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3 13:17:49

1960년대

연대구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세기구분
19세기 20세기 21세기
밀레니엄구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2. 정치 경제 및 사회
2.1. 세계2.2. 한국
3. 경제4. 문화
4.1. 음악
4.1.1. 서양 음악4.1.2. 한국 음악4.1.3. 일본 음악
4.2. 미술4.3. 게임4.4. 만화/애니메이션
4.4.1. 대한민국4.4.2. 일본
4.5. 방송4.6. 영화
5.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6.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7. 이 시대의 상징들
7.1. 인물
7.1.1. 정/관계
7.1.1.1. 대한민국7.1.1.2. 해외
7.1.2. 재야운동가7.1.3. 재계
8. 1960년대생
8.1. 한국8.2. 해외
9. 1960년대에 들어가는 해

1. 개요

서기 1960년~1969년까지의 연대시기. 전후 세대를 맞이하게 된 연대이자 경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전 및 성장기의 과정을 거치는 시기였기 때문에 경제의 태동연대라고도 불리며 일명 저항의 시대로 대변된다.

현재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age(1969-12-31)]세 ~ [age(1960-01-01)]세이다. [1] (만 나이 기준이다.)

2. 정치 경제 및 사회

2.1. 세계

1960년대, 프랑스 파리의 모습

한국전쟁 이후 잠시 조용하던 냉전은 다시 격해지기 시작했다. 1961년의 서베를린 위기, 1962년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존 F. 케네디소련니키타 흐루쇼프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하지만 다행히 소련의 양보로 인해 핵전쟁은 피하게 되었다.

외교상으로 이때 들어서 대한민국미국 등의 일부 국가를 넘어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던 자유진영 국가를 비롯해 중립국가 그리고 범아프리카 일부 국가 등과 외교관계를 활발히 맺으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는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하면서 인도(자와할랄 네루), 이집트(나세르) 등과 함께 유엔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1960년은 대표적인 아프리카의 해로 불린다. 1967년에는 동남아에서 ASEAN이 성립되었으나, 한국처럼 서구식 민주주의 실험이 한계로 접어들자 군사쿠데타가 점차 벌어져 비민주적인 체제로 전환되었다.

50년대 말의 스푸트니크 쇼크에 이어서, 60년대는 우주기술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미소양국의 'Moon Race'가 치열했다. 이 문 레이스의 정점은 주지하다시피 1969년 최고의 이벤트였던 아폴로 계획에 따른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반면 소련은 N1 로켓 발사에 실패하면서 달착륙 경쟁은 포기하고, 이후 우주정거장 건설로 나아간다.
Anti-Vietnam War Movement Documentary

반면 베트남 전쟁은 60년대 내내 미국을 괴롭혔고, 권위주의와 전쟁에 회의감을 느낀 청년들이 68혁명프라하의 봄을 정점으로 히피에 이르기까지 기성세대에 과 권력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Youthquake).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대표적. 또 민권운동이 격렬해지고 존 F. 케네디, 마틴 루서 킹 목사, 맬컴 엑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의 프라하의 봄 진압과 리처드 닉슨의 당선이 보여주듯이 혁명의 불꽃은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졌다.

일본에서도 1960년대는 투쟁과 저항의 시대였다. 학생운동이 이때 정말 치열해서, 전학공투회의의 투쟁이나 안보투쟁과 같은 좌익 세력의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되려 자민당 득표율 감소에도 야당의 다당화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일본의 좌파운동세력은 투쟁 방식에 관한 논쟁과 세력 다툼(우치게바)으로 점점 사라져갔고, 1970년대에 다다르면 거의 사라지고 만다.

종교적으로는 요한 23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면서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2.2. 한국



당시 영화인 <수학여행 1969>에서 반영된 1968년경의 서울 모습.[2]

대한민국은 이 연대 초부터 이승만 집권 말기에 접어들게 되었고 1960년 3월 3.15 부정선거4.19 혁명이 일어났다. 제2공화국장면 내각(대통령 윤보선)하에서 잠시 민주적 신장이 일어났으나 혼란 속에 1년 만인 1961년 5.16 그리고 박정희 집권기(1963년 부터)로 박정희 정부가 성립하였다.

