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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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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am_Gwok_262_CE.png
262년의 중국. 지도의 초록색 영토가 촉한.
별칭촉한(蜀漢)[1], 계한(季漢)
존속기간221년 ~ 263년 (2대 43년간)
위치중국 서남부
수도성도
인구1,040,000명[2]
정치체제전제군주제
국성(劉)
국가원수황제
주요 황제소열제 유비 ,(221~223),
회제 유선 ,(223~263),
주요 재상제갈량,(221~234),
장완,(234~246),
비의,(246~253),
진지,(253~258),
동궐[3],(258~263),
강유[4],(253~263),
언어상고 중국어[5], 파촉어
문자한자
종교유교, 도교, 중국 토속 종교, 불교[6]
종족한족, 파촉인[7]
통화직백전(直白錢), 직백오수전[8], 오수전
성립 이전후한
멸망 이후
현재 국가중국

1. 개요2. 역사
2.1. 군사
2.1.1. 촉한군의 성격2.1.2. 촉한의 지휘관들2.1.3. 촉한 후기의 군사정책2.1.4. 촉한의 군사적 역량
2.2. 정치
2.2.1. 정치이념2.2.2. 정치특징
2.3. 경제2.4. 중앙집권화 / 이민족 유화
3. 역대 황제4. 계보5. 여담
5.1. 명칭5.2. 촉한정통론5.3. 촉한의 작위를 봉한 대신들5.4. 창작물5.5. 쓰촨성의 관광 유산

1. 개요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이자 스스로 후한의 계승을 표방하였던 국가.

정식 국호는 한(漢)이나, 전후한과의 구분을 위해 여러 연구 서적이나 매체에서는 주로 촉한(蜀漢) 또는 지역 이름을 따 촉(蜀)이라 부른다. 유비후한 말년에 세웠다는 뜻으로 계한(季漢)이라고도 불린다.

수도는 성도. 영토는 한나라 행정구역상의 익주와 그 주변 지역으로 오늘날의 충칭시, 쓰촨성 전체, 윈난성 대부분, 구이저우성 전체, 산시성간쑤성 지역 일부를 포함한다. 삼국 중 가장 작은 나라였고 실제로 후한 13주 중 익주 1개주만 온전히 가졌지만 그래도 이 익주가 진한시대에 상당히 개발되고 번영한 주였기 때문에, 후한 13주 중 무려 10개주 가량을 차지한 위나라와의 인구 차이는 5배 정도였다. 여기에 방어하기 좋은 지형, 위나라와 달리 주변 이민족 제어에 성공해 북벌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삼국간의 정립 구도를 만들었다.

삼국지 매니아들에게는 하북의 거대한 경제체제와 물량으로 대표되는 위, 장강을 낀 수전 특화로 기억되는 오와 비교되어 산악지형을 위시한 험지 전투에 특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9]

2. 역사

208년 적벽대전
214년 유비, 파촉 점거.
218-219년 한중 공방전
219년 유비,한중왕으로 즉위. / 형주 공방전으로 형주 상실
221년 한 멸망 이후 유비, 황제 즉위. / 한나라 재건 선포.
222년 이릉대전
225년 남만 정벌
227-234년 제갈량의 북벌
244년 낙곡대전
253-262년 강유의 북벌
263년 위나라의 침공으로 멸망.

2.1. 군사

2.1.1. 촉한군의 성격

유비가 살아 생전에 워낙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기록이 적지만, 안정된 후에는 기록이 늘어나 많아지는데 이것들만 봐도 촉한이 비록 세력은 약하지만 결코 얕볼 수는 없는 국가였음을 시사한다. 전반적으로 촉한 정권 자체가 군벌의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나라의 기조를 한실의 부흥으로 정했기에 촉한은 끊임없이 대외팽창을 꾀했다.[10] 촉한의 한실부흥 정책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끝임없이 이어졌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열망이 줄어들기는 하나 촉한의 주요 대외 정책으로 작용하였다, 오나라와의 동맹으로 오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여 정통성에 대해 일정 정도 훼손을 입은 240년대 글인 계한보신찬을 봐도 여전히 자신들이 진정한 한의 계승자이며 위나라를 멸해야 한다는 인식이 촉한인들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을을 알 수 있다.
옛날 문왕[11]은 덕행을 노래했고 무왕(武王)은 흥성함을 노래했다. 무릇 절대 군주는 몸을 세워 도의(道)를 행하는데, 오직 한 시대뿐만 아니라 또 다음 왕조의 기초를 세우는 단서를 열어 후세까지 빛을 발하는 자이다. 우리 중한[12] 말기부터 왕실은 권력을 잃고, 영웅호걸이 함께 일어나 전쟁이 빈번하여 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도탄의 고통 속으로 빠졌다. 그 결과 선제(世主)께서는 이 일을 개탄하며 걱정하셨다. 연(燕), 대(代) 땅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인의의 명성이 현저했고, 제(齊), 노(魯)에 온 이후[13]로는 풍모가 널리 퍼졌으며, 형주(荊), 영(郢) 땅에서 창업했을 때는 군주와 신하의 마음이 합쳐졌고, 머리를 돌려 오(吳)와 월(越) 땅을 원조했을 때는 현인이든 어리석은 자든 간에 모두 그의 명성을 우러렀으며, 파(巴), 촉(蜀)에서 위세를 떨쳤을 때는 천하가 진동되었고, 용(庸), 한(漢)에서 병사를 일으켰을 때[14]는 강대한 적군은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때문에 우리 군주는 고제의 창업을 계속 이어 대한(皇漢)의 종묘 제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간사하고 흉악한 적에 대해서는 아직 천벌을 가하지 못하여, 주무왕이 맹진(孟津)에서 부대를 결합한 것처럼, 또 은의 탕왕이 하의 걸왕(條)을 멸하지 못해 명조의 전투를 기다린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의 복록에는 끝이 있어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엄습했다. 천하가 통일로 달려가고 각 국가가 한 몸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해서는 당시 탁월한 인사가 천하를 보조하며 영웅다운 군주를 추대하고, 영명한 덕행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인사들은 많아 볼 만하다. 그래서 이들의 아름다운 풍모를 모두 서술하여 후세 사람의 이목을 감동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후략)
계한보신찬 서문 중에서

유비가 형주에 보냈던 세월까지는 고생이 많아 그에 대한 기록인 선주전을 비롯한 다른 문헌들을 보면 "흩어졌던 사병들이 다시 모였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예를 들어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한 뒤 한 달쯤 지나 흩어져 달아났다는 병사들이 다시 모였다."는 정사의 기록이 나온다. 이를 바탕으로 영웅 삼국지는 촉의 군사는 소수 강병에 서바이벌 스페셜 리스트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유비가 이끈 병사는 다른 세력에서 빌려온 군을 그대로 증여받거나(혹은 탈취하거나) 특정 세력의 잔존병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오환 기병 등 이민족 군사를 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유비의 휘하에 '촉군'으로 일반화할 만한 군이 출현한 시점은 유비가 동맹을 져버린 유장을 치고 그의 군대 일부를 손에 넣음으로써 그때까지 유비 전력의 대다수였던 형주의 유표 잔존 군세와 촉의 군세가 결합된 시기라고 보는 것이 옳은데 그렇다면 그전까지 정말 소수의 직할/잔존 병력 외에는 상황에 따라 구성이 바뀌는 혼성 부대로 안정적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 버텼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유비군이 전투력은 몰라도 최소한 생존성 및 부대 재편성, 교육 면에서는 확실히 뛰어난 군대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파일:D79QPK_VsAA2dbG.jpg
제갈량의 북벌 당시 촉한병사

유비가 입촉한 이후 촉한의 주력은 보병이었고 기병이 그 다음이었다. 남중은 예로부터 의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에 남중을 평정하고 나선 기병전력도 어느정도 충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나라의 대규모 기병대와 맞설 전력까진 아닌 환경이라 팔진도 등 보병 병법의 발전으로 이를 파훼하려고 노력했다. 촉한은 소수민족 부대도 편성했는데 종병(賨兵), 수병(叟兵), 청강병(青羌兵) 등 촉한 경내의 종족, 수족, 강족 등을 편성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대는 왕평이 운영했던 남중 출신 정예부대 무당비군(無當飛軍) 오부(五部)일 것이다.

촉한은 일반 편호(남녀구) 이외 兵(군사), 吏(관리)를 따로 기록하였는데, 중국 현대사학자 백수이(白寿彝, 1909~2000)의 <중국통사中国通史>[15]에서는 촉한의 사민부에 나오는 대갑장사(帶甲將士)를 세병제(병호제,사가제)를 전제로 한 병적상의 수치가 아니라 당시 상비병의 숫자로 간주하고, 촉한에서는 세병제(병호제,사가제)가 아닌 한나라 때 징병제가 그대로 실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촉한은 진한시대에 비해 병사들에게 보급할 방호구, 병장기류와 운송수단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 제갈량과 촉한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포원은 야금술을 발전시켜 튼튼한 갑옷투구, 신도(神刀)라 불리는 갑옷과 투구를 가를 정도의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제갈량은 원융노라고 불리는 십시연노를 개발한다. 이는 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인, 한 번에 10발씩 쏘는, 현대 기준으로 말하면 기관총 같은 무기에 속한다. 또한 촉지 제갈량전에서는 제갈량이 병법을 미루어 넓히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군사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그 운용은 반드시 연노와 배합되었다고 한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부릉의 힘좋은 병사 3천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고 한다. 제갈량이 보급의 편리를 위해 운송용 수레 목우유마를 개발한 것도 유명하다.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군은 '대오가 질서정연하고 상벌이 엄숙하고 밝았다'라고 한다. 이런 엄격한 군기와 고양된 사기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며,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훈련의 결과다. 또한 촉한군은 '무기를 날카롭게 갈고, 무예를 강습하며 뒷날을 도모하니, 병사들은 간결하게 정련되었다'고 한다. 즉 제갈량은 촉군을 정예한 강군으로 육성했다는 것이다. 진나라 사람인 원준은 제갈량의 촉군이 계속 전투할 수 있었던 비결로 "제갈량의 법령이 밝았고, 상벌이 믿음을 주었으며, 사졸이 명을 바쳐 험난함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계속해서 싸울수 있었다."라고 했다. 또 원자에 따르면 제갈량이 평소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측간, 울타리, 요새와 보루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으니,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최고 상태로 유지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제갈량의 수완과 배려의 일환으로 봄이 옳다.

2.1.2. 촉한의 지휘관들

정사에 나오는 촉한 주요 장수들의 전적에 대한 고찰하는 글에서도 왕평, 비의, 강유, 관우, 위연, 오의, 오반, 조운, 마초 등 촉한 장수들을 언급하며 촉한 장수들의 전반적인 군사적 능력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지휘관들에 대해 적어보면 파란만장한 1세대(오호대장군 등)에 비해 2세대는 이릉대전에서 대부분 죽어버렸고, 제갈량이 이끄는 소수의 2세대와 3세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들 상당한 능력을 지녔다. 사실 1세대의 인물들이 워낙 대단한지라 관우와 장비 이후 무용이 높은 무장들은 모조리 관우 또는 장비와 비교되었을 정도다. 이전에는 한고제와 싸운 인간흉기와 비교했다. 특히 맹장을 가리켜 관우, 장비(이른바 관장지용)에 비견하는 것은 남북조시대에 자주 보인다. 더 나아가서 양대안이라든가 남조 유송의 명장인 단도제의 부장인 고진지와 설융 등도 좋은 예다.

1세대 장수들의 기록이 상당히 무협지스럽다. 관우는 조조에게 의탁하던 도중 관도대전 당시 1만 명의 군사 속에 뛰어들어 안량을 베어낸다던가, 또는 장비는 장판파에서 5000명의 정예 기병을 대동한 조조군을 10명의 병사로 막아냈다는 기록이나[16]. 이러한 기록들은 놀랍게도 연의를 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내용만이 아니라 정사의 기록들이다. 아무래도 군세가 많이 약했던 만큼 상장급들도 일선에서 피 묻히며 싸울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대규모 회전을 많이 경험한 탓에 전략가, 지휘관 타입이 많은 위나라나, 소규모 유격전에 특화된 오나라와는 또 다른 차이점. 다만 1세대 장수들 중에서 장비와 위연을 제외하면 지휘관으로서 커리어가 훌륭했던 인물이 적다는 것이 단점. 관우의 경우 형주의 패배 때문에 패배가 부각이 되며[17] 마초는 귀순 후 활약이 귀순 전에 비하면 미미하며 조운의 경우 커리어 자체가 지휘관 쪽을 많이 맡았기보단 유비, 제갈량의 친위 대장 성격이 강하고, 황충은 기록이 적다.[18]

그 외 2, 3세대 장수들 중에도 1세대나 위나라의 명장들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상당했다. 강유, 마충, 장억, 왕평, 장익, 요화, 상총, 곽익 등의 좋은 장수들이 있었고 촉 멸망 후에도 나헌은 2천 군세만으로 오나라의 군세를 반년간 막아냈다. 이때 오나라 최후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육항도 3만 병력을 이끌고 왔지만 성을 넘지 못했다. 즉, 2세대부터 좋은 지휘관들은 배출되었지만 쪽수가 안 돼서 고생이 많았다.[19]

여담으로 항장의 임용이 두드러진 국가이기도 했다. 촉한에 투항해 온 무장들의 행보를 보면
  • 왕평 - 진북대장군에 올라 한중 수비
  • 곽순 - 좌장군까지 올랐다가 역대급 통수 치고 먹튀
  • 하후패 - 거기장군에 오름
  • 마초 - 표기장군, 양주목, 태향후까지 오름
  • 황충 - 후장군에 오름(당시 전장군 - 관우, 후장군 - 황충, 좌장군 마초, 우장군 장비)
  • 강유 - 대장군, 녹상서사에 오름

특히 강유의 승진이 두드러지는데 그가 항장 출신이라서 견제를 받았다면 애초에 대장군에 녹상서사라는 어마어마한 위치까지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대장군에 오른 250년대이면 강유가 투항한지 이미 20년이 넘어가던 시점. 아무리 인재들이 죽어나가서 강유만한 인재가 없다고는 하지만, 강유는 이미 왕평, 마충, 장억 등의 인재들이 살아있었을 때부터 별 탈 없이 계속 승진했던 인물이다.

2.1.3. 촉한 후기의 군사정책

실질적인 마지막 재상이었던 비의 사후 진지가 정권을 잡으며 조금씩 무너져 가더니 진지 사후 유선환관 황호를 총애하면서 국가의 체계는 붕괴되기 시작했고,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결국 위에게 멸망당한다.

이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황호 & 유선에 책임을 두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는 의견 또한 있는데, 비의 사후 군정의 1인자 소임을 해야 할 것으로 기대 받았던 강유가 촉내부의 정치적 기반을 다잡지 못하고 안정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북벌을 시도했던 것 또한 촉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비의가 암살당하기 직전 비의는 유선으로부터 개부를 허락받고 한수 일대로 출병했고, 마침 20만 대군을 모아 움직이려 하던 제갈각과의 공동 북벌의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비의가 곽순한테 암살당하자 후계자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하는데, 그러한 일은 무시당하여 실행되지 못하였다. 한편 오의 제갈각은 촉에서 장억 등이 우려하는 가운데서도 꿋꿋히 북벌을 실행시키면서 강유에게 출병을 종용했다.[20] 강유도 어쩔 수 없이 오나라에 호응해 북벌을 나섰지만 진태의 방어와 오가 신성에서 위나라에게 막히면서 곧바로 퇴각한 전력 때문에 권력도 완전히 이어받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강유의 실책으로 보기에도 어려운 정황도 크다. 애당초 강유의 직책인 녹상서사로는 아예 유선이 그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한 그가 거의 반역에 가까운 행위를 해야만 촉의 내정을 장악 가능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촉한은 조비 이후 다시 호족 우대책으로 돌아선 조위라든지 아예 정권 태생이 호족 연합 정권이라 병권과 행정권까지 호족들이 분할하다시피하던 동오에 비해서 황제권이 강한 정권이었다. 애당초 황제의 권력에 철저히 기반한 환관이 국정을 농단한다는 자체가 강력한 황권 확립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을 가진 유선이 그리 미욱한 인물이 아니었던게 촉한은 유비 유선 양대에 걸쳐 외척이 딱히 요직이라고 볼 수 있는 자리에 오른 적이 없는 등 외척의 발호가 없었다. 그것은 유선이 천하를 다툴 자질이 부족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활용하고 유지하는데는 나름대로 머리를 쓴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강유의 북벌은 전략적 무리수로만은 볼 수 없다. 우선 조비 이후 북방의 상황은 매우 피폐한 상황이 큰 기회였다는 점을 들어볼 수 있다. 안 그래도 황건난 이후 오랜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은 지역인데 가뭄과 흉년이 거듭되고 조예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잦은 궁궐공사 등 조세와 부역이 가중되어 사람들이 토지를 떠나 유랑하는 등 당대 조위의 실정에 대해서 기록들은 대체로 피폐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아무리 기본적인 체급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촉한의 익주는 후한 시절부터 인구와 경제력으로 이미 후한의 웬만한 주 3개는 합쳐놓은 규모였으며 이는 후한의 여러 주 중에서 단연 가장 큰 규모였다.[21] 게다가 익주 지역은 황건난의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았고 중원 지역에 비해 전화가 적었으며 외부에서 중원 각지의 유이민들이 전란을 피해 유입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갈량의 선정과 정비로 만만치 않은 국력을 뽑아낼 수 있었고 조위, 동오와 달리 이민족을 적극 포섭하는데 성공하여 그들의 세력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역시 후한의 주 중에서 익주 다음으로 인구와 경제력이 컸던 형주와 양주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던 동오와의 협공이 가능하다면, 강유의 처지에서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어차피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는한 내정 평정이 불가능하고 촉의 국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잘 다져져 있는데다가 조위의 실정이 피폐해져 있으면서 동오와 협공이 가능했던 그 당시야말로 호기였을지 모른다.

