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조선/왕사
, 고려/역대 왕비
조선 왕비의 상징인 왕비 적의용 '금수오조원용보흉배'. 왕과 같이 오조룡이다. |
1. 개요
조선의 왕비를 정리한 문서.당연하지만 에밀리 브라운 같은 페이크 왕비는 기재하지 않는다. 후궁은 조선/역대 후궁 문서 참고.
2. 역대 왕후(추존 포함[1])
군주 | 시호·이름 | 출생 | 사망 | 아버지(본관) | 어머니(생모) | 능호 | 비고 | |
목조 | 효공왕후 이씨 孝恭王后 李氏 | ? | ? | 이공숙(평창) | 돌산군부인 정씨 | 안릉(安陵) | 익조의 모후, 개국 후 추존되었다가 태종대 추숭 | |
익조 | 정숙왕후 최씨 貞淑王后 崔氏 | ? | ? | 최기열(등주) | ? | 숙릉(淑陵) | 도조의 모후, 개국 후 추존되었다가 태종대 추숭 | |
도조 | 경순왕후 박씨 敬順王后 朴氏 | ? | ? | 안변부원군 박광(문주) | ? | 순릉(純陵) | 환조의 모후, 개국 후 추존되었다가 태종대 추숭 | |
환조 | 의혜왕후 최씨 懿惠王后 崔氏 | ? | ? | 영흥백 최한기(영흥) | 조선국대부인 이씨 | 화릉(和陵) | 태조의 모후, 개국 후 추존되었다가 태종대 추숭 | |
태조 | 신의고황후 한씨 神懿高皇后 韓氏 | 1337.9 | 1391.9.23 | 안천부원군 한경(청주) | 삼한국대부인 신씨 | 제릉(齊陵) | 조선 개국 전 사망. 정종·태종의 모후 | |
신덕고황후 강씨 神德高皇后 康氏 | 1356.6.14 | 1396.8.13 | 상산부원군 강윤성(곡산) | 진산부부인 강씨 | 정릉(貞陵) | 조선 왕조 최초의 왕비. 사후 태종에 의해 예우가 후궁격으로 격하, 현종 때 복권. | ||
정종 | 정안왕후 김씨 定安王后 金氏 | 1355.1.9 | 1412.6.25 | 증 문하좌시중 김천서(경주) | 삼한국대부인 이씨 | 후릉(厚陵) | 조선 왕조 최초의 왕대비 | |
태종 |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 1365.7.11 | 1420.7.10 | 여흥부원군 민제(여흥) | 삼한국대부인 송씨 | 헌릉(獻陵) | 양녕대군·효령대군·세종(충녕대군)·성녕대군의 모후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비(7남 5녀) | |
세종 |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沈氏 | 1395.9.28 | 1446.3.24 | 청천부원군 심온(청송) | 삼한국대부인 안씨 | 영릉(英陵) | 문종·세조(수양대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의 모후. 2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왕비(8남 2녀) | |
문종 | 현덕왕후 권씨 顯德王后 權氏 | 1418.3.12 | 1441.7.24 | 화산부원군 권전(안동) | 해주부부인 최씨 | 현릉(顯陵) | 단종의 모후. 세자빈 시절 죽어 문종 즉위 후 추존. 세조에 의해 폐위되었다 중종 때 복위. | |
단종 | 정순왕후 송씨 定順王后 宋氏 | 1440 | 1521.6.4 | 여량부원군 송헌수(여산) | 여흥부부인 민씨 | 사릉(思陵) | 사상 초유의 왕대비 폐출. 폐비 이후 가장 오래 생존. 숙종 때 복위. | |
세조 |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 1418.11.11 | 1483.3.30 | 파평부원군 윤번(파평) | 흥녕부부인 이씨 | 광릉(光陵) | 조선 왕조 최초의 수렴청정. 윤여필의 대고모, 윤지임의 증대고모 | |