박정희가 이끈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국시로 내세웠다. 이는 이승만정부와 장면 내각 시절 세워졌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차 계획은 장면 정부의 계획을 대부분 차용해 기존의 연평균 5.2%성장을 7.1%로 끌어올리는 데 중점을 둔 경공업 중심의 경제 발전을 꾀했으나[3] 2차 계획부터는 박정희 정부측의 독자적인 중공업 투자와 수출 산업 투자에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 2차례의 경제발전 계획과 그로 인한 성공적인 경제성장 및 인프라 구축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1967년 대선과 총선에서[4] 상당한 표 격차로 승리했다. 하지만 이 부정한 선거운동으로 인해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동백림 사건이 일어났으며 민주주의적 후퇴가 일어났다. 교통부문에서는 1968년부터 2년간 경인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를 개통시켰다.

하지만 패스트 푸드 분야에서는 여전히 발전이 더뎠다. 이 때문에 정부를 중심으로 삼양라면을 시작으로 이 때부터 한국에서 혼식이나 라면(분식) 식사문화가 장려되었다. 또한 을 갉아먹는 떼들 때문에 를 잡자, 쥐 잡기 운동이 민간 곳곳에서 성행하기도 하였다. 패스트 푸드 분야는 이후 1970년대가 돼서야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1955년을 시작으로 1960년대는 한국 역사상 최대의 베이비붐 세대가 태어났다.[5] 이른바 386세대. 이 때문에 지금과는 반대로 산아제한정책이 실행되었다. "콩나물 교실"도 부족해 오전, 오후반의 2교대 수업을 한 것도 흔한 일이었다.

일제 말기와 해방을 겪던 1940년대 출신들이 이 연대에 들어서 해방 세대 첫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때이기도 하였는데 구한말과 경술국치를 겪었던 당시 30대 이상 세대였던 1900년대 ~ 1930년대 세대들이 망국의 통한을 비롯해서 일제의 간악무도한 만행 등을 눈과 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일제의 만행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거나 해방을 맞이하였던 세대들이었으니만큼, 이들에 대한 기대가 꽤 컸었던 편이었고, 또한 해방 후의 조국의 미래를 짊어져야하는 과제를 안기도 하였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대일 외교굴욕에 맞섰던 6.3 항쟁을 통해서 반일감정을 뿌리깊게 이어나가는 세대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는 1950년대생들이 10대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던 때이기도 하다. 태어나자마자 전쟁을 겪게 되었고 피난까지도 갔기 때문에, 이들의 성장은 그 당시 정서로 따지자면 기대 이상이었던 편. 과외금지조치가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3. 경제

한국에서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된다. 해당 문서와 한강의 기적 참고. 이 시기의 한국이 로스토우의 도약기에 해당했다는 것이 통론이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전후 경제 회복과 성장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두 나라는 서방진영에서 미국에 이은 2, 3위의 경제대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4. 문화

4.1. 음악

4.1.1. 서양 음악

1950년대 후반 폭발적으로 유행하던 로큰롤이 더욱 발전하여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며 대중음악의 실세로 자리잡게 된다. 비틀즈를 통해 록 뮤직의 장르가 정의내려지고 여러 장르로 세분화되었다.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닌 대중음악의 큰 줄기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침공'이라 불리우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되어 영국 밴드들이 대거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던 시기였다. 비틀즈는 물론, 롤링 스톤즈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더 후킹크스, 크림도 큰 인기를 얻었다. 인기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수준도 뛰어나서 다수의 명반들이 60년대에 발표되게 된다.

미국의 경우 영국 밴드들 외에도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포크송이 인기를 끌었고,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한 서던 록이 대중적으로 유행하였다. 1960년대 초반 한정으로 비치 보이스를 위시한 여러 밴드들이 서프 뮤직을 유행시켰으나,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서프 열풍은 한풀 꺾이고, 비치 보이스는 Pet Sounds를 시작으로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감행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사이키델릭 음악이 성행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히피 문화가 성행했다. 히피족들의 지지에 더불어 우드스톡 페스티벌 같은 음악 축제들도 크게 성공하게 된다.

백인들에게 로큰롤의 주도권을 빼앗긴 흑인음악계에도 큰 변화가 이 시기에 일어났으니 디트로이트의 모타운 레코드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R&B, 재즈, 블루스와 같은 정통 흑인음악 장르를 기반으로 하는 대신 대중음악계의 트렌드를 빠르게 분석하여 시기마다 색다르면서 대중친화적인 노래들을 발표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로큰롤의 위세에 저물어가던 흑인 음악을 다시금 견인하고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끔 해주었으며 모타운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아 펑크(Funk), 디스코, 그리고 현대식 댄스팝등의 장르가 새로이 탄생했다.

