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둔전(屯田)은 국가에서 재정 확보 등을 목표로 계획적으로 사람들을 투입해서 국유지인 땅을 경작하는 제도이다.2. 종류
'차전차경(且戰且耕), 차경차수(且耕且守)'의 이념하에 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군인들을 동원해 만드는 군둔(軍屯)이 유명하지만 민간인을 둔전에 투입시키는 민둔(民屯)도 매우 많았으며 양자가 공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2.1. 군둔(軍屯)
병사들의 생활기반을 만들어주고 병참도 어느 정도 충족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둔전이다. 주로 국경 지방이나 군사 요충지 근방에 집중해서 만들어진다.병력의 육성과 유지를 위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세금은 없거나 저렴한 것이 보통이지만 병역의 의무가 세습되는 세병제나 수도권인 장안, 낙양, 태원 주변에 토지를 지급하는 것 외에는 세병제나 마찬가지인 부병제처럼 군둔에 소속된 인원들에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사라지고 평생을 복무하는 징병제나 마찬가지라서 군사복무 의지가 점점 하강하는 큰 단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근대 시대에는 어제까지 농사를 짓던 민간인을 긴급하게 강제 징집해서 전장에 허수아비같이 세워만 놓아도 양호한 편이라고 평가받을 수준으로 군대의 질이 낮았으므로 일정한 질을 갖춘, 대규모 병력을 저비용으로 동원할 수 있으면서도, 해당 군대가 반란세력이 되는 것은 최소화했다는 장점이 당시의 중앙정부에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기에 명나라의 위소제나 고려의 2군 6위, 조선의 오위처럼 둔전이라는 이름만 붙이지 않았지 군민일체 병제라는 이론을 만들어서 사실상 부병제를 살짝 고친 수준의 군둔이 지속되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민둔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면 중앙이나 지방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사유지를 계속 확장시키는 경우에는 둔전이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군둔에 소속된 인원들이 토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거나 부족하게 받는 바람에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져서 순식간에 군사력이 붕괴된다.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에 군사력의 중심이 오군영으로 넘어가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2.2. 민둔(民屯)
전란으로 파괴된 황무지나 주인이 없어진 무주지를 국가 소유의 토지로 만든 후에 농민들을 투입해서 개간하여 식량생산량을 늘리고 국고를 충족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둔전이다. 관둔(官屯)이라고도 불린다.기본적으로 경제성과 세금 확보를 위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세금이 상당히 높은 것이 보통이다. 토지의 빠른 개간을 위해서 농기구나 경작용 소를 빌려주고 개간에 착수하면 일정기간동안은 세금을 감면하거나 면제해주는 제도가 존재하긴 하지만 일단 개간이 완료되면 세금과 대여료등 각종 명목으로 둔전민들에게 뜯어가는 것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고 세금이 너무 많아서 평시에는 일반 농민들이 둔전 따위에는 접근조차 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혼란기가 지나가면 민둔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으며 중앙이나 지방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사유지를 계속 확장시키는 경우에는 둔전이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둔전이 해산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따라서 민둔은 먹고 살길이 막막한 난세 같은 시대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실제로 민둔의 경우에는 황무지를 개간한 농민에게 소유를 인정해주고 다년간 면세를 해준다든가, 소를 빌려준다든가 하는 경우에는 유랑민을 정착시켜 국민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과거에는 지금보다도 황무지나 유랑민이 많았는데 이런 땅과 사람을 놀리기는 아까운데 민간 자체적인 개척이 힘들다면 국가가 나설 수 밖에 없고 그럼 어떻게 되든 둔전과 비슷해진다.
2.3. 혼합
오나라의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처럼 아예 둔전과 둔전에 소속된 인원을 모조리 신하들이 식읍처럼 병호를 세습할 수 있으며 평시에도 병호를 마음대로 부리면서 사실상 사병으로 만들어주는 경우가 있다. 주로 국가의 중앙권력이 약하고 미개척지가 많으며 호족이 강성할 경우에 자주 발생한다.세습령병제도 원칙은 군둔(軍屯)만 해당되지만 실제로는 민둔(民屯)도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고 서류상으로만 살짝 고쳐서 모두 군둔 취급하는 경우도 흔했다.
군둔과 민둔의 성격을 모두 가지기 때문에 둔전에 소속된 주민들은 병역의 의무가 부과되는데 세금까지 압도적으로 많은 개막장급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세습령병제로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자가 자신의 사병 세력을 유지할 목적으로 평소에 통치에 신경을 쓰고 둔전을 관리하면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으나 해당 지역과 연관이 없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가 세습령병제의 지휘관이 되면 둔전을 철저하게 착취하면서 말 그대로 둔전이 폐허가 된다.
3. 장점
3.1. 군의 자체 수익사업
둔전은 근본적으로 군이 경제활동을 통해 재정의 일부나마 자급자족하는 걸 목적으로 한다. 흔히 전근대에만 행해진 제도로 이해하기 쉽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에선 군이 수익사업을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 취지는 현대에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기본적으로 군은 어마어마한 유지비가 들어가는 집단이다. 영내 숙영 장병들을 삼시 세끼 먹여야 함은 기본이고, 직업군인과 군무원으로 한정하더라도 최소한 사회 평균은 만족하는 봉급을 지불해야 하며,[1] 이런 집단을 적게는 수만, 많게는 백만 단위로 굴려야 한다. 그리고 군이 아무런 수익사업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혈세에서 빠져나간다. 이 문제는 국가 전반의 생산력이 열악하던 산업화 이전 시대의 국가에서는 더욱 절실했다.
농사라고 한정지으니 기이해보이는 것일 뿐, 군이 재정문제를 경감하기 위해 수익사업을 한다는 개념 자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다. 가령 이 분야의 끝판왕인 이집트군은[2] 군대에서 공장, 병원, 클럽, 심지어 주유소까지 굴려서 재정 문제를 경감하고 있으며,[3] 이집트만큼 극단적인 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군 역시 군 골프장, 체력단련장, 호텔, 콘도 등으로 복지기금에 보태고 있다. 전근대엔 이 수익사업이 둔전이었다.
애초에 수익사업을 굴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군축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란 반론은 군사 분야의 핵심을 간과한 것이다. 안보 상황에서 요구되는 군대의 규모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정해져 있으며 모든 국가는 경제 여건과는 별개로 최소한의 국방을 갖출 수 있는 군대를 보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전력도 대체로 대결 구도가 심화됨에 따라 늘어나는 게 보통이고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특성까지 있다.
그러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를 가진 군대는 항상 보유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가 되는 상황에서 상비군으로 항시적 운영하는 것이 부담이라면 평시에 훈련을 해두는 예비군을 대량 운영해야 한다. 그러나 예비군을 상비군에 근접할 수준으로 정예화할 수 있는 경우는 전근대에는 생활 자체가 군대 복무와 비슷한 유목민이거나 혼란기를 종결하고 국가를 건국한 건국기나 국력이 최강으로 올라간 최전성기같은 경우나 한시적으로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보유한 군대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수도에서 국왕을 호위하고 왕궁을 수비하는 소수 친위대를 제외하면 군대가 껍데기만 남고 사실상 해체상태에 돌입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예비군 정예화 따위는 바랄 수 없다. 여기에 더해서 예비군을 대량동원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상비군이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를 가지고 있어야 예비군이 동원완료되는 최소한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다. 조선의 제승방략이 붕괴된 원인 중에서 중요급 원인 중 하나로 뽑히는 것이 상비군의 숫자가 크게 부족해서 부산진 전투와 동래성 전투에서 용전분투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방어선이 빠르게 무너지며 제승방략으로 중앙 조정에서 파견된 장수와 현지에서 집결한 병력이 시간부족으로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꼽힌다.
