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1 02:40:31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
Vietnam War / Chiến tranh Việt Nam
인도차이나 전쟁, 냉전의 일부
날짜 1955년 11월 1일 ~ 1975년 4월 30일
(19년 5개월 4주 1일)
장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결과 북베트남(월맹)의 승리
영향 미군의 월남 철수
북베트남남베트남 합병
베트남, 캄보디아[1], 라오스의 연쇄 적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적화통일)
미국징병제 폐지와 모병제 실시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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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png 베트남 공화국
파일:미국 국기.png 미국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파일:태국 국기.png 태국
파일:호주 국기.png 호주
파일:뉴질랜드 국기.png 뉴질랜드
파일:필리핀 국기.png 필리핀
파일:캄보디아 국기.png 캄보디아 왕국 (1967~197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Khmer_Republic.svg.png 크메르 공화국
파일:라오스 왕국.png 라오스 왕국
흐몽족(민병대 추정)
파일:말레이시아 국기.png 말라야 연방

군사 지원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77년).png 스페인국

기타 지원국
파일:영국 국기.png 영국
파일:캐나다 국기.png 캐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50px-State_Flag_of_Iran_%281964-1980%29.svg.png 이란 제국
파일:독일 국기.png 서독
파일:브라질 국기.png 브라질
파일:일본 국기.png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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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국기.png 베트남 민주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NL_Flag.svg.png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파일:크메르 루주.png 크메르 루주
파일:라오스 국기.png 파테트 라오
파일:중국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북한 국기.pn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파일:인도 국기.png 인도
파일:캄보디아 국기.png GRUNK[2]

군사 지원국
파일:소련 국기.png 소련
파일:쿠바 국기.png 쿠바

기타 지원국
파일:체코 국기.png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Bulgaria_%281971-1990%29.svg.png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파일:독일민주공화국 국기.png 독일 민주 공화국
파일: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png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파일:폴란드 국기.png 폴란드 인민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Hungary_%281957-1989%3B_unofficial%29.png 헝가리 인민 공화국
파일:external/www.vinahanin.com/Myanmar.jpg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Mongolia_%281940-1992%29.svg.png 몽골 인민 공화국
파일:스웨덴 국기.png 스웨덴[3]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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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png 응오딘지엠
즈엉반민
판칵스우
응우옌반티에우
쩐반흐엉
응우옌까오끼
까오반비엔
파일:미국 국기.png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로버트 맥나마라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프레드릭 웨이언드
엘모 줌왈트
존 폴 밴
로빈 올즈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박정희
채명신
이세호
파일:호주 국기.png 로버트 멘지스
해럴드 홀트
파일:태국 국기.png 타놈 끼띠카쫀
파일:뉴질랜드 국기.png 키스 홀리오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Khmer_Republic.svg.png 론 놀
시소와트 시릭 마탁
롱 보렛
파일:1280px-Flag_of_Laos_(1952-1975).svg.png 수바나 푸마
푸미 노사반
파일:필리핀 국기.png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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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국기.png 호찌민
레주언[4]
보응우옌잡
쯔엉찐
똔득탕
팜훙
반띠엔중
쭈후이먼
레둑토
팜반동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NL_Flag.svg.png 호앙반타이
응우옌흐우토
보찌콩
응우옌반린
쩐반짜
쩐도
보민찌엣
파일:중국 국기.png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파일:소련 국기.png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Democratic_Kampuchea.svg.png 폴 포트
파일:캄보디아 국기.png 노로돔 시아누크
파일:라오스 국기.png 쑤파누웡
파일:북한 국기.png 김일성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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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병력 200만 명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png 월남군 140만 명
파일:미국 국기.png 미군 54만 명[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Khmer_Republic.svg.png 캄보디아군 20만 명
파일:1280px-Flag_of_Laos_(1952-1975).svg.png 라오스군 7만 2,000명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한국군 5만 5,000명[6]
파일:태국 국기.png 태국군 2만 2,000 명
파일:호주 국기.png 호주군 7,500명
파일:필리핀 국기.png 필리핀군 2,061명
파일:뉴질랜드 국기.png 뉴질랜드군 400~534명
파일:대만 국기.png 대만군 31명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77년).png 스페인군 13명
파일:영국 국기.png 영국군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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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병력 126만 명
파일:베트남 국기.png 월맹군 28만 명[7]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NL_Flag.svg.png 베트콩 80만 명[8]
파일:중국 국기.png 중국군 17만 명
파일:소련 국기.png 소련군 3,000 명
파일:북한 국기.png 북한군 200명
피해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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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png 월남군 22만~31만명 전사
파일:미국 국기.png 미군 58,000명 전사 항공기 3750대, 헬기 5000대 파괴.[9][10] 전차 및 장갑차 880대 파괴[11]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한국군 5,099명 전사 11,232명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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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국기.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NL_Flag.svg.png 월맹군&베트콩 84만~110만명 전사
파일:중국 국기.png 중국군 1,100명 전사
파일:북한 국기.png 북한군 14명 전사[12]
민간인 사망자
200만명[13][14]

1. 개요2. 명칭3. 상세4. 배경5. 교전 초기6. 연합군 결성과 미군의 참전
6.1. 한국군 파병
7. 전개8. 주월미군이 패전한 이유
8.1. 호치민 루트8.2. 북진 금지8.3. 수렁8.4. 사기 저하
9. 월맹의 구정 공세10. 케산 전투
10.1. 전개10.2. 케산 전투와 구정 대공세를 포괄한 배경 및 영향
11. 남베트남의 패배와 북베트남의 승리
11.1. 반미반전(反美反戰)11.2. 파리 강화 협정11.3. 빈집털이11.4. 적화통일
12. 전후
12.1. 미국에 끼친 영향12.2. 한국에 끼친 영향12.3. 고엽제 문제12.4. 한 장의 사진12.5. 월남 전쟁의 전쟁 범죄/민간인 학살12.6. 전후 숙청 및 보트 피플
13. 월남 전쟁의 교훈14. 전쟁 중 사용한 장비 목록15. 월남 전쟁을 다룬 창작물
15.1. 소설15.2. 드라마15.3. 영화15.4. 뮤지컬15.5. 만화15.6. 게임15.7. 노래15.8. 서적15.9. 다큐멘터리
16. 관련 문서

파일:NUiOhsE.jpg 파일:external/i2.cdn.turner.com/150417130311-10-vietnam-war-timeline-restricted-exlarge-169.jpg
베트콩 대원을 발로 차는 베트남 공화국군 육군 베트콩 게릴라 수색 대원과 미 육군 UH-1 헬리콥터
파일:external/vvkr.cdn2.cafe24.com/usarmy07.jpg 파일:external/www.english-online.at/vietnam-war-protest.jpg
주월 한국군 사령관 육군 소장 채명신과 월남 군사 원조 사령관[15] 미 육군대장 윌리엄 웨스트 모어랜드 미국에서 일어난 월남 전쟁 반전 시위
파일:external/vvkr.cdn2.cafe24.com/usarmy06.jpg
월남에 파병된 대한민국 육군 제9보병사단M113

1. 개요

영상 중간과 끝부분에 승려 틱광둑소신공양(분신자살) 영상이 나오니 주의 바람.
1955년~1975년까지[16][17]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이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함께 양대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군대가 남베트남에 파병되어 월맹(북베트남)을 상대로 싸웠지만,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조직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 등에 의해 고전하게 된다. 이는 미국이 월맹을 지원하던 소련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제한적인 작전만을 펼칠 수 밖에 없었던 점도 있었다. 결국 내 가족과 주변 젊은이들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미국내 반전 운동과 여론에 밀려 미군은 철수하게 되었고(징병제도 폐지된다), 예상밖의 고초를 당한 미군의 군사적 명성은 크게 실추되었다.[18] 그리고 주월미군의 철수 이후 남베트남은 고전하다가 결국 월맹에게 패망하였다.

덕분인지 서구권 등에서 나오는 창작물에서는 M16 소총을 든 미군 병사가 UH-1 헬리콥터에서 내리고 정글 속에서 베트콩과 싸우는 이미지로 대표되고 있으며, 미군이 패배한 전쟁이라는 점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와 전쟁에 회의적인 시각이 강한 편이다. 미국 국내에서는 히피 문화가 월남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하였다고 보며, 월남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들의 후유증과 사회 부적응 문제 등이 크게 대두되었다.

한국군이 파병된 전쟁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에 이어 한국이 경험한 대규모 전쟁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을 참고할 것. 당시 한국에서 썼던 명칭은 월남(越南戰)이며 지금도 국군에서 만든 자료에서 월남전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처럼 명백한 악이었던 추축국이 존재하거나 한국 전쟁과 같이 휴전 상태로 끝나버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선전에 활용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월남 전쟁은 종결되었고 월남은 이미 통일이 됐다. 그리고 지금 미국(+한국을 비롯한 당시 연합군측)과 베트남이 서로 이 일로 으르렁거리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그래서 지금은 알다시피 베트남과 미국, 한국 등도 수교를 맺고 원만한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있는데, 이는 지정학적으로 미국 입장에선 베트남이 중국 견제를 위해 필요하고, 베트남 역시 중국 견제를 위해[19] 미국이 필요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월 입장에선 경제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즉, 외교 관계가 회복되면서 필요에 의해 옛 일은 어느정도 덮고 넘어가는 단계인 것이다.

2. 명칭

제3자 입장에서는 전쟁 장소를 당사국에서는 전쟁의 내용을 강조한다. 영어권에서는 Vietnam war, 한국에서는 월남 전쟁 등. 베트남에서는 항미전쟁이라고 한다.

3. 상세

베트콩(Vietnamese Communists, V.C.)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 남민전) 산하의 무장 게릴라 단체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월맹 정권 및 군부의 지시를 받는 조직이다. 이들의 목표는 기존의 친미적 성향의 남베트남 정부를 붕괴시키고 공산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월맹)에 합병시키는 것이었다. 참고로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워 독립을 이룬 베트민(Viet minh)과는 다른 조직이다.

월남 전쟁의 배경은 길게는 19세기부터, 짧게는 2차 대전 이후인 1950년대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들은 사실 상당히 긴 시기 동안 발생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이 남베트남에 첫 원조를 시작하고부터 월남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진 거의 10여년 가까운 시기가 있었다.

정작 월남에서는 월남 전쟁이라는 명칭을 거부한다. 자신들의 전쟁을 제3자 입장에서 부르기를 싫어하기 때문. 그러나 (물론 제3자의 시선에서) 걸프전이나 이라크 전쟁, 그리고 대한민국의 6.25 전쟁을 영어로 한국 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듯이 지명에서 명칭을 따오는 용법도 흔하기 때문에 월남 전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잘못된 명칭은 아니다. 월남에서는 이 전쟁을 항미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월남 전쟁을 얻을 것도 명분도 없는 전쟁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 해서 The Quagmire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이 단어는 '엉망진창'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맨발의 베트콩들이 미군 최신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났으며 미군으로 하여금 상당한 재정 적자를 일으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의 군사력에도 한계가 있다."라고 선언하게 한 전쟁이다.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남베트남 국민들의 사상, 생각과는 관계없이 친미주의자 대통령을 옹립해놓고, 또한 그들의 부정 부패를 방치함으로써 남베트남 내부의 분열을 조장했고, 그와 더불어 통킹만에 군함을 주둔시켰던 것으로 그들의 분노를 사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2차 통킹만 사건의 경우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결국 어떤 이유에서던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견해서 군대를 파견하는 행위는 월남 전쟁을 시작으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보여졌고, 미국 내부에서도 반전의 목소리가 컸었다.

출구 전략(Exit Strategy)도 월남 전쟁에서 나온 말이다. 월남 전쟁을 지속하기도, 단번에 철수하기도 애매해진 미국이 굴욕적이지 않으면서도 별 피해 없이 전쟁을 끝내고 빠져 나오기 위해 찾던 전략을 출구 전략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용어가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베트남을 한국 한자음대로 월남(越南)으로 표기했는데, 특히 남베트남을 정통으로 보았으므로 남베트남을 그냥 월남, 또는 자유 월남이라고 했다. 북베트남은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월맹이라고 불렀다.

비슷하게 대한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중국 공산당의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중공이라고 불렀고, 중화민국이 통치하는 대만을 자유 중국이라고 불렀었다. 대만에서도 과거에는 같은 용법으로 중국 본토를 중공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당시를 다룬 한국군의 각종 자료에서도 이 용법을 현재까지 변경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이후 북베트남(월맹)이 남베트남(자유 월남)을 무너뜨리고 통일한 뒤에 세워진 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부터 '베트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0] 이에 따라 마치 이전의 '월남'과 단절된 신생 국가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4. 배경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이후 이번엔 미국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남베트남)에 간섭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복잡한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남베트남을 적화되게 방치하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같은 편인 자유 진영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적화될 것이라고 우려하여[21] 우방국인 자유 월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미국은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22] 물론 나름 자유 진영에서 구(舊)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공산 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그건 미국 입장이고, 월맹(북베트남)과 베트콩 입장에서 보면 구 식민 세력을 아무 생각 없이[23] 지원한 또 다른 적이다.

덧붙여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호치민이 프랑스와 중국을 경계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24] 호치민은 일찍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8차례나 서한을 보내 독립을 지지해주길 호소했으나 <불간섭> 소리만 들으며 묵살당했다. 아이젠하워 정부도 마찬가지로 호치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약속을 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부터 군사 훈련, 무장 등 일련의 원조가 시작된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 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 호치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월맹은 남베트남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폭력 투쟁을 선전, 선동해나가며 남베트남의 민심을 교란했다. 한편 응오딘지엠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나 보다가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응오딘지엠의 일가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원조 기금은 경제 개발 계획에 사용되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된다. 예컨대 월남은 농경 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양담배 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누를 두목으로 하는 비밀 경찰을 조직하여 반대파, 경쟁자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이 때문에 겨우 안정되었던 치안도 다시 악화되고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국민 여론도 악화되었다. 이틈을 타고 베트콩이 세력을 확장시킨다. 1960년 12월에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Central Office for South Vietnam, 남베트남 중앙국)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으로 확대된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무능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기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것이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조차 감당할 여력이 안됐다. 그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1963년 베트콩 게릴라와 남베트남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압박 전투다. 1963년의 압박 전투는 1,500 명의 정부군이 300여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압박 전투에서 베트콩측이 18명의 전사자를 낸것에 비해 연합군측은 86명(남베트남군 83명, 미국 군사 고문단 3명)이 전사하고, 미군 헬기 5대가 파괴됐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교전에서 참으로 허접한 모습을 보였다.

