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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후한 제14대 황제 헌제 | 獻帝 | |||
선릉 전경. | |||
출생 | 181년 4월 2일 | ||
후한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즉위 | 189년 9월 28일 | ||
후한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사망 | 234년 4월 21일[1][2] (향년 53세) | ||
조위 산양군 (現 산둥성 허쩌시) | |||
능묘 | 선릉(禪陵) | ||
재위기간 | 후한의 황제 | ||
189년 9월 28일 ~ 220년 11월 25일 | |||
조위의 산양공 | |||
220년 11월 26일 ~ 234년 4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 | 유(劉) | |
휘 | 협(協) | ||
부모 | 부황 영황제 모후 영회황후 | ||
형제자매 | 2남 1녀 중 차남 | ||
배우자 | 정실 효헌황후, 헌목황후 후궁 동귀인 | ||
자녀 | 7남 3녀 | ||
자 | 백화(伯和) | ||
작호 | 발해왕(渤海王) → 진류왕(陳留王) → 산양공(山陽公) | ||
시호 | 조위: 효헌황제(孝獻皇帝)[3] | ||
촉한: 효민황제(孝愍皇帝)[4] | |||
연호 |
[clearfix]
1. 개요
한나라의 제29대 황제이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로 휘는 협(劉協), 자는 백화(伯和).2. 생애
2.1. 황제 등극
영제의 후궁인 미인[9] 왕영(왕미인)의 아들이다. 태어나자마자 이를 시기한 하태후에게 어머니 왕미인이 짐독으로 살해당하자 할머니인 동태후의 손에 양육되어 동후(董侯)라 불렸다.[10] 황자 시절의 작위는 발해왕[11]이었다가, 하태후 소생의 이복형 소제가 등극하고 진류왕(陳留王)으로 전봉되었다.십상시의 난 당시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한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8살의 헌제를 보위에 올렸다. 헌제는 후에 어머니 왕영을 영회황후로 추존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소제가 동탁을 만나고는 겁에 질린 반면, 헌제는 동탁에게 천자를 겁박하러 온 것인지 호위하러 온 것인지 따져 물으며 예를 갖추라고 명령한다. 이로써 헌제는 동탁의 눈에 들어 황제가 되고 소제는 죽는다. 물론 이는 역사적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픽션이다. 실제로 헌제가 동탁 앞에서 그랬다면 혹독한 세상 물정과 권력의 생리를 모르는 8살배기 어린애가 겁없이 한 행동이었을 테고, 동탁 입장에선 이렇게 순진한 어린애야말로 꼭두각시로 삼기에 딱이었을 것이다. 동탁은 정권을 휘두르기 위해 어린 허수아비 황제를 교체했을 뿐이고 이때 후보자 중 어리고 만만하기에 헌제를 보위에 올렸을 뿐이다. 헌제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서자였기에 동탁 입장에는 허수아비 황제로 삼기에 적격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차남인 데다 서자이며 이복형을 죽인 동탁의 손에 황제로 옹립되었다는 약점은 헌제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할 여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 원소는 헌제를 괴뢰 황제로 규정해서 한때 유우[12]를 대립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유언, 원술은 황제를 참칭했고 유표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도 헌제는 대체로 지지받았던 편이라[13] 원소와 원술 외에는 특별히 전국적인 도전을 받지는 않았다.[14] 조조와 손책은 이런 헌제를 옹립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 전-후한 교체기처럼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2.2. 낙양 천도
황제였지만, 그저 어린 나이로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탁은 천자가 된 헌제를 협박해서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직책을 부여받는다. 헌제는 그 과정에서 허수아비마냥 아무것도 못하고 동탁의 폭정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192년, 동탁은 왕윤과 여포에게 살해당했고 헌제는 자유의 몸이 되는 듯했다.그런데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 곽사 등이 가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장안을 함락시키니 여포는 퇴각, 왕윤은 이각과 곽사에 의해 살해되었고, 헌제는 사악한 늑대들의 손에서 벗어난 후 교활한 승냥이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이복형 소제를 독살하는 데 관여한 이유의 죄를 물으려 시도했으나, 이각에게 저지당했다.
이각과 곽사는 자신들이 정권을 잡자 장안을 완전히 개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많던 장안 주민들이 거의 죽거나 도망쳐 몇명 남지 않은 상황에 처했고 장안 주민들은 동탁보다 더한 새끼라며 이각과 곽사를 까는 지경까지 갔다. 문무백관들 역시 다 이각, 곽사 무리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도망쳐서 동승을 포함해 5~6명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헌제는 자신의 명마를 팔아서 쌀을 사다가 직접 죽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줬는데 이를 적발한 이각과 곽사가 죽을 나눠주고 있는 헌제 앞에 난입해서 모조리 몰수해버렸다.
이각과 곽사는 권력을 차지한 이후 자신들이 서로 패권을 잡기 위해 분열하면서 서로 정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헌제는 이를 기회로 삼아 마침내 세는 나이로 15세가 된 195년에 장안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측근인 동승 등과 함께 1년여간 극도의 궁핍과 기아 그리고 이각과 곽사의 추격 속에서 생활하였고, 그 과정에서 양봉, 산적 출신인 한섬 등이 군을 이끌고 와 그들과 함께 낙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양봉과 한섬 등은 권력을 노려 동승을 공격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고, 낙양에 도착한 후 군을 이끌고 헌제를 맞이한 조조의 힘이 커지자 조조는 한섬과 양봉을 속이고 헌제를 허현으로 데리고 갔다. 이에 양봉과 한섬이 조조를 공격하나 패해 군세가 흩어진다. 이 사건이 바로 삼보의 난으로 이 일로 안 그래도 동탁 때문에 피폐해진 관중이 완전히 끝장나 버리고 말았다.
2.3. 조조의 꼭두각시
기껏 이각, 곽사 등의 억압자로부터 자유를 찾아 고생하며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낙양에 도착하였으나 조조에게 사실상 옹립된 헌제는 당시 그저 그런 일반적인 군웅 수준의 세력[15]을 가지고 있던 조조에게 황실의 보호자라는 강력한 정통성을 인정받는 명분적 무기를 제공하였고, 이는 조조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16] 이는 처음에는 일종의 윈윈 관계였으나[17] 조조의 권세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가면서 결국 일방적인 관계로 변질되게 된다. 처음의 조조는 거의 맨손이다시피한 채로 이각과 곽사로부터 탈출한 헌제를 옹립하면서 사재를 털어 헌제를 대신하면서 조정의 문무백관들에게 급여를 주는 등 뭔가 기반을 다져주는 것 같아 보였으나 이 과정에서 조조의 마음속에는 탐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헌제는 조조의 본거지인 허현[18]으로 이사간다. 연의에서는 헌제가 "낙양이 폐허가 되었고 내가 있는 허현이 아주 좋으니 그쪽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조조의 말에 이각, 곽사 때와 같은 꼴이 난다며 매우 근심해하지만, 거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천도하여 허현으로 가게 된 것으로 묘사되었고, 정사에서도 진동장군(鎭東將軍) 조조(曹操)가 스스로 영(領) 사례교위(司隸校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고 후에 헌제를 허현(許縣)으로 천도케하며 스스로 사공(司空)이 된 것으로 나온다. 허현은 이후 허도로 불리며 후한이 망할 때까지 도읍으로 남는다.[19]
조조의 손에 허도로 봉대된 이후 곧 헌제는 모든 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국가의 대소사는 사실상 조조가 모두 처리하게 되었고 당시 헌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조조가 가져온 문서에 인을 찍는 것뿐이었다. 관직 임명부터 각 제후들에 보내는 황명까지 모두 조조의 손을 거쳤으며 실제 당시 다른 군웅들 역시 헌제가 보낸 칙서는 곧 조조의 뜻으로 여기곤 했다. 연의에서는 사냥터에서 조조에게 활을 빌려주었다가 조조가 헌제의 활로 사슴을 쏘아 죽이자 백관들이 헌제가 맞춘줄 알고 칭송한다. 그러나 조조는 "아, 그거 제가 맞힌 건데요?" 하고 굴욕을 주거나, 칼찬 조조가 헌제 자리에 앉은 명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구석 특전을 받은 이후의 일이므로 매우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헌제가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헌제는 자신이 만 20세가 되는 200년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를 외치며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암살하려고 계획하지만[20][21] 일이 누설되어 실패한다. 이 일로 인해 헌제가 어릴 때부터 그를 모시던 동승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신들은 삼족에 걸쳐 파리처럼 죽어나갔으며[22] 임신하고 있던 동귀인[23]까지 헌제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다. 헌제 자신도 목숨이 위험한 판국이라 눈물만을 흘릴 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24]
유비 또한 이 거사에 가담했는데, 원소의 대군과 연대하고 스스로의 본거지인 서주의 군대 등을 동원해 조조를 토벌하려 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조조의 친정군에 서주를 뺏기고 부하들을 잃고 원소에게 의탁하게 된다.[25] 즉, 의대조 사건은 관도대전의 발발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한중왕 즉위와 관련하여 헌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도 "의대조 사건"과 관련하여 등장한다.[26]
조조는 원가를 멸망시키며 중원에서 가장 강한 제후가 되었고, 적벽대전 이후에도 이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헌제를 협박해 위공의 위를 받고 헌제를 구석에 박아놓은 채 스스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황제를 무시하게 된다. 이에 복 황후와 그 외척 세력이 황제 복권을 위해 조조 암살 계획을 세우다 들키자 조조는 황궁에 군사 500을 보내 궁벽을 무너뜨린다. 복 황후는 벽을 부수고 쳐들어온 조조군에게 산발이 된 채 머리를 잡혀 끌려나와 매맞아 죽었고 조신 200여 명이 살해당했으며, 헌제의 두 아들도 독살당했다. 이때 헌제는 앉아 떨고 울면서 살려달라는 복 황후에게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거늘."이라고 하였다. 이후 죽은 복 황후를 대신해 조조의 딸 조절(헌목황후)을 강제로 황후로 맞는 등 완전히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또한 조절의 자매들인 조헌과 조화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27]
2.4. 선양과 한나라 멸망
