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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 貞聖王后 | |||
홍릉 전경 | |||
출생 | 1693년 1월 2일 (음력 1692년 12월 7일) | ||
조선 한성부 가회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일대) | |||
사망 | 1757년 3월 23일(음력 2월 15일)[1] (향년 64세) | ||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관리합[2]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능묘 | 홍릉(弘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제빈 | ||
1721년 11월 4일 ~ 1724년 10월 5일 | |||
조선 왕비 | |||
1724년 10월 5일 ~ 1757년 3월 2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대구 서씨 | |
부모 | 부친 달성부원군 서종제 (達城府院君 徐宗悌, 1656 ~ 1719) 모친 잠성부부인 우봉 이씨 (岑城府夫人 牛峰 李氏, 1660 ~ 1738) | ||
형제자매 | 2남 4녀 중 3녀 | ||
배우자 | 영조 | ||
자녀 | |||
봉작 |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 → 왕세제빈(王世弟嬪) → 왕비(王妃) | ||
전호 | 휘령전(徽寧殿) | ||
존호 |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 (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 | ||
휘호 | 단목장화(端穆章和) | ||
시호 | 정성왕후(貞聖王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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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정비.조선의 역대 왕비 중 유일하게 왕세제빈에서 중전으로 진봉한 인물이자, 승하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왕비로서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인물이다.
성씨는 서씨이며 본관은 대구 달성군이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며 1692년(숙종 18년)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년), 12살의 나이에 11살 연잉군 이금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책봉되고, 1721년(경종 1년), 조선 20대 국왕 경종이 이복동생 연잉군 이금을 왕세제로 책봉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된다. 1724년(경종 4년), 경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였고, 이에 따라 임금의 상징인 어보(御寶)를 이어받은 남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식 왕비가 되었다. 남편과의 불화로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다. 1757년(영조 33년) 2월 15일, 창덕궁 대조전 관리각(관리합)에서 향년 6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능호는 홍릉(弘陵)이다.
2. 생애
2.1. 세제빈 시절
야사에는 정성왕후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에게 시집온 첫날 있었던 일 때문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혼인 첫날밤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정성왕후가 무심코 "반가에서 태어난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보기에는 이게 소박맞을 만큼 잘못한 말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마누라의 대답을 출신이 미천한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숙빈 최씨는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출신이 불분명해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손마디와 뼈마디도 굵고 손이 되게 거칠었다고 한다.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서 영조가 정성왕후를 미워하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서덕수는 다름아닌 경종을 죽이고 연잉군을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두시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조는 이복형 경종 앞에서 폐세제를 자처하며 무릎 꿇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저하를 위해 모의한다는 서덕수의 발언을 세상에 알린 게 다름아닌 영조인 만큼 저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삼수의 옥을 수사하던 도중에 목호룡의 고변에서 영조의 첫 아들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의 죽음도 서덕수가 경종 암살을 위해 구한 독약의 시험 대상 겸 정성왕후의 경쟁자 제거를 위해 정빈 이씨에게 독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2.2. 왕비 시절
1737년(영조 13년) 3월 10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는 신하들이 "중궁전에 들어가는 진상품보다 현빈궁[3]에 들어가는 진상품이 많아 중궁전의 체면이 맞지 않으니 진상품을 늘리자"고 하자 "현빈궁에 기거하는 나인이 많아 그런거"라며 거부하고 "중궁전에 들어가는 약에 대한 표지를 내리는 게 매번 늦어 중궁전으로 들어가는 약이 들어가는 것이 매번 늦어진다"고 하자 "도제조가 서씨 일가의 서명균인데 설마 늦겠냐"며 "이미 이전에 서명균에게 중궁전의 약은 그들 집안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고 변명했다. 신료들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뭐 확인해보겠습니다."라는 반응이었다.두 부부 사이가 최악인 건 궁궐 내에서도 공공연한 일이었는지 정성왕후는 승하하기 14년 전인 1743년(영조 19년)부터 영조에게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담증 가지고 엄살 부린다"고 말을 씹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용태(병의 증상)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라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내시에게 대신 보고할 정도였다.[4]
1752년(영조 28년) 11월 23일에는 "중전의 회갑인데 하례를 드리게 하자"는 우의정 김상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사도세자에게 "네 엄마[5]의 회갑이랍시고 잔치까지 크게 벌일 것이 있느냐"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다
임금이 대신과 예조의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였다.