상비군이나 예비군 대량 편성이 어렵다면 전시에만 고용하는 용병을 쓸 수도 있다. 용병은 상비군보다 돈이 더 들지만, 계약 기간에만 돈을 주면 된다는 이점이 있다. 다만 이마저도 동아시아에서는 애초에 고용할 용병이 없었고 인구수가 많아서 대규모 병력이 필요했으므로 용병으로 때우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했다.
따라서 선군정치를 하는 북한의 사례가 너무 극단적일 뿐이지, 일단 필요해서 모집한 군대를 그나마 효율적으로 유지하려면 '적정한' 수익사업 모델은 분명히 필요하다.
3.2. 국가의 세금 확보
주로 민둔(民屯)에 적용되는 항목으로 황무지나 무주지를 개간해서 농사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기본적인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곳이 늘어나서 재정 확보에 도움이 된다.그리고 황무지나 무주지는 보통 국가가 소유한 토지이며 개간을 위해서 농기구와 경작용 소를 빌려주는 등 투자를 해놓았고 둔전의 주민들도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기본적인 세금과 함께 대여료등 각종 명목의 돈을 추가로 징수하면 면적에 비해 엄청난 세금을 거둘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전근대의 국가들은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권력자들이 사유지를 자꾸만 증가시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일반 양민들의 토지가 모조리 권력자의 사유지로 편입되면서 면세혜택까지 받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국가 재정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지는데 둔전이라도 제대로 국가의 중앙정부가 꽉 쥐고 있다면 기본적인 수입이 보장되므로 국가 재정 붕괴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조의 민둔이다. 조조의 민둔은 영토 내부의 여러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무려 50% - 60%나 되는 세금을 징수하여 국가 재정으로 활용했다.
3.3. 병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
현대식 도로도 없고 철도도 없는 시대에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고 험해지면, 운반하는 자들의 식량으로 그 이상이 소진될 수 있다. 이 경우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양곡이 아무리 많아도 그 양식을 전달할 수가 없으니 소용이 없어진다. 게다가 접전지의 병졸들에게 보급하려면 전투로 피난가는 백성들은 민심도 흉흉한데다가 도적의 습격을 배제할 수 없고, 만약 적 병사들이 보급로를 예상하고 습격하여 군량을 고스란히 넘겨줬다간 오히려 아군에게는 독이 되고 적에게는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버린다.그럴 바에야 세금을 수취하여 군대에 지급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적당한 곳에 농사 지을 땅을 지급하는 것으로 보수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농토는 군 복무의 대가이기에 면세되었다. 애초에 면세 조치 자체가 병력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이유도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고 둔전을 설치했는데 그 둔전에서, 변방 같은 먼 곳에서 나는 수확물을 세금으로 거두자니 또 운송 비용 문제가 벌어지므로 반드시 면세가 필요하기 때문에 군둔에 대한 면세 조치는 보편적으로 시행되는 경향이 높았다.
그리고 둔전만으로는 병참 문제를 일부분만 해결할 수 있지 병참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테마 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둔전병들은 전투력 유지를 위해서 병력들이 자체적으로 무기와 갑옷과 장비를 유지해야 하므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해주고 군사력에 투자할 여유분까지 확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지급되는 토지의 양과 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여줄 필요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군사적 요충지나 변경에 설치된 둔전의 경우에는 농사짓기가 힘들어서 둔전으로 일군 밭에서 나오는 소출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별도의 봉급이나 하사품을 나누어줄 필요까지 발생한다. 여기에 더해서 전투가 벌어지거나 원거리 원정에 둔전병을 투입할 경우에는 국가가 추가적인 보급과 물자를 지원하고 공적에 따른 포상도 두둑하게 주어야 한다.
이러한 특성은 둔전제 뿐 아니라 봉건제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이므로 봉건제를 통해서 지방 영주와 기사들을 소집한 중앙정부는 항상 계약에 따라서 정해진 기간동안만 병력 동원이 가능했고 해당 기간 안에서도 별도의 병참과 하사품을 준비해야 했으며 유사시 휘하 병력의 계약기간 연장을 위한 준비와 병참 및 막대한 댓가도 따로 마련해두어야 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둔전의 특징인 국가적 비용감소만 노리고 무리한 조치를 한 끝에 둔전에서 나오는 소출로 둔전병의 삶을 유지할 수 없어서 군사제도 자체가 붕괴되는 일이 잦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병제의 붕괴다.
3.4.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
대개 군대가 주둔하는 곳은 국경 등 국가의 외곽 지역이므로 백성들의 수가 적고 황무지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곳을 병사들을 이용해 개간하면 그 자체로 이득이고, 이 병사들이 군대에서 퇴역한 이후 자연스럽게 주변에 정착하면 인구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 이 경우 군둔 뿐만 아니라 민둔도 같이 사용한다.조선이 4군 6진같은 북방 영토를 개척할때 둔전으로 상당한 이득을 봤고, 충무공 이순신도 녹둔도에서 둔전을 관리한 적이 있다.
3.5. 백성들을 땅에 묶어둘 수 있다
기본적으로 둔전에 소속된 인원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으므로 땅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평소에는 통제가 가해지기 때문에 토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전쟁이 나면 통제력이 약해지므로 둔전민들도 당연히 피난을 가겠지만, 사람이 몸과 약간의 재산까지는 들고갈 수 있어도 땅은 떼어갈 수가 없다. 그리고 안전한 후방까지 피난하는데 필요한 대규모의 식량을 조달하고 운반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근처의 정부군이나 의용병이 수비하는 요새같은 곳으로 피난을 갈 수 밖에 없다.
둔전민이 천신만고끝에 후방의 안전한 지역까지 도주하더라도 집도 돈도 없는 떠돌이가 되며 유랑민을 붙잡아다가 다시 변경이나 둔전으로 보내는 시스템이 갖추어진 국가가 많다. 따라서 둔전민의 대다수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자기 땅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주민들이 되돌아오면 당연히 자기 살 마을 정도는 다시 가꾸어놓을 것이므로 변경지역이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런 효과는 주로 동로마 제국의 테마 제도에서 많이 나타났다.
