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9 10:30:14

효명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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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왕세자
순조 이공 효명세자 이영 헌종 이환 (왕세손)
조선 추존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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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종 효명대왕
대한제국 황실 1대조
文祖 翼皇帝
문조 익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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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익황제 상상화. 권오창 작.
묘호 익종(翼宗) → 문조(文祖)
시호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
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
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
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
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본관 전주(全州)
능호 수릉(綏陵)
영(旲)[1]
덕인(德寅)
황후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부황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모후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출생지 창덕궁 대조전
사망지 창덕궁 희정당
생몰기간 음력 1809년 08월 09일 ~ 1830년 05월 06일
양력 1809년 09월 18일 ~ 1830년 06월 25일 (20세 총 7586일)
대리청정 기간 1827년 2월 ~ 1830년 5월 6일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요절
3. 이모저모4. 어진5. 가계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조선의 추존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조선의 제23대 국왕 순조의 세자이자, 제24대 국왕 헌종의 아버지. 고종 황제 때 1대조인 양아버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황제로 추존됐다.

헌종이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올린 묘호는 익종(翼宗)이었는데, 고종이 1899년 황제로 재추존하면서 문조(文祖)로 묘호를 바꿨다. '종(宗)'자를 쓴 기존 묘호 '익종'을 '조(祖)'자를 쓴 묘호로 격상하고자 하니 태조의 직계 조상 추존왕 중에 '익조'가 이미 있었기 때문.

다만 익(翼) 자는 묘호 대신 시호에 넣어 익황제(翼皇帝)라고 하였다. 황제로서 묘호를 문조로 격상하여 추존했음에도 보통은 이전에 받은 묘호인 익종이나,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효명세자는 참으로 정말 오랜만에 세자로 책봉된 정실 왕비 소생 원자였다. 왕비 소생 세자는 숙종 이후 처음. 경종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기 전에 태어났으니 일단은 서자였고, 영조는 무수리 소생이며, 효장세자, 사도세자는 모두 후궁 소생이다. 정조는 정실 소생이긴 하지만 부모를 왕과 왕비로 추존하지 못했고, 순조 역시 후궁 소생이다. 1819년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헌종을 낳았다. 그의 아내가 후에 고종수렴청정을 하는 신정왕후 조씨이다.

외모가 출중했고 대단히 영특하고 재능이 있었던 인물(한마디로 엄친아)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지내던 아버지 순조도 기대를 많이 걸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 제작에 관여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효명세자가 동궐도를 그리게 한 데에는 왕권 강화책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해석한다.

순조의 건강이 나빠지자,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고 이후 4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다. 왕이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크게 환영하였을 정도로 기대받았다.[2][3]

효명세자는 아직 어린 나이[4]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았으며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단속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정승도 마음대로 제수하는 등 대리청정에 걸맞은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때 기용된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등의 주요 연회들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들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직접 정재의 대부분을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재능을 드러냈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태양왕으로 부르며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도 나섰던 프랑스루이 14세와 견주기도 한다. 칼춤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이 사람.