이곳 출신들도 화려한데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슈프림즈 등이 있으며 훗날 팝의 황제로 군림하는 마이클 잭슨 역시 유소년기에 잭슨5라는 그룹으로 모타운에서 데뷔해 인기를 얻으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모타운 뮤지션 외에도 아레사 프랭클린, 레이 찰스, 제임스 브라운 등의 흑인 뮤지션들이 1950년대의 R&B장르의 명맥을 유지하며 60년대 소울, 펑크(Funk) 장르의 탄생에 기여했다.

4.1.2. 한국 음악

국내의 경우 미8군 출신으로 대표되는 스탠다드 팝, 가곡 위주의 장르를 부르던 가수들이 큰 활약을 보였으며 패티김과 같은 가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일본의 엔카를 기반으로 미국의 블루스, 한국의 전통 민요등이 조금씩 뒤섞인 현 시대의 트로트 장르가 완성되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이 중심엔 국내 가수 최초로 10만장의 앨범을 판매한 아이콘 이미자가 있었다.

여러모로 한국 대중가요계가 상업적인 성과와 시장성이 커진 최초의 시기이며 많은 가요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진정한 한국가요계의 시작이라 일컫는 시기가 1960년대이다.

4.1.3. 일본 음악

일본에선 1961년 신예가수 사카모토 큐가 발표한 <위를 보며 걷자>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었고, 1963년에는 <스키야키>라는 제목으로 미국에 발매돼 동양인으로서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땄다. 1962~1965년까지 고교생 출신의 가수들인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 하시 유키오[橋幸夫], 후나키 카즈오[舟木一夫], 사이고 테루히코[西郷輝彦], 미타 아키라[三田明]가 발표하는 청춘가요 (고교3년생,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17살의 이 가슴에) 와, 청춘영화 (언제라도 꿈을, 고교3년생,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저 구름에 노래하자, 키타쿠니의 거리)들이 인기를 끌었다.

4.2. 미술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가 본격적으로 유행하던 시기였다.

4.3. 게임

세계최초의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워! 라는 단순한 컴퓨터 게임이 1961년에 개발된 후로, 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확대된다. 물론, 본격적으로 게임기가 등장한 것은 1970년대고, 현재 게임의 대략적인 형태가 잡힌 것인 1980년대.

4.4. 만화/애니메이션

4.4.1. 대한민국

1960년대 한국 만화계는 1950년대에 이어 명작으로 넘쳐난 '황금기'라 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만화 유통경로가 서점에서 만화방(대본소)으로 옮겨가면서 부엉이문고나 크로바문고 등 만화방 만화책만을 내는 출판사가 생겨났고, 출판사와 만화방을 이어주는 지역별 중간조직 '총판'도 생겨났다.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소년만화계에선 김종래, 김산호, 박기당, 방영진, 오명천, 박기정-기준 형제, 손의성, 임창, 신동우, 고우영(당시 추동성), 경인(본명 김경언) 화백이, 순정만화계에선 엄희자, 박수산, 민애니, 권영섭 화백 등이 쟁쟁히 활약했다. 특히 김산호는 <라이파이 시리즈>를, 신동우는 <풍운아 홍길동>, 임창은 <땡이 시리즈>, 권영섭은 <봉선이 시리즈>, 오명천은 <산디만>, 방영진은 <약동이와 영팔이>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연이어 쏟아냈다.

그러나 계속될 줄 알았던 황금기는 1961년 5.16 쿠데타로 위기를 맞았다. 쿠데타 후 수립된 박정희 군정은 대한만화가협회와 현대만화가협회를 강제 해체하고 자율기구 '한국아동만화자율회'를 발족하도록 해 처음으로 만화 사전검열을 실시했고, 1968년 문화공보부가 '아동만화 정화대책'을 수립함으로써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가 발족돼 본격적으로 관 주도의 사전심의제도가 확립되었다. 1967년에는 이영래 회장이 진영문고 등 신촌 만화출판사들을 중심으로 규합한 후, 크로바문고와 제일문고, 부엉이문고 등 용두동 만화출판사까지 흡수해 '합동출판사'란 독점출판사 연합체를 만들어 어떤 경쟁자도 허용치 않는 무한독점체제를 구축했다.

