부터 지원군을 받아 다시 상산군으로 왔다. 오한은 왕상 등과 군대를 합쳐 총 6만 군대를 거느리고 고류로 나아가 평성(平城) 아래에서 가람, 흉노군을 격파하고 그들을 병주에서 쫓아냈다.
건무 11년(35년) 봄, 주로장군 유륭 등과 형주에서 6만 명의 인력과 5천 필의 말을 징발해 정남대장군 잠팽을 지원하였다. 이후 잠팽을 도와 형문(荊門)에서 공손술군을 격파하였다. 잠팽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공손술의 패잔병들을 추격해 바로 강주(江州)를 향했고, 오한은 이릉(夷陵)에 머물면서 노요선(露橈船)을 준비한 뒤, 남양(南陽)의 병사들과 이형(弛刑)의 모사 3만 명을 징집해 강을 거슬러서 잠팽의 후위 부대로서 강주로 올라갔다. 머지않아 잠팽이 암살되면서 뒤따라오던 오한은 잠팽의 군사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건무 12년(36년) 정월, 어부진(魚涪津)에서 공손술의 장수 위당(魏黨)과 공손영(公孫永)을 대파하고 무양(武陽)을 포위하였다. 공손술은 사위 사흥(史興)에게 5천여 군사를 주어 무양을 구원하게 했으나, 오한은 사흥을 요격해 그의 무리를 멸절시키고 건위(犍為)로 들어갔다. 여러 현들이 성을 굳게 닫고 지키자, 오한은 광도(廣都)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경기병을 보내 성도(成都)의 시교(市橋)를 불태웠다. 이에 무양 동쪽의 작은 성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오한은 이렇게 승승장구하였지만 광무제는 조서를 보내 경고하였다.
성도(成都)에는 10만여 무리가 있으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광도를 굳게 지키면서 그들이 알아서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먼저 싸움을 걸지 말도록 하라. 만약 그들이 감히 오지 않는다면, 공(公)은 병영을 옮기면서 적군을 위협하다가 그들이 피곤해졌을 즈음에 공격한다면 격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한은 전세의 유리함을 믿고 광무제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가 보병과 기병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곧장 성도로 진격하니, 성도로부터 거리가 어느새 10여 리 밖에 남지 않았다. 오한은 강 북쪽에 군영을 세워 주둔하여 부교(浮橋)를 만들고, 무위장군 유상(劉尙)에게 1만여 명을 주어 강 남쪽에 주둔하게 하였다. 양 진영 사이의 거리는 20여 리 남짓 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광무제는 크게 놀라 다시 조서를 보내 오한을 책망하며 말했다.짐은 공(公)에게 수많은 칙령을 내려 세세히 일러주었건만, 어찌 이리도 일을 혼란스럽게 임하는가? 이미 적을 가벼이 여기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으며 유상과 병영도 나누었으니, 일에 완급이 생길 때에는 서로 다시는 돕지 못하게 되었도다. 적들이 출병하여 공을 포위하고 많은 병사들로 유상을 공격할 경우, 유상은 깨질 것이고 공 또한 패하리라. 다행히 아직 무사한 것 같으니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광도로 돌아가도록 하라.
하지만 광무제의 조서가 오한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공손술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공손술은 장수 사풍(謝豐), 원길(袁吉)에게 약 10만의 병사를 주고, 20개 진영으로 나누어 동시에 오한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또다른 장수에게 별도로 군사 만여 명을 주어 유상을 쳐 서로 구원할 수 없게 하였다. 오한은 쳐들어온 공손술군과 하루종일 크게 싸웠으나 패해 군영으로 들어가 수비했고, 사풍은 오한의 진영을 포위했다. 오한은 휘하 장수들을 불러모아 격려하며 말했다.
"나는 제군과 험난한 고비를 넘어 천리를 돌며 함께 싸웠다. 우리는 머무는 곳마다 적들을 참하거나 사로잡았고, 마침내 적지 깊숙이 들어가 그 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유상과 더불어 두 곳이 모두 포위를 당하고 있으니, 서로의 세(勢)가 접하지 않아 그 화란(禍難)을 헤어릴 수가 없다. 그러니 병사들을 강 남쪽으로 헤엄치게 해 유상과 합류하여 함께 저들을 막고자 한다.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저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운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는다면 반드시 패하여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성패의 순간은 전부 이 일거(一舉)에 달려있다."
장수들은 모두 오한의 말에 따를 것을 다짐했다. 오한은 군영 문을 굳게 닫아걸고 3일 동안 병사와 말을 배불리 먹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3일이 지난 날 밤, 군영에 깃발을 빽빽하게 세우고 연기를 끊이지 않게 한 뒤, 재갈을 물리고 장병들을 거느려서 강 남쪽에서 유상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다음 날, 오한군이 이동한 걸 몰랐던 사풍은 군사를 나눠 강 북쪽의 군영을 치게 하고 자신은 남쪽을 공격하러 갔다. 오한과 유상은 병사를 모아 아침부터 오후까지 사풍을 맞아 싸워 그들을 대파하고 적군 5천여 명을 참했으며, 사풍과 원길을 참수했다. 상황이 마무리 되자 오한은 유상을 남겨 수비하도록 하고, 자신은 광도로 돌아와 광무제에게 서신으로 현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며 스스로를 심히 자책하였다. 광무제가 답장을 보냈다.공(公)이 광도로 돌아온 것은 대단히 잘한 일이다. 이제 공손술은 유상을 공략하려 들지 않고 공을 치려 할 것이다. 허나, 만약 그들이 유상을 먼저 공격한다면 공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광도에서 50리 떨어진 곳까지 나아가 적당한 때에 위기에서 구원해 적은 반드시 쳐부수도록 하라.
