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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부대빈 장씨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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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숙종의 후궁 옥산부대빈 장씨 | 玉山府大嬪 張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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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묘 전경 | |||
출생 | 1659년 11월 3일[1] | ||
조선 한성부 북부 연은방 불광산계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일대) | |||
사망 | 1701년 11월 9일[2][3][4] (향년 42세) | ||
조선 한성부 창경궁 취선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 대빈묘(大嬪墓) | ||
재위기간 | 조선 숙원 | ||
1687년 1월 23일 ~ 1688년 11월 19일 | |||
조선 소의 | |||
1688년 11월 19일 ~ 1689년 2월 4일 | |||
조선 희빈 | |||
1689년 2월 4일 ~ 1690년 11월 12일 | |||
조선 왕비 | |||
1690년 11월 12일 ~ 1694년 4월 25일 | |||
조선 희빈 | |||
1694년 4월 25일 ~ 1701년 10월 2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인동 장씨[5] | |
휘 | 옥정(玉貞)[6] | ||
부모 | 부친 - 옥산부원군 장형 (玉山府院君 張炯, 1623 ~ 1669) 모친 - 파산부부인 파평 윤씨 (坡山府夫人 坡平 尹氏, 1626 ~ 1698) |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차녀
| ||
배우자 | 숙종 | ||
자녀 | |||
종교 | 성리학 → 무교(巫敎) | ||
봉작 | 숙원(淑媛) → 소의(昭儀) → 희빈(禧嬪) → 왕비(王妃) → 희빈(禧嬪) → 부대빈(府大嬪) | ||
당호 | 취선당(就善堂)[7][8] | ||
사당 | 대빈궁(大嬪宮) | ||
존호 |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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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89236A> 희빈 장씨를 다룬 KBS 〈역사의 라이벌〉 영상 |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희빈 장씨/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가계
3.1. 친가(인동 장씨)
가계를 보면, 주로 무과·의과·역과에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이들 중 대부분이 1701년(숙종 27년), 무고의 옥에 연좌되어 유배 또는 처형당하는 등 말년이 좋지 않았고, 국문을 받는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종 대에 비로소 '사죄인(死罪人)'이라고 하여, 유배지에서 죽은 사람들이 풀려났지만, 사실상, 집안이 몰락하였다.[12][13] 다만, 영조, 정조 재위 연간에, 7~8촌[인척관계] 사람들이 과거 급제하여 장형의 대를, 양자를 통해 잇는 등 집안을 겨우겨우 이어나갔다.- 당숙: 장찬(張燦)
- 당숙모: 청주 최씨(사역원 정 최진남(崔振南)의 딸)
- 조부: 첨지 증 우의정 장응인(張應仁)
- 조모: 증 정경부인 남포 박씨(별제 박침(朴沈)의 딸)
3.2. 외가(파평 윤씨)
- 외증조부: 노직 윤기수(尹麒壽)
- 외증조모: 결성 김씨
3.3. 시가(전주 이씨)
3.4. 배우자 / 자녀
- 남편 : 숙종(肅宗) 이순(李焞)
4. 여담
- 외모에 관한 묘사가 별로 없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미모를 인정한 몇 안 되는 여성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장희빈과 어리다.[32] 다만 어리는 사관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모를 전해들은 정도였지만, 장희빈은 실제로 보고 기록한 것이다. 그 깐깐한 사관들과 정치적으로 적인 노론들조차 미모 하나는 인정할 정도이니 외모는 확실히 대단했던 듯하다.[33] 다만 이는 성리학 국가인 조선의 특성을 고려할 때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이다. 단순 외모 칭찬이 아니라, 미모로 숙종을 홀리고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중전의 자리를 찬탈했으며 숙종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나라의 법도를 어지럽혔다는 부정적 평가이다.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頗有容色)."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사간원의 한성우가 궁인 장씨를 염려하여 왕에게 미인을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4일 (갑자) 2번째기사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4일 (갑자) 2번째기사
"김창협이 장씨의 미색에 마음이 현혹되어 은총을 열어준다는 비난을 없게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9월 13일 (갑오) 1번째기사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9월 13일 (갑오) 1번째기사
* 실록에 '미인'이라 기록된 여인인지라, 희빈 장씨의 미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호기심이 매우 크다. 그러다보니 여럿 그림들이 희빈의 얼굴인 양 알려져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위의 사진. 하지만, 희빈의 초상화는 전해지는 게 없다. 저 그림은 고영훈 화백의 서양화 기법으로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애초에 왕실의 여인이 기생 마냥 떨잠을 비대칭으로 꽃은 것부터 말이 되지 않으며, 동양화라고 볼 수도 없는 그림이다. 즉, 이 그림은 그저 동양화도 초상화도 아닌 상상화이며 장희빈의 진짜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 몇몇 사람들은 '장희빈'을 본명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조선 내명부 정1품 후궁 빈(嬪)으로서 받은 작호가 '희빈(禧嬪)'인 것이다. 하필 오빠의 이름이 또 장희재(張希載)라서 '희'자 돌림인 줄 알고 착각하기도 쉬운 면도 있긴 한데 한자가 다르다.