문학 박사눌(朴思訥)이 가서 고한 뒤에 또 청대하니, 임금이 불러 물었다. 박사눌이 말하기를,
"동궁이 이 하교를 받고 매우 실망하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는 이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구나."
하였다.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11월 23일 (경진) 1번째기사.
임금이 대신과 예조의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였다.
문학 박사눌(朴思訥)이 가서 고한 뒤에 또 청대하니, 임금이 불러 물었다. 박사눌이 말하기를,
"동궁이 이 하교를 받고 매우 실망하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는 이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구나."
하였다.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11월 23일 (경진) 1번째기사.
그로부터 15일 후 영조는 양위 파동을 벌여 홍역을 앓다 나은 지 1달밖에 안 됐던 병약한 사도세자를 눈 밭에서 양위를 한다는 전교를 거두어 달라게끔 석고대죄 제대로 시켰다.
2.3. 사망 후
1757년(영조 33년), 승하 직전이나 당시, 《영조실록》과 《한중록》에 따르면 심하게 각혈을 하고 팔다리가 심히 부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위궤양에 부정맥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 걸로 추정되는데 당시 남편 영조의 태도가 그야말로 막장이다.중궁이 피를 토하여 약방에서 주원에 옮겨 직숙하다
중궁전(中宮殿)이 편찮은 까닭에 약방에서 주원(廚院, 사옹원)에 옮겨 직숙하였다.
당시 곤전(坤殿)이 피를 토한 것으로 인하여 원기(元氣, 심신의 활동력)가 갑자기 가라앉았는데,
연달아 삼다(蔘茶, 인삼차)를 올렸지만 조금의 동정(動靜)이 없었으므로, 상하(上下)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4일 (병자) 1번째 기사
중궁전(中宮殿)이 편찮은 까닭에 약방에서 주원(廚院, 사옹원)에 옮겨 직숙하였다.
당시 곤전(坤殿)이 피를 토한 것으로 인하여 원기(元氣, 심신의 활동력)가 갑자기 가라앉았는데,
연달아 삼다(蔘茶, 인삼차)를 올렸지만 조금의 동정(動靜)이 없었으므로, 상하(上下)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4일 (병자) 1번째 기사
영조는 죽은 마누라의 빈소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우연히 같은 날 사망한 사위 정치달(화완옹주의 남편)의 문상을 갔다. 이는 궁중 예법에도 어긋나고 인간적으로도 너무 지나친 처사라 대신들과 대간이 경악하여 심하게 반대했지만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遞差)[6]해버리면서까지 인정머리 없이 강행했다. 실록을 보면 영조가 '엄중한 하교'를 여럿 내렸다고 나오는데, 정황상 신하들에게 심각한 폭언을 퍼부은 것을 윤색해서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성위 정치달이 졸하자 곡반을 하고, 이를 만류한 삼사 신하를 체차시키다
이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 화완옹주의 남편)이 졸(卒)하였다. 예단(禮單)이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중궁전(中宮殿)이 승하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장차 곡반(哭班)에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중략)
"이렇게 망극(罔極)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임금이 잇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으나, 이최중(李最中)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힘껏 간쟁하였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최중에게 물러나도록 명하였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은 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합문(閤門)을 닫고 마침내 보련(步輦)으로 연영문(延英門)을 나갔다.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에서 앞으로 나와 다투어 고집하자, 임금이 또 모두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삼사의 신하를 중도 부처(中途付處, 유배 죄인의 평소 공로 등으로 정상 참작하여 중간 지점에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유배형) 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단지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중략)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5일 (정축) 3번째기사.