3.6. 농사를 통해 훈련을 일부 대체
육도삼략에서 농사짓는 것을 병기 다루는 것과 연결하기도 했다. 실제로 몇몇 무기의 기원은 농기구에서 발전했다. 과(戈)의 경우가 그런 것. 서양의 경우도 폴암이라 불리는 무기들의 대부분이 농기구에서 유래했으며 동양에서도 편곤은 사용법이 도리깨질과 비슷해서 조선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게다가 둔전제라면 군사 편제가 그대로 농사 작목반이 될테니 팀워크 훈련에도 제격일 것이고, 무기의 사용법을 익히는 게 아니더라도 기초체력 단련으로도 매우 쓸만하다. 도시에서 운동 좀 한다는 청년도 농촌에서 농사로 잔뼈가 굵은 중장년과 체력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농촌이 기계화 등의 이유로 노동강도가 많이 약해졌는데도 그렇다. 옛날에는 농사를 위해 소를 몰고 끌면서, 자연스럽게 군마를 다루는 법과 군마를 먹이는 법도 배운다고 볼 수 있겠다.아래 훈련량 감소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기본적으로 고대 시대의 군대는 요즘의 군대에 비하면 군대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수준으로 심각한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다. 영상 매체의 영향으로 고대 군대도 갑옷을 입고 금속 무기를 들고 진형을 맞춰 싸웠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고대 시대의 군대는 그냥 농민들을 긴급 징집해서 대충 모아둔 무리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극소수의 무사, 귀족 계급 지휘관들을 제외하면 체계적인 훈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줄을 맞춰 걸으며 진형을 유지할 수 있기만 해도 정예병 취급을 받았다.
근현대 군대에서 괜히 제식훈련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다. 공교육이 보편화되고 사회 전체가 체계화된 현대를 사는 사람들로써는 얼른 실감하기 힘들수도 있겠지만, 교육 혜택을 누리기 힘들던 전근대 사회의 평민들에게는 '지휘관이 내린 명령을 알아듣고, 정확하게 그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현대의 경우를 보더라도 한국의 8.15 광복 직후 혼란기에서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냥 시골 청년들을 징집해서 모은 군대에서는 지휘관이 '위험하니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행동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증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아예 21세기에 들어서도 공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못한 후진국 출신, 또는 해당 국가 출신이라도 나이 많은 노동자들 중에는 중요한 업무상 규정을 '그걸 왜 꼭 지켜야하는지 이해가 안가서' 무시하는 이들이 종종 나올 정도이다. 국민개병제가 근대국가의 상징인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국가 구성원에게 '사회적 규범'과 '같은 상식'을 부여하기 이전 시대 평민을 징병한 군대란 그저 창 한자루 들고 모여있을 뿐 제대로 통제하기도 힘든 무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둔전이나 하느라 훈련도 못 받아서 오합지졸이라 까이는 북한군은 커녕, 국어, 사회, 체육수업만 제대로 들은 현대 고등학생 수준만 되어도 고대 - 중세 기준으로는 징병군으로써는 충분히 최정예가 될 수 있다. 이런 시대였기에 그저 농사일을 하며 팀워크를 기르고 농기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유효한 훈련이 될 수 있었다. 이렇듯 어차피 농사 안 짓는다고 그 시간에 대단한 훈련을 받는 것도 아니니 둔전을 해서 식량이라도 제대로 보급하는 군대가 더 유리했다.
3.7. 비상시의 대책
삼국지 시대나 군벌이 난립하는 시대같은 난세에는 체계적인 병참이 불가능해지며 각지에 있는 병력이 스스로 호구지책을 마련하고 전투력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자체적인 병참을 확보하기 위해서 둔전이나 둔전과 비슷한 제도를 운용할 수 밖에 없다.임진왜란의 이순신 제독의 경우에도 조선의 중앙정부인 조정이 서북쪽 국경선 지역인 의주까지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채 긴급피난했고 조선의 국토가 일본군에게 쑥대밭이 되는 상황인지라 조정에서 어떤 것도 지원해줄 수 없었다.
그래서 한산도 일대에서 둔전(농, 어업)을 운용한 예가 있다. 게다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중앙에서 보급이 오지 않아 대부분을 병사 및 피란민들이 생산하는 것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순신은 둔전 운영에도 일가견이 있었는지 궁핍해져 있던 조정에 여유 물자를 종종 보내서 선조가 더 내놓으라고 닦달하고 이순신도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는 주객이 전도된 현상까지 발생할 정도였다.
4. 단점
4.1. 사실상의 농노제
일단 둔전에 거주민이 들어오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지고 신분이 세습된다. 사실상의 농노제나 다름이 없는 것이며 실제로는 영주의 재산으로 간주받아서 영주가 손해를 피하기 위해 세심한 관리를 해주는 농노보다도 못한 비참한 처지로 둔전민이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군둔의 경우에는 병호(兵戶)가 되고 평생동안 복무해야 하며 의무적으로 집단으로 거주해야 했으며 혼인도 같은 병호들끼리만 해야 했다. 병호가 죄를 지으면 민호보다 더 엄격하게 다스렸고 병호에 속한 병사가 배신을 하거나 투항을 하면 가족에게까지 죄가 미치는 연좌제가 실행되었다.
따라서 민간인인 민호(民戶)에게도 차별을 받는 일종의 차별 계급화하여 병호가 되었는데 결혼할 여자를 구하지 못하니 원할한 병력 수급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과부들을 병호와 강제결혼하도록 투입하는 것도 모자라서 강제로 여자를 납치하는 지경까지 발생하게 된다.
민둔도 거주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고 병역의 의무는 없으나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므로 삶의 질이 병호보다 더 안좋아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오나라의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처럼 군둔과 민둔이 합쳐지면 병호의 의무까지 추가되므로 말 그대로 지옥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래서 서민 경제가 어려웠던 전근대 시절조차도 난세가 아니라면 둔전에 접근조차 안하는 것이 일반적인 민심이었다. 덤으로 기존의 둔전에 소속된 인원들은 농노제의 단점처럼 점차 삶의 의욕이 떨어지면서 군둔에서는 쓸만한 병력이 나오지 않게 되고 민둔에서는 농사의 작황이 안좋아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둔전은 난세나 회복기에만 많이 나타나며 그 중에서도 민둔은 특정한 시기에만 중점적으로 운영되고 보통은 특수한 목적으로만 민둔이 유지된다. 그래서 둔전이라고만 부르면 보통은 군둔이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4.2. 운영 난이도가 높음
둔전은 만들어놓았다고 끝이 아니라 중앙정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운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둔이고 민둔이고 간에 이름만 걸어놓은 폐허가 된다.둔전을 제대로 굴리려면 처음부터 인원을 모집할 때 쓸만한 토지를 지급하고 좋은 농기구와 경작용 소나 말을 빌려주며 일정 기간동안은 세금을 아예 면제하거나 크게 감면해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군둔에서 나오는 소출로 병호가 호구지책을 마련하고 스스로 장비를 갖출 수 있으며 민둔의 경우에는 농지 개간이 늘어나고 농업 생산성이 올라가게 된다.
둔전이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라가면 둔전에 손을 대려는 권력자의 시도를 차단해야 한다. 권력자가 사유지를 늘리는 것 자체가 세금을 거둘 수 없는 면세토지가 늘어나며 재정에 많은 타격을 주는데 특히 둔전처럼 국가의 소유지를 권력을 사용해서 사유지로 만들려는 시도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부병제와 그 이후의 제도들이 모두 붕괴된다.
