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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정규군.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창설되었으며 1644년 멸망하기 전까지 276년간 유지되었다.2. 상세
정화의 대항해 6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우표에 실린 전성기 시절 명나라 함대 |
명나라 군대의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상. 명나라 황제[1]의 나들이 장면을 그린 출경입필도가 배경이다.[2] 3:05쯤에 코끼리가 나오는데 실제로 명나라군이 코끼리를 운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청나라 초기 삼번의 난 때 오삼계가 코끼리 부대를 운용하기도 했는데 이걸로 봐선 이미 명나라 때부터 소수나마 운용했던 듯 하다.[3] 실제로 명나라 말기에 활동했던 의병 지도자인 이정국은 1652년 지금의 광시 좡족 자치구의 구이린시인 계림에서 8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청나라 장수인 공유덕과 니칸이 지휘하는 10만 명의 청나라 군대와 싸웠는데, 이때 이정국이 중국 남부 운남성에서 가져온 코끼리 20마리를 군대 앞에 내세워 청나라 군대를 향해 돌격시키자 청나라 군사들이 코끼리를 보고 겁을 먹어 달아나는 바람에 승리하였다.[4]
명나라의 정규군이 착용했던 투구 |
한국 사극에선 예산 등의 문제로 명나라의 화포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을 뿐 당시 명군의 화력은 아시아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총만 해도 하미(쿠물) 원정을 통해 오스만 제국산 총이 수입되면서 일본보다도 먼저 들어왔고, 내몽골에서 몽골족과 대치하던 명나라는 조총을 적극 받아들여 보병 대부분을 조총으로 무장시켰으며 조총 전래 이전엔 총의 선조뻘인 삼안총이나 화창 등이 이미 나와있었다.[7]
파일:명나라군대6.jpg |
명나라군 조총병 |
하지만 그 무슨 그럴듯한 변명을 하든 명나라군이 임진왜란때 졸전을 거듭한것도, 조선백성을 상대로 수탈이 극심했던것도 다 사실이다.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건져준 구원군임에도 조선에서 명군에 대한 평판은 매우 나빴다. 왜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과 명군 지휘관들의 오만방자한 태도 등 때문이었다.특히 명군 병사들이 조선 백성들을 약탈해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명군은 쌀, 콩 등 곡물은 물론 닭, 소, 돼지 등까지 뺏어가고, 심지어 아녀자들도 겁탈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서애 류성룡이 명나라 사신 사헌과 필담을 나눌때 사신에게 "왜병은 얼레빗처럼 대충 쓸어가는 약탈을 벌이는데 반해, 명나라 파병군은 참빗처럼 싹쓸이로 조선백성들을 약탈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했을 정도다.#
예컨대 1593년 1월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명나라군 내부에서 수급(首級)을 다투는 경쟁, 즉 적병의 목을 베는 경쟁을 벌였다. 무고한 조선 백성들의 목이 수없이 잘린 것이다. 훗날 명나라의 산동도어사 주유한과 이과 급사중 양정한은 파병군 총사령관 이여송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이여송이 평양에서 목을 벤 수급 가운데 절반은 조선백성입니다. 또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 여 명도 모두 조선백성이라 합니다.”<선조실록>
이 뿐이 아니었다. 명군은 조선 지방관의 목을 메어 끌고 다니며 심지어는 몽둥이와 돌로 난타해 살해하는 등의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1592년 9월) 또 1597년 8월, 남원전투에서 패주하던 명나라군은 관고(官庫)를 부수고 약탈을 자행했다. 주민들은 명군의 약탈을 우려해서 낮에는 숲속에 은신하고 가재도구와 곡물을 땅에 묻기도 했다.조선 조정은 이같은 명나라군의 탐학질에 병아리 냉가슴 앓듯 했다. 예컨대 1595년 12월, 병조판서 이덕형은 “명나라군이 군사훈련을 빙자해서 갖가지 민폐를 일으키고 있다”고 아룄다. 그러자 선조는 고개를 내젓는다.
“지금은 괴롭지만 참아야 한다. 지금 중국만 믿을 뿐이다. 중국의 노기를 적발시키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된다.”(<선조실록>)
1598년 2월 2일에는 역시 마귀가 이끄는 명나라 군 가운데 일부가 마초(馬草)를 벤다는 핑계로 민간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간했다. 이 때문에 명나라군이 온다는 풍문만 들어도 조선백성들이 숨기에 바빠 사방 30~40리의 마을이 텅 비어있을 정도였다.#[8]
무엇보다 명나라 전 시기에 걸쳐 명나라의 군대는 막강한 위용을 자랑했으며 특히 전성기인 홍무제와 영락제 당시의 명군은 그야말로 세계 최강이었다. 영락제 때는 50만 대군을 다섯 번이나 북방으로 보내고[9] 7번에 걸쳐 중국 남부에서 인도와 중동, 아프리카까지 해군을 보낸 나라가 명이다. 그야말로 전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였던 시기. 또한 이 당시 명나라는 말레이-포르투갈 전쟁에서 포르투갈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며, 이후 해군이 급격히 쇠퇴한 17세기에 조차도 명-네덜란드 분쟁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로 격파하는 위용을 자랑하였다.
이때 몽골도 명나라에게 크게 깨져서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웬만하면 피했다. 특히 영락제 시기의 명군은 군사력이 절정에 달했는데 베이얼 호 전투에서 북원에게 대승을 거두어 몽골의 성지인 카라코룸을 파괴하기도 했고 그 후에도 맹공을 펼쳐 몽골에 큰 피해를 입혀 몽골을 도로 유목국가로 만들었다. 베트남군 역시 전면전에서 참패했고 베트남의 명장인 레 러이조차 명군에게 계속 지며 고전했다. 나중에 베트남은 명나라와 협정을 통해서 조공을 바치며 명을 상국으로 섬기는 조건으로 간신히 독립했다. 비록 실책을 저질러 패하기는 했지만 명은 베트남에 20만의 대군을 파견했으며 베트남 방면 명군 총사령관인 주능이 베트남에서 제일가는 지략가 응우옌짜이의 수법을 대번에 간파하여 베트남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군도 큰 타격을 입어 명군과의 전면전을 회피하고 게릴라전으로 나가야했다.