이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 화완옹주의 남편)이 졸(卒)하였다. 예단(禮單)이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중궁전(中宮殿)이 승하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장차 곡반(哭班)에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중략)
"이렇게 망극(罔極)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임금이 잇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으나, 이최중(李最中)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힘껏 간쟁하였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최중에게 물러나도록 명하였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은 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합문(閤門)을 닫고 마침내 보련(步輦)으로 연영문(延英門)을 나갔다.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에서 앞으로 나와 다투어 고집하자, 임금이 또 모두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삼사의 신하를 중도 부처(中途付處, 유배 죄인의 평소 공로 등으로 정상 참작하여 중간 지점에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유배형) 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단지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중략)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5일 (정축) 3번째기사.
이후 불과 한 달 후인 3월 26일, 지금까지 세자를 누구보다 아껴 준 대왕대비 인원왕후마저 승하하면서 완충장치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가 정순왕후 김씨를 배려한 탓이었다.[7] 영조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그렇게 땅에 묻힌 이후에도 정성왕후는 편히 지내지 못했는데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때 그 명분으로 가져온 이유가 정성왕후의 영혼이 사도세자가 변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하며 이걸위해 정성왕후의 위폐가 있던 창경궁 문정전(사건 당시에는 정성왕후의 위폐를 모신다는 이유로 휘령전으로 부름)에서 참배하고 이후 사도세자의 폐세자와 뒤주형 모두 문정정 앞마당에서 이루워졌다. 영조가 직접쓴 사도세자의 폐세자를 지시한 반교문에도 영빈이씨와 더불어 5년전에 사망한 정성왕후의 귀신이 요청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영조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는 행태였다.
3. 가계
- 친정(달성 서씨)
4. 여담
-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라 단명했을 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로는 장수했다. 1757년(영조 33년), 승하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65세.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다. 임오화변이 발생했을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가 마지막으로 찾은 장소가 바로 정성왕후의 위패가 있는 창경궁 휘령전이었다. 두 사람이 위패에 절을 한 직후 갑자기 영조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가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지간 사이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고 주장하며 궁을 봉쇄하고 사도세자를 처단하게 된다.
- 남편 영조와는 사이가 안 좋다 못해 최악 그 자체였다.[9][10] 영조는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 변두리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문안이나 안부 등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환갑 잔치도 숙의 문씨의 건방진 말꼬라지 때문에 인원왕후가 버르장머리 고쳐주겠다고 사도세자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보는 앞에서 회초리로 종아리 때리다가 영조한테 발각돼서 영조가 역성을 들다가 결국 파토났다. 심지어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영조는 늑장부리면서 와서는 그 와중에 슬퍼하는 사도세자에게 "네 옷 꼬락서니가[11]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 사도세자와는 친아들이 아님에도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자녀를 낳지 못해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인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돌봤다고 한다. 실제로 정성왕후는 살아 생전에 사도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생모였던 후궁 영빈 이씨의 자식에서 중전 정성왕후의 자식으로 양자 입적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시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법적인 할머니 되는 인원왕후와 더불어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보호하는 인물이었으며, 사도세자 역시 편집증적인 스타일과 냉혹한 성격의 영조한테 학대당하는 핍박 속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어머니 정성왕후에게 의지하며 극진히 대우했다고 한다.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사도세자가 밖에서 "소자가 왔사옵니다"라고 말하며 엎드려 통곡했을 정도다. 어찌보면, 정성왕후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중압감을 주는 처지를 보고 동병상련을 느꼈을 수도 있다. 다만 말이 아들이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마흔둥이(늦둥이 아들)었기 때문에, 정성왕후와도 나이가 40년 이상 차이가 나서 당시 기준으로는 할머니와 손자뻘이 된다.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와도 그럭저럭 관계가 괜찮았다고 한다.
