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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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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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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후작
도정궁 제15대 궁주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
조선 중종의 15대손
창산군 | 昌山君
파일:이해창.png
봉호 <colbgcolor=#fff,#191919> 창산군(昌山君)[1]
성명 이봉길(李鳳吉) → 이해창(李海昌)
배언(拜言)
인헌(仁軒)
출생 1865년 10월 15일
사망 1945년 3월 2일 (향년 79세)
서훈 훈1등 태극장(1910)
대훈위 이화대수장(1910)
비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관직 생활2.2. 경술국치 이후
3. 여담
3.1. 이해춘과의 악연
3.1.1. 도정궁 친자 소송3.1.2. 서대혜 빈소 난동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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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800_128391800119650.jpg
<colbgcolor=#29176e> 창산군 이해창
조선왕족, 문신이자 대한제국황족, 정치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종가 도정궁의 제14대 사손[嗣孫]이며 '대원군 적장손 왕족 세습제'로 '군()' 칭호를 받은 마지막 도정궁 사손이다. 일제강점기후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2. 생애

1865년(고종 2년)[3] 10월 15일에 경기도 포천군에서 덕흥대원군의 13대손으로 훗날 참봉을 지내는 이경전[李慶銓]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그의 가계와 도정궁 종가는 2대 사손 당은군 이인령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에[5] 촌수가 상당히 멀었다. 본래 가계는 다음과 같다.
당은군 이인령 - 밀산군 이찬 - 이익한 - 이홍우 - 이재극[6] - 이순현 - 이사건 - 이양존 - 이관식[7] - 이화응 - 이재형 - 이경용(이경전) - 창산군 이해창
그러나 실제 혈통 상 23촌 숙부인 제13대 사손 경원군 이하전이 아들 없이 죽으면서[8] 1872년(고종 9년) 7월에 그의 양자로 입적하여 도정궁 제14대 사손이 되었다.

2.1. 관직 생활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봉 벼슬부터 시작했고 1884년(고종 21년)에는 양아버지 경원군처럼 충훈부[忠勳府] 도사직을 맡았다.

1889년(고종 26년) 알성시[謁聖試]에 병과(丙科)로 합격한 뒤 본격적으로 관료의 길을 걸었다. 형조공조, 예조의 참의를 맡고, 우부승지와 사간원 대사간, 그리고 종정사장[宗正司長]을 역임했다.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수립 무렵에는 봉상사 부제조[奉常司副提調]를 지내다 강화부윤[13]으로 전직했고, 다음 해에는 중추원 의관[14]에 이어 비서원승 등의 벼슬을 지냈다.

1904년(광무 8년) 10월에 한성판윤[15]을 역임했고 한 달 뒤 창산도정(昌山都正)을 거쳐 창산군(昌山君)으로 봉해졌다.[16] 동시에 그 무렵 사망한 황태자비 민씨의 무덤인 유강원[17]을 지키는 수원관을 지냈다. 이후에도 작헌례[酌獻禮]와 친경 의식[親耕] 등의 왕실 주요 행사에 꾸준히 종친으로써 참여했다. 1910년(융희 4년) 8월에 훈일등 태극장(勳一等 太極章)과 대훈위 이화대수장(大勳位 李花大綬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다른 종친들과 마찬가지로 민족계몽운동과 교육 사업에 힘썼다. 1908년(융희 2년) 한성부 사직동에 학교 설립 발기 모임을 가지는 한편, 이용직, 지석영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애국 계몽 단체인 기호 흥학회[20]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창산군의 양어머니[21] 서대혜와 부인 이씨도 청진동에 양심여학교(養心女學校)를 세우는 등 계몽교육을 위해 노력했다.[22]

2.2. 경술국치 이후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체결 후 황족의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6일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받고 1911년 1월과 1912년 8월에 각각 은사공채 168,000원 및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아 빼도 박도 못하는 친일파가 되었다.(...) 이후에도 선왕의 탄신일 봉사 및 기타 제사와 장례 등 이왕가의 행사에 관여했다.

1913년 12월에는 화재로 150칸 규모에 달하던 그의 집 도정궁이 겨우 20칸~30칸 정도만 남기고 다 타버렸으나, 고종순종이 사비를 내려 복구 비용을 지원하면서 가까스로 재건할 수 있었다.