사실 이 부분은 촉한 뿐 아니라 한나라 말기에서 송나라 성립 이전까지 여러 번 등장한 촉 지역에 근거한 지방정권 전반이 가지는 한계에 가깝다. 인구와 생산력이 충실하고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 덕분에 난세마다 이 지역을 근거로 한 독립세력이 꼭 들어서기는 하였으나, 당대까지 중국의 문화적, 경제적, 인구적 중심은 어디까지나 중원 지역이었고, 따라서 중원 지역의 상황이 안정된다면 파촉 한 지역의 인구와 생산력만으로는 중원에 기반한 세력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고, 또한 방어에 유리한(=고립된) 지역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영향력과 영역을 확장하기도 어려웠던 것. 즉, 가만히 있으면 외부의 압력을 견뎌내기에 유리하지만 그렇게 계속가다가 제풀에 멸망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결국 제갈량이나 강유의 북벌은 국력을 소모하는 도박적 군사 행동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런 도박이라도 하지 않으면 완만한 고립과 고사 후 침공을 피하기 힘든 입장이었다는 것. 후일 오대십국시대의 후촉이 그렇게 망했듯이 말이다.

아무리 천혜의 지형이 있어도 결국 방어하는건 사람이다. 촉 이전에도 이후에도 익주에 웅거했다가 한중-영안 방면에서 쳐들어오는 중원세력에게 끝까지 버틴 왕조, 세력은 드물다. 성공한 사람은 기껏해서 한중에 몇달 있지도 않던 한고제 정도. 제갈량, 강유 등이 괜히 량주, 관중일대로 기를쓰고 나간게 아니며 세력차이가 너무 커지면 결국 버티기 힘들다. 아무리 방어시스템을 갖추어도 항상 그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갈수 있느냐도 촉의 인재들이 우려한 부분일것이다. 실제로 촉한의 멸망도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무 문제없이 막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나라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자 어처구니 없이 등애에 의해 돌파당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지형을 통한 방어전략은 정상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이행하는 것이므로 '방어만 하다 후일을 도모하자'이것은 애초에 전략 목표로 설정되지도 않았을것이며, 우리가 생각하는것 보다는 촉의 천협이 그다지 안정감있는(어디까지나 촉인들 입장에서)요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분열된 상태도 아니고 중원을 장악한 강력한 왕조가 바로 위에 건재한다는것을 생각하면 익주에만 안주할 수 없는건 지극히 당연하며 적어도 위나라 하북 세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장안, 관중 평야 확보는 촉한에 필수적인 루트였다.[22] 장안, 낙양으로 다이렉트 진격할수 있는것은 덤이고. 또한 익주에 웅거하던 전대 세력들의 예 또한 무시할수 없다. 촉한 이후 성한이나 촉에 웅거한 세력들, 이전의 공손술, 고대의 촉나라가 그 험한 익주에서 끝내 버텼던가? 촉나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촉한만큼 중원세력을 상대로 선전한 익주세력은 없었는데 기준을 촉한이 보여준 방어력으로 맞추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소국이 대국을 항상 이기지 못한다고 볼 순 없고 촉한이라고 같은 게 반드시 가능하지 않았으리란 가정은 없다. 강한 쪽이 국력을 뽑아내도 막상 현실 전쟁에 들어가면 그 투사나 진행이 상당 부분 달라지므로, '자국보다 명확히 압도적으로 강한 국력을 가진 적국' 을 상대로 지속적인 출혈을 요구하는 장기간의 군사적 대립을 꾀하는 경우는 역사상 상당히 많았다. 전쟁이 강한 쪽이 제대로 국력을 뽑아낸다고 늘상 이기는 전략 게임도 아니고, 로마 제국도 제대로 국력을 뽑아내기 시작하는 이슬람 제국에게 몰릴 때 아예 거진 세력이 1:10 비율로 위기였으며, 그나마도 양면 전선 상황이었는데도 이슬람 제국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끝내 실패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이 몰리는 상황에서도 주로 방어전에서 그리고 나중엔 아예 공세로 나가 이슬람 제국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여러 차례 가해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하면서 다른 양면 전선 상황을 정리해 국력을 확충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촉한이라고 같은 게 가능하지 않았으리란 가정은 없다. 훗날의 중국사에서도, 서위-북주가 동위-북제에 비해 분명 열세였음에도 역시 방어전에 성공하면서[23]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세력을 상쇄하는 데 성공한 바 있으며 세력이 열세면 우세인 쪽이 안정된 상황에서 거의 늘 이긴다고 볼 순 없는 게 이유다.

이렇듯 방어전에서의 투쟁에서 우세한 적에게 타격을 주고 전쟁 수행 의지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 기간 꺾기 위해, 촉한도 여러 군사정책의 변경을 꾀했다. 강유가 단곡전투의 패배로 도박적인 북벌의 실패가 가시화되자 방어전으로 전환, 침공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방어선 정비책을 쓴 것도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즉, 강유도 무리한 북벌을 계속하기보단 방어전으로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려 했다는 증좌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강유의 방어선 변경 이후론 촉한의 군사 활동은 수만의 군세를 동원한 대대적인 북벌보단 방어를 기준으로 재편성되었다. 촉한은 망할때까지 한실부흥을 목적으로 끊임없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인 군사 활동을 했던 것이다.

2.1.4. 촉한의 군사적 역량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는 보급역량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후한은 고도의 상업유통망이 존재하는 고대 제국으로서는 상당히 세련된 사회체계를 만들었으며, 덕분에 후한은 전성기에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상업인프라가 후한의 군사력을 지탱하였다. 이 후한의 상업 인프라는 진(秦) 시대와는 달리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으나, 자율적인 사회의 특성상 가성비적으로는 이전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전문화 된 상업 인프라는 안정된 치안 유지가 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순식간에 붕괴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말난세는 황건반란, 맹진학살, 서주학살, 외 각지에서 벌어진 학살 같은 사회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는 아포칼립스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업은 커녕 기초적인 농업 단계에서까지 경제 붕괴가 파급되었다. 이건 사실 진(秦) 시대의 군사 인프라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식량창고에 보급을 의존할 수 있었던 초한전쟁 무렵의 전투 상황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초한전쟁이란 사실 진나라가 땅에 묻어둔 쌀을 신나게 까먹으면서 초한이 열심히 싸우는 좀 초현실적인 모양새였던 것.[24]

후한 시대에는 과거와 같은 터무니 없는 대규모 군량창고 인프라는 일단 기본적으로 없었던 걸로 보인다. 유사한 사례가 동탁이나 공손찬이 무력으로 민간의 곡물을 징발해서 만들어낸 미오성, 역경성 정도 뿐 본래는 식량을 모아서 억지로 쌓아두는 방식이 아니라, 군자금으로 민간에서 상인이 식량을 조달하는 방법을 썻을텐데, 이 무렵에 일단 경제가 상당부분 붕괴되서 이게 쉽게 안됐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한말 군벌들의 중요한 과제는 전투보다는 일단 생존이었다. 상당수의 난민은 아예 농토를 버리고 수렵채집 생활로 퇴보하였으며, 실제로 겉으로는 강성해보이는 원소, 원술의 군대도 오디를 따고 달팽이까지 잡아먹는 임시보급(?)을 시도하고 인육을 보급품으로 가져왔다는 정욱 설화나, 왕충의 해골 일화나, 서주에서 쫓겨났을 때 초기 유비군 등 아예 식인 기록까지 발견된다. 즉, 사실 이 시대는 싸우는 것 이전에 군량을 조달하고 보급하는 것 부터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조조군의 강점이자 터닝 포인트로 여겨지는게 둔전이었던 것이고 그 둔전 조차도 사실 조조에게 충분한 군량은 보급해주기 어려워서, 군량 보급이 부족하다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런 면에서 유비, 제갈량의 촉한 같은 한 주의 물자를 모두 끌어모아서 전선에 쏟아붓는, 그러면서도 국가, 민간경제와 사회질서는 잘 돌아가는 총력전쟁기계 같은 국가를 구축했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선 놀랍고 신기하게 여기고 그럴 만한, 경이로운 일이다. 이런 시스템을 실제로 만들고 공세적으로 유효성이 있도록 작동시켰다는게 그 자체가 뭔가 행정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성과이다.

전체적으로 총평하면, 촉한은 위, 오와의 세력적 열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으나 주어진 자원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선전을 보여준 건 맞다. 촉한 이후에도 이 일대에는 성한, 전촉, 후촉 등의 여러 독립 정권이 들어서지만, 촉한처럼 자원을 능률적으로 관리해서 상당 기간 동안 공세를 하거나 막아내며 버틴 정권은 후대에 거의 없다.

2.2. 정치

2.2.1. 정치이념

제갈량의 권력이 절대권력, 즉 동탁이나 조조, 후에 등장하는 사마의제갈각의 그것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갈량 개인의 품성도 한 요인이겠지만, 그보다는 제갈량이 촉한의 전권, 이른바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정치가로서의 유비 최고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유비와 그 뒤를 이은 유선이 다스린 촉한의 대의명분은 한실의 부흥이다. 400년을 이어온 왕조의 부흥을 주장하는 건 그 멸망 내지 쇠퇴 직후의 상황에서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역사상 숱한 왕조들이 멸망한 뒤 그 부흥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등장해서 활동했던 전력들이 많기도 하고. 고구려 부흥 내지 계승을 천명했던 발해고려도 있다.
제갈량의 권력(?)은 이 한실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명협의 제갈량 평전에서 지적했던 바 있지만, 촉한이 내세운 한실 부흥의 대의는 외부적으로는 위와의 대결에 있어 한실로부터 선양을 받은 = 한실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갖는 위에 대해 촉한이 맞서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치가 되었고, 내부적으로는 국가의 단결과 황실의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명분과 국가의 내부 단결을 위한 일종의 선전은 존재해왔고, 촉한에서는 그것이 한실 부흥이었다.
한실 부흥의 대의를 내세운 이상, 촉한은 두 가지 시책을 국가전략으로 유지해야 한다. 첫번째는 북벌. 옛 한실이 차지했던 땅을 수복하는 것은 한실 부흥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터다. 두번째는 유씨 왕조의 존속. 한실 = 유씨인만큼, 촉한이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한, 촉한은 유씨 황실의 정통성과 그 권위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밖에 없는 국가이다. 그것이 침해되는 순간, 촉한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셈이 되니까.
유비는 이런 상황에서 제갈량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제갈량으로서는 촉한은 주군 유비의 나라인 동시에, 자신의 재능과 야망을 모두 바친 작품이다. 국가의 창설에 제갈량이 핵심적으로 개입한 이상, 그로서는 촉한이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촉한의 존재가치, 대의명분은 이미 유비가 분명히 대내외에 천명한 상태이다. 한실의 부흥, 즉 유비 자신의 왕조가 존재하는데 대한 절대적인 이유를 부여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갈량은 촉한의 국정 전반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국가를 이끌고 다스리는 책무를 진 사람으로서, 제갈량이 동탁이나 조조처럼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국가의 수반은 제갈량 자신이라 한들, 황실의 권위는 동탁이나 조조가 그랬던 것처럼 침해할 수 없다. 이 정도면 촉한은 제갈량 집정시부터 이미 '국가를 좌우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의 분리가 있었다고 봐도 되겠다. 물론 제갈량에게도 권위가 있었으나, 그건 동탁이나 조조와는 달랐다. 제갈량의 권위는 '최고의 신하로서의' 권위, 황실의 존속이 보장되는 한 인정될 수 있는 권위였지, 동탁이나 조조처럼 그 후계자들이 황권을 침해할 때 내세울 수 있는 권위가 아니었다. 이건 엄청난 차이다.
즉, 유비(와 유선)로 시작되는 촉한 황실은 제갈량에게 촉한의 전권을 부여하는 대신, 제갈량으로 하여금 황권을 침해할 수 없게 하는, 요약하자면 황권과 신권이 병존하는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촉한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촉한이 한낱 지방정권으로 전락하게끔 하거나 위나 오에게 나라를 팔아버릴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다시 말해 촉한이라는 나라의 성공을 추구하는 이상, 제갈량은 절대로 촉한 황실을 침해할 수 없다. 유선(이하 유비 계통)을 폐하고 다른 유씨 황제를 내세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자체가 이미 황권의 침해니까.
기록을 볼때, 촉한만큼 황제의 권위가 보장된 국가는 삼국시대 내내 없다. 유비의 아들 유선이 용렬하다는 평가가 있었다고는 해도, 후계구도 자체에 신하들이 개입해서 왈가왈부하지도 않았고, 황제를 폐위하거나 시해하지도 않았고,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황제를 모욕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유비와 유선의 재능 문제는 아니라, 촉한이라는 나라가 한실 부흥을 내세우는 한(그리고 그것을 목표로 북벌을 지속하는 한), 촉한은 유비와 그 후손들로 이어지는 황실의 존재를 영속적으로 보장할 수밖에 없는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에게 부여된 촉한의 전권은, 그런 의미에서 황제의 그것을 논할 수 있는 권력이라기보다는, 황제의 존재와 그 권위에 의해 부여된 권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동탁이나 조조와 차별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게다가, 동탁이나 조조와는 달리, 자신이 이끄는 국가의 존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권위의 선을 지킬 수밖에 없게끔 체제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도 차이겠고.

이런 체제를 시작한 인물은 유비였고, 제갈량은 그것을 13년에 걸친 통치로 입증했으며, 장완은 여기에다 제갈량의 권위까지 덧붙여서 신권이 황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황권이 건재해야만 신권이 보장되는) 체제를 완성한다. 탁고라는 황제로부터의 권한위임을 받지 못한 장완으로서는, 최고의 신하인 제갈량의 권위 하에 스스로를 묶어서 정치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실제로 장완은 양의를 배제하면서 그것을 성공시켰다. 말단 관리에 불과한 양민이 대장군인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들어도 인정한 것은 장완 자신의 대인배스러움만이 아니라, 그만큼 제갈량의 권위를 장완이 인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일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체제의 확립으로, 촉한은 굉장히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가 된다. 기록을 볼때 위나 오처럼 촉한이 신하들간의 권력다툼으로 피를 본 예는 위연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무하다. 조상과 사마의, 제갈각손준의 예를 볼 때 이엄이 다른 나라에 있었다면 삼족이 몰살당하고 그 자신도 다진 고기가 되었을 것이다. 양의 또한 자살은커녕 시신을 온전히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촉한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양적인 열세를 질적인 우위로 극복하고, 국력이 월등한 위와 장기간 대치할 수 있었던 데 있어서도 이런 정치적인 안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엄정하면서 각박하지는 않은 법 집행과 비교적 자영농 위주의 생산력 증가정책으로 낮은 세율로 각각의 계층 내부와 계층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잘 조정이 되는 내적인 안정성은 높은 편이었고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비교적 온건한 처리가 이루어졌다. 툭하면 누가 누굴 쳐 죽이고 누가 반란 일으키고, 반란에 대해 과격한 후처리 하는 식으로 가진 힘을 소모했던 조위나 손오에 비하면, 촉한은 상대적으로 있는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한편 촉한은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의 선비들을 예우하고 중시하며 존중했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는데 유학에 능한 사람들을 주로 등용하였고 이들은 여러 직책에 임명되어 유학을 진흥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맹광극정에게 태자 유선이 무슨 책을 읽는지 묻고 권모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던 것처럼 법가, 병가 등 다양한 제자백가들의 저서를 읽고 행동하는 것이 권장되었으며 이는 유비가 유조에서 유선에게 독서를 권한 책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책들에는 역사책이나 유가의 책도 있었지만 법가나 병가의 책이 많이 있다. 촉과를 보면 알 수 있듯 유비와 제갈량은 법가를 많이 따랐고 거기에 유가와 병가등이 섞인 형태였다. 역사서와 유교의 경전과 병법서와 법가의 통치술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폭이 넓었던 것이다. 제갈량은 이를 통해 엄격한 법치를 시행했지만 촉한의 근본적인 사상은 유학이었으므로 덕으로서 정치하는 덕정이 제갈량이 펼친 법치의 근본이었다.