216년 위왕에 오른 조조가 220년 정월에 죽고 조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왕으로 즉위했다. 같은해 10월, 헌제는 조비의 협박으로 그에게 선양하게 되었다. 이때 헌목황후 조절이 옥새를 집어던지며 ‘너희는 망할 것이다’는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28] 이로써 4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한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위나라가 건국된다.선양으로 한나라는 멸망하고 위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산양공(山陽公)으로 봉해졌다. 다만 한때는 황제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의식을 이전과 같이 하고 위 황제에게 신하로서 예를 갖추지 않도록 허가하는 다소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조비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에게 있어선 최대한의 예우로 헌제를 대한 셈이지만,[29] 위안은 되지 않았을 듯하다. 해당 지방의 민간 전설에 따르면 산양공으로 봉해진 헌제는 봉지에서 백성들을 매우 어질게 대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어릴 때부터 황자 시절에는 하황후의 정략에 목숨이 위험했고 그 이후에는 제위에 올라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면서 바람 잘 날 없이 보낸 헌제에게는 조비에게 선양하고 산양공으로 보내던 말년이 헌제 일생에서 가장 평화롭던 때가 아니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2.5. 사망
흔히 조비에게 쫓겨나고 얼마 안 가 그한테 살해당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226년에 먼저 숨진 조비보다도 더 오래인 234년까지 살다가 53세[30]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당시 촉한에서는 헌제가 죽었다는 소문을 근거로 유비가 황제 자리에 올랐기에 위나라 입장에서는 헌제가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31] 명제 조예는 산양공의 시호를 추증하여 효헌황제(孝獻皇帝)라고 했으며, 한나라 황제의 예로 선릉에 안장했다.그런데 촉한에서는 헌제가 선양한 후 조비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바탕으로 220년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고, 221년 유비는 한나라의 계보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촉한을 건국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촉한의 단순 착각이었는지는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220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였으니, 촉한에서는 유비 또한 위나라를 맞상대하기 위해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중신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유비는 한나라 황제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까지 한나라라고 했다. 한나라 헌제가 아직 엄연히 살아 있는 상태에서 유비가 직접 칭제를 선언한다는 것은 스스로 건국의 명분을 짓밟는 무개념 행위였고, 나아가 한나라에 대한 반역이었다. 따라서 촉한 측에서는 헌제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 유비가 황제에 자리에 올랐으리라 여기는 경우도 많다.[32]
헌제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유비가 황제에 오를 명분을 가져다 주었으며, "꼭 헌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익주민들을 동원하는 데에도 좋은 구실이 되었다. 어쨌거나 당시 위나라에서도 소칙이나 조식이 헌제가 죽었다고 여기고 곡을 했으며, 이릉대전 당시 유비에게 보내는 제갈근의 편지에 '폐하께서는 관우와의 친분과 돌아가신 황제[33]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헌제를 고인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선양한 지 1~2년 사이에는 헌제가 정말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헛소문이 어느 정도는 퍼져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몰랐을 가능성은 없는데, 왜냐하면 224년 제갈량이 쓴 편지에 의하면 4년 후에도 촉 사람들은 아직도 이미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비록 아무리 허수아비였지만 엄연히 한의 황제였던 인물인 데다가 선양한 이후에도 봉토를 갖는 제후의 신분이었다. 조비가 헌제의 신병을 비밀리에 구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주요 인물의 행방을 4년 동안이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정보 전달이 느렸던 고대 사회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촉한에선 위나라 항장 출신 강유가 재상직까지 꿰차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착각이 촉한의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것에 도움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224년 제갈량이 썼다는 편지는 관리를 등용하기 위해 쓴 것이다.
의외로 후한의 황제 중에서는 2번째로 장수했고 재위 기간도 2번째로 길었다.[34] 그렇다고 헌제가 특별히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건 아니고 이 정도로 후한의 황권이 막장이어서 그렇다. 사실 헌제의 재위 기간은 31년 정도로 긴 편이었으나, 실질적 직접 통치 기간은 이각과 곽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 조조의 손에 권력을 잃을 때까지 극히 일부 기간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 기간에는 이미 군웅할거 기간이 개막한 상태라 전국에 그의 황명이 전달된 기간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다. 오죽하니 일개 잡적 나부랭이에 불과한 백파적에게 구조를 요청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을 정도로 헌제는 권력이 매우 허약했고 위상도 상당히 낮았다.
헌제는 초대 유방부터 따지면 29번째 황제이며, 유변을 포함한 소제 4명과 창읍왕, 정안공을 빼면 23번째가 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디스전으로 왕랑을 분사시킬 때 "저승에서 무슨 면목으로 한실의 스물네 분 황제를 뵈려 하느냐?"는 말을 하는데, 이는 유비를 포함한 것이다.[35] 헌제가 숨진 뒤 산양공의 작위는 장남 남양왕 유풍(劉馮)은 200년에 이미 요절해서 없었는 연고로 손자 유강(劉康)이 서진의 건국까지 보고 태강 6년(285년)에 사망할 때까지 51년을 이었고, 다시 유강의 아들 유근(劉瑾)이 태강 10년(289년)에 사망할 때까지 4년을 이었으며, 계속해서 유근의 아들 유추(劉秋)가 계승했으나, 영가 3년(309년)에 벌어진 영가의 난에 말려 피살되면서 일족이 흩어져 소멸하고 대도 끊어졌다.
3. 선양에 대한 평가
3.1. 긍정적
논(論)한다. 전(傳)에서 이르길 정(鼎, 왕업을 상징하는 세발 솥)이라는 기물은 비록 크기는 작으나 무거우므로 신(神)이 보배로이 여기어 함부로 빼앗아 옮길 수 없다 하였다. 위나라가 짊어지고 가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천운이 다한 귀결이로다!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미워한 지 오래되었으니 산양공을 어찌 꾸짖겠는가!
《후한서》 <효헌제기>
이미 한나라는 그가 즉위하기 전부터 망조가 들어있었고, 9살의 어린 나이에 꼭두각시 황제로 즉위하여 선양할 때까지 꼭두각시 신세였기 때문에 그가 뭘 해보기도 어려웠고 황제로서 자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그가 산양공으로서 매우 어진 통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다.《후한서》 <효헌제기>
계속되는 환란과 동탁, 조조 등의 집권, 전임 황제들의 실정으로 황제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동탁의 추대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제위에 오른 헌제의 정통성은 원소가 황제를 갈아치우려 할정도로 매우 낮았으며 실권도 사실상 전무했다. 그러나 헌제 본인이 무능하고 용렬한 군주였다면 그저 이런 상황에 순응했겠지만 분명히 한 황실을 살리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왕윤의 주도가 있긴 했지만 여포를 부려 동탁을 주살하고,[36] 비록 이각과 곽사에게 빼앗기긴 했으나 자신의 말을 팔아 쌀을 사서 백성들을 먹이려는 노력도 하고, 빈털터리로 장안을 탈출해 이각과 곽사를 견제한 후 조조와 손을 잡아 그 둘을 몰락시키거나, 나중엔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주살하고자 수차례 암살과 친위 쿠데타를 꾀하는 등 아득바득 후한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고난을 마다않고 장안을 탈출해 황제의 신분인데도 개고생을 하면서[37] 황실의 복권을 꿈꿔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파트너 선정이 그 야심만만한 조조였다는 점이 패착 아닌 패착. 다만 이때 헌제에게는 달리 파트너 선택권이 없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이각, 곽사 같은 인간 말종들 손아귀에 계속 있을 게 아니라면 일단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손을 잡긴 잡았어야 했는데, 당시 제후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갖춘 원소는 애초에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유우를 새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가 유우에게 거절당한 전력이 있고 본인도 황제가 되려는 마음을 품고 주부 경포를 시켜서 칭제를 권하는 자작극을 꾸미기 까지 했던 인물이라 뭔가를 기대하기가 불가능했다.[38]
유표와 유언도 마찬가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진 종친들이기에 칭제만 안 할 뿐 황제의 의복 깃발 등을 만들거나 황제의 권한인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등 헌제 입장에서는 피꺼솟 할 만한 짓을 여러번 했고 그 결과 아예 헌제 본인이 유표를 토벌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라 그들이 헌제를 도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유종이나 유장도 애비보다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 이라 뭔가를 기대할 상황도 아니었다.[39]
그나마 황족 중에서 헌제를 도울 수 있던 이는 유총이 있었지만 그도 딴마음을 먹고 있었지는 몰라도 그가 헌제가 접촉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유총마저도 197년에 원술에게 암살당하면서 황족들 중 충성심과 대의 하나로 헌제를 도울 만한 이는 유비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 역시 주변 제후들에 비해 세력이 너무 작은 탓에 헌제를 쉽게 도울 수가 없었다. 사실 헌제는 조조보다 앞서 백파적을 파트너로 삼았지만, 백파적의 한섬과 양봉은 그냥 도적에 불과한 위인으로, 헌제가 갖고 있는 포부 따윈 안중에도 없었으며 결국 개망나니처럼 굴다가 조조한테 헌제를 빼앗기고 심지어 조조한테 추격당하는 신세로까지 전락했다.