1915년에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17년에 불교단체 불교옹호회의 고문이 되었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한성은행의 취체역[取締役]을 맡았고, 1927년부터 선일지물 감사로 부임해 1935년까지 재직했다. 1928년에는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30년 1월에는 창복회에서 1월분 교부금 250원을 받았다. 1931년 단군을 모시기 위해 세운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을 맡았다. 1939년에는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에 참여했고 1940년에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5년 3월 2일에 사망했다. 사망 4일 뒤, 일본 정부에서 그를 정2위에 추승시켜주었으며 그의 작위는 장남 이덕주가 물려받았지만 불과 5달 뒤 8.15 해방이 되면서 작위는 소멸했다.

3. 여담

  • 1909년(융희 3년) 4월 6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한국인 / 일본인 순사들이 도정궁에 가서 창산군에게 위생비[26] 를 독촉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창산군이 “궁에는 위생비가 없다.”라며 배째라로 나오니, 일본 순사가 “일본은 황실에도 위생비를 징수하거늘 하물며 궁이겠는가?”라며 창산군을 잡아가려고 했고,[27] 결국 어쩔 수 없이 위생비를 마련하여 주고 겨우 욕보일 상황을 피했다고 한다.[28] 이 기사가 나간 후 창산군 측에서 이 일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고, 8일 뒤인 4월 14일에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정정보도를 내었다. [29]
  • 도둑맞은 적이 많다.(...) 1907년(융희 원년) 12월 10일에는 도둑 4명이 도정궁에 침입했다.[30] 1928년 5월 9일에도 도정궁에 도둑 2명이 들어와 이해창의 2남 이흥주의 방으로 들어가 금고와 의복 등의 물건 수십가지를 훔쳐갔다. 또한 1939년 9월 16일에는 사당에 괴한이 쳐들어와 덕흥대원군창빈 안씨의 위패를 훔쳐간 뒤 3000원을 내놓지 않으면 위패를 손상시키고 아들 이덕주를 납치하겠다고 협박하는 일까지 있었다.(...) 위패를 훔쳐가고 협박장을 보냈다는 기사. 도정궁 위패 귀환 기사. 범인으로 2명이 잡혔는데 한 명은 엿 장사였다고.(...) 그런데 이해창이 친일파이긴 하지만 이들의 범행이 단순한 강도 사건인지 아니면 민족적 의식을 가지고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3.1. 이해춘과의 악연

3.1.1. 도정궁 친자 소송

파일:2017-12-05 19-55-30.jpg
<colbgcolor=#29176e> 도정궁 친자 사건 관련 기사 중 하나.
李海春(이해춘)은『辨香處士(변향처사)』.
1921년에 이른바 '도정궁 친자 논란'이 일어났다. 서대문에 사는 이해춘(李海春)이란 사람이 이해창은 양자니까 가짜이고 자신이 진짜 이하전과 군부인 서대혜의 친아들이라 주장하며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한 것.

이해춘은 "나는 1862년 음력 8월 7일 생으로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이하전이 귀양갔고 생후 2달 뒤 사형당해 어머니 서대혜가 김집이라는 사람에게 부탁해 몰래 기르게 했다. 이하전이 복권 된 이후에도 내 존재를 바로 못드러내서 이해창이 입양되었다."라고 주장했고 "어머니 서대혜가 80고령이 되어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부득이 진실을 밝힌다."고 말했다. 李海春(이해춘)은遂呈訴(수정소).

이에 깜짝 놀란 이해창은 양어머니 서대혜에게 진실을 물어보았으나 서대혜는 모른다고 했다. 사실 이하전 역모 사건 무렵 서대혜는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 사후 자살 시도를 했다. 다행히 서대혜는 살았으나 오랫동안 혼절하여 아이를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 만약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는지 모든 게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이해춘은 그 아기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한 것. 이해춘은 당시 창덕궁 이왕이던 순종에게까지 투고했고 재판에서 다수의 증인과 서대혜가 보냈다는 서찰 등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짜였다.

사실 이해춘은 고종 재위 시절, 서대혜가 불공을 드리러 혜화문 밖 원통사에 갔다가 만났던 처사로 법명은 변향이었다. 그 때도 이해춘은 서대혜를 보고 "내가 당신이 낳은 아들"이라면서 "이하전도 안 죽고 홍일도라는 섬에 숨어있다"는 등의 거짓말을 했는데 남편 관련 일로 계속 심신이 지쳐있던 서대혜가 한 때 이를 믿고 속았던 것.(...) 위에 언급한 서찰도 원통사에서 만났던 무렵에 오고간 것이었다. 서대혜는 조사에서 이해춘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고, 결국 이해춘은 패소했다.李海春(이해춘)은結局敗訴(결국 패소).

그러나 이후에도 이해춘은 자신이 이하전의 아들임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해창을 성토하는 〈토이해창문(討李海昌文)〉이라는 격문이 나돌아 인쇄, 배포한 사람이 체포당하기도 했다.