덕종 | 소혜왕후 한씨 昭惠王后 韓氏 | 1437.9.8 | 1504.4.27 | 서원부원군 한확(청주) | 남양부부인 홍씨 | 경릉(敬陵) | 성종의 모후, 성종 즉위 후 왕대비로 격상, 이후 추존 | |
예종 | 장순왕후 한씨 章順王后 韓氏 | 1445.1.16 | 1461.12.5 | 상당부원군 한명회(청주) | 황려부부인 민씨[2] | 공릉(恭陵) | 인성대군의 모후 세자빈 시절 사망, 예종 즉위 후 추존 | |
안순왕후 한씨 安順王后 韓氏 | 1447.3.12 | 1498.12.23 | 청천부원군 한백륜[3](청주) | 서하부부인 임씨 | 창릉(昌陵) | 제안대군의 모후 | ||
성종 | 공혜왕후 한씨 恭惠王后 韓氏 | 1456.10.11 | 1474.4.15 | 상당부원군 한명회(청주) | 황려부부인 민씨 | 순릉(順陵) | 장순왕후의 여동생 | |
1455 | 1482.8.16 | 연산군의 모후, 폐비 후 사사됨 연산군에 의해 복권되었다 중종 때 추탈. | ||||||
정현왕후 윤씨 貞顯王后 尹氏 | 1462.6.25 | 1530.8.22 | 영원부원군 윤호(파평) | 연안부부인 전씨 | 선릉(宣陵) | 중종의 모후 | ||
연산군 | 거창군부인 신씨 居昌郡夫人 愼氏 | 1476.11.29 | 1536.4.8 | 중모현주 이씨[4] | - 연산군묘(燕山君墓) | 중종반정으로 폐위. | ||
중종 | 단경왕후 신씨 端敬王后 愼氏 | 1487. 2. 7 | 1557.12.7 | 익창부원군 신수근(거창) | 청원부부인 한씨 | 온릉(溫陵) | 최단 재위 왕비, 거창군부인의 질녀. 영조 때 복위. | |
장경왕후 윤씨 章敬王后 尹氏 | 1491.7.6 | 1515.3.2 | 파원부원군 윤여필[5](파평) | 순천부부인 박씨[6] | 희릉(禧陵) | 인종의 모후 | ||
문정왕후 윤씨 文定王后 尹氏 | 1501.10.22 | 1565.4.6 | 파산부원군 윤지임[7](파평) | 전성부부인 이씨 | 태릉(泰陵) | 명종(경원대군)의 모후, 명종 초 수렴청정 | ||
인종 | 인성왕후 박씨 仁聖王后 朴氏 | 1514.10.1 | 1577.11.29 | 금성부원군 박용(반남) | 문소부부인 김씨 | 효릉(孝陵) | 선조 대까지 생존했으나 대왕대비가 되지 못함. | |
명종 | 인순왕후 심씨 仁順王后 沈氏 | 1532.5.25 | 1575.1.2 | 청릉부원군 심강[8](청송) | 완산부부인 이씨 | 강릉(康陵) | 순회세자의 모후 선조 초기 수렴청정(7개월) | |
선조 | 의인왕후 박씨 懿仁王后 朴氏 | 1555.4.15 | 1600.6.27 | 반성부원군 박응순(반남) | 완산부부인 이씨 | 목릉(穆陵) | ||
인목왕후 김씨 仁穆王后 金氏 | 1584.11.14 | 1632.6.8 | 연흥부원군 김제남[9](연안) | 광산부부인 노씨 | 영창대군의 모후 | |||
1553.11.16 | 1577.6.13 | 김희철(김해) | 정경부인 권씨 | 광해군의 모후 광해군에 의해 추존되었다 인조 때 추탈. | ||||
광해군 | 문성군부인 류씨 文城郡夫人 柳氏 | 1575 | 1623.10.8 | - 광해군묘(光海君墓) | 인조반정으로 폐위 | |||
원종 | 인헌왕후 구씨 仁獻王后 具氏 | 1578.4.17 | 1626.1.14 | 능안부원군 구사맹(능성) | 평산부부인 신씨[10] | 장릉(章陵) | 인조의 모후, 남편의 추존으로 격상 | |
인조 | 인열왕후 한씨 仁烈王后 韓氏 | 1594.7.1 | 1635.12.9 | 서평부원군 한준겸(청주) | 회산부부인 황씨 | 장릉(長陵) | 소현세자·효종(봉림대군)의 모후 | |
장렬왕후 조씨 莊烈王后 趙氏 | 1624.11.7 | 1688.8.26 | 한원부원군 조창원(양주) | 완산부부인 최씨 | 휘릉(徽陵) | 예송논쟁의 중심 인물 | ||
