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09:39:16

숙종실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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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5153E><colcolor=#FFC224> 숙종대왕실록
파일:숙종대왕실록.jpg
분량 65권 73책
기록시기 1674년 8월 ~ 1720년 6월

1. 개요2. 내용3. 특이점4.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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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종실록(肅宗實錄)은 조선 제19대 국왕인 숙종 이순(李焞) 재위(1674년~1720년) 45년 11개월 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총 65권 73책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국가기록원에 소속된 역사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국사편찬위원회 숙종실록 전문

정식 명칭은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실록(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이다.

1674년 8월부터 1720년 6월까지 숙종 재위 45년 11개월 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으로, 경종 즉위년인 1720년 11월에 편찬을 시작하여 1727년(영조 3년) 9월에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특이하게도 편찬 도중에 주요 편찬자가 계속 바뀌었다. 최초 1720년 11월 숙종실록찬수청(肅宗實錄纂修廳)을 설치할 때에는 노론의 힘이 컸기 때문에 당시 노론인이던 김창집이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나, 1721년 12월에 신임옥사가 일어나면서 노론이 몰락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 당시 소론이던 조태구가 새로이 총재관이 되었다. 그러다 1724년 8월에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노론이 정권을 잡고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런데 또 실록이 최종 완성된 바로 그 순간 정미환국이 일어나 노론이 쓸려나가고 소론이 정권을 잡아버렸다.

하지만 이땐 이미 실록이 거의 완성되어 있어 더 이상의 수정은 불가능했고, 대신 소론의 주도 하에 숙종실록보궐정오를 붙였다.

숙종 실록에 기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장희빈 - 인현왕후 관련 기록, 안용복 - 독도 관련 기록#, 각종 환국에 관한 내용, 장길산 관련 기록 등이 있다. 숙종 시기의 역사 전반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관련 사료로는 숙종실록을 완성하며 그 편찬의 전말을 기록한 숙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肅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가 존재한다.