5. 교전 초기


당시의 녹음 파일

파일:attachment/79552-050-5B7249FA.jpg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월남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다.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은 보통 1964년 벌어진 통킹만 사건으로 간주하지만, 그 이전에도 양측은 1960년대초부터 서로의 후방에서 게릴라 침투 공작을 벌이며 국지적인 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1964년 7월 말에는 라오스 왕국이 월맹군에게 자신의 영토(호치민 루트)에서 나가라며 북베트남을 폭격했고, 베트남 공화국군북베트남 관할하의 통킹 만의 두 섬에 상륙해서 점령해 무력 충돌은 점점 심각해졌다.

직접적인 발단은 1964년 8월 2일 벌어진 통킹만 사건이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통킹만 사건을[25] 명분으로 하여 월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하게 된다.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다.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이다. 미 해군 항공모함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했다. 북베트남 해군의 대공포가 미국 해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2기를 격추했다. 폭격 실시 2일 후에 미국 의회에서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피어스 애로우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11월 1일 베트콩이 비엔호아 미국 공군 기지를 공격하여 4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다. B-57 폭격기 등 항공기 27대가 파괴되었다.

이후 이에 대한 다소 애매한 보복전 성격인 미군의 배럴 롤 작전이 벌어진다. 목표는 라오스에 존재했던 호치민 루트 타격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라오스 정부군을 돕는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다만 직접적으로 라오스 국경을 넘어서 폭격을 하는 것은 협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간에 조명탄에 의존해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공격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틈타 베트콩이 미군 장교 막사를 연달아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미국인 2명이 죽었다. 그러나 미군은 확전을 원하지 않는지 이에 대한 보복전을 펼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콩은 미군에 대한 일련의 보복전을 이어나갔다.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중부 고원 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의 푸레이쿠 기지를 습격해 미군 8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미군 헬기 7대를 파괴했다. 이에 분노한 존슨은 6일 뒤 즉각 30대의 미국 공군 전투기(A-1, F-100)를 동원해서 월맹군 병영에 대한 공습을 지시했다(플레이밍 다트 작전 1). 사흘 후인 2월 10일 베트콩이 쿼논의 미군 기지를 습격해서 미군 23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다음날인 11일과 19일 보복 공습을 실시했다(플레이밍 다트 작전 2). 이어 20일 미군은 남베트남 공군과 합동으로 대규모 폭격을 실시하려 했으나 남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소요로 작전이 4차례나 연기된 끝에 3월 2일에야 실시되었다. 이것이 롤링썬더 작전이다.

1965년 3월 미 대통령 린든 존슨은 다낭 공군 기지의 미군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미 해병대 2개 대대를 남베트남에 파병하고, 이어 2개 대대를 추가로 파병했다. 1965년 3월 8일 미 해병대 2개 대대가 다낭에 상륙했다. 당시 남베트남의 미군 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은 상당한 규모의 미군 병력이 주둔하지 않으면, '베트콩 전국 장악'이 1년 내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국지전 수준에 머물렀고, 대규모 지상 전투 수준으로는 확전되지 않았고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월맹을 위협해서 그들의 남베트남 합병 야욕을 저지해보려는 수준에 머물렀고 전면전으로의 확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65년 3월 30일 사이공에서 미국 대사관 폭파 테러로 2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다. 결국 사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월남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1965년 5월 초 연대 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푹룽성(成) 성도를 공격했다. 그들은 1960년대 초에 남베트남군과의 교전에서 포획한 무기들을 사용했다. 남베트남군은 적수가 되지 못했고, 베트콩 부대는 하루 사이에 도시를 점령하고 퇴각했다. 5월 말에는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와 같이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이는 결국 미 지상군이 투입되어 베트콩을 상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11월 14~18일에는 두 번의 큰 전투가 플레이미 서쪽에 있는 남베트남의 중앙 고원인 이아드랑에서 일어났다. 이아드랑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 되었던 미군은 약 4일 간의 전투에서 우수한 화력을 동원하여 월맹군 170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미군 또한 3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6. 연합군 결성과 미군의 참전

초기에 양측은 보복전 수준의 국지적인 교전을 지속하며 전면전으로의 확전은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3월 30일 베트콩이 사이공에서 미 대사관을 폭탄 테러해서 상황은 순식간에 악화되었고, 본격적인 전쟁이 개시되었다.

미군은 대규모로 병력 증강을 하며, 대부분의 국가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대했었지만 만만한 국가들, 호주, 뉴질랜드, 한국, 태국, 필리핀이 전투병을 파병하고 대만 등 다른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은 비 전투병 등을 파병하였다.

한편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은 무기 원조[26]나 유격대 등으로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베트콩(+ 월맹(북베트남), 소련,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27])
VS
미국 + 남베트남(+대한민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대만 기타 연합군)

쉽게 이야기 하자면 이런 구도의 대결이었다. 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아닌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N.L.F)과 기타 저항 세력들이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는 지역에 베트콩의 기습+월맹군의 공격이 벌어지는 양상이었다.

한편, 남베트남 측은 제네바 협정에서 협약한 '1956년 남북 통합 총선'의 이행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월맹이 앞에서는 평화 공세를 하면서도 뒤에서는 남베트남을 해방시킨다는 미명 아래 남베트남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폭력 투쟁을 선전, 선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호치민 루트를 통해 군수 물자와 베트콩을 계속해서 남파하고 있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화전양면전술을 구사하는 월맹을 믿고 함께 총선을 할 수 없다고 남베트남은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말이 총선이지 승패가 이미 결정된 선거에 뛰어들어서 패배할 바보가 어디 있는지? 총선을 하면 승리는 월맹측의 것이 거의 확실했다.

심지어 전쟁 발발 전까지 남베트남의 지도부는 "설마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며 방심했다.

완고한 반공주의자였던 티우 대통령조차도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 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하는 등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월맹은 경제가 부실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하므로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상대를 얕보고 우습게 보는 자는 결국 패망하게 된다.

6.1. 한국군 파병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한국도 전투 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 참조바람.

한국군대한민국 육군제9보병사단 백마 부대와 수도 사단 맹호 부대, 그리고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 부대가 주축이었다.

7. 전개

196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 공군의 1966년 6월 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된다. 7월 17일에 월맹은 전 국민과 군대에 비상 동원령을 선포하였고 중공은 각종 전쟁 물자와 무기, 후방 기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물론 1966년 1월에 중공,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기에 비공식적으로는 지원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 때부터 엄청난 물자와 장비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8월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이 30여만명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으나, 미국은 10월에 발표한 월남 참전 7개국 정상 회담 공동 성명 발표를 통해 전쟁의 조기 종결을 계획하고 있었다.

1967년 11월 3일 부터 23일 까지 베트남의 중부 고원 지대인 콘툼성에 있는 닥토에서 미군과 월맹군 그리고 베트콩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미군은 캄보디아 국경 지대에 있는 콘툼성의 닥토라는 곳에서 적의 병력,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화력과 기동력만을 믿고 익숙치 않은 지형에서 작전을 펼쳤고, 월맹군은 거의 연대가 궤멸되었다. 미군은 우수한 화력을 동원하여 베트콩과 월맹군 1600명 이상을 사살했다. 20일 간의 전투에서 미군 또한 350명 이상 전사하고 헬기 40대를 잃었다. 닥토 전투 또한 이아드랑 전투에서처럼 미군이 우위를 점했지만, 적잖은 사상자를 내고 끝이났다.

8. 주월미군이 패전한 이유

8.1. 호치민 루트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무리없이 상황이 종료되리라고 미국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갔다. 미 국방성은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월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28]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트콩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싸우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다. 그래서 이 정글의 나뭇잎, 풀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 사용한 농약이 현재 사용이 금지된 그 유명한 고엽제다.

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 덕분에,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 소총을 든 미군이 UH-1 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우는 전형적인 월남 전쟁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베트콩과 월맹군은 몰래 캄보디아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월맹이 베트콩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치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중국, 소련 등은 주변 국가인 캄보디아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월남 국내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치민 루트를 타격하고, 어마어마한 공군 폭격을 감행했으나,[29] 효과는 미미했고 호치민 루트는 전쟁 내내 건재했다. 게다가 캄보디아크메르 루주라오스의 파테트라오 등의 공산 반군이 호치민 루트 형성을 지원하고, 이들 두 국가의 정부는 이를 막을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내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결국 시아누크 국왕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사라지자 오히려 폴 포트크메르 루주 같은 공산계 게릴라가 준동해,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 혼란에 빠져버려 호찌민 루트를 막는 것은 더 어려워져 버렸다.

그렇다고 남베트남이 그래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냐면 절대 아니었다.[30] 애초에 월남 전쟁에서 주로 공세를 펼치는 세력은 월맹이라기보다는 남쪽에서 양산된 베트콩이다. 물론, 월맹에서 지원 병력이나 지도를 위한 간부, 전투 물자를 계속 내려보내기는 했지만 자국 내에서 반란군이 발생하는 실정이니 자국 통제도 제대로 못했던 셈이다. 더 막장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떠돌다가 월맹군/베트콩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

8.2. 북진 금지

사실상 베트남전 승패의 결정적 요인으로 아무리 남베트남이 막장중의 상막장이고 힘든 전투환경이었지만 압도적 세계 1위인 미국이 북베트남을 못이길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교전 대상은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 내의 베트콩 세력이었고, 미군의 신분 역시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의한 인도적 원조군>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었으며, "북베트남을 직접 공격하면 소련이나 중국이 끼어들어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짐![31]" 이라는 입장이었던지라 무슨 일이 있어도 북베트남 영토로 지상군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던 상황이었다.[32]

물론 그린 베레를 비롯한 특수 부대는 잘만 투입되었지만 특수 부대는 성격상 절대로 주력 부대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숫자도 적어서 국지전에서는 강력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없다.[33] 대신에 Operation Rolling Thunder 등의 북폭이라 불리는 항공 공세 작전을 수 차례 했지만, 월맹을 결정적으로 쓸어버릴 수는 없었다.

반면 월맹은 수 십 년이 걸려도 남베트남을 어떻게든 무력으로 합병할 목표를 세운 상태에서, 미군은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34]

북폭에 대해서 하노이를 비롯한 북베트남 대도시에 B-52를 동원해 융단 폭격을 가한 작전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시 북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소련제 SA-2 지대공 미사일 포대가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35][36] 전술기도 아닌 대형 전략 폭격기의 작전은 불가능했다.[37] 흔히 생각하는 융단 폭격은 어디까지나 밀림지대, 특히 호치민 루트 제압을 목적으로 행해졌을 뿐, 도시와 민간 지역에 대한 폭격은 어디까지나 군수 공장이나 철도망 같은 전략 목표에 대한 조준 폭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폭이나 부수 피해로 인한 민간인 사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미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일방적으로 북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당장 월남 전쟁 동안 미국 공군/해군 항공대의 교환비는 역대 최악이었던 것으로 이름 높기도 하고... 이는 F-4로 대표되는 미국 공군의 병크, 즉 미사일 만능주의로 달렸던 결과였다. 이 착각은 심각해서 한국전쟁 시기 12대 1까지 벌어졌던 교전비는[38] 월남 전쟁 3 대 1, 2 대 1을 거쳐서 MiG-21이 등장할 때에는 0.85 대 1까지 밀리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39] 최종적인 교환비는 F-4 1대당 북베트남기 3.67대로 돌아오긴 하지만. 즉 오히려 밀리는 상황까지 진행된 것이다.

더구나 북베트남의 북부 영토는 중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오폭 시 중국을 폭격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북부 국경 지대는 애초에 폭격 불가. 이래서야 중국 국경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자 지원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 외에 하이퐁 등 북베트남의 주요 항구에 대규모로 기뢰를 살포했고 이 자체는 효과를 보긴 했지만 전쟁의 전체 판도를 바꿀 수준은 아니었다. 즉 폭격을 통해 월맹의 전쟁 의지를 근본적으로 무력화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8.3. 수렁

처음부터 이 전쟁은 미 지상군이 북위 17도선을 넘어서 북베트남으로 진군하기 전에는 승전으로 끝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호치민 루트의 존재, 남베트남의 막장 상황, 북베트남으로 진입 금지 등 여러 가지 제약이 걸린 상황에서 미국은 월맹군의 주력 부대도, 전쟁 수행 능력도 무력화시키지 못하고 끌려다니기만 했다.

남은 것은 강화 협정, 더 이상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월맹을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유도하는 것이다. 혹은 북베트남 사람들이 전쟁의 피해로 인해 월맹 정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이것이 반전 여론으로 이어져서 내부 분열로 인해 전쟁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마저도 실패했다. 이것은 미군이 패배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월맹의 전쟁 의지를 꺾어놓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호치민의 발언처럼 월맹의 적화 통일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고, 전면 침공이 아닌 간헐적인 공중 폭격만으로 월맹 정권 수뇌부들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기는 힘들었다.
폭격만으로 월맹의 전쟁 의지를 꺾으려면 태평양 전쟁 당시 도쿄 대공습 수준으로 북베트남을 불태우고 갈아 엎어버리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소련제 무기로 촘촘히 구축된 월맹의 방공 전력은 미군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소련은 미 공군과는 무슨 짓을 해도 공군과 전투기 생산을 통한 전면전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련은 방공용 지대공 미사일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방공망의 감지/요격 능력이 미국보다 더 발전하게 된다. 이 발전된 방공망이 도배됐다는 것은 미 공군 역시도 만만찮게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미국은 이렇게 뻔히 보이는 막대한 피해를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를 위한 국내외의 명분 역시 미국 편이 아니었다. 이미 전쟁의 정당성을 상당히 잃은 미국이 월맹을 정말로 갈아엎었다간 친미 우방국들조차 등을 돌릴게 뻔했다. 미국 국내의 반전 여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월맹의 내부 통제력 또한 남베트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미군은 특수 부대를 이용해서 북베트남 내의 반공 세력이나 소수 민족 세력을 포섭, 북베트남 정부에 대한 반(反) 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전쟁은 월맹의 지속적인 지령과 지원을 받은 베트콩들의 일방적인 게릴라전으로 흘러갔고, 미군은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질식되어간다.

