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23:02:43

남북한의 전후복구사업

1.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2. 한국전쟁의 발발과 시대적 배경3. 휴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한의 정치 상황4. 남한의 전후복구사업
4.1. 초대 정부의 전후복구사업 정책4.2. 유엔한국재건단의 조직과 활동
5. 북한의 전후복구사업
5.1. 복구건설 3계년 계획5.2. 제 1차 5개년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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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 및 좌익 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 소총회의 결정대로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임기 2년의 국회의원을 198명 선발했다. 이때 이승만의 독립 총성 국민회가 원내 제 1당이 되었다. 당시 정부는 민주 공화국을 표방하는 내용의 헌법을 공포하고 삼권 분립과 4년의 임기를 가진 대통령을 간접 선거 제도로 선출하도록 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위원장으로서 김일성이 1946년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후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한 토지개혁과 산업 및 자원의 국유화 등 사회주의의 체제를 마련했고 1948년 9월에 이르러 제 1차 최고 인민 회의를 통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서 38도선 이북의 단독 정부를 선포했다.

2. 한국전쟁의 발발과 시대적 배경

한국 전쟁의 발발은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된 시대적 배경에서 그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북한은 소련과 비밀 군사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군사적 지원을 약속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주둔하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군사력이 강화된 상황이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미국의 애친슨 선언을 통해 한반도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대만과 함께 제외되어 미군의 철수가 이루어졌다. 이에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침을 이행했고, 3일만에 서울이 합락되었다. 하지만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유엔군을 참전시켰고, 결국 서울을 재탈환한 뒤 압록강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국의 개입과 함께 1.4 후퇴로 남측은 서울을 도로 뺏겼으며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8도선 중심의 접전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시점으로부터 3년 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각종 건물과 산업 시설의 파괴와 민족 간의 적대감이 증가하였다. 이승만은 당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미군의 한국 주둔과 경제 원조라는 합의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울타리 삼아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한 배경이 된다.

3. 휴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한의 정치 상황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제 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세력 사이의 동아시아 냉전 구도가 형성됨에 따라 한반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남한과 북한은 국제적 갈등상황 속에서 냉전의 논리 질서에 순응하여 주도 세력인 미국과 소련 중 하나의 노선을 선택할 것인지, 혹은 강대국이라는 울타리를 버리고 자주를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북한은 식민지배와 일제 예속의 역사들을 강조하며 강대국의 무리한 요구를 경계하는 자주노선을 취했다. 외부 세력과 평등하지 못한 관계로 발전하기보다는 극단적인 주체 외교로 국가를 고립시키는 것이 외국에 함부로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 하에 민족 자결주의를 표방했다. 이를 위해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으켜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을 소련과 연안계 등의 정치세력에 넘김으로써 반대파를 제거하여 독재체제를 강화했다. 그리고는 천리마 운동, 경제 개발 3개년 계획과 5개년 계획을 각각 실시함으로써 분단 국가로서의 국가 건설을 진행시켰다.
남한은 생존을 위해 자주 국가로서의 노선을 포기하고 미국의 원조와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으며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썼다. 따라서 분단 국가로서 출범한 대한민국 정식 정부는 반공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지녔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내세워 정권을 연장시켰고, 독재체제의 강화를 추구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이 당선된 이후, 1952년 이루어진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반대 세력들이 대거 당선되자 간접선거로 재선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자유당 창당, 직선제로의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의 변칙적 논리를 앞세워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기에 나섰다. 일례로, 반공을 내세워 진보 세력을 탄압하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자 당시 라이벌이었던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사형시킨 진보당 사건을 들 수 있다. 나아가 신국가 보안법 제정 등을 통해 정부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등 사회 통제를 강화했다.

4. 남한의 전후복구사업

4.1. 초대 정부의 전후복구사업 정책


1954~1956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집권 기간 동안 주요 경제 개발 계획은 한국경제부흥 5개년계획안(1954), 4개년 종합계획(1953), 한국경제재건계획(일명 네이산 보고서, 1954), 경제부흥5개년계획(1956)을 들 수 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 정책은 고정환율의 중요성과 산업의 재건을 강조하는 방향성을 띄었다.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화의 고평가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를 받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산업을 재건시켜 공장을 짓는다면 자급자족의 근원이 마련되기에 중점을 두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안정적으로 세수를 마련하기 어려웠던 점과 해당 산업으로의 투자 금액의 절반 이상이 원조와 해외 차입(대충자금의 사용권한은 미원조당국의 경제 조정관이 장악하고 있었음)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문제가 있다.