2.2.2. 정치특징

촉한 정치의 특징은 재상의 많은 활약이다.

촉한 전기는 제갈량이 승상으로 군정을 총지휘하였고, 제갈량 사후에 승상을 설치하지 않았다. 정사는 상서령이, 군권과 군사행정은 대사마, 대장군을 최고 군사통수권자로 했다. 제갈량은 촉나라에 들어간 후 바로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는다'이라는 치실(治實)정신을 제창하였다. 남중을 대하는데 있어선 마음을 공략하는 것을 취함이 상책이며, '이민족과 한족이 대체로 무사하고 별고 없이 편안함'의 효과를 거두었다. 손오에 대하여 실질적인 외교를 취해, 제갈량의 북벌을 위해 '동쪽을 고려하는 걱정'을 해소하였다.[25] 법에 따른 나라를 다스림에서는 '선리가 강하고, 후리가 약하다' 강한 세력을 지닌 자들을 억누르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법도와 규범, 관직을 간략하게 하는 것을 제창하여, 권제를 엄격하게 따르고, 널리 성심을 열고, 공평하게 행동했다.[26]

유선이 집권한 후, 정책은 제갈량에 의해 주로 진행되었다. 그는 조정 내에서 규범을 제정하고 대신을 훈계하며, 조정의 풍토는 청렴하고 인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촉한의 경제는 해마다 위나라와 싸워도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제갈량은 촉한의 백성들이 그리워했으며, 그 치국 능력과 효과는 당세와 후세에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도 장완, 비의, 동윤, 강유 등이 제갈량의 정책을 이어갔고, 이후 유선은 환관 황호를 총애해 조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지방의 정치풍토는 청렴했다.[27]

황제 유선은 초기에는 내정이나 외치 면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 주로 황실 의례적인 면을 담당하거나,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나설 수밖에 없는 사안을 제외하면 그냥 소소하게 놀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진행해야 하는 의례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의례적인 소임이라고 해도 할 일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황제의 권위나 권력이 위축되고 귀족의 권위가 상승한 점은 위, 오가 비슷했으며 이에 덧붙이자면, 이러한 그 당시의 상황은 황제가 유명무실했던 시대 상황 때문일 것이다. 다만 '권력'이라는 측면은 몰라도 그 '권위'에 있어서만큼은 촉한은 위, 오와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삼국 시대 후반에 가면 후일 위진 남북조 황제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위, 오의 황제들이 신권에 의해서 줄줄이 목숨도 부지하기 힘든 상황이 연이어 벌어졌으나 촉한에서만큼은 유선의 40년 넘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이런 상황이 벌어진 적이 없다. 신권이 그토록 강했으면서도 말이다. 촉한의 경우에는 외척들, 권신들, 심지어 황제의 친동생들조차 황제를 무시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또 비의 집권 이후에는 스스로 친정함으로서 실질적인 권력도 행사했다.[28]

오대 시대에도 특출난 몇몇을 제외하면 바보 같은 황제가 줄줄이 이었지만, 촉한의 독특한 점은 이런 황제가 우두머리이면서도 나라의 정치가 안정되고 상당 기간 국정이 순조롭게 잘 돌아갔다는 데 있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승상이자 상국으로서 집권하였고, 제갈량을 구심점으로 하는 정치가 행해졌다. 이 부분은 유선의 모자란 점을 인식한 유비가 제갈량에게 당부했던 일이기도 하다. 유비는 유조에서 한서나 한비자 같은 서적을 유선에게 읽을 것을 권했는데 후세 학자들은 이를 유선에게 부족한 제왕학, 정치학 교육을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당시 유선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더하여 유선도 제갈량에게 상당히 의지한 면이 있었다.

유비의 죽음 이후에도 나타나는 촉한의 정치적 특징은, 재상의 권력이 강했음에도 이들 모두 근면성실하고 황실에 충성하며 권력을 이용한 부정부패와 자리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일한 경우가 제갈량 사후에 일어난 양의와 위연의 대립이었지만 위연이 내분을 일으켰다가 죽었고[29] 얼마 후 양의도 실각하면서 곧바로 수습이 되었다. 비의와 동윤도 갈등을 빚었지만 이는 업무 스타일의 충돌 때문이었고 권력 다툼은 아니었다. 비의는 업무의 큰 줄기만을 잡고 그 외는 아랫 사람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스타일인 반면 동윤은 자신의 업무를 직접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죽어라 일하는 동윤의 눈에 당연히 비의가 일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 동윤이 비의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된 후 무지막지한 업무를 받아 본 후에야 "사람의 재능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하고 비의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더욱 무지막지하게 일을 해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1년 만에 과로사했다. 그나마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한 제갈량이 곽유지를 둘 사이의 중개자로 배치하면서 별탈 없이 해결되었다. 촉한에는 여러 지역에서 온 인물들이 자리를 잡았으나 정치적으로 갈등 요소나 권력 다툼은 없었다.중국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한 포스팅1포스팅2[30] 양홍전에 따르면 서쪽 사람들은 모두 제갈량이 당대 인물의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도록 기용한 것에 감복했다고 하며 계한보신찬 등에는 유비와 제갈량이 등용하고 촉한황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목숨을 바친 많은 익주 출신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의 푸시를 받아 가면서 승상부 유부장사(원정나간 승상의 대리역)까지 제갈량 승상부 2인자인 장예는 촉군의 대성호족 장씨였고 촉한의 핵심지역인 촉군태수였던 양홍은 줄곧 2천석군 태수로 그런 장예의 소꿉친구였다. 장예는 참군이자 후일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보다도 더욱 권력핵심에 접근했다고도 볼 수 있고 유사시 제갈량 다음으로 조정을 이끌 당사자였다. 두 사람은 익주 출신의(益州籍) 각각 상부와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조정 위의 구경(九卿)도 익주인이 절반에 가깝다. 오늘날의 수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령에는 각각 익주 사람 하지, 왕이 등이 임명되었고 건흥 연간의 '文者子敕,武者子均'이라는 말은 각각 익주 출신인 진밀왕평을 뜻하는 말로 문무에서 익주출신이 유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외 비시, 이복, 두미, 주군, 두경, 윤묵, 양희 등이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으며 남쪽에서는 마충, 이회, 장억, 장표 등이 활약했고 중앙 군부에는 역시 익주 명문가 출신인 장익 주요인사로 들어가 있었고 구부도 익주 출신 명장으로 유명했다. 촉한 건국 이전에야 당연히 외지 사람이 많을 수 밖에 없지만 건국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열전 35명 가운데 익주인이 16명으로, 1/2에 가깝다. 윤묵이나 이선 같은 인물들은 형주의 사마휘, 송충의 학업을 전수받는 등 단순히 형주인, 익주인 구분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은 태자의 스승이 되기도 하고 태자의 총애를 받는 등 촉한 정권의 중추에서 활동하였다. 이렇듯 촉한에 충성한 익주 인사들은 중용되었고 촉한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단순히 제갈량 개인의 정치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제갈량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탁고 대신으로써 비록 구두상이긴 하지만 유비로부터 황제가 되도 좋다는 윤허까지 받은 제갈량인지라, 제갈량이 승상이던 시절에는 그의 정치력으로 국가가 안정되게 운영되었다고 풀이할 수는 있어도, 제갈량 사후에도 큰 혼란없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것은 나머지 사람들도 제갈량의 유지를 잇는 사람들이라서 그의 뜻과 체제를 유지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촉한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장완, 동윤, 비의가 차례로 죽고 난 이후였고 기우는 와중에도 위나 오처럼 바람이 불지는 않았다. 또 사마의사마염이 행정 처리 문서를 보고 감탄했다는 기록, 개인이 처리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업무가 재상에게 집중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제갈량은 당대 기준으로는 수준이 매우 높고 복잡한 현대와 비슷한 관료제 체계를 만들어 국정 운용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으로 많은 국정을 제갈량 본인이 직접 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아, 재상에게 많은 직무와 권한이 집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다만 아쉽게도 기록이 부족하여 상세한 고증은 하기 어렵다.

이런 현상이 필연적인 것이, 전근대의 다른 나라들이 하면 좋은 줄 몰라서 관료제에 의한 중앙집권화를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다만 기술과 인프라의 한계로 할 수 없었던 것인데, 이런 기술과 인프라의 한계를 넘어 중앙집권화를 실천하려면 결국 유능한 인재를 갈아넣는 방법밖에 없는 것. 즉, 기술적 기반에 의해 중앙집권화와 정국 안정을 이룬 것이 아니라, 유능한 재상의 역량으로 당대의 평균적 수준보다 높은 중앙집권제를 실시한 것이고, 따라서 이런 제도를 운영하는 부담은 필연적으로 재상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유비와 제갈량이 세운 촉한의 중앙 정계 시스템 안에서 촉한의 황제는 그 권위가 확고했고 신하들의 1인자라고 해도 감히 간섭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선 제갈량부터가 유선의 즉위에 방해가 되는 강한 성격의 유봉이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자 숙청하고 첩이었던 유선의 생모 감부인을 정식 황후로 추증한 인사로 그 자체가 유선의 즉위와 황권의 강화에 일익을 담당한 인물이며, 본인 스스로가 그 권위하에서 1인자로 남았고 이후 촉한의 인사들은 촉한이 망하고, 심지어 그 사후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일개 백성들부터 이민족들까지 길가에 사사로이 사당을 세워 추모하는 등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 제갈량[31]을 감히 넘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그만큼 자신의 유지를 이을 제갈량의 인재 선정이 적절했기도 했고. 사실 이런 오랜 기간 동안 안정된 황권을 통한 황제의 재위는 혼란했던 위진 남북조 전체를 뒤져봐도 정말로 몇 안되는 특이 사례에 가깝다. 후대의 유학자, 정치가들이 '유선이 이렇게 오랜 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다 한 소열제 유비와 무후 제갈량의 심모원려가 있었다'는 평가를 한게 괜히 그런게 아니다. 촉한의 정치나 내치, 황권과 신권의 관계에 대해선 굳이 따지면 '실제 실무를 보는 신권이 엄청나게 강했으나 그것이 안정된 황실의 권위를 침해할 수 없었다' 라는 절묘한 밸런스가 유지되었다고 봐야 하고 이런 시스템을 만든 유비와 제갈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물 관직 생몰년도 재직
제갈량 승상 녹상서사 영익주목 181~234 223~234
장완 대장군/대사마 녹상서사 영 익주 자사 ?~246 235~246
비의 대장군 녹상서사 영 익주 자사 ?~254 246~254
강유 대장군 녹상서사 영 양주 자사[32] 202~264 256~263

여기에 강유를 제외하고 동윤까지 더해 촉한의 사상(四相), 촉한사영(四英)이라고 부른다. 비의가 장완의 익주 자사 직을 승계하면서 상서령이 되어 조정의 사무를 책임졌다.

남아있는 기록만 보면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위나 오에 비하면 사상/처벌이 관대했다는 것이다. 삼족을 멸한 예는 위연 정도이며 그나마도 양의의 개인적 감정이 들어간 것이고 유선이 나중에 부분적으로 복권을 시켜주었다. 그 양의도 상당히 중대한 죄를 지어 나중에 제재를 받지만 그냥 본인만 자살하게 하는 걸로 끝났다.역모를 꾀한 팽양의 경우는 그 당시로서는 놀랍게도 오직 팽양 본인만 처형당하는 정도로 정리. 그 외에는 대부분 귀양이나 좌천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제갈량과 마찰을 빚은 이엄이나 요립 등도 겨우 귀양 정도로 끝났고(당시 위나 오에선 권력자와 마찰을 빚으면 피를 봤다) 그런 그들도 자신들을 내쫓은 제갈량이 자신들을 다시 불러주기를 바랬다. 이엄과 요립은 제갈량이 죽자 자신이 복권될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통곡했을 정도였다. 흔히 이런 경우 쫓겨난 자들은 쫓아낸 자들이 죽고나서야 돌아갈 수 있다고 안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촉한에선 반대였던 특이 케이스. 그리고 이엄의 아들 이풍은 아버지가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태수로 승진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릉 전투 때 위에 투항한 황권은 황제 유비가 "황권이 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내가 황권을 배신한 것이다."며 남은 가솔들을 보호해줬다. 관우의 죽음에 관여하고 상용 일대를 위에 바쳐 촉한 입장에선 이갈리는 배신자였던 맹달의 아들 맹흥(孟興)과 후계 구도 정리를 위해 제갈량이 주도해 제거한 유봉의 아들 유림(劉林)조차 촉한 멸망 때까지 무탈하게 살았다. 심지어는 위에 정통이 있다고 주장한 인물들을 탄압한 기록도 없다. 사상과 처벌 면에선 아주 자유로웠다는 점에서 꽤나 특이했던 국가. 사실 인재가 부족해서...[33][34] 예외로 이막이 제갈량을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가 유선의 분노를 사서 사형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 것도 내막을 보면 오히려 유선이 화를 내지 않은게 더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처벌이었다.

또 법률 체계를 보면 촉과의 성립만 봐도 통치는 비록 엄정했으나 상황에 맞는 엄정함으로 오히려 나라의 기강이 확실히 선 법률 체계를 보였다.

다른 특이점이라면 관리가 많았다는 점. 촉한의 관리 수는 오나라가 3만 2천일 때 오히려 4만으로 더 많았다. 무슨 소리냐면 동맹이었던 오나라에 비해 인구는 2분의 1도 안되었다. 오의 호구가 230만 정도였을 때 촉한은 90만이었다. 다만 오와 달리 촉한은 명백한 중앙 집권 국가이고 그 집중도만 따지면 오히려 위보다도 결속력이 더 강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장 나라가 망할 당시에도 위는 촉한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 엄청난 우위의 국력에도 불구하고 불과 두 배의 병력만 동원했고, 그나마도 운이 겹치고 또 겹친 결과 멸망시키는 게 가능하였다. 게다가 원래 위의 1차 목표는 유엽의 건의에서 보듯이 촉한이 아니라 오였다.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다소 농담이 섞인 말이긴 하지만 '과로사가 많다'는 것이 특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유언이 다스리던 시기부터 호족들의 정리를 위해 노력했으나 유장 시기 엉망이 되었던 것을 유비와 제갈량이 정리하면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고 유비는 익주의 행정과 재정, 토지와 인구를 장악하여 호족 세력을 적극적으로 제어하고 내부 안정을 꾀했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촉한이 들어선 익주 지역은 군웅할거 시대가 개막하고 유언이 다스리던 180년대 말부터 유비가 들어온 214년까지 전란을 피해 들어온 수많은 중원 유이민들과 이민족들, 토착 호족들, 유언이 끌어들인 동주병 같은 세력이 뒤섞여 유비가 214년 익주를 평정하기 이전까지 무려 30여 년 가까이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이민족들의 경우, 현대에도 익주 남부에 해당하는 귀주성운남성 일대는 상당수의 묘족, 백족 같은 소수 민족들의 자치구가 넘치는 상황인데, 1800년 전인 후한 말 시절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당장 촉한 본진이던 성도 바로 위에 저족들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유언의 후계자 유장은 이 난국을 평정할 그릇이 되지 못했고 보다 못한 법정, 장송 같은 익주 인사들이 유장 대신 익주를 통치할 인물로 선택한게 유비였던 것이다. 이는 자치통감에서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익주 인심이 안정되고 화합되었다고 나와있는 것에서 증명된다. 당장 그 선두에서 촉한을 20여년간 다스린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고 그가 천명한 법치주의와 한실 부흥을 기초로 214년부터 263년까지 반세기동안 촉한이 다스려진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물론 여기엔 제갈량에게 전권에 가깝게 강력히 힘을 실어준 배후의 유비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촉한 정권 성립의 양대축은 유비를 따라다녔던 유협집단, 심복들의 연합과 촉한의 호족, 외부인사파 출신들의 구 서천파의 양대 축이 있다. 전자의 대표가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미축이라면 후자의 대표는 마초, 법정, 황권, 이회, 이엄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에서 처럼 외부인사파들이 호족화 되지도 않았고 위처럼 심복파들이 내부파들을 전부 숙청해버리지도 않았다. 이러한 세력관리는 유비가 그 가이드맵을 제시했는데, 유비는 한나라의 복원을 내세우면서 이들을 전부 촉한 정권으로 흡수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리체계는 유비의 권위가 촉한 전체에 견고하게 자리잡았고, 유비의 탁고대신 2인인 제갈량과 이엄은 유비 사후에 촉한의 모든 결정권한을 유선 대신 처리했음에도 촉한의 신료가 이들에게 일체 반발하지 않았을 뿐더러, 제갈량 이후 후계자들인 장완, 비의, 동윤이 제갈량 사후로도 어떠한 반발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다. 아니 당장 그것만 생각하지 않더라도 유장 아래서 그다지 출세하지도 못했고, 유비가 촉한을 차지한 이후에도 남방 방어와 내부 반란 진압에만 동원되고 그 부관인 양홍에게까지도 출세에서 밀린 이엄이 유비의 탁고대신이 된 이후 제갈량과 맞먹고 제갈량이 북벌 등의 이유로 국내에 없을 경우 제갈량을 대신해서 촉한의 전권 사항을 관리했다는 점(이엄이 파직된 이후 이 일은 동윤이 대행하고, 군량 보급 임무는 아들인 이풍이 대신한다.)은 유비가 촉한 내부의 호족들에게 가진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촉한의 이러한 내부 화합형 인사 정책은 제갈량이 그대로 승계하게 된다. 제갈량은 남중을 촉한의 군현으로 흡수하는 측면에서 남중의 대성, 이수들과 유력 호족들을 촉한 조정의 관료로 임용하면서 이들을 전부 촉한 정권과 묶어버리는데 사실 이러한 포박술의 시초는 유비였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기 전에는 그냥 공손찬의 부하나 다름없었고, 명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도, 서주의 부호이자 서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진규, 진등 부자와 미축, 미방 형제가 도겸 사후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유비의 서주 승계를 반대하지도 않고 오히려 지지하기까지 했으며 미축의 경우는 그 여동생마저 유비에게 부인으로 내어줄 정도면....