8.4. 사기 저하

베트남 전쟁/미군 항목 참조.

9. 월맹의 구정 공세

1968년, 월맹군과 베트콩이 설 연휴 동안의 관습적 휴전 기간에 미리 잠입한 병력을 통해 남베트남 주요 대도시에 동시 다발적인 선제 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 베트남어로는 Sự kiện Tết Mậu Thân, 영어로 Tet Offensive이기 때문에 테트 공세로도 알려져 있다.

이 구정 대공세는 월남 전쟁의 운명을 가른 사건이었다. 베트콩들은 남베트남의 주요 기관들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도리어 처참하게 대패 당했다. 그러나 주월 미국 대사관 1층이 베트콩에게 공격당하고 점령당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미국에도 생중계가 되었다. 그래서 미 지상군이 월남에 상륙한 시점부터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다'라는 언론의 보도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인들에게 심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고조되었다.[40]

물론 미 지상군이 월남에 상륙했던 1965년 시점부터 일부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도한 월남 전쟁 반전 운동이 있긴 했다. 그러나 전쟁이 점차 수렁텅이에 빠지고 1968년 구정 공세 당시의 여러 장면들이 방송을 통해 전파되자 반전 운동이 격화됐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10. 케산 전투

10.1. 전개

파일:external/www.mishalov.com/khe-sanh-1968.detail.map.jpg 파일:map15.jpg
케산 요새 포위 전개
1968년 1월에 벌어진 포위 전투로 시작 자체는 구정 공세보다 일렀던 전투다.[41] 디엔 비엔 푸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프랑스군의 요새였던 케산(Khe Sahn)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국경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이 케산을 미군이 아니라 월맹군이 포위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즉 케산에 주둔한 미국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을 월맹 정규군 2개 사단이 포위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애초에 동원된 월맹군 부대부터가 디엔 비엔 푸에 참전했던 사단이었다. 그리고 디엔비엔푸 당시 베트민을 지휘했던 보응우옌잡 북베트남 국방 장관이 이 케산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설레발이 서방 기자단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디엔비엔푸와 상황이 유사했다. 지압은 이에 대해 "우리는 야전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참가설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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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 포위망 격퇴 작전인 오퍼레이션 페가수스

하지만 이번의 상대는 어설픈 프랑스군이 아니라 쇼미더머니의 미군이었다.

근처 '캠프 캐롤'의 포병대가 지원해주는 막강한 포병 화력, 폭탄을 물처럼 들이붓는 수준의 항공 폭격으로 월맹군을 화력으로 압도해 버렸다.[42] 또 케산 기지는 하루에 최소 115톤의 물자가 필요했는데 미군은 하루 평균 300회의 보급으로 이를 해결해 버렸다. 다만 원래는 비행장 착륙후 지상 하역이었으나 월맹군들이 수송기가 이착륙 할때를 노려 포격을 해대서 활주로 착륙후 달리는 상태로 화물만 던지고(...) 그대로 이륙하는 걸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피해가 커지자 공중 투하로 변경되었다.[43]

그래도 참호전에 무지했던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과는 달리, 미군은 기지 전체를 활주로 건설용 플레이트와 모래포대로 만든 방공호로 도배를 해놨고 앵간한 포격은 다 막아낼수 있었다. 대신 미해병대는 하루종일 쏟아지는 포격 때문에 참호 밖으로 거의 나오질 못했고 때 아닌 1차대전의 참호전을 경험 하였다. 존슨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어떻게든 케산이 '제2의 디엔비엔푸'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백악관 상황실에 케산 기지의 모형판을 가져다 두고 매일 마다 전황을 체크 했다. 하지만 미대사관까지 공격 당하는등 남베트남 전역이 개판 상황이어서 구출 작전은 계속 지연 되었다.

북베트남도 환장하긴 마찬가지였는데 상황이 디엔비엔푸와 비슷하긴 했지만 당시처럼 월맹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도 못했다.[44] 게다가 테트 공세의 초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미군이 1 기병사단을 앞세워 케산 구원 계획인 '페가수스' 작전을 실행 하였다.

공세 초반의 대규모 공격도 미해병대의 분투로 격퇴 되었고, 숫적 우세조차 미군의 화력에 마구 갈려나가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월맹군 지휘부는 피해가 너무 크다고 결론 짓고 철수 하기에 이른다. 결국 케산은 77일의 포위를 버텨내었고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것도 완벽한 승리라고 하기엔 좀 무리였는데 왜냐하면 미군의 구원병력이 당도 했을때는 이미 북베트남군이 완전히 철수해버렸기 때문에 1기병 사단은 별 다른 전투 한번 없이 케산기지까지 당도 하였다.

그리고 그해 7월, 미군은 그렇게 피를 흘려가며 지켜낸 케산 기지를 해체 해버리고 스스로 물러났다.[45]

10.2. 케산 전투와 구정 대공세를 포괄한 배경 및 영향

케산 공세는 대놓고 디엔 비엔 푸를 흉내낸 것에 알 수 있듯이 미군에 그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고, 성공하였다. 실제로 미국의 매스컴들은 구정 공세로 불타는 대사관 만큼이나 포위된 케산이 제2의 디엔 비엔 푸가 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으며, 게릴라전이나 벌이던 월맹남군이 이제는 미군을 포위 섬멸하는 시도를 할 정도로 나오게 된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게 되었다. 결국 대통령은 핵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사령관에게 부탁하고, 사령관인 웨스티 모얼랜드는 케산과 디엔 비엔 푸는 다르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구정 공세와 같은 맥락에 있었다. 애초에 구정 공세와 케산 전투는 모두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왜 같은 시기에 시도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은 시기에 있다. 1968년. 이는 바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월맹은 미국의 존슨 행정부를 엿먹이기 위해서, 그리고 반전 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보응우옌잡이 말한 우리는 전투에는 몇 번 진 적이 있지만 전쟁에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라는 말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월맹군은 전쟁과 정치를 동시에 실행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완벽한 기습을 당한 것은 미국 내 언론과 여론, 그리고 남베트남의 여론이었다. 미국은 당시 "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으며, 우리의 승리가 확실하다"라고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불타는 미국 대사관과 포위된 케산 요새는 대단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사상자도 급증하여, 2월 18일 주월 미군사령부는 전체 전쟁 기간 동안 주간 피해로는 최대인 542명 전사, 2,547명 부상을 공포하였다.

여기에는 명분도 포함되는데, 월맹 입장에서야 이건 독립과 통일 전쟁이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개막장 남베트남을 도와주는 방어 전쟁이었던 것이 컸다. 이 때문에 기존 베트남 전쟁 찬성 측마저도 구정 공세 기간에 20% 가량이 반대로 돌아서는 등 전쟁 혐오와 반전은 미국 전체를 거세게 몰아갔다.

그리고 린든 존슨이 대통령 재선 불출마[46]와 함께 북폭의 중단을 선언하고 월맹측에 협상을 요구하면서, 월남 전쟁은 지루한 협상과 전쟁의 마지막 진창으로 넘어가게 된다.

구정 공세 시기 1달간의 공격 기간 동안 월맹군과 베트콩 30000명 이상이 죽었던 데에 비해, 미군 2천명이 사망했고, 3천명 이상이 부상자가 나왔다. 참고로 1968년 기간 동안 전사한 미군은 총 16000명이 넘는다. 이는 1965~1967년까지의 미군 사상자 숫자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47][48]

11. 남베트남의 패배와 북베트남의 승리

11.1. 반미반전(反美反戰)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결국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남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다. 게다가 반전 여론과 경제 인플레이션 및 재정 적자로 인해 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대폭적으로 감축시키겠다는 요지의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아시아의 군사적/정치적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월남은 말 할 것도 없이 한국과 북한에서도 긴장이 흐르게 되어 각각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미국은 중국과 대립하는 노선에서 선회하여 친중적인 노선으로 바뀌게 된다.(핑퐁 외교)[49]

1969년 9월 2일에는 월맹의 주석 호치민이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호치민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주언, 똔득탕 등 그의 뒤를 이은 월맹의 2세대 지도부들도 전쟁을 계속 수행하면서 월남 전쟁은 호치민 사후에도 이어졌다.[50]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내에서 반전 운동의 격화되었고, 이는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도 미국 국내에서의 반전 운동은 지속되었다. 1969년에는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인 미라이 학살의 진상의 밝혀지고, 1970년 5월 4일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발하여 생긴 미국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교 시위에서 주방위군의 발포로 인하여 4명이 죽고 9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미국 국내의 반전 여론을 더 격화시켰다.[51]

11.2. 파리 강화 협정

미국의 동맹국들은 처음부터 이 전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을 포함해서 다른 친했던 나라들이 파병을 하긴 해도 전투병은 잘 보내지 않는 등. 그닥 협조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가 대한민국. 미국 다음으로 전투병 숫자가 많았다.[52][53]

아무튼 미국은 단계적 철군 발표 이후로는 희망도 없는 전쟁에서 지리멸렬한 전쟁을 이어 나간다. 미군의 철수는 196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매년 순차적으로 부대들이 떠났다. 큰 전투도, 목표도, 뚜렷한 적도 보이지 않는 마치 안개 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듯한 전쟁이 수 년간 이어졌다. 그리고 도와주려고 했던 놈(남베트남)까지 막장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그리고 1971년에는 라오스를 침공했다. 1971년이 끝날 무렵에는 지상 전투 부대의 대부분은 떠나며 1972년 3월 월맹군의 춘계 대공세가 일어날 때 미국은 지상군 재파병이 아닌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을 재소집하여 대응하고 지상군은 그대로 나가게 한다. 부활절 공세 당시 월맹군과 베트콩은 중국과 소련으로 부터 지원받은 전차와 장갑차 수 백대를 동원하여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격을 감행했지만, 미군의 공군력에 밀리고 말았다.

1972년에는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게 되고, 단계적인 철군은 계속 이어진다. 곱게 철군하기 싫었던 닉슨 정부는 1972년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12월 18일~29일까지 11일 동안 또 한 번의 대규모 폭격을 하노이와 하이퐁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대도시에 감행했다.

1973년 1월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은 파리 강화 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그래서 헨리 키신저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한국군도 이 때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하기 1년 전인 1972년 마지막으로 안케패스 지역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른 뒤, 1973년 3월 월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54][55]

이 때 미국은 체면치레를 위해서 핵 위협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 바로 출구전략으로, 핵 위협을 통해서 덜 쪽팔리는 퇴각을 이뤄낸 인물이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이다. 물론 소련도 핵을 가진 상황이었고, 전쟁을 끝내려는 마당에 핵전쟁을 벌리기는 싫었으므로 일단 위협만 하고 당연히 사용하지는 않았다. 사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1949년이었으므로, 애초에 프랑스에 제의하던 시기에는 이미 소련도 핵은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핵 협박은 핵을 쏘지 않기 때문, 혹은 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애초에 상대도 핵 보유국이 아닌 이상 핵 협박 자체는 그다지 눈치를 보지 않았다.

11.3. 빈집털이

무주공산(無主空山). 미군 없는 남베트남은 빈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월맹은 앞에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뒤에서는 남베트남을 재차 침공할 준비를 했다. 침공 준비를 마치고 1975년 1월 시험삼아 푹룽 성(福隆省)을 공격하여 점령 한 뒤, 1975년 3월 월맹은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미국은 이왕 도와준 놈인데 그냥 손 빼기는 좀 찝찝했는지, 미군은 철수하면서 남베트남에게 많은 수의 무기를 공여했다. 남베트남이 그거 갖고 잘 싸우라는 거였는데... 1975년에 월맹군이 쳐들어 오자 대부분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나버렸다.

결국, 남베트남군은 대패했고 월맹군은 미군 무기를 노획하여 남베트남군을 역공하는 사태까지 갔다.#

사실 미국이 무기는 줬지만, 이 무기들의 유지를 위한 예산 비용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베트남군은 일상적인 전투에도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례로 미군 철수 전에는 전투 한번에 100발을 쏘던 포대가 단 3발만을 쏠 수 있었다. 특히 유지 보수에 민감한 공군의 타격이 커서 전투기는 많았지만 부품과 기름, 탄약이 없어서 제대로 출격할 수 없었다. 급기야 C-130 수송기에서 폐유 드럼통과 폭탄을 함께 투하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본래 공산주의자로서 군 내에 위장 잠입해 있던 전투기 조종사가[56]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폭탄을 떨구고 월맹에 귀순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출격을 위해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가 닥치자 태국이나 말레이시아까지 날아가서 태국말레이시아에 망명한 조종사들이 수십명이다. 공군 참모총장이자 전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탈출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귀중한 조종사와 전투기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던가[57].흠좀무. 이때 탈출한 항공기들은 태국이 임시로 보관하다가 미국에 반환하였다.[58]

보병들은 미군을 따라서 싸운 경험이 남아있었는지 공군 지원 없이는 한 발도 못 움직인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1975년 3월 초에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더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게 잘못되면서 오히려 패망을 앞당기는 자충수가 된다. 1975년 3월 1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주요 거점지인 부온마투옷을 점령했고, 이로써 수도 사이공으로 가는 길을 확보한다.

미국 정부는 의회에 9억 7,200만 달러의 남베트남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의회는 더 이상의 예산 지원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물론 남베트남군이 무능력했던 면도 있긴 했으나 그 밖에 지휘 체계의 붕괴와 전략, 전술적인 문제도 상당히 컸다. 보급과 병참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 월맹군의 대공세에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옌 반 티에우가 내린 무모한 철수 작전으로 인해 피난민들과 군이 뒤섞이는 대혼란에 빠지면서 일개 야전군이 월맹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되어버렸다. 이 철수 작전의 문제점은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그 자리에 없었고, 사령관 대리는 막 진급해서 별을 단 여단급 지휘관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보안을 유지한답시고 철수 작전 자체가 부대장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이 재배치를 틈타서 호치민 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월맹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휴전선인 북위 17도선과 중부 고원지대가 넘어가면서 남베트남은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1975년 3월 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된다.