당시 제후들 중에 조조를 제외하면 오직 원술이나 손책만이 협천자가 되고 싶어했는데, 원술은 한때 친(親) 헌제파 처럼 보였으나 마일제 억류 사건 등으로 조정에 찍힌 후 결국 협천자 레이스에서 탈락했고 서주 정벌에 실패하자 될대로 되란 식으로 진짜 황제에 올라 말 그대로 역적이 되어버렸고 나중엔 완전히 말아먹고 원소에게 읍소하는 처지로 전락한 만큼 애초부터 뭔가를 기대할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또 다른 야심가 손책은 조조의 세력에 막혀 협천자를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조가 협천자를 행한 해가 196년인데 손책은 197~8년에야 원술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으며 손책 또한 조조 못지않은 야심가고 상당히 잔인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헌제가 손책에게 갔으면 적어도 복황후는 물론 임신한 동귀인까지 싸그리 죽이는 도살자 조조 밑에 있을 때보다야 나을 수는 있어도 실제 역사와 큰 차이는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물론 얼마 안 가서 손책은 죽고 손권이 뒤를 잇는 만큼 또 모를 일이다만 손권도 이궁의 변 등에서 알 수 있듯 한 성질하고 잔인한 면도 있으며 손책의 자리를 물려받은 후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느라 바빴기에 당장은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 역시 훗날 황제에 오르는 만큼 헌제가 마냥 편안하게 살았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답이 안 보일 정도로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헌제에게 호의적일 사람은 유우나 유비가 있었다.
유우는 헌제 입장에서 크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고 충성심도 입증되었으나 이미 공손찬에게 죽었다. 유비는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니 유비가 헌제를 받아들였다면 당연히 조조 밑에 있을 때 보다야 훨씬 낫고 서로에게 윈윈이겠으나 유비의 당시 근거지는 서주인데, 서주는 서주 대학살로 상황이 말이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신의 없기로 소문난 여포가 자신을 받아준 유비의 통수를 쳐서 서주를 삼키는 것도 모자라서 나중엔 직접 소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유비는 소패조차 떠나야 했다. 그랫니 협천자니 뭐니 할 상황이 되지 못했으고 이후에도 원소나 유표에게 의탁하는 등 한동안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던 처지라 헌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즉 조조 말고는 헌제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헌제를 도와줄 만한 인물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
헌제는 백성을 생각할 줄 알고 총명한 모습도 보여준 바가 있다. 본인이 가장 힘들 때에 자신보다 힘든 사람을 구휼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덕으로 통치한다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군주의 명분에 있어서는 떨어질 게 없었다. 흔히 암군으로 알려진 이들 가운데서 국정능력은 별개로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고, 아낌없이 구휼한 이들이 의외로 많다.[40]
헌제의 선양은 비교적 평화적이고 세련된 형태로 이루어진 편인데, 이는 헌제의 생존에 근거한다. 이는 그가 조비보다 장수하였으며 자손 대대로 공작을 물려받아 생활했던 사실로 알 수 있다. 실제로 유비가 칭제했을 때 헌제는 살아있었으며[41] 헌제는 제갈량과 같은 해에, 같은 나이에 서거했다. 선대 황제로서 일종의 예우를 받아 황제의 의관과 그 외 예식은 황제급으로 행하게 되었다. 또 위 황제에게 글을 올릴 때 "신(臣)"이란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유선이나 조환 등이 선양 혹은 폐위되었지만 전 황족으로써 제대로 대우를 받고 산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또한 복황후와 동귀인 역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조조가 미쳐서 잡아 죽인 건 아니고, 본인 혹은 본인의 아버지가 조조 암살을 기도하다 발각되었기 때문에 연루되어 죽은 것이다.
이에 대해 고대로부터 조비의 시대까지 선양한 황제가 살해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실존조차 불분명한 요순의 경우를 제외하면 고대로부터 조비의 시대까지 선양한 사례라고 해 봐야 전한 유자영과 왕망의 경우 하나, 그리고 굳이 추가하자면 연왕 쾌가 자지에게 선양한 사례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둘 다 살해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유자영은 선양할 당시 고작 4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위협이 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방에 유폐되어 교육은커녕 대화조차 거의 못 하고 바보처럼 살았다. 쾌의 경우에는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역시 유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큰 의미는 없지만 요의 경우에도 유폐되었다는 기록이 죽서기년에 전한다. 헌제처럼 제대로 대우를 받은 전례는 없었다.
물론 동승, 복완의 조조 암살 기도 등으로 헌제가 조씨 정권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비가 조조의 뒤를 잇자마자[42] 선양[43]을 받고 위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선양은 헌제의 자의적이고 적법한 절차를 거친 듯 꾸며놨을 뿐, 실제로는 강제성을 띠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왕조의 교체 과정에서 표면적인 모양새라도 좋게 유지한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헌제부터 조비로 이어지는 선양은 역시 평화로운 왕조 교체였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후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사마염의 위 → 진의 교체 역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두 사례를 모범적인 권력 승계로 여기는 사관도 있었다. 조환 역시 위나라 치하에서의 헌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44]
물론 신하가 군주를 배신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위, 진의 건국은 옛 왕조로부터 정당성을 물려받는 선양을 통해 이루어진 역성혁명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물론 옛 왕조라고 좋아서 권력을 넘겨줄 리야 없겠지만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질서를 건립하는 일을 무조건적으로 찬탈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 유송(劉宋)의 마지막 황제 순제 유준은 죽을 때 "다음 생에는 절대 황제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않기를!"이라고 부르짖었다.[45] 왕조 교체 과정에서 하도 유혈 사태가 난무하는 중국사에서 헌제의 무난한 선양 과정은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 이후의 훈훈한 선양은 후주(後周) 공제(恭帝)와 송태조 조광윤의 케이스가 있다.
이외 이민족 왕조의 경우에도 대체로 전 왕조의 구성원들을 살려주고 때로는 우대했다. 하지만 이쪽은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정통성을 갖고 형식상으로는 선양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사실상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 참고로 이런 조치는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계속되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도 그럭저럭 우대를 받으며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헌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한나라 황실의 권위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후한의 황제는 13명이 있었는데 이 중 35세를 넘어서까지 생존한 황제는 헌제를 포함하여 단 3명뿐이다. 후한 황제들의 평균 즉위 연령은 약 13세이며 사망 연령은 29세, 재위 기간은 12년 정도였다. 그나마 이건 초대 광무제와 2대 명제가 있기 때문이고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은 더욱 비참했다.