명나라 말기의 경우에는 명군의 동원 가능한 총 병력은 자그마치 300만에 달했다.[10] 한 연구자는 명나라 역사 전체에 치러진 전쟁의 횟수와 공격/방어를 통계낸 뒤 명나라는 당나라 이후에 한족 왕조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공세적인 전략[11]을 취한 국가였다는 결론을 내기도 했다. 만력 3정도 명나라 말기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두 난은 진압했고, 임진왜란도 명나라와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일단 당시의 대국이 참전해주다보니 명분적인 면에서도 이득이었고 군사 부분에 미친 영향도 크지만, 이들이 주둔하면서 왕노릇을 하며 민폐를 끼친 게 많아 접대하는 동안 조선의 등골이 휠 정도였다는[12] 일화가 있다. '일본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 한국에는 이러한 명군의 추태만이 알려져 있으나 위의 평가는 조선의 입장만 강하게 반영된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현대 한국인들의 임진왜란 당시 명에 대한 역사적 인식은 근현대의 반중감정과 민가 약탈 같은 부수적 피해에만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데 좋던 싫던간에 임진왜란 이후 지상군의 주력은 조선군이 아니라 명군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나 한국 전쟁 당시 중국군과[13] 비슷하게 아무리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활약해도 결국 보병이 땅에 발을 딛고 깃발 꽂으며 육상에서 탱킹, 딜링하던 건 명군이었다는 소리. 대민 약탈이나 당시 조명 지도부간 알력이 무시할 역사적 디테일은 아니지만 마치 당시 명나라 지원 없이 조선 자체적으로 왜란을 격퇴한 양 묘사하고 명군은 무슨 도움보다 민폐만 더 끼친식으로 묘사하는 현대의 대중적 역사인식에는 오류가 있다.
사실 명군의 약탈문제는 보급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보급은 평양 이남으로 내려가자마자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서 약탈이 아닌 상거래를 통해 군량을 보급받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문제는 당시 조선은 현물거래에 의존하였기에 명군이 가진 은자가 통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것까지 알고 명나라는 명나라군 5만 명을 먹일 식량을 중국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옮겨주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 의주에 있는 식량을 전방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는데도 정작 조선에서 이 5만명을 먹일 식량을 전방으로 수송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그 결과 명나라군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며 평양으로 본대를 퇴각시키고 외교적으로 전쟁을 해결하려는 행보를 보이게 하는데 이는 조선의 수송실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조선에 파병된 명군은 군사 기강이 문제였을 뿐이지 지휘관이 전투 의지를 갖고 독전할 경우에는 전과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위에 나온 민폐를 많이 끼친 병사들은 이여송이 이끈 요동 출신의 북병이다. 당시 북병은 절대 다수가 기마술에 익숙한 몽골족/여진족이었다. 그래서 한족 농민 위주인 남병에 비해 통제가 어려워 민폐를 많이 끼쳤지만 일본군에 없는 기병대를 다수 운용한다는 점에서 전투력 자체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다만 명나라 역시 다른 왕조들처럼 군마 부족이 정말 심각해서 한인들로서는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기에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해야 했다. 나중에 가면 한인 기병들조차 몽골 기병의 풍속을 모방해서 장교들조차 한인 기병과 몽골 기병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14]
또한 척계광이 고안한 절강/복건성병법으로 단련된 보병들인 남병은 각종 화약 무기를 갖추고 있어 오랜 전란으로 단련된 일본군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절강 병법 자체가 척계광이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던 시절 대 일본군용으로 개발한 전술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명나라와 야전에서 붙는 족족 패배했으며 평양성 전투나 직산 전투 등은 명나라 군대가 거둔 대표적인 승전으로 손꼽힌다. 이 남병은 철저하게 왜구와의 전투를 상정하고 키워진 베테랑으로 이들의 절강병법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의 표준병법으로 자리잡는다.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 가량, 정유재란 때 파견된 명군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이치 전투, 진주 대첩이나 그리고 이순신의 활약은 전라도 곡창 지대를 일본으로부터 지켜 전쟁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치 전투는 일본 쪽 연구에 따르면 일본이 패배한 최대의 이유라 한다. 임진왜란 문서 참조.
이 외에도 명군의 기효신서, 절강 병법 등의 병법, 호준포, 백자포 등의 무기가 조선에 도입되고 유럽에서 도입된 후장식 속사포인 불랑기포의 사용 확대 경향 등은 명군이 조선군에게 끼친 영향이다. 다만 불랑기포 자체는 조총과 유사하게 조선 명종 시기에 이미 들어온 상태였다. 1982년도에 명종 시기 불랑기가 한 번 발굴되었으나 정식 발굴 조사로 입수된 게 아니라 진위 여부가 불투명한 부분이 있어 비공식 유물 취급을 받았으나, 2009년 서울 군기시 유적 발굴 조사에서 불랑기포가 발굴되어 임진왜란 이전 도입이 공식 인정되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훈련도감 제도 건의도 명군의 참장 낙상지가 했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의 명군은 병력이 많지않아 보조 전력 수준이었는데, 이는 명나라가 좋지 않은 내부 사정 때문에[15] 해외로 대규모 병력 투입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당장에 조선에서 지원달라고 사정을 해도 명에서는 난색을 표하며 '왜 너희가 스스로 못하냐'며 짜증스러운 반응을 냈을 정도.[16] 그러나 정유재란 때는 조선군 3만에 비해 명군은 대략 10만 이상이 조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는 사실상 명군이 주력이었다. 사로 병진 같은 군사 작전도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갑질을 시전하는 와중에 명군이 수립하면서 작전권 등도 명군이 쥐고 흔들었다.