더 막장은 이 와중에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치 투쟁과 쿠데타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

11.4. 적화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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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남민전)의 T-54B 전차.[59]

그 와중에도 레민다오[60] 준장이 지휘하는 5천명 남짓의 18사단은 소수의 증원 병력으로[61] 사이공 북동쪽 60km 지점에 있는 소도시 쑤안 록에서 1개 군단, 4만여명 규모의 월맹군의 공세를 4월 9일부터 13일까지 4일간이나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이 전투는 사실상 이 전쟁 마지막 국면에서 벌어진 유일한 정규전이었다. 당시 월맹군을 지휘하던 반티엔둥 장군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전투"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래서 사이공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월맹군은 병력을 7개 사단으로 늘려서[62] 2차 공세를 감행했다. 주변 지역부터 제압당해 보급로가 끊기고 포위당한 18사단은 결국 3군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21일부로 쑤안 록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1개 사단이 아무리 분투한들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이 전투는 남베트남군이 불태운 마지막 불꽃 이상은 되지 못했다. 18사단은 이후 사이공 동부 방어선에 배치되어 끝까지 싸우다가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항복하고 사단장 다오 준장은 생포되어서 포로가 된다.

쑤안 록이 함락된 4월 21일에는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이 하야하고 곧바로 남베트남을 탈출한다. 이후에 4월 30일에는 결국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월맹군과 월맹의 지도부들은 최소 2년이 걸릴 것 같던 남부 해방 작전이 무려 55일만에 끝난 것에 대해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국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파리 강화 협정''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패망과 아비규환에 빠진 남베트남 주민들의 절규에 침묵으로 응답했다. 물론 남베트남이 패망한 뒤 보복이라는 걸 해주긴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중 하나로 캄보디아에서 친미 쿠데타로 등장한 좌익 게릴라 크메르 루즈를 지원했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는 100~150만 명 이상이 학살되는데 이것이 바로 킬링 필드이다. 킬링필드 학살은 전 세계적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 크메르 루즈를 지지했던 미국과 이후 공산 월남과 전쟁을 벌인 중국이 크메르 루즈에 의한 학살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공산 월남의 정당성만 더해주는 꼴이 되었다. 나머지 또 하나는 이전부터 해오던 경제 제재라 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타이밍도 부적절한 게, 리처드 닉슨데탕트를 주장하던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그도 워터게이트로 물먹으면서 제럴드 포드가 올랐다. 닉슨은 자신의 집권기였으면 당연히 군대를 파병했을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여하간 참 절묘한 타이밍.

전쟁의 막바지에는 적화되는 남베트남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미국을 비롯한 대한민국 등 자유 진영에서는 월남 전쟁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입안했다.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세운 작전의 일환이다. 흔히 프리퀀트 윈드 작전 하면 당일 새벽 미국 대사관 철수 작전을 떠올리지만 이것은 최종 탈출 작전인 옵션 4이며,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옵션 1~4로 구성되었다.

옵션 1은 탄손누트 공군 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서 민항기로 공중 수송하는 것이었다.[63]
옵션 2: 군용기로 공중 수송.
옵션 3: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 수송.
옵션 4: 최종 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 수송.

일단 작전이 수립되자 비행기편 및 선박편을 통해 자국민들을 남베트남 밖으로 피난시키고 있었으며, 한국 역시 월남에 있던 한국인들을 소개하기 위해 LST 2척을 파견하였다.[64] 그러나 긴 전쟁 기간 동안 나름대로 월남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민간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놓고 떠나기를 주저했고, 설상가상으로 4월 28일 탄손누트 공군 기지가 폭격 당한 후에는 비행기편을 통한 탈출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주월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비상 시 미국 대사관 직원 및 미국인, 그리고 호주, 영국, 태국, 싱가포르, 프랑스 등을 비롯한 동맹 국가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옵션 4를 요청하고, 이것이 월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군비 지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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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제 개발청 직원 숙소 옥상 LZ로 몰려드는 사람들. 미국 대사관으로 흔히 잘못 알려진 사진이다.[65] 아래 나오는 영상에도 이 장면이 마치 그레이엄 대사의 탈출 장면처럼 나와있다.

4월 29일 오전 11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최종 단계인 옵션 4가 발동, 탄손누트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Landing Zone) 등 사전에 선정된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의 탈출이 개시된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 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사람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어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국 대사관 옥상만이 남았다. 미국 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 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66]

4월 30일 새벽 5시, 헬기편으로 주월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을 포함한 2,100여 명의 피난민이 탈출했고, 2시간 후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 해병대 병력 11명 역시 탈출 헬기에 오르며 주월미군의 월남 전쟁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 종지부를 찍는다. 이 때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후 추가로 탈출한 사람들까지 합쳐 보트피플로 전락했고 이 작전으로 인해 약 13만명의 월남 민간인이 탈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베트남에서는 베트콩이 정권을 잡고, 이듬해인 1976년 월맹과의 통일을 선언하고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작전 중 주월미군은 총 78대의 헬기를 동원했는데, 남베트남군 조종사들이 헬기나 경비행기 등을 몰고 미군 함정으로 날아오면서 착륙할 자리가 모자라 바다에 헬기를 버리기까지 했다.[67] 미군에 구조된 민간인 대다수는 배를 이용해 바다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비극적인 예상대로, 또는 야심찬 의도와는 반대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절반이 적화되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마저 적화되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이 우려했던 바가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가 밥 먹듯이 일어나던 태국도 적화되는 일은 없었다. 단 태국의 경우는 원래 막장 국가급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태국은 남한보다 잘 살았다. 미국이 악몽스럽게 생각했던 인도의 공산화도 발생하지 않았다.[68] 인도는 친 소련이지만 반중(反中)적인 입장이 된다.

미군은 월남에서는 철수했다. 그러나 1년 뒤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는 함모 전단을 끌고 와서 위력을 과시한다.[69] 그리고 이 당시 탈출하지 못한 남한 교민 100여명과 중앙정보부 출신 이대용 공사 등 주월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굶주려가며 북한으로 납치 당할 두려움에 시달렸다. 공산 월남은 남한 교민들의 대부분을 조건 없이 석방했지만 북한측의 요구에 따라 이대용 주월 공사 일행을 생포하여 5년 동안 억류했다. 남한 정부는 경제 원조 등을 조건으로 내걸며 이대용 공사 일행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공산 월남은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다. 1979년 중월전쟁이 터지고 북한은 중공편을 들어서 북한과 공산 월남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한편 북한은 이대용 공사 일행에게 사상적인 전향 및 월북을 강요했다. 이대용 공사 일행은 북한측의 협박, 회유를 완강히 거절했다. 공산 월남측은 남한 정부에게 얼마간의 경제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포로를 석방한다. 이대용 공사 일행은 1980년에서야 석방되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12. 전후

월남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월남 전쟁 이전까지는 서유럽에서도 사민주의적 복지 체제를 구가하고 있었고, 금본위제의 고정환율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이었다. 미군의 패전은 단순히 일국의 패배가 아니라 금본위제를 무너뜨리게 된다. 환율이 널뛰기 시작하고 오일 쇼크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도래하게 된다.

외교적으로는 냉전을 점차 해소하는 데탕트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여러 모로 현대사를 이루는 가장 핵심적 근간이 된 사건이라고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12.1. 미국에 끼친 영향

지미 헨드릭스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미국 국가.[70]
초반에는 정상적인 연주로 들리나, 후반부는 폭탄이 투하되는 소리, 폭격 소리, 사이렌 소리, 사람의 울음소리,
그리고 미군에서 추모곡으로 사용되는 '탭스'의 멜로디를 섞어 베트남 전쟁과 미국 정부를 풍자한것이라고 알려졌다.
I had a brother at Khe Sahn
케산 전투에 전우가 있었지
Fighting off the Viet Cong
베트콩과 전투 중이었어
They're still there; he's all gone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그는 전사했어.
He had a woman he loved in Saigon
사이공에 걔가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어
I got a picture of him in her arms, now
지금은 그녀의 품안에 안겨 찍힌 걔의 사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 미국의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의 'Born In The USA' 가사 중에서

이 전쟁으로 미군은 무려 58,315여 명이 전사 및 실종됐고, 부상 약화로 수년 후 사망하여 집계가 안 됐거나 심한 부상을 입은 군인까지 합치면 참전병 300만여 명의 15분의 1인 20만 명에 달한다. 게다가 이 전쟁으로 인해 전사자 및 유족처리, 미국 사회에 다수의 상이병사,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사회 부적응 등으로 인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1970년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해보면,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전쟁들과 비교해보면 미군이 입은 피해가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미군이 베트남에 있던 9년 동안 미군 5만 8천 315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미국 입장에서 1년 동안 12만 6천명이 전사한 제1차 세계대전[71], 그리고 4년 동안 40만 7천 300명이 전사한 제2차 세계대전[72]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전사자 수이다. 또한 한국 전쟁과 비교해봐도 3만 6천 574명이 전사한 한국전쟁이 전사자 수가 적기는 하지만 3년이란 기간 동안 이 정도 인원이 죽은 것이고, 베트남 전쟁은 무려 9년 동안 5만 8천 315명이 죽은 것이기에 비례식으로 비교해보면 한국전쟁 때가 미군 사망율이 더 높은 걸 알 수 있다.[73]

하지만 당시 미국은 1960년대까지의 황금기가 종료되고 거품이 슬슬 빠지면서 어차피 불경기가 시작된 참이었는데 이 때 베트남에서 전쟁까지 하느라 엄청난 돈을 부은 데다[74], 오일 쇼크,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쳐 지독한 정치,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염세주의 경향이 뚜렷해졌으며 마약이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여지껏 전쟁에서 져 본적 없었던 미국의 첫 패배, 그것도 소련 같은 강대국이 아닌 베트남 같은 약소국을 상대로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점은 미국으로선 굴욕적이었다. 결국 얻은 것은 없고 정치·경제의 위기 및 불안정한 사회 등 잃은 것만 있는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다.[75]

여기에 더해 전쟁에서 돌아온 미군들이 국민들에게 살인자라는 소리를 듣는 등 비참한 현실을 마주했고[76], PTSD등에 의해 마약을 복용하는 사례도 있게 되면서 미국 사회는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뉴욕시의 낙서 문제도 베트남전 전후로 생기기 시작했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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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1968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사위이자 미국 해병대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찰스 로브 대위의 전황 음성기록을 듣고 괴로워하는 장면이다.[78]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중 하나가 람보 1이다. 베트남 전쟁 참전 후 귀국한 람보가 겪는 PTSD와 여러 사건들과 더불어 람보의 동료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었다. 게다가 람보 외에도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만화와 영화들 때문에 지금도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병들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디엔비엔푸 같은 만화 등도 있으니.

당연히 진보/좌파계열 사람들에게 미국은 악의 축으로 찍히고, 냉전이 끝난 1990년대를 넘어서야 그런 인식이 좀 잠잠해진다. 심지어 1980년대 독재정권 하에서도 유시민은 그 유명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골리앗을 구원한 다윗으로 표현하였고, 진보 지식인 리영희는 북베트남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절대 선한 쪽이 아니고 그저 승리한 악왜 악인지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만... 애초에 1국의 정권을 선악으로 구분하는게 가능한지?일 뿐으로 이를 지지하는 진보 계열이 꾸준히 욕을 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상당히 막장이었는데 윌리엄 캘리급의 개나소나 같은 인물도 훈련병 시절의 성적만 괜찮으면 GTG를 통해 장교로 임관시킨 탓에 위관급 장교들의 질적 수준이 완전히 개판이었고 이 때문에 프레깅이 상당히 많이 일어났지만 부대원이 짜고 전사라고 주장해서 증거를 찾을 수 없어 수사가 불가능했다. 이런일이 계속 일어난 데다가 이 전쟁에서 패배하기까지 한 미국은 결국 병역제도를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이후 모병제로 병력 충원이 부족할 것을 대비해 매브니 제도를 도입, 실시했다.

12.2. 한국에 끼친 영향

"...국론이 통일되지 않고 국민의 총화 단결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정치 불안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즉 집안 싸움만 하다가 패전을 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읍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점을 특별히 "타산지석"으로 삼고 또 교훈으로 명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면 인도지나 반도 사태가 한반도 및 우리의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도지나 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쓰고 있는 "인민 해방 전쟁"이나 "폭나 혁명 전략"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의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쓰고 있는 소위 "남조선 해방"이니 "남조선 혁명 전략"이니 하는 것과 똑같은 아세아 국제 공산주의 전략의 일환이고 또 그 공동 전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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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따라서 가정 호전적이고 악명높은 북한 공산 집단이 오늘의 인도지나 사태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아마도 지금 그들은 어떤 흉계와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입니다. 해방 후 지난 30년 동안 그들은 이것만을 연구해 왔고 이러한 음모만을 꾸며 왔던 그들이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지나 사태와 정세를 보고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크게 용기를 얻고 고무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한반도에서도 소위 "인민 해방 전쟁"이니 "남조선 혁명"이니 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일성은 북경에 가서 "남조선 혁명"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것이고 전쟁이 나면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읍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지극히 도전적인 말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10월유신"에 의해 유신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헌법이 바뀌었읍니다만은 만약에 유신 헌법이 생기지 않고 구(舊) 헌법대로 한다면 금년 봄이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를 하는 해 입니다. 아마 지금쯤 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고 다음 달에 가서는 국회 의원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선거의 해라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국력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사회 혼란, 정국 불안, 행정의 공백을 가져 옵니다. 선거 때 뿐 아니라 선거 전 6개월 혹은 1년 전부터 선거 바람이 불어 사회가 시끄럽고 혼란하고 또 행정의 공백을 거듭하는 양상을 띄다가 선거 때만 되면 이것이 절정에 도달해서 그야말로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 정도로 시끄러워 지는 것이 우리나라의 선거 풍조입니다.

(중략)

우리나라는 이처럼 매 4년마다 하는 선거를 중심으로 전후 1년 내지 2년 동안 여러가지 사회 혼란, 정치 불안, 행정 공백으로 국력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지난 71년도의 선거를 보고 이와 같은 시기에다가 "타이밍"을 맞춘 것일 것입니다.

(중략)

그들이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도중에 뜻밖에도 그들로 하여금 크게 용기와 자신을 얻게하고 고무시켜준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지나 사태인 것입니다. 그들은 인도지나 사태를 보고 이 시기가 "남조선 혁명"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하한 적의 공격도 능히 이를 저지하고 격멸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 여러분들은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가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만약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 굳건한 결의와 각오와 반드시 이겨야 되고 또 이길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이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가슴속에 확실히 서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중략)

우리는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국민 여러분들은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힘을 가지고도 왜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겠는가, 지키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읍니다. 만약에 있다면 우리들의 각오와 결의에 달려있읍니다. 따라서 앞으로 국민 여러분들은 정부와 군을 믿어 주시기 바라고 또 우리 정부는 슬기롭고 용감한 국민 여러분을 믿고 우리가 일치단결해서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의연한 자세로써 모든 사태에 대처해 나가야 하겠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제가끔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일에 대해서 보다더 충실하고 책임있게 해나가야 하겠읍니다. 이것만이 국난 극복을 위해 우리 국민들이 가져야 할 자세요 또 우리들이 나갈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행운과 건투를 빕니다."