그리고 둔전 거주민의 생활을 항상 잘 관찰하고 보조해줘야 한다. 병호가 몰락하면 당장 쓸만한 병력이 없어지고 민둔이 붕괴되면 재정에 큰 압박이 가해진다. 따라서 병호의 소모를 막기 위해서라도 장거리 원정같은 답없는 짓은 가급적 줄이고 만일 장거리 원정을 실시하게 되면 국가가 따로 병참을 수시로 지급해줘야 하며 원정이 완료되면 계급 상승이나 승진을 포함해서 반드시 큰 보상을 주어야 하며 지급대상도 사실상 해당 원정에 참여한 모든 인원 수준으로 범위가 넓어야 한다.[4] 민둔의 경우라도 조조처럼 50% - 60% 수준의 고리대금식 세금을 거두면 안된다.
하지만 이런 조건이 모두 충족되려면 성군이나 명군이 다스리는 국가의 전성기여야 가능하다. 그래서 둔전으로 국가의 이득만 보겠다고 어설프게 둔전을 도입했다가 말아먹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막장 사례로 러시아 제국이 있다. 19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1세의 발안으로 둔전병 제도를 시작했다. 시행방식은 병사를 국유지 소속 농민으로 하는 것과 국유지 소속 농민을 병사로 하는 것을 모두 실시해서 둔전병을 만들어서 군무와 농업을 겸하게 했다.
1810년 11월 9일,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이후의 소강기에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에 의해 최초의 둔전병 개시를 알렉세이 아라크체예프(Aleksey Arakcheyev) 백작이 수행하게 된다. 시행방법도 매우 거칠어서 모길료프주 지역의 주민 중 일부를 강제로 이주시킨 후에 해당 지역에 둔전병을 정주시킬 계획이었다. 쫒겨난 주민을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강제로 이동시켜서 사망자가 속출할 지경이었다.
1812년에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자 둔전의 설치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1816년 8월 5일에 다시 둔전병을 설치하라는 칙령이 내려지면서 노브고로드주에서 둔전병 개설의 계획이 시작되었다. 1817년부터는 비용절감을 위해서 둔전병을 토지에 정주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농민을 강제로 둔전병으로 만드는 방식이 남부 러시아부터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둔전병은 크게 확대되었으며 한때는 러시아 제국군 병사의 33%가 둔전병이었을 정도다.
둔전병 소속의 마을의 남자는 7살부터 17살까지는 소년병, 청년과 장년층은 병사, 노인은 퇴역병으로 불렸으며 소년병은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된 후 집단생활을 하다가 18세가 되면 병사로 임명된다. 군인 신분으로 간주되므로 군복의 착용을 의무화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농노는 농노 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이라서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고 생활수준이 매우 열악하고 각종 세금의 부담에 시달렸으며 높으신 분들의 도박에 판돈으로 걸리는 등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러시아 둔전병은 러시아 농노보다 더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가정을 파괴당하고 툭하면 채찍질을 당하며 일상생활까지 억압당하는 러시아 둔전병은 창설 초기부터 둔전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이 발생했다. 1819년 주구예프가 주동해서 일으킨 폭동은 앞서 언급한 알렉세이 아라크체예프 백작이 지휘하는 러시아 제국 정규군이 진압했고 313명의 반란병사를 채찍질형에 처했으며 그 중에서 25명이 채찍질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다. 그 후에도 둔전병의 반란이 계속 벌어지고 병력으로서도 반항심이 높고 훈련도도 낮아서 쓸모가 줄어들자 결국 1857년에 알렉산드르 2세가 둔전병을 폐지하면서 마무리된다.
4.3. 과도할 경우 전투력과 수익사업이 주객전도된다
보통 둔전이 너무 잘 돌아갈 때 발생하는 현상으로 군 수익사업의 필요성 자체는 긍정한다 하더라도, 수익사업에 과도하게 치중할 경우 '수익사업도 하는 군대'에서 '총 쏠 줄 아는 공공기관'으로 주객전도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수익사업의 유용성을 아무리 인정한다 하더라도, 군의 전투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이 문제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조선군인데, 적은 재정으로 어떻게든 군을 굴리기 위해 둔전 경작은 기본에, 상업 등의 각종 수익사업도 해야 했고, 토목, 소방(금화군), 역졸, 광산업(취철아병) 등 온갖 공공사업까지 도맡아해야 했다. 심지어 경군(京軍)의 최정예인 훈련도감마저도 자금 조달을 위해 배추 농사를 해야 했는데, 너무 열심히 한 결과 웃프게도 '훈련도감 배추'는 조선 청과물 업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가 된다.
아무튼 이렇게 군이 '생산성 있는' 수익사업을 하고 온갖 공공사업에 군이 관여한 결과, 조선은 '이론상으로는' 거의 군국주의급 병영국가에 가까웠다. 1885년(고종 22년) 당시 사료인 『병액(兵額)』을 보면, 당시 조선군은 장부상 중앙군 기병만 6만5648명이고, 함경도와 평안도를 뺀 나머지 6도의 지방군이 59만9183명이며, 여기에 6도의 속오군 17만8363명이 추가되는 황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최종적으로 총 병력을 합치면 110만명에 이른다.(2009년 12월 23일 국방일보 기사) 게다가 흥선대원군의 혁파 전 실질적 국가최고의결기구였던 비변사는 오늘날의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대응하며, 심지어 명목상 국가최고의결기구인 의정부는 국방기구인 도평의사사가 뿌리이다. 즉 '이론상으로만' 따지면 조선군은 극동의 프로이센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병영국가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서술했듯 실상을 보면 경군 최정예인 훈련도감이 배추 팔고 있었다. 지방군은 물론이고 경군(京軍)까지 '총도 쏠 줄 아는 공공기관'으로 전락한 것이다. 서류상에서 나오는 거대한 병력과는 달리 실질적인 병력 규모는 매우 작으며 훈련 수준도 낮았고 전투 의지도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조선군이었다.
4.4. 농사 부적합 지역이 많다
둔전의 상당수가 위치하는 국경지대의 대부분은 보통 농사에 부적합한 황무지라 농사를 짓기도 힘들거니와 지어봤자 수확량도 그리 크지 않다. 때문에 둔전을 한다 해도 다른 곳으로 식량을 조달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사실 이럴 가능성이 높은 게, 애초에 그런 황무지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민간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니 둔전을 할 필요도 없을 때가 많다.또한 둔전의 상당수가 위치하는 국경지대는 맨날 치고받고 하기 때문에 거기서 농사를 지어봐야 전쟁 피해로 인해 굉장히 많은 부분이 유실되는 경우가 잦다.
