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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판락

<colbgcolor=#000><colcolor=#fff> 하판락
河判洛
파일:하판락.jpg
창씨명 가와모토 한라쿠
河本判洛
가와모토 마사오
河本正夫
문숙(文淑)
별명 고문귀(拷問鬼)
출생 1912년 2월 15일[1]
경상남도 진주군 성태동면 관지동
(現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2]
사망 2003년 9월 11일 (향년 91세)
부산광역시
본관 진주 하씨[3]
학력 진주제일보통학교[4] (졸업)
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 3회)
최종 당적

[[무소속(정치)|
무소속
]]
경력 사천경찰서 경찰
부산 외사계 고등경찰
前 우양금고 사장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고문귀
2.1.1. 착혈(搾血) 고문
2.2. 해방 후2.3. 모든 것이 드러나다
3. 대중매체에서4. 유사 사례5.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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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마를 만나모 직이뿌라(죽여 버려라). 금마는 사람이 아이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
하판락에게 고문 피해를 입은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5]
대한민국경찰공무원,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기독교도에 대한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 높은 친일 경찰이었다. 제5공화국 시절에 박처원이근안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김덕기, 김태석, 노덕술, 하판락이 있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본관은 진주(晉州), 창씨명은 카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혹은 카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다.

8.15 광복 후에도 처벌을 받기는커녕 부유한 사업가로 살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국민의 공분을 샀다.

2. 생애

1912년 2월 15일 경상남도 진주군 성태동면 관지동(現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서 아버지 현계(賢溪) 하한운(河漢云, 1887. 5. 24 ~ 1962. 8. 16)[6]과 어머니 동래 정씨(1887. 2. 2 ~ 1966. 2. 26)[7]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 동전(東田) 하영락(河永洛, 1909. 2. 10 ~ 1979. 4. 6)[8]은 명석면사무소 서기 및 명석면 부면장을 지낸 공무원이었고 남동생 하충락(河忠洛, 1922. 8. 14 ~ ?)은 일본으로 유학하고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가 6.25 전쟁 당시 월북했다.

2.1. 고문귀

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1930년 1월 17일에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후 동년 2월 9일에 풀려난 적도 있었고 1932년 진주고등보통학교(3회)를 졸업한 후 진양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1934년 2월에 처음 경상남도경찰부 외사계에 순사로 입직하여 일본 제국의 경찰관이 되었는데 1936년 순사부장으로 승진하고 이듬해인 1937년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외사주임이 되었다. # 1939년 12월에는 제21회 조선총독부 경상남도 경부·도경부보 고시에 합격해 경부로 승진했으며 이후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사천경찰서를 거쳐 부산 수상경찰서 고등과 외사계 등지에 근무하였다. 1940년 2월에 창씨개명령이 실시되자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로 개명했으나 이듬해에 완전한 일본식인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로 재개명했다.[9]

그는 일제의 고문 경찰로서 독립운동가, 기독교인, 공산주의자들을 고문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당시 항일 투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경남 고등경찰 3총사(부산의 하형사, 진주의 강형사, 마산의 박헌병)로 꼽힌 것은 물론 '고문귀'(고문 귀신)가 그의 별명이었을 정도였을 정도다.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강점기 최악의 고문 경찰은 바로 노덕술과 하판락이었다.