오한은 광무제의 지시에 따라 광도와 성도 사이를 오가면서 8번 싸워 8번 모두 승리하였고 공손술은 점점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였다.공손술의 힘이 어느정도 빠진 것을 확인한 오한은 성도성 외곽까지 나아가 진을 쳤다. 때마침 장궁도 북쪽 광한군에서 내려와 오한과 성도성에서 합류하여 두 군세는 어느새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공손술은 비단과 금을 뿌려 결사대 5천여 명을 모집해 여녕왕 연잠(延岑)에게 배속시켰다. 연잠은 성도성 시교(市橋)에 기치를 내걸어 마치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는 것처럼 위장시키고 북을 울려 시선을 그쪽으로 집중시키게 한 뒤, 몰래 기습병을 보내 오한군의 후방을 치게 하였다. 오한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지휘관인 오한 본인도 도망치다 물에 빠지는 바람에 말꼬리를 붙잡고 겨우 육지로 올라왔다. 다만, 연잠의 반격은 그리 큰 타격을 주지 못해 오한은 금방 군을 수습하고 성 앞까지 왔다.
공손술은 마지막으로 발악으로 연잠에게 장궁을 막게 하고, 자신은 친히 수만 군사를 일으켜 성에서 나와 오한군을 공격했다. 양군은 세 차례의 접전을 벌여 세 번 모두 공손술군이 승리하였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싸우기만 한 공손술군은 지쳐버렸다. 오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호군 고오(高午)와 당감(唐邯)에게 정예병을 주어 공손술군을 역습하게 하였다. 거센 반격에 놀란 공손술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공손술은 이를 어떻게든 수습해보기 위해 말 위에서 군사들을 호령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더 눈에 띄어 그를 발견한 고오가 공손술의 가슴팍에 창을 찔러 넣었다. 공손술이 그대로 낙마하자 곁에서 호위하던 장수가 재빨리 그를 등에 업고 성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공손술은 그날 밤 부상으로 앓다가 연잠에게 전군을 떠맡기고 사망하였다. 다음 날 아침, 연잠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성도성에 입성한 오한은 공손씨는 물론, 항장인 연잠까지 잡아다 멸족시켰다. 그리고 병사를 풀어 성도를 크게 약탈하게 하고 성도의 백성들을 보이는대로 학살했으며, 공손술이 세운 황궁도 불태워 버렸다. 당시 성도성에는 1만 명이 넘는 어린 아이와 노모도 있었으나 전부 오한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수는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오한을 엄히 비난하고 또, 오한의 부장인 유상에게도 죄를 물어 경질시켰다. 한바탕 소란이 있었으나 일단 대륙의 마지막 군벌인 공손술까지 평정하면서 광무제의 천하통일의 마지막 단추가 끼워졌다. 오한은 군대를 돌려 수도 낙양으로 향했다.
건무 13년(37년) 정월, 오한은 낙양으로 향하다가 광무제의 배려에 따라 잠시 완성에 들러 조상의 제사를 받들었곡 곡식 2만 휘(斛)도 하사받았다. 그리고 4월에 낙양에 도착하니, 광무제는 천하통일을 기념하여 성대한 연회를 열고 공신들의 식읍을 늘려주었다.
건무 15년(39년) 2월, 흉노의 침입이 날마다 심해지니, 오한은 양무장군 마성, 포로장군 마무를 거느리고 흉노를 격파했다. 그리고 안문군(鴈門郡), 대군(代郡), 상곡군(上谷郡)의 관리와 백성 6만여 명을 거용관(居庸關)과 상산관(常山關) 동쪽으로 이주시켰다.
건무 18년(42년) 2월, 장수 사흠(史歆)이 성도(成都)에서 반란을 일으켜 대사마(大司馬)라 자칭하면서 촉군태수 장목(張穆)을 쳤다. 장목이 성도를 버리고 광도(廣都)로 도주하자 사흠은 각 군현에 격문을 뿌렸다. 이에 탕거의 양위(楊偉), 구경(朐颈)의 서용(徐容) 등이 각기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호응하였다. 광무제는 사흠이 과거 잠팽의 호군으로 근무하면서 나름 군대에 관해 빠삭한 인물임을 알고, 오한에게 유상, 태중대부 장궁과 함께 1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난을 진압하도록 했다. 오한은 무도(武都)로 들어가 광한, 파, 촉 세 군에서 병사를 추가로 징집한 뒤, 성도로 진격해 성을 포위하였다. 성은 공격한 지 100일 만에 함락되었고 오한은 사흠을 붙잡아 참수했다. 이후 오한이 뗏목을 타고 강을 따라 파군에 이르니, 양위와 서용의 무리는 두려워 알아서 흩어져 버렸다. 오한은 주동자 200여 명만 처형하고 그에 동조한 잔당과 백성들은 남군(南郡)과 장사(長沙)로 강제이주시키고 귀환했다.
건무 20년(44년),오한이 병에 걸렸는데, 그 병세가 위독하였다. 광무제는 친히 행차하여 서로 못했던 말들을 주고 받았다. 오한이 말했다.
"신은 우매하고 무식하니, 오직 폐하께서 용서하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오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병사하였다.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애도하고 북군의 오교(五校), 경차(輕車), 개사(介士)를 그의 장례식에 보내 전한의 대장군 곽광의 예와 같게 하였다. 시호는 충(忠). 그의 작위는 아들 오애(吳哀)가 이었으나 이내 노비에게 살해당하니, 광무제는 오한의 봉국을 3개로 나누어 각자 오한의 다른 아들들에게 주고 전부 열후에 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