이런 이유로 둔전이 시행되는 지역은 전반적으로 삶의 질이 열악하다. 따라서 다른 지역처럼 평범한 삶을 살더라도 기본적으로 풍족함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는 둔전을 하려는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다. 전반적으로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된 오늘날에 둔전이 비효율적이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근대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삶이 빈곤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거기에도 등급은 있어서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민둔이나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고 평생동안 강제로 군복무를 해야 하는 군둔의 실상을 알면서 지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과거에는 "군대는 밥이라도 제때 주니까"라는 이유로 군에 지원하는 인구가 많았긴 했으나[5] 곧 둔전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는 탈영을 시도하는 일이 빈번했다. 중국도 송나라 시절부터는 봉급을 받는 직업군인이 주력이 되기 시작했고 명나라에서 초창기에 위소제(衛所制)와 둔보(屯堡)로 둔전을 재도입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군인들에게 따로 봉급을 은자로 지급한 것은 병력의 질은 포기하더라도 병력의 규모라도 유지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군둔의 경우라도 둔전이 있는 지역이 농사 짓기에 부적합한 경우에는 둔전을 지급해주더라도 간단한 부식이나 반찬거리 정도만 확보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군사력 유지를 위해서라도 둔전과는 관계없이 중앙정부가 책임지고 병참을 제대로 제공해줘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군둔을 실시하면서도 둔전병들에게 약간이라도 봉급을 추가로 지급해주는 경우가 많았으며 병력들의 사기 유지 및 전투력 보존을 위해 점차적으로 봉급의 양이 증가했다.
4.5. 농사 비전문가의 농경
전근대의 농경사회라면 군인 역시도 사회에서는 농사 짓다가 온 사람이 절대적 다수이므로 둔전에서 농사를 지을 때 심각한 비효율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심각한' 수준이 아닐 뿐이지, 자기 고향이랑 복무지랑 기후가 좀 다르다 싶으면 비효율이 생겼다. 조선이든 유럽이든 산 하나 강 하나 넘으면 풍속이든 기술이든 격차가 확 벌어지는 곳이 흔했다.그러나 현대에는 이촌향도와 도시화로 인해 선진국이나 어느 정도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개발도상국에서는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보다 훨씬 많아져서 농사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군인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의무복무기간이 정해져 있고 전역 및 퇴역절차도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서 전근대처럼 평생동안 둔전에 얽매이지 않는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점은 농업은 절대로 아무나 투입해도 성과가 나오는 직업이 아니며 각종 작물에 대한 육성 및 수확 경험이 있어야 하고 토지의 질과 강수량 및 농업용수의 공급문제와 해당 지역의 기후를 감안해서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춘 농업을 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니다. 따라서 농사에 이제 막 입문한 사람은 농업능력이 있더라도 농사를 몇 년정도 연속으로 말아먹는 것은 기본이 되며 익숙해질만 하면 의무복무기간이 끝나서 전역하게 되므로 다시 농사 초보가 들어오는 악순환이 전개되므로 둔전이 비용절감이 아니라 비용증대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또한 오늘날 농업은 고도화된 기술을 필요로 하므로 농경에 특화되지 않은 직종이 농사를 짓게 되면 비효율이 커진다. 둔전이 전문 농부의 생산성을 따라잡으려면 군대 내 각종 농기계의 도입과 최신 농법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2020년대 들어서는 스마트 팜이라고 농업에 사물인터넷 같은 것을 도입하는 추세인데, 이런 것들은 군의 보안 정책과 상충되는 것들이 많아 도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전근대의 오합지졸 군대라면 모를까 산업 혁명 시기만 되더라도 군인이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전략과 전술이 매우 다양해지고 숫자가 많아지며 군대의 최하단 계급인 졸병급이라고 해도 제식훈련, 기초군사훈련, 주특기훈련등 각종 훈련에 참여하고 자신에게 지급된 제식 소총과 군장을 항상 유지 및 보수해야 한다. 현대에 들어가면 각종 기계 장비의 도입과 기술력 및 전략전술의 큰 변화로 인해 병사 1인이 익혀야 할 각종 지식과 이수해야 하는 훈련과 관리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다른 일을 수행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된다.
따라서 군사에 관련된 일만 하더라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는데 농사처럼 시간, 노력, 정성이 모두 들어가는 일을 동시에 시행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근대의 군대가 아니라면 결국에 농사도 애매하고 군사적으로도 애매한 상태가 되어버리게 된다. 현대의 농업과 군사의 전문화로 인하여 일종의 겸직에 가까운 둔전은 두 분야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없게 된 셈이다.
5. 사례
5.1. 한나라
한무제는 둔전제를 시행하여 군인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동시에 현지에서 둔전을 개간하여 군수물자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흉노로부터 빼앗은 땅을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5.2. 삼국시대(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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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중국 삼국시대에 모개, 한호, 유복 등의 제안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조조는 둔전을 하면서 난세에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떠돌던 유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여 병력을 많이 늘렸다.출전(出典)
조조의 둔전 체제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으나 효율성 하나는 매우 높았으므로 기존의 세병제와 결합하여 후대인 당나라에서 부병제가 만들어지는 데 큰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5.3. 명나라
명나라 건국 초기 당시에는 비옥한 농경지가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경우가 많았으므로, 둔전을 하면 민간인에 대한 수탈도 줄이고 농경지도 새로 복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 부병제를 살짝 고친 위소제(衛所制)와 둔보(屯堡)다. 둔보는 보통 변방이나 국경지역에 둔전을 만들고 요새인 보루를 건설한 후 주민을 정주시킨 것이다.예시그러나 중원의 농경지가 충분히 개간되고 병사들이 변방에 주둔하면서 문제가 달라지는데, 상술한 것처럼 명나라는 무리하게 설원이나 사막, 정글에 둔전을 설치하는데 이런 지역에서 둔전을 짓는다고 식량이 충분히 자급될 리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병력들에 대한 지원도 줄어들면서 위소제가 붕괴되며 명나라군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특히 명나라 말기에는 감숙성과 섬서성에 기근이 들면서 둔전병들이 기근에 시달리다가 나중에 가면 무기를 훔쳐들고 뿔뿔이 흩어지며 집단탈영하는데, 이렇게 탈영한 사람들 중에는 이자성도 있었다.
5.4. 중국
생산건설병단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한다. 이름만 보면 무슨 부대 이름 같고, 실제로도 군부대로 시작됐지만 지금에 와서는 군사, 행정, 사법, 생산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 조직으로, 현대판 둔전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산 면화와 과일 상당량을 생산하며, 농업 외에도 토목건설, 유통 등 다양한 사업체를 굴린다. 구성원들은 민간인에 가까운 신분인데, 자치구 한족은 거진 여기 소속된다.1953년부터 1981년까지는 군둔의 성격에 더 가까웠으며 변방의 전략적 요충지 같은 곳에 배치되었다. 그래서 자연재해나 화재에 병단 전체가 휩쓸리면서 대형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1977년 2월 18일 구정 연휴때 발생한 신장 제61연대농장 화재는 해당 농장에 거주하던 1,600명의 아동 중에서 597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다. 전체적인 인명 피해도 694명 사망에 161명이 후유증이 심한 장애를 입었다.
과거 10여곳이 존재했지만 현대에는 신장 지역에 1곳만이 존재하며, 계급상으로는 성과 대등하지만 중앙정부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명령을 동시에 따르는 2원 영도제를 갖추고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 수준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며, 3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 준군사조직이다.
5.5. 한반도
한국에선 나당전쟁 당시 설인귀가 문무왕을 협박하기 위해 보낸 편지에서 신라는 어린이가 둔전을 경작할 정도로 위태한 상황이라고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신라군이 웅진도독부의 둔전을 짓밟은 기록 등 삼국시대에도 중국의 둔전을 접할 기회는 직간접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정황상 비슷한 제도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이 강제병합 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대유둔전을 만든 정조가 시행한 일시적인 제도라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아래 서술된 바와 같이 이순신 장군의 경우 중앙정부로부터 이렇다 할 보급을 받지 못해 대부분을 자급자족한 사례도 있다.