물론 이러한 포용 정책은 허정이나 마초에서 보듯 정치적 안배 측면도 없지 않다. 인재보는 눈이 거의 신급인 유비가 허정의 허명이 싫어서 쓰지 않으려다가 법정의 권고를 받고 쓴 측면이나, 익주와 옹양주의 오랜 지배자 출신인 마초가 그다지 중히 쓰이질 않았음에도[35], 정치적 입장에서는 그들을 포용해서 익주 관내 호족들을 몽땅 유비 세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유장아래 유신인 오의의 여동생이 황후가 되고, 그 자식인 유영과 유리가 있음에도 유비 사후의 황제 계승은 유선으로 못박아버리고 그 아래에서 어느 누구도 반발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유비가 생전에 촉한정권의 흥망 = 익주호족의 흥망으로 익주호족과 촉한을 묶어버리는데 성공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의 호족정책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처한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앙관료화를 꾀하는 조위는 이러한 중앙관료화에 반발하는 호족들을 몽땅 숙청하고, 순응하는 호족들은 귀족화가 되어 이후 서진의 창업공신세력이 되었으며, 오의 경우는 그 성립 자체가 호족연합체로 성립되면서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촉한의 경우는 창업자인 유비의 호족흡수정책의 성공으로 조위처럼 호족들의 반발과 숙청을 기반으로 정권을 성립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호족들이 촉한에게 적극 협력하고 최고 통치자에게 결속되었다. 촉한에서는 신하들에게 세습되는 토지나 식읍, 부곡을 하사한 기록이 없으며 이는 그만큼 중앙세력외의 유력 권력이 존재하지 않아 중앙집권이 강했음을 보여준다.[36]

부정적인 특징은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후한의 병폐인 '환관의 전횡'이 재현된 국가라는 점이다. 위-진은 시스템상 환관이 전횡하는 일이 없었는데[37], 촉한에서는 황호의 전횡이 나타났다. 유선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위-진에도 결점이 많거나 막장스러운 군주는 있었다. 그럼에도 환관이 국가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록은 이 시대에는 오직 촉한에만 나타났다.[38] 이는 촉한의 정치 체계가 후한을 답습하여 환관의 전횡에 대한 대비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원인을 생각해보자면 위나라-진나라는 환관과 외척을 배척하면서 문벌귀족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오나라는 호족 세력이 각각 정치적으로 강력하여 환관이 세력을 키울 환경이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촉한은 후한의 정치 체계를 전반적으로 답습하면서 외척이나 국내의 호족 세력이 약하다보니 유약한 황제 아래 환관이 전횡하는 후한 말의 병폐도 재현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 탓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황호의 전횡은 유선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유선이 외정의 강유와 내정의 황호를 분리한 일종의 정치적 안배라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관의 전횡은 당시 촉한 정치제도의 '문제점'일 수는 있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도 있다. 왜냐하면, 후한이나 후일의 당나라, 명나라처럼 자신들끼리의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가져 황제까지 좌지우지 하는 파벌이나 강력한 정치기구를 구성하지 못하는 환관은 오직 황제의 개인적 총애를 통해서만 권력을 가질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환관의 전횡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안정적이고 강력한 군주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황제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권신이나 호족이 고작 환관을 두려워 할 리 없고, 후한처럼 황제가 자주 갈리는 상황이라면 황제의 개인적 총애만으로는 권력이 성립하기 어렵다. 곧 국내에서 권신과 외척, 호족에 관계없는 황제의 강한 권위를 확립한 것 역시 촉한뿐이었다는 뜻이므로 이는 정국의 안정과 군주의 권위에 기반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부작용이며, 이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국가에서는 부작용 역시 발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촉한에선 후한과 달리 진진, 비의, 동윤, 진지, 극정, 상충 등 문관들이 직책을 맡아 환관이 아닌 사람들로 중서를 비롯한 내조가 구성되었다.[39] 제갈량은 시중이었던 동윤에게 숙위친병을 통솔하게 하면서 권한을 몰아주어 황호를 비롯한 환관을 찍어눌렀고 실제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후에도 촉한에선 후한, 당나라에서처럼 환관들이 세력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황호가 자기의 휘하에 같은 환관들을 수하로 거느리면서 환관 파벌의 수장 노릇을 하거나 아예 황제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려 드는건 불가능했다. 사실 황호의 문제 역시 유선 본인이 황호를 사사로이 지나치게 총애한 결과물이고 후한 말 조등이나 십상시처럼 황호에게 본인의 권력이 휘둘릴 정도는 아니었다. 촉한은 이런 기반하에 후한과 달리 한 군주가 지속적으로 오랜기간 집권하면서 권력과 권위를 휙득하기까지 했으므로 기본적으로 황호는 그런 황제 유선의 총애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그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40] 내조인 중상시나 중서령은 황제가 인사권을 쥐는 만큼 황제가 간신을 앉히면 월권의 문제가 생기는데 촉한은 하필 통제력이 느슨해지는 시기에 황호가 여기를 차지함으로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권력구도가 어떻게 개편되는지 따지고 본다면 제갈량이나 후임들의 문제나 인재의 부족, 시스템의 문제나 우연이라 해석되기 보다는 진지 사후 황제 유선의 의중, 황제의 권력구도 재편 개입이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정책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권리에서 상서령이 우위를 가지고 있으면 애초에 시스템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던 것이다. 상서령이 쉽게 휘둘리지는 않는 나름의 건실한 체계를 보여줬다 볼 수 있다. 당장 진지 시절에는 시중 겸 상서령으로 시중으로서나 상서령으로서나 황호의 우위에 있었고 황호는 진지에게 영합만 했을 뿐 그를 휘두를 수 없었다. 진지 생전 황호는 유선과 진지 사이의 연락망 정도로 진지가 죽은 후에야 문제가 생겼다. 이후에도 중상시에 오른 황호를 상서령을 맡던 동궐번건이 못 쳐낸 것이지 그렇다고 황호가 이들의 권한을 뺏거나 어찌하진 못 했고 대놓고 황호를 죽이려 한 대장군 강유의 경우나 황호와 대립하며 촉한 사람들에게 제갈량의 아들로서 많은 사랑을 받은 제갈첨도 마찬가지였다. 진수나헌의 예처럼 개인적인 인사 불이익이면 몰라도 후한말 당고의 금처럼 사인층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도 불가능했다.[41] 황제를 등에 업은 황호의 위세와 권력에 대신은 모두 뜻을 굽히고 따랐고(진서 진수열전) 매우 많은 이들이 황호에게 붙었지만(양양기, 진서 나헌열전) 실제 촉나라 사람들의 마음은 황호를 막았던 동윤을 그리워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촉서 동윤전, 화양국지) 그러니 군부나 상서령, 사대부 등이 황제의 권력에 기생한 환관 개인에 불과한 황호에게 무작정 휘둘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촉한은 상서령이 실권자로서 이는 자연히 상서성의 두 복야와 그 밑의 상서와 좌우승 그리고 시랑, 령사에 이르기까지 행정관료들이 전면에서 기능별로 실질적인 업무를 심의, 결정, 집행을 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국정이 작동되었다.

또한 요절과 같은 우연이든 의도적인 견제가 있었든 간에, 주요 공신들의 2세, 3세가 부모의 후광으로 실권을 장악한 사례가 위, 오에 비해 적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제갈량의 외아들인 제갈첨의 경우 나이가 어린 탓(사망 당시 37세)도 있지만 출세 속도가 매우 빠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처럼 촉한의 전권을 장악한 수준은 되지 못하고 위장군이라는 강유 다음 가는 군부 인사에 속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제갈첨은 촉한의 주요 공신의 자제 중 가장 출세한 축에 속한다. 관우는 자식들이 자신과 함께 전사(관평)하거나 문관으로 활동하다가 요절(관흥)하였고 장비는 아들이 요절(장포)하거나 평범한 실무 문관(장소)에 그쳤다. 장비의 두 딸이(경애황후 장씨, 황후 장씨) 황후가 되긴 했지만 외척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별다른 기록도 없다. 조운의 경우에도 두 아들(조통, 조광)은 각각 실무 관료와 무장으로 활동했을 뿐 별다른 정치 활동이 없다. 방통의 아들 방굉도 지방관에서 그쳤으며 법정의 아들 법막도 딱히 활약이 없었다. 간손미(간옹, 손건, 미축) 역시 그 자손들은 아버지들의 공로 및 대우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는 활동이 없다.

촉한의 정치 시스템이 맘루크 같다는 의견도 있다. 토착세력은 죽긴 커녕 멀쩡히 살아 숨쉬는 것 같은데 정치적 백그라운드 없는 고아들, 혹은 이주민들이 윗 자리를 다 돌아가면서 틀어쥐고 있고, 후계자 없을 것 같으면 어디서 고아 하나 구해오고, 그렇다고 토착 세력이 자신과는 이질적인 백그라운드를 가진 고아들에게 조직적으로 반발하긴 커녕 그 아래서 종군하고 있으니 이건 진짜 맘루크 같은 그림이라는 것. 결과적으로 정리하면 유비 대에서 유비의 개국공신 집단이 우대를 받는 와중에, 촉한의 멸망까지 이들이 상층부를 점한 상태에서 유선대부터 점차적으로 공신 2세대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익주 호족들이 제갈량의 의도적 푸시와 더불어 슬슬 비어가는 외래 집단의 빈 자리를 채워가는 정도 그림이 나온다.[42]그 결론이 제갈량이 업어키운 고아인 강유의 바로 아랫선까지 오른 익주인 장익이다. 사실 그전부터도 제갈량의 푸시를 받아 가면서 승상부 유부장사까지 오른 장예가 제갈량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참군인 장완보다도 더욱 권력핵심에 접근했지만 장예는 아쉽게도 제갈량보다 먼저 병사하는 바람에...장예가 오래 살았다면 제갈량의 후임은 장완이 아니라 장예가 되었을 수도 있다.

촉한의 경우, 중국 절반(위)과 주 하나(촉한)의 대결구도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된 체제를 이어나간다. 중국 절반, 혹은 그 이상의 국력이 주 하나를 압도하고 무너뜨리는 데에 수십년이 걸린다. 말하자면, 촉한의 체제와 위의 체제는 가성비에서 이만한 차이가 났다는 의미. 유비의 불행이라면 제갈량 정도의 행정가와 너무 늦게 만난 것, 그리고 지나치게 권력의 주변부에 있어서 초기 기반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이런 체제의 견고성이 단순히 제갈량 개인의 선함으로 이루어 진것은 아니었다. 역사를 논함에 있어 '그냥 개인이 선해서 그랬다'는 식의 설명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2.3. 경제

촉한의 영토는 성도 평원 중심의 파촉, 익주 북쪽의 한중 분지, 익주 서남부의 남중(오늘날의 운남)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파촉 땅은 산이 많지만 관개 농업을 통해 계단식으로 개간했고, 그 안의 넓은 분지는 농사를 짓기에 알맞고 기름졌다. 그리고 날씨는 온후하여 온난습윤한 지역으로 식생의 종류와 양이 풍부하고 각종 작물이 잘 자라며 일년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사천분지의 남쪽에는 장강이 흐르며 서부의 성도 평원은 생산성이 높은 농업지대이다. 동부의 대부분은 해발 500m 이하의 분지로서 비옥한 평원과 구릉 지대로 이루어져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많이 살았다. 한중은 관중 지방과 촉을 안정적으로 분리해 파촉의 생산력을 보호했고 그 자체로도 기름진 땅이었기에, 제갈량은 민은국부(民殷國富, 백성은 편안하고, 나라는 부강함)하다 말했다. 남중은 비록 독자 세력에 가까웠지만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산물이 풍부했다.

때문에 삼성퇴 유적으로 대변되는 고대 촉문명이 일치감치 등장, 소위 중원과는 독자적으로 번성했으며 이후 전국 시대 이곳을 점령한 진의 경제 부분의 일익을 담당,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또한 도강언으로 대표되는, 전한 시대에 이루어진 뛰어난 관개 사업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홍수로 인한 피해와 물 부족은 걱정이 없었다. 그 덕에 예로부터 익주, 지금의 사천 땅은 ‘옥야천리’, ‘천부지토’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촉한이 존재했던 시기인 기원전~기원후 600년까지는 기온이 지금보다 2~4도 낮았었는데 사천분지 내 지역은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후한시기에는 인구가 대폭으로 늘어 익주의 서남부인 영창군의 인구가 무려 189만명에 달했고 조조가 장로를 격파하고 파동군과 파서군의 사람들을 8만명을 이주케 한 것만 봐도 인구가 많았다. 여기에 후한 말기의 중원 전란을 피한 유민으로 인구가 증가, 거기에 더해 촉한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포텐셜이 제대로 터졌다.

이 경제력은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에서 익주의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원을 도모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으며, 등애는 촉한을 정벌한 직후 촉한의 융성한 소금 산업, 철업을 이용하여 오를 칠 전초 기지로 사용하면 내년 가을, 겨울 안에 오나라까지 거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도 했다. 실제 후일 오나라의 멸망은 익주에서 양성된 수군의 공격이 큰 소임을 담당했다.

유비는 익주 점령 후 펼친 경제 정책에서 조위와는 차이를 보였다. 우선 대규모 둔전 위주 정책을 펼치는 대신 주군의 농업 경제 육성과 발전에 힘썼다. 일례로 익주 평정 후 성도의 토지와 저택 등을 상으로 내리자는 건의에 조운이 '밭과 집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생활이 안정된 뒤 역조(役調)를 지운다면 백성들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유비는 조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농업 발전의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제갈량은 민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해야 안심하고 농업생산에 종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백성들을 쉬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또 농사의 풍작을 위해 농토 수리 관개 사업을 매우 중시했다. 도강언은 서촉 농업의 명맥이었다. 제갈량은 이곳의 수리 시설을 계속 유지, 보수, 신축하였다. 또한 익주의 경제는 중원과 같은 심각한 파괴를 당하지 않았고 유비와 제갈량 통치하에서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둔전의 규모도 위, 오만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군량미 환적의 번거로움을 줄이고 소농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소금 수입을 막기 위해 암염을 개발했다. 촉은 원래부터 정염(井鹽)과 철광자원이 풍부했는데, 정염은 정확히 말하면 지하수에 녹아있는 소금을 끓여서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당시에 ‘집에 염천이 나는 우물이 있고, 임공(臨邛)의 염정에서는 ‘물 1곡에 소금 다섯말을 얻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를 점령하자마자 소금과 철을 전매케했고 당시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행해지던 정염 생산을 화정(火井, 천연 가스)를 이용하여 본격화시켰다. 고대에는 소금이 전략 물자였으므로,[43] 공명은 이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 생산량을 늘리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면서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었다. 염부교위(鹽府校尉) 혹은 사염교위(司鹽校尉)를 두고 그 아래 염부전조도위(鹽府典曹都尉)를 두어 염업을 국가가 관리하게 했다. 이로서 촉한은 국가 단위에서 소금과 철의 정제를 관리함으로써 질과 양을 성장시켰으며 소금 산업의 비약적인 향상을 통해 파촉 지역의 소금은 촉한이라는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큰 명성을 떨쳤다.[44]

익주에는 도강언(都江堰)을 위시하여 양전언(楊塡堰), 오문언(五門堰) 등의 수리 시설이 홍수방지 및 농업용수 공급에 큰 소임을 해내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런 수리 시설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 농업의 관개를 보장, 생산량을 늘리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농사시기, 세금와 역을 적절하게 하여 농민이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였으며 수공업도 장려하였고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제갈량은 '무농식곡(務農殖穀)'과 '이부민재(以阜民財,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한다.)'라는 정책을 주장하였다. 촉땅은 강이 수량이 많고 들판이 비옥한 데다가 제갈량의 정성스런 관리로 농업 생산량이 매우 높아졌다. 도강언 관개구에 있는 면죽(지금의 덕양), 광한 일대의 논은 묘(亩) 30곡(斛) 이상이라는 기록이 있다.[45] 제갈량은 남중의 영창군 법보산(法寶山) 아래(오늘날의 운남성 보산시) 제갈언(諸葛堰)을 건설하기도 했다. 또 그와 동시에 제갈량은 촉과라는 법률을 통해 엄정한 사회기풍을 강조했고 '촉 땅 인사(호족)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스스로 방자'하지 못하게 해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았고' 이로서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였으며 호족 세력이 농민을 침탈하는 것을 막았다.