- 종합적으로 보면 폐비가 되지 않았을 뿐, 내쫓기지 않은 조선의 왕비 중 제일 비극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십 년 동안 남편인 영조에게 계속 홀대받은 걸로도 모자라, 영조는 정성왕후의 죽음을 그녀가 친자식처럼 아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말실수를 한 것이든 조카 때문에 곤란에 처한 것이든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이든, 정성왕후가 크게 잘못한 것은 사실상 없는데도 영조 혼자 착각하고 의심하여 홀대를 수 십 년 동안이나 받았다. 죽은뒤에서 그 뒤가 편치못해 남편이 자기 양아들을 죽이는 명분꺼리로 이용되고 양아들이 죽는 과정을 자기 위폐 앞에서 봐야했던 왕비였다. 어찌보면 못난 남편 탓에 폐비가 되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은 남편과 사이가 괜찮았던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12]보다 여자로서는 더 비참했다고 볼 수 있다.
5. 대중매체에서
무수한 영조의 출연작들에 비해 출연 빈도가 적다. 거꾸로 말하면 이하의 작품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고증과 구색엔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5.1.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 편 - 김애경
실제 역사와는 반대의 모습으로 나온다. 영조와 사이도 괜찮게 나오며 홀대하는 모습도 나오지 않는다. 되려 숙의 문씨가 승은을 입자 더 화려한 가체를 올리거나 가체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절대 내릴수 없다며 대왕대비전과 숙의 문씨를 찾아다니는 등 깨방정의 모습을 보인다. - 대왕의 길 - 문예지
비록 역사처럼 영조에게 홀대받지만 작중 인원왕후와 함께 영조에게 끊임없이 간언을 하며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과 문제들을 중재, 해결하려 노력한다. 그 중에서도 26화에서 화재 사건을 계기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세자 시키려는 것을 인원왕후와 함께 간곡히 간언하여 막고 후에 같이 세자를 위로하며 슬픔을 나누는 걸 마지막으로 인원왕후와 함께 극에서 퇴장한다. 이후, 인원왕후와 함께 직접적인 승하장면이 생략되었기 때문.[13] - 동이 - 신규리(아역), 정모레(성인)
연잉군 시절 영조와 갓 혼례를 맺은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나오며[14] 별다른 역할없이 인원왕후에게 문후(문안 인사)를 올리러 가는 모습 정도로만 등장한다. 마지막화에서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함께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 해치 - 최수임
5.2. 영화
- 상의원 - 박신혜
- 사도 - 박명신
2010년대에 임오화변을 다룬 대표 작품인 이 영화를 통해 정성왕후를 알게 된 사람이 적지않게 많다.
실제 역사대로 초반부에 시어머니인 인원왕후와 함께 의붓아들인 사도세자를 어린 시절부터 매우 귀여워하며 예뻐한다. 또한, 남편 영조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점도 묘사된다. 극중에서 영빈 이씨가 영조의 성격이나 버릇을 갓 시집온 세자빈 홍씨에게 알려주는 부분에서도 자기는 총애받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씁쓸해한다.[15] 하지만 영빈 이씨가 환갑 잔치까지 건의해줄 만큼 대접을 해주는지라, 둘 사이엔 큰 다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다. 노년에 거동이 힘들 때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한 것도 다름아닌 영빈 이씨다.[16] 실제 역사에서는 대왕대비인 인원왕후보다 한 달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속에서는 인원왕후가 먼저 시름시름 앓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며 인원왕후와 달리 승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장면이 없다.[17] 사도세자의 광증이 발발한 이유에는 자신을 아껴주던 정성왕후의 죽음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나마 등장한 이 영화에서도 실제 역사보다 비중이 낮게 책정된 편.[18][19] - 궁합 - 김분례
6. 참고 문서
- 경빈 박씨
- 경종
- 경종실록
- 경희궁
- 사도세자
- 선의왕후
- 숙빈 최씨
- 숙의 문씨
- 숙종
- 숙종실록
- 영빈 이씨
- 영조
- 영조실록
- 인원왕후
- 임오화변
- 정빈 이씨
- 정순왕후
- 정조
- 정조실록
- 조선/왕사
- 창경궁
- 창경궁 휘령전
- 창덕궁
- 한중록
- 홍릉
- 화완옹주
- 효순왕후
- 효장세자
- 혜경궁 홍씨