그가 이 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42년 9월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70여 명을 검거하고 집단 고문한 끝에 투옥하면서부터였다. 1943년 경상남도 진주부에서 배돈병원(培敦病院) 원장을 지내던 김준기(金準基, 1913~?)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 선교사들과도 친분이 있어 같은 시기 부산부에 있던 장로교회의 관리인도 겸직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를 빌미로 김준기를 '황국신민 정신이 결여된 연합국의 간첩'으로 몰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한 뒤 고문을 가했다. 1994년에 출판된 김준기의 회고록 '의학의 길목에서'에 의하면 하판락은 본인 역시 한국인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경상남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반일 투사를 색출해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에 따르면 하판락이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43년 3월에 일제의 침략 전쟁 방해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1942년 5월에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군사 시설 및 군수 공장을 파괴하고 항일 전단을 살포하며 군자금 모집을 계획한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 사건'으로 검거된 이광우 등 천우회 회원 3명과 여경수 등까지 합해 7~8명을 고문한 사건이었다. 참고로 여경수 등은 그로부터 1주일 전에 '울산 부산 마르크스 레닌 연맹'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하판락은 사회주의자들의 항일 운동을 친우회 활동과 엮어 '청소년들도 사회주의 운동이 가담했다. 기성 사회주의자들이 청소년들까지 포섭하여 불온 전단을 살포토록 사주했다.'고 날조해 이들을 고문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呂敬守, 1912?~1945)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그가 거듭 부인하자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졌으며 이어진 구타[10], 전기고문, 물고문, 머리카락 뽑기, 손가락 비틀기, 압슬 고문[11] 끝에 여경수는 3년 후, 즉 해방 직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뿐인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그는 고문 당시 만 17세의 청소년이라 몸에 되도록 열상 자국을 남기지 않게 한다고(???) 이광우에게 고춧가루 물고문을 가했는데 이광우는 무려 10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으며 광복으로 석방된 후 몸을 추스르는 데만 1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를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의 잔혹한 고문 때문에 모두 신체 불구자가 되었다. 실제로 이광우는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 근육이 파열되어 30대 초반부터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심지어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그는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2.1.1. 착혈(搾血) 고문

파일:친일경찰 하판락.jpg
주사기로 착혈하던 고문귀 하판락
반민자 죄상기
하지만 이 같은 죄상이 '하판락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자행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 그것이었다.

200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광우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그의 고문 행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광우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 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가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다.

1943년 그는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어떻게 고문했냐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팔 여기저기에 주사기를 삽입한 후 혈관을 찾으면 주사기 한가득 피를 뽑아낸 후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리고 나서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얼굴이나 몸,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는데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순수 고문 목적으로서의 피 뽑기는 외국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례라는 것이다.[12][13]

2.2. 해방 후

해방되었음에도 친일 경찰 하판락은 '오히려' 더욱 잘 나갔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으며 미군정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일하면서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고 1946년 6월에는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해 일제 고등경찰 '하 형사'로서의 '실력'을 발휘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1949년 1월 16일까지 차석수사관 자리를 유지했다.

그러한 그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이었다. 그의 고문으로 순국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고발하여 그가 경찰 일을 그만둔 지 8일 후인 1949년 1월 24일 부산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뒤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고 하자 부산 시민들이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애원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체포된 후 이광우가 자신의 항일 활동과 그의 고문 사실 등에 대한 조서를 보내고 반민특위로부터 증인 소환장을 발부받자 그의 아버지는 파렴치하게도 이광우의 생가를 찾아가 보자기로 싼 돈 보따리를 건네면서 이광우의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이 하판락을 모른다고만 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한다.[14] 당연히 이광우의 아버지는 이 파렴치한 요구를 거부했고 이광우도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격분했으며 체포된 그를 만나러 갔을 때 주먹다짐을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반민특위로부터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자신이 저지른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결국 1949년 8월 26일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교인 진주고등학교 동창회의 초대 감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부산진체육회 이사장[15], 1956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의회 의원 진양군 제1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당시 막강했던 하씨 문중의 영향력과 금품 살포를 동원한 선거 운동에도 불구하고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다. 이후 부산시의회 의원에도 도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파일:external/imnews.imbc.com/DN20020071-00_01340003.jpg
[16]

결국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과 미군정 도경찰부에서 회계업무를 본 경험을 가지고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았는데 초반에는 목재 수입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성공하며 많은 돈을 모으며 그 돈을 바탕으로 1973년 '우양금고'라는 이름의 신용금고를 설립하고[17] 금융업자로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아 은퇴한 후[18] 이 돈으로 고향인 명석면 청사를 신축하는 데 기금을 희사하거나 크고 작은 고향 일에 기부금을 내는 등 생색을 내며 출향 인사로 자리잡았고 부산에서는 대한노인회 수영구 지회장을 수 차례 역임하고 장수학교도 운영하면서[19] 1997년 어버이날에 문정수 부산시장에게서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신분세탁을 제대로 했다. 이렇게 그는 무려 반 세기 가까이 과거의 악행이 크게 공론화되지 않은 채 명석면의 지역유지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평온한 노년과 부귀영화를 누렸다.[20]

물론 그의 악행이 당대에도 완전히 잊혀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상술한 것처럼 1994년에도 그의 만행을 언급한 책이 출판되기도 했고 1990년에 반민특위 관련 드라마에도 그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나오기도 했으며 조갑제가 1987년 쓴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서도 그의 이름과 그가 여경수를 고문치사케 한 악행이 언급되었다. 심지어 1977년 6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에는 반민특위에 대해 다루는 연재 기사에 아예 반민특위에 연행되는 하판락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부산에서도 그의 악행은 잊혀지지 않았다. #1 #2

다만 의외로 노덕술, 이종형마냥 자신을 체포한 반민특위 측에게 '빨갱이', '공산당'이라는 망발은 전혀 하지 않았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도 이와 관련된 기사가 전무할 정도.