또한 명군의 민폐를 해결하고 조선에 일종의 보상을 하며[17], 현지 병력의 군량을 대기 위해 명군이 이때 정도 되면 아예 쌀도 조선에 퍼줌으로써 당시 기근이 심각했던 조선인들이 이 덕을 보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군이 아예 수군까지 동원해서 명나라 수군으로 식량수송까지 직접 담당해서 임진왜란과 다르게 비교적 약탈이나 문제가 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의 주인공은 물론 조선이지만, 병력도 주력이고 작전권도 쥔데다 병참도 맡을 정도면 정유재란 때의 명군의 비중은 자국이 침략당한 조선보다도 높을 지경이다.
한편 서구의 중국 사가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청나라를 포함해서도 명나라가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에선 가장 선진화된 군대를 운용했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명나라는 영토가 크고 지역이 다양한 중국의 특성상 선진 무기가 전체 군대에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각 지역에서 상대하는 적군에 맞춰서 군대를 운용했다.
예를 들면 몽골, 여진을 상대해야 하는 북방에서는 기병 중심의 군대를, 왜구를 상대로 하는 남방에서는 수군과 보병 중심의 군대를 운용하는 식이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조선과 일본의 기록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명나라 군대에서 다수의 대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대포야 일본이나 조선에도 있었지만 대형 대포를 군대의 주력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명나라 군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불랑기포나 홍이포 및 조총 등 외국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발달된 무기를 수입하고 이걸 상당히 잘 활용했다.
일반적으로 유목 문명과 정주 문명 사이의 군사력이 역전된 시기를 화약 무기의 등장부터로 잡는데 이게 바로 명나라 시기였다. 그래서 몽골 군대의 침입이 명나라를 괴롭힐 수는 있었어도 결국 명나라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물론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에게 패배하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략과 전술에서의 연이은 실책과 사건사고, 농민 반란군들의 공격이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물일 뿐이지 당대 명군이 농민 반란군보다 약체였기 때문이 아니다. 명청교체기를 다루는 항목에서는 늘 강조되는 대목이지만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망했지, 청나라가 직접 멸망시킨게 아니다.
오히려 명나라 내환이 아닌 자체적인 힘으로는 그 개판난 말기 명나라 상황에서도 영원성 하나 못넘고 산해관에서 원숭환, 오삼계가 이끄는 명군한테 입구컷당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오히려 한참 상승세일때도 특유의 유목민족들의 기풍을 물려받은 기병 중심 군대로는 야전에서는 팔기군이 명군을 압도했지만, 산해관 같은 잘 준비된 방어 거점에서는 최첨단 화약무기를 통한 화력 투사를 통한 방어진을 자력으로 격파 못하고 있다가 명나라의 내환 덕분에 중국의 패자가 된 이후론 국력에 대한 자신감과 긴 평화 때문에 새로운 전법과 군사 기술 개발에 소홀히 하다가 명나라 망할 시점만 하더라도 그리 압도적이지 않았던 동서양 기술격차가 19세기쯤에는 넘사벽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는 삼번의 난 때 청군과 오삼계 군대의 전투를 보면 알 수 있다. 초창기 삼번의 난 때, 동아시아에서 무적으로 보이던 청의 대군과 장군들이 오삼계의 반란군에게 패배를 거듭하고 있어 강희제한테 충격을 주었다. 사실 삼번의 난 규모는 준가르, 베트남, 구르카 등과의 싸움보다 거대한 수준이며 엄청난 양의 물자 이동이 발생하고 사방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곳곳의 강과 바다에서 함대전까지 일어날 정도로 세세한 역사를 살피면 강희제의 정치 역량과 의외로 막강한 오삼계 세력을 볼 수 있다. 강희제 역시 삼번의 난을 어느 정도 의도한 바가 있었으나 예상외로 오삼계의 반란군이 강하며 심각한 상황에 빠졌던 적이 많아 스스로 실수였다며 반성문을 적어 모든 신하들에게 들려주는 일까지 했을 정도였다. 특히 삼번의 난을 진압하느라 청은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명나라 포병 |
이외에 임진왜란 당시 활약하고 대량으로 사용된 명군의 주력 화기로는 휴대가 간편하고 1회 사격으로 조란환 100여개와 납탄 1개를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경포면서 최대 사거리가 무려 2km에 달한 호준포와 서양의 오르간 건과 유사한 연발포인 멸로포, 튼튼한 철로 만들고 총구 장착식 총검을 끼워 근접전에서도 강력한 단병기로 활용 가능한 쾌창, 최대 사거리가 중형의 경우 1.7km, 대형의 경우 무려 3.4km에 달한 거포인 위원포 등이 있었다. 특히 호준포는 그 강력한 위력과 편리한 휴대성으로 조선군을 경탄시켜 임진왜란 시기에 곧바로 제식화기로 채택, 복제품이 생산되었다. 이외에도 독가스탄을 발사하는 비운벽력포나 독가스를 방사하는 독무신연포, 최대 500여개에 달하는 산탄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백자연주포와 같은 특수한 화포 역시 사용되었다.
