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22:50:52

대한민국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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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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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한사군[2]<nopad>마한<nopad>변한<nopad>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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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고구려<nopad>백제<nopad>가야[3]<nopad>신라
고구려
<nopad>신라
남북국​시대발해통일신라
후삼국​시대<nopad>후고구려<nopad>후​백제신라
고려
고려​시대고려
조선​시대조선
개화기대한제국
일제​강점기식민지 조선[4]대한민국
임시정부
현대<nopad>조선건국준비위원회
소련군정[4]미군정[4]
<nopad>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nopad>
[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주요 민족: 예맥 · 삼한 · 한민족}}}}}}}}}


대한민국
大韓民國 |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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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1948-19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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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1949-1960) 국장
1948년 8월 15일 ~ 1960년 6월 15일 (11년 10개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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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제1공화국 출범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8월 15일[2]
6.25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제1차 개헌 (발췌 개헌) 1952년 7월 7일
6.25 전쟁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제2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 1954년 11월 29일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1960년 4월 27일
}}}}}}}}}
정부 수립 이전 제3차 개헌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3] 대한민국 제2공화국
미군정
위치[4]
한반도 삼팔선 이남 지역 (1950년 이전)
한반도 휴전선 이남 지역 (1953년 이후)
수도
공식 서울특별시
임시 충청남도 대전시 ,(1950.06.27 - 1950.07.16),
경상북도 대구시 ,(1950.07.16 - 1950.08.17),
경상남도 부산시 ,(1950.08.18 - 1950.10.27, 1951.01.04 - 1953.8.14),
면적
실효 지배 93,634km2[5] (108위) (1949년)
→ 97,534km2[6] (108위) (1954년)
내수면 비율 0.3%
인문 환경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인구 총 인구 <colbgcolor=#fff,#1f2023>2,002만 7,393명 (1948년)
→ 2,501만 2,374명 (1960년)
인구 밀도 213.89명/㎢ (1948년)
→ 256.44명/㎢ (1960년)
}}}}}}}}}
하위 행정구역
1특별시 9도 14부 133군 1도(島) 8구 73읍 1,456면
→ 1특별시 9도 26시 140군 15구 85읍 1,407면
미수복지역 이북 5도, 경기도 일부, 강원도 일부
정치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정치 체제 <colbgcolor=#fff,#1f2023>민주공화제(국민주권), 비자유민주주의[7], 단일국가, 대통령제[8], 단원제양원제[9], 다당제, 성문법주의(대륙법계)
국가
요인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김성수, 함태영, 장면
국무총리[10] 이범석, 장면, 장택상, 백두진, 변영태
수석국무위원[11] 변영태, 김현철, 이익흥, 조정환, 홍진기, 허정
여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
}}}}}}}}}
경제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경제 체제 <colbgcolor=#fff,#1f2023>자본주의
명목
GDP
전체 GDP $39억 5,787만 3,926(1960년)
1인당 GDP $158(1960년)
수출입액 수출 $3,282만 7000(1960년)
수입 $3억 4,352만 7000
화폐 공식 화폐 조선은행 원대한민국 환(圜) }}}}}}}}}
<colbgcolor=#29166f> 단위
법정 연호 단군기원

1. 개요2. 한국 최초의 공화헌정체제3. 6.25 전쟁과 해체4. 관련 인물
4.1. 정부 및 여당4.2. 야당
5. 관련 사건6. 미디어에서
6.1. 동명의 드라마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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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owcolor=#ffffff>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부터
D[dday(1948-08-14)]
파일:external/i2.ruliweb.com/158ab032de845c1cc.jpg
8.15 대한민국 정부 선포식 당시 실제 현장 육성이 담긴 촬영 영상 (25분)[12]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13]
1945년 광복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따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의견 대립으로 회담은 결렬되고 정부 수립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통일안이 가결되었으나 소련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였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축사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희생적으로 투쟁해 온 결과가 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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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귀빈 제씨와 나의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8월 15일, 오늘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희생적으로 투쟁하여온 결실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제일 긴중한 시기입니다.