-대통령 박정희, 대한뉴스 <[특보] 박 대통령 특별 담화> 보도 중 일부, 1975.04.29[79]

한국은 월남 전쟁 참전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며 경제적 이득을 보았다.[80] 월남에서 인정받은 실력으로 전쟁 이후 중동 특수를 따게 된다.

비록 자유 진영이 패배한 전쟁이긴 하나 자유 월남의 패망은 유신정권에 엄청난 행운이었다. 6.25 전쟁을 겪은 지 30년이 채 안 된 상황에서 월맹이 남베트남을 적화 통일한 것이 마치 데자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박정희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쁘게 손을 썼지만 자유 월남의 패망 이후에는 유신에 대한 저항이 싹 사라졌고, 긴급조치 9호 발령에도 별 저항이 없었다.[81]

앞서 말했 듯, 대한민국 국군도 미국과 자유 월남의 편에 서서 참전해 잘 싸웠다. 그러나 국군이 아무리 잘 싸웠다 해도 파병으로 전쟁의 전체적인 구도에 큰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큰 영향이 없었는지 궁금하다면 남베트남의 행태를 다시 보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한국군이 방어하고 안정화 시킨 지역이 1번 국도를 타는 지역들이었다. 안정화 작전 덕에 인구도 유입 증가가 될 정도로 안정화 지역이었는데, 한국군이 철수하자마자 남베트남군이 제대로 싸우거나 방어도 못하고 월맹군에게 그대로 빼았겼다.

분명 한국군은 월맹과 베트콩에게 있어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구정공세 이후 유일하게 선전했던 전투 지역은 맹호부대안케패스 지역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치 소강 상태였던 것에 반해 한국군만 유일하게 성과를 내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보병, 즉 알보병 위주의 파병과 적은 규모에서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한국 해병대가 크게 패배한 짜빈박 전투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한국 해병대가 애용한, 짜빈동 전투로 그 위력을 입증했던 중대 전술 기지가 그 당시에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또 다시 입증해준 셈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한국 해병대가 미처 철거하지 않고 넘어간 걸 월맹군이 차지하여 활용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남베트남 패망 당시 한국 해병대는 자국민과 라이따이한 그리고 베트남인들의 피난을 도왔고 실제로 한국에 정착하게 해주었다. 공산권에서 한국을 겨냥해 특별히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남베트남 자체가 심각하게 막장이라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뭘 어떻게 하건 전쟁의 흐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월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만 설명하고 넘어가기에는, 참전으로 인한 부작용도 분명 있었다.

유신헌법군인 및 군무원, 경찰공무원에 대한 이중배상 금지 규정(현행 9차 헌법 29조 2항)이 들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월남 전쟁이다.

국가가 군인이나 경찰에게 보상을 하면[82] 국가 재정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사법부가 사법 파동까지 일으킨 것을 무시하고 헌법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것이 2000년대까지 와서도 전상 및 국가유공자가 푼돈이나 받게 된 것의 배경이 된다. 이 때문에 실질적 후원은 배상이 아닌 연금이나 보험, 동료의 모금 등으로 해결한다. 또한 고엽제 피해를 입은 참전 용사들이 정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도 한다.

12.3. 고엽제 문제

가장 심각한 문제중 하나.

베트콩과 월맹군들의 주요 전투 패턴은 정글을 이용한 게릴라전이었다. 미군은 밀림 지역을 쓸어버리기 위하여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들을 항공 작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포하는 고엽 작전을 벌였고 이 고엽제들은 본래 목적이었던 베트남의 산림과 농업까지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이옥신등의 성분이 포함된 강력한 독성으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나 월남 민간인들에게 다음 세대까지 지금까지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엄청난 후유증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83]

고엽제 피해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12.4. 한 장의 사진

월맹의 구정 공세 당시 사진가 에디 애덤스(Eddie Adams)가 사이공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바로 "General[84] Nguyen Ngoc Loan executing a Viet Cong prisoner in Saigon". 일명 '사이공식 처형'이라고 알려진 사진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guyen.jpg

시가전 중 사로잡힌 베트콩으로 추정되었던 인물[85]을 남베트남 경찰서장 응우옌 응옥 로안(Nguyễn Ngọc Loan)이 즉시 자신의 권총으로 사살한다. 이는 당시 경찰서장과 같이 있던 AP통신 사진작가 에디 애덤스와 NBC 취재팀이 그 현장을 취재했다. 즉, 응옥 로안은 치안 유지 정부 소속의 경찰서장으로서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던 용의자를 즉결 처형한 것.[86] 포로의 인도적 대우는 제네바 조약에 의하면 적군이라고 인식될 수 있는 표식이나 제복을 입은 자가 대상인데, 해당 인물은 민간인 복장을 입었으므로 제네바 조약으로 보호받지 못한다. 문제는 저게 마땅한 심문과정이나 절차도 없이 진행된 즉결처분이라는 것. 이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나 생각없이 처형했다는 냉혹한 인물로 응옥 로안이 욕을 많이 먹었고, 그 다음에는 처형 대상자가 극악무도한 인물이다라는 식으로 알려져서 응옥 로안을 재평가하다가, 마지막에는 저 사람 정체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저 즉결 처형 과정이 정당한지 어떤지도 모른다는 식이 되어버렸다. 즉결 처형이다 보니 정보 수집 과정도 없고, 영상에서도 상대가 진술할 기회 같은 것도 없이 처형해버리기 때문에 무슨 죄목인지도 알 수 없다. 응우옌 응옥 로안은 1998년 6월 14일 67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저 사진의 완벽한 진실이 밝혀질 가능성은 앞으로도 거의 없다. 좀 자세한 내용은 구정공세 문서 참고.

구정 공세는 전술적으로는 월맹의 완벽한 실패였다. 남베트남군만이라도 단독 북진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는 한 북진 통일이 가능했을 정도로 월맹군 주력 부대와 베트콩의 병력 손실은 심각했다. 그러나, '터널 끝의 빛이 보입니다'라며 전황의 호전을 선언한 린든 B. 존슨 당시 대통령의 연설 직후 사이공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에게 공격을 허용받아 불타는 광경을 뉴스로 보게 된 미국의 국내 반전 여론은 다시 심각하게 점화되었다.[87] 그 움직임을 절정에 올린것이 당시 남베트남 정권의 비도덕성과 전쟁 범죄를 표현하는(것으로 미국 사회에 비추어진) 이 사진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구정 공세 이후 불타오르는 회의주의와 반전주의 여론 때문에 병력 증원에 큰 차질을 빚었고, 결국 미적거리는 사이에 큰 피해를 입었던 월맹은 기사회생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12.5. 월남 전쟁의 전쟁 범죄/민간인 학살

  • 베트콩
    • 쩌우독 학살 사건
    • 후에 학살 사건

1999년 한겨레 21의 보도 이후 파월 국군의 민간인 학살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1992년 한월 수교 당시 월남 측에서 과거사는 묻지 않겠다고 양해하였으며,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월남 방문 당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월남전과 관련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88]

사실 배상, 사죄는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하는 것인데 미국, 한국은 항복 문서를 쓴 적이 없다. 전쟁을 멈추자는 문서였지 사과, 전쟁배상금을 논하는 문서가 아니었으므로 미국, 한국은 사과하고 배상할 의무가 없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인권 유린 면에서 더 주목받는 것은 국내에선 고엽제, 월남 현지에서 라이따이한 문제다. 두 문제 모두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지만,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일은 드물다. 그나마 고엽제 문제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론화가 되었으며 피해 보상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라이따이한은 양측 정부와 언론, 시민 사회 모두의 무관심 속에 완전히 방치된 상태다.

12.6. 전후 숙청 및 보트 피플

월맹의 전쟁 수행을 지원했던 베트콩과 간첩, 좌파 인사들이 전쟁 이후에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곧이 곧대로 듣기보다는 걸러들어야한다.

이미 구정 대공세 이후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주요 인물들은 일망타진 된 상황이었고, 그 빈자리는 월맹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메꾸고 있었다.

여러 목적으로 재판없이 즉결 처형된 사람은 약 6만 5천명 ~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잘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통계가 과장되어 알려진 측면이 있다.

베트콩 정권이 들어선 뒤, 남베트남 정부 관련 인사, 고위 포로, 고위층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월남이 적화 통일되기까지 대략 1년의 기간 동안 남베트남 경제의 큰 부분을 좌지우지하던 화교들과 태국인들, 남베트남 정권의 수뇌부에 기생하고 있던 부패 관료들, 반공주의자들은 종전 후 많은 숫자가 망명을 하거나 보트피플이 되어 월남을 탈출했다.

쉽게 말해 숙청도 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라진 상황. 물론 재판없는 즉결 처형'만' 6만 5천에서 10만이라는 숫자를 적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릴 부분.

그리고 보트 피플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질병이나 기근 혹은 해적 등으로 인해 많은 숫자가 사망(숫자에 관한 항목은 베트남 공화국 참조)해 간접적으로 숙청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월남의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등은 사상 개조라는 미명 아래에 재교육 캠프로 끌려갔다.

사실 월남 전쟁 이후 숙청에 대한 논지는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제각각인데 확실한 것은 남베트남 관련 고위직(100만명)의 재교육 캠프는 분명히 있었고 이 중 10만 명은 가혹한 처사를 받았다. 거기에서의 대접은 전혀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재교육 캠프에서 갖은 학대를 받은 사람 중에 대한민국 공사 이대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중앙 정보부 소속 무관이었고 예비역 장성이었기 때문에 외교 특권을 박탈당하고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귀환한다. 이 사람이 당했던 이야기를 본다면 공산 월남에서 인권 탄압이 없었다거나 살 만했다는 말은 거짓이다. 여기에 수용된 사람은 약 1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대숙청 이후 공산 월남을 탈출하려는 대규모 보트 피플이 발생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 80만 명이나 되었다. 특히 보트 피플이 폭발적으로 늘어난것은 1978년 이후로 종전된 지 3년이 지난 뒤였다.

정치인, 관료 같은 상류층들은 미국이 철수한 1973년부터 남베트남이 패망하는 1975년까지 진작에 남베트남을 빠져나갔고, 1978년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교사, 의사, 상인 같은 중산층 사람들이었다. 보트 피플의 또다른 경우는 1979년 2월~3월까지 진행된 중월 전쟁의 여파로 탄압을 받을 위기에 있었던 중국계 화교들도 적지 않았다.

대규모 보트 피플이 상당 기간 이어졌던것은 단순히 보복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월남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전쟁이 10여년 넘게 이어졌기 때문에 전후 복구에 쓸 돈을 전쟁으로 써야했던 판인지라 전후 복구가 지지부진하여 한 동안 경제 상황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인 영향도 컸다.

당시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봐야 푼돈이나 받을 뿐이고 물가 상승 문제도 심각했던지라 공장에서 일을 해서 먹고 살아봐야 생활에 여러 가지 애로 사항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배타고 외국으로 돈을 벌려고 나갔던 이들도 많았던 것.

물론 이들은 정치적인 문제로 추방된 것은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로 외국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에 상당수가 난민 수용소 같은데서 살거나 막노동을 하다가 거금을 손에 쥐고[89] 공산 월남으로 돌아오기는 했다.

한편으로 중월전쟁으로 화교에 대한 추방도 이어지면서 육로로 중국으로 추방된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보트피플로 치지는 않으나 배를 타고 별 수 없이 다른 나라로 떠났던 화교들은 보트 피플로 분류된다.

의외로 공산 월남에서는 이들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막을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는데 당장 전쟁 때문에 전후 복구가 지지부진해서 먹여살리기 빠듯했던데다가 크메르 루즈와는 달라야한다는 인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초기에는 월남 패망의 교훈으로 이적 행위를 때려잡자거나 우익은 부패하지 말자라는 걸 모토로 했고 한국보다 우익이 개판인 월남은 망해도 싸지만 한국은 든든하다라는 걸 강조했다.

북한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월남의 굴욕을 갚기 위해서 북폭을 감행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이후 했던 연설인 "전쟁이 벌어지면 잃을 것은 철조망이요. 얻을 것은 조국 통일이다"라는 말은 남조선과 미제놈들을 선제 공격하자는 말이 아니라 미제가 전쟁을 일으키면 그에 맞서 싸울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90]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발생한 학생 운동이나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흑색 선전으로서 남베트남의 막장화와 베트콩들에 대한 공포감을 부풀린 측면도 있었다.

이대용 공사의 수기를 드라마로 만든 '사이공 억류기'가 김무생 주연으로 출시되었다. 일명 한국판 킬링필드.[91]

1980년대 월남 수용소라는 애먼 제목으로 출간된 고백 수기가 있는데 이 책은 남베트남의 전직 학생 운동 지도자가 통일된 공산 월남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다.

사실 절반 정도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사이공의 티우 정권에 대한 투쟁을 얼마나 잘했으며, 절반 정도는 무식하고 말 안 통하는 북쪽 월맹 동지들에 대한 비난, 나머지 절반은 월맹을 비난한 죄목으로 체포되었을 때의 일이다.[92]

현재 월남 내에서도 월남 전쟁에 대한 평가는 지역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 남부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전장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따라서 평가가 엇갈리는데 반해서 북부에서는 혼란 상태에 빠진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평가다.

물론 현재는 남부 지역이 상대적으로 잘 살기 때문에 남부 지역이 북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13. 월남 전쟁의 교훈

남한에서는 장병 정신 교육 및 예비군 훈련에서도 월남의 패망을 예로 들면서 남한의 상황과 접목시켜 안보 교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조갑제가 쓴 <송의 눈물>에서도 월남전이 언급된다.