3.1.2. 서대혜 빈소 난동

그 뿐 아니라 1925년 1월 3일에 서대혜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이해춘은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도정궁에 두 아들을 데리고 달려와 어머니 얼굴이라도 보고 가겠다며 대문 밖에서 통곡을 했었다.

이에 보다 못한 이해창이 종로경찰서고등계 주임[31] 미와 와사부로에게 부탁하여 파견나온 경관들로 겨우 물리쳤다. 그러나 질 수 없뜸! 다음 날 이해춘은 아예 아내와 아들들은 물론이고 시집간 딸까지 모아모아 7남매를 데리고 또 와서(...) 일제히 대성통곡을 했다. 처음엔 단체로 온 문상객들이라 사람들도 별 뜻 없이 맞이했다가 가만 보니 이해춘과 그의 일가인 것이 밝혀져 하인부터 조문객들까지 모여들어 이해춘의 가족들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당연히 순순히 나갈 리가 없었고 결국 큰 싸움이 벌어졌다. 하하 개판이네. 이해춘의 부인 송씨는 옷이 찢어지고 허리를 다쳤으며 아들 이단주와 이한주는 기단에서 떨어져 큰 상처를 입었다. 쫓겨나오면서도 밤늦게까지 대성통곡을 하다 또 경관이 파견나와 12시에 돌아갔다.

이후 관련 기록이나 다른 자료들은 없다.

4. 가족 관계

이해창의 2남 이흥주는 미국 네브래스카 대학 농과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32]와 경신학교 및 진명여고보[33]에서 교사로 일하고 세브란스 전문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다 1936년 47세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34] 부인 홍승원과의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다.
  • 생부 : 이경용(李慶鎔) - 당은군의 3남 밀산군(密山君)의 후손
  • 생모 : 아산 이씨(牙山 李氏) - 이현모(李顯謨)의 딸
    • 동생 : 이해명(李海明)
    • 동생 : 김사오(金思澳)의 처
  • 양부 : 경원군 이하전(慶原君 李夏銓)
  • 양모 : 달성군부인 서대혜(達城郡夫人 徐達城, 1842 ~ 1924) - 참봉 서음순(參奉 徐音淳)의 딸
  • 정부인 : 남양 홍씨(南陽 洪氏, 1866 ~ 1898) - 홍종우(洪鍾宇)의 딸
  • 첩부인 : 제주 고씨(濟州 髙氏, ? ~ 1929)
    • 서장남 : 이흥주(李興柱, 1890 ~ 1936)
    • 며느리 : 홍승원(洪承嫄, 1897 ~ 1952) - 친일파 홍우석(洪祐晳)의 장녀