애니메이션계는 한동안 관제 애니 및 광고용 애니가 주류였다가, 같은 시기 해외 애니메이션이 히트하자 애니 제작자들 사이에서 국산 애니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1967년에 신동헌 화백이 동생의 작품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국내 최초 컬러 장편애니 <홍길동>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비용 문제 때문에 미군 항공필름을 재사용하고 포스터칼라로 채색하는 등 열악한 조건 하에서 만들어졌음에도 흥행에 성공했으며, 같은 해에 강태웅 감독이 국내 최초의 퍼펫 애니메이션 <흥부와 놀부>를 만들었다. 이후 1968년 <황금철인> 및 <손오공>, 1969년 <홍길동장군> 및 <보물섬> 등이 제작됐으나, 흥행에만 치중한 나머지 수준 이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등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4.4.2. 일본

일본 출판만화계는 1959년에 <주간 소년 선데이> 및 <주간 소년 매거진>이 창간된 후 '주간 만화잡지 붐'이 일었다. 이를 계기로 1968년에 슈에이샤가 <주간 소년 점프>, 1969년 아키타쇼텐이 <주간 소년 챔피언>을 각각 창간했으며, 특히 소년 점프는 타 잡지들과 달리 유명 만화가들을 주로 초빙하지 않고 모토미야 히로시, 나가이 고 등 젊고 전도유망한 만화가들을 중심으로 틈새시장을 노렸다.

애니메이션계에선 1953년 TV 방송 시작 이후 제작자들이 한동안 막대한 비용 문제로 TV 애니메이션 제작을 주저했다. 다만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토에이 동화에서 갈고 닦은 애니 제작실력을 바탕으로 1961년에 사카모토 유사쿠, 스기이 기사부로 등과 함께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을 설립했고, 이듬해 실험작품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제작 후 '무시 프로덕션'으로 사명을 바꾸고 과감히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접근했으며, 앞으로 발생할 적자를 메꾸기 위해 만화 원고료와 머천다이징 사업으로 재정 보충을 하는 쪽으로 확립해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게 1963년에 자신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장편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철완 아톰>으로, 이 작품은 후지TV를 통해 방영되며 TV 대중화의 바람을 타고 첫화 시청률 27,4%를 시초로 제4화 때 32.7%로 30%대를 깼으며, 이후 30%대 시청률을 웃도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더불어 '메이지 마블 초콜릿'에 첨부된 아톰 스티커 등 관련 캐릭터 상품까지 성공했고 제작사 역시 데즈카 오사무 팬클럽을 '철완 아톰 클럽'으로 변경해 어린이 팬 서비스 확대에 주력했다. 1964년에는 일본 애니제작사로서 최초로 미국 NBC에 <아스트로 보이> 라는 제목으로 해외 방영권 판매를 시작했다.

<철완 아톰>의 성공으로 각 애니 제작사들도 하나 둘 씩 TVA 시장에 하나 둘씩 뛰어들었다. TV 수입판매업을 하던 TCJ는 같은 해 9월 일본 최초의 성인취향 애니 <신선부락>을 제작했고, 10월에는 로봇애니 <철인 28호>를 제작해 아톰의 대항마로 급부상했다. 뒤이어 11월 7일에는 TBS로부터 처음으로 발주를 받아 <에이트맨>도 제작했다. 극장 애니메이션 제작에 몰두하던 토에이 동화도 다카하타 이사오, 야부시타 다이치, 야마구치 야스오를 필두로 <늑대소년 켄>을 제작해 11월 25일 NET를 통해 방영됐다. 그 사이 무시 프로덕션은 선구적인 제작방식을 모색하여 1964년 1월 25일 <철완 아톰> 제56화를 컬러로 처음 제작해 시청률이 처음으로 40%대를 돌파했고, 그해 가을에는 최초의 컬러TV 장편애니 <정글대제>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일본 작품으로서 최초로 해외 수출까지 염두에 둔 작품이다.