파일:이승만 정책 테이블.png

한국경제부흥 5개년계획(1954)
한국전쟁 전후 첫번째로 발표된 경제개발 계획 정책이다. 1954년 7월에 입안되었으며 계획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승만의 방미를 앞두고 원조를 신청하기 위해 급조된 계획안으로 평가된다.

경제부흥5개년계획(1956)
1956년 5월 예정되어 있던 정,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3월달에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방한한느 일정에 맞추어 3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입안된 경제원조 계획안이다. 미국의 원조를 전제로 구상되었으며 23억 달러 원조 중 10억달러는 시설재(교통 통신 주택 치수도로 등 사회간접 자본의 복구와 확충 56.3%, 제조업 23.2%, 철강 1.7%, 선박공업 3.5%: 선박공업을 제외하고는 국내의 사회간접자본의 확충과 수입대체산업에 치중됨), 13억 달러는 소비재에 사용하는 것이 계획의 주된 내용이다. 미국은 계획안이 통합된 전후 복구 전략이기 보다는 구매리스트에 가깝다는 비판을 하며 계획안에 상정된 이원의 양이 과다하다고 평가했다. 미국이 이 계획안의 승인을 거부하자 국내에서도 해당 계획안이 구체적인 기초 자료에 입각하여 작성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경제 원조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방적으로 가공된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후 한국 정부의 공식 환율과 현실적인 환율 사이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자 미국은 더 이상 부흥 개년계획에 대한 언급 없이 안정화 대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산업개발 3개년 계획안(1958)
1956년 9월 부흥계획을 입안할 것으로 합의한 한미합동경제위원회는 1957년 5월 6일 국민소득 300만 달러를 목표로 하는 경제부흥 장기계획을 수립할 것과 입안과정에서 미국의 고문단을 초빙하기로 하였다. 이에 장기경제개발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이 출범했고, 통계적 기초를 닦고 부흥백서를 발간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와 외국인 고문의 참여를 통해 이전과는 차별화된 부흥안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케인즈이론과 해러드도마 모델, 콜롬모델, 넉시의 균형 성장론과 구조주의 등 다양한 이론을 도입했다. 나아가 화학, 제철, 기계, 질소 비료 공장의 건설을 비롯한 2차 산업을 주요 내용으로 하여 수입 대체 산업화를 전략으로 구상했다. 국내에서는 산업개발위원회 부서 간의 협의가 부재하고 중공업 부문에의 과도한 설정이 있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달리 현실적인 내용을 갖춘 정책안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 원인 분석
이승만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첫째, 이승만 정부의 정책 자체가 가격 기구를 왜곡하고 있으며 계획이 비현실적이었다. 과대한 국방비를 유지하면서 경제건설을 위한 투자비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부는 일본에서 생산한 원조 물자의 도입을 반대함과 동시에 대일 교역 단절까지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쌀 수출을 주요 목표로 설정한 것은 한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외국의 이론과 계획을 과도하게 참조하여 실패로 이어진 것이라 판단된다.
케네디 행정부에서 철강 사업을 비롯한 수입대체를 위한 기간 산업의 건설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지원을 거부했다.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제반,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금융기관과 취약한 주식시장으로 인해 국내 자본을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외자를 활용한 중공업 중심의 기간산업 건설 계획은 비현실적이었으며 결국 계획의 실패로 이어졌다.

두번째, 이승만 정부의 의지 부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실제로 1954년과 1956년의 계획은 미국의 원조를 더 받기 위해 급조된 계획이었을 뿐, 심의나 본격적인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정 환율과 한화의 과대평가를 위해 경제정책 보다는 당시 이승만 정부가 원조의 분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정부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원조를 받아내는 일차적 목적에만 매몰되었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원조 감축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미국은 군대의 감축에 따른 비용을 경제개발 비용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였다. 미국의 원조로 운영되는 한국군의 규모를 감축함으로써 원조 비용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였고, 오히려 한국군의 사단을 늘리겠다 주장하였다. 한국군에 대한 원조 감축 반인플레이션을 통해 현상 유지에 만족하려 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 문제가 경제부흥 관련 정책들이 실행되지 못한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입안했던 네이산 계획과 타스카 계획이 실행되지 못했던 점이 그 근거가 된다. [1]