광무제와 명제를 제외하면 후한의 황제들은 평균적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황제에 올라 약 10년간 보위에 앉아 있다가 30세 정도가 되면 죽음을 맞았다.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유아 시절에 일단 보위에 앉았다가 사리를 분별할 법한 나이가 되면 제거당하는 소년 황제 시대가 100년간 이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중 2명은 확실하게 신하의 손에 죽었다. 황제가 제 구실을 못 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은 언제나 환관과 외척들의 정쟁으로 얼룩졌다. 즉, 헌제가 즉위할 당시에 이미 한나라 황실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라꼴이 막장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어서 사회 곳곳에서 한나라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대규모 농민 봉기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후한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이들을 진압한 후에는 그 과정에서 성장한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갔다. 이 시점에서 중앙의 권력은 더욱 위축되어 사실상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형주의 유표와 익주의 유언은 조공을 끊고 황제의 의식주를 사용하는 등 일찍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원술은 형주 북부 남양에서 황제를 자칭했으며, 기주의 원소는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 했다.[46]
옹, 양주는 184년, 187년에 이미 한수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을 정도로 중앙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고, 한수는 10년 후에 마등과 함께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47]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던 지방 군벌은 유우를 제외하면 표면적으로나마 우호적이었던 정권 초기의 조조와 남양주의 손책, 그리고 유비 정도였다. 하지만 조조는 이후 권신이 되어 그 아들이 한을 멸망시켰고, 요절한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도 훗날 칭제했으며, 유비도 결국은 칭제를 했다. 후한의 권위가 이 지경이 된 것이 헌제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이런 굴욕도 없다.
현대에 이르러 시민 사회가 성립되고 더 이상 전제 군주제적인 역사관에 얽메이지 않게 되면서 선양에 대한 시각도 점차 바뀌었다. 이를 군주에 대한 신하의 찬탈로 보는 시각에서 점차 권력이 교체되는 변혁으로 보는 관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의 후한은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가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제어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난세를 종식시킬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군주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으나 현대적 사관은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조비의 선양은 5호 16국이라는 난세로 이어졌다는 면에서 낮게 평가받지만, 명분은 행위 이전에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이지 선양 이후 백수십여 년간 벌어진 인들로 선양의 명분을 논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다.[48] 비록 선양을 받아 신(新) 왕조를 수립한 위나라와 진나라가 삼국 통일 후 금방 멸망하여, 조위의 선양이 오호십육국이라는 난세가 발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선양 당시 조비 치하의 위는 후한 말의 혼란기보다는 적어도 더 안정되어 있었고 국가의 기틀이 다져지고 있던 단계였다.
그리고 "조조가 난세를 열었다." 하는 말 또한 설득력이 없다. 5호 16국 시대는 조조 사후 80년도 더 지나서 시작되었다. 오히려 난세는 조조가 집권하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조조가 보여준 일련의 정책들은 후한 말의 혼란을 수습하고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즉, 한 황실의 권위 추락도, 중국의 난세도 이미 조조 이전에 시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진 이후의 혼란기까지 조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민간에서는 조조를 감정적으로 악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학계에서는 그 업적과 위진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자 역시 주나라가 이미 땅에 떨어지다 못해 맨틀에서 허우적거리던 춘추전국시대에 주나라로 돌아가자고 외친 인물이다. 그밖에도 당시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겨 원래대로 하자는 의견이 강경해지면 근본주의, 원리주의라 불리는 것이다. 한나라 정통주의를 너무 단순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
3.2. 부정적
헌제는 허현으로 도읍을 옮긴 후로부터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곁에서 모시는 숙위병(宿衛兵)[49]조차도 조조의 일당이거나 옛 인척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의랑 조언(趙彥)이 황제를 위하여 그에 대한 시책을 진술하여 말했으나, 조조의 미움을 받아 살해당했으며, 그 밖에 궁 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주륙을 당하였다. 나중에 조조가 이 일로 인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오니, 헌제가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대가 만약 능히 나를 보좌 할 수 있다면 두텁게 대해주고 그렇지 않다면 청컨대 은혜를 베풀어 나를 폐하시오."
조조가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바깥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옛 의례에 따르면, 삼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경우, 황제를 조견할 때에는 호분이 칼을 들고 그 양옆에 서도록 되어 있었다. 조조가 바깥으로 나와서 좌우를 돌아보니 식은땀이 등에 한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조가 그 후에는 감히 다시 조견을 청하지 않았다.
<후한서> 헌제복황후전
"그대가 만약 능히 나를 보좌 할 수 있다면 두텁게 대해주고 그렇지 않다면 청컨대 은혜를 베풀어 나를 폐하시오."
조조가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바깥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옛 의례에 따르면, 삼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경우, 황제를 조견할 때에는 호분이 칼을 들고 그 양옆에 서도록 되어 있었다. 조조가 바깥으로 나와서 좌우를 돌아보니 식은땀이 등에 한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조가 그 후에는 감히 다시 조견을 청하지 않았다.
<후한서> 헌제복황후전
대중매체에서 조조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과 달리 조조에게 일갈하는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 바도 있다. 다만 그 결과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고, 대세는 이미 새 왕조 개창에 기울어 결국 한나라는 망국을 맞이했다. 이런 면에서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고 믿을 만한 충신 한둘을 믿고 나라의 수명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기고 만 고려의 마지막 군주 공양왕과 같다고 볼 수 있겠다.
여하튼 자신의 뜻을 펼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동탁과 이각 & 곽사, 조조, 조비 등의 권신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한지라,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조조가 악인으로 취급받은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헌제가 암군이었다면 조조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그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검증도 안 된 상태에서 조조가 권력을 꿰찼으니 애매하게 된 것.
그나마 황제 시절의 모습을 보면 적어도 환제, 영제 같은 이들보다는 더 나은 개념인이었을 것으로 보이긴 한다. 물론 이 2명이 환령이라 엮일 정도로 개막장이기는 하다. 사재를 내어 시도한 구휼물자마저도 이각에게 강탈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삼보의 난 무렵 본인의 명마를 팔아 구휼을 시도했던 점을 보면 기본적으로 통치를 잘해볼 의지 자체는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아버지 영제의 실정이 이미 겹친 데다가, 의붓외숙부 하진이 지방의 군벌들을 입성시킨 채로 참살을 당하는 바람에 동탁이 실권을 장악했다.
동탁이 시행한 화폐정책이 실패하자 경제정책은 꼬였고 반동탁연합이 결성되었다. 낙양은 초토화되고 장안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지방통치는 와해되었다. 그나마 기대해볼 만했던 신하인 왕윤은 동탁의 잔당을 처리하는 문제에서 실패하였고, 이각과 곽사는 삼보의 난을 일으키는 등 본인이 뭘 해보기도 이전 이미 최악의 환경이었다. 오히려 서자에 차남으로 태어나 체계적인 제왕학을 교육받지 못한 채로 불과 만 8세에 즉위해 11세에 동탁을 주살, 14세에 삼보의 난의 참상을 겪어 가며 장안을 탈출한 것 등을 생각하면 본인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구휼 담당 관리의 비리를 본인의 능력으로 적발해 내기도 했고.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가 크다면 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선대인 영제 치세시기부터 십상시 → 동탁 → 이각과 곽사 → 조조 → 조비로 이어지면서 계속 강력한 군웅들에게 눌려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비운의 황제였다. 마지막 황제이지만 멸망의 책임은 거의 전무하다고 보는 게 적합하며, 후한의 군주로서는 분명 온 힘을 다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동탁이 사망했던 그 시점에서 한나라는 재건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간신이자 악적(惡敵)인 가후가 서량으로 야반도주하려던 이각과 곽사에게 관군과 맞서 싸워라 하는 얼척 집 나간 권유를 했고 그 권유를 이각과 곽사가 받아들여서 그들이 관군을 무찌르고 서영을 전사, 여포를 도주, 왕윤을 참수시키면서 한나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었다. 이후 이각과 곽사는 전횡이란 전횡을 일삼아 그 사람 많기로 유명한 대도시 장안을 전부 다 죽여서(또는 저 멀리로 도망가서) 허허벌판으로 만들었고[50] 이렇게 그 많던 문무백관이 몇 명 되지도 않게 아주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때 헌제가 천자임에도 얼마나 비참한 신세가 되었는지, 삼보의 난을 피해 도망칠 때 너무 세력이 없어서 백파적 나부랭이한테 구조요청을 해야 했다. 천자임에도 길도적 나부랭이한테 도와달라고 빌 정도로 헌제는 아예 세력이 없었다. 의붓 할아버지의 후광이 엄청나게 빵빵한 조조는 이렇게 쪼그라들어버린 헌제를 너무 쉽게 가로챈 것이다.
제대로 된 시대에 천자가 되었더라면 상당한 성군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헌제 유협이다. 하나 그가 즉위하던 시기는 이렇게 나라가 시궁창이 된 이후라 이건 누가 천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재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지경이다. 수도는 너무 많은 살육이 벌어져 반쯤 유령도시화 되었고 지방관이라는 놈들은 그 자리를 돈 주고 사다가 조병갑이 울고 갈 수준으로 백성을 탈탈 털어먹고 되파는 짓을 반복했으며[51] 황족이나 귀족이 참칭을 하는 지경까지 갔다. 특히 친척 어르신인 유표에게 철저히 버림받았으며 친족이라는 인간치고 헌제의 편에 서 준 사람이라고 해 봐야 유비와 유우 단 두 사람 뿐이었다. 이건 어떻게 봐도 아비규환 그 자체인 것이다. 한마디로 지옥을 이승 수준으로 되돌려 놓는 건데 그게 그렇게 쉬울 리는 없는 것이다.