그러나 성공 뒤에는 어두운 면이 있듯, 애니 제작사들은 꾸준히 퀄리티 있는 작품들을 내놓았음에도 비용문제로 재정난이 심화된 데다, 정규직 제도의 문제점으로 인력난에 시달려왔다. 게다가 도에이나 무시 등 대형 제작사 애니메이터와 프로듀서들이 밤에 몰래 타사 작업까지 도맡았기에 '올빼미 애니메이터', '올빼미 연출' 등이란 호칭이 나돌았다. 1960년대 중반까지 승승장구한 무시 프로덕션에도 위기가 닥쳐왔는데, 스기이 기사부로 등 초기 제작진들이 서서히 퇴사한 데다 1965년부터 후지코 후지오의 일상물을 원작으로 한 <도깨비 Q타로>가 시청률 30%로 <철완 아톰>을 추월했고, 1966년에는 아카즈카 후지오의 개그물 <오소마츠군>이 돌풍을 일으켜 SF중심에서 일상물 중심으로 메인스트림을 변경했다. 심지어 츠부라야 프로덕션이 제작한 TV 공상특촬물 <울트라 Q> 및 <울트라맨>도 애니메이션의 인기를 위협했다.

1960년대 후반 들어서 <비밀의 앗코쨩>과 <거인의 별>, <타이거마스크>처럼 마법소녀물과 스포츠물이 트렌드가 됐고, 1968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태 등 학생운동의 과격화로 '아웃사이더 열풍'이 불었다. 당시 일본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1948년을 전후로 태어난 '단카이 세대'가 주역이었는데, 이들은 학생운동을 하면서 만화도 열심히 읽었기에 '한 손엔 아사히 저널, 다른 한 손엔 소년 매거진'이란 호칭이 붙었고, 이들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에 대해 연민을 가졌다. 이들의 사고방식을 투영한 작품으로는 시라토 산페이의 <사스케> 및 <카무이 외전>, 츠게 요시하루의 <나사식>, 가지하라 잇키/치바 테츠야의 <내일의 죠>가 대표적이다. 같은 시기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노조활동이 활발해 토에이 동화 내에서도 노조 소속인 오오츠카 야스오, 다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가 중심이 되어 회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개구쟁이 왕자의 구렁이 퇴치> 등 실험적인 장편애니를 열성적으로 제작했으나 흥행은 실패했다.

4.5. 방송

서구권과 일본, 소련에서는 TV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었을때였는데, 특히 일본에선 1960년 컬러TV 방송이 처음 개시됐고, 더 드리프터즈가 TV 코미디 프로를 주름잡아 1969년부터 불후의 개그프로 <전원집합>을 방송하는 데 일조했고, 1966년부터 후지TV에서 국민 만담프로 <쇼텐>이 방송됐다.

다만 한국에서는 TV가격이 매우 비쌌던지라 TV방송망의 확충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음에도 이때까지도 여전히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고, 따라서 라디오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 박정희 군정은 김지태로부터 MBC 소유권을 빼앗아 이듬해 5.16장학회에 헌납했고, 1961년부터 첫 TV방송을 진행한 KBS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식>, <혁명의 아침> 등 군사정권 선봉대 노릇을 하기 시작했으며 1962년에는 1기 공채탤런트를 뽑았다.

1964년에는 삼성그룹과 락희그룹이 공동으로 '라디오서울' 및 '동양TV방송'을 개국했으나, 경영상 분쟁으로 삼성이 독자 경영했다.

4.6. 영화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손꼽히던 시절이었다. 전후수습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지방에서도 영화관이 대대적으로 늘어섰지만 TV는 아직은 매우 비싸서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이 몹시 제한적이었던지라 자연히 영상매체는 영화가 주가 되었다. 물론 당대기준으로는 영화 표값이 마냥 싼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대중적인 여가수단이었다. 한국영화도 1950년대에 비해 어느 정도 체계가 갖추워지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며 한국영화가 영화시장에 차지하는 점유율도 점유율도 50~60%대를 기록했고 1969년에 절정에 달했다.

전설적인 첩보영화 시리즈 007 시리즈가 시작된 년대기도 하다.

5.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

6.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 구법령

7. 이 시대의 상징들

7.1. 인물

7.1.1. 정/관계

7.1.1.1. 대한민국
7.1.1.2. 해외

7.1.2. 재야운동가

7.1.3. 재계

  •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 정재호 삼호그룹 회장
  • 구인회 락희그룹 회장
  • 김연수 삼양사 회장
  • 남궁련 극동해운-대한조선공사 사장
  • 이양구 동양제과-동양세멘트공업 회장
  • 설경동 대한전선 회장
  • 홍재선 쌍용양회 사장
  • 이정림 개풍그룹 회장
  • 박흥식 화신산업 사장
  • 박두병 동양맥주 회장
  • 조성철 중앙산업 사장
  • 박용학 대한농산 사장
  • 이한원 대한제분 사장
  • 최성모 동아제분 사장
  • 최태섭 한국유리 사장
  • 전택보 천우사 사장
  •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
  • 조중훈 한진상사 사장
  • 서갑호 판본방적 사장
  • 함창희 동립산업 사장
  • 김지태 한국생사그룹 회장
  • 강석진 동명목재상사 사장

8. 1960년대생

8.1. 한국

1960년부터 1969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흔히 586세대라고 불린다. 2020년 기준으로는 모두가 51~60세인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1960년생이 60대가 되었고 60년대생의 막내인 1969년생은 51세가 되었다.