남베트남의 군사력은 압도적으로 규모나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면에서 보았을 때 월맹보다 우월했다. 경제력 또한 북베트남보다 좀더 앞서긴 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대선 후보가 간첩이었고, 남베트남 정치인들은 답이 없는 부정 부패를 일삼았고, 심지어 남베트남의 국무 총리도 간첩이었고, 월맹군이 쳐들어오자 남베트남 주민들이 환호했고, 더 한심한 것은 남베트남의 군인마저 싸우기는 커녕 도리어 월맹군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월맹군은 하루가 머다하고 남침용 땅굴을 굴착했고, 파리 강화 협정 이후에 월맹군이 재차 침공했다. 그래서 남베트남은 패망했다. 그 이후 공산 월남에서는 대량 숙청, 보트피플이 다반사가 되었다.

이처럼 이적 행위는 언제나 어디서나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을 끼친다.

그러나 월남의 역사 및 전쟁의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전쟁의 일부 과정과 결과를 좌우익 모두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색하여 팩트를 왜곡하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와 더불어 월남의 당시 상황을 무리하게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도 큰 문제.

1950년대 후반, 남베트남 정부와 북베트남(월맹) 정권이 비슷한 시기에 수립되었다. 월맹 정권은 토지 개혁 문제와 코민테른의 제재 때문에 남베트남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못했고, 양측 모두 내정에 치중했던 시기였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도 나름 토지 개혁을 하기 위해 농촌에 공무원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월맹 치하에서 토지 재분배가 상당히 이루어졌다. 남베트남의 관료들은 께름칙하게 여기면서도 그 상태를 방치했다.

남베트남의 공무원들은 이미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몰수하여 지주에게 다시 돌려 주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입맛대로 재처분 하려다가 지방 베트콩들에게 암살당하기도 했다.[93]

1960년대 중반, 월맹 정권은 남반부 해방 전쟁을 선포하고 베트콩으로 하여금 무장 봉기를 허락했다. 얼마 되지도 않아 남베트남은 심장부에서 벌어진 동호이 전투에서 개박살나고 나라가 멸망하려는 것을 미군의 지상군 투입이 막아줬다. 그래서 그나마 10년 더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응오딘지엠의 통치 하에서는 최소한의 자주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국정 운영을 하였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이후 권력의 핵심 자체가 아수라장에 빠지는 동시에 전쟁 상황은 더욱 더 긴박해졌다. 월맹 측과의 교섭 과정은 물론, 갈수록 남베트남의 일반적인 통치 구조 또한 미국의 통제하에 넘어가며 남베트남은 역설적으로 응오딘지엠 축출 이후로는 종이 위의 정부가 되어 갔다.[94]

베트남 관광청 홈페이지에선 월남 전쟁에 대해 '남베트남의 자유화'라 한다.

14. 전쟁 중 사용한 장비 목록

베트남 전쟁/장비 문서 참조.

15. 월남 전쟁을 다룬 창작물

창작물에서 월남 전쟁 자체는 등장하지 않아도 중~노년 캐릭터, 즉 194,50년대 출생 등장 인물이 경험했던 전쟁으로 언급되는 일이 많다.

15.1. 소설

  • 무기의 그늘(한국, 황석영)
  • 하얀전쟁(한국, 안정효)
  • 머나먼 쏭바강(한국, 박영한)
  • 훈장과 굴레(한국, 이원규)
  • 정글피쉬(한국, 한정광)
  • 하얀 헬리콥터(한국, 이윤기)
  • 느시(한국, 박정환)
  • 불꽃놀이(한국, 최정)
  • 전쟁의 슬픔(베트남, 바오 닌)
  •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미국, 팀 오브라이언)
  • 7월 4일생(미국, 론 코빅)[95]

15.2. 드라마

15.3. 영화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중에 반전 메시지를 담은 걸작 전쟁 영화들이 많다.

특히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1960년대를 상징하는 사건이기에 1960년대를 다루는 할리우드 작품이라면 거의 반드시 언급되거나 묘사된다. 대개 전쟁이 한 인격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키는가에 대한 고찰이 담긴 내용이 많기 때문에 전쟁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명작들이 많다.

15.4. 뮤지컬

15.5. 만화

15.6. 게임

몇몇 괜찮은 것도 있지만 희한하게도 베트남전은 관련 게임만 나왔다 하면 망하는걸로 유명하다. 밑에 기재된 게임들 중에 좋은 평과 흥행을 거머쥔 것은 라이징 스톰2와 블랙옵스 정도. 다만 블랙옵스의 경우 냉전시대가 주 배경이기에 베트남 전쟁만을 주제로 하진 않았다. 이마저도 라이징 스톰은 1년 가까이 된 패치로 겨우 호평을 받기 시작한 케이스다. 영화쪽에선 반면 현대 전쟁 영화의 자금석 같은 걸작들이 배출된 것과 대조적이다.

15.7. 노래

15.8. 서적

미국에서 나온 월남 전쟁 서적은 정말 많지만, 반면 국내에 출판된 월남 전쟁 관련한 서적은 2차 세계 대전이나 한국 전쟁 관련 서적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제목으로 다룬 국내 서적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유경찬 옮김, 을유문화사 출간]

캐나다 종군 기자인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전쟁 서적이다. 1981년 13부작 짜리 저자의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1945년 미국의 OSS요원들이 베트남에 들어가 베트민 조직을 훈련시키는 과정부터 1946년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과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분단된 베트남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정부패상,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의 참전과 북폭, 베트콩의 게릴라전과 호치민 루트, 1968년 구정공세와 미국내에서 일어난 반전운동 호치민의 사망과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 그리고 1972년 크리스마스 폭격과 파리평화협정 1975년 월남패망까지 약 30년전쟁을 서술한 책이다.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통히여 이 책을 썻다.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일반 병사들과 장교들부터, 미국내에서 반전운동을 했던 반전운동가들, 응우옌 까오 끼와 같은 남베트남 지도자들 그리고 팜반동과 같은 북베트남 지도자들 까지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 했기에 객관성이 보장된다.[118]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전개양상을 아는데 있어서 매우 좋은 책이다.

* 베트남 전쟁과 나 [채명신 지음/팔복원 출간]

그 유명한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직접 집필한 회고록이다. 나무위키에 서술된 내용중 많은 것이 이 책에 나온다. 채명신 장군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 내부에서 월남 전쟁 참전을 비하하고 왜곡하는 이들에 맞서서 역사적 사실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서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런 취지를 떠나서 월남전에 참전했던 채명신 장군이 보는 월남 전쟁이란 어떤것인지 그리고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인식하고 있는 월남 전쟁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지음/정병선 옮김, 책갈피 출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일어났던 반전 운동과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반전운동에 참가했던 군인들과 대학생 지식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현재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트로츠키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단체 노동자 연대의 사상을 교조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그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119] 그래도 베트남 전쟁 시기 남녀평등 문제와 인종문제 이후 미국의 중동개입 문제까지 심도있게 고찰했다.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베트남 전 반전운동을 알기위해선 읽어볼 가치가 있는 명저다.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지음, 창작과 비평 출간]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가 쓴 책이다.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또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아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출판된 전환시대의 논리의 분량은 대략 500페이지 정도 되는데 그중에 1/5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의 내용을 다뤘고, 2부는 남북분단 이후 1975년 북베트남의 통일까지의 내용을 다뤘다. 박정희 정권 시기 국가가 국민에게 강요했던 반공주의라는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국내 최초로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세력 대 제국주의 세력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물론 보수세력의 경우 이와같은 관점을 매우 싫어하겠지만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을 해석했다는 점에서 분명 읽어볼 만한 책이자 명저다. [120] 참고로 저자 리영희는 주로 미국측 문서를 많이 인용했다.[121]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김태완(글)/주경훈(그림)/손영운(기획),주니어김영사 출간]

어린이 위인전이다. 2012년 12월 28일 초판을 발행했다. 어린이용 도서이긴 한데 호찌민에 대한 내용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내용이 굉장히 탄탄하다. 호찌민의 일대기와 베트남 전쟁 관련해서 있을 내용은 거의다 있다. 심지어 호치민의 최대 실책이라 할 수 있는 토지개혁도 응오딘지엠의 탄압과 더불어 이 책에서 균형있게 다루고 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얘기도 어린이용 만화치고는 생각보다 탄탄하다. who?시리즈에서 출간한 호찌민 위인전에 비해 역사에 대한 설명과 고증면에서 확실히 그러하다. 베트남 전쟁 관련한 정보를 얻고 싶은데 두꺼운 책이 부담스럽다면 입문격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다.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한겨레 출판 출간]

한국전쟁의 저자이자 서울대 교수인 박태균 교수가 쓴 베트남 전쟁 관련 대중서적이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50주년이자 베트남 전쟁 종결 40주년인 2015년에 출간되었다. 한국군의 파병,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한강의 기적에 감춰진 이야기, 미국의 패배한 이유,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했던 병사들의 기록을 비롯한 얘기들을 책에서 다뤘다. 조너선 닐의 '베트남 전쟁' 처럼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분석한 책이다.

* 최고의 인재들 [데이비드 헐버스템 지음/송정은, 황지현 옮김, 글항아리 출간]

한국전쟁을 분석한 서적으로 유명한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를 집필한 저자 데이비드 헐버스템이 쓴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이다. 베트남 전쟁의 전개 양상을 다루기 보단 로버트 맥나마라, 맥조지 번디, 존F케네디 그리고 린든존슨과 같이 소위 미국 최고의 엘리트라 불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고, 최악의 실수를 지질렀는지를 철저하게 분석한 논픽션 걸작이다. 따라서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1960년부터 1965년까지의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들의 심리상황과 과거 이력 그리고 그 당시의 국제 정세가 베트남 전 개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다. 책을 읽다보면 소위 세계 최고의 엘리트라 불릴만한 사람들이, 우월주의와 오만감에 심취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던 그들의 행적을 보고만 있으면, 소름끼칠 정도.... 미국에게 있어서 '최악의 실수'라 불리는 베트남 전쟁을 미국 최고의 인재들이 어떻게 계획하고 왜 개입했는지를 알 수 있는 명저이긴 하지만, 1104 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이 읽는 이를 짓누를 것이다.[122]

[베트남 전쟁 관련한 좋은 서적 있으면 추가 바람]

15.9. 다큐멘터리

  • PBS 베트남 전쟁

2017년에 제작된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다. 총 10부작으로 제작되었고, 미군 참전용사, 남베트남군 참전용사, 북베트남군 참전용사, 베트콩 참전용사, 반전운동가 등 총 60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여러시각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에피소드 1편당 평균 1시간 30분이나 될 정도로 러닝타임이 길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16. 관련 문서