또 파촉 땅에는 전한기부터 제철 사업으로 갑부들이 많았다. 공명은 이 좋은 쇠와 무릉의 석유, 천연 가스로 무기와 갑옷 따위를 비롯한 쇠붙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고 하며 사금중랑장(司金中郎將)을 두어 농구기와 무기를 제조하게 했다. 염철(鹽鐵)을 정부에서 관리하여 국가적 수요를 만족 시켰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 수입도 늘렸다. 또 공명은 이를 이용하여 무기를 개량하였다. 결과적으로 강력한 무기와 단단한 철갑은 촉나라의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공명의 북벌시에 사마의는 촉한의 군사와 대치만 할 뿐 감히 대적하지 않았으며, 촉한의 험준한 지형상 군수 물자 수송이 어려운 것을 알고 공명이 군사를 물리기만을 기다렸다.

더불어 공명은 촉금을 국가의 중요 물자라고 인식하고 본래 유명하던 촉한의 비단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규모를 넓혀서 금관이란 기관을 만들어 민영/관영 할 것 없이 직간접적인 관리를 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나라의 특산물로 삼았다. 당시 촉금과 관련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위진 이래 촉금이 생겨나서 양읍의 자리를 빼앗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양읍은 견직물을 생산하는 쪽으로 변하여 결국 얇은 채색 비단은 촉지방에만 있게 되었다.
주개검의 〈사수필기 絲繡筆記〉
삼국 시대 때 제갈량이 촉나라를 다스리자, 잠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촉나라 비단이 일시에 유명해졌다. 위나라 문제 조비는 '촉나라 비단' 무늬의 참신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뭇 신하에게 "전후로 매번 촉나라 비단을 얻었으나, 서로 비슷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예문류취 藝文類聚〉 권 85
장호가 일찍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오나라 비단, 절강의 비단을 가지고 관청으로 와서 사천의 비단과 같이 붉게 물들였다. 뒤에 경사(京師)로 돌아와 장마철이 지나자 오와 절강의 비단은 모두 색이 변했으나, 오직 촉나라 비단만이 예전과 같았다.
〈능개재만록 能改齋漫綠〉 권 15

이처럼 촉의 비단은 삼국의 귀족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오나라와 위나라가 촉한으로부터 수입하는 중요한 수입품 중 하나였다. 이 당시 촉한의 상업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교빙(交聘)과 호시(互市) 형태의 무역이다. 제갈량은 말과 비단을 손오와의 교빙 예물로 보냈고, 위는 촉한에서 비단을 사들였다. 교빙이든 호시든 각국의 화폐 가치가 달라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촉한의 경내에서 이루어진 화폐를 이용한 무역이다. 당시 각국의 화폐제도는 (붕괴해) 화폐로 값을 치루는데 미치지 못하여서 물물교환이 다수로 있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최선에 속하는 것이었다. 촉한의 경내(境內)에서 이루어진 무역은 화폐가 통용되는 무역으로, 이 시대에는 특수한 한 종류의 정도에 이르렀다. 익주 평정후 직백전(直百錢)을 주조해 물가를 고르게하고 관에서 여는 시장에서 교환하게 하여 수개월만에 국고를 충실케 했는데 이는 당 시대의 한차례 특수한 교역이지만 화폐가 존재하는 상품교환 중의 작용을 같이 나타내어 보여주는 것이 명백하다. 촉한 화폐의 유통은 교환 경제가 활성화되어 장기화된 중원보다 우수했다. 성도는 수도가 되었고 상업도 상당히 번창했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赋)'는 성도 상업의 발달로 점포가 즐비하고, 각종 진기한 상품들이 모두 시시각각으로 늘어져 있고,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46] 유비가 입촉한 이후 당시 촉한에선 기존 오수전을 잇는 화폐가 계속해서 주조되었다. 이는 남정으로 양한 때부터 구리를 공급하던 현재의 윈난성 지역을 차지한 이후 더 원활해졌다. 이렇듯 촉한 화폐의 유통, 교환 경제의 활성화는 중원을 오래 능가했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천땅은 서쪽으로는 차마 고원을 통하여 티벳과 인도, 그리고 중동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당대에 남만이라고 불렸던 운남성과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좋은 [47] 와 농지로 유명하다. 남중 정벌 이후 금, 은, 단, 칠, 밭갈이 소 등이 공품으로 들어와 촉한의 군비에도 다소 공급되었고 국가를 부유하게 했다. 그리고 운남성의 무릉에서는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어 등갑옷을 만들 때나 쇠를 주조할 때 연료로 쓰여왔다. 제갈량은 남중을 정벌한 후, 남중을 한층 더 개발했고 내륙과의 연계를 촉진하였다. 내항도독들은 농업 생산을 중시하고, 주둔지를 개간하여 치적(政绩)을 쌓았으므로 남중인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남중은 촉한과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문화 경제를 발전시켰다. 운남성과 그 인근 지역은 촉한 정권 시절에 경제적으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무후는 이러한 특산품들의 이 점을 이용하여 강한 무기와 갑옷을 만들었다. 이러한 점을 봤을 때, 촉한의 경제력과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국방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더하여 새로 주조된 촉한의 화폐는 위나라의 서북 지역, 오나라의 남부 지역에도 통용되어 촉한의 경제권과 연결될 정도로 신뢰성이 높았다고 한다.[48] 오나라에서는 촉한의 돈이 널리 유통되고 있던 모양으로 오나라 승상 고옹의 후손 고훤(顧烜)은 촉한의 돈이 삼오(三吳)[49] 여러현에서 유통했던 것이라 하였다. 다만 이전 시대의 화폐에 비하면 악화였고 촉 내부와 촉한과 교역이 잦았던 지역에서만 유통되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렇듯 천혜의 조건과 인구유입, 걸출한 정치가의 삼박자가 맞물린 익주는 그 규모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번영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촉한이 삼국 중 국력에서 가장 열세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물론 제갈량을 중심으로 한 국가운영이 당대 기준에서는 매우 탁월하고 효율적이었으며, 사천 분지가 엄청난 곡창 지대이기에, 촉한이 '질적인 측면'에 있어서 '하나의 주'가 발휘할 수 있는 역량과 생산력을 훨씬 상회한 면모를 보여준 건 별로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가령 후주전을 보면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촉한이 동원한 군사력이 20만 명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물론 적당히 과장으로 필터링해야겠지만, 당대 난세 난리통 속에 급전직하한 중앙 권력의 통치력과 피폐해진 생산력을 감안했을 때 고작 '하나의 주'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동원력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규모다. 그것도 이릉 대전이라는 엄청난 참사를 겪고 난 이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경이로운 수준. 참고로 1개 주에 인구 100만 명 남짓을 확보[50]한 촉나라가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보여준 20만명이라는 최대 군사 동원력은 표면적으론 (거의) 3개 주에 인구 250~300만 명을 확보한 오나라가 한참 나중에 제갈각의 북벌을 통해 보여준 최대 동원력과 똑같다. 게다가 토착 호족과 유력 명문가의 입김이 강한 동오의 정치 체제 하에서 20만 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것은 그 자체로서 엄청난 무리수[51]였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 그러니까 북벌에서의 승패와 무관하게 이미 이 시점에서 제갈각 몰락의 단초가 뿌려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제갈량과 다른 사영들을 중심으로 일궈진 리즈시절 촉한의 내부역량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

결국 익주 자체의 생산력은 전쟁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보인다. 문제는 요즘도 유명한 촉의 잔도인데, 익주가 보급과 전쟁을 둘다 수행하기에 좋지 않은 점은 이 부족한 보급로에 있다. 다만 진과 유방은 서북 일대와 이 익주를 합쳐서 보급-전선기지를 모두 확보했기에 안정적인 전쟁 수행이 가능했는데, 제갈량과 장완, 비의, 강유가 서북 일대에 계속 출병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서북 일대를 흡수하고, 익주의 생산력으로 서북을 경영한다는 것이다.

이런 내부 역량은 촉한이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큰 변함이 없어서, 위에 언급한 등애의 발언도, 촉한이 멸망한 직후의 시점에서도 경제력 자체는 매우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또 촉한이 멸망할 당시에는 비단 수십만 필이 축적되어 당시 국가 사정이 양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촉한이 멸망할 때 내부 사정을 보면 '인사들이 겁을 먹고 싸우기도 전에 항복했다'(마막), '전력을 급조해야 했고 능력이 부족해서 이기지 못했다'(제갈첨)라는 이유는 있어도 '군량이 부족하고 백성들이 피폐해서 제대로 싸울 수 없다'라는 내용은 없다.

다만 군주인 유선은 후반으로 갈수록 무능하고 놀기 좋아하고 겁쟁이인 암군이 되어서 환관들을 중용하여 나라를 어지럽혔고 강유 역시 수차례에 걸친 북벌로 백성들을 피로하게 했다. 그렇다고 해도 오나라의 육개는 비록 군주는 사치스럽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다고 까긴하나 촉한의 멸망 당시 병사들은 대부분 정예이고 강하였으므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만대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화핵 역시 적이 서쪽으로 개미때처럼 몰려들었을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했으며 촉나라는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며, 게다가 유비의 통치 방법을 이었으므로, 그들의 수비는 오랜 시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고 있다는 평가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적어도 말기에도 촉한의 국력이 위나라를 방어하기엔 충분했다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촉한이 멸망할 당시 장제는 촉은 환관이 국정을 독점해 나라가 엉망이고 무력을 남용해 백성은 피곤하고 사졸은 지치는데 밖의 이익을 다투며, 수비를 정비하지 않았으니 사마씨가 이길것이라고 했으나 사람들은 그 말을 오히려 비웃었다. 이 말인 즉슨 당대 사람들이 촉한의 사정이 위나라에게 그렇게 쉽게 멸망할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다 당시 오나라 사람들은 사마씨가 국정을 다스린 이래로, 큰 재난이 자주 이르러, 지력이 비록 넉넉해도, 백성은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다. 지금 다시 그들의 자력을 다하여, 파촉을 원정하며, 병사는 힘들고 백성은 피곤하나 가엾게 여김을 모르니,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패할 것인데,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정도였으니 당대 위나라의 사정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무력의 남용이라고 평가받는 북벌의 경우도 비의 시절에도 1만의 리미트가 걸려 있었긴 했지만 잦은 출병을 했으나 그때는 무력을 남용한다는 말이 없다가 단곡 이후, 진지 사망 이후에 촉한의 국방정책이 북벌에서 방어전략으로 돌아섰음에도 집중적으로 말이 나온다. 단곡과 후화는 싸움에서 패배하여 상심하고 사기가 떨어졌고 근년 이래로 일찍이 편안한 날이 없었으며, 출정하는 장부들은 피로와 고통 속에 있었다는 종회의 말을 봐도 그렇다.[52] 단곡 전투 자체가 촉한의 북벌 역사 최대의 패배인 것도 있거니와 진지가 죽고 황호가 득세해 정계가 혼란해짐에 따라 강유의 북벌도 그 평가가 나빠지지 않았나 보여진다. 촉한 정계를 비판하는 설후의 평가만 봐도 손휴시절, 그러니까 진지가 죽어 황호가 발호하는 시점의 평가[53]이다. 제갈량의 북벌병력 규모, 출병횟수와 텀을 비교하면 제갈량이 오히려 더 빡세게 굴렸지 강유가 무리한건 아니다. 당장 제갈량 시절에는 10만의 군세를 동원해도 잘만 굴러가더니 강유가 최소 1만에서 몇만 정도 끌고 나갔다고 나죽네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사실 서진으로 통일된 이후 서민들의 삶은 촉한 시절만 못했다. 조위의 둔병, 둔호의 비참한 처지와 위나라의 상층 풍조가 조예시대부터 사치와 낭비로 바뀌면서 민생도 나아지지 않고 있던 것을 서진은 더 막장스럽게 계승했다. 서진과 오나라가 대치했을 때, 왕준이 파군태수에 임명되기 전에 파군의 주변은 오나라와 국경으로 병사들이 고통스럽게 노역을 했으므로 가정에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많은 사람이 키우지 않았다.[54]. 이후 서진 왕조는 민생에 대해선 막장이었던 탓에 그나마 독발수기능의 난 이후 양주 사인의 대한 처우를 높인 것처럼 촉 지역의 인심을 달래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고 이는 서진 말기 유민들의 난으로 성한 정권이 촉땅에서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 후세에 환온이 촉한시절 관리를 맡았던 사람에게 물었을때 그가 "제갈공(제갈량) 사후 제갈공 만한 분을 다시 보지 못하였다"라는 말했다는 이야기[55]가 나온것이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익주 기반과 자연조건이 좋은 데다 제갈량과 그 상속자들의 세심한 경영까지 더해져 망국까지 국방력과 사회경제가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다. 촉한 멸망 직후에 보이는 넉넉하게 축적된 국가의 재정상황이나 촉한의 경제기반을 이용하면 오나라를 굴복시킬수 있다는 등애의 평가만 봐도 아무리 나라가 혼란하게 되었다지만 국방력이나 사회경제가 붕괴될 지경은 아니었다. 등애는 이 주장을 고집하다가 누명까지 썼는데 익주의 자원과 노동력은 여전히 풍부했다, 등애가 언급한것들 중 소금은 식량, 철은 무기 생산, 배 건조는 노동력과 관련이 있다. 강유의 북벌이 자원 고갈과 노동력 감소를 불러 일으켰다면 등애는 저 발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효율성'이 아닌 '절대량'에 있어서는 결국엔 '하나의 주'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노정하게 되니 본질적으로 후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오나라 같은 경우는 장강 이남 지역은 개발이 별로 진척되지 않았고 호족 연합체라는 정치적 리스크까지 안고 있지만 그래도 결국은 개발이 잘 된 장강 북부 일부와 비옥한 양쯔강 삼각주를 장악했고 표면적으로는 (거의) 3개의 주를 확보했으니 근본적으로 뿌리내린 영토가 협소한 촉나라가 절대적인 볼륨 면에서 오나라를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다만 후한서나 한서 지리지, 정사 삼국지를 참고했을 경우 익주가 워낙 땅도 크고[56] 인구도 많은 주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인식처럼 무조건 촉한이 위나라에 불리하고 '이미 게임 끝났다' 정도는 아니었다. 한서 지리지나 후한서, 삼국지를 기준으로 했을 경우 대략 저 비율대로 하면 위 4.25 오 1.25 촉 1 정도. 주 하나로 치면 의외로 익주가 최대 주가 맞는데 인구나 면적이나 두개로 쪼개야 할 지역이 한중 쪽이랑 성도 쪽이랑 격차가 워낙 심해서 둘 정도로 자르기도 애매해서 걍 변방 지역이라 하나로 묶어버린 경향이 있고, 실제 서진 성립 이후 이 지역은 두개의 주로 행정 구역이 나뉜다. 촉한이 방어측이면 걍 전면전으로 해도 위가 맘대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닌 상황이고 이는 한중공방전이나 낙곡대전의 승리, 촉한멸망전 당시에 그 압도적인 국력 차이로도 간신히 촉한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과 합치된다. 게다가 익주는 중원에게 전란을 피해 유이민이 많이 들어온 지역이었기까지 하다. 다만 30여년에 가까운 익주 내부의 혼란기 때문에 그 포텐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걸 유비와 제갈량이 평정하고 재정비함으로서 이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이는 유장 시기 유장이 익주를 다스리면서도 장로조차 이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조조에게 항복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던 것과 대비된다.촉한의 통치에 대한 내용(중국어)

2.4. 중앙집권화 / 이민족 유화

중앙 집권화가 삼국 중 가장 잘 된 국가였다. 상대 국가였던 위나라는 호족의 지원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워서 의외로 지방에 대한 통제가 약했다. 일단 나라가 너무 커 초반에는 조휴, 조진 등 황실 인척들을 고위직에 얹혀놓음으로써 이들을 통제했으나, 조휴와 조진이 급사하고 장수한 사마의가 조상을 뒤치기한 후 호족들의 지지를 자기 편으로 돌리자 그대로 멸망 테크를 타게 되었다. 오나라의 경우는 더 심각한데 봉건제(...)를 쓰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합비 공방전에서 오나라의 패배에 대한 원인 중 하나로 각 토호들의 손발이 맞지 않아서라는 의견도 있을 정도로 이 나라는 중앙 집권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위의 경우는 이민족을 노예화시켰고,[57] 는 이민족과 아옹다옹 칼질하며 살았던 것과 달리, 무릉만이 자체적으로 복속하기를 원하여 포섭하고 호왕인 사마가를 동맹으로 삼거나 반란을 일으킨 남만맹획[58]을 정3품의 고위 관직에 임명하고 맹획의 일가쯤 추정받는 맹염은 후에 5차 북벌에 참가하는 등 상당히 이민족을 잘 포용한 편이다. 촉한은 강족, 저족 같은 서쪽의 소수 민족과 화합하면서, 후방의 '서남이(西南夷)'라고 부르는 이민족을 회유해 서남 소수 민족들은 점차 산림을 떠나 평지로 옮기고 마을을 이루었으며 농업에 힘써 이 지역이 대대적으로 개발되었다. 자체 세력이 약하다보니 동맹이 절실하기에 소수 민족을 포용해서 전력으로 끌어옴과 동시에 유비 정권이 있던 익주, 형주 등에 이민족이 많았으므로 이들과 잘 지내며 이들이 국가 체제에 도움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물론 촉한도 이민족들과 싸우기도 했지만 현지 행정관들에 의해 단기간에 진압되었으며 남만 지역에 제갈량에 호의적인 전설 등이 남은 것으로 봐선 시간이 지나도 원한이 남을 정도의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히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은 지금도 이 지역에는 제갈량의 신이한 위엄이 남았고 주민들이 제갈량을 경외하고 있다면서 고금에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까지 하고 있다.