이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60~1970년대는 지금보다 빈곤한 시대였으나, 경제성장으로 보릿고개가 해소되고 중학교 입시 폐지, 대도시 한정으로는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의 혜택까지 받으며 대부분이 고등학교까지 쉽게 진학하면서 절반 이상이 초등학교 졸업 이후 만12세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윗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충분한 영양 섭취를 하되 과식을 하지 않아 비만은 거의 없었고, 컴퓨터의 본격적인 보급 이전이자 중학교 때까지는 학업의 부담이 적어 육체 활동을 마음놓고 즐길 수 있었기에 단군 이래 청소년기 최강 체력을 자랑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해 체벌과 폭력이 만연한 학교생활을 보냈으며, 이 세대까지는 유아사망률이 10%에 달하기도 하였다.

1965~1966년생이 국민학생 3~4학년 시절인 1974~1975년부터, 한국에 전자오락실이란 것이 생겼고, 중학생 시절에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즐겼다.

물론 1960년대생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외환위기를 겪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게 된 분들도 상당수 있다.

현 30대 초반~20대의 부모 세대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세대 역시 1960년생은 60대에 접어들었고, 나머지도 곧 60대로 돌입할 예정이라 완전히 기성세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형제자매 수는 4~5명으로 1970년대생 출생자들에 비하자면 많은 편이고, 1950년대생 출생자들보다는 약간 적은 편이다. 하지만 인구통계상으로는 가장 많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산아정책을 시작했지만, 1970년대와는 달리 강압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으며 1950년대 초반생이 태어난 시기가 한창 전쟁통인지라 베이비붐이 시작된 1950년대 중후반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매우 적고 편차가 컸다. 그에 반해 1960년대생은 전반적으로 편차가 없고 태어난 인구수가 꾸준했기에 일어난 현상. 그래도 약간씩 차이는 있는데, 1963년 까지는 출생아 수가 살짝 감소하다가 그 이후로는 살짝 증가했다. 그와중에 1966년생은 적은 편인데, 일본 미신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실질적인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들은 결혼도 점차 늦춰져가서 대부분 20대 중반 ~ 후반 혹은 30대 초반에 결혼한 사람들이 상당수이다.[6] 이들의 자녀 수는 평균적으로 2명 수준이다.

정치성향은 진보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1970년대생들보다는 보수성향이 강하다. 정치적으로 본래는 운동권, 386세대라 불리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세대라 원래 진보성향이 지나칠 정도로 매우 강했다.[7] 사실상 1960년대생들이 학생 운동시절에 받아들이고 추진했던 사상들(NL, PD)이 지금 현재 한국의 진보계열 정치계에도 굉장히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하지만 1990년대김영삼이회창이 보수정당을 장악하고 나서, 보수성향이 강해졌다가 다시 15대 대선16대 대선에서 김대중노무현에게 몰표를 주면서 진보성향으로 돌아갔지만 민주정부가 경제정책에서 실패하자 다시 보수성향이 강해져 17대 대선에서는 이명박에게 상당한 표를 주었고 18대 대선에서도 박근혜에게도 상당한 표를 주면서 보수성향이 제법 강해졌다.