중근세까지 중국에서는 위의 선양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현대 기준으로도 헌제의 양위는 위에서 말하는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양위'가 절대 아니었다. 선양의 밑밥이 깔리는 과정에서 헌제의 가족과 주변인들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엄청나게 죽어나갔다.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헌제귀인 동씨, 삼보의 난 때부터 20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효헌황후 복씨, 그 황후가 낳은 어린 자식들까지. 외척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유비를 비롯해 헌제와 관련된 인물들을 다 죽이려고 했지만 유비 정도나 원소 방향으로 도망가서 살았을 뿐 대부분 죽였다. 한마디로 조조는 헌제가 말을 걸 상대 자체를 없애버렸고 헌제 본인만 안 죽였을 뿐이다. 또한, 실제로 이 소위 "평화로운 선양" 덕분에 황제를 협박해 신하가 황제가 되는 일이 잦아지자 이런 행위의 기틀을 세운 조조가 간신의 대명사가 되어 망탁조의의 한 명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망탁조의라 매도하면서까지 이를 역적의 행위로 본 이유는 헌제가 살아있을 당시엔 한의 복권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예를 든 남북조시대 유송의 선양과 비교하면 안 되는 게 유송 때는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라 자체가 막장이었고 왕조의 역사도 50년 정도밖에 안 되는 단명 왕조였다. 당연히 백성의 유송에 대한 감정도 매우 차가웠고 유송이 망할 때 반발하는 이는 드물었다. 이 때문에 유유와 달리 소도성이 굳이 유송의 황족들을 몰살시킨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52]
하지만 헌제는 달랐다. 유방이 세운 한은 400년의 세월 동안 중국인들을 강하게 묶어놓았고[53] 황실의 힘이 약화되자 너도나도 황실 복권을 부르짖으며 자체적으로 반동탁연합이 일어났다. 동탁의 전횡으로 황실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나 혼란과 군벌의 피튀기는 난립은 낙양의 동쪽인 하북지방에만 한정되었고[54] 서량의 옹주와 양주, 서남의 익주와 교주, 중원의 형주는 겉으로나마 황실에 순응하며 조용했다.
조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조가 동탁을 추격하다 서영에게 할아버지 조등이 환관으로 재직하며 모아두었다가 넘겨준 권력과 군사를 모두 잃은 후, 막장이 되어 1천 명 정도 군사만을 가진 채 하내에서 원소에게 객장으로 있을 때 조조를 재기시켜준 것이 역적 동탁을 끝까지 치려 한 진정한 한의 충신이라며 조조를 찾아 몰려든 순욱 등의 모사들과 군병들이었다. 또한 비슷비슷한 일개 군벌 중 하나에 불과했던, 특히 원소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조조가 갑자기 하북의 천하이강이 된 것도 헌제를 허창으로 데려와 한실의 이름을 등에 업은 후부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조는 유유, 소도성, 소연, 진패선 등과는 다르다. 이들은 처음부터 썩을 대로 썩은 전 왕조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며 이를 토대로 자체적인 힘을 길러 군과 신과 백성들의 지지하에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선양을 받아 새 왕조를 창업했다. 하지만 조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왕조라는 소에 붙어 그의 피를 빨아들였다. 이 당시 한 왕조엔 아직도 한을 그리워하는 많은 충신이 있었다.
특히 조조가 위공에 오르려 하자 당시 조조군의 최고 중책이었던 순욱이 자살해버린 것은 당시 한나라에 충성하는 명사들이 많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55] 조조가 절대 쉽사리 헌제를 죽일 상황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거기에 한나라를 부흥하자는 논리나 반 조조 세력의 궐기는 한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계속 되었다. 당장 218년, 한실 부흥을 외치는 유비와 관우를 끌어들여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려 한 경기, 위황의 난으로 수많은 한나라 중신이 목숨을 잃었고, 그다음 해에는 관우가 쳐들어오자마자 예주, 사례, 심지어 업에서도 들고 일어나기 때문에... 이렇듯 한실의 저항은 후한이 완전히 망하는 전해인 219년까지 계속된다. 조씨 정권의 기반이 확실히 닦였다고 보려면 조비의 위왕 즉위 후 동생들을 정리하고 구품관인법으로 한나라 신하들까지 포섭하는 단계까지 가야했다. 이걸로 세습 왕조 창업이 가능하다는 걸 입증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소칙이나 조식은 한이 멸망하고 헌제가 죽임을 당했을 거로 생각하여 상복을 입고 곡을 하였고[56] 이런 소문이 촉에까지 퍼져 유비가 칭제하는 명분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마저도 헌제가 선양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이미 퍼져 있던 것이다. 거기에 소칙은 이렇게 곡을 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불쾌해 하는 조비에게 바른 소리를 하려다가 그대를 논한 게 아니라[57]는 부손의 말에 저지되기까지 했다. 조씨를 따르던 신하들조차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헌제를 말 그대로 죽이지만 않았다 뿐이지 조조는 헌제를 충분히 핍박하였고 상술된 것처럼 잘 대해준 것이 결단코 아니다. 당장 복 황후를 죽일 때 아직 미성년자일 헌제의 두 아들도 조조에게 독살당하여 죽었고, 동귀인은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죽었으며, 일가는 모조리 조조의 손에 멸족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딸들을 헌제에게 시집 보내[58] 조조는 스스로 국구가 되었다. 헌제 앞에서 칼을 차고다니는 등 헌제를 핍박한 사실이 정사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헌제의 가족들이 모조리 끌려가 참살당할 때 헌제에게 구명을 간청하자 헌제가 "내 목숨도 건사하기 힘드오."라고 말한 정사 기록이 남아있다.
모범적인 선양을 주장하는 근거는 단 하나 '헌제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는 것뿐인데, 그 헌제조차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해했다. 또 흔히 왕조 멸망기의 황제는 무능한 경우가 많지만, 헌제는 재위기간 내내 꼭두각시에 머물렀고 제대로 된 통치를 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애초에 황제로서 유능한 인물이었는지 그렇지 아니었는지를 모른다. 헌제에게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자신이 권력을 전횡했다는 점 역시 비판될 수 있다.
한편으로 백성에겐 종친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비를 따라 길을 나설 정도로 한 왕조를 재건해야 한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었고, 영웅 호걸들은 한의 이름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한실은 동탁의 손에 권위가 추락했으나, 지속될 수 있었고, 잘하면 다시 화려하게 복위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역량을 조조가 한의 보호자인 양 행세하며 몰래 빨아들이고 동귀인과 복 황후 등을 죽이고 헌제의 옆에서 황실의 권위를 천천히 망가뜨려가면서 최악의 형태로 한은 무너져내렸다. 물론 조조는 황제 자리에 직접 오르지 않고 실권자로 머물렀지만, 아들 조비가 황위를 찬탈하도록 판을 깔아놓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조조였다. 그 때문에 후세의 역사가들은 조비를 인간성의 측면에서는 까도 정치적 찬탈의 측면에서는 조비보다는 조조를 더 까는 것이다.