2.2. 요절

그러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불과 22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덕일은 안동 김씨들의 독살설을 제기했지만 이 사람이 제기한 수많은 독살이 그렇듯 근거는 전혀 없다. 이덕일이 퍼뜨린 인식과 달리 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동안 그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가문간 싸움을 회피했던 김조순(1832년 졸)이 아직 살아있었으며, 각혈 후 어의들이 갖은 방도를 썼으며 재야에 있던 정약용까지 부르려고 했다. 그 때문인지 과로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다음은 순조가 직접 쓴 제문이다.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상제(上帝)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장차 우리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스럽지 못하여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윤사(胤嗣)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내가 장차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호소할까.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먼저 맺히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히며 곡(哭)을 하려고 하면 소리가 먼저 목이 메니, 천하(天下)와 고금(古今)에 혹시라도 국가를 소유하고서 나의 정경(情景)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내가 눈으로 네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귀로 네 음성을 듣지 못한 지 이미 60일이 지나고 두 절서(節序)가 바뀌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까지 잠이 들어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이 명명(冥冥)하고 막막(漠漠)하기만 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미련하여 참으면서 먹고 호흡하기를 태연히 하며 유유범범(悠悠泛泛)하게 여겨서인가. 네가 정말로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내가 과연 바야흐로 꿈을 꾸면서 깨지 않고 있는가. 네가 정말로 훌쩍 떠나버렸는가, 아니면 네가 장차 벌떡 일어나 돌아올 것인가. (父母)·(妻子)의 은혜가 여기에 있고 종묘(宗廟)·사직(社稷)의 중대함이 여기에 있으며 성궐(城闕)과 궁전(宮殿)의 거처가 여기에 있는데, 가기는 어디로 가며 가서는 누구와 친할 것인가. 해와 달은 그 운행이 변함이 없고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그 까닭도 변함이 없으며, 하늘은 높고 땅이 두터운 그 지극함도 변함이 없는데, 돌아온다는 기약은 언제이며 기약은 누구와 같이 알겠는가. 천하의 슬픔 가운데 어버이와 떨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네가 성효(誠孝)하면서 3년 동안 어버이 품에서 사랑받은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어찌 이와 같이 근심이 없을 수 있겠으며, 천하의 슬픔 가운데 자식이 없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나의 기구하고 험한 운명으로 갑자기 네 가지 곤궁한 것에서 첫번째 입장이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이 독(毒)하게 하는가. 슬프고 슬프다.

옛날 내가 10살 겨우 넘어서 황고(皇考)를 여의었는데 어렵고 큰 기업(基業)이 산처럼 자신을 누르는 듯하였으며 자신의 외로움과 나라의 위태로움이 마치 아침 저녁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지만, 1년, 2년 지나면서 많은 백성들 위에서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무엇이 있어서이겠는가. 특별히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말없이 도와주신 힘뿐이었다. 그러다가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내 마음에 즐거움은 남의 아비가 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니고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져 황고와 열성(列聖)의 유업을 의뢰하여 펼칠 수 있어서였다. 네가 또 이미 관례(冠禮)를 치루고 이미 장가를 들어 또한 이미 자식을 두었는데,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타고난 자질이 일찍 성취가 되었으므로, 마침내 내가 하던 정치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더니, 팔방(八方)에서 〈백성들이〉 목을 빼어 ‘은(殷)나라 때의 치도(治道)를 다시 창성하게 할 수 있으며, 주(周)나라 때의 천명(天命)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들 하였으니, 어찌 나 한 마음의 즐거움이며 한 몸의 경사라고 말하겠는가. 자못 천하 국가에서 드물게 있고 드물게 보는 일이었기에 내가 망령되이 근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었었는데, 하루아침에 재앙(災殃)을 내려 만사(萬事)가 기왓장처럼 깨어질 줄을 누가 생각이나 하였으랴. 종팽(宗祊)에 대한 우려와 나 자신에 대한 슬픔이 도리어 황고를 여의고 네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심함이 있다고나 할까. 슬프고 슬프다.

너의 청명(淸明)하고 수미(秀美)한 자질과 길선(吉善)하고 상화(祥和)한 기질은 하늘에서 태어나게 한 바가 쉽지 않은데, 그것을 꺾어버리는 데 이르러서는 갑자기 위급한 병(病)에 걸린데다 또 괴잡(乖雜)한 증세가 겹쳐 물이 흘러간 구덩이 같고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으니, 이치의 믿기 어려움이 어찌 더 갑작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빨랐는가. 어떻게 이른바 비자(丕子)의 책임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인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누구를 좇아서 바로잡겠으며,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누가 이를 주장하는가. 슬프고 슬프다. 고고(呱呱)하게 우는 세손(世孫)이 장차 할아버지를 아비같이 여길 터이며, 근심스러운 나의 여생은 장차 나라를 운명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네가 혹시라도 앎이 있다면 나의 이 말을 듣고서 틀림없이 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얼굴을 가리고 억울(抑鬱)해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슬픔은 너로 인한 슬픔일 뿐만이 아니고 나의 어질지 못하고 덕스럽지 못하여 죄를 자신에게 쌓아 나의 훌륭한 자식을 잘 보전하지 못하여 4백 년의 종묘 사직으로 하여금 위태롭기가 하나의 털끝 같지만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아! 애통하도다."
위 제문을 보면 자식 잃은 부모의 한이 절절히 느껴진다. 안 그래도 순조의 병은 깊어지는데, 오라비 효명세자의 뒤를 따라가듯 그 2년 후 순조의 두 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5] 순조는 두 해 뒤인 1834년 세상을 뜨게 된다.