효종 | 인선왕후 장씨 仁宣王后 張氏 | 1618.12.25 | 1674.2.23 | 신풍부원군 장유(덕수) | 영가부부인 김씨[11] | 영릉(寧陵) | 유일하게 외국 생활을 했던 왕비(청나라 볼모) | |
현종 | 명성왕후 김씨 明聖王后 金氏 | 1642.5.17 | 1683.12.5 | 청풍부원군 김우명(청풍)[12] | 덕은부부인 송씨 | 숭릉(崇陵) | 숙종의 모후 | |
숙종 | 인경왕후 김씨 仁敬王后 金氏 | 1661.9.3 | 1680.10.26 | 광성부원군 김만기(광산)[13] | 서원부부인 한씨 | 익릉(翼陵) | ||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 1667.4.23 | 1701.8.14 | 여양부원군 민유중(여흥) | 은성부부인 송씨[14] | 명릉(明陵) | 한때 폐위 후 생전에 복위 | ||
옥산부대빈 장씨 玉山府大嬪 張氏 | 1659.9.19 | 1701.10.10 | - 대빈묘(大嬪墓) | 경종의 모후, 한때 왕비였다가 다시 강등. 일반 궁녀부터 시작해서 왕비가 됨 | ||||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 1687.9.29 | 1757.3.26 | 경은부원군 김주신(경주) | 가림부부인 조씨 | 명릉(明陵) | |||
경종 | 단의왕후 심씨 端懿王后 沈氏 | 1686.5.21 | 1718.2.7 | 청은부원군 심호[15](청송) | 영원부부인 박씨 | 혜릉(惠陵) | 세자빈 시절 사망, 경종 즉위 후 추존 | |
선의왕후 어씨 宣懿王后 魚氏 | 1705.10.29 | 1730.6.29 | 함원부원군 어유구(함종) | 완릉부부인 이씨 | 의릉(懿陵) | |||
영조 | 정성왕후 서씨 貞聖王后 徐氏 | 1692.12.7 | 1757.2.15 | 달성부원군 서종제(달성) | 잠성부부인 이씨 | 홍릉(弘陵) | 최장 재위 왕비(33년) | |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 1745.11.10 | 1805.1.12 | 오흥부원군 김한구(경주) | 원풍부부인 원씨 | 원릉(元陵) | 순조 초기 수렴청정 | ||
진종 | 효순소황후 조씨 孝純昭皇后 趙氏 | 1715.12.14 | 1751.11.14 | 풍릉부원군 조문명(풍양) | 완흥부부인 이씨 | 영릉(永陵) | 남편의 추존으로 격상 | |
장조 | 헌경의황후 홍씨 獻敬懿皇后 洪氏 | 1735.6.18 | 1815.12.15 | 영풍부원군 홍봉한[16](풍산) | 한산부부인 이씨 | 융릉(隆陵) | 정조의 모후, 남편의 추존으로 격상 | |
정조 | 효의선황후 김씨 孝懿宣皇后 金氏 | 1753.12.13 | 1821.3.9 | 청원부원군 김시묵[17](청풍) | 당성부부인 홍씨 | 건릉(健陵) | ||
순조 | 순원숙황후 김씨 純元肅皇后 金氏 | 1789.5.15 | 1857.8.4 | 영안부원군 김조순(안동) | 청양부부인 심씨 | 인릉(仁陵) | 문조(효명세자)의 모후, 헌종, 철종 초 수렴청정 | |
문조 | 신정익황후 조씨 神貞翼皇后 趙氏 | 1808.12.6 | 1890.4.17 | 풍은부원군 조만영[18](풍양) | 덕안부부인 송씨 | 수릉(綏陵) | 헌종의 모후 고종 초 수렴청정, 왕비 중 최장수(83세), 조선 왕조 마지막 대왕대비 | |
헌종 | 효현성황후 김씨 孝顯成皇后 金氏 | 1828.3.14 | 1843.8.25 | 영흥부원군 김조근[19](안동) | 한성부부인 이씨 | 경릉(景陵) | 왕비 중 최단명(16세) | |