훗날 후조를 창건한 창업 군주 석륵이 조조와 사마의를 평가하며 "나는 조맹덕 부자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으면서 헌제를 죽이지 않은 것을 무리하게 옹호하지만, 불편한 진실은 고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양한 황제가 죽은 기록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비로서는 별다른 이유 없이 고대부터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전통을 깨고 헌제를 죽이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의 사관과는 달리 중국 사관은 아직도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는 위나라가 불과 몇 대 만에 망하고 이를 이은 진나라도 통일을 이룩한 후 불과 10여 년 만에 힘을 잃고 30여 년 만에 망한 데서 기반한다. 역성 혁명은 기본적으로 기존 국가가 하늘의 뜻을 잃어 더는 백성을 다스릴 힘이 없어 백성을 괴롭게 하니 신왕조를 세워 난세를 편안히 하겠다는 것이 골자인데. 위·진나라는 난세 종식에 완벽히 실패하여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 후 가장 난세의 시기인 오호십육국를 열었기에 정당성이 매우 떨어진다. 이러한 난세는 무려 589년까지 계속 되며, 중국 역사상 역성 혁명은 무수히 일어나왔지만. 이러한 장기간의 대난세를 연 것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이때가 유일하다. 한마디로 조조가 정권을 잡고 후에 조비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면에서 보면 성공한 역성혁명이나 백성 처지에서 보면 실패한 역성혁명이었기에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서진의 멸망은 조조 사후 거의 백 년 가까이 지나서인데 그 책임을 조조에게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명확히 해야 할 것은 그가 난세를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역성 혁명을 일으켰음에도 난세를 종식하는 데 실패하였고 그가 마련한 기반을 물려받은 아들인 조비가 건국한 왕조와 후계가 오히려 수습될 수도 있었던 난세를 조장했다는 점이다. 당장 남북조시대를 개판으로 만들었던 청담사상, 구품관인법, 문벌귀족의 발호는 조조가 창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조비가 창업한 조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남북조시대가 개판이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너도나도 나야말로 한나라의 (혹은 위 또는 진나라의) 정통 후계자라고 난립하였다는 점인데. 형식상으로나마 한황실이 살아있었다면 이러한 난립이 없었거나 최소한 축소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국내에서는 삼국지 연의의 영향으로 (다른 삼국지 군웅도 그러하지만) 조조와 위나라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위나라는 역대 역성혁명을 일으킨 왕조 중에서 중앙 집권의 정도나 국력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 되려 최하위에 머무르는 수준이었고, 중앙 집권 정도가 약했기에 조조 사후 30년도 채 안 되어, 고평릉 사변으로 말 그대로 사마의의 꼭두각시 정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위나라를 보면 거의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자주 반란이 일어나서 불과 3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도 신하에 의하여 2번이나 갈렸으며 요동을 공략하려는 고구려와 전쟁까지 치뤘다. 역대 이 정도로 불안했던 왕조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찾기 힘들 지경. 진나라의 조기 멸망은 이미 위나라 때부터 그 조짐이 강하게 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진나라도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 오를 병합한지 얼마 못 가 망하니 난세 종식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인이 자신을 한족이라고 칭하고, 조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워낙 이 헬게이트가 괴로웠던 시기 였기에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한나라를 그리워 했던 때에서 기인한다. 그래서인지 실제 이 난세를 겪지 않은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조조에 호의적인 의견도 많지만 중국에서는 재평가론이 일기 전까지 조조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편이었고 이후 중국 문학계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 조조의 재평가 이후로는 호의적으로 보는 의견과 맞물리는 편이다. 여담으로 국내에서는 유독 조조의 악역 이미지가 순전히 삼국지 연의 때문에 생긴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훨씬 이전부터 조조의 악역 이미지는 굳어 있었고, 나관중 또한 그런 성향을 그대로 따라 조조를 악역으로 그린 거지, 악역 이미지는 그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59]
또한, 당시의 백성은 조조가 살아 있을 때부터 조조를 부정적으로 여겼다. 흔히 조조의 나쁜 이미지는 후세에 성리학 때문에 만들어졌다거나 남송 때 촉나라에 동질감을 느껴서라고 착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조조가 벌인 학살[60], 가혹한 정책으로 조조의 이미지는 이미 바닥이었고 그 결과 장판파 전투 직전에 백성 10만 명이 조조를 피해 유비를 따라갔다. 바로 후대인 위진남북조 시대의 가십 등을 정리한 책인 《세설신어》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이미 매우 부정적으로 굳어 있다는 것은, 상층부라면 모를까 백성에게 조조의 이미지는 조조가 살아 있을 때도 매우 안 좋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남북조 초기에 노예에서 황제까지 오른 인생역전의 주인공인 석륵 또한 조조를 간교한 술책이나 부리는 자라는 식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61] 당장 남송이 되기 전인 북송 시대의 기록을 보면
민가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집안이 아주 가난하더라도 조금씩 돈을 모아 옛날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삼국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어 유현덕이 패하여 어려움에 처하면 눈물을 흘리다가, 조조가 패하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만인이 아주 즐거워한다.[62]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영향은 백 대를 지나도 끊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塗巷中小兒薄劣,其家所厭苦,輒與錢,令聚坐聽說古話。至說三國事,聞劉玄德敗,顰蹙有出涕者;聞曹操敗,即喜唱快。以是知君子小人之澤,百世不斬。)
소동파(蘇東坡)의 지림(志林) 권1, 도항소아청설삼국어(塗巷小兒聽說三國語)에서
소동파(蘇東坡)의 지림(志林) 권1, 도항소아청설삼국어(塗巷小兒聽說三國語)에서
이런 기록이 있는데 조조에 대한 백성의 민심은 남송이나 성리학과 전혀 관계 없이 이미 시궁창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면 백성과는 다르게 상층부는 시성인 두보가 자신의 벗 조패의 공을 기리는 시에서 "영웅 위 무제의 후손"이라고 칭찬하는 등 조조에 대한 시선이 일방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는데 당태종이 조조를 매우 싫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반반이었던 듯하다. 금나라의 침공으로 강남으로 밀려나 촉나라와 동질감을 느낀 남송 즈음부터 이미지가 나빠졌으며 명분에 죽고사는 성리학 때문에 조조는 완전히 간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또한, 조조의 적인 관우나 제갈량을 모시는 관제묘나 무후사 등이 이미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중국인들이 자신을 한족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도 송나라보다 훨씬 이전이다. 더불어 송나라 이후의 작품이지만 삼국지평화 같은 작품을 보면 조조는 훨씬 더 잔혹하고 찌질하게 나온다. 이런 삼국지평화의 과도하게 악역적인 조조적 이미지는 민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라고 하며, 이를 보면 백성에게 조조의 이미지는 삼국지연의 이전부터도 매우 안 좋았던 듯하다. 솔직히 서주 대학살만 놓고 봐도… 이를 볼 때 조조의 이미지는 적어도 백성에게는 오랜 시대에 걸쳐 매우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니 선양에 대한 인식도 자연스레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4. 가족 관계
- 후비
- 아들
5. 기타
- 촉한의 시조 유비와는 엄청나게 먼 친척인데, 촌수로 따지면 사실상 남이나 다를 바 없다.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 헌제는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인데 저 둘은 한경제의 아들이다. 하지만 전한 시대부터 갈라져 나온 셈이니 성씨만 같은 다른 계보와 같은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다.[69] 연의에선 유비가 조조의 부하 시절에 헌제는 그 먼 촌수를 따져서 결국 유비가 자신의 숙부에 해당된다는 것까지 파악해 유황숙이라 부르며 친애했으나 정사에선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딱히 나온 바가 없다.[70] 다만 동승의 의대조 사건 당시 동승이 유비를 끌어들인 사실을 봐도 그렇고 유비가 반조조 세력에 가깝다는 것은 일찌감치 파악했을 가능성은 있다. 유비측에서도 헌제와 반조조로 결탁하였으나 유비를 중심으로 하는 한의 중흥, 즉 촉한 건국과 조위 타도를 위하여 역시 헌제의 정통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 시호가 2개다. 위나라에서 올린 정식 시호는 효헌황제(孝獻皇帝)인데 대개 줄여서 헌제(獻帝)라고 부른다. 그리고 선양했을 때 촉한에서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고 착각해서 양위 소식을 접한 직후에 올린 시호는 효민황제(孝愍皇帝)로, 줄여서 민제(愍帝)라고 부른다. 촉한 정통론에 아주 철저한 사람들은 유협을 효헌황제나 헌제라고 부르지 않고 촉한에서 올린 효민황제, 약칭 민제를 썼고, 위진 정통론자들은 당연히 효민황제 또는 민제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헌(獻)이 시법에서는 좋은 의미로 쓰는 시호지만 한자의 의미가 바칠 헌자라서 뭔가 좀 그렇다. 그리고 실제 재위한 황제 중 이 글자를 시호로 쓰는 황제는 헌제가 유일하다.[71] 일반적으로 군주의 묘호나 시호에 쓰이는 헌은 '법 헌(憲)'이고, 조선 헌종의 경우에도 이 글자를 사용한다. 다만 고려 헌종은 獻을 쓰고 뜻도 헌제의 "헌"의 뜻과 다를 바가 없는 게 고려 헌종 역시 고려판 단종으로 숙부 숙종에게 찬탈당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여하간 민이든 헌이든 보통 마지막 군주에게 붙여주는 시호란 것이다.
- 인생 자체는 굉장히 험난했지만 유일한 행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내복. 복황후는 헌제의 애첩인 동귀인이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72] 살려달라고 간언을 한 대인배이고, 조황후는 다른 조씨 일족과 달리 헌제를 진심으로 위하고 지키고자 했다.[73] 만약 헌제가 평범한 평민으로 태어났다면 아내와 함께 평생을 사랑하며 사는 로맨틱한 삶을 살수 있었을지 모른다.