조선시대 둔전은 군둔전과 관둔전으로 나뉠 수 있다. 군둔전은 세조시기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가 진관 체제로 변화함에 따라 종전에 북방에 한정되었던 것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관둔전은 각 관아의 재정마련을 위해 시행했으며 원칙상 관아의 노비가 운영했다. 이러한 관둔전은 임진왜란 이후 재정마련을 위해 (그리고 원래 땅주인들이 죽어나가서 빈땅이 보인 김에) 널리 시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둔전제도는 원칙적으로 시행되지 않아 부작용을 낳았다. 대표적으로 농민을 강제로 동원한다든지, 둔전을 사유화한다든지, 조세의 세율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조선의 둔전제도는 대한제국 시기 궁내부 내장원에 귀속되었다가 다시 탁지부에 마지막으로 일제의 통감부에 귀속되어 1920년 역둔토특별처분령에 의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민간에 불하되어 소멸한다.(참고로 향리층 일부는 토지조사 사업때 이 국유지를 본인 사유지로 등록했고, 지금까지 토호로 풍요롭게 살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도 왜란 당시 한산도 일대에서 둔전(농, 어업)을 운용한 예가 있다. 게다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중앙에서 보급이 오지 않아 대부분을 병사 및 피란민들이 생산하는 것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순신은 둔전 운영에도 일가견이 있었는지 궁핍해져 있던 조정에 여유 물자를 종종 보내서 선조가 더 내놓으라고 닦달하고 이순신도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6][7] 농담이 아니라 군함 수백 척에 군인이 1만 명 이상이나 되는 대함대는 대규모 농장을 지어야 겨우 유지가 된다. 당연히 조선 수군은 농사만 지은 게 아니라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어선에서 고기를 잡고, 선박들에게 유료 통행증을 발부하는 등 다양한 수익산업을 굴렸다.[8]
5.5.1.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군도 식량사정이 좋지 못했던 1960년대 - 1970년대에는 부대 내에서 간단한 채소를 키우거나 심지어 닭이나[9] 돼지를 키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아무나 맡겼다간 금세 폐사하기에 농삿일을 했던 병사들이 "영농계"를 비롯한 희한한 보직명을 받고 관리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군대 규모는 컸지만, 미국에게 예산을 타와서 썼던 만큼 군대 에산이 풍족하지 못했으며, 또한 그나마도 횡령이 잦았기 때문에 보급은 더욱 부실했고, 신병들도 배운것이라고 해봐야 농사로 몸쓰는 정도인지라[10] 궁여지책으로 둔전을 했던것이었다. 물론 비인가 보직이었고, 1970년대 이후로는 차츰 사라졌다.그 후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 전문화되고 기계화된 전쟁의 양상과 산업 발달, 분업의 개념 도입 등으로 인해 비효율적인 제도가 되어버려 사실상 사장된 제도다. 한국군은 일부 병사들에 한해서 대농민 지원을 통해 농사일을 돕는다. 이것도 워낙 농촌에 일손이 부족하기에 시행된 제도이며 해당 농촌에서 수확한 쌀을 군량미로 바로 땡겨오는 게 아니니 둔전제라고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대민지원의 일환인데 그 지원 내용이 농사인 것뿐이다. 그리고 산업기능요원의 한 분야로 농·어업 후계자 대체복무제도 있으나, 역시 대체복무이기 때문에 둔전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고 산업기능요원들이 농/어업 후계자 대체복무로 내는 소출이 군량미로 땡겨오는 게 아니니 절대 둔전이 아니다. 그보다도 애초에 현대 한국군의 대농민 지원이나 농/어업 후계자 대체복무는 어디까지나 '기존의 농민(민간인)'이 농사 짓는 주체이고, 군인이나 대체복무요원들은 (대민 지원이나 봉사의 목적으로) 그것을 돕는 것 뿐이니 둔전제의 정의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물론 이 와중에도 지휘관과 그 가족이 친환경이나 신선 식품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유로 소규모 둔전은 지휘관 공관을 중심으로 음성적으로 존재하며, 주로 본부중대 또는 본부대행보관이 인원들을 차출해 손으로 거름피고, 밭 갈고,[11] 비닐 깔고, 고추나 참외, 수박 등을 심고 망 치고 나일론 줄 띄우기 등을 해놓으면 공관이나 인근에 상주 중인 병사[12] 또는 본부대에서 수시로 와서 물을 주며 관리했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박찬주 대장 부부 갑질 사건으로, 70여 평 규모로 둔전을 시켰다.
5.5.2.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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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다수의 국가들이 진작에 둔전제를 폐지한 지 오래인 지금도 북한에서는 둔전제를 유지 중이다.
5.6. 동로마 제국의 테마 제도
서양에서는 동로마 제국이 테마 제도라는 이름으로 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쪽의 경우 초기에는 아나톨리아에 먼저 설치되었는데, 툭하면 제국에 반란이 나던 상황이라 동로마 제국 정부는 가장 반란이 빈번했던 옵시키온 테마를 해체해 버리고, 다른 테마들도 크기를 잘게 쪼개서 관리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보통 테마(Theme) 제도라고 불린 동로마식 둔전 제도는 처음에는 마우리키우스 황제 때 페르시아와 아바르를 상대하면서 일시적, 부분적으로 운영하다가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대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후 이슬람 쪽이 삼중성벽이 있는 한 정복은 안 되겠구나 하고 약탈 작전으로 바뀌자, 그 지방은 너희가 지켜라라는 의미로 운영되었다. 이슬람 세력이 한번 쓸고 지나가도 테마병들은 피난 안 가고 그 지방을 지키면서 복구할 수 있었다.
다만 이후 동로마 제국이 세력을 회복되고 공세적인 확장을 시도하자 테마 제도는 약화되었고 황제가 지방 호족 세력들의 제어에 실패하면서 호족들이 테마를 집어삼켜 유명무실해지면서 후방의 테마들은 사실상 일반적인 지방조직으로 전락하고 최전선의 테마들만 제대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다가 투르크 부족들의 침공해오면서 최전선의 테마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후방 방어선이 없는 상태가 발생해버렸고 테마 제도 복구를 시도하던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의미를 잃었다. 잔여 테마들이 아직 남아있었으나 여기서 차출한 병력을 조금씩 상실해가면서 프로니아 제도가 보편화되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5.7. 일본 제국
일본어에서 둔전(屯田)은 발음에 따라서 2가지 뜻이 있다. 돈덴(とんでん)으로 발음하면 여기서 말하는 일반적인 군둔(軍屯)을 말하며 미타(みた)라고 발음하면 고대일본의 황실령(皇室領)을 지칭한다.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둔전병(屯田兵)을 징집하여 파견했다. 집과 땅을 주고 개간을 시킨 다음 몇 년 동안 복무하고 나면 자신이 개간한 땅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식의 제도였다고 한다. 1870년 12월부터 홋카이도 개척사가 둔전병을 개시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99년에 둔전병 신규 모집이 중단되었으며 1904년에 잔여 둔전병이 민방위급 단계인 후비역(後備役)으로 편입되면서 둔전병 제도가 완전히 폐지된다. 폐지 사유는 홋카이도 내부에 둔전병에게 지급할만한 쓸만한 토지가 크게 줄어들었고 홋카이도에 이주민이 들어오면서 평범한 징병제로도 병력 수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둔전병은 토지와 가옥을 지급하고 가족과 거주하는 대신 장기간 복무하는 지원병으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면세 혜택등의 소소한 지원은 있었으나 지급되는 가옥은 병옥(兵村), 병옥들을 관리하는 곳은 병촌(兵村)이라고 부르며 연병장과 사격장을 갖추는 등 사실상 중대의 본부 역할을 했고 둔전병은 기상과 작업실시시간이 정해져 있고 군사훈련과 농사를 병행했으며 멀리 외출할 때는 상관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 등 사실상 군대 내부에 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인 엄격한 규율로 지배받았다.