- 그녀의 정식 명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35]으로, 1722년(경종 2년)에 그녀를 추존하려는 과정에서 인현왕후 민씨의 외가 측의 반대가 극렬했고 무고의 옥을 재수사하기엔 숙종의 부묘례까지 남은 시간이 지극히 촉박했기에[36] 부대빈(府大嬪)이란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옥산부대빈으로 추증하고, 사당을 옥산부대빈묘(사당 묘), 무덤을 옥산부대빈묘(무덤묘)로 개칭했다. 부대빈은 부대부인의 내명부 형, 국대비(國太妃·國大妃)[37]의 조선형[38] 조선 세종 14년에 이젠 명의 제후국인 조선에서 신하의 작호에 국호를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하면서 외명부 부인들의 작호를 개칭할 때 세웠던 공식[39]을 쓴 것으로, 1753년(영조 29년)에 후궁 출신 왕모의 본래 작호(1자호 빈)에 2자 시호를 더하는 새로운 제도가 창시됐기에 이후 라임에 맞춰 대빈, 대빈궁 대빈묘라 쓰는 경우가 흔해 대가 빈호이고 옥산부가 시호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 무덤이 '원'이 아닌 '묘'인 것에 죄인이라 아들 경종이 원으로 올리지 못했다고 보는 경우가 흔하나, 이는 인조가 소현세자의 무덤을 원이 아닌 묘로 삼았던 것이 소현세자를 증오했다는 증거라 주장했던 모 학자들과 동일한 논리이다. 사전에선 비록 원을 왕세자 부부와 왕의 생모인 후궁의 무덤이라 정의하고 있지만 이는 결과론. 왕세자 부부의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는 고종 7년(1870년)에 세워졌으며 후궁 출신 왕의 생모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는 영조 29년(1753년)에 세워졌다. 정리하면, 경종이 살아있을 땐 후궁 출신의 왕의 생모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는 것. 앞서 인조가 사친인 연주부부인 구씨가 사망했을 때 '지존은 오직 왕과 왕후의 상주만 될 수 있을 뿐'이란 대신들을 상대로 '난 할아버지 선조와는 달리 선왕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한 게 아니라 법적으로 여전히 내 부모의 자식으로 심지어 적장남이다'라는 논리로 구씨의 상주가 될 수 없다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며 시위를 벌였는데, 대신들이 결국 '한 선제가 비록 사친을 황제로 추존할 수 없었지만 대신 부모의 무덤을 원으로 봉원하여 황제의 부모란 권위를 세워주었다'며 정원대원군과 연주부부인의 무덤을 봉원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아 봉원한 이력이 있긴 하나, 이후 '명의 제후인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무덤을 '원'이 아닌 '능'으로 삼은 것은 불충'이라는 논란이 일어나 결국 인조의 부모를 대왕과 왕후로 추숭하여 무덤을 봉능한 것으로 수습했던 전력이 있어 다시 '원'을 쓰기엔 부담 요소가 있었다.[40] 거기다가 영조와 노론정권의 정적이었던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무덤은 당연히 봉원 대상에서 누락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숙종 때 성비 원씨의 전례대로 종친부 1등의 예장대로 단장된 무덤 그대로 남았긴 했다. 그러나 1969년 재개발 목적으로 희빈의 무덤을 도로로 만들어 버려 서오릉 내 그늘진 구석으로 이장하면서 규모와 단장품도 대폭 축소하여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타 후궁 출신 왕의 생모의 '원'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졌다.
- 조선왕조에서 비(非)사족(士族: 양반. 양반은 사족의 존댓말이다. 출처: 양반전) 출신에 궁녀 출신으로 정실 왕비까지 올라간 유일무이한 여성이면서 동시에 후궁으로 되려 강등된 유일한 왕비 타이틀도 있다. 조선 왕비가 쫓겨나는 일반적인 테크트리는 폐비 윤씨나 단경왕후처럼 친정(사가)으로 쫓겨나는 게 일반적인데, 희빈 장씨는 폐비를 시킬 명분[41]이 없었으므로 원래 자리인 후궁으로 강등시킨 상황. 그러나 좀 더 정확히는 숙종이 총애하던 숙빈 최씨의 위증[42]에 속아[43] 숙빈의 독살을 꾀했던 장희재를 강경처분하기 위해서는 ‘왕비의 오빠, 왕세자의 법적 외숙부’의 입장을 벗겨내야 했고 그러려면 희빈 장씨를 왕비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했는데, 희빈 장씨는 당시에 딱히 폐출할 껀덕지도 없는 데다[44][45] 어거지로 없는 죄를 만들어 씌워 폐출하면 이미 이혼 경력이 있던 숙종 본인의 입장이 난처함은 물론 희빈의 아들인 세자 윤의 입장도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 '삼불거로 이혼이 취소될 시 이혼 중에 성립된 정식혼은 중혼법에 따라 자동 취소된다'는 혼인법을 이용하기 위해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다.