3. 특이점

숙종실록에 총 162건의 졸기가 있는데 이중 몇몇 졸기에서는 인물 평가에 있어 송시열과의 관계가 개입되는 점이 특징이다. 그 사례들을 보면 이렇다.
임금이 탄생(誕生)하였던 처음에 송시열(宋時烈)이 밖에 있었으므로 미리 축하하는 소를 올리지 못하였다. 화(禍)를 〈꾸미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이로써 유언 비어(流言飛語)를 만들어서 임금 귀에 들리게 하였는데, 김우명이 목욕(沐浴)을 핑계대고 회덕(懷德)에 가서 탐문(探問)하였다. 이에 허목(許穆)은 건저(建儲) 의 소를 올렸고, 이무(李袤)도 또한 김우명의 집에 드나들었지마는, 행적(行跡)이 매우 음비(陰秘)하였다. 선왕(先王) 말년(末年)에 이르러 김우명이 민신의 일로 송시열을 배척하니, 대관(臺官)들은 ‘김우명이 국구(國舅)로서 정사에 간여했으니 파직을 청한다.’고 탄핵하여 김우명이 더욱 크게 노하였다.
청풍 부원군 김우명의 졸기 中[1][2]
김수홍이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의 다른 의논에 억지로 맞추어 편지로 송시열(宋時烈)이 기년(朞年)의 복제(服制)를 〈논의한〉 잘못을 논척(論斥) 하여 대항하고, 송시열이 헌의(獻議)한 말의 꼬투리를 잡아 선동(煽動)하고 곤궁에 빠뜨리려는 뜻을 두었다가 마침내 대각(臺閣)의 탄핵을 받아 오래도록 폐기(廢棄)당하였었다. (중략) 당시 송시열이 임야(林野)에서 기용되어 동전(東銓) 을 맡아 인사(人士)로 하료(下僚)에 억눌려 있는 자를 추천하여 발탁하고 대헌(臺憲)에 천거하여 보임(補任)되게 하였는데, 김수홍도 희망(希望)하였었지만 송시열이 취(取)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비방하며 배척한 것도 유감으로 노여워한 데서 나왔다고들 하였다.
지돈녕부사 김수홍의 졸기 中[3][4]
김육을 장사할 때에 미쳐 김좌명(金佐明) 등이 참람하게 수도(隧道) 를 파니, 대신(臺臣) 민유중(閔維重) 등이 법에 의거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송시열(宋時烈)이 이판(吏判)이 되어 자못 그 논의를 도와 곧 대간의 논의와 다른 자는 내치고 같은 자는 올리니, 이 때문에 김석주의 집에서는 사류(士類)를 깊이 원망하였다.
청성 부원군 김석주의 졸기 中[5][6]
다만 그 성품이 평소에 편협하고, 또 윤선거(尹宣擧)의 외손으로 사론(士論)이 둘로 나뉘었을 때 힘껏 송시열(宋時烈)을 헐뜯었고, 윤선거의 강도(江都)의 일은 ‘죽을 만한 의(義)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또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를 무함하여 그 외증조(外曾祖) 윤황(尹煌)을 추장(推奬)하는 뜻에 어긋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환혹(抅惑)됨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 송시열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소식(素食)을 하였고, 이어 자손에게 박태보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박태보의 졸기 中[7]
일찍이 괴과(魁科)에 올랐고, 극력 청의(淸議)를 붙들었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제현(諸賢)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전 좌의정 민정중의 졸기 中[8][9]
박세채는 계해년 이후로 의견이 송시열(宋時烈)과 자못 맞지 않았다. 그런데 송시열을 위해 가마(加痲)하자 윤증(尹拯)에게 큰 원한과 분노를 샀으나, 사론(士論)은 그의 마음가짐의 공평함을 훌륭하게 여겼다.
좌의정 박세채의 졸기 中[10][11]
송시열(宋時烈)이 역모(逆謀)를 꾀하고 있으니 궁성(宮城)을 호위하여 방어하라고 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중외(中外)에서 두려워하였는데, 경신년에는 그 죄 때문에 천극(栫棘) 의 벌을 받았다.
죄인 권대운의 졸기 中[12][13]
주자서(朱子書)에 공력(功力)을 씀이 더욱 깊어, 송시열(宋時烈)이 《주문차의(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다.
지돈녕부사 김창협의 졸기 中[14][15]
만년에 문자(文字)를 저술(著述)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부자(父子)를 침해하고 비방하였는데, 그 말이 몹시 해괴하고 패악하여 그 평생(平生)의 심술(心術)을 여지없이 드러냈다고들 한다.
봉조하 남구만의 졸기 中[16][17]
윤증은 이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여 사림(士林)에서 죄를 얻었고, 또 유계(兪棨)가 편수(編修)한 예서(禮書)를 몰래 그 아버지가 저작한 것으로 돌려 놓았다가 수년 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니, 유계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이를 노여워하여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행 판중추부사 윤증의 졸기 中[18][19]

위의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송시열과 관련된 부분에서 그와 사이가 좋으면 좋게 평가해주고 사이가 나쁘면 나쁘게 평가한다. 그리고 졸기의 평가도 대게 이와 비슷하다. 특히 윤증의 경우 무려 송시열을 배반해서 사림에 죄를 얻었다고까지 기록한다. 이는 숙종실록이 노론에 의해 저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론에 의해 편찬된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는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모습을 보인다.[20]