한편 비록 화포처럼 주력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다종다양한 로켓 무기를 운용하였으며, 대표적으로 2단 로켓과 다탄두 로켓이 결합된 선구적인 병기인 화룡출수가 있다. 명나라가 개발하고 활용한 지뢰와 수뢰, 수류탄과 총류탄 역시 유명하다. 특히 조문과 조성이 달린 홍이포만 해도 조선에서 자체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영조 때로 명과 비교하면 대략 100년의 차이가 있었는데 명에서는 멸망 전에 이미 기존 대포의 조문과 조성을 더욱 향상시키고 있었고 자생화총(自生火銃) 같은 플린트 록 방식의 총기도 스스로 발명할만큼 기술적 진보가 되어 있었다.
명의 화기 수준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대략 200년 후 청에서 명나라 대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쇠퇴의 흔적이 보이고 타 문명들과 비교하여 중화권 화기 발달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진 것이 분명하게 보일 정도. 청군의 주력인 팔기군은 한인 팔기가 아니면 활을 장비한 창기병이었고 강희제 시기 갈단을 공격하는 기록화를 보면 죄다 용기병식으로 운용되어 소화기 위주였다.
사실 명군이 개발한 무기들이 겉으로 보면 상당히 놀라운 건 많지만, 시대적/기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이론에 비해 실제 성능은 엉망이라 얼마 못가 도태된 것들이 많음을 감안해야 한다. 개인용 다발화전의 경우 병서에 기록된 기종은 매우 다양하지만 실전에서는 몇몇 종류 위주로 한정적으로 사용되었고, 신화비아나 화룡출수도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았다. 조선의 신기전 역시 매체나 기사에선 무슨 조선의 첨단과학이 만들어낸 최종병기로 묘사되지만 실전 성능은 그다지 주력으로 굴릴게 못됐던 걸 생각해보자. 수많은 '옛날에도 이런게 있었다니 신기하네'류의 무기가 대부분 그렇듯이 실전에서 의미가 크진 않았다. 이것들은 동서양 각국에도 널리고 널렸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실전에서 운용하기 곤란했다는 것. 다만 이런저런 아이디어 고안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 과학기술과 이과적 상상력 하나만큼은 후임 왕조인 청나라보다 뛰어났다고 평가해줄수있겠다.
병사들이 화기를 대충 다루다 사고가 나는 경우도 많았다. 화약 창고에서 오래돼서 뭉친 화약을 도끼로 깨다가 수백명이 폭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명나라의 대포 자체는 제법 우수한 기술력으로 생산되었지만, 전선에서 이를 활용하는 장수와 병사들은 대포의 명중률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대포에 고기와 술을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등 화기의 과학적 운용과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준적이 있다. 다만 서양에서도 카톨릭 사제를 비롯한 성직자가 무기나 군기 등을 향해 축성을 한다던지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므로 명나라군만의 모습도 아니고, 사실 딱히 전근대에만 발견되는 모습도 아니다. 원래 군인같이 목숨을 다루는 직업은 세상이 얼마나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지 절감하는 직업이라 세계 어디든지 현대에도 미신적 풍습이 많이 남아 있다. 현대에도 군함에 진수식을 하거나, 러시아군 소속 정교회 사제들이 무기에 축성을 하는 것만 해도 좋은 예시다.
연발식 총들의 경우 자모총을 제외하면 다총신 구조라 무겁고 나중에 일일이 다 장전해줘야 한다는 한계가 있어 보조적인 용도로 쓰이는 정도로 그쳤다. 이는 당시 초기 형태의 기관총을 만든 나라들의 공통점이었다. 조선은 여말 선초에 이미 6연발 핸드캐논인 쌍자총통을 개발했고 임란 이후 삼안총을 도입했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력은 궁시/조총이었다. 서구나 일본에서도 비슷한 다총신 기관총들을 개발하긴 했지만 주력 화기는 되지 못했다. 이유는 말 할 것도 없이 6연발이니 다련장이니 하는 거창한 타이틀에 한참 못 미치는 실전성능 때문.
호준포나 위원포 등의 화기들도 서양식 화기인 불랑기포와 홍이포가 들어온 이후에는 주력에서 밀려났다. 이런 현상은 조선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소형 불랑기가 주력 지원 화기가 되는 시점의 조선의 호준포를 보면 내부 구조부터가 탄환 발사시 제대로 명중하기 힘든 구조를 하고 있고, 용도도 신호용이었다.
한편 총검/다총신 구조가 보이는 핸드캐논류 등 혁신적(?)인 기능을 갖춘 무기들이 실린 병서들은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내용 면에서도 서구 유럽의 총포류에 대한 정보도 같이 실려있어 유럽 총포류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명 초기에 병력은 120만에 가까웠고 명 말기에 가면 군대의 숫자가 크게 증가해서 장부상의 총 병력은 3백만에 달하기도 했지만 실제 병력은 이와 달리 100만 안팎을 유지했으며 명 말기의 병력 동원이 전성기때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진 않은 상태였다.[20] 무엇보다 전성기 시절에는 조선과 심각한 갈등 및 군사적 충돌을 하지 않았고 조선의 관심 밖인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21] 조선 사서를 기준으로 살피면 실제보다 적게 느껴진다.
물론 명나라 역시 장부상 적힌 병력이 전부 상비군이 아니며 실제 병력의 대부분은 조선처럼 전쟁 터지면 예비군마냥 끌어와서 동원하는 제도였다. 게다가 장부상 총병력 300만과 대조적으로 실제로는 그 징집병조차 10만을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22] 그래서 말기에 나라 꼴이 엉망이 되자 장부에 적힌 병력을 동원할때는 정작 군벌들이 알아서 모은 병력에 의존했던 것이다.