효정성황후 홍씨 孝定成皇后 洪氏 | 1831.1.22 | 1903.11.15 | 익풍부원군 홍재룡(남양) | 연창부부인 안씨 | 조선 왕조 마지막 왕대비[20]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태후 | |||
철종 | 철인장황후 김씨 哲仁章皇后 金氏 | 1837.3.23 | 1878.5.12 | 영은부원군 김문근[21](안동) | 흥양부부인 민씨 | 예릉(睿陵) | 조선 왕조 마지막 '대비'[22] | |
고종 | 명성태황후 민씨 明成太皇后 閔氏 | 1851.9.25 | 1895.8.20 | 여성부원군 민치록[23](여흥) | 한창부부인 이씨 | 홍릉(洪陵) | 을미사변 때 일본에 의해 시해 | |
순종 | 순명효황후 민씨 純明孝皇后 閔氏 | 1872.10.20 | 1904.9.28 | 여은부원군 민태호[24](여흥) | 진양부부인 송씨 | 유릉(裕陵) | 대한제국의 최초의 황태자비 태자비 시절 사망, 순종 즉위 후 추존 | |
순정효황후 윤씨[25] 純貞孝皇后 尹氏 | 1894.8.20 | 1966.2.3 | 해풍부원군 윤택영(해평) | 경흥부부인 유씨 | 조선 왕조 마지막 왕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
2.1. 기타(존령)
군주 | 추증 작위 | 시호·이름 | 출생 | 사망 | 아버지(본관) | 어머니(생모) | 능호 | 비고 |
시조고 | 비(妣)[26] | 시조비 김씨 始祖妣 金氏 | ? | ? | 김은의(강릉) | ? | 조경묘 | 시조고 이한의 부인. 영조 추증 |
선조고 (先祖考) | 비(妣) | 선조비 이씨 先祖妣 李氏 | ? | ? | 이강제(삼척) | ? | 영경묘 | 선조고 이양무의 부인. 고종 추증 |
3. 이야깃거리
- 조선의 역대 왕비의 특징으로, 성씨 중 이씨가 없다.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로 왕가는 물론 사대부, 일반 중인층에서도 동성동본 간의 혼례를 터부시했기 때문. 왕조 초기에 정통성 강화 목적으로 근친혼이 장려되었던 고려 왕실과 정반대인 셈. 이에 더해 세종 시절, "본관이 다르더라도 성씨가 같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논조의 국시를 내리면서 당시 세자(문종)의 혼례부터는 오얏 이씨 성을 쓰는 규수는 동성이본이더라도 아예 간택의 대상에서 빠지게 된 것. (물론 후궁은 상관없다) 그리고 이 즈음 조선 왕실의 가계도인 선원계보, 종친회인 종정시 등이 체계화되면서 이 불문율은 조선(대한제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지켜졌다. 따라서, 조선의 왕비 중 이씨는 추존된 왕인 목조의 효공왕후 이씨와, 본래 일본인이나 남편의 성씨를 따른 자행비[27], 둘 뿐이다.
- 조선 전기 예종 ~ 연산군 때처럼,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에 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선대 왕비(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대왕대비 위 혹은 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고,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 - '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의 3단계로 재편되었다. 그래서 효정왕후와 철인왕후는 이전 왕비들이 왕대비에서부터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에서부터 존봉되었다.