촉한은 이민족들에게 토벌보다 일단 위엄과 덕으로 구슬러보고 안되면 추장들만 유인해 죽인다거나 이민족중 나쁜짓을 한 자들만 찾아내 죽인 편이었고 이민족과 전쟁을 했던 이유 자체가 주로 자주 약탈을 했던 부족이 마침 철이나 소금같은 자원이 많이 생산되는곳이라 겸사겸사 토벌하거나, 약탈한 부족 근거지가 중요한 관도를 점하고있어 여길 탈환하면 도로소통이 더 원활해 진더거나 이런 이유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되도록 출혈을 최소화했기에 토벌된 이민족들이 물자를 자발적으로 제공해 이것을 북벌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북벌 때는 제갈량이 가비능 등의 이민족 대장들도 잘 포섭했고 서융족 등의 협력을 얻기도 했으며, 왕평이 이민족 부대의 대장이 되고 좀 더 올라가면 유비 휘하에 이민족 기병이 있었다는 기록도 볼 때 이민족에게 군사적 포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민족들을 기병 전력으로 활용하는 것은 위에서도 했고, 전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촉한도 이런 예를 따랐다고 볼 수 있지만 촉의 경우 이민족에게 가장 친화적인 국가였음은 변함이 없다. 당장 위에 나오는 맹염도 직위가 호보감, 즉 근위 보병 사령관이었다. 당시 위와 오가 이민족에게 저런 고위 관직을 주면서 중앙 관서에 편입시키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후로도 이민족과의 관계는 잘 유지했는지 제갈량 정벌이후 남만이 반란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나오고 초주의 반대로 실패하지만 유선은 항복직전에 남만으로 피난계획을 잡을정도로 상당히 유화적으로 지낸 증거들이 나타난다.[59]

3.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출생 사망 연호 재위기간 능호
초대
(30대)[60]
열조(烈祖)[61]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劉備) 161 223 장무(章武, 221~223) 221~223 혜릉(惠陵)
2대
(31대)
- 안락사공(安樂思公)[62]
효회황제(孝懷皇帝)[63]
유선(劉禪) 207 271 건흥(建興, 223~237)
연희(延熙, 238~257)
경요(景耀, 258~263)
염흥(炎興, 263)
223~263 -

4. 계보

한나라 문서의 계보를 참조.

5. 여담

통전(通典) 7권, 두우(杜佑)의 주석에 따르면 유비 장무(章武) 원년에 호구는 20만이었고 남녀 인구는 90만이었다.

왕은의 촉기에 의하면 멸망 직전 민간인은 28만 호 94만 명이었으며, 장병 10만 2천 명, 관원 수는 4만 명이었고, 창고의 식량이 40여만 곡, 금과 은은 각기 2천 근가량, 비단인 금, 기, 채, 견은 각기 20만 필이었다고 한다.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에서도 이렇게 보고 금, 기, 채, 견 각각 20만필로 총 80만필의 견직물이 있었다라고 보고 있으며 그중 금(錦), 기(綺)가 유명하고 진귀하며 기술요구도가 극히 높은 견직물로서 이것을 능히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음이 촉한 수공업의 창성과 발달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 촉한이 망할때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108만 2천명으로 거의 110만명이 되었다. 그렇게 자주 출병했음에도 오히려 건국 초기보다 민간호는 8만, 인구는 20만명이 늘어난 것이다.

촉한은 멸망시에 창고에 금은 2000근[64]씩과 80만필의 비단이 있었는데 오나라는 멸망시 금은도 없고 비단도 없고 오로지 곡식 뿐이 창고에 가득했다. 역으로 따지면 촉은 상품경제의 발달로 곡식대신 금은비단이 가득했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그만큼 부가가치가 높은 물건들이다. 곡식의 양이 적어보이는것은 후주가 무당의 말을 믿고 전쟁준비도 안한 상태라는걸 감안해야 한다. 후주가 어리석은 군주인건 둘째치고'어리석은 군주는 세곡을 국고에 보관하고, 지혜로운 군주는 세곡을 민간에 보관한다'는 말이 있다, 촉한은 부가가치가 높은 물건들을 창고에 보관함으로서 언제든지 곡식을 비롯해 다른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을 정부가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65][66][67]

촉나라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는 민간인 인구가 100만 내외 수준이지만, 군인과 관원의 가족 수까지 합하면 이것보다 많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촉에는 이보다 더 많은 인구가 살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유민이 많았던 데다 가족의 구성원들 중 일부는 호적에서 누락하는 일도 있었으며, 인두세를 내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호적에 올리지 않거나, 호족이나 부자 밑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했었다.[68] 그래서 실제로 촉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그보다 몇 배 이상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분은 위와 오도 마찬가지.

촉한의 유민들은 강유가 주도한 성도의 난의 대실패 이후 서진에 어느정도 융합되는데 이는 촉한의 인물들을 서진 정부가 중앙정계에 어느정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또 성도에 있던 고위급 인물들이 죽어 구심점이 없어진 탓도 있었다. 예컨데 촉한의 인물이었던 문립제갈량, 장완, 비의의 자손이 중원을 방황하고 있으니 이들에게 관위를 주어 등용하면서 파촉 민중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오의 백성들의 기대를 이 곳으로 돌리는 것이 좋다고 상표했고 이 일은 모두 시행되었다. 이것을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는 성도의 난 같은 대대적인 저항 이후 촉한인들의 인심을 잡기 위한 시도임과 동시에 오나라에 대한 회유의 의미가 있었다. 촉한이 멸망했을땐 아직 서진 체제가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은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중원에서는 천하통일 이후에도 계속 촉과 오 지방 인사들을 차별하고 있었고[69] 또한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 지방의 살림살이는 오히려 촉한 시절이 더 나았다. 그렇기에 이 지역이 마냥 호락호락 한 건 아니어서 촉한 멸망 40여년 만에 독립정권인 성한이 건국되기에 이른다.

여러 모로 국공내전대만으로 이주해 정통성을 주장한 중화민국의 처지와 비슷하다. 실제로 제갈량의 출사표에 등장하는 말인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한나라(촉한 포함)와 도적(역적)[70]은 양립할 수 없다)이라는 용어는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말로 인용해 왔고 지금도 강경한 사람들은 이 말을 쓴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나라 이름(한나라, 중화민국) 대신 지배하는 중심 지역의 지명(촉, 대만)으로 더 유명하고 그렇게 주로 불린다는 점도 비슷하다.

촉한에서 동맹국인 오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은 달변가나 외교에 능한 사람들이 많았다. 비의등지, 종예, 진진, 마량, 이적, 나헌, 번건 등등...

오늘 날 사천에 해당되는지라 맵고 자극적인 사천 요리의 이미지로 인해 이 시기에도 맵고 자극적인 요리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오나 위로 투항한 촉한 출신 맹달조비에게 촉은 가축의 맛이 밋밋하다고 하여 고기요리에도 꿀과 엿을 쓸 정도로 달게 먹는다고 말해 조비가 놀라 신하들에게 알릴 정도였다. 덕분에 1800년전 촉한에서는 그저 매운 요리라는 인상만 뚜렷한 현재 사천 요리의 인식과는 달리 주로 달콤한 재료를 썼다는 사실을 이로서 알 수 있다. 사실 꿀이나 엿으로 요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이야 서민들이 얻기 쉬운 감미료라 그렇다 쳐도 은 많은 곡물을 사용하여 엿기름을 고아 만드는 것[71]이기에 그만큼 시간과 품삯도 많이들고 옛날엔 고급 식재였다. 그런 재료로 음식을 해 먹는다는 거 자체가 그만큼 촉한이 부유하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

5.1. 명칭

후한을 이은 왕조라는 정통성을 주장했으므로 정식 국호는 단지 (漢)이었다. (蜀)은 이 나라의 별칭인데 촉한 스스로는 잘 안 썼고 위나라나 오나라 내부에서 주로 썼다고 여겨진다. 촉한에서는 스스로를 정통 한나라로 보아 한나라로 불렀기는 하지만 이 시대를 다루는 정사 역사서 정사 삼국지에는 그냥 촉으로 나오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도 촉이라고 불렀다. 다만 편년체 사서의 명저인 자치통감에서는 '한(漢)'이라고 정식 명칭으로 기록했고, 때문에 이를 존중하여 삼국지평화에서는 그냥 한(漢)이 불리고 판소리 등에서도 "한말 위한오 시대 때"라고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일반적으로 중국사에서 국호를 '漢'이라고 쓰는 나라가 많은 탓에 국가의 위치인 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촉한이라고 부른다. 사실 위진남북조시대에도 이 지역에 (漢)이 또 나온다. 이쪽은 이민족 국가로 흔히 후촉(後蜀)이나 성한(成漢)이라 일컫지만, 이쪽도 "촉한"이라 부를 수 있으니 촉한이라는 표기라면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역사가들은 계한(季漢, 전한,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이라는 의미[72])이라고도 불렀다.

근래에는 조위, 손오에 대응하여 유촉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도 있다. 다만 일반화된 표현은 아니며, 애초에 이 나라의 정식 국호는 촉이 아니라 한이므로 그런 식의 표현을 쓰고자 한다면 유촉이 아니라 유한이라고 칭하는게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또 건국 때부터 멸망할 때까지 정통 왕조 한의 계승자임을 표방했고 파촉의 지방 정권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적이 없던 나라에 대해, 촉한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한이라는 명칭을 떼어버리는 건 문제가 없지 않다. 다만 이렇게 국명에다가 왕실의 성씨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사한 이름의 국가들끼리 구분을 하기 위한 것이므로[73] '유한'이라고 해놓으면 서한과 동한에도 해당되므로 별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촉한이라는 명칭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촉한이라는 확립된 표기가 있는 판에 유촉이라는 새로운 표기를 사용하는 것은 조위-손오에 대응시켜 명칭의 체계적 통일성을 구축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나, 정작 위, 오와는 달리 정식 국호가 아닌 촉을 쓴다는 것부터가 그 체계적 통일성을 해치는 것이고 명칭부터가 촉한 정통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뉘앙스를 풍겨 중립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까지 생긴다. 그렇다고 통일성을 위해 유한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언급된 대로 전한, 후한이나 뒤에 나올 유연의 한나라 등과 구별이 어렵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5.2. 촉한정통론

후한을 계승한 촉한에 그 정통성이 있다는 평가. 정통성은 전 왕조에 기준을 두는 만큼 비록 세력은 작았으나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이 충분했던 촉한에 정통을 두는 논리다. 마찬가지로 동진과 바로 이어지는 남조 또한 북조에 비해 세력이 작고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조에서 나온 수에게 멸망당했음에도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논리가 있는 것처럼 정통성에 대해 세력보다는 전 왕조와의 연결성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촉한 정통론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유송 때 유유가 많이 밀었다. 한나라의 계승자는 오직 자신들의 형제인 촉한뿐이고 서진이나 위는 역적이라는 것.

5.3. 촉한의 작위를 봉한 대신들

이 항목에선 촉한의 왕(王) 10위(位)와 후(侯) 66위(位), 추봉시호적대신(追封諡號的大臣) 12위(位)를 소개한다.
  • 왕: 한소열제의 아들 2명, 후주의 서제(庶弟)들, 소열제의 손자 1명.
    • 유영(劉永): 노왕(魯王)-221년, 감릉왕(甘陵王)-230년 개칭
    • 유리(劉理): 양왕(梁王)-221년, 안평왕(安平王)-230년 개칭
      • 유집(劉輯): 안평왕(安平王)-261년, 유리의 아들.
  • 왕: 후주의 아들 7명.
    • 유선(劉璿): 태자-238년
    • 유요(劉瑤): 안정왕(安定王)-238년
    • 유종(劉琮): 서하왕(西河王)-252년
    • 유찬(劉瓚): 신평왕(新平王)-256년
    • 유심(劉谌): 북지왕(北地王)-259년
    • 유순(劉恂): 신흥왕(新興王)-259년
    • 유거(劉虔): 상당왕(上黨王)-259년

  • 현후(縣侯) 1등후작(一等侯爵), 10위(位)
    • 유표(劉豹): 양천후(陽泉侯)-220년 전, 의랑, 선주전에 나오는 인물.
    • 상거(向舉): 청의후(青衣侯)-220년 전, 역시 선주전에 나오는 인물.