또한, 명 말기에는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였기 때문에 그런 규율을 갖춘 부대를 양성하기에는 부족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된 뒤에는 좋은 군인을 양성하는데 시간과 돈이 필요했지만 명 말기에 가면 재정의 악화로 이게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 이러한 문제점은 명나라 황제들이랑 대신들과 장수들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딱히 명쾌한 해결책이 없었다. 특히 이때부터 명나라는 국가 막장 테크를 겪게 되는 터라 답이 더욱 없었다.
사실 실제 병력이 장부상 병력보다 적은 이유는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하는 주류 사학의 설명을 보면 근대 이전의 제국들의 경우에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인구와 영토를 완전히 효율적으로 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만 봐도 실제 인구에 비해 세금을 걷거나 파악하고 있는 인구는 적은 편이었다. 학설에 따라 명나라의 실제 인구를 어느 정도로 잡느냐에 따라서 1억이 넘는 인구임에도 대략 3,000만 ~ 6,000만 정도의 인구밖에 파악하지 못해서[23] 명 정부에서 어디서 무슨일을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유목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농경제국들은 압도적인 국력을 가졌음에도 장부상의 국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났다. 말이 좋아 발휘지, 오히려 국정이 어지러워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부실해진 상황에서 지방의 실권자나 군벌 등이 독립 혹은 반란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특히 거대한 제국들의 역사를 보면 도시나 실력자들끼리 위급한 상황에서 칼을 거꾸로 잡거나 적에게 협력하기도 하고 겉으로 보기에 통제 불능 상태에 쉽게 빠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전근대에는 현실적으로 중앙정부가 지방의 인구와 영토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도 지방 세력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구체적으로 알렉산더, 한니발의 침공 때를 보면 페르시아나 로마도 칼을 거꾸로 잡는 도시나 실력자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로마 중부 지방의 최대 도시인 카푸아의 통수는 로마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24] 물론 반대로 카르타고에 통수를 치고 로마에 붙은 도시들도 존재했다.
간단히 말해서, 명나라 정도 규모의 국가가 제대로 국내 장악력을 확보한 상태에서 병력을 동원한다면 100만 대군쯤 유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전근대 사회의 거대 제국 입장에서 <제대로 된 국내(특히 변방) 장악력을 확보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 쉽지 않은 정치적 과제였던 것. 특히 통신과 교통수단의 한계 속에서 중앙정부가 조금이라도 삐끗만 하면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는 상황>은 쉽게 발생했고, 이렇게 중앙정부의 통제 바깥으로 벗어난 지방들이 최악의 경우 칼을 거꾸로 잡아버리거나, 그보다는 낫더라도 중앙정부가 통치력을 상실하여 그 지역의 인력과 자원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게임으로 역사를 배우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하면서 궁병 뽑는데 고향이 추수기라고 중간에 때려치고 막으려고 들면 지급한 활이랑 화살을 플레이어한테 들이대는 일은 없으니 자꾸 전근대 제국들의 장부상, 서류상 기록들만 보고 이 나라는 몇만명을 동원할수 있는데 무슨 전투에서 졌으니 약체네, 이런 비전문적인 호사가적 인식만 도는것이다. 대부분 전근대 국가들한텐 애초에 저 장부상의 국력을 동원한다는거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과제이고, 현대 국가처럼 속편하게 수도 중앙 조정에서 말 한마디 내리면 다른 그 지역 영주나 교회 세력, 유지 세력의 필터링을 안 거치고 직접 인력과 자원을 뽑아 쓸수 있는 나라는 아예 나라 시작 자체를 지방세력 뿌리뽑는걸로 시작했고, 특유의 지형이랑 대외적 여건 덕분에 이게 가능했던 이조 조선 말고는 잘 없었다.
이렇게 되면 거대한 영토와 인구 내에서 뽑혀 나오는 국력=군사력을 중앙정부가 제대로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봉건제도의 도입, 즉 중앙정부의 영향력과 권위 없이도 스스로 유지가능한 반독립적 지방세력의 육성이었지만... 이 방식은 반 독립적 지방세력=사실상 군벌인 특성상 중앙정부의 영향력과 권위, 통제력이 무너질 경우 군사력이 무너질 가능성은 낮아지는 대신 아예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립을 시도하거나 칼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거꾸로 잡아 중앙정부에 도전할 가능성인 엄청나게 높아진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전근대 중앙집권제국의 모범격인 중국 역사에서도 이런 사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훨씬 더 명확하고 밀도높은 유사사례로 동로마 제국의 사례를 꼽아볼수도 있을 것이다. 테마 제도가 군사력의 주축이었던 시절, 동로마 제국은 잦은 정변과 황제/왕조 교체속에서도 항상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지역에 대한 행정권과 군사력을 가진 반독립적 제후인 스트라테고스들이 언제든지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은 그 자체가 정변과 정국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 콤니노스 왕조가 변경 테마들의 복구를 사실상 포기하고 프로니아 제도를 통해 황제와 중앙정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는 중앙군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재편성 한 이후에는 일단 지방 군사력의 정변 위험성 자체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문제는 로마사의 가장 탁월한 암군이자 폭군 중 하나인 안드로니코스 1세의 즉위+그 후 등장한 앙겔로스 왕조 출신 황제들의 평균적인 무능으로 중앙정부의 권위와 영향력, 통제력이 실추되자 곧 제국의 군사력 자체가 와해되어 제국을 노리던 외적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것. 본래 전면적 대결을 통해 비잔티움을 무너트릴 정도의 세력이었다고는 보기 힘든 4차 십자군이지만 중앙정부의 혼란과 그로 인한 군사력 자체의 와해라는 빈틈을 찔리자 이를 알아차린 외적들이 침공해오면서 제국 자체가 무력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테마군과 같은 반독립적 군사력 기반이 있는 상태였다면 중앙정부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자체는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런 군사력이 있었다면 4차 십자군의 공격을 해당 군 지휘관의 역량으로 격퇴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실제 역사보다는 높을것이다. 대신 이 군사력에 의해 무능한 황제가 퇴출되었을 가능성도 높긴 한데 그거야 어쩔 수 없는 황제 자기 팔자다. 어차피 여기는 황제랑 기관은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개별 왕가나 왕사에는 큰 중요성을 두지도 않는 동로마 제국이니 황제 혼자 팔자 망하는거야 나라가 망하는것도 아니다. 하지만 중앙집권화된 군사력은 중앙정부의 혼란으로 쉽게 무력화되었고, 이 때문에 행정시스템의 중심인 수도를 외적에게 빼앗기자 더욱더 나락으로...