- 왕세자빈(왕세손빈) - 왕비 - 왕대비 코스를 모두 밟은 왕비는 총 8명이다.
- 혼인 당시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뻘 되는 왕과 결혼한 왕비로 인목왕후 김씨[37], 장렬왕후 조씨[38], 인원왕후 김씨[39], 정순왕후 김씨[40], 순정효황후 윤씨[41]가 있다.
- 자식을 가장 많이 낳은 왕비 TOP5
- 추존 왕후까지 합친 51명의 조선 왕비들 중 아들을 3명 이상 낳은 왕비는 13명 밖에 안된다.
이들 중에서도 아기 때나 혼인하기도 전에 죽어 봉군되지 못한 왕자들을 제외하면 8명 밖에 없다.
- 수렴청정 경험이 있는 왕비는 총 6명이다.
- 조선을 떠나서 해외에 나간 경험이 있는 왕비는 공식적으론 대군부인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적이 있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유일하다. 동북면에 거주했던 추존비 효공왕후 ~ 신의왕후는 동북면이 당시에는 고려의 영토가 아니어서 약간 애매한 편. 그 외엔 본래 일본인 출신이고 오랫동안 일본에서 거주했던 자행비가 있다.
- 중전이 된 뒤 폐출되었다가 생존한 상태에서 복위한 왕비는,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가 유일하다. 그 외에 폐출된 왕비 중 복권된 케이스는 모두 죽은 뒤에 추존된 형태.
- 서로 3촌 이내의 왕비들로는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언니)와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동생),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고모)와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 신씨(조카)가 있다.[70]
- 가장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인물은 헌종의 첫번째 왕비 효현왕후로 10살에 왕비가 되었다. 여담으로 가장 어린 나이에 사망한 조선의 왕비이기도 하다.(향년 16세)
- 이름이 알려지거나 일부분만 알려진 왕비들은 다음과 같다.
《해평윤씨대동보(海平尹氏 大同譜)》에 기재되어있다.]
- 외조부가 왕자 혹은 왕자의 후손이여서 시가와 외가가 전주 이씨인 왕비도 있다.
4. 조선 왕비 배출 가문 순위
순위 | 성씨 | 왕비 |
1위 | 청주 한씨 | 6인 |
2위 | 파평 윤씨 | 5인 |
3위 | 여흥 민씨 | 4인 |
4위 | 청송 심씨, 경주 김씨, 신 안동 김씨 | 3인 |
5위 풍양조씨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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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탈되었을 경우 취소선 처리.[2] 정순왕후의 생모인 여흥부부인과는 친사촌 관계다.[3] 소혜왕후의 8촌 오빠이다[4] 세종 4남 임영대군의 딸이다.[5] 세조의 장인인 윤번의 증손이다.[6] 박원종의 누이로, 월산대군의 처제이기도 하다.[7] 세조의 장인인 윤번의 현손. 중종의 장인인 윤여필의 재종질(7촌 조카)이다.[8] 5대조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다[9] 증조부가 김전이고, 종조부가 김안로다.[10] 신립의 여동생이다.[11] 김상용의 딸[12] 대동법 실시에 결정적 역할을 한 명재상 김육의 차남.[13]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형이다.[14] 송준길의 딸이다.[15] 6대조가 명종의 장인 심강이다.[16] 고조부 홍주원은 선조와 인목왕후의 사위다.[17] 고조부가 현종의 장인 김우명이다.[18] 조선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소개한 조엄의 손자이다.[19] 김조순의 재종질이다.[20] 따지고 보면 헌종, 철종, 고종 3명의 왕을 모셨으므로 대왕대비에 해당하나, 후술하겠지만 대비 작호가 왕대비 - 대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비 - 왕대비 - 대왕대비의 3단계로 바뀌어 왕대비로 계속 유지됨.