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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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조선귀족 백작 고중덕 高重德 | |||
<colbgcolor=#b0313f><colcolor=#c0c0c0> 출생 | 1923년 2월 18일 | ||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구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
사망 | 2014년 7월 4일 (향년 91세) | ||
서울특별시 | |||
본관 | 제주 고씨 | ||
본적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합동 21-1 | ||
재임 | 1939년 ~ 1945년 |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0px" | <colbgcolor=#b0313f><colcolor=#c0c0c0> 가족 | 증조할아버지 고영희 할아버지 고희경 아버지 고흥겸 | |
소속 정당 | |||
학력 | 경기공립중학교 (졸업) 도쿄농업대학 (농학과 / 중퇴) | ||
약력 | 충청남도 예산능금협동조합장 충청남도 예산군농업협동조합장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충남지부장 고덕중학교(예산) 설립기성회 회장 중앙고등학교 설립기성회 회장 예산라이온스클럽 회장 문화재보존위원회 예산지회장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애국지사 인한수 현충비 건립위원회 부위원장 | }}}}}}}}} |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본관은 제주로, 가문이 구한말 일제의 국권 피탈에 부역한 대가로 수여받은 조선귀족 작위를 일제강점기에 세습하였고 친일 부역 활동의 대를 이었다. 해방 후에도 장수하여 가장 오래 생존한 최후의 조선귀족으로 기록되었다.
한때 근황이 전해지지 않아 생존설까지 있을 정도로 생사 여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으나, 2014년 7월 4일 세상을 떠난 것이 확인되었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923년 2월 18일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구한말부터 일제에 충실히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집안이었는데, 증조부 고영희는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에 해당하는 매국노였고 조부 고희경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고흥겸은 목장 경영인으로 일하며 국방헌금을 헌납한 친일파였다.1939년 8월 14일 아버지 고흥겸이 세상을 떠나자 그가 가지고 있던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해당 작위는 증조부 고영희가 1910년 국권 피탈에 협력함에 따라 그 대가로 몇 달 후 조선귀족령이 공포되며 받은 것으로, 본래 자작이었으나 조부 고희경 대에 백작으로 승급된 것이다.
작위 세습 이후 일제 부역 활동을 이어갔다.
1940년 3월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3년 11월 일본 도쿄농업대학 농학부 농학과 3학년 재학 중 일본군 학도병에 자원하기도 했다.[1]
다만 다른 자료에서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재학 중에 학도병에 자원했다고 적혀 있다.[2]
2.2. 8.15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조선이 독립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8월 20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24일까지 자수 기한을 연장했고 신문에 실린 해당자의 명단에 실려 있다.반민자수기한(조선일보), 특위당연범의 자진출두요망(동아일보) 그 후 23일 자수를 했다고 신문에 실렸으며[3] 이 사실에 따라 불구속 송치되었으나 위원회 활동이 무산되면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고 넘어갔다.6.25 전쟁 이후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낙향해 농촌 지역 유지로서 살아간 것으로 보이며, 1972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충남 예산 고덕면 선거구에 출마해 무투표 당선되기도 했다. 1974년에는 예산군농협 조합장을 맡았고, 1977년 12월 9일 '새마을 포상자'로 지정되고 새마을운동 근면장을 수여받았다. #
2011년 3월 8일 본인의 가문이 소유한 재산을 국고로 귀속한다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관련 조치에 반발, 해당 법령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등 친일파 재산 반환 소송에 나서며 잠시 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이 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패소하였고, 결국 가문 재산의 국고 귀속을 막지 못했다. #
2011년 4월 당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고 있었고, 2014년에도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 #
2014년 7월 4일 세상을 떠났다. # 향년 91세. 서울시설공단 검색 결과 내역에 따르면 시신은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어 후손들의 사유지에서 산골되었다.
사후인 2016년 4월 15일 경기도 성남시의 성남도시개발공사가 작성한 대장동 토지조서에 본인 명의로 된 사유지 내역이 포착되었다. # 2025년 5월까지 생사 여부가 불명이었기에 해당 사유지 내역은 2016년까지 고중덕 본인이 생존해 있었다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등기부등본 발급 결과 전부 후술될 고중덕 제독의 재산이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2 |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충남 예산 고덕면 | | 무투표 당선 | 당선 | 초선 |
4. 여담
- 공식적으로 기록된 모든 조선귀족 중 2014년까지 살아있었으므로 최후의 조선귀족으로 등극한 인물이다. 물론 해방된 독립국 대한민국에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부역했다는 본인과 가문의 내력이 자랑은커녕 공개할 만한 이력조차 못 되므로, 근황을 자의로 알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장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 중 가장 성공한 인물인 민복기 전 대법원장만 하더라도 본인의 부친인 민병석의 정체를 숨겨야 했다. # 그러나 이후 밝혀진 자료들에 따르면 조선귀족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생존 당시 근황을 꾸준히 밝혀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충남 예산군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다. 2014년 이후 소식이 없었던 것은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단지 장례가 조용히 치뤄져 사망소식을 알기 어려웠는데, 비슷한 사례로 캐나다의 항공공학자 제임스 플로이드가 있다.