명 후기의 군사적 무능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할 것인데, 명은 이전까지의 중국 왕조들과 비교해서도 명백하게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했고, 지방의 반독립적인 군벌 형성을 가능한 한 억제하려고 들었다. 그 결과로 중앙집권화되어 황제의 정부의 권위 아래 복속된 군대를 구축했지만... 문제는 이 군대가 중앙정부가 혼란스럽고 무력해진 상황에서는 그에 비례하여 동원력과 역량을 상실하여 외침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북송과 조선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다가 똑같이 나쁜 결과를 맞이한다. 시대는 약간 이르지만 서양에서는 부르고뉴 공국이 이렇게 현대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대, 저지대 땅을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제 3세력으로 일으키려고했고 성공 직전까지 갔다가 낭시 전투에서 이 일련의 프로젝트의 수장인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머리에 반쪽나고 죽으면서 아예 나라 자체가 공중분해됐고, 나머지 16-17세기의 서유럽의 전쟁과 외교사는 아예 오스트리아-스페인 양쪽 합스부르크 세력이 발루아-부르봉 프랑스가 이 증발한 부르고뉴 공국의 유산을 누가 먹을것이가를 두고 펼쳐진다. 이런만큼 현대와서는 중앙집권화된 베스트팔렌식 국민국가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정치형태가 되었지만 전근대 국가들을 근대 국가의 기준만으로 판단해선 생산적인 역사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는 현재와 같은 민족주의도 거의 없었고 이방인보다는 이웃과 더 심한 원한 혹은 불만의 역사가 있을 때도 있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쉬웠다. 그 유명한 로마군도 자세히 알아보면 제국의 저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다녔기 때문에 은근히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세력을 잃기도 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송응창도 조선 대신들과 장수들이 명나라 군사들의 대민 약탈을 항의하자 사과하며 자기 부하들이 기강이 없어서 약탈이 심하다는 걸 인정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재정악화로 병사들에게 제대로 급여를 주지못하자[25] 명나라 내에서도 병사들의 대민 약탈이 심각해졌으며 아예 병사들이 대규모로 탈영하여 도적이 되거나 농민 반란에 가담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
여기에 명나라가 군인의 처우가 나쁘며 사회적인 지위도 낮은것이 한몫했다. 특히 명은 군인들에 대한 급여도 박하다보니 군인들이 생계를 위해선 부업을 해야만 하는 처지였는데, 문제는 이 군인들의 부업이 병사들을 각종 노역과 돈벌이에 강제로 동원하였던것이다. 게다가 장교들은 부수입을 벌려고 뇌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로 인해 군대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진다. 이외에도 장교들이 장부상에 병력을 실제 병력보다 더 많게 보고하는 유령 군인들을 만들어내고 보고하여 예산을 허위로 보고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이 타내어 횡령하거나 병사들의 급여를 착복하는 행위까지 저지른다. 이렇게 병사들이 군사훈련과 노역에 시달리며 보수도 형편없고 이마저도 제대로 나오지 않다보니 나중에 가면 명에서는 군대에 가는것을 두려워하고 기피하게 된다. 돈있는 사람들은 장교와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병역을 면제시키고 돈이 없어서 강제로 군대에 오게된 사람들은 고된 군 생활을 견딜수가 없어 탈영이 급속도로 증가하게되니 나중에가면 명나라는 군대가 제대로 싸울 병력이 없는 막장이 되고 만다. 이는 가정제 때 알칸 칸의 몽골군이 침공해온 경술의 변에서 제대로 드러나는데 당시 명군의 중앙군인 금군부터가 막장이었는데 문서상으로만 10만명이지 실제로는 4~5만밖에 없었고 태반이 노약자이며 나머지 절반도 제독, 대신들의 하인이었으며 무기와 갑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더 심하게는 모집한 근왕병 5만명도 지원하러 오는 도중에 전부 탈영하는 사태가 터져 병부상서 정여기가 책임추궁으로 처형당하는일까지 발생했다. 사실 정여기는 무고했으나 당시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인 엄숭이 책임추궁을 두려워하여 정여기에게 누명을 씌워 죽게 한것이다.
당장에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만 해도 탈영한 병사 출신이다. 이때문에 당시 명나라에서는 백성들이 대민 약탈을 일삼는 병사들을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특히 지나치게 많은 병력은 군비 지출을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게 만들어 재정을 압박했기에 나중에가면 국고를 파탄내고 말았다.