2.3. 모든 것이 드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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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악행을 부정하는 노년기의 하판락. 대놓고 취재진들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21]

하지만 그의 친일 행적은 독립투사 이광우의 아들 이상국의 노력과 이광우의 증언으로 다시 한 번 까발려졌다. 이상국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10년 동안 제대로 된 기록을 찾지 못했던 상황에서 우연히 그를 알게 되었고 이에 1999년 10월에 KBS 기자들과 함께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이광우를 체포했다는 것만은 인정했으나 이광우에게 가한 고문에 대해 '나는 고문을 지시했을 뿐, 직접 고문한 것은 내 부하인 김소복이었다.'는 거짓말을 했는데 이 증언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기사와 이광우의 반민특위 증인 출두 서류와 함께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을 입증할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그는 전직 친일 경찰로서 뉴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이광우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고 200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평판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친일 죄상과 고문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난 여론이 불같이 타오르자 그는 2000년 1월 17일 정운현[22] 대한매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경의 간부를 지낸 과거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했다. 사실상 그의 사회적 생명은 이때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하다.[23]

한편 2000년 12월에 그의 고향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 그의 집안인 진주 하씨 문중의 반발로 그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명석면사를 쓴 김경현이 밝힌 바로는 하씨 문중이 마을회관으로 자신을 불러서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 "광주 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 "외지인 주제에 지역 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는 등의 망언과 비난을 해 댔다고 한다. 결국 <명석면사>에서 그에 대한 내용은 삭제되었지만 김경현은 편찬 후기에 '명석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고 적어 시간차 공격을 날렸다. 진주 하씨 일동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펄펄 뛰었지만 책은 이미 인쇄가 끝난 뒤였다. 하씨 문중은 하판락이 고등계 형사를 지냈지만 해방 후 면민들에게 취직 알선 등 좋은 일도 했다면서, 면사가 면민의 화합을 필요한 것인데 하판락의 친일 죄상을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면민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1 #2