내가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내 동포의 자치 자주하는 정부 밑에서 자유 공기를 호흡하며 이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대통령의 존귀한 지위보다 대한민국의 한 공복인 직책을 다하기에 두려운 생각이 앞서는 터입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기에는 앞길이 아직도 험하고 어려웁니다. 4천여년을 자치 자주해온 역사는 막론하고 세인들이 남의 선전만 믿어 우리의 독립 자치할 능력에 대하여 의심하던 것을 금년 5월 10일, 전 민족의 민주적 자결주의에 의한 전국 총선거로써 우리가 다 청소시켰으며 모든 방해와 지장에 대하여 일시의 악감이나 낙심 애걸하는 상태를 보이지않고 오직 인내와 정당한 행동으로 극복하여 온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연속 진행함으로 앞에 많은 지장을 또 일일이 이겨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우려하거나 퇴축할 것도 없고 어제를 통분히 여기거나 오늘을 기뻐만 하지말고 내일을 위해서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우리의 애국심과 노력으로 우리 민국을 반석같은 기초 위에 둘 것이니 이에 대하여 공헌과 희생을 아니한 남녀는 더 큰 희생과 굳은 결심을 가저야 될 것이요 더욱 굳센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다만 우리의 평화와 안전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힘써야 될 것입니다.

이 건국 기초에 요소가 될 만한 몇 조건을 간략히 말하면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 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는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 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다른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의 사소한 장해로 인해서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의 대정 방침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 제도가 어렵기도하고 또한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 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로 우리 친구들이 이 전제 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드러다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치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하고 30년 전부터 결정해서 실행하여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2. 민권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 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사상의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어서 다만 말과 행동 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절대로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 활동과 자유 판단권을 위해서 쉬지않고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유래로 저의 나라의 전제 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속으로 민주 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 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수난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30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3.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중하며 한도 내에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던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 계급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계단을 밟어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해서 위험 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쉬웁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 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자유 권리를 행사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하며 남의 이론을 참고하는 원칙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와 선악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불의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어야 될 것입니다.

4. 서로 이해하며 협의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관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으로 공고하며 밖으로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해서 자기를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 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 국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참정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분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히 받들어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를 불복한다든지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으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또 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 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 분자들이 민권 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어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5. 정부에서 가장 전력하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 정도를 개량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에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 통상공업 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에 따라 발전을 실시하여 우리 농장과 공장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물건은 수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敗)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를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요 노동자는 자본가를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계급 전쟁을 피하고 전 민족의 활동을 도모함이니 우리의 활동과 단합성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상고 시대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에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에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6.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경제적 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지금와서는 이 세계 대세가 변해서 각 나라 사이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에 화복안위를 같이 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되므로 어떤 적은 나라의 자유와 건전이 모든 큰 나라에 동일하게 관심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기왕에 밝히 표명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표할 것은 이 세계의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요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준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요망이 없고 오직 세계 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의심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미군정은 끝나고 대한 정부가 시작되는 이날에 모든 미국인과 모든 한인 사이에 한층 더 친선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첫째로 미국일본의 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있던 적군을 밀어내었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기에 돕는 것이니 우리 토지의 일척일촌(一尺一寸)이나 우리 재정의 일푼전이라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은 과연 정의와 인도의 주의로 그 나라의 토대를 삼고 이것을 세계에 실천하는 증거가 이에 또다시 표명되는 것입니다. 겸하여 과도기에 미국 장교들을 도와서 계속 노력한 모든 동포들의 업적은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첫째로 미국 군인이 점령한 동안에 군정이나 민정에 사역한 미국 친우들이 우리에게 동정하며 인내하여 많은 양해로 노력해준 것은 우리가 또 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또 다시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미 점령군 사령관이요 지도자인 하지 중장의 모든 성공을 치하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분을 용감한 군인일 뿐 아니라 우리 한인들의 참된 친우임을 다시금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 새로 건설되는 대한 민주국이 세계 모든 나라 중에 우리의 좋은 친구되는 나라들이 많은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의 주의하는 바는 기왕에 친근히 지내던 나라와는 더욱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요 기왕에 교제 없는 나라들과도 친밀한 교제를 열기로 힘쓸 것입니다.