4. 외부 링크



[1] 김우명은 김육의 차남이자 명성왕후의 아버지이다. 김집이 김육과 대립한 것처럼 본인도 송시열과 대립했기에 평이 나쁜 것.[2] 전체적으로는 어리석고 거만하며 송시열을 배척하느라 간사한 무리(남인)들이 진출하게 되었고 뒤늦게 뉘우쳤으나 자기 하나도 구하지 못하여 식자들이 그 무식함에 탄식했다고 비판한다.[3] 김수홍은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대립하였다.[4] 사람됨이 괴상하고 음관으로 벼슬을 시작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늙도록 도리에 어긋나는 짓만 골라하고 비루하고 사특한 짓만 한다고 격렬히 깐다.[5] 김석주는 경신환국때 서인과 손잡고 남인들을 몰아내지만 그 이전에는 송시열과 대립했다. 애초에 그의 아버지가 김우명의 형인 김좌명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6] 정도를 걷는건 아니라도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냈는데 그가 죽은 뒤 흉한 무리(남인)들이 날뛰게 되어 그를 좋아하지 않던 자들도 애석해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경신환국과 그의 사후 벌어진 기사환국의 영향이다.[7] 박태보는 인현왕후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다 죽었다. 그래서 전반적인 평은 좋지만 여기서 보이듯 송시열과 대립한 것만큼은 격렬히 비판받고 있다. 덤으로 그런 박태보의 죽음을 슬퍼한 송시열을 강조하고 있다.[8] 민정중은 인현왕후의 백부이다.[9] 영특하고 강직하며 일을 잘 한다고 평가한다. 다만 사람이 괴팍할 정도로 편협했고 시비를 확실하게 결정하질 못해 답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10] 박세채는 경신환국 시기에는 소론의 영수로 활동했지만 송시열과 척지려고 하지 않았다.[11] 덕성이 온순하며 사람들이 그의 학식에 탄복하였다 평가하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호평도 있고 그의 죽음을 두고 철인(哲人)이 죽었다고 슬퍼한다.[12] 권대운은 남인이다.[13] 조금 특이하게도 죄인이라는 점은 강조하면서도 청렴한 것은 숭상할만하고 벼슬을 하고서도 특별히 잘못을 하고 산 사람이 아니라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중도적으로 칭찬하다가 후에 허적과 함께 조정을 어지럽히고 권세를 다투고 인현왕후 폐비와 깊이 연루되었다며 비판한다. 사실 인현왕후 폐비의 전개는 그냥 숙종이 밀어붙여 한거라 권대운은 왕을 깔 수 없으니까 대신 까인것이지만...[14] 김창협은 김수항의 아들인데 김수항은 송시열과 가까운 사이였다.(제자는 아니다.)[15] 천성이 청결하고 그의 문장과 학문에 대해 극찬한다. 그런데 포인트는 그런 그의 말을 송시열이 인용했다는걸 올렸다는 것이다.[16] 남구만은 소론이다.[17] 남구만은 그래도 문재가 뛰어나고 유림의 우두머리였으며 송준길의 문하에 들어가 명성을 높였으며 성품이 각박하고 편협하나 강직하므로 강개의 선비라 하였다고 좋게 평가해줬으나 김석주가 준 정보[21]를 받고도 두려워 따르지 않다가 김석주가 설득하고서야 상소한 일을 두고 군자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업동의 옥사에서 실수하여 벼슬이 높아지더니 뭔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혹평한다.[18] 윤증은 회니시비의 주인공으로 본디 송시열의 제자였으며 송시열이 크게 칭찬했을 정도였으나 송시열의 인간성 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술이부작 사건'을 계기로 절교하게 되었다.[19] 윤증에 대한 평가는 최악인데 송시열 이전에 유계가 스승이었는데 그 두 어진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말한다.[20] 송시열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인데 숙종실록에서는 칭찬 일색이지만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는 칭찬과 비판을 모두 하면서 비판 쪽에 좀 더 무게를 싣고 있다. 대체로 젊은 시절은 칭찬하고 숙종 연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비판하며 그의 모습에 대해서도 유림의 종사이자 그의 문하에서 재상과 어진 선비가 많이 나왔다는 찬양과 학문이 허술하고 패도에 치우쳤다.는 유학자로서는 크나큰 혹평을 동시에 냈다.


[21] 허견이 모반을 꾀하려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