그는 당연히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에 들어갔는데 이 명단을 발표할 때 명단에 들어간 대상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이었다.[24] 2002년 3월 10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53년만의 증언, 친일 경찰 노덕술' 편에서도 얼굴을 비췄고 2003년 9월 11일 향년 91세의 천수를 누리면서 살다가 부산광역시에서 죽었다.[25]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4. 유사 사례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6 1956년 지방선거 (경상남도의회 의원)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 낙선
1960 1960년 지방선거 (부산시의회 의원)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 음력 1911년 12월 28일.[2] 진주 하씨 집성촌이다.[3] 사직공파(司直公派)-충순공(忠順公) 기곤(起崑)파 27세 락(洛) 항렬.[4] 現 진주초등학교.[5] 참고로 이광우는 하판락의 착혈 고문을 폭로한 이이기도 하며 1999년에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려는 목적으로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는 아들 이상국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광우는 하판락보다 4년 뒤인 2007년 사망함으로서 하판락의 죽음은 살아서 지켜보았다.[6] 자는 응장(應章). 명석면협의원과 명석면학교비 평의원을 지낸 지역 유지였다.[7] 정성영(鄭成永)의 딸이다.[8] 자는 창숙(昌淑).[9] 창씨개명을 두 번이나 한 것을 보면 하판락이 얼마나 뼛속까지 친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두 번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10] 천장에 손과 발을 묶고는 주먹과 몽둥이, 와이어로프로 무자비한 구타를 가했다고 한다.[11] 종아리 사이에 야구 방망이를 끼우고 무릎 위에 올라가서 힘껏 구르는 방식이었다.[12] 심지어 대못상자도 외국에서의 유사 사례는 흔한 편이다.[13]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방글라데시군이 주사기로 희생자들의 피를 죽을 때까지 뽑아냈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14] 상술했듯 하판락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였기 때문에 자신의 재력으로 아들의 죄가 무마될 것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15] 출처[16] 참고로 하판락 왼쪽에 있는 사진 속 인물은 박춘금인데 이쪽도 악랄함으로는 손에 꼽을 만한 최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17]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에 의거한 상호신용금고법 개정으로 전국에서 신용금고가 우후죽순으로 설립되었는데 그 중 하나다. 그 신용금고는 얼마 안 가 하판락의 먼 친척에게 넘어갔으며 90년대 말 차명대출, 서류위조 등 위법행위를 일삼다가 예금지급불능상태에 빠져 1998년에 파산하고 타 신용금고에 흡수되었다고 한다.[18] 사실 우양금고를 설립했을 때 하판락의 나이가 당시 기준으로는 고령인 61세였다.[19] 1996년 기준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20]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하판락은 그와 동렬로 간주되는 수준의 비매국노 악질 친일파들 중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권세를 누린 인물이다. 김태석김덕기6.25 전쟁 전후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노덕술은 잠깐 헌병으로 권세를 누리는 듯 싶었다가 뇌물수수 발각으로 강제전역, 국회의원 선거 낙선, 불법흥신소 운영 발각으로 전 재산을 잃고 알거지 신세로 죽었으며 신상묵은 불법 벌목에 연루되어 전국적 망신거리가 되었다. 국회의원에 오른 이종형도 있지만 재임 중 교통사고로 죽었기에 논외.[21] 하판락이 앉은 고급 소파와 그 양옆의 스탠드들에서 하판락이 쌓은 부를 짐작할 수 있다.[22] 이낙연 총리 하에서 국무총리비서실장을 지냈고 20대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 지지를 선언했다.[23] 당시에는 환단고기 진서론은 물론이고 일제 역사서 20만 권 분서설, 쇠말뚝, 일본의 Korea 표기 조작설, 일제풍수모략설 같은 괴담이 사실인 것마냥 퍼졌던 데다 (하판락 사후인 2004년의 일이긴 하지만) 조갑제가 '친일보다 나쁜 것은 친북'이라고 했던 것이 엄청난 논란거리가 되었을 정도로 지금보다 민족주의/반일 감정이 강경했다. 그런 시절에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친일 경찰이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는 게 발각되었으니 주변으로부터 엄청난 손가락질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되었을 것만큼은 안 봐도 뻔하다. 하지만 이미 누릴 건 다 누린 뒤에 악행이 드러난 거라 노년기에나마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건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24] 다만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마지막 생존자는 아니다. 해당 명단에 오르지는 않은 조선귀족 고중덕(1923년생)은 지금도 생존해 있으며, 2016년까지 근황을 밝혔다.[25] 한국이 광복을 맞이한 후 권세를 누린 기간보다 몰락한 기간이 더 길었고 1969년 최빈국에서 탈출하기 1년 전 죽은 노덕술과 정반대로 하판락은 아흔이 다 되갈 때까지 악행이 공론화되지 않은 채 누릴 거 다 누리다가 한국이 2002년 선진국에 진입하는 것까지 보고 그 1년 후 죽었다.[26] 심영 역으로 유명한 김영인과는 동명이인이다.[27] 특히 바르비는 망명지인 볼리비아의 군사 정권의 악행들을 돕거나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28] 이후 좀머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만 종신형을 선고받았지 실제로는 감옥에도 가지 않은 채 요양원에서 2019년 편하게 사망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좀머와 같이 학살에 가담한 SS 출신 공범 9명도 2차 대전 후 합당한 처벌을 받기는커녕 독일에서 멀쩡히 살아가다가 종전 60년 후인 2005년에야 궐석재판에 회부되었고 감옥에 가기는커녕 죽을 때까지 독일에서 태연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29] 에어버스의 전신[30] 심지어 후에 밝혀진 정보에 따르면 발트하임은 단순(?) 입대 정도가 아니라 포로와 민간인에 대한 처형을 조력하거나 직접 지시하기까지 한 악질적인 전범이었다고 한다. 비록 발트하임이 직접 포로와 민간인을 처형한 것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살상 행위에 가담한 것 자체가 하판락이랑 하나도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