게다가 명나라군도 알고보면 낯 뜨거운 전적이 많아서 몽골군에게 대패하고 황제가 사로잡히며 수도까지 공격당하는 토목의 변과 알탄 칸의 몽골군에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약탈당하는 경술의 변 등의 굴욕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그나마 몽골과 싸우기라도 했던 토목의 변과 달리 경술의 변은 이보다 더 최악이었는데 이때 명나라군은 몽골군과 싸우지도 않고 성에 들어가 수비만 했으며[26] 오히려 백성들을 약탈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러다보니 경술의 변에서는 몽골군에게 20만명의 백성들이 학살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며 200만 마리의 가축을 빼앗기고 황릉들까지 약탈당하여 토목의 변에 지지않는 굴욕을 겪었다. 만력 3대정도 임진왜란이야 명의 책임이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나머지 둘은 초반에 반군에게 대패하는 바람에 제대로 진압하는데 실패한터라 반란의 규모가 커져버렸고 많은 병력과 자금을 투입해서야 겨우 진압할수 있었다. 말기에는 이자성과 싸우는 동안에도 진압에 동원한 20만 대군이 이자성의 농민군을 두려워하여 싸우지도 않고 달아난다거나, 협공하기로 하고는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서 공격한 부대만 격파당한다거나 하는 추태를 여러번 선보이기도 했다. 사르후 전투에서도 후금군을 상대로 우세한 전력임에도 군 부대들과 사령관들이 서로 협조하지 않고 각자 행동하다가 이를 알아차린 후금군에게 공격당하여 대참패를 당하는데, 오죽하면 같이 참전한 조선군이 군기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후금군에게 포위된 상태였는데도 명군 패잔병들의 합류를 거부했을 정도였다. 흔히들 명나라가 단순히 만주에서 일어난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멸망당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실제 명을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것은 이자성과 장헌충으로 대표되는 농민 반란군이다.[27]
물론 전체적인 전력은 이자성 등의 농민군보다 월등했으며, 명나라가 농민군에게 멸망당하는 지경까지 간 배경에는 명의 정예군이 청군을 대비하느라 발이 묶여서 이자성군을 요격하지 못한 점이 크다. 특히 청나라의 위협이 심화되어 명군이 북방에 집중해야 하기 전에는 이자성 등의 농민군은 명나라 관군의 진압으로 대부분 궤멸당한 상태였다. 이자성이 농민군의 중심이 된 것도 사실 관군의 진압으로 이자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사망했기 때문이며, 이때는 이자성군도 무너져서 이자성 역시 한동안 숨어지냈다. 1639년경이 되면 명나라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로 대부분의 병력과 지휘부가 무너져서 끝내 이자성도 살아남은 부하 18명만 데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문제는 명나라 말기로 갈수록 명나라 군대 중에서 병사들과 장교들을 보면 실질적으로 군대의 기본을 갖춘 전력의 비율이 높지 않았다는 데 있다.오삼계가 이끄는 수만 병력이 북방에서 버텨주는데 이자성을 막을 병력이 없어서 베이징이 함락됐다는 데서 당시 명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를 알아차린 청나라가 다시 침공해와 북쪽에서 활개를 치게 되니까 명나라에서는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던 주요 장교 및 정예병들을 북쪽으로 전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사르후 전투와 송산 전투에서 청나라에게 대패하면서 많은 정예병력을 상실하였기에 더이상 청나라에 공세를 할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고 만다. 그 뒤에 실력있는 장교와 정예병이 빠진 진압군은 위에서 언급한 추태를 벌였고 다시 재기하여 공격해온 이자성에게 속속 궤멸당했고 이자성이 베이징으로 진격했을때는 더이상 막을수가 없었다.
한편 수군의 경우는 난징(남경)의 현무 호라는 조금 큰 연못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명을 바다로 침략하고 약탈했던 왜구와의 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호수가 현무 호였다.
명군의 전투력은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막장화되는 시기 이전에도 동시기 조선군과 비교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는데[28]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다.
다양한 형태의 명나라 갑옷들을 복원한 사진들
3. 여담
- 한국의 역사배경 온라인 게임들에서 제일 유명한 게임 중 하나인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정작 시대배경이 임진왜란 당시인 16세기~17세기의 조선, 일본, 명나라, 대만인데도 불구하고 명나라풍스러운 의상이 하나도 없다. 이는 한국사람들에게 중국 문화 중 명나라 문화가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와 한나라 같은 고대 중국풍의 한푸 문화나 또는 만주족이 중국대륙을 차지하고 세운 청나라 문화[29]만큼 많이 알려지지 못하고 친숙하지 못한 탓이다.