둔전병을 활용하는 범위도 넓어서 건물 경비, 재해 수습, 작물의 시험재배, 도로와 수로의 건설공사등에 동원되었으며 세이난 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같은 전쟁시에는 일본 정규군에 편입된 후에 전쟁이 벌어지는 곳까지 장거리 원정에 나가게 된다. 수비 뿐 아니라 공격 및 원정에도 둔전병을 활용한 것이며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과달카날 전역 라바울의 일본군은 미군의 전략에 의해 포위당하고 보급이 끊기자 둔전을 하며 버텼다. 이마무라 히토시 휘하 일본군들은 100년동안 라바울을 확보한다는 목표하에 식량 확보를 위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원 예외 없이 1인당 200평을 경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마무라 대장 자신부터 실제로 200평의 경작지를 확보하여 농사를 지었다. 작물은 처음에는 타로나 얌 같은 현지 작물을 심었으나, 곧 고구마같이 더운 날씨에서 잘 자라는 작물과 상추와 배추, 무 등 각종 채소들을 심기 시작했고, 장립종인 현지 벼와는 달리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단립종 벼의 종자도 들여와서 심기 시작했다. 원래 열대성 작물인 벼가 고온다습한 환경에 놓이자 쑥쑥 잘 자라서 3 - 4달이면 수확이 가능했고, 식량이 풍족해지자 사탕수수도 심어서 단 음식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실제로 라바울 지역은 농사가 아주 잘되는 곳이었다. 덕분에 다른 섬에 고립된 일본군들이 보급 부족으로 죽어나갈 때 라바울의 병사들은 배 곯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단 단백질 식품이 부족해서 생선을 많이 잡아야 했다.
연합군은 이미 라바울 본영을 수비하는 10만여명의 일본군을 라바울과 주변의 좁은 지역에 고립시켜놓고 다른 곳을 공격하기로 미리 결정해놓았으므로 일본군이 농사나 짓는 걸 보고 가끔 신무기를 실험하거나, 신참 조종사들의 폭격 연습용 훈련장으로 쓰거나 하는 식으로 직접적인 침공을 하지 않았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라바울이라는 좁은 곳에 가두어진 일본군과 굳이 전투를 치룰 이유는 없었고 전쟁이 일본 제국의 패배로 마무리된 후에 라바울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그 때까지 다량의 무기, 장비, 탄약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라바울 고립 및 우회작전은 성공적이라고 판정받았다.
그러나 연합군이 공격능력이 없어서 라바울 본영을 놔둔 것은 아니다. 굳이 정면에서 전투를 진행해서 라바울을 탈환할 필요가 없기에 거기서 농사나 지으면서 전투력을 서서히 잃으라고 방치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농작물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트럭이나 시설, 건물은 공습했으며 병력 훈련도 최대한 공습으로 방해했다. 연합군이 라바울에서 공습한 농작물은 수확을 마치고 쌓아놓은 무더기에 한하며 그것도 야간에는 공습하지 않는 등 대처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야간에 저장창고로 최대한 운송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호주군이 담당해서 섬 전체를 점령할 목적으로 전투가 진행되는 부건빌의 경우에는 농작물에도 논, 밭, 수확물을 가리지 않고 철저한 공습이 가해지면서 둔전은 실패하고 현지 일본군 중 절반 이상이 굶어죽는 참사가 발생했다. 따라서 라바울 본영의 둔전 성공은 연합군이 일부러 방해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다.
6. 매체에서의 묘사
6.1. 삼국지 11에 나오는 특기
항구, 관에 해당 특기를 가진 장수가 부임했을 시에, 해당 거점에 소속된 병사들의 병량 소모가 사라진다. 단, 병량이 0인 상태에서 집어넣으면 의미가 없다. 병량 자체가 하나도 없을 경우 병량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병사가 줄어들기 때문에 최소 병량 1은 있어야 한다. 물론 물자 수송을 하려면 부대를 편성해야하고 그 수송대가 먹을 군량도 따로 준비돼야 하니 1뿐인 것도 큰 의미는 없다.병사가 아무리 많아도 이 특기 하나면 항구나 관에 틀어박혀 쌀 한 톨 안 먹고 살아갈 수 있으니 대단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항구나 관문의 최대 수용 능력은 3만 명이며, PK에서 연구하면 최대 6만 명으로, 거점에서는 매 턴마다 주둔 병사의 2.5%만큼의 병량이 소모되는 것을 생각하면 한 턴에 최대 1500의 병량을 절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1500이면 15000명 부대가 한 턴에 소비하는 병량과 동일하므로 조금이나마 병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변칙적인 활용법으로, 적 도시에 소속된 관이나 항구에서는 금과 병량 수입이 없기 때문에 장수나 병력을 주둔시키기 힘든데, 둔전 특기가 있다면 병량 걱정 없이 대군을 주둔시킬 수 있으니 적 도시 근처의 관이나 항구를 경유하여 적의 도시를 공격하고자 할 때 효과적인 활용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삼국지 11의 AI 알고리즘 자체가 도시를 공격할 때는 도시의 병사를 기준으로 공격대를 편성하기 때문에, 도시에는 2,000명~3,000명 정도의 병사만 남겨두고 나머지 병사들은 도시 소속의 항구, 관에 둔전특기 보유자인 장수와 함께 보내두면 컴퓨터 세력은 바보같은 AI 알고리즘 덕분에 기껏해야 6, 7천 남짓한 부대만 보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적의 공격을 몇 번 막아낸 뒤에 항구에 모아둔 병력으로 적 도시 공략을 반복하면 어떤 시나리오라도 대부분 클리어가 가능하다. 삼국지 11의 난이도 자체가 너무 낮아 유저가 만든 가학적 난이도의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클리어는 가능하지만, 유저가 만든 가학적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시나리오에서는 빛을 본다. 단, 정석적인 공략법이 아니고 AI의 허점을 이용한 일종의 꼼수이므로 평범한 플레이에서 추천할 만한 공략법은 아니다.
참고로 영수를 제외한 모든 둔전 특기 소유 장수는 정치력이 84가 넘는 A급 내정관이다. 삼국지 11에서 정치력 84 이상인 무장은 혼자서 시장이나 농장을 30일만에 건설할 수 있으므로 도시에 시설물이 제대로 건설되지 않은 초반에는 둔전 특기의 활용보다는 도시 시설물 건설을 우선하는 게 좋다.