    (유표와 상거는 장예, 황권, 은순, 조작, 양홍, 하종, 두경, 장상, 윤묵, 주군과 함께 220년 익주인으로서 유비에게 제위를 권한 인물들로 유비에게 거절당함, 이후 221년에 태부 허정, 안한장군 미축, 군사장군 제갈량, 태상 뇌공, 광록훈 황주, 소부 왕모 외 촉한의 신하 800여명이 상서로운 징조를 말하며 유비에게 제위를 권했지만 거절당함, 최종적으로는 제갈량의 진언을 받아 제위 수락.)
    • 위연(魏延): 남정후(南鄭侯)-230년
    • 오반(吳班): 면죽후(綿竹侯)-234년, 오의와 같은 집안 동생.
    • 강유(姜维): 평양후(平襄侯)-234년, 대장군 녹상서사 영 양주자사.
    • 오의(吳懿): 제양후(濟陽侯)-234년, 소열제 유비의 인척, 목황후 오씨의 오라버니.
    • 왕평(王平): 안한후(安漢侯)-237년
    • 마대(馬岱): 진창후(陳倉侯)-234년, 열전이 없지만 1등 후작까지 오를 정도면 어지간히 큰 공이 있었던 듯.
    • 구부(句扶): 탕거후(宕渠侯)
    • 염축(閻竺): 서성후(西城侯) 파군태수.
  • 향후(鄉侯) 이등후작(二等侯爵), 15위(位)
    • 신탐(申耽): 원향후(員鄉侯)-219년(항장, 이어 봉함)
    • 장비(張飛): 서향후(西鄉侯)-221년
      • 장소(張紹): 서향후(西鄉侯)-221년, 장비의 둘째 아들.
    • 마초(馬超): 태향후(斄鄉侯)-221년
      • 마승(馬承): 태향후(斄鄉侯)-222년, 마초의 아들.
    • 제갈량(諸葛亮): 무향후(武鄉侯)-223년, 촉한의 승상, 탁고대신.
    • 이엄(李嚴): 도향후(都鄉侯)-223년, 탁고대신.
    • 유염(劉琰): 도향후(都鄉侯)-223년, 유비가 예주목인 시절부터 따라다닌 노신.
    • 보광(輔匡): 중향후(中鄉侯)-건흥(223-237)중, 계한보신찬 등장.
    • 고상(高翔): 현향후(玄鄉侯)-231년 전, 열전은 없지만 제갈량의 북벌에 적극 참여.
    • 비의(費禕): 성향후(成鄉侯)-244년, 촉한사영의 하나.
      • 비승(費承): 성향후(成鄉侯)-253년, 비의의 아들.
    • 장영(張瑛): 서향후(西鄉侯)-255년, 장억의 장남.
    • 요화(廖化): 중향후(中鄉侯)-259년
    • 동궐(董厥): 남향후(南鄉侯)-261년
  • 정후(亭侯), 삼등후작(三等侯爵) 31위(位)
    • 관우(關羽): 한수정후(漢壽亭侯)-200년
      • 관흥(關興): 한수정후(漢壽亭侯)-220년, 관우의 차남.
        • 관통(關統): 한수정후(漢壽亭侯)-220년 후, 관흥의 적자
        • 관이(關彝): 한수정후(漢壽亭侯)-220년 후, 관흥의 서자.
    • 조운(趙雲): 영창정후(永昌亭侯)-223년
      • 조통(趙統): 영창정후(永昌亭侯)-229년, 조운의 장남.
    • 왕련(王連): 평양정후(平陽亭侯)-223년
    • 비관(費觀): 도정후(都亭侯)-223년, 유장의 인척.
    • 상총(向寵): 도정후(都亭侯)-223년
    • 이회(李恢): 한흥정후(漢興亭侯)-225년
      • 이유(李遺): 한흥정후(漢興亭侯)-231년, 이회의 아들.
    • 여개(呂凱): 양천정후(陽遷亭侯)-225년
      • 여상(呂祥): 양천정후(陽遷亭侯)-225년 후, 여개의 아들.
    • 왕항(王伉): 정후(亭侯)-225넌
    • 진도(陳到): 정후(亭侯)-226년
    • 진진(陳震): 성양정후(城陽亭侯)-229년, 주로 오나라에 사신으로 감.
      • 진제(陳濟): 성양정후(城陽亭侯)-235년, 진진의 아들.
    • 원침(袁綝): 도정후(都亭侯)-231년 전, 전장군, 정서대장군.
    • 허윤(許允): 한성정후(漢城亭侯)-231년 전, 행전호군, 편장군.
    • 이복(李福): 평양정후(平陽亭侯)-건흥(223-237)중
    • 등지(鄧芝): 양무정후(陽武亭侯)-234년
      • 등량(鄧良):양무정후(陽武亭侯)-251년, 등지의 아들.
    • 상랑(向朗): 현명정후(顯明亭侯)-234년
      • 상조(向條): 현명정후(顯明亭侯)-247년
    • 호제(胡濟): 성양정후(成陽亭侯)-234년
    • 장완(蔣琬):안양정후(安陽亭侯)-235년, 촉한사영의 하나.
      • 장빈(蔣斌): 안양정후(安陽亭侯)-246년, 장완의 아들.
    • 유민(劉敏): 운정후(雲亭侯)-244년, 장완의 외종동생.
    • 마충(馬忠): 팽향정후(彭鄕亭侯)-249년 전
      • 마수(馬修): 팽향정후(彭鄕亭侯)-249년, 마충의 아들.
    • 장익(張翼): 도정후(都亭侯)-연희(238-257)중
  • 관내후(關內侯), 무봉지의후작❲無封地的侯爵❳ 11위(位)
    • 방통(龐統): 관내후(關內侯)(사후추증)-214년
    • 황충(黃忠): 관내후(關內侯)-219년
    • 법막(法邈): 관내후(關內侯)-222년, 법정의 아들.
    • 양홍(楊洪): 관내후(關內侯)-223년
    • 왕모(王謀): 관내후(關內侯)-건흥(223-237)초
    • 유옹(劉邕): 관내후(關內侯)-건흥(223-237)중
      • 유식(劉式): 관내후(關內侯), 유웅의 아들.
    • 장억(張嶷): 관내후(關內侯)-254년 전
      • 장호웅(張護雄): 관내후(關內侯)-254년, 장억의 아들.
    • 종예(宗預): 관내후(關內侯)-약255년
    • 진찬(陳粲): 관내후(關內侯)-258년, 진지의 아들.

  • 추봉시호적대신(追封諡號的大臣) 12위(位) - 세상을 떠난 뒤에 시호를 받은 대신.
    • 법정(法正): 익후(翼侯)-220년
    • 제갈량(諸葛亮): 충무후(忠武侯)-234년
    • 장완(蔣琬): 공후(恭侯)-246년
    • 비의(費禕): 경후(敬侯)-253년
    • 진지(陳祗): 충후(忠侯)-258년, 시중 동윤의 후임.
    • 방통(龐統): 정후(靖侯)-260년
    • 관우(關羽): 장목후(壯繆侯)-260년
    • 장비(張飛): 환후(桓侯)-260년
    • 마초(馬超): 위후(威侯)-260년
    • 황충(黃忠): 강후(剛侯)-260년
    • 조운(趙雲): 순평후(順平侯)=261년
    • 하후패(夏侯覇): 불명, 하후연의 차남, 고평릉 사변으로 인하여 촉한으로 투항함, 촉한의 거기장군.

5.4. 창작물

작은 세력으로 계속 노력했다는 이미지 덕분에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선 주역으로 많이 등장하며 연의가 주로 촉 위주로 흘러가 유비, 관우, 장비 3명을 위주로 촉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창작물도 엄청 많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해버린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비장함을 부여하기도 좋은 데다가 역사상의 본인들이야 죽을 맛이었겠지만(...) 인재가 적다는 것은 문학 등으로 창작했을 때 여러 인물에 포커스가 흩어지는 게 아니라 한두 사람에 집중되어서 주인공으로 띄워주기 좋다. 특히나 파보면 강력한 모습은 보기 힘들어도 의외로 튼실한 면도 보여서 이런 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대부분의 창작물이 전쟁을 다루다보니 위에서 언급된 촉의 다른 장점인 정치 체계나 경제력은 거의 무시 받는다. 대부분 제갈량이 정치를 잘했다 정도로만 끝나 안습.[74] 하지만 정작 촉한은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30여 년을 더 존속했고, 게다가 위가 전력을 다해 수십년을 더 싸우고도 오와 달리 힘으로 정면 대결해서 멸망시킨 게 아니라 간첩을 엄청난 규모로 보내고, 강유를 철저하게 묶으며, 여기에 유선의 병크까지[75] 줄줄이 운이 따른 결과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SD건담 삼국전에서는 '상(翔)'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유비 건담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익주로 가서 건국을 선포한다.

5.5. 쓰촨성의 관광 유산

쓰촨성에는 난세가 오면 나라가 하나씩 나왔다. 그런데 이 나라들이 대체로 혼란기에 지방 실력자가 한 몫 잡고 험준한 산악에 기대 버티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나태해지다가 대륙의 정세가 바뀌어 천하 대세가 갈리면 흐지부지 멸망하는 일을 자주 보여준다. 그래서 인지도가 낮고 관심도 덜 받는다. 당장 촉한이 멸망한 지 40년 뒤 촉 땅에 성한이라는 이민족 왕조가 나왔는데 이런 식으로 망했다. 물론 촉한에 비해선 아웃 오브 안중(...).

쓰촨성의 지정학적인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듯한데, 촉한은 망하기 직전까지 공세를 펼친 특이 사례다.[76] 유비의 한중 공방전, 이릉대전,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 등 끝없이 싸워왔다.

이 때문에 촉한은 쓰촨성 관광계의 희망이자 별이자 모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다른 지방에서는 완전 듣보잡 수준인데[77] 촉한만은 삼국지의 영향으로 인기가 높아서다. 대충 이 동네 전통 관광 유산의 90%가 촉한 관련이라고 한다.무후사는 물론이고, 낙봉파 같은 연의에 나온 가상의 지역까지의 도로도 만들었다.

실제로 촉한이라는 나라는 역사상 사천 지역의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민과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회유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면서 인심을 얻으려 했고 촉한 멸망 당시는 이미 유비가 입촉하여 이런 정책을 펼친지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78] 또 촉한의 명재상들인 촉한사영들의 통치가 워낙 뛰어났기에 백성들은 그들의 정치를 그리워했으며 이 때문에 문립이나 나헌 역시 익주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서진 정권에 이들의 후손을 등용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끝까지 촉한 정권에 충성했던 곽익 같은 인사가 원래 보직에 그대로 임명된 것도 그런 의미가 될 것이다.

화양국지에는 촉한이 망하고나서 '유비 세력이 익주를 다스린지 50여년이 흘렀다'라고 굳이 적었는데 말이 50여년이지 거의 반세기 동안 유비 세력의 이념적 영향이 촉한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익주 주류 세력들도 어느 정도는 그 이념에 감화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즉 촉한이 멸망할 당시엔 익주 세력이 촉한의 존속이 곧 자신들의 이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보았기에 촉한이 망할 때 이런 반응들이 나왔던 것이다. 촉한 멸망 이후 성한이 망하는 백여년 후에도 촉의 장로들이나 촉인들이 촉한을 부흥시키려 했던 강유를 안타까워 했고 제갈량의 통치에 대한 칭송이 오래토록 사천 지역에 일종의 신앙으로 남은 것만 봐도 당시 '촉한'이라는 나라가 익주의 사대부나 백성들에게 어떤 위상이었는지가 명백하다.[79]

예외인 것은 전촉 황제 왕건 묘나 도강언, 당나라 시기 시성 두보가 살던 초당, 진(秦)나라에게 멸망하기 이전 고대 파촉 문명 정도? 그나마 이쪽도 촉한 관련 유적보다는 인기가 없는 듯.[80]