그 이후 19대 대선에서도 안철수 후보가 선전하는 등 보수정당에는 호의적이지 않지만, 민주계 정당에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전체적으로 냉담한 세대이다. 그리고 바른정당의 유승민 후보도 50대에서 제법 지지를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의 안희정, 이재명, 표창원, 안민석, 김민석, 우상호, 안규백, 김태년, 윤호중, 김경수, 송인배, 황희, 조정식, 백원우, 국민의당의 안철수 등이 1960년대생 출신이다. 보수성향의 경우 김진태, 우병우, 조윤선, 김태흠, 윤상현, 김도읍, 권성동, 원희룡, 남경필, 박민식, 서용교, 주광덕, 김용태, 조경태, 정진석, 하태경, 나경원, 이혜훈, 오세훈, 원유철, 김재원, 손범규, 김영선, 유기준, 정점식 등이 있다. 진보성향은 이정미, 윤소하, 김종대, 김종훈, 이상규, 조승수, 권오길, 윤종오, 이정희, 김창현 등이 있다. 재벌가로는 이재용, 정용진, 최태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이 정치에 진출한 시기도 14대 국회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5대 국회부터 대거 정치에 진출했다. 그리고 16대 국회에 들어서서 꽃을 피우더니 17대 국회에서는 대거 정치에 진출을 했고 18대 국회에서는 부조력자로 있다가 19대 국회에서는 계속 정치에 진출해서 조력자가 되었고 20대 국회에서는 주도권을 쥐었다.

아마 이들이 이 연대의 일부 출생자들로 추정된다. [8]

대부분 이들은 과외금지조치의 피해자였는데, 돈 많은 집은 편법과 탈법으로 비밀리에 과외를 하였고, 전두환 정권부터 시작된 일반계 고등학교(인문계 고등학교)의 야자(야간 강제 자율학습)의 최초 피해자이다.

울릉도에서 유치원에 다니던 첫 세대였다.

8.2. 해외

세계적으로는 출생율이 감소하는 세대이기에 '베이비 버스터'라고 불리며, 1965년생부터가 이에 해당되고 1968년생부터는 'X세대'이다. 이 시기 출생자 중 도시 전문직 종사자는 '여피족'이라 불리고, 무자녀 맞벌이 젊은이들은 '딩크족', 개인주의자는 '님비족' 등으로 각각 불린다. 일본에선 이때 출생자를 '오타쿠 세대'라고 한다. 이들은 선배 신인류 세대보다 더 자유분방하고 탈권위적인 발상을 가지기도 하기에 일본 애니 현업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청소년 시절부터 다수의 공감보다는 소수 집단의 공감에 집중하기도 한다. 20대 들어선 일본 버블경제도 경험했다. 다만 버블 붕괴 이후에 1970년대 생들과 함께 피해를 많이 본 세대.[9]

9. 1960년대에 들어가는 해


[1] 1960년생이 [age(1960-01-01)]~[age(1960-12-31)]세. 1969년생이 [age(1969-01-01)]~[age(1969-12-31)]세.[2] 영화 내용은 단순하다. 전라도 시골마을의 학생들이 힘겹게 돈을 모아서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온다는 내용. 구봉서가 출연하기도 한 영화다. 제목은 1969지만, 촬영시기를 감안하면 1968년에 가깝다. 당시 주한미군 복무중이던 닐 미샬로프가 안양과 서울의 풍경을 촬영한 시기와 비슷하다.[3] 장면 내각의 계획을 차용해 실행하것은 1963년까지만 해당한다. 경제개발계획을 쓰이는 데 필요한 달러가 1억달러로 떨어져 이는 최초의 외환위기 였으며 이듬해인 1964년 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수출주도 산업화로 바꾸었다.[4] 여당에서 혼탁한 선거로 규정하고 일부 의원을 제명하였다.[5] 통계적으로 대한민국베이비붐 세대는 1955년생~1963년생으로 잡고 있다.(더 길게 잡자면 1974년생까지도 베이비붐 세대로 잡기도 한다.)[6] 여담이지만 1990년대에 태어난 자식들의 80%(특히 90~95년생의 경우는 95% 이상)가 이 연대의 부모를 두었다. 왜냐하면 90년대 당시 남성 평균 결혼연령이 28세였기 때문이기도 해서 딱 들어맞는다.[7] 다만 1960년대 초반생들은 다른 1960년대 중후반생들보다는 보수성향이 제법 강한 편인데 1960년대 초반생들은 386세대의 시작점을 끊었지만, 반공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8] 것도 극초반으로 추정. 이 연대 말년엔 분명 빠른 70까지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 현시점의 만나이 성인 기준으로도 1979년 ~ 1988년에 모든 60년대생이 완전한, 온전한 성인이 되었다. 물론 후반 말년대에 극초반인 빠른 70 역시 일부 포함되겠지만서도. 조기졸업 그리고 몇 년 이상 휴학-재학한 경우 등등의 일부 역시도 포함되었을 것이다.[9] 그래도 70~71년 생들을 제외한 70년대생들 보단 버블 경제의 수혜를 가장 많이 본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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