4.2. 유엔한국재건단의 조직과 활동

유엔한국재건단(UNKRA)는 1950년부터 1958년 해체되기 전까지의 기간동안 유엔기구가 한국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구호와 경제 재건을 목표로 원조를 진행한 조직이다. 이들은 1950년 설립 이후 휴전 협정 체결 이전까지 미국 원조 기관과의 협의에 따라 한정된 영역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규모 기간 사업보다는 전황의 변화에 맞춰 중소 규모 산업을 통한 생필품 자급 자족과 농업 생산량 증대에 기여했다. 이는 소비재 판매 대금으로 막대한 국방비를 충당하고자 했던 미국의 원조와 차이를 둘 수 있다. 협정 체결된 1953년 중반 이후의 시점에 진입하자 존 쿨터로의 단장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유엔군 사령부 산하의 경제조정관실과의 협의 하에 독자적 활동 영역을 확보한 것이다. 1958년 재건단의 해체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1960년대까지 남은 프로젝트를 맡아 마무리할 청산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이렇게 유엔한국재건단의 활동은 막을 내린다.
유엔한국재건단은 이승만 정부와 사전에 계획안을 공유받고 논의했던 최초의 기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실상은 한국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적었으며 양자택일의 압박으로 접촉이 이루어졌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불신과 겹쳐지면서 재건단에 대한 한국정부의 영향력은 실질적으로 행사되기 힘들었다.
재건단은 공업을 중심으로 한국정부가 요구한 3대 기간 산업(비료, 시멘트, 판유리)을 핵심분야로 설정하고 재건을 구상했다. 공업은 재건단의 원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핵심적인 분야로 농업, 보건에 초점을 두었던 미국의 저개발국 원조 행태와 상이하다. 전체 재건단의 계획 실행률이 60%인데 반해 그 중 공업 부문의 실행률이 80%에 달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산업생산성의 향상을 지향한 원조로 볼 수 있겠다. 노후화되거나 전쟁으로 파괴된 기존 시설을 복구하고 신규 투자를 통해 공장을 새롭게 건설하였다.
3대 기간 산업인 비료, 시멘트, 판유리는 각각 농업 생산량 증대와 건설 필주 물자로서 전후 기초시설 복구 및 민생 안정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분야이다. 또한 해당 산업에 요구되는 원료를 대부분 국내에서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수익 창출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진다. 일례로, 문경 시멘트 공장과 인천 판유리 공장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시멘트는 국내 필요량이었던 60만톤 중 전쟁으로 인해 한국 유일의 시멘트 공장이었던 삼척 공장이 1953년 시점에서 4만여톤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재건단은 외화 900만 달러를 투입하여 연간 20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원조를 계획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재건단의 원조가 전전 수준으로의 복구를 넘어 부흥 원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이외에도 한국의 상황에서 장차 수출 가능성을 전망할 수 있는 분야인 면방직 공업과 화학, 기계, 공예 순으로 금액을 배정하여 극도로 불균형한 국제 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자본을 투여하고자 하였다. 대규모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던 건축 자재를 비롯하여 수입-수출의 극심한 불균형을 완화하고 식량 증산과 생필품의 자급 자족을 가능하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2]

5. 북한의 전후복구사업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휴전협정 이후 1953년 8월 개최된 조선 노동당 중앙 위원회 제 6차 전원회의를 통해 복구 건설 일정을 확정 지었다.

5.1. 복구건설 3계년 계획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 계획은 1954~1956년 집행되었다. 주로 소련과 중국의 원조에 의존하여 이루어졌으며 1955년 계획안의 확대 수정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개조를 본격화했다. 반면 소비품 생산 증대 문제와 사회문화 사업 등의 집행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에 원조국과의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노후되거나 오염된 시설로 인해 결핵과 이질, 기생충 감염이 만연했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36%의 농가에 5-6개월 분의 양식이 부족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의료와 생필품 생산, 식량 증대를 비롯한 인민 생활 수준의 향상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급진적 공업화 및 사회주의화 노선에 따라 추진된 무리한 양곡 수매 사업으로 봄에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양곡 수매 사업이란 전후 재건과 산업 시설 복구에 투입된 노동자 수가 급증함에 따라 그들에게 배급할 식량을 사전에 확보하기 위해 진행한 정책이다. 노동자들이 전후 복구를 위해 무보수로 일년에 40일 이상을 강도 높은 의무 노동에 차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개개 농가에 의무 수매량을 부담시켰고, 수매가는 시장 가격을 훨씬 밑돌았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 건 현지 간부들의 부정확한 수확고 통계였다. 총 수확고의 값보다 60만톤을 넘어선 294만톤으로 부정확한 통계 집계를 함에 따라 본래 전체 수확고의 27%로 책정되어야 했던 현물 세율이 사실상 35%에 달했다. 현물세의 과당 징수로 인해 농민이 소유한 여유 양곡은 0에 수렴했고, 수매에 응했던 농민 당원의 70%가 봄에 파종할 종곡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수매의 보상으로 제공되어야 했던 대가는 현금이 아닌 물자로 이루어졌으며, 제공되기로 한 공산품의 제고량이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많은 농민 단원들이 수매 사업에 응하려 하지 않자 정부는 양곡의 자유판매 금지령을 선포했다. 양곡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게 되자, 목화와 담배 등의 공예 작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을 쌀을 구입하지 못했고, 개인 식당과 주막의 90%가 문을 닫는 등 민간 상업의 폐업 위기까지 도래했다. 그 결과 농민의 자살과 폭동 선동, 삐라 살포 나아가 노동당 하급 간부들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초래되었다.[3]