[1] 정식 국호는 한(漢)이고, 고대 파촉인들이 살았던 쓰촨성을 기반으로 한 정권이므로 후한과의 구별을 위해 촉한(蜀漢)이라고 부른다. 촉(蜀)이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이는 서진 치하에서 관직생활을 한 진수가 어쩔 수 없이 한 표현일 뿐이고 자치통감 등 삼국 시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시대의 저술에서는 엄연히 정식 국호인 한(漢)으로 표기했다.[2] 멸망 직전 인구로 군인까지 포함한 숫자로, 멸망 직전 민간인은 28만 호(戶) 94만 명 정도였으며, 멸망 직전 군인 수는 약 10만 2천명 가량 되었다고 한다.[3] 동궐은 진지 사후 표면상 내정을 맡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환관 황호가 전횡을 부렸기에 그 영향력은 전임들과 비교하면 크지 않았다[4] 비의 사후 촉의 실권은 내정과 외정을 둘로 나누어 진지가 내정을 강유가 외정을 맡는다.[5]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6] 촉한 당시에도 불교가 들어간 흔적이 있다. 사천성 낙산시 마호애묘(麻浩崖墓)에 바로 촉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부처와 승려의 도상이 있는 것. 촉한에서도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는 형태로 수용되었던 증거라 본다. 단 지배층에까지 미친 흔적은 전혀 없다.[7] 중원과 관련 없이 고촉(古蜀)이나 파(巴) 같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활동하다가 중국에 흡수된 선주민 종족들이다.[8] 직백오수전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주전지역이 표기된 화폐였으며 배면에 주전된 지역인 건위군을 표시하는 위(爲)자가 새겨져 있었다.[9] 성도에서 한중까지 이어지는 관도에는 촉 멸망전 당시 유명했던 검각이 존재했고 성도에서 한중 남부까지 이어지는 우회도에는 면죽부터 강유. 음평. 멀게는 답중. 관도와 우회도 모두 철벽방어 라인이다. 오의 장강라인의 종착점인 영안 또한 천혜의 요지로 영안군 자체가 촉의 정예 중의 정예가 지키는 요충지이기도 했다.[10] 촉한 정권은 삼국 중 가장 열세였으므로 옹양주를 겸병하는 등 세를 불리지 않으면 장기적인 전망이 불확실했던 탓도 있다. 촉한의 멸망도 바로 이 장기적인 국가계획의 실패로 인한 것이기도 하고.[11] 文王: 주나라의 문왕[12] 中漢 : 후한을 가리킴, 촉한인들이 서한을 전한, 동한을 중한, 자신들을 계한으로 칭했음을 알 수 있다.[13] 예주자사가 되어 원소에게 몸을 기탁한 일.[14] 한중공방전을 가리킴.[15] 상해인민출판사(上海人民出版社) 1989~1999년 출판, 총 12권 22책, 1400만 자, 백수이가 주편집자가 되었고, 22명의 분권 편집장, 탁월한 성과에 조예가 깊은 500여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썼다.[16] 다만 먼지를 내서 복병이 있는 듯이 꾸몄다.[17] 다만 관우가 패배가 많았다고 일반화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기록이 풍부한 위의 기록과 너무나 부실한 촉한의 기록 차이로 인해 관우가 패한 전투만 부각되기에 생기는 착시 현상으로 인한 오류다. 관우가 패했다고 알려진 전투는 확실히 전세를 바꾼 번성 전투시의 서황과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악진, 문빙 등 개개인의 열전에 나오는 내용들이며 이들 전투들은 도대체 언제 벌어진 전투인지조차 가늠을 못할 정도로 영향력도 떨어진다. 실제로 형주 공방전 당시 초창기에는 위나라 군을 몰아세우며 조조가 천도까지 고민할 정도로 선전했고 (비록 홍수의 덕을 봤다고 하나 관우의 군사라고 물에 안 빠지는 것도 아니고 자연 재해를 잘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다) 애초에 사람 능력 평가하는게 거의 예언급으로 정확한 유비가 자신의 부재시에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의 총 사령관을 맡기는 것만 봐도 지휘관으로서 능력이 검증된 거나 마찬가지다.[18] 이건 위에도 설명하였듯이 촉군 자체가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장수 혼자서 돌격해서 다 썰어버리는 연의와 달리 실제 전쟁은 장수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병사들의 전투력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19] 물론 연의에서 미화받은 장포, 관흥, 마대는 제외한다.[20] 오서 제갈각전 배주 제갈각별전 中.[21] 파일:16b43749cac4d43fe.png
후한서 군국지 기준 후한 13주의 인구조사, 익주가 1위고 형주가 2위인것을 알수 있다. 괜히 제갈량이 형익을 아우르는 천하삼분을 논한게 아니다. 게다가 후일 복속되지 않다가 제갈량의 남정으로 촉한의 행정력에 들어온 남중 4군(장가, 월수, 익주, 영창)의 경우 후한서 기준으로 인구가 약 290만여명에 가까웠다.(영창군만 189만여명)
[22] 한고제가 장안과 관중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이 지역 역시 천혜의 요새지형이었고 또 풍족한 배후지를 갖추어 천하를 제압하기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이다.[23] 서위-북주는 익주와 관중을 겸병했으나 서위는 초반에는 익주가 없이 관중만 갖고 동위에게 열세인 상태로 버티고 있었고 이후 익주로 확장하면서 세력을 키운다. 촉한이 물론 방어만 염두에 뒀다면 곤란했겠지만, 익주만 있다면 반드시 망했으리라는 가정 또한 무리하다는 것이다. 이로 따져보면 촉한 입장에서도 후일을 기약하기 위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지속적 북벌로 옹양주 겸병과 관중 합병이 필수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잠깐 힘을 키우기 위한 휴지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일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24] 이는 초한전쟁이 매우 짧은 시간에 끝난 쟁탈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말의 상막장 상황을 시작한 진승,오광의 난부터 항우가 오강에서 자살할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7년으로, 아무리 난세였다고 한들 진나라가 쌓아올린 모든 인프라를 갈아버리기엔 충분치 않은 시간이었다. 반면 삼국시대는 황건적의 난부터 7년 지났을 시점은 동탁토벌전이 벌어지던 시기로, 이제 겨우 천하대란의 막이 열린 수준이었고 촉한이 위와 사투를 벌이던 기산과 옹양주지역은 이 동탁의 폭정 이후로 수십년동안 수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완전 버려진 상태라 인프라가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25] 만줄남(萬繩楠, 2002년): 《위진남북조사논고魏晉南北朝史論稿》 제3장 〈제갈량의 치실정신을 논하다〉제1절〈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는다〉[26] 만줄남(萬繩楠, 2002년): 《위진남북조사논고魏晉南北朝史論稿》 제3장 〈제갈량의 치실정신을 논하다〉제2절〈제갈량의 촉 통치〉[27] 조곤생(趙昆生, 2011년): 《삼국 정치와 사회三國政治與社會》 제4장 〈촉한의 정치와 사회〉, 제1절 〈촉한 정권 출현의 특정과 방식〉[28] 사실 촉한의 권력행사에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하는 북벌에 시행에 있어서 이미 장완 시절부터 황제 유선이 직접 북벌을 신권 1인자에게 명령하여 개부하는 것을 보면 이미 이 시기부터 황제에게 권력이 본격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29] 작정하고 일으킨 반란이라기보단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은 뒤 자기 버리고 군대가 철수하자 홧김에 그랬다.[30] 중국어로 되어 있으므로 중국어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파파고 등을 통해 보길 추천한다.[31] 애당초 지금도 유명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쫒았다'라는 말을 지어서 퍼뜨린게 제갈량 최후의 북벌 주둔지였던 오장원 인근 주민들이었다.[32] 강유는 일단 비의 사후 대장군이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린데다, 비의 사후에는 조정을 유선이 황호와 진지 등을 내세워 직접 통할했으므로 제갈량, 장완, 비의와는 그 소임에 상당한 차이가 난다. 다만 군부와 조정의 어른 격인 대장군 녹상서사직에 올라 있었고, 한중 방어 체제 개편이나 건국 공신들의 추증 등 국사에는 강유가 개입한 바 있으므로, 강유 또한 재상 계보에 드는 것이 가능하다.[33] 연의의 영향으로 비의 사후 인재풀이 메말라버린 후기 촉한군을 강유 혼자 고군분투 멱살 잡고 하드캐리했다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 당시 총사로서 내세울 인물이 강유 정도긴 했으나(250년대~260년대 촉한군 고위직을 따져보면 제갈첨을 제외하면 강유가 상당히 어린 축에 든다. 당시 강유의 나이 50대 초반 ~ 60대 초반. 이런 노익장들을 다 제치고 빠른 승진 끝에 대장군직에 오른것만 봐도...) 그렇다고 해도 촉한 역시 명색이 적어도 수만~10만 명에 이르는 북벌군을 동원할 수 있는 황제국이다. 강유가 홀로 촉한군을 이끌었다는 건 비장미를 가미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뿐 현실성은 없다. 사실 연의에서도 장억, 장익, 요화, 호제, 하후패 등의 활약이 있긴 하지만 연의는 제갈량 사후를 간략하게 다루는 바람에 촉한 후기 인물을 좀 누락한 감이 있다. 이 외에도 유은, 뛰어난 행정력과 군정 능력, 인망으로 서북방 이민족에게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던 왕사, 조광(조운의 차남), 내충(내민의 아들), 상충(상총의 동생), 양희 등이 강유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여 북벌에 참여한 걸로 사서에서 확인되는 촉한의 소장파다. 나헌이나 곽익의 존재도 그렇고 이쯤 되면 정말로 후기 촉한에 인물이 없었는지에 대한 편견도 재고가 필요할지도. 물론 유비-제갈량 리즈시절의 퀄리티에 비할 바는 안 되겠지만 후기 촉한의 인재풀은 기록의 부재 측면도 있으나 지나치게 저평가 받는 경향이 있다. 후기 촉한의 인물들이 다수 실린 계한보신찬이나 화양국지만 봐도 유은처럼 의외의 인물들이 나오는 걸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후기 촉한의 인물들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 뛰어난 인재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은 방굉(방통의 아들), 장표(장송의 아들) 등이 있다. 당신이 촉한빠라면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 신무장으로 추가해봄직하다.[34] 그만큼 촉한 말기에 인재가 없다는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진수가 기록을 개판으로 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는 쪽이 맞을 것이다. 강유의 부장이었던 유은만 하더라도 화양국지에서 열전이 수록될 정도로 나름대로 행적이 전해지는데 정작 진수의 기록에서는 사실상 소멸. 그나마 254-56년까지는 강유의 북벌을 다루느라 그나마 자세히 다뤄지는 듯하지만 내정쪽으로 진지가 휘어잡았다는 심증만 남을 뿐 실질적으로 진지가 한 행동으로 (스승 초주와) 구국론 짓기와 매년 사면령내린 것 밖에 없다. 262년의 후화전투만 하더라도 패했다는 내용만 있고 그외에 아무런 디테일이 없다. 배송지 주석으로도 보충되는 내용도 없고. 문제는 진수 생전에 일어났던 사건인데도 이 모양.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자료가 미비한 상황에서 무슨 인재풀을 재구성할 수 있기나 하겠나.[35] 사실 중하게 쓰였다고 하지 않기엔 마초의 직위가 영양주목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게만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장 이후 북벌군의 책임자 역할을 맡은 위연이나 강유가 이보다 권위가 낮은 영양주자사였던 걸 생각하면...마초는 한중공방전에도 참여하면서 황충의 활약을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36] 다만 남중정벌 이후 남중 토착호족들의 자치권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금과 비단을 이민족들에게 풀어 부곡으로 삼도록 권하고 많은 부곡을 얻은 자들에게만 관직을 세습시켜주긴 했다.[37] 손오에서는 손호 시기에 환관들이 설쳤다고 한다. 손오 문서 참조.[38] 다만 환관문제를 시스템적으로 잘라냈다고 하는 위나라에서도 조상 일파와 밀접히 결합해 연락하면서 국정을 주무른 장당이라는 환관이 있었다. 또 이풍의 난때 보면 하후현전에서 종육이 상주하길 환관과 이풍이 결탁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이걸 보면 환관이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보기 힘들다.[39] 이는 환관의 전횡을 막기 위해 위, 오에서도 비슷하게 실행되었다.[40] 진서 나헌전에는 황호가 많은 무리를 모았다고는 하나 황호의 세력에 권력에 따라 영합하는 일반적인 무리를 제외한 다른 환관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황호가 자신에 영합하는 무리를 매우 많이 모았음에도 촉서 동윤전이나 화양국지를 보면 황호가 내정을 전횡하자 촉나라 사람들이 황호를 막은 동윤을 그리워 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황호와 대립한 강유, 제갈첨, 동궐, 번건이나 황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초주의 제자들도 있었던 만큼 당시 비익주인, 익주인 출신을 가리지 않고 많은 촉한인들이 황호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41] 당장 황호에게 밉보인 진수, 나헌과 달리 이들과 동문인 문립, 이밀의 경우 황호가 권력을 잡던 시절에 좌천되거나 면직되지는 않았다.[42] 촉한 상층부에 있던 형주 출신들은 촉한의 형주의 상실 이후 인적 유입이 끊겨 촉한말기가 되면 점차 현지에 동화되거나 사라진다.[43] 한 왕조 시절에 이미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전매케 하는 법이 있었으며, 연의에서나 정사 등애전에서나 촉한 정벌 이후 관련 계획에서 등애가 "익주에서 소금을 굽고 철을 벼리며 차근차근 준비해서 오를 쳐야 합니다"라는 진언을 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소금과 철은 중요한 물자였음을 알 수 있다.[44] 여담인데 조미료에 있어서도 사천 지방은 괄목할만했던 듯 하다. 향신료 중 사천산이 '촉강'/'천화초'라 불리우며 특별 대접을 받을 만큼 질과 생산량 면에서 독보적인데가 있었다. 다만 촉한의 신하였던 맹달은 당시 사천 고기요리의 특징을 /을 많이 쓰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를 생각하면 과거의 사천요리는 좀 더 달았을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45]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 1993년, 인민출판사.[46]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 1993년, 인민출판사.[47] 제갈공명이 입촉 후 운남성의 차를 갖고 보이차를 만들어 보급하였단 전설이 내려오고 실제로 차의 재배가 촉한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다.[48] 경제적인 문제로는 촉의 역량이 의심될 여지는 없어보인다. 촉이 발행한 화폐가 옹양주와 형주, 교주 일대까지 통용되었다고 하는데, 화폐가 그렇게 널리 통용되려면 화폐의 주조와 유통에 작용하는 정부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후한말 인플레의 주된 요인이 돈을 만드는 데 쓰이는 구리의 공급 불안 탓이었다고 하는데, 촉은 남중을 정벌한 뒤부터 위에서 말한 화폐를 주조했다(미야자키 이치사다). 서진의 실정으로 수나라의 등장 때까지 화폐경제가 다시 망하지만.[49] 오군(吳郡), 오흥(吳興), 회계(會稽)로 오나라를 3개 지역으로 나눈 지역들.[50] 누차 강조되듯 실제 익주에 살고 있는 사람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촉한의 통치 자장권 내에 들어온 인구수가 100만 정도란 얘기.[51] 상술에서는 촉한과 동오의 정치 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구 대비 관리수'를 예시로 들었는데, 이보다 더 두 나라 간의 차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예시가 바로 군사 동원력이다. 동오는 촉한에 비해 2배 이상의 인구수와 병사력을 확보했지만 실제 대위전에 '무리 없이' 투입 가능한 최대 전력은 촉한과 비슷한 수준인 10만 정도로 여겨진다. 20만이라고 칭해지는 제갈각의 북벌을 제외하면 10만을 넘어가는 병력을 동원한 적이 전무하다. 문제는 10만이라는 병력은 촉한 처지에선 거의 전력의 전부이지만 동오의 전력에 비춰보면 절반 이하이다. 그러니까 동오가 확보한 군사력은 대략 20~25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한마디로 동오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풀전력을 가동한 적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가령 적벽 대전 같은 경우를 보면, 그 시점에 동오는 이미 10만명이라는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이민족의 준동, 토착 호족들 간의 알력 다툼에 피치 못하게 개입해야 했기에, 반드시 전력을 집중시켜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전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실제 적벽 대전에 투입된 병력은 전력의 절반 이하인 3~4만 명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1만 정도는 손권 본인이 쥐고 있어야만 했다. 실상이 이러했기에 유비는 형주의 패잔병을 중심으로 꾸려진 고작(?) 2만명 수준의 병력을 들고 적벽 대전에 참전해 전후 자신의 지분을 주장할 수 있던 것이고, 동오 역시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결국 나중엔 최악의 파국으로 파토났을 망정. 아무튼 촉한이 이렇게 전력투구할 수 있던 배경에는 제갈량을 중심으로 다져진 반석과도 같이 굳건한 정치 시스템이 깔려있다. 일견 연의에서 엄청난 미화와 보정을 받은 걸로 여겨지는 '신출귀몰 천재 군사' 제갈량이 곰곰이 따져보면 실제 정사 상의 '관중과 소하에 비견되는 명재상' 제갈량에 한참 못미친다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어쨌든 전체 국력의 규모 면에서 한참 격차가 벌어지는 촉한과 동오가 실질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똑같이 국가의 전력을 투입해 패배한 제갈량의 1차 북벌과 제갈각의 북벌을 비교해 볼 때 전자는 별 사달이 없었지만 후자는 최악, 최흉의 결말(물론 이는 두 제갈씨 사이에 가로놓인 넘사벽 인품의 간극과 거기에서 기인한 사후 처세술, 자기 관리를 반드시 고려해야겠지만)을 맞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는 촉한이 당시 기준으론 얼마나 황권과 신권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잘 확립됐는지, 동오가 얼마나 호족들간의 '느슨한 연합체'였는지를 동시에 웅변하는 대목이다.[52] 물론 종회의 말은 점령지에서 프로파간다 용으로 연설한 것이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53] 주군은 암우해서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신하는 보신에 급급해 허물을 못 본 척하며, 조정에 입궐하고도 정론은 말하지 않아 촌야를 지나가기만 해도 백성들의 안색이 채소빛이라는 평가. 다만 설후의 이 보고는 비록 유선의 촉한조정을 보고 말한 것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손휴에게 넌지시 권하는 것이라는 권중달 교수의 평가가 있다.[54] 왕준이 파군태수가 되어서야 법을 엄하게 하고 요역을 관대하게 하여 아이를 가진자에게 휴가를 주니 수천명이 살아났다고 한다.[55] 속담조에 따르면 '환선무(환온)가 촉을 정벌했을 때 환온은 제갈량 시절의 하급 관리를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백여세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상은 오늘날의 누구와 견줄 수 있겠소?" 이에 관리가 답하길 "갈공(제갈량)께서 계실 때도 남다른 사람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갈공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진실로 그와 견줄만한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라고 한다.[56]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촉한의 강역은 오늘날의 사천, 충칭, 운남, 귀주 전부와 섬서성, 감숙성 일부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영역이고 중심지인 사천 분지의 면적도 한반도 면적과 유사하다.[57] 이때 고구려동천왕관구검에게 패배했다. 당시 고구려는 수도가 불타고 거의 무너질뻔 했으나 위나라의 한반도 일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시도는 대실패했다. 교역권 배분을 통해 삼한을 분리 통제하려던 것이 마한의 경제적 이권과 정면 충돌해서 마한과 군사적 대결을 벌였는데, 위나라가 이겨서 주장을 관철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위나라도 심각한 군사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 과정에서 마한 내의 경쟁 국가들이 약해지거나 없어진 탓에 백제가 급속도로 세력을 키우게 된다. 게다가 기껏 뺏은 영토는 고구려가 다시 빼앗아서 결과적으로 망했어요가 되었다.[58] 다만 맹획이 이민족인지 단순한 지역 토호인지는 논란이 있다.[59] 출처- 삼국지 초주전[60] 촉한이 후한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 고조 유방을 초대로 계산한 대수이다.[61] 촉한에서 붙여준 정식 묘호는 아니고, 후세에 추증한 묘호다. 전조의 유연은 흉노는 한의 동생이라며 한나라의 계승을 칭하면서 한왕에 올랐는데 한고조, 광무제, 소열제(유비), 한문제, 한무제, 한선제, 한명제, 한장제를 모셨다. 이때 앞의 세명, 즉 서한의 창건자 고조, 동한의 중흥자 광무제, 촉한의 건국자 유비까지 3조(三祖)로 두고 뒤의 다섯 황제는 5종(五宗)으로 모셨다고 한다. 대체적으로는 이때 열조의 시호를 받지 않았나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열조가 유비의 묘호라고 쓴 기록이 있다. 열조는 조선 인조의 묘호가 될 뻔했으나, 더 좋은 묘호를 주기 위해 기각되었다.[62] 서진에서 내려진 시호.[63] 전조의 유연이 붙인 시호.[64] 한대의 근으로 금만 계산하면 466kg으로 2019년 8월 23일 기준으로 금만 271억원이다.[65] 예로부터 옷감을 세금으로 내는건 흔한일이었는데 촉한은 비단산업이 융성했으므로 비단으로 세금을 받았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유비와 제갈량은 역사를 짓고 비단산업을 육성하여 상업활동을 활발하게 했기에 나올수 있는 추론이기도 하다[66] 후한의 지방군은 스스로의 유지를 지방 상인 세력과 결합함으로서 실현한 걸 떠올려보면, 생각 외로 후한 말의 평균치가 유지된 사례라고도 볼 수 있을 듯 하다.[67] 경요 연간에 강유는 답중에서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둔전을 했다. 즉 촉 야전군과 성도 중앙정부가 축적한 곡물 계산량은 따로 계산하는것이 맞을듯하다.제갈량 북벌 당시부터 꾸준히 그렇게 관리한 걸 생각해보면 이원화되어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68] 호족이나 부자 밑으로 들어간 경우를 '세객'이라 칭했는데, 정사에 보면 세객의 수치가 국가 행정권에 들어온 인구의 2~3배는 족히 넘을 것이라고 나온다.[69] 굳이 따지면 오나라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좀 더 높았다. 자세한 내용은 손오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70] 당장은 위나라를 가리켜서 賊이라 표현했겠지만 내심 오나라도 賊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목표는 삼국을 통일해서 옛 한나라의 정통을 승계하는 것이니깐.[71] 조청 1kg을 얻으려면 쌀 2kg에 엿기름 500g을 때려부어 6시간 동안 삭히고, 그걸 또 한 나절 꼬박 졸여야한다. 보다시피 쌀과 장작이 엄청 들어가기 때문에 수수조청 2kg 정도이면 가격이 10만원은 가볍게 넘어간다.[72] 계는 '백중숙계'의 계로써, 중국어에서 막내를 의미한다. 손책(백부), 손권(중모) 형제들의 자를 보면 알 수 있다.[73] 예를 들자면 유송조송.[74] 오히려 역대 최강급의 행정가였던 제갈량의 정치적 역량이 거의 축소되고, 전쟁터의 책사로 신출귀몰한 전투를 벌인것으로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띄우기 위해 다른 인물들의 군공이 제갈량의 것으로 돌려지는 건 덤.[75] 유선을 안락공으로 봉하고 잘 대해준 것도 실상은 촉 내부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로 보인다.[76] 전한도 여기에 들어갈 것이라 많이 생각하지만 한왕에 임명된 유방은 파촉까지 들어가지 않고 한중에서 반년도 안있다가 바로 관중을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으니 장기간 파촉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한 촉한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77] 듣보잡은 둘째치고 성한, 전촉, 후촉 등을 보면 모두 촉한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78] 실제로 촉한이 멸망하고 유비의 통치술이 살아있는데 그렇게 무너지리라곤 생각 못했다는 발언을 한 이도 있다.[79] 촉한이 멸망할 때 제갈첨을 따라나선 이회의 조카 이구나 황권의 아들 황숭은 모두 익주 출신이었고 강유의 최측근으로 한중의 황금성을 끝까지 방어한 유은 역시 익주 출신이었다. 두진의 경우에도 성도가 함락될 때 촉군 태수에게 '저들은 옛 사람(촉한 출신)을 쓰지 않고 새 사람들을 쓸 것'이라며 낙향을 권유하고 본인도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났는데 이는 두진 역시 촉한이 망하면 촉한 출신 사람들이 기득권에서 밀려서 중히 쓰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효성으로 유명한 이밀 역시 등애가 불렀는데도 조모를 더 생각한다는 식으로 부름을 회피했다. 당대 식견있는 자(위나라에서 온 인원, 촉한의 사대부)들은 촉한을 점령한 등애의 뻐기는 듯한 태도를 비웃었고 강유를 따르던 촉한의 군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것에 분노하는 등 전체적으로 촉한 멸망 직후 익주의 분위기는 위나라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류가 생각보다 강했다.[80] 사실 왕건의 경우 폭군인데다가 아얘 비속어 왕팔의 유래가 된 사람이니 인기가 없는건 당연하고 파촉도 참 어이없이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