둘재로 국제연합의 회원된 나라들을 일일이 다 지명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이 모든 나라들이 우리에게 많은 동정을 표하였으며 작년 11월 14일에 한국을 위하여 통과한 결의로 우리의 독립 문제를 해결되게 한 것을 감사히 여기는 중 더욱이 유엔 임시위원단에 대표를 파견한 그 나라들이 민주적 총선거를 자유로 거행하는데 도와주어서 이 정부가 생기게 한 것을 특별히 고마워하는 바입니다. 이 앞으로 유엔총회가 파리에서 열릴 때에 우리나라 승인 문제에 다 동심 협조하여 이만치 성공된 대사업을 완수하게 하기를 바라며 믿는 바입니다.

우리 전 국민이 기뻐하는 이날에 우리가 북편을 돌아보고 비감한 생각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거의 1천만 우리 동포가 민국 건설을 우리와 같이 진행하기를 남북이 다 원하였으나 유엔 대표단을 소련군이 막기 때문에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 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처를 요구할 것이요 다음에는 세계 대중의 양심에 호소하리니 아무리 강한 나라이라도 약한 이웃의 강토를 무단히 점령케 하기를 허락한다면 종차로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는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자유로 사는 것을 우리가 원하느니만치 우리가 자유로 사는 것을 그 나라도 또한 원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이 원하는 바를 그 나라도 원한다면 우리 민국은 세계 모든 자유국과 친선을 지키며 지내는 것과 같이 소련과도 친선한 우의를 다시 교환하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결론으로 오늘 지나간 역사는 마치고 새 역사가 시작되어 세계 모든 정부 중에 우리 새 정부가 다시 나서게 되므로 우리는 남에게 배울 것도 많고 도움을 받을 것도 많습니다. 모든 자유 우방들의 후의와 도움이 아니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우방들이 이미 표시한 바와 같이 금후로도 계속할 것을 우리는 깊이 믿는 바이며 동시에 가장 중대한 것은 일반 국민의 충성과 책임감과 굳센 결심입니다. 이것을 신뢰하는 우리로서는 모든 어려운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장해를 극복하여 이 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에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

대한민국 30년 8월 15일[14]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한국에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 1948년 8월 15일부터 1960년 6월 15일까지 존속하였다.

2. 한국 최초의 공화헌정체제

1910년 대한제국일본 제국에 의해서 멸망한 후 1919년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주류는 복벽주의라고 불리는 왕정복고 운동이 주류였지만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주류는 공화주의로 급격하게 기울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지금은 공화국이라는 일본식 번역어가 대중에게 자리 잡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민국이라는 중국식 번역어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대한공화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를 접수한 미군정소련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무시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한반도에 귀국했다. 임정 진영을 구성한 정당들은 한국독립당을 제외하고 하나둘씩 탈퇴하기 시작했고, 1946년 1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정치단체(임시정부 국무위원회)로서 활동했지만 김구김규식신익희과두제였으며, 김구 계파와 김규식 계파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면서 제헌 국회의원 선거 참가를 거부한 덕택에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1948년 5월 10일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선출한 제헌 국회이승만 계파와 신익희 계파의 협력에 힘입어 7월 12일에 입법한 제헌 헌법을 7월 17일에 정식으로 공포했다. 7월 20일에 간선제제1대 대통령 선거를 실행하면서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았고, 8월 15일에 광복 3주년을 기념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제헌 헌법을 입법할 때 이승만은 임정법통론을 주장하면서 전문에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문구를 넣었고, 그렇게 3.1 운동의 헌법 이념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 다스리는 제1공화국이 탄생하였다.