[21] 김조순의 재종질이며, 김조근의 8촌 동생이다.[22] 헌종 때까지 '대비'라는 말은 '왕대비'의 준말로 쓰였다. 대비의 정식 명칭이 왕대비였던 것이다. 그런데 철종 즉위 후 왕실 웃어른이 3명(순원왕후 - 신정왕후 조씨 - 효정왕후)이 되면서 대왕대비 위나 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왕대비' 아래에 '대비' 자리를 만들었고, 효정왕후는 '대비'로 존봉되었다. 조선 왕조 최초의 '대비'인 것이다. 또 고종 즉위 후에도 3명의 선대 왕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철인왕후도 효정왕후처럼 '왕대비'가 아닌 '대비'로 존봉되었다. 철인왕후 다음으로는 '대비'로 존봉된 왕비가 없었기에 그녀는 마지막 '대비'가 되었다. 여담으로 성종 때 정희왕후 - 소혜왕후 - 안순왕후의 3대비가 생존해 있었으나, 소혜왕후 - 안순왕후의 관계는 동서지간으로 신정왕후 - 효정왕후처럼 고부지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경우 같은 왕대비지만 서열을 두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23] 숙종의 장인 민유중의 5대손[24] 명성황후와 12촌간이다. 숙종의 장인 민유중의 6대손[25] 순정효황후와 영친왕 부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사망했기에 정식 시호가 없다. 대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를 쓴다.[26] 죽은 어머니 비. 왕비(王妃)가 아닌 여자 조상을 높여 부르는 말임.[27]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결혼했기에 좀 복잡하다. 보통은 이름인 이방자라고 불리며, 굳이 조선(대한제국)에 맞추자면 세자빈(황태자비).[28] 왕세자빈 덕빈(德嬪) - 왕비 덕비(德妃) - 왕대비 순덕왕태비(順德王太妃)[29] 왕자부인 정녕옹주(靖寧翁主) - 왕세자빈 정빈(貞嬪) - 왕비 정비(靜妃) - 왕대비 후덕왕태비(厚德王太妃)[30] 왕세자빈 - 왕비 -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31]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 - 왕세자빈 - 왕비 -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32] 왕세자빈 - 왕비 -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33] 유일하게 처음부터 왕세자빈으로 시작해서 왕비 자리에 오른 후 본인의 아들이 왕이 되어 왕대비 자리까지 올랐다.[34] 왕세자빈 - 왕비 - 경순왕대비(敬純王大妃)[35] 왕세손빈 - 왕비 - 왕대비[36] 황태자비 - 황후 - 이왕비(李王妃) - 이왕대비(李王大妃)[37] 남편 선조의 차녀 정혜옹주와 동갑이고 아버지 김제남이 남편 선조보다 10살 어렸다.[38] 남편 인조의 4남 용성대군과 동갑이다.[39] 남편 숙종과 아버지 김주신은 1661년 생으로 동갑이다.[40] 할아버지 김선경이 남편 영조보다 5살 어렸다.[41] 아버지 윤택영이 남편 순종보다 2살 어렸다.[42] 이 중 장남, 차남, 3남, 5녀는 일찍 죽었다.[43] 이 중 장녀는 일찍 죽었는데 세종이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정소공주(貞昭公主)로 추증해 주었다.[44] 이 중 장남, 3남, 장녀, 5녀는 일찍 죽었다. 장녀는 후에 조카 숙종이 숙신공주(淑愼公主)로 추증해 주었다.[45] 6남은 조선 건국 전 미혼인 상태로 사망하였다. 형 태종이 문안군으로 추증해 주었다가 후에 고종이 덕안대군으로 추증해 주었다.[46] 이 중 장남, 4남, 차녀, 3녀는 일찍 죽었고 차남 폐세자와 3남 폐창녕대군은 정식 책봉을 받았지만 미혼인 상태로 살해당했다. 막내를 임신하여 해산이 임박하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정작 해산 기록이 없는 걸 보면 유산한 것으로 추정된다.[47] 이 중 4남, 5남, 6남, 장녀는 일찍 죽었다. 5남과 6남 사이에 임신을 하여 산실청 설치 논의까지 있었으나 해산 기록이 없는 걸 보면 유산한 것으로 추정된다.