[1] 다만 현재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다.[2] 론놀에 의해 쫓겨난 캄보디아 제1왕국의 망명 정부. 론놀 정권이 친미 정책을 추진하는 바람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과거 자신이 참전했던 베트남 공화국 측이 아닌 베트남 민주 공화국 측에 참전한다.[3] 사실 스웨덴은 월맹을 지원했다기보다는 반전의 일환으로 월맹 정권을 지원했다고 보는게 설득력 있다. 특히 당시 총리였던 올로프 팔메의 연설에 드러나듯, 월맹에 대한 지원보다는 폭격과 전쟁에 대한 환멸이 더 두드러지게 느껴진다.[4] 사실 호치민은 1950년대 말 실권을 내려놓았고 레주언이 실권을 장악해 월남 전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5] 1968-1969년에 걸친,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때 주둔했던 주월 미군의 최대 병력으로 전쟁의 모든 기간 동안 파병된 미군의 연간 인원은 무려 280만명이다. 68년의 구정 공세 직후 웨스트 모얼랜드의 요청으로 주둔 병력의 한도를 70만명으로 증가시키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반전 여론이 거세서 실행되진 않았다.[6] 누계 38만 명[7] 1968년의 병력[8] 당연히 이 수는 순수 남베트남의 공산주의자 숫자가 아니다. 호치민 루트를 통해 파견된 베트콩으로 위장한 월맹 정규군을 포함한 수치이다.[9]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230[10] 이중 10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북베트남 상공에서 파괴되었다.[11] 출처: http://www.answers.com/Q/How_many_tanks_were_in_the_Vietnam_war[12] North Korea fought in Vietnam War[13] 출처: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p.77[14] 남북 베트남 민간인 사망자 추정치이다. 이들 중 대다수가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좌파 세계사 p.654[15] 주월미군의 최고 선임자다.[16]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한 시점까지만 치면 1973년까지다.[17] 아직까지 전쟁의 시발점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미국 국방부의 기록 중 월남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고 기록한 것이 1955년 11월 1일이라 보통 월남전의 시발점은 1955년으로 본다. 다만 미군이 투입된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은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18] 명목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월맹에 투항한 적이 없다. 그저 월남에서 철군한 것이지 결코 투항한 것이 아니다. 강화 협정의 내용도 교전 중지, 주월미군의 철수를 골자로 하는 것이다. 미군이 투항해서 월맹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사죄한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그런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건 월맹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주월미군이 철수했다는 실질적인 측면에선 미국의 패배라고 불러도 할 말은 없다. 13세기엔 몽골, 20세기엔 미국을 막은 베트남? 하지만 프랑스는 못 막았다.[19] 같은 사회주의권으로 분류되지만 중월전쟁까지 치르는 등 중월 관계는 매우 좋지 않다.[20] 남베트남 패망 직후에 이 조치가 취해졌다.[21]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6.25 전쟁이 정전으로 마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6.25 전쟁은 종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땐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가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월남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예측은 월남 전쟁으로 현실화되었다.[22] 이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 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유야 물론 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전쟁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3] 다만 후일의 베트남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식민지 해방 전쟁과 동급으로 여기진 않고 남베트남 통일 전쟁의 일환으로 해석한 걸 보면 미국과 프랑스는 확실히 구분한 듯하다.[24] 이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갖고 있었다. 당연한게 한국전쟁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적화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늘 자리잡고 있었고 그 이전에 매카시즘의 광풍에 휘말려 Communism의 'C'자만 들어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공산주의를 주창하는 호치민 정권에 협조적일 이유가 없었다.[25] 월맹의 공격 자체는 사실이다. 미국이 1번 공격받은 것을 2번으로 부풀렸다가 들통난 것 때문에 공격 자체가 없었다고 오해되기도 하지만 1차 공격은 베트남측도 인정한 사실이다. 다만 미군 함선이 아닌 남베트남 함선으로 알고 한 공격이라고 밝힌 바 있다.[26] 이 때 소련2차대전 중 대량으로 노획했던 독일제 무기를 뿌려주기도 했다. 월맹군 및 베트콩이 뜬금 없이 독일제 화기인 MG34MP40을 들고 다닌 게 이 때문.[27] 여기에 북한도 포함된다.[28] 비슷한 지형에서 미군과 싸웠던 일본군은 월맹, 베트콩과 같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군대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정규전을 수행한 군대였기에 교훈은 되지 못했다. 뭐만하면 덴노 헤이카 반자이나 해대면서 알아서 자기 쏴달라고 몸을 들이밀었으니 애초에 게릴라 전술이라고 뭐고 할것도 없었다.[29] 심지어 캄보디아의 호치민 루트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 농촌의 지지를 받는 역효과를 낸다.[30] 유사한 냉전의 대리전쟁이자 동족상잔인 한국전쟁 당시 한국은 남베트남에 비해 수뇌부나 장병들의 상태가 매우 양호했기 때문에 결국 공산군을 이겨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은 전쟁을 거듭할 수록 조금씩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고 1951년 당시 중공군에게 아마추어 잡병 취급을 받았지만 1953년 종전 즈음에는 중공군과 호각으로 싸울만한 수준까지는 발전되었다. 그에 비해 남베트남군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말이 딱 맞았는데 한 두개 사단급 제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수준이었고 그저 미국이 다 해주겠지하는 안일한 정신으로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게 없었다. 수뇌부쪽으로 가면 더 막장인데 남베트남 대통령인 응우옌반티에우는 아예 남파된 공산주의자 프락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부패하고 무능했다.(물론 군부가 군벌화 되어 총체적인 막장이었기에 모두 반티에우 탓을 할 수는 없다)[31] 실제로 소련은 베트남공화국군과 미군이 북위 17도선을 넘어가면 소련군이 개입하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32] Cat Shit One에서도 베크위스 소령이 "이건 뭐 트럭은 박살내도 되지만 트럭 공장은 박살내지 말라는 소리냐?"라며 이걸 깐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방어는 하되 공격은 하지 말라는 소리다. 공격이 되어야 상대방의 공격하는 힘의 근원을 부술텐데 공격을 하면 더 큰 세력이 개입하여 일이 더 커질까봐 무서워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다.[33] 북한의 특수 부대에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북한이 특수 부대를 남파할 능력이 되는지도 의심되지만.[34] 만약 북베트남이 아무런 지원 없이 혼자 상술한 목표를 세운다면 그 목표는 공염불이 될테고 어느 날 국력이 모두 소진되어 오히려 역관광을 당할 수도 있지만 북베트남은 중국, 더 나아가서 실제로 미국이란 강력한 항공전력을 보유한 나라와의 전쟁 수행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소련의 적극적인 군사 원조를 받았다.[35] 결국 북베트남이 미국의 항공전력을 이겨낸 데에는 이 SA-2의 공이 크다. 오늘날처럼 발달된 미사일을 이용, 극도로 정밀한 조준폭격이 힘들던 이때 SA-2같은 지대공 미사일은 B-52같이 폭장량은 많지만 속도가 느린 폭격기들의 원활한 공습을 어렵게 했다.[36] 더군더나 북베트남은 레이더 관제를 적극적이게 받았기에 이런 레이더 기지를 지상군으로 점령하거나 모두 파괴하지 않는 이상 결과적이게 부수면 원조받아서 또 짓고 부수면 또 짓고 하는 식이 되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폭격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져갔다.[37] 다만 라인베커2 작전 기간 중 정치적 효과를 노리고 B-52가 하노이를 강행폭격한 적은 있다. B-52의 강력한 ECM 능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수의 폭격기를 손실. 물론 이 때에도 조준 폭격이었지 융단 폭격을 하지는 않았다.[38] 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수치인데 실제로 격추시킨 적기의 상당수가 살아는 돌아갔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F-86과 MiG-15의 격추비는(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2:1에서 3:1 정도이다.[39] MiG-21은 북베트남에서 희귀한 존재였고 상술한 수치에는 지대공미사일이나 기타 여러가지 이유로의 손실이 포함된 수치이다. 볼로작전만 봐도 실제적이게 F-4가 MiG-17이나 MiG-21등 대부분의 소련제 전투기를 압도했다. 어쨌든 비록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북베트남 조종사들은 홈그라운드의 레이더 관제를 받아가면서 치열하게 싸웠고 몇몇 에이스를 배출하기도 했다.[40] 구정 공세 이전인 1967년 12월까지 월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대략 2만명을 넘어섰다.[41] 같은 시기 대한민국에선 김신조의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42] 이기간 동안 쏟아부은 폭탄의 양이 12만톤이었다.참고로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동안 독일이 영국에 퍼부은 폭탄이 12만톤이다. 그래서 기지 주변 2마일 반경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월맹군은 그 엄청난 폭격을 맞아가면서도 미군 참호 코 앞까지 참호를 파고 오는 근성을 보였다.[43] 당시 자료화면들을 보면 거지꼴의 미군들이 벙커에서 튀어나와 이 화물들을 줍고 월맹군의 포탄이 날아오기 전에 부리나케 벙커로 도망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와중에 포격에 휩쓸려 죽은 미군도 엄청나게 많았다.[44] 디엔비엔푸는 완전한 적지에 갇힌 모양새였지만 케산은 근처에 캠프 캐롤 같은 미군 기지도 있었고 프랑스군의 빈약한 항공지원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공군!의 힘 때문에 보급을 끊어서 말려죽이는것도 불가능 했다.[45] 이후 근처 수 킬로미터 뒤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북베트남 포병의 사정권 밖이었다. 전사가들은 미군의 이러한 결정이 북베트남 정규군의 마찰을 피하려는 작전반경 축소와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한 예비 단계였다고 보고 있다.[46] 사실 로버트 케네디와 같은 강력한 경선 경쟁자들 때문에 경선 낙선 이야기가 많았다.[47] 출처는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 p811과 United States, Government (2010). "Statistical information about casualties of the Vietnam War".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6 January 2010. Retrieved March 6, 2010.[48] 베트남 전쟁 참전 시점부터 1967년 12월 까지의 베트남 전 미군 전사자는 2만명이다.[49] 꼭 그런것 만도 아닌게 1970년 중국의 인공 위성 발사 성공으로 무기로써 핵 개발이 완성 되었기에 태도를 바꿨다는 견해도 있다[50] 장례식 당시에는 베트콩의 국가인 '남부를 해방하라'가 연주되었다고 한다. 생전에 호치민은 유언을 여러 차례 고쳤는데, 고치는 유언에는 "시신을 화장한 뒤 3등분해서 월남에 뿌리라는 부탁"은 항상 담겨있었다고 한다. 그가 쓴 유언에는 소수 민족을 탄압하지 말 것과 통일 후 남부 사람들에게 무차별 보복을 가하지 말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호치민이 그리도 강조하던 시신을 화장 해달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호치민의 시신은 방부 처리 되어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처럼 인민들에게 전시되었다.[51] 사실 반전 시위대를 다루는 진압측 또한 인정사정 없이 강경진압을 하는 사례가 적잖게 있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을 보면 그게 얼마나 심각했는지, 게슈타포 같다았다는 반전시위자의 말도 나온다.[52] 이미 대한민국은 6.25전쟁 때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당시 쿠데타로 집권한지 얼마 안된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는 미국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53] 미국의 파병 요청보다 한국이 더 적극적으로 파병을 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처음 요청한 것은 미국이 맞지만 미국의 요구보다 더 큰 규모로 파병 했는데 이는 국가 개발에 필요한 자금 등을 미국에서 더 많이 원조받기 위해서이다. 이 파병 참전에 대한 대가로 국군의 현대화 및 중요한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 즉 카이스트 설립을 얻게 되었으며, 참전 수당이나 현지 복구 공사 참여 등 여러가지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었다.[54] 여담으로 1973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된 직후에 영국, 일본, 서독, 프랑스 등 상당수 제1세계 국가들이 앞다투어 북베트남과 수교를 맺었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으니 북베트남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데 미국과 남베트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기 때문이다.[55] 1972년 당시에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던 한국군의 숫자가 미군보다 많았다.[56] '응우옌 탄 쭝(Nguyễn Thành Trung)' 이라는 조종사다.# 기사에는 구엔이라고 나와있으나 현행 외래어 표기법 상으로는 응우옌이라고 표기하는게 맞다.[57] 그 와중에 애국이라면 애국이겠다.[58] 일부 기체가 한국 공군에 들어오기도 했다.[59] 사진 속 844호 단차는 선두가 아닌 후속 차량이다. 선두였던 843호(같은 T-54B)와 390호(중국제 59식) 단차가 월남 전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의 일부 보수 논객들은 북한 주석궁에 국군 탱크가 진군해야 진정한 남북통일이라고 이야기한다.[60] Lê Minh Đảo 1933~ .남베트남군의 몇 안되는 유능하고 청렴한 지휘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다느니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이 끝난 뒤 월맹군에 생포되어 16년 동안 복역했다가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61] 사이공 북부를 지키고 있던 5사단과 레인저 부대 일부가 헬기편으로 지원되었다.[62] 그동안 3일 정도 공세가 멈췄는데, 전(前) 남베트남 공군 사령관이자 부통령이었던 응우예 까오 끼는 자서전에서 이게 자기 지시로 투하한 데이지커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63] 한국의 LST 탈출 작전이 끝나고 한국 대사관 직원 15명들은 미국의 군용기를 기다리며 대사관에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으로 금일 비행기 탈출 계획은 취소 됐으니 내일로 연기된다고 통보가 온다. 그러자 나이 어린 직원 한 명이 지금부터 각개 약진을 할 때이니 나 혼자 민항기 타고 도망가겠다고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는 어이가 없었지만 "가는 길에 내 골프채를 태국 대사관에 갖다 주게"라고 말하며 보내준다. 이 직원이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월맹군이 공황 활주로에 폭격을 하기 시작한다. 이 때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그 직원은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후 탄손누트 공군 기지는 활주로가 파괴당해 이용할 수 없었다.[64] 공식적으로는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이였다. 그래서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도 거하게 치르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상황이 악화되자 해군 본부에서는 다 내던져도 LST 선박이라도 탈출시키라고 한 시간 단위로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LST 함대 사령관의 독단으로 교민 철수 작전을 지시한다. 문제는 교민들 중 상당수가 돈을 벌기 위해 왔던 불법 체류자였다는 것. 그런데 남베트남 측에서 한국 대사관에 뜻밖의 제안을 했는데 남베트남의 VIP 500명을 수송해주면 비자 검사 안 하고 한국인들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결국 동의하고 수송 작전을 시작하였다. 한국 교민들은 웬만큼 다 태웠는데 남베트남의 VIP는 가족을 제외하고 본인만 150명밖에 안 왔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한밤중에 그냥 출발하였는데 먼저 출발한 수송선은 한밤중에 불을 전부 켜두고 베트남인들을 전부 위에 올려 너희 나라 사람들이니 죽일테면 죽여라! 하는 식으로 월맹군들이 장악한 수로를 탈출하여 나왔고 3시간뒤에 출발한 2번째 수송선은 반대로 불을 다 끄고 플래시 하나로 물길을 보면서 탈출하였다. 남베트남 측에서는 VIP를 다 안 태웠다고 정선하라! 안 그러면 나포하겠다! 하며 협박하는 상황이였다. 이들이 출발한 항구는 다음날 폭격 당하였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 15명은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탈출을 거부하여 남았다.[65] 이곳이 한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배정된 시큐리티 포인트 3이었다.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시큐리티 포인트 3으로 탈출하라는 미국 대사관의 지시를 받고 건물로 진입을 시도 하였지만, 입구에서 한국인들을 태워 가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문을 안 열어 주었다. 