[1] 이 날은 영조의 서9녀인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먼저 죽은 날이기도 한데, 정처(正妻)와 사위가 한 날에 죽은 줄초상이 난 것. 근데 영조는 중궁전의 상례를 주관해야할 때에 사위가 죽어 딸 집에 가겠노라고 고집부려 난리가 나기도 했다. 영조와 정성왕후 간의 사이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2] 창덕궁 대조전 서쪽 행각의 방 중 하나[3] 효장세자의 세자빈인 현빈 조씨의 거처다.[4] 한마디로 당시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영조의 부부관계가 파탄났다는 걸 다들 알았다는 뜻이다.[5] 사도세자를 직접 낳은 생모는 영빈 이씨지만, 왕의 자녀는 모두 공식적으로 왕비의 자녀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된다.[6]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7] 과거 문정왕후도 "중종이 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나 남편에 대한 정은 있었던 모양.[8] 이현모(李顯模)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릉 오른쪽의 비워 놓은 자리는 곧 대행 대왕께서 유언하신 곳으로서, 선왕께서 오늘날의 처지를 미리 염려하여 평소에 처리해 놓기를 지극히 자세하고 원대하게 하신 것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 《정조 즉위년 3월 22일 계사 1번째기사》[9] 똑같이 정비이면서 자식을 못낳았던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도 남편 선조와 서먹했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10] 놀랍게도 광해군과 사도세자 둘 다 자신을 아껴주던 법적 어머니인 정비(의인왕후, 정성왕후)와 사이가 좋았으면서 적모가 사망하면서 궁궐 내에 의지할 데가 없어지고 아버지에게 핍박받아서 결국 삐뚤어지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도세자는 여기에 할머니인 인원왕후까지 잃고 정신질환까지 앓고 있던 상황이라 그 정도가 더 심했지만..[11] 옷 댓님(바지 밑에 묶는 끈)을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면서 풀린 건데, 아버지라는 작자가 돌아간 아내에 대한 조문은 커녕 마침 조문하면서 엎드려 우는 아들의 통곡소리를 듣고 꼴뵈기 싫었는지 옷 댓님 풀린거 가지고 꼬투리 잡아 뭐라 한 것이다.[12]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여러 명 낳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던 데다가 사화를 일으키며 미쳐 돌아가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해도 무사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에 연산군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 교동도에 유배, 위리안치당하여 병으로 죽기 직전에 "중전(폐비 신씨)이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고 한다.[13] 영화 사도에서처럼 간접적으로 죽은 게 언급된다.[14] 극에서 혼례를 맺기 전 동이가 직접 아들인 연잉군의 혼 처를 구하기위해 서종제 집으로 찾아가 여식을 청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딸에게 맑고 총명한 눈빛을 지녔다고 칭찬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영조에게 홀대받고 미움받는 사이였다는 건 드라마와 성격이 완전 틀리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실제 역사를 대입해 보았을 때 생모인 숙빈 최씨의 의중을 연잉군 시절인 영조가 모를 수 있을까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 다만 연잉군 가례 후 출합으로 내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종의 궁여지책처럼 묘사되기도 한다.[15] 이는 영화 내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분명히 부부인데도 영조와 서로 직접적으로 대화하는 장면이 단 한개도 없다.[16] 심지어 배역을 맡은 박명신은 영빈 역할을 맡은 전혜진이 추천해서 영화에 합류했다고 한다.[17] 인원왕후 상중에 영조가 세자를 폐위시키면서 꾸짖을 때 중전이 죽었다는걸 언급한 게 다다.[18] 다만 극 중 영빈의 환갑잔치를 치르면서 간접적으로 정성왕후를 영빈 이씨에게 투영하는 행동을 보였다.[19] 정성왕후가 얼마나 세자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는가를 자세히 보려면 드라마인 대왕의 길을 보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