사실 이렇게 쓰면 꽤 괜찮은 특기 같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이런 장수들을 관이나 항구에 박아놔야 한다는 것. 관, 항구에서는 쓸 수 있는 명령 자체가 사실상 없다. 등용이나 계략도 쓸 수 있지만 인재부나 계략부를 써서 행동력 할인 받아서 도시에서 쓰는 게 낫다. 결과적으로 6만명의 병사를 주둔시켰을 때 기준으로 1년에 최대 54000의 병량을 아끼는 셈인데 그 대신 1년간 이 장수를 안 쓴다는 조건이 걸린다. 하지만 위에 언급했듯 둔전 특기를 가진 장수들이 내정에선 최소 B+급은 먹고 들어가는 인물인데 기회비용 측면에서 영 적절치 못하다. 54000이란 병량도 미도나 징수 기준으로 하면 잘 지어진 도시에서는 한 계절 만에 뽑아낼 수 있는 수치라 따지고보면 그렇게 큰 수치도 아닌데 그 댓가가 장수 1명을 1년 내내 못 쓴다. 둔전 특기를 굳이 활용하겠답시고 관이나 항구에 이런 장수들을 주둔시키는 건 당장의 약간의 이익을 얻자고 장기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소유 장수는 한호, 유복, 국연, 영수, 소하(고대무장).
6.2. 가상 배경 작품
커맨드 앤 컨커 3에 등장한 스크린 부대도 병력 충원을 자급자족한다는 점에서 둔전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들은 본디 제대로 된 전투를 상정하고 구성된 전투부대가 아니라, 타이베리움을 채취하는 광부들과 불의의 사고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경비부대에 가깝다.드래곤 라자로 유명한 이영도는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의무병 제도중 가장 지독하다고 신랄하게 디스했다. 연재 잡담에서 말한 작가 자신의 견해는 '둔전제는 땅을 우선으로 보고 사람을 거기 부속된 부품으로 보는 것'이기에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는 매우 비인간적인 수단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둔전제로 유명한 제갈량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의 인권 개념은 현대보다 훨씬 희박했을테니 그가 특별히 악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폴랩 작중에 다벨 공국에서 구상하는 것으로 등장하는 둔전제는 저런 일반론적인 비판과는 별개로 훨씬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제도라서 작중 세계(둔전제가 용인되는 세계)에서도 말도 안되는 잔악한 제도 취급을 받는 것이므로 이 두 평가는 별개로 보아야 한다. 다벨 공국이 자국보다 훨씬 크고 강한 페인 제국을 선제공격해서 정복하려고 20만 대군을 육성하려 하는데, 다벨의 규모와 국력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20만을 징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한 가족에 병사 한 명씩 징병하고 문화도, 예술도, 하다못해 술 한 잔도 없이 모든 생산력을 군대 부양에 투입해야 한다'는 답이 나왔다는 주객전도의 제도인 것. 실제 유럽의 봉건제에서도 봉토가 세대를 거칠수록 점점 분할되면서 12세기 무렵에는 기사 한 명이 받는 봉토가 농민 가족 하나 분량으로 줄어들 지경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작중의 다벨 봉건제는 그보다 더하다. 그냥 농민 한 가족에게 병사 하나를 부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력인 건장한 성인 남성을 징병한 후 남은 이들에게 병력 부양을 떠맡기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이 제도의 실행안을 직접 고안한 바탈리언 남작도 "(내가 만들었지만)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제도"라고 까고, 바탈리언에게 이를 요구한 휘리 노이에스 역시 그런 말도 안 되는 시행안을 실제로 완성시키는데 성공한데다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문화와 여가까지 고려한 바탈리언의 기량에 감탄할 뿐 시행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굳이 따진다면 다벨의 병력 동원 한계를 파악하기 위한 참고자료 정도로 활용할 뿐, 현실성은 없는 계획 정도로 취급된다.)
7. 지명
이들은 모두 위의 둔전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둔전동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둔전리: 현대에 와서도 이곳에
에방사제55보병사단이 위치해 있다. 용인경전철 둔전역이 있다.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둔전리
-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둔방내리
-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둔전리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둔전리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1] 그 가난하다는 북한에서도 어떻게든 군대만큼은 밥을 먹여주려고 한다.[2] 개도국 군대라서 얕보기 쉽지만, 이집트군은 (군사독재 때문에 도덕적 논란은 있을지언정) 아프리카 - 아랍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군대이자, 이스라엘군, 이란군, 튀르키예군과 함께 중동의 4대 강군이다.[3] 사실 재정 문제를 경감한다를 넘어서 그냥 이집트군 자체가 이집트 경제의 큰손이다. 군부 쿠데타로 건국된데다 군부 독재자를 연이어 맞이했다 보니 이집트 군부는 목소리가 커서 그만큼 영향력도 큰데 이들의 이집트 경제에서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보가 극비라 할 수 없지만 대략 18~40%정도로 보고 있다.[4] 전투보병휘장처럼 엘리트 보병이 직접 전투에 참가해서 공훈을 세워야 받을 수 있는 특수 훈장이나 종군성장(Battle Star)이나 기장처럼 전투나 작전이나 주둔군에 참여해도 수여대상이 되는 훈장보다는 등급이 낮지만 의미가 있는 각종 표창들이 만들어진 기원 중 하나가 말단 병력들에게도 모두 주어진 소소한 포상들이었다.[5] 그러나 요즘에는 어지간한 최빈국이 아니고서야 절대빈곤에서는 벗어났기에 그런 이유로의 군 지원은 크게 줄어들었다.[6] 다만 당시 조선 조정은 짐작조차 못했던 10만이상의 대규모 외침에 대해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못해 왜란직전 24 - 26만석에 달하던 전세가 반토막이 나버렸고 반토막 나버린 전세로 지원 온 명나라군도 먹여살려야 했다는 걸 감안해야한다.[7] 출처:https://www.gsnj.re.kr/forum/board.php?no=10&page=1&code=essay2&kind=TRAVEL2&stext=&stitle=[8] 사실 이런 행보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행보였다. 자체적으로 수입을 마련해 그걸로 군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조정의 재정에서 벗어난 행위, 더 나아가 군벌의 징조로도 읽힐 수 있었다. 재정으로라도 묶어놔야 유지 문제 때문에라도 조정의 말을 안 들을 수는 없는데 이렇게 재정 문제에서 독립해버리면 명분 있고 수틀리면 군벌이 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당시 전시상황으로 조정은 앞서 말했듯 선조가 이순신에게 뭘 주는게 아니라 이순신이 선조에게 뭘 줘야 할 정도로 막장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9] 2012년 영화 미운 오리 새끼 참조.[10] 이 당시는 농어촌에 인구 대다수가 살던 시절인지라, 농사에는 익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11] 상술했듯 정정당당한 둔전이 아니기에 트랙터도 동원할 수 없고 심지어 옛부터 둔전 부지도 아니라면 돌이 꽤 많이 나오니 삽과 곡괭이는 필수다.[12] 후술할 박찬주 대장 사건 전까지는 이를 공관병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