- 인과응보인지 헌제로부터 선양받고 건국한 조씨 황실도 똑같은 꼴을 당했다. 위나라 마지막 천자 조환 역시, 마치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한 것과 똑같이 조환도 사마염에게 선양했다. 그리고 그 사마염이 곽마가 난을 일으킨 것을 빌미로 손오로 진격하자 손오 천자 손호는 정말 허무할 정도로 쉽게 항복해, 사마염이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다.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헌제/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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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갈량과 생몰년이 동일하다.[2] 지금 기준은 물론 당시 기준으로 봐도 오래 살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후한의 역대 황제 중 50대를 넘긴 인물은 광무제와 헌제가 유이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단명했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평균 수명이 짧은 시대 중 하나였던 후한의 황제 치곤 나름 장수한 셈. 당장 헌제의 아버지인 영제도 손견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손견보다 3년 더 일찍 죽었다. 손견이 전투 중 사망해서 자연사가 아닌걸 감안하면 영제는 단명한 셈이다.[3] 위나라가 올린 시호. 황제에서 물러난 뒤에는 위나라로부터 산양공(山陽公)의 작위를 받았고, 사후에는 한나라 황제로 대우한 것. 헌제(獻帝)는 이 시호의 약칭이다.[4] 촉한에선 헌제의 양위 소식을 들었을 때 헌제가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시호를 올렸다. 민제(愍帝)는 이 시호의 약칭이다. 그러나 민제는 헌제가 살아있을때 올렸으므로 정식 시호는 아니다.[5] 폐위된 소제의 연호 광희(光熹)·소녕(昭寧)과 헌제의 첫 연호인 영한은 동탁 시절의 연호였다. 그래서 세 연호는 칙명에 따라 삭제되고 이 기간은 다음 연호인 중평이 쓰인 것으로 취급했다. 다음 주석도 참고할 것.[6] 앞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광희·소녕·영한의 연호가 삭제되고 그 기간은 중평의 연호로 표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9년은 중평 원년이 아니라 중평 6년으로 취급된다.[7] 촉한에서는 다음 연호인 연강을 인정하지 않아 221년까지 건안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유는 다음 주석을 참고할 것.[8] 조조가 죽자 이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연호를 바꿨다. 연호를 정하고 바꾸는 것은 천자의 소관인데, 일개 신하인 조조의 죽음을 이유로 연호를 바꿨으니 조조가 실질적으로는 황제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 때문에 촉한에서는 이 연호를 인정하지 않고 건안을 221년까지 사용했고, 이후 촉한의 황제에 즉위한 유비가 장무(章武)로 개원했다.[9] 한대 후궁의 직급 중 하나로 귀인 바로 다음이다.[10] 이와 마찬가지로 소제도 영제 소생의 황자가 자주 요절하자 민간 신앙에 따라 도인(道人) 사자묘의 집에서 양육되어 사후(史侯)라 불렸다.[11] 이전에도 두 명의 발해왕이 있었기에, 후한 시대에는 잠깐씩이나마 발해국이 존재했다. 한자는 주로 勃海國으로 쓰지만 勃海와 渤海는 같이 쓰이기 때문에 渤海國으로 써도 되는데 이러면 한국인이 흔히 아는 한국사의 발해와 같은 표기다. 이걸 가지고 발해는 한나라 때부터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낚시질도 할 수 있다. 지금의 지명으로 하면 창저우시는 일찍부터 중국이었다는 소리에 불과하니 놀라지 말자(현재 산둥반도와 요동반도에 둘러싸인 바다 이름이기도 하고).[12] 유우는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의 5대손이라 광무제의 후손이라는 점만 고려하면 정통성이 높았다.[13] 당시 기준으로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동탁에게 이용당했다는 이미지가 강한 데다가 그나마 정통성이 강한 유우가 황제에 오르기 거부하면서 다른 후보들은 정통성에서 너무 많이 밀렸던 거도 헌제의 정통성에 도전하기 어려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14] 문제는 원소, 원술이 당시 중국의 양대 세력이었고 여기에 유표와 유언까지 더하면 이들에게 필적할 만한 군벌은 공손찬, 조조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15] 헌제를 얻기 이전까지의 조조는 거대한 원소의 하북 세력에 붙어있던 여러 군웅 중 하나에 불과했다.[16] 그 당시의 여러 군웅들 중에 헌제를 옹립해야 자신이 살아남는다고 생각한 군웅은 조조와 손책, 이 둘 뿐이었다. 그래서 손책은 한 황실 조정을 습격하여 헌제를 조조로부터 구출해서 자신이 옹립하는 프로젝트를 수립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원소는 동탁 따위가 옹립한 놈은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며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시도했고, 유우만 승낙했다면 훨씬 우수한 명분과 권위를 얻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유우 본인이 원소의 제의를 스스로 고사하고 그냥 자신의 관할지인 유주에 계속 남은 것. 이후 유우는 공손찬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연히 원소 입장에선 이후에 헌제를 옹립하려고 하면 명분이 완전히 꼬여버리기 때문에 헌제를 옹립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17] 헌제는 동탁이 소제를 살해하고 앉힌 황제라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다른 제후들이 괜히 헌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오히려 은근히 다른 황족을 천자로 내세운 게 아니다. 동탁 사후 이각, 곽사의 난으로 근위 세력도 소멸하여 실권도 명분도 다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다른 제후들이 내세우는 황족에게 권위가 완전히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조조의 군사력을 의지하여 헌제 자신의 권위도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해졌다.[18] 허창이란 지명은 훗날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의 지명이다.[19]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국가들에서 괜히 진짜 절실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천도를 최대한 꺼린 게 아니다. 헌제와 조조의 사례와 같이 이런 식의 뜬금없는 천도가 강행될 때는 항상 그 이면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 물론 불과 6년 전에 아주 좋은 선례-동탁의 장안 천도 강행-도 있었다.[20] 《삼국지연의》의 의대조 사건이다.[21] 《정사》에서도 거의 비슷한 표현이다. 《선주전》에 따르면 동승이 유비에게 이르길, "황제(= 헌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고 했다.[22] 연의에서는 암살 모의를 누설한 노비 진경동은 이후 등장하지 않아 어떻게 되는지 나오지 않는데, 대부분의 2차 창작물에서는 조조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 노비를 죽인 이유는 한마디로 "주인을 무는 개는 살려둘 수 없다."는 것이다.[23] 삼국지연의에서 동귀비로 나오는 인물. 정사 삼국지에선 동귀인으로 나온다.[24] 물론 최악의 경우에도 헌제를 폐위시킨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임박한 원소와의 일전을 앞두고 상대 진영에 초대형 명분을 제공하는 일을 감히 단행하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25] 드라마 《신삼국》에도 같은 묘사가 나온다.[26] 자세한 내용은 한중왕표 문서로.[27] 조헌과 조화는 이후 어떻게 됐는지 전혀 안 나왔지만 조절은 계속해서 헌제의 아내로서 그를 따랐다.[28] 이 저주는 45년 후에 현실이 된다.[29] 참고로 후일 조위도 망한 뒤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30] 앞에서 말했듯 제갈량과 생몰년이 동일하다.[31] 헌제가 살아 있기만 해도 촉한의 명분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 괜히 나관중이 소설 삼국지에서 헌제를 곧바로 퇴장시킨 게 아니다. 만약 촉한이나 동오가 헌제의 복위를 명분으로 삼거나 헌제가 살아 있는 동안 중원통일이 이루어졌다면 헌제 본인의 입지가 부담스러워지긴 했을 것이다.[32] 전술했듯 복위를 주장하면 안 그래도 불안한 헌제의 목숨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에 무작정 복위만이 능사인 상황도 아니었다.[33] 한 헌제 유협을 말한다. 강남에서도 조비가 유협을 살해했으리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34] 둘 다 1위는 광무제다.[35] 다만 이 말을 할 때 헌제는 엄연히 아직도 이 세상 사람이었다는 게 개그 포인트다. 심지어 그 말을 꺼낸 제갈량 자신과 생몰년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니 당연지사다.[36] 이때 헌제는 고작 초등학교 고학년 나이였다. 그 어린 나이에 동탁처럼 잔인하고 병력까지 꽉 쥐고 있는 사람을 주살하는 명령을 내리는 게 웬만한 두뇌 회전과 담력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37] 역대 한 황제 중 유일하게 좁쌀밥을 먹어본 사람이다. 당시 좁쌀밥은 백미를 많이 섞은 지금의 좁쌀밥과는 달리 백미는 단 한 톨도 안 들어간, 순수 좁쌀만으로 만들어진 밥으로, 극빈층 말고는 아무도 먹지 않을 정도의 음식이었는데 헌제는 이각과 곽사의 행패를 피해 도망가던 도중 백성에게 이 좁쌀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이 정도로 헌제는 처지가 매우 빈곤한 지경까지 추락했는데 이각과 곽사가 싸그리 빼앗아갔기 때문이다.[38] 때문에 연의를 바탕으로한 창작물들에선 대놓고 원소가 황제인 헌제를 허수아비라며 까거나 구원 요청을 무시하거나 조조가 헌제를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할 때엔 권력 아이템 쯤으로 취급하는 등 처우가 영 좋지 않다.