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0:30:35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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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호 509호 510호
매일신문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 상해판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Korea Daily News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국가
[[대한제국|]][[틀:국기|]][[틀:국기|]]
창간 1904년 7월 18일
종간 1910년 8월 29일 (《매일신보》로 변경[1])
본사 소재지 한성부 중부 수진방 (창간 사옥)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설립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양기탁
사장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알프레드 만함
이장훈
주필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09호
대한매일신보
(2012 - 1, 2, 3)

大韓每日申報
Daehan maeil sinbo (The Korea Daily News)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국립중앙도서관 (1)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2)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3)
분류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 (1, 2, 3)
수량 / 면적 1식 (1, 2, 3)
지정 연도 2012년 10월 17일 (1, 2, 3)
시대 1904년 7월 18일~1910년 8월 28일
소유자
(소유 단체)
국립중앙박물관 (1)
문화재청 (2, 3)
관리자
(관리 단체)
국립중앙박물관 (1)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2)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3)
파일:대한매일신보_창간호.jpg
<colbgcolor=#0047a0>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파일:대한매일신보(제8권_제1461호).jpg
《대한매일신보》 제8권 제 1461호.
현재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09-3호이다.[2]

1. 개요2. 시작3. 구성4. 활동5. 역대 임원 및 간부
5.1. 사장5.2. 주필5.3. 논설주간
6. 쇠퇴와 인수7. 관련 문헌

[clearfix]

1. 개요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한 대한제국의 신문. 신민회의 수뇌부들이 대거 참여해 발행했고, 사실상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 10대 중앙 종합 일간지인 《서울신문》의 전신이다.

2. 시작

파일:어니스트베델.png
<colbgcolor=#0047a0>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한국 이름 배설)
1902년(광무 6년)에 한국에 온 영국인 기자 어니스트 베델(배설)이 양기탁 등 민족 계몽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창간한 신문이다. 영문판 제호는 《더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였다.

3. 구성

창간 직후에는 영문 4면, 국한문 2면을 엮어 배포했으나 1905년(광무 9년) 8월 11일 이후 영문판과 국한문이 분리되었으며 1907년(광무 11년)에는 순국문판이 추가되었다.

1907년 기준으로 국한문판 8천부, 국문판 4천부, 영문판 4백부를 발행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3]

4. 활동

창간 당시에는 화합을 추구한 대한제국, 일본, 러시아의 각 정부에서 재정을 지원했으나,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발, 반일 신문으로 전향했다. 그 당시 일본이 사실상 언론의 검열을 맡았던 시기임에도 반일화가 가능했던 것은 발행인인 베델(배설)이 일본과 동맹국영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파일:양기탁.jpg
파일:attachment/Baekam.jpg
파일:단재신채호.jpg
<colbgcolor=#0047a0> 《대한매일신보》의 주요 논설진. 왼쪽부터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치외법권 혜택을 받아 통감부의 검열을 일체 받지 않고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을 비판하는 논설을 자유롭게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주요 논설진은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아주 쟁쟁한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일본은]에 참여해 애국 운동을 주도했으며, 1907년(광무 11년) 4월에는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했다. 이 신문은 항일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며 항일 논조를 견지했다. 한국 민중들의 민족 의식을 드높여 신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고종의 친서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으며,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부당성, 그 외의 일제의 야만적 침략 행위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끊임없이 신문지상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알려졌을 때는 사옥에 큼지막한 태극기를 내걸고 축배를 들며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를 열기도 했다고.

이에 대한 활동 중에 〈시일야방성대곡〉 관련 칼럼 보도 및 〈시일야방성대곡〉의 영문판 번역을 게재했다. 2017 수능 한국사 복수 정답으로 알려진 일(...)[5]

5. 역대 임원 및 간부

5.1. 사장

5.2. 주필

5.3. 논설주간

6. 쇠퇴와 인수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대한매일신보》였지만 통감부의 압박에 쇠퇴기를 겪게 된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사주인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했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양기탁은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핵심 인사 두 명의 이탈로 《대한매일신보》는 큰 타격을 받았다.

재판에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일제는 영국 정부를 직접 압박해 베델을 상하이로 강제 소환시켜 6개월형을 받게 만들었고, 1909년 5월 베델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1908년 5월 발행인이 영국인 만함(萬咸, Alfred W. Marnham)으로 교체되었고 1910년 6월에는 이장훈으로 다시 바뀌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 인수되었고, 제호에서 '대한'이 떨어진 채 1910년 8월 30일자 신문부터 총독부의 조선어판 기관지로 전락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2일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의 역사는 매일신보, 서울신문을 참고.

7. 관련 문헌



[1] 칙령 318호 때문에 그렇다.[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이전의 신문들은 자금적 한계와 미약한 인쇄 수준 탓에 많아봐야 3천부밖에는 발행하지 못했으나, 신문에 대한 인식의 형성으로 인한 독자 수의 증가와 인쇄술의 향상으로 많이 발행해낼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일본은] 화폐 정리 사업을 시행하는 데 필요하다며 차관 도입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차관은 실제로 일본인을 위해 사용되었다. 차관은 1,300만 원으로 늘어났는데, 대한 제국의 1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대구에서 서상돈 등이 국민 성금으로 국채를 갚고자 하는 국채 보상 운동을 일으켰다(1907)[5] 수능 출제 전까지 《황성신문》에만 게재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당대 중요한 사건이 한 신문에만 보도가 되기보단 타 신문에도 보도가 되기에 출제 오류를 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