[1]고종실록》에는 1904년까지 '창'자가 '蒼'으로, 1906년 이후에는 '昌'으로 나온다.[嗣孫]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3] 고종은 창산군의 할아버지 뻘이나 나이는 13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즉, 창산군은 이구와 같은 항렬이다.[李慶銓] 1868년 이후 이경용(李慶鎔)으로 개명.[5] 종가는 큰아들 응천군의 후손들이었고, 이해창은 3남 밀산군의 후손이었다.[6] 원종의 후손 이재극과는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다.[7] 이양존의 양자로, 생부는 이양존의 동생 이술존이다.[8] 이해창이 태어나기 3년 전이다.[忠勳府]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에 포상 및 작우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 현재의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격이다.[謁聖試] 조선 시대 왕이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에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실시한 과거 시험. 문과, 무과로 나누었다.[宗正司長] 종실 사무 외에 어보(御譜)의 수정 등을 맡던 종정사의 수장.[奉常司副提調] 조선의 행정 기관으로 국가의 제사와 시호 등을 맡아보던 기관인 봉상사의 부 책임자.[13] 지금의 강화군수. 단 이 당시 강화의 위상은 지금의 급으로 조선 시대의 위상이 현대까지 왔다면 강화시장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14]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회 형식인 중추원의 구성원. 지금의 국회의원 격.[15] 지금의 서울특별시장.[16] 봉호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창산(昌山)'에서 유래했다.[17] 순종 즉위 후 '유릉(裕陵)'으로 개칭. 지금의 서울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었다가 20여 년 뒤 순종이 사망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酌獻禮] 왕이나 왕비의 조상이나 문묘(文廟)에 모신 공자의 신위에 왕이 직접 예로써 제사지내던 제도.[親耕]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들의 고생을 느끼기 위해 직접 밭을 갈고 농사를 짓는 의식.[20] 경기도 6개군, 충청북도 4개군, 충청남도 7개군에 지회를 두고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10년 9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21] 즉, 경원군의 부인.[22] 설립 당시 기존의 양원여학교 출신 관계자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양원여교 영어 교사인 윤고라가 교장, 창산군 부인 이씨가 재무 부장을 맡았다. 몇 달 뒤 이재극과 김인화가 설립한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과 합병되었으며, 동덕여자의숙은 동원여자의숙과 다시 합쳐져 이후 동덕여학교를 거쳐 현재 동덕여자대학교가 되었다.[取締役] 근현대기에 주식회사의 이사(理事)를 이르던 말.[朝鮮'''儒'''道聯合會] 즉, 유림들의 모임이다.[25]황성신문〉에 실린 1909년(융희 3년) 1월 28일 자 기사 원문: 兩君守宮 - 大皇帝陛下ᄭᅴᄋᆞᆸ셔今番西巡狩하ᄋᆞᆸ신ᄂᆞᆫᄃᆡ皇族中完興君李載冕氏와昌山君李海昌氏가守宮ᄒᆞᆫ다더라.(현대 한국어 풀이: 두 명이 궁을 지킨다 - 대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서부 지방으로 순행하시는데 황족 중에서 완흥군 이재면씨와 창산군 이해창씨가 궁을 지킨다더라.)[26] 대한제국 시기 서울에 넘쳐나는 분뇨, 쓰레기 등 오물처리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시민을 상대로 거둔 금액이다. 당시 한국인은 집칸을 따져 달마다 한칸당 2전을, 일본인 등 외국인은 명수로 따져 달마다 8전을 걷었다. 지금으로 치면 정화조 푸는 비용이라고 보면 된다.[27] 순사가 위생비를 독촉한 이유는 대한제국 시기 경무청은 위생단속 같은 보건업무도 겸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다 해방 후 보건사회부 설립과 함께 경무국 위생과의 업무를 각 행정조직으로 이관하면서 폐지.[28] 기사 원문: 日前韓日巡査等이 都正宮에 來到ᄒᆞ야 昌山君李海昌시를 見ᄒᆞ고 衞生費ᄅᆞᆯ 督促하거ᄂᆞᆯ 李海昌시가 答ᄒᆞ되 宮에ᄂᆞᆫ 衞生費가 無ᄒᆞ다 ᄒᆞ대 日巡査言內에 日本은 皇室에도 衞生費ᄅᆞᆯ 徵收ᄒᆞ거ᄂᆞᆯ 況宮乎아 ᄒᆞ고 리시를 捉出門外ᄒᆞ야 押去之境에 當ᄒᆞᆫ지라 不得已 ᄒᆡ費ᄅᆞᆯ 辦給免辱하얏다더라(현대 한국어 풀이: 일전에 한국인 일본인 순사 등이 도정궁에 가서 창산군 이해창씨를 보고 위생비를 독촉하거늘 이해창씨가 답하되 궁에는 위생비가 없다하니 일본 순사 말로는 일본은 황실에도 위생비를 징수하거늘 하물며 궁이겠느냐하고 이씨를 잡아가려 하자 부득이 해당 비를 판급하여 욕을 면했다더라)[29] 기사 원문: 昌山君李海昌시가 衛生費로 因ᄒᆞ야 日巡査에게 見辱ᄒᆞ얏다ᄂᆞᆫ 說은 純是虛言이라고 該君家에셔 來卞ᄒᆞ기 玆에 正誤ᄒᆞᆷ(현대 한국어 풀이: 창산군 이해창씨가 위생비로 인해 일본인 순사에게 욕보였다는 일은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해당 군가에서 반론하여 이에 잘못을 바로 잡음.)[30]대한매일신보》에 실린 1907년(융희 원년) 12월 12일 자 기사 원문: 再昨日下午에 社동昌山君리海昌씨家 賊漢四名이 突入허얏ᄂᆞᆫᄃᆡ 警視廳別巡檢이 捉去허얏다더라(현대 한국어 풀이: 이틀 전 오후에 사직동 창산군 이해창씨 집에 음흉하고 악한 도둑 4명이 갑자기 들어왔는데 경시청 별순검이 잡아갔다더라.)[31] 사상범을 다루는 경찰이다. 이들에게까지 부탁할 정도였다면...[32] 지금의 연세대학교.[33] 지금의 진명여자고등학교.[34] 1936년 3월 25일 자 《조선중앙일보》와 《매일신보》에 따르면, 충청남도에 있는 땅을 판 돈 3천 원을 횡령당해 비관하여 쥐약을 먹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