아들 헌종까지 요절하면서 정조로부터 이어진 왕통은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그나마 사도세자의 자손인 철종이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 죽으면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혈통이 완전히 단절되고 그의 양자로 지정된 고종이 뒤를 이었다. 고종은 법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추존 문조, 즉 효명세자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수릉(綏陵). 본래 효명세자는 죽고 나서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지냈었지만 풍수에 관한 논의가 있어서 철종 때인 1855년에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 1890년 대왕대비였던 아내 신정왕후 조씨가 승하하자 함께 합장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동구릉을 방문하면 팸플릿을 하나 주는데, 이 팸플릿에 적혀 있는 추천 관람코스대로 동구릉을 관람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능이 바로 수릉이다. 사실 동구릉은 팸플릿의 추천 코스대로 수릉부터 관람하는 게 편하다.

3. 이모저모

효명세자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 조씨를 적극 기용했다는 말이 있으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그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다. 김조순의 아내(다시 말해 외할머니)가 죽자 직접 찾아가 문상하는 등 최고의 존중을 보여주었고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이 부임지에 첩을 데려가다가 난리난 적이 있었는데[6] 신하들이 김유근을 탄핵하자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탄핵한 신하들을 유배 보내 버렸다.[7] 물론 왕권 강화를 꿈꿨던 효명세자였기에 안동 김씨를 마냥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을 수 있으며 오히려 방심하게 했다가 동시에 제거할 타이밍만 잡으려 했을 수는 있긴 하다. 어쨌든 안동 김씨를 견제할 맘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행하진 않았다. 그리고 집권 기간 동안 풍양 조씨에 러브콜을 보낸 흔적도 없다. 효명세자는 순조 27년 2월 9일부터 대리청정에 들어가서 30년 5월 6일에 죽는데 그동안 김유근, 김이교, 김이재 등 안동 김씨들은 고위 관직을 다 해먹었다.

고종은 그의 양자로서 즉위했기 때문에(입승대통) 여러 차례 존호를 올렸다. 그래서 효명세자의 최종적인 정식 시호는 조선은 물론 세계를 통틀어 가장 긴 시호가 되었으며, 아래와 같다. '황제'라는 칭호를 제외하고 자그마치 113자.[8]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4. 어진

파일:attachment/hwomyung123.jpg
반소된 문조(효명세자)의 어진

현재 남아 있는 어진은 면복본(冕服本)으로, 왕세자의 면류관곤복인 8류면 7장복 차림으로 되어 있다. 복식 연구에서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지만 하늘은 그의 초상화까지 불운하게 만들었는지, 한국전쟁 이후 대화재로 초상화가 불에 탔는데, 하필이면 세로로 불탄 것이 얼굴을 포함해 타버리고 나머지만 남아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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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운 없는 건 아버지와 판박이라서, 순조의 초상화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것이라 이 또한 효명세자의 초상화 못지 않게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 그림도 얼굴 부분이 불타는 통에 역시 복구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위 그림인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보다시피 아들 헌종처럼 사망한 연령에 비해 상당히 노안인 얼굴이라는 것. 아무튼 그래서인지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얼굴을 배경으로 저 탄 초상화를 복원하자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실은 이미 복원한 초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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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문조(효명세자)의 어진

권오창 화백이 불에 탄 부분에 얼굴 부분을 그려넣었는데, 얼굴을 상상한 상상화인 관계로 문화재나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진 않았고, 권화백이 개인 소장하고 있다.