결국 급박한 상황 속에 직원들은 그냥 조금 더 내려가면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강행했다. 하지만 조금 늦게 도착하여 문 두들기다가 실패한 이대용 공사 외 2명은 한국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들은 그대로 공산 월남에 억류되어 기나긴 포로 생활을 한다. 아마도 너무나 혼란스러워 미국 대사관과 시큐리티 포인트3 사이에 연락이 실패한 듯 하다. 마지막으로 나타나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가 실패한 한국일보 특파원 안병찬 기자에 의하면 "만약 들어갔어도 내 차례가 와서 헬기를 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라고 했다.[66] 이때의 상황은 한국일보 특파원으로써 4월 30일 새벽 5시 마지막 헬기편으로 탈출한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를 보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1990년대 드라마인 머나먼 쏭바강에서도 사이공 함락 이후 주인공이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하는 과정을 아주 정확히 묘사해 놓았다. 말 그대로 소리없는 아우성 그 자체.[67] 개중엔 남베트남군 치누크 조종사들이 가족들을 태우고 바다로 탈출하던 중 발견한 미국 해군 전함에 접근했는데, 치누크의 크기에 비해 전함의 착륙장 크기가 작아 사람들을 착륙장에 뛰어내리게 한 다음 조종사는 치누크를 바다에 불시착 시켜 탈출한 경우도 있었다.[68] 오히려 인도는 인도 국민 회의 등 비(非)공산 계열 정당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며 민주적 정체를 유지하던 나라였다.[69] 호전성과 극단성에서 북한 정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70] 다소 시끄럽고 전장의 소음을 묘사한 기타 소리가 공포스럽게 들릴 수 있음.[71] 이전 버젼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1차대전 미군 전사자가 5만 3천명밖에 안 된다고 나와 있었는데 이는 엄연한 오류다.[72] 28만 7천 300명이 서부전선에서, 12만 명이 태평양에서 사망.[73] 다만 베트남 전쟁의 경우 한국전쟁과는 다르게 일정한 전선없이 싸운 전쟁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74] 상기에 살짝 언급이 됐지만, 베트남 전쟁 수행을 위한 달러화 추가 발행 때문에 당시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1971년 의회의 동의 없이 기존 브레튼 우즈 체제를 깬 스미소니언 체제를 출범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금융시장의 질서라 할 수 있는 브레튼 우즈 체제는 '금 1온스 = 35달러'의 고정환율로 미국은 이 금본위제를 25년 간 지켜왔는데, 이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 전까지만 해도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의 통화수지 적자를 견디면서 미 달러화의 가치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으로 통화수지 적자가 가중되었고 동시에 미 달러화의 가치도 떨어지는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에 빠지게 되면서 '금 1온스 = 38.02달러'의 교환비율로 금본위제를 재조정하여 달러화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결국 누더기가 된 금본위제는 베트남 전쟁 종전 후인 1976년에 전격적으로 폐지되면서 이를 대체할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 제도의 도입, 고정환율과 변동환율의 선택적 적용 등을 골자로 한 킹스턴 체제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국제통화기금(IMF)에 잘 나와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75] 물론 베트남 전쟁 참전전우회에선 이 전쟁은 한국과 미국같은 연합국이 진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베트남 전쟁에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잡혀 고문 끝에 두 팔을 다쳐 후유증으로 지금도 두 팔을 높이 못 드는 미국의 상원의원 존 매케인2000년 베트남 전쟁이 왜 미국이 졌는지 열불난다는 연설을 했다가 베트남 측의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76] 당시 베트남 전쟁 귀환자를 욕하는 단어로 Babykiller라는 신조어까지 있을 정도였다. 유아 학살자라는 뜻인데 이건 서방 사회에서 욕하는 걸 넘어 당장 상대에게 주먹이 날아와도 할말 없는 수준의 엄청난 폭언이며 이는 현대어 사전 사이트인 Urban Dictionary에도 있다.[77] 안타깝게도 이때 참전했던 상당수의 장병들이 사회부적격자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범죄자로 타락하는 등의 비극을 겪었다. 사회적 비난도 비난이지만 당시 미국 경제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판이 되기 시작했고 당연히 보훈예산에 대한 투자도 줄었는데, 그 여파를 베트남 참전용사들이 정면으로 얻어맞았다. 물론 대부분은 정상적인 생활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정신질환을 겪고 사는 사람도 있는 등(참고로 이때 참전했던 군인들의 상당수가 노숙자로 전락해버렸다) 참으로 여러모로 미국에게 있어서는 괴로웠던 전쟁이었다.[78] 이 사위는 전쟁에서 생환한 뒤 훗날 대통령을 역임했던 장인어른처럼 정계에 입문하여 버지니아 주에서 주지사, 상원의원을 지낸다. 존슨이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열어줄 정도로 사랑해 마지 않았던 사위라고... 2010년대에는 정계에서 은퇴했다.[79] 국론 분열 등으로 국가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에는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라며 국민들의 자주 국방에 대한 굳건한 결의와 능력 요구, 그리고 국론 통일을 강조했다.[80] 다른 국가에 비해서 한참 낮은 이득이었다. 미군 1인당 파견 비용이 1만3천 달러 수준, 필리핀 비(非) 전투원 1인당 파견 비용 7,000달러, 한국군은 1인당 5,000달러 수준이다. 월남 파병으로 인한 한국의 이득(1965∼1969)은 약 5억5천만 달러이며, 월남에 파병하지 않은 일본의 이득보다는 적고, 대만의 이득보다는 약간 상회하는 정도이다. 이것은 1970년 사이밍턴 청문회 때 포터 주한 미 대사가 참전에 따른 한국의 경제적 이득을 설명한 대목이다. 즉, 전쟁에 참가하지 않던 일본이 한국보다 더 많은 금전적 대가를 월남 전쟁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따지면 인당 5천 달러라도 더 많은 액수를 받은 선진국들보다는 더 도움은 되었겠지만 자유 진영에서 한국군이 미군 다음으로 가장 규모가 큰 군대였음을 생각하면..[81]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은 정부가 제시한 월남 전쟁에 대한 시각과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래 서적 문서에 있는 전환 시대 논리의 저자 리영희는 긴급조치 9호로 인하여 재판받고 형을 보냈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리영희가 저술한 <전환 시대의 논리>는 월남 전쟁을 제국주의 세력(미제) VS 민족 해방 세력(월맹)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 입장에선 분명 불편했을 것이다.[82] 군법에 의한 보상액은 엄청나게 낮게 유지할 수 있다. 이는 다른 국가 보상 규정도 비슷한데, 대신 이 헌법에 다루는 대상을 제외하면 다른 방법으로 추가적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83] 참전 군인이자 고엽제 피해자이신 분의 증언에 따르면, 날이 덥고 해가 뜨거운데도 어디선가 물방울이 날라와 시원했다고. 비인 줄 알고 주변의 병사들도 상의를 벗거나 심지어 갈증 탓에 입을 벌려 받아 마시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스콜(열대성 소나기)이 여우비처럼 오는 것인지 알고 그렇게 하신 듯 하다.[84] 이 영어 때문에 응우옌 장군으로 알려졌다.[85] 응우옌 반 램(Nguyễn Văn Lem)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86]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용의자가 응우옌 응옥 로안(Nguyễn Ngọc Loan) 집에 처들어가 가족들을 전부 몰살해서 즉결처형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는데 역시 확실하진 않다. 허나 이게 사실이라손 치더라도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하는 경찰서장으로서 부적절한 행위였고, 무엇보다 여론 악화에 한몫하면서 남베트남군에 오히려 불리한 짓을 한 셈이 되어버린다.[87] 구정 공세 시기 19명의 베트콩이 사이공 미 대사관 1층을 7시간 동안 점령했었다.[88] 구체적으로 보면 월남 정부는 미국, 한국의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 이정우 전 대통령 정책 기획 운영장은 외교부로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월남 정부에게 사과성 발언을 했다가 회의장 분위기가 어색해졌다라고 전해들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원래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개적이고 명확한 사과를 전하려고 했으나, 월남 정부에서 동족상잔 등의 내부 문제가 부각되는 것에 난색을 표해 유감을 표명함으로 수위를 낮추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과가 이루어지면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텐데, 이 문제에서 현 월남 정부가 난색을 보이며 거절하고 있는 것.[89] 미화로 수 백 달러에서 수 천 달러 가량 되는 돈인데 미국이나 호주같은 나라들 기준으로 한다면 한 달치 봉급도 안되는 수준이지만 월남 기준으로 1년을 거뜬히 먹고 살고도 남을 돈이었다.[90] 사실 중소 분쟁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북한도 주체 사상으로 고립되어 있어 이전과 같은 원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도움을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91] 이대용 공사는 당시 한국 정부를 미국의 괴뢰 정권으로 인식하고 있던 공산권의 시각 때문에 더 가혹한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미제의 스파이 취급을 받은것.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대용 공사는 당신 같은 고위직이 무사히 살아온걸 보면 변절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곤욕을 치른다. 심지어 이수근(북한)이 간첩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월간 조선에 했다가 욕을 무척 먹었다.[92] 여담으로 저자는 외국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공산 월남 당국의 출국 허가를 받아 미국에서 살았다.[93] 응오딘지엠이 실각한 이유가 이 짓거리를 하는 것을 미국과 남베트남 군부가 용납할 수 없어서였다. 농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판에 오히려 뻘짓을 반복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지 않을 수가 있나.[94] 출처: J. Race, “War Comes to Long An”, from War Comes to Long An: Revolutionary Conflict in a Vietnamese Province, (Berkeley: 2010)[95] 아래 후술된 영화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양심적인 지식인 하워드 진이 대학에서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읽기를 추천해주던 책이다.[96]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후 반전운동가가 된 론 코빅이 쓴 자서전을 영화화한 것.[97] 미국의 미덕이라 불리는 가치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리고 본인이 베트남전 참전용사다. 그가 감독한 또 하나의 작품인 Wall Street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관한 내용의 지금의 상황에 대입해서 본다면 훌륭한 작품이다.[98]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다.[99] 가수 남진의 베트남 전쟁 경험담이 각색되어 들어가 있다. 실제로 남진은 해병대에 복무하던 중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었는데 전쟁 과정에서 몇 차례 죽을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영화에서 베트남에 사업하러 간 주인공 윤덕수와 친구 천달구가 남진을 만나고, 현지 주민들을 구출하여 철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여기서 윤덕수는 과거 한국전쟁 시절에 겪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 보이는 2번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 데, 첫 번째는 어쩌다가 얻은 초콜릿을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은 끝에 뺏기고 우는 소년, 2번째는 전쟁의 위협에서 탈출하려던 마을 주민들을 베트콩이 습격하면서 생이별의 위기에 처한 한 남매다. 전자는 윤덕수가 초콜릿을 건네주자 그걸 받아들고 그냥 가나 싶더니 베트콩의 미군 건물 테러를 눈치채고 윤덕수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서 윤덕수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끝났고(그 소년은 결국 테러에 휘말려 사망), 후자는 남매를 구출하기 위해 강에 몸을 던졌다가 베트콩에 의해 총상을 입은 채 귀국하며, 천달구는 자기가 구출한 현지 주민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윤덕수가 남진의 팬이 된 이유가 바로 이 때 남진이 자신을 구해주었기 때문.[100] 척 노리스 주연의 B급 액션물. 3편 오프닝이 사이공 함락 씬인데, 의외로 당시 상황을 잘 그려냈다.[101] 앞부분에 디엔비엔푸 전투가 묘사된다.[102] 베트남 전쟁 중의 람보 활약에 관한 내용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1편부터 4편까지 전부 베트남 전쟁에 관한 내용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람보는 1편부터 베트남 전쟁 종전 후,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고, 3편은 아프가니스탄, 4편은 미얀마에서 싸우는 내용이다. 즉 람보 시리즈에는 1, 3, 4편에는 베트남이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특히 람보 1편은 베트남인들을 죽이는 내용이라는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베트남 전쟁으로 사회 부적응자가 된 참전용사의 이야기로 오히려 반전영화에 좀 더 가깝다[103] 베트남에서 실종(나중에 불에 타 죽은 것으로 밝혀짐)된 애인을 그리워해서 타락해가는 여교수의 심리를 그렸다.[104] 베트남 전쟁에 뮤턴트들만으로 이루어진 비밀부대가 참전한 것으로 묘사되며, 미스틱은 자신의 동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사이공 미군기지에 잠입한다. 또한 중반에 미국의 패전 이후 파리에서 열린 평화 협정이 주요 무대이자 분기점이 된다.[105] 이쪽도 장르는 액션, 로맨스. 다만 감독인 서극이 베트남 출신이어서 그런지 사이공의 함락 직전을 다루고 있지만 첩혈가두와 다르게 그다지 헬게이트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남베트남 패망 직전인 1975년으로 설정한 것은 당시 중국 반환 직전에 놓여있던 홍콩의 사회적 불안심리를 빗댄 것이란 해석이 많다.[106] 여기서는 초월적 존재인 닥터 맨하탄덕분에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다. 일종의 대체역사인 셈. 극중 베트남에서 코미디언닥터 맨하탄 사이에 있던 일이, 닥터 맨하탄의 중후반 행적의 복선이 된다.[107] 베트남 전쟁을 최초로 극의 주제에 넣은 작품, 참전용사가 전쟁 후유증으로 고뇌하다 창녀를 만나서 치유해간다는 영화이다. 국내 촬영 베트남 전쟁은 완전히 동네 뒷산 병정놀이.[108] 베트남 소녀를 강간한 부대 동료들을 고발한 주인공이 도리어 왕따당하고 동료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스토리. 백 투 더 퓨쳐 시리즈로 유명한 마이클.J.폭스 주연. 참고로 감독인 브라이언 드 팔마는 이라크 전쟁에서의 강간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109] 전쟁 영화는 아니고 홍콩 느와르 장르로, 당시 남베트남의 헬게이트스러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110] 극우 성향이 강한 미국의 유명한 배우 존 웨인이 주연을 맡았다. 영화 내용도 미국이 백전백승한다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다.[11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디엔비엔푸 전투를 주제로 하고 있다.[112] 1편은 그나마 전쟁의 참상을 구현한 스토리와 연출로 호평받았는데, 2편에서 뜬금없이 게임을 좀비 호러물로 바꿔버림으로써 망했다(...). 어색한 타격감이나 납득 안가는 스토리는 덤. 특히 evac 미션 시작할때 뜬금없이 헬기 조종사를 팀킬해서 탈출 기회를 지 손으로 없애 버리는 미친 놈이 등장하는 시점에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참고로 2편 제작사가 스나이퍼 엘리트 시리즈 빼고 다른 게임들은 내는 족족 말아먹기로 유명한(...) 리벨리온이다.[113] 빌드 엔진으로 만든 베트남 전쟁을 다룬 FPS 특이한점은 난이도가 어렵다.[114] 베트남 전쟁을 다룬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게임 시스템상 공중 급유가 구현되어 있지 않아서 지도가 약간 작게 묘사되어 있으나 그 당시 미군 조종사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참전했던 분들도 이 게임을 가끔 하신다고 한다. 어떤 분은 자신이 실전에서 가져온 건 카메라 영상과 F-100 켐페인 화면을 영상 편집해서 올리기도 하셨다. http://vimeo.com/27102505[115] 동유럽 게임 개발사 프테로돈에서 제작한 FPS게임으로 싱글플레이어와 코옵으로써 가장 베트남 전쟁을 잘 구현했다는 게임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베트공의 터널 기지에 침투하는 임무는 폐쇄 공포증을 느끼게 할 정도. 다만 속편은 망했다.[116] 미국 록밴드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줄여서 C.C.R)의 곡.[117] 미국 언더그라운드 래퍼 R.A. the Rugged Man과 Jedi Mimd Trick소속의 래퍼 Vinnie Paz가 피쳐링한 곡. 실제 월남전에 참전했던 John H. Thorbun하사의 이야기를 아들인 R.A. the Rugged Man이 본인의 벌스에 담았다. 스토리텔링, 리릭시즘이 굉장히 뛰어난 곡으로 힙합 팬이면서 영어가 된다면 한번 검색해 들어보자. 동명의 영화가 있다, 아마 거기서 제목을 따온듯[118] 저자는 호치민 장례식에도 참가했었고, 1972년 라인 베커 작전 당시 미군의 감행한 하노이 공습을 직접 겪어본 경험이 있다.[119] 구공산권 체제를 사회주의로 보지 않고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트로츠키와 제4인터내셔널이 정의한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관점과도 다르다.[120] 다만 이 책은 중국혁명을 다루는 파트에서 문화대혁명을 매우 미화했기에 그부분은 매우 걸러볼 필요가 있다. 자세한 건 리영희 비판 목록을 참고[121] 전환시대의 논리 초반부에 진실의 승리라는 대목을 다루면서 대니얼 엘스버그의 펜타곤 페이퍼에 대한 내용도 다루고 있다.[122] 첫장 부터 끝까지 정말 글 밖에 없다. 심지어 역자 마저도 '깨알 같은 글씨'라고 디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