농업 협동화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추진된 사업으로 전후 경지면적의 현저한 감소와 노동력, 화학 비료가 부족한 상황적으로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강제되었다. 그러나 간부 중 30%이상이 문외한이었고, 재산을 횡령하고 자금을 탕진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협동 조합을 견실화 시키기보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개인농들을 끌어들이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 부실한 협동 조합이 58%이상에 달했으며, 협동 조하 탈퇴를 바란 이들이 전체 조합원의 38%이상으로 추정된다.

민간 양곡 판매 금지 사업을 통해 농업 협동화를 추진하고 결국 사회주의적 개조를 용이하게 만드는 것에 목적을 둔 북한 정부의 협동화 운동은 민간 상업을 통제하는 맥락에서 소비 조합에도 적용되었다. 농민에게는 협동 조합의 가입을 종용했던 것과 달리, 기업가와 상인에 대해서는 생산협동 조합에서 생산 및 판매하는 상품의 거래 세율을 1~10%로 하향 조정함으로써 민간 상업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는 1920년 중반 민간 상인을 폐업의 수준에 이르도록 고율의 세금과 수수료로 억압한 소련의 움직임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1954년부터 1955년까지 1년 동안 민간 상업의 유통액은 277억원에서 97억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농업과 상업의 협동화를 통해 사회주의로의 개조를 시도한 것이다. 북한은 생산수단과 자금을 전적으로 조합의 공동 소유로 하고 오직 노동에 의해서만 분배하는 협동 조합의 형태를 추구하였고, 1957년 말 통계에 따르면 824개의 협동 조합 중 조합원이 소유한 자금과 생산 수단을 유지한 15%의 조합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완전한 사회주의 경영 방식을 채택했다. [4][5]

5.2. 제 1차 5개년계획

인민경제발전 제 1차 5개년 계획은 1957~1961년까지 5년간 진행된 경제개발 정책으로 전면적 공업화를 주된 내용으로 한다. 1954년 12월 29일 개최된 당 정치위원회에서 당시 북한의 최고 통치자였던 김일성은 사회주의의 기초 축성과 인민들의 의식주 문제에 대한 기본적 해결을 해당 정책의 기본 방향이라 제시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달 3일에 걸쳐 진행된 당 상무회의에 따르면 소련에 의해 제동이 걸려 있던 소비재 생산 중시 정책에서 벗어나 중공업과 기계제작 공업의 발전을 통한 중공업 우선 정책과 농업 협동화를 통한 사회주의 경제적 기초의 축성으로 노선을 변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을 선두로 한 북한의 정부 세력은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중공업 우선 정책을 만능 해결책으로 여기고, 중공업이 발전해야만 경공업을 비롯한 모든 공업 부문과 농업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954년부터 시행되어 온 양곡 자유판매 금지령과 농업 협동화 운동, 그릇된 세금 정책을 비롯해 식량위기가 도래한 경제적 상황 상 급진적 공업화 노선은 많은 사회적 부작용을 야기했다.