5. 가계

순조순원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동복 여동생 명온공주(明溫公主), 복온공주(福溫公主), 덕온공주(德溫公主)와 이복 여동생 영온옹주(永溫翁主)가 있다. 동복 남동생도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6. 대중매체에서

사극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시기를 살았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다뤄진 일은 드물다.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에서는 무풍지대에서 유지광, 야인시대에서 금강 등을 연기한 나한일이 연기했다.

네이버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가상의 여자주인공 홍라온과 궁중 로맨스를 이루는 왕세자 이영으로 등장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판에서는 박보검이 캐스팅됐다. 다만 드라마판에서는 효명세자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며 한자 이름이 다르게 표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여기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들 헌종 대신 순조 다음 왕이 된다. 아아, 실제 역사가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9]

명당(영화)에서도 잠시 등장하는데 김좌근의 음모로 영화 시작과 함께 독살된다.


[1] 이름을 보면 ,즉 + 大의 조합으로 되어있는 글자로 날 일(日)부수이다. 이는 효명세자와 항렬이 같은 다른 왕족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인데, 철종 형제들을 보면 첫째는 회평군 명(, + 月)), 둘째는 영평군 경응(( + 京)應, 초명은 욱(, + 立)), 셋째는 철종 변(, + 弁)이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 + 丙)' 이었다가 '승응(( + 升)應)'으로 바꿨고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 + 羲)'였고 남연군의 네 아들들의 이름은 흥녕군 창응((日 + 曰)應), 흥완군 정응((日 + 政)應), 흥선군 하응(( + 正)應)인데 흥인군 최응(( + 取)應)의 경우는 부수는 가로 왈(曰)로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였다.[2] 과거에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는 달랐다. 세종대왕 때는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세종이 "아파 죽겠다"라고 일갈하고 나서야 간신히 집행될 수 있었다. 숙종 때는 세자인 경종에게 대리청정이 명해지자 (오히려)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노론이야 좋아했지만 소론에서는 윤지완 등이 도끼 상소까지 하며 반대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었다. 영조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세손의 반대파 홍인한, 정후겸은 물론 김상철, 한익모 등 당시의 대신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 결사 반대했다. 근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는 남공철, 김재찬, 한용귀, 김사목, 이상황, 심상규 당시의 중신들이 전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며 왕의 서무 명령 비망기를 그야말로 '찬양'했다고 실록에 표현될 정도였다.[3] 순조실록 권28 순조 27년 2월 9일 을묘 4번째 기사.[4] 이때 아직 20살도 채 안 되었다.[5] 심지어 효명세자가 죽기 전 해에 순조의 차녀인 영온옹주도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다. 순조는 고작 4년 남짓한 세월 동안 사랑하는 자식들을 무려 네 명이나 잃은 것.[6] 웬 아전이 김조순과의 면담을 요청했다가 거부되자 뛰어들어 김조순의 서제부와 종 2명 그리고 주모를 베어버렸다.[7] 순조실록 권29 순조 27년 5월 24일 기해 1번째 기사.[8] 원래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의 34자였다. 그러나 1863년(즉위년), 1868년(요순우탕), 1875년과 1876년, 1878년, 1883년 음력 1월(임오군란 직후 / 신정왕후 조씨 왕대비 즉위 50주년), 1886년 11월, 그리고 황제로 재추존한 뒤엔 1890년 10월, 1892년 1월(조선 건국 500주년), 1902년(고종 즉위 40주년)로, 10차례에 각각 8자씩 80자를 추가했다.[9] 다만 헌종도 지지기반이 없는데도 재위 말년을 보면 알겠지만 혼자서 안동 김씨 세도를 흔들리게 만들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겠지만 지지기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