- 명나라 조정이 그토록 정성을 다해 양성한 정예 부대인 관녕철기(關寧鐵騎)는 1644년 지휘관 오삼계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여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장악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헌데 정작 명나라 조정이 증오했던 이자성과 장헌충 등의 농민 반란군들은 지휘관이 죽자,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에 항복하여 최후까지 남명을 지키기 위해 청나라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1618년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출신의 코사크인 이반 페트린이 이끈 비공식 대표단을 명나라로 보냈는데, 그들이 중국을 방문하여 본 명나라 군사들은 키가 작고 볼품없는 말을 타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는 명나라 군사들이 탄 말들이 유럽산 말보다 키가 작고 땅딸막한 몽골산 품종이었기 때문이다.[1] 2:23에서 등장하는데 젊은 시절의 만력제이다. 그림을 보면 만력제가 직접 갑주를 입고 무장하며 말을 타고 있는데 이는 명나라 황제의 갑주와 무기, 말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알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2] 현재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3] 해당 그림에 등장하는 코끼리들은 의전용에 가깝다.[4]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81~82쪽[5] 다만 남원 전투의 경우 양원이 전투 준비가 잘 된 교룡산성을 놔두고 읍성인 남원성에서 전투를 벌인 것도 패전의 이유 중 하나이다. 게다가 성이 함락되자 도주한 양원과 휘하 기병 50기를 제외한 명나라 군대 3천명은 조선군민들과 함께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멸했다.[6] 이 또한 명나라는 화폐 경제, 조선에서는 현물 경제라는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명나라 군사들은 봉급으로 은을 받아 그걸로 식량 및 무기를 구입했는데 조선에서는 이게 통하지가 않았다.[7]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조선, 명, 왜 3국의 모든 기록에도 명나라군의 조총병이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임진왜란에서는 절강병법의 일환으로 소수 운용 된것으로 보이며, 조선과 왜에 비하면 대량생산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혹은 조선, 일본과 다르게 병력 징집시 군의 규모가 너무 거대해져서 조총의 대량 보급이 어려워서 그럴수도 있다.)[8] 다만 공정성을 위해 기술하자면 명군의 이러한 민간인 약탈은 외국 땅인 조선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자국 영토인 명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예로 명나라 말기의 장군이었던 좌량옥(左良玉)의 군대는 무창에 들어가서 현지 백성들을 상대로 마구잡이로 약탈과 강간을 저질러서 왕족이나 일반 주민들이나 모두 겁에 질려 산속으로 도망쳤으며, 무창에서 좌량옥 군대가 떠나자 "이제 드디어 살았다!"라고 환호했다는 기록도 있다.[9] 이만한 병력을 다른 지역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사막과 초원지대로 보내자면 수십만 대군의 병참은 오로지 공격측인 명나라 측에서 담당하여야 한다. 이런식의 원정은 영락제 시절 전성기 명나라의 국력과 행정망이 뒷받침 해주기에 가능한 것이었다.[10] 앞서 언급했듯 어디까지나 장부상이고 실제와는 달랐으며 나라가 어지러울땐 제대로 동원 못해 쩔쩔 매는 모습을 보였다.[11] 기사. 만주에 대한 점유 시도도 있었다.[12] 일화 중 명군이 조선에서 만든 두부를 매우 좋아해서 콩을 총동원해 두부를 만들어 대접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13] 한국전쟁 초반부에는 북한의 조선인민군이 주력이었으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거의 궤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고, 중국군과 연합군의 전투 구도로 전환되었다.[14] 실제로 명나라 군대를 그린 그림들에서 등장한 명나라 기병들의 갑주를 자세히 살펴보면 몽골인, 만주인이 입는 두정갑과 비슷하다.[15] 이민족의 약탈과 침공, 내부의 반란, 경제사정의 악화.[16] 특히나 이때 명나라는 보배의 난과 양응룡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반군 진압에도 군대를 투입한 상황인데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어 사실상 양면전쟁을 치르고 있었다.[17]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경략 송응창의 경우 병사들이 조선 민간인에게 약탈, 강간, 살해를 저지르면 참수형에 처하라고 엄포를 놓았다.[18] 지방정부인 양광총독부에서만 500문에 달하는 홍이포를 제작할 정도였다.[19] 특히 당시 유럽 국가들이 주철대포의 내구성에 골머리를 앓았던것과 달리 명나라에서는 겉은 구리 속은 주철로 주조하는 이중구조로 내구성이 강한 대포를 주조하였다.[20] 학자들이 연구한 명나라 말기의 실제 동원 병력은 84만명이며 기병은 3만명에 불과했다.[21] 사실 조선의 관심 밖의 지역인 몽골과, 동남아시아가 명나라한테선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22] 실제로 명은 사르후 전투에서 10만을 동원했고 조선군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였으나 대패하자 영원성 전투에서 막아낼때까지 후금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또한 그 때는 명의 재정이 파탄난 상황이며 명나라 전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23] 명이 호적에서 파악한 최대 인구는 66,598,337명이나, 학자들의 연구에서 실제 명의 최대 인구는 이보다 더 많은 1억 6천만에서 2억으로 보고 있다.[24] 물론 나중에 로마가 이기고 나서 카푸아는 로마한테 보복당한다.[25] 사실 재정악화로 급여를 못준것도 있지만 부패한 장교들이 병사들의 급여를 착복하고 횡령한것도 컷다.[26] 사실 토목보의 변 때도 몽골군을 상대로 출전한 명군 50만은 말이 50만이지 실질적으로는 8만 정도의 군사가 엄청나게 뻥튀기된거라는 주장도 있으며(출처:http://m.egloos.zum.com/xuecheng/v/4433042)그마저도 조선 방식대로 하면 그냥 징병 명단에 들어간 농민들 다 끌어다가 조직한 것과 같은 부대에 불과했다.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할 수밖에 없었다. 명 조정의 실권자인 엄숭도 이를 인정하며 이 상태에서 몽골군과 싸우면 패할것이 뻔해서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으려고 장군들에게 몽골군과 싸우지 말고 수비만 하라고 한것이다. 문제는 조정과 군대가 패배와 책임추궁을 두려워하여 성에 들어가 수비만 하고 싸우지를 않으니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학살과 약탈을 당해도 명나라가 대처를 못하게 되었다.[27]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도 팔기군은 고작 18만 명에 불과하지만, 국내의 떠돌이 도적인 유적들은 그 수가 60만이 넘으니 이들이야말로 진짜 명나라의 화근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28] 다만 이건 명나라군이 약한게 아니라 반대로 조선군이 당시 아시아 최강이었던 명나라군과 밀리지 않을만큼 전투력이 높았다고 볼 수도 있다.[29] 전자의 경우 초한지와 삼국지의 영향으로 인지도가 높으며, 2000년대 중후반에는 드라마 주몽의 인기 또한 한나라의 고대 중국풍 한푸 문화가 많이 알려지는 데 한 몫 했다. 후자의 경우 전세계적으로 중국풍 하면 청나라 문화가 가장 많이 알려진 것도 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의 주도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나라 미화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은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청나라를 정통 중국 왕조로 여기지 않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원나라나 청나라 같은 북방 유목민족 왕조들의 중국 지배를 매우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청나라는 원나라에 비하면 한민족과 한족을 비교적 단기간에 쉽게 굴복시킨 만큼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롤모델로 삼을 만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