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15:09:46

인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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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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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전궁 추증 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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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조의 현손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인양군 | 仁陽君
봉호 인양군(仁陽君)
이름 이재관(李載寬) → 이재근(李載覲)[1]
윤선(允善)
출생 1857년 9월 21일
사망 1896년 12월 6일 (향년 39세)
1. 개요2. 생애3. 사망과 이후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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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장조의 서3남 은전군의 양증손자이자 완평군의 큰아들이다.

2. 생애

1857년(철종 8년) 9월 21일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인 유학 이신덕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이 근 2 ~ 300년 전 임금이었던 11대조 선조였기에, 태어날 당시 그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만 3세 되던 1860년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양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자였던 경평군 이호[2]가 파양당하고 아버지 이신덕이 대신 입양가면서 그 역시 왕실의 일원이 된다.

이밖의 어린 시절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878년(고종 15년) 고종의 특명으로 군관에 임명되었고 그 해 철종철인왕후의 장례 시 빈전도감에 낭청으로 참여한 공로로 어린 말 1필을 받았다. 이듬해인 1879년(고종 16년) 3월 고종의 명으로 이름을 이재근으로 고쳤다. 이후 음서로 출사하여 부사용(副司勇)[3]과 사용(司勇)[4]을 지내는 등 주요 군직을 맡았고 1880년(고종 17년) 혼전의 종척 집사(宗戚執事)[5]로 참여하였다.

1888년(고종 25년) 5월 고종이 친히 낸, 지금으로 치면 시 짓기 대회[6]에 합격하여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래서 몇 달 뒤 식년시(式年試)[7]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그 해 11월 16일 영릉(永陵) 참봉[8]을 역임하고 1889년(고종 26년) 8월에는 선공감감역, 1890년(고종 27년) 1월에는 금부도사를 지냈다. 이 때 몸이 안좋아져 2달 뒤 사직한다 했으나 고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 감역(監役)을 거쳐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9]와 수릉 능령(綏陵陵令)을 거쳤다. 그 무렵 아내 연일 정씨와 사별하고 해주 오씨와 재혼하였다.

1890년대 초중반엔 주로 지방으로 파견나가 고을의 수장을 많이 맡았다. 경기도 진위현령[10] 및 강원도 간성군수, 그리고 경기도 삭녕군수와 수원군 판관을 지냈다. 수원군 판관시절에도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으나, 고종은 무시하고 오히려 그를 수원군수로 승진시켰다. 윤허하지 아니하다 이러다 내가 죽는다고요!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 피살 이후 중앙으로 올라와 다시 종척집사를 맡고 이듬해인 1896년(건양 원년) 3월에는 농상공부참서관(農商工部參書官)이 되었다.

3. 사망과 이후

농상공부참서관으로 재직하던 1896년(건양 원년) 12월 6일 지병으로 40세(만 39세)에 별세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인천부 전반면[11] 묘좌(卯坐)에 안장되었다. 첫부인 연일 정씨의 묘는 경기도 과천군 남면 당정리[12]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일반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종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4대 후손까지는 황족으로 대우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인양도정(仁陽都正)을 거쳐 4년 뒤 인양군(仁陽君)으로 최종 추봉되었다.[13][14]

4. 가족과 후손

첫 부인 연일 정씨(1859 ~ 1890)와 두 번째 부인 해주 오씨(1872 ~ ?)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름없는 첩 사이에서 아들 이헌용 하나만 두었다. 이헌용에 대해서는 문서 참조.
[1]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 청안군은 '재순(載)'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 완순군은 '재완(載)', 완영군은 '재긍(載)', 흥친왕은 '재면(載)', 완은군은 '재선(載)', 인양군은 '재근(載)', 의양군은 '재각(載)', 예양정은 '재규(載)'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 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였다.[2] 이세보로 더 잘 알려져있다. 원래는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후손이다.[3]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종9품 무관직.[4]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둔 정9품 무관직.[5] 조선시대 국상(國喪) 때 왕실 친인척에게 시키는 임시 벼슬.[6] 응제(應制, 통상 '製'로 적지만 이는 일제의 잔재다.)라고 하는데 '어명으로 시를 짓는다'는 뜻이다.[7]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시험. 식년시에는 크게 소과, 문과, 무과가 있었다. 즉, 우리가 흔히 아는 과거 시험이라 보면 된다.[8]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아닌, 영조의 장남 진종(효장세자)효순왕후(현빈) 조씨의 능이다.[9] 중국으로 보내는 직물, 인삼과 의복 및 각종 비단과 물감 ‧ 염색 ‧ 직조 등의 일을 관장하는 제용감의 관리자.[10]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동지역,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일대.[11] 현재 경기도 시흥시 북부 일대.[12] 현재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 일대[13] 작호는 지금의 인천광역시인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서 유래했다.[14] 은언군계 : 증(贈)[15] 덕안군 이재덕, 경은군 이재성, 청안군 이재순.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 이재원, 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 이재긍, 완흥군 이재면.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 이재근, 의양군 이재각, 예양정 이재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