[48] 막내아들 덕안대군은 미혼으로 사망하였다.[49] 장남, 차남, 3남 요절[50] 장남, 3남 요절[51] 전부 요절, 그 중 폐세자 이고는 10살 때 피살당해 시호가 따로 없었고 폐창녕대군은 어린 나이에 봉군되었으나 5살 때 피살당함.[52] 장남, 3남 요절[53] 4남, 5남, 6남 요절, 그 중 4남 용성대군은 5살 때 죽었지만 봉군되었다.[54] 장남, 3남 요절[55] 장남, 3남, 4남 요절[56] 공주 둘을 낳았는데 장녀는 1년을 넘기지 못했고 차녀는 생후 이틀만에 사망했다.[57] 태조비 신의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비 장순왕후와 안순왕후, 성종비 공혜왕후, 인조비 인열왕후[58] 세조비 정희왕후, 성종비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와 문정왕후[59] 함안 윤씨가 파평 윤씨의 함안파로 합본되었기 때문에 성종비 폐비 윤씨도 파평 윤씨에 속한다.[60] 태종비 원경왕후, 숙종비 인현왕후, 고종비 명성황후, 순종비 순명효황후[61] 순조비 순원왕후, 헌종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62] 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63] 정종비 정안왕후, 숙종비 인원왕후, 영조비 정순왕후[64]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후궁이었으나 세자빈 봉씨가 폐출 된 후 세종의 결정으로 세자빈이 되었다가 사후 왕후로 추존되었다.[65] 당시 세자였던 예종의 후궁이었으나 세조의 결정으로 왕비가 되었다.[66] 종2품 숙의였다가 정비 공혜왕후가 사망하자 성종과 삼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의 결정으로 왕비가 되었다.[67] 종2품 숙의였다가 윤씨가 폐출되자 성종과 삼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의 결정으로 왕비가 되었다.[68] 종2품 숙의였다가 왕비가 되었다.[69] 유일하게 간택 후궁이 아니라 궁녀 - 승은 후궁 - 왕비 단계를 거쳤다. 장희빈 이후 숙종이 후궁의 중전 격상을 원천 금지하면서 후궁 출신 왕비는 없다.[70] 고모와 조카가 형제들과 혼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1450년 생으로 신승선의 장남이었고 단경왕후의 고모인 폐비 신씨는 1476년 생으로 신승선의 막내딸이었기 때문이다.[71]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윤씨(尹氏)는 파주인(坡州人)이다. 아버지 윤호(尹壕)가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있을 때인 임오년 6월 무자일에 그 고을 관아(官衙)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 《중종실록》 - 중종 25년(1530)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72] 《선원록》에 의하면 문성군부인의 두 언니 이름은 옥영(玉英), 중영(重英)이고 여동생 이름은 소영(小英)이다.[73] 《선원록》에 의하면 인헌왕후의 언니들 이름은 경완(敬婉), 효완(孝婉), 정완(靜婉), 장완(莊婉)이고 여동생 이름은 신완(愼婉)이다.[74] 《선원록》에 의하면 장렬왕후의 두 언니 이름이 수임(壽任)과 종임(終任)이다.[75] 《선원록》에 의하면 인경왕후의 두 여동생 이름이 한혜(漢惠)와 복혜(福惠)이다.[76]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 단암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丹巖漫錄)》에 적혀 있다.[77] {{{#!wiki style="margin: -5px -10px[78] 조선 제4대왕 세종의 적4남[79] 조선 제3대왕 태종의 적차남 효령대군의 고손[80] 조선 제4대왕 세종의 서차남 계양군의 증손[81] 조선 제11대왕 중종의 서4남 영양군의 고손[82] 조선 제3대왕 태종의 적장남 양녕대군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