소련은 스탈린의 국제주의적 이념에 따라 저개발국 원조에 대해 경제적 자립을 보장함으로써 스스로 현대적 사업을 건설하고 인류의 삶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지향했다. 물론 미국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계를 위해 신노선을 관철하고 사회주의 내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한 권력 행위로서의 이유도 있었지만, 정책 권고를 통해 우방국의 경제발전을 도움으로써 원조 수혜국에서 자신의 독점적 지위 강화에만 관심이 있던 미국 등의 자본주의국가의 제국주의 행태와 스스로를 대비시킴으로써 우월함을 느꼈다. 따라서 북한의 독단적 정책으로 인해 초래된 경제적 혼란은 사회주의 경제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손상을 주는 행위이자 동아시아 냉전 구도에 불안정을 조성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에 북한의 주요 원조국이자 우방국의 원조의 열쇠를 쥐고 있었던 소련은 인민들의 생활난 해결보다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농업협동조합 확대에 박차를 가한 북한 지도부의 선택에 대해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1955년 1월 소련 외무성 극동국과 북한주재대사 수즈달레프가 공동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처방을 작성했다.

(1) 1차 5개년 계획 작성에서 3개년 계획의 속도를 유지하고 현실적 조건과 사회주의 진영과의 협력 가능성을 고려하라.
(2) 급속한 농업 협동화 운동 추진을 멈추고 기존 협동 조합의 견실화를 추구하라.
(3) 근로자들의 물질적 생활 여건을 개선하고 생필품 생산을 증대하라.
(4) 당내 민주주의 신장과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하라.

특히 소련은 당 내 주요 직위를 배분함으로써 김일성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분산시키고 선거를 실시하기를 요구했다. 북한의 입장에서도 소련의 충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954~56년에 걸친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 계획에 오직 경공업 투자 확대 등 보여주기 식 대처가 이루어지자 소련은 김일성의 모스크바행을 독촉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양곡수매 사업의 실패가 불러일으킨 식량 문제를 변명거리로 삼아 북한을 떠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결국 미뤄진 1955년 4월 21일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의 충고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두 달 뒤인 6월 15-20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무리한 공업화 추진 자제, 농업협동조합의 양적 성장 억제, 수매사업시 금지된 양곡의 거래 허용, 농업 분야에 대한 투자 확대(관개 및 저수시설 복구, 재해피해농민에 양곡 대여, 수확이 낮은 토지에 대한 현물세 인하)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 또한 조성된 식량 위기가 심각했기 때문에 관련된 권고를 수용한 것일 뿐 공업화 방침과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미온적으로 반응하는 모양새였다. [6]

북한의 탈소련화와 주체사상 출범
김일성은 연안계와 소련계 정치인을 배척함으로써 정치 세력을 안정화 시키고 당 지도부를 개편했다. 일례로 소련을 모국으로 여겨 그들의 권위를 활용하여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치, 경제, 사회제도와 문화를 이식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소련계 한인의 국적을 전환시키는 사업이 있다. 소련대사관과 소련계 한인의 유착 관계를 끊고 합법적 통제권과 처분권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1955년 8월 22일 해방 경축 사절로 평양을 방문한 소련 대표단에게 문제를 제기한 정부는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의 정령을 통해 북한 국적을 취득한 고려인들의 소련 국적 탈퇴를 허용하되 이중 국정을 허용한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에 지도적 직위에 복무하고 있는 고련인에 한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만을 취득해야 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여 소련계 한인들로 하여금 북한의 지도적 직위를 택할 것인지, 소련이라는 보호막을 선택할 것인지 자유에 맡겼다. 그 밖에도 조쏘 친선의 달 행사를 폐지하고 러시아어 수업을 축소 또는 폐지 시키는 등 소련의 문화적 영향력을 제한함으로써 탈소련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제 1차 5개년 계획의 재작성이 무기한 지연되었다. 1956년 4월 제 3차 당대회 총결 보고에 따르면 중공업 우선 발전 방침과 경공업 농업의 동시 발전체제가 공표되었지만, 시행된 데이터의 결과 수치 상 재작성 이전과의 생산 수치 변화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결국 북한은 소련과의 약속을 무산시키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표방하기에 이른다. 외세의 영향력을 거부했던 북한은 김일성을 신격화한 주체사상을 출범시켜 현대의 북한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의 경제부흥 전략(박태균, 2007)[2]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조직과 활동(임다은, 2020)[3] 1950년대 중반 북한의 경제난과 북소 관계의 균열(김재웅, 2021)[4] 북한의 전후복구 3개계획 수립과 소련의 개입(조수룡, 2018)[5] 정전 후 북한의 사회주의 개조와 민간상업의 몰락(조수룡, 2017)[6] 북한의 제 1차 5개년계획(1957~61) 초안과 탈소련화의 개시(조수룡,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