[39] 유종은 뭔가 해볼 기회도 의지도 없었고, 유장은 그를 익주목으로 추대한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서 궁지에 몰리거나 자신보다 세력도 작은 한중의 장로에게 핍박받는 등 무능의 극치였다. 이들은 헌제를 돕기는커녕 이들 본인부터 조조나 유비의 힘을 빌리고 싶어할 정도로 한심한 처지였고 결국 각각 조조와 유비에게 삼켜지고 만다. 그나마 둘 다 목숨만은 건진 게 위안.[40] 조선의 인조, 프랑스의 루이 16세 등. 물론 저 둘은 왕권이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실정을 해 암군이라 불리는 존재들이고, 헌제는 황실의 힘 자체가 증발해 뭔가 해볼 기회도 없었으므로 암군이라고 할 수 없다.[41] 나관중도 이게 걸렸는지 유비의 칭제에 앞서 헌제를 죽여 버린다. 실제로도 《촉서》 <두미전>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이 224년 두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비가 헌제를 죽였다." 하고 알리는 구절이 있다. 헌제는 234년까지 생존해 있었으므로 제갈량이 사실을 잘못 알고 있었거나, 유비의 칭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곡해했다는 말이 된다.[42] 220년 10월 28일[43] 같은 해인 220년[44] 조환은 265년에 양위하여, 303년까지 진류왕으로서 생존하였다.[45] 아이러니한 건 선양을 하고 물러난 황제를 죽이는 전통이 유송의 건국으로 시작된 점이다. 유유가 유송을 건국, 동진을 멸망시키면서 공제(恭帝) 사마덕문에게 선양을 받자마자 죽여버렸다. 이후 등극한 왕조들은 유유의 행동을 그대로 본받아 실행한 것일 뿐이다.[46] 헌제 역시 동탁의 괴뢰 정권에 추대되었다는 정통성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47] 이 사건에는 유언의 아들이 연루되어 사형당했다.[48] 그런 평가라면 선양의 의의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49] 궁궐에서 숙직하면서 지키는 병사.[50] 장안, 그리고 동탁이 초토화한 낙양이 얼마나 처참하게 폐허가 됐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두 도시를 모두 지배하에 두고 있던 조조가 실질적인 자신의 본거지를 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업은 당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긴 했지만 위치가 하북 지방에 치우쳐져 중국 통일을 노리는 세력이 근거지로 삼긴 모호한 곳이다. 두 도시가 수도로 기능하기 힘들 정도였기에 조조는 허도를 행정수도 격으로 두고 본인은 업에서 주로 업무를 보았다. 위나라는 조비가 선양을 받고 황제국이 된 이후에야 낙양으로 천도했다.[51] 심지어 이 짓거리를 자기 아버지가 생전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실시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런 탐관오리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에게 돈 주고 벼슬을 샀다는 것이다.[52] 유유는 동진의 공제 사마덕문이 만만치 않았고 동진의 치세가 고착되어 있어서 반발이 심했다. 따라서 동진 복권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세워진 유송이 워낙 막장이라서 소도성이 굳이 몰살하지 않아도 유송이 복권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53] 현대 중국에서도 주류 민족을 '한족(汉族)', 표준중국어를 '한어(汉语)', 글자는 한대에 정립되어 '한자(汉字)'라고 일컫는 상황이다.[54] 원소, 조조, 공손찬, 동탁, 여포, 도겸, 원술 등이 이 지방의 군벌들이었다.[55] 당시 조조 세력 내 순욱의 위치는 제갈량 이상이었다. 유비 세력 내에서 제갈량이 유비의 행보에 태클을 걸다 못해 자살해 버린 격. 자세한 건 순욱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56] 정사 삼국지 소칙전의 기록은 이렇고 주석 위략에는 조식의 경우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제위에 오르자 조조의 총애를 잃은 것을 한탄하면서 곡했다고 한다. 그럴 거면 상복은 왜 입었는지 의문이긴 하지만.[57] 조비는 조식의 소문만 들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얼마 후 조비에게 찍혀 좌천당하고 병이나 병사한 소칙인데 만약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더더욱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58] 황후와 빈[59] 오히려 나관중은 조조를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개성있는 악역으로 묘사해줬기에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를 기점으로 조조 재평가 바람도 불 수 있던 것이 가능했다.[60] 대표적으로 서주대학살이 있다.[61] 석륵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황제까지 올라온 자이기 때문에 당시 민심을 잘 반영하는 황제지만, 정작 석륵도 도덕성과 관련해서 조조를 비판할 자격은 없었다. 낙양에서 도망치는 피난민 10만 명을 몰살한 자가 석륵이다.[62] 유비는 자로 부르고 조조는 쌩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63] 헌제의 장남이며 200년에 요절. 따라서 헌제 사후 산양공의 작위는 헌제의 손자 유강이 이었다.[64] 국내의 일부 자료에서는 유풍을 헌목황후 소생으로 서술하기도 하지만, 유풍은 헌목황후가 입궁하기도 한참 전에 죽었으니 절대로 헌목황후 소생일 수 없다.[65] 216년 조조에게 살해당한 낭야왕 유희와 이름자가 일치하지만, 동명이인으로 별개의 인물이다. 헌제의 아들인 유희는 212년 제음왕으로 봉해졌지만, 낭야왕 유희는 11년간 재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낭야왕 유희는 황실 종친인 듯하다.[66] 국내 일부 자료에서 유의를 헌목황후 소생으로 서술하는 것은 오류이다. 유의는 212년 산양왕으로 봉해졌기에 214년 귀인이 된 헌목황후 소생일 가능성이 없다.[67] 조비의 후궁이 된 헌제의 두 딸은 조절(헌목황후)의 소생일 가능성이 상당히 희박하다. 조절의 입궁 시기(214년 입궁, 215년 황후 책봉)와 조비의 재위 기간(220~226)을 고려할 때, 조절의 딸이 조비가 재위하는 동안 그의 후궁이 되었다고 생각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리다(조절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귀인으로 봉해지고 나서도 입궁을 1년간 미뤘었다). 애초에 나이를 따지기 이전에 3촌 근친혼이다. 따라서 조비의 후궁이 된 헌제의 두 딸은 조절의 소생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편이 합리적이다.[68] 유만의 경우에는 헌목황후 소생일 가능성이 그렇게까지 희박하진 않다. 물론 짐작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니 그저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69] 참고로 유우와 유엽은 광무제의 후손으로 유우는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 유엽은 광무제의 7남 부풍질왕 유연의 후손이다. 더불어 헌제는 광무제의 4남 효명황제 유장의 후손이라 유우와 유엽은 유비보다 9대 정도 더 황실의 직계 후손으로 정통에 가까웠다.[70] 유승 이후 유비까지 계보가 어떻게 되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둘 사이의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건 불가능하지만, 헌제의 경우 광무제 유수의 7대손이고 광무제는 유발의 5대손이니 헌제는 유발의 12대손이란 얘기가 된다. 한경제로부터 따지면 13대손. 형제지간이었던 유발과 유승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고 유발계와 유승계의 항렬 진행 속도가 비슷하다고 가정해 헌제의 아버지뻘인 유비가 한 항렬 위라고 친다면 둘은 25촌 관계가 된다. 같은 항렬이면 26촌으로, 관계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성만 같은 생판 남이다. 여담으로 위에 언급된 유우는 헌제와 13촌 사이이고 한 항렬 높은데, 연의에서 나온 '혈연이라고 힘들 정도로 먼 친척이지만 한 항렬 높은 숙부뻘'인 유황숙이라는 설정은 유우라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물론 유비건 유우건 유황숙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은 없다.[71] 추존황제까지 범위를 넓혀보면 명나라의 추존 황제인 명예종 주우원도 獻을 시호로 쓰지만, 이 경우는 추존 이전에 친왕으로서 이 시호를 받은 것을 황제 추존 후에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약칭 시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쁜 의도로 내린 시호도 아니고, 시호를 내린 선제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이루어진 결정으로 생각된다.[72] 동승을 위시한 동귀인의 외가가 조조를 처리할 계획을 꾸미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관련자였던 동귀인도 함께 죽게 된 것. 참고로 동귀인은 이 때 임신 상태였는데, 조조는 그 당시에도 웬만해선 죄인일지라도 죽이지 않았던 임산부(동귀인)를 죽이는 냉혹한 처사를 보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웬만한 죄인 처벌 상황에서도 임산부의 경우 최소 아이를 출산하게 해주고 죽이거나 살려주던 식으로 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73] 조비의 사자들이 옥새를 요구하자 끝까지 내놓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강요에 못 이겨 옥새를 내던지며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라 저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조의 딸이기보다 후한의 황후이기를 택했던 사람. 그래서 후한 멸망으로부터 40년, 헌제 사망으로부터 26년이나 뒤인 260년에 죽었지만 장례도 후한의 예법에 따라 치렀다고 한다. 여담으로 조 황후가 죽을 때인 260년은 조모가 사마소에게 시해당하는 등 조위의 망조가 본격적으로 가속화되었던 해였다. 아버지와 오빠가 남편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가 생전에 벌써 망조가 드는 것을 보고 조 황후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