3. 6.25 전쟁과 해체

좌익 진영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방해 등 명분이 있기는 했으나 반공주의를 빌미로 정권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경찰 및 우익단체와 결탁하였고, 그래서 6.25 전쟁 당시 민간인들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하거나 좌익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탄압당하기도 했다. 대북정책으로 북진통일을 내세웠고, 6.25 전쟁 중인 1950년 10~11월에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결국 전쟁이 서로 물고 물리는 교착상태에 빠진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북진통일에 실패하고 다시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15]

이후 이승만 정권은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장기집권을 시도했으나 이반된 민심이 들고일어나면서 4.19 혁명이 벌어졌고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제1공화국은 해체되었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함과 동시에 가장 넓은 영토를 잃기도 한 체제이다. 6.25 전쟁 중 북한의 침공으로 낙동강 방어선 안쪽과 제주도, 일부 도서 지역으로 영토가 축소되었다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초산, 혜산, 청진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다시 삼팔선 부근으로 밀려났고 전쟁이 휴전으로 끝남과 동시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철원, 속초, 설악산 등을 차지한 반면 개성, 연백, 옹진반도 등을 잃었다. 이 상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4. 관련 인물

4.1. 정부 및 여당

4.2. 야당

5. 관련 사건

6. 미디어에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중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드라마가 야인시대인데, 최근에 들어서 심영물의 대상이 점점 많아지면서 제1공화국 자체가 합성물의 소재가 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야인시대 합성물 중 최근에 부상하는 인물이 바로 제1공화국의 수장 이승만. 그뿐만 아니라 이기붕, 조병옥 등의 당시 정치인들이 개성을 가진 캐릭터로 부상하고 있다.

야인시대 바로 전에 편성된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의 원작인 월탄 박종화 선생의 소설 <여인천하>의 소재 역시 제1공화국으로, 박종화 선생이 프란체스카 도너, 모윤숙, 박마리아 같은 자들의 치맛자락 정치를 조선시대의 문정왕후, 정난정, 경빈 박씨 등에 빗대어 쓴 것이다.

6.1. 동명의 드라마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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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9년 10월 15일 이전 사괘의 배치가 달라지기 전의 국기.[2] 1948년 7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했고, 며칠 내에 내각 구성도 완료하면서 제1공화국 정부는 이미 실질적으로 수립되어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부수립국민축하식'을 의도적으로 광복절에 맞추어 8월 15일에 거행한 것. 그러나 법률상으로는 정부 수립의 선포까지가 공식적인 정부의 출범 절차이므로 공식 정부 수립 기념일은 8월 15일이다.[3] 승계 여부에 논란이 있다. (임정 법통 논란 참조.) 제1공화국 정부가 당시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하자로 인해 발행한 논란이다. 그러나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서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4] 헌법상의 영토는 당연히 한반도 전역과 그 부속도서이다.[5] 출처[6] 1954년 11월 15일 ~ 17일 수복지구 행정권 이양식 이후 면적, 다만 국내 상황이 안정되지 않아 미등록 토지를 제외한 면적이다.[7] 제헌 헌법의 전문에는 민주주의제제도라고 적혀 있었다. 현재 학계의 주류적인 학설은 이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해석하는 것이다. 헌법적인 취약점을 이용해 비자유민주주의적으로 운용했다고 지적받는다.[8] 제헌 헌법기에는 대통령이 국회에서 선출되는 형태였다.[9] 제헌 때는 단원제로 정하였으나, 제1차 헌법 개정 때 양원제로 바뀐다. 그러나 단원제처럼 운영되었으며 본격적인 양원제는 제2공화국부터다.[10]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무총리직이 폐지되었다.[11] 사사오입 개헌으로 폐지된 국무총리직을 대신하여 국무회의를 조정 및 총괄한 신설 직책이다.[12] 00:20 각계 인사들 중앙청으로
02:15 개회
03:01 이승만 대통령 연설
09:48 맥아더 장군 연설
16:28 하지 장군 연설
20:56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연설
23:52 주한 미 대사 연설
24:33 폐회
24:45 참석한 내외 귀빈들 퇴장
[13] 현수막에 적힌 한자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14] 정부 수립 후 9월 25일 단군기원 연호가 법제화되기 전까지 이승만 행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한민국 연호 사용 경위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15] 만약 6.25 전쟁 당시 북진통일을 이루었다면 이승만과 1공화국의 위상은 지금과는 180도 다른 엄청난 신격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승만이 거의 조지 워싱턴+에이브러햄 링컨 수준의 위인으로 대우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비고] 내각 사임 후 야당 정치활동.[17] 내각에서 경질됨.[비고] [19] 미군정기에 시작되었지만 제1공화국 시절에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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