- 본인이 살아생전에 남긴 기록들을 확실히 지우고 가려 했는지 2010년대에 비해 본인 성명 '고중덕'이 포함된 뉴스 보도 기사들이 상당수 삭제되었다. 이로 인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동명이인인 해군참모차장을 지낸 고중덕 제독이 언급된 기사조차 다수 삭제된 상태.[4]
- 인터넷 검색 결과 본인의 사진이 노출되지 않으며, 온라인상에 본인의 사진이 아예 없다시피 했었으나, 1943년 학도병으로 출전하던 젊은 시절의 사진, 1966년 제7회 농업기술자대회에서 농업기술상 기본상을 받으며 찍은 단체사진 1장, 1972년 농협중앙회 회보에 조합장으로 참석하여 회의 중 촬영된 단체사진 1장과 단독사진 1장[5], 그리고 2005년 4월 27일 발간된 전국농업기술자협회 '농업기술회보' 42권 3호(통권 497호)의 42쪽 '협회소식 및 회장동정'에 실려 있는 아래의 단체사진이 발굴되었다.# 2005년엔 '전국농업기술자협회 50년사' 간행물에 소개된 각 지부장 명단에 충청남도지부장 직책으로 이름이 확인되지만 사진은 나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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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18일 경성일보에 "백작의 작위를 이은 고중덕군 기쁘게 지원"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고중덕(당시 만 20세)의 사진. |
파일:고중덕 역주.jpg | |
1944년 1월 20일 경성일보에 "世紀の曉に戴く“力酒”, 漲る鬪魂にいで立つ高君"이라는 제목[6]으로 나온 고중덕의 사진. |
파일:고중덕 수상.png | |
1966년 10월 4일 제7회 농업기술자대회에서 농업기술상 기본상을 받으며 찍은 단체사진[7] |
파일:고중덕 회의중.jpg | |
1972년 농업 관련 회의중 촬영된 고중덕 (12시 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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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9일 전국농업기술자협회 회장단-지도위원 간담회에 참석한 고중덕[8] |
파일:예산전자공고 모교설립유공자 공적비.jpg | |
2014년 3월 11일에 세워진 모교설립유공자 공적비 |
- 사망 직전인 2014년 3월 예산전자공업고등학교 개교 40주년을 맞이하여 개교에 도움을 준 사람으로 공적비에 이름이 적혔다.
- 고중덕의 증손자임을 주장하는 한 네티즌이 디시인사이드 해외야구 갤러리에서 활동했는데, 다른 네티즌들이 "증조할아버지의 근황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일절 응답하지 않은 채 사라졌다고 한다.
5. 참고자료
5.1. 조선일보
- 반민자수기한 - 1949년 8월 20일
- 예산협동조합 일일창립발족 - 1957년 6월 4일
- 예산축산협조 조합장등임원개선 - 1960년 3월 1일
- 한종석씨 등에 기술상 수여 - 1966년 10월 4일
- 자랑스런 독농가 제7회 농업기술자본상을 받고 꽃다발에 묻힌 독농가들 - 1966년 10월 4일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입후보자 - 1972년 12월 3일
- 무투표 당선 89명 - 1972년 12월 5일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당선자 - 1972년 12월 17일
- 운영위원 50명 지명 - 1972년 12월 24일
- 새마을지도자 포상자 명단 - 1977년 12월 10일
5.2. 동아일보
- 특위당연범의 자진출두요망 - 1949년 8월 20일
- 반민자수자7명 - 1949년 8월 23일
- 대의원 입후보자 명단 - 1972년 12월 4일
-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무투표 당선 89명 - 1972년 12월 5일
- 「국민회의」 대의원 무투표당선자 - 1972년 12월 15일
-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당선자 명단 - 1972년 12월 16일
- 박 국민회의장 운영위원 50명 지명 - 1972년 12월 23일
- 새마을훈장 수상자 - 1977년 12월 9일
5.3. 매일경제신문
5.4. 경향신문
- 흙에서 솟는 민성 농민좌담 농민도 잘살아보자 - 1966년 9월 7일
- 무투표 당선 89명 - 1972년 12월 5일
- 박의장이 지명 - 1972년 12월 23일
- 새마을 포상자 명단 - 1977년 12월 9일
5.5. 경성일보
- “伯爵の名乘り”, 高重德君欣然と志願 - 1943년 11월 18일
- 今ぞ君が征く秋, 學兵を送る壯行の花束 - 1943년 12월 8일
- 世紀の曉に戴く“力酒”, 漲る鬪魂にいで立つ高君 - 1944년 1월 20일
5.6. 매일신보
[1] 출처: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방안 연구용역 보고서[2] 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4,1-4,10, 친일반민족행위 결정[3] 남작이라고 적힌 것은 오타로 추정된다.[4] 고중덕 제독은 1931년생으로, 우연의 일치로 이 문서의 고중덕과 성명은 물론 이름의 한자까지 똑같다. 이쪽 또한 3년 뒤인 2017년 10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 #[5] 이 문서의 프로필 사진이기도 하다.[6] 한국어로 해석하면 '세기의 효에 드는 '역주', 넘치는 투혼에 나선 고군'이다.[7] 맨 오른쪽 사람[8] 왼쪽 사진의 상단부분 좌측에서 오른쪽으로 3번째에 있는 인물이 고중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