- 장희빈의 묘인 '대빈묘'에 참배하면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20대 ~ 30대 젊은 여성들에게 알려져 인기를 끌었다. 대빈묘에 절을 하거나 특정 행동 주로 춤을 추는 행동을 해서 장희빈의 기를 받으면 된다는 것인데, 2008년도경에 잠시 크게 유행했다. 당시 기사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공포유튜버 윤시원도 이 소재를 다뤘으며 여기서 무덤에서 절을 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춤을 추거나 하는 행위는 장희빈의 영령에 대한 조롱으로 보여 자기 자신을 망치는 저주를 받을 것이며 그게 아니더라도 문화재 사적 침범 및 유실 행위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괴담은 괴담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달라고 부탁했다.
- Why? 한국사 시리즈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장미소의 선조[46]로 설정되었다. 거기다가 이 두 명이 실제로 만나는 것이 그려졌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생각시 시절 같은 방을 쓴 룸메이트다.[47] 다른 책에서는 미소가 고모인 승은상궁 장씨의 빽으로 입궐해 아기나인이 된다.[48]
- 2018년 1월 1일 모바일 게임 크래시 피버 5번째 초위저드 유닛으로 나올 예정이다. 게임 스토리에선 숙종 이순이 바람잘날 없이 사건을 일으키다 보니 이성계의 한숨이 깊어 정도전이 그녀를 숙종에게 소개 시켜줘 문제는 일단락 되었으나... 그녀의 매력에 홀려버린 숙종이 ALICE 한국 지사의 메모리 관리 권한을 그녀에게 맡긴 채 메모리 관리 지역 입구를 봉쇄하게 되어 버리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그 사건을 막기 위해 장길산이 부대를 데려가서 막으러 가는 스토리.
- 만화가 우양숙의 작품 중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에 연재했던 고교 장희빈이라는 만화가 있다. 물론 실제 역사의 장희빈과는 무관하게 등장인물의 이름만 빌려 온 학원물[49]이지만 작중에 희빈과 인현왕후가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해서 진짜 장희빈을 만나는 에피소드가 있기는 하다.
-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여인으로 영국의 헨리 8세의 총애를 받다 몰락하여 죽은 앤 불린과 닮은 구석이 많다.[50] 앤 불린이나 장희빈이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현대에 들어선 당대의 평가만큼이나 악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왕조 시대에 국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금기였던 만큼 치세가 불만이라도 해도 국왕을 직접 비판하지는 못하고 측근인 간신이나 요녀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와 정반대격인 인물은 국왕에 같이 묻어가버린 똥별 원균이다.[51] 물론 정말로 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진정한 권신도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 왕이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면 충분히 억제할 수 있는 경우도 숱하게 많다. 현재 둘 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편, 국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희빈, 앤 불린도 알고 보면 평가가 상당히 갈린다.
- 조선 역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비(非)사족(士族: 사대부) 신분의 왕비, 유일무이한 궁녀 출신 왕비, 유일무이한 승은후궁[52] 출신 왕비이자 3대 태종 때 승계법이 개정된 이래 최초로 아들이 원자가 된 후궁이었다. 부정과 조작이 불가능한 이 복합적 사실은 영조 정권의 수립 과정을 정당화할 수단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널리 전파되어 온 "국모가 될 야망을 품고 유교 사회가 바란 이상적인 국모였던 여군자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국모의 지위를 찬탈했다"는 구도가 예지력이 있지 않은 이상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노론의 성녀이자 영조 정권의 성모였던 인현왕후 민씨는 인품과 행실이 완벽했던 여군자로, 경종의 사친이었던 장씨는 '절대 악녀이자 희대의 요녀'로 정의되어 왔으며 노론과 노론의 전신이었던 서인 산당은 유능하고 정의로웠던 충신당, 남인은 무능하고 탐욕스러워 간계를 서슴치 않았던 역신당으로 정의되어 왔다.[53] 이 구도가 조선 멸망 이후까지 바뀌지 않은 탓에 이를 바탕으로 대중매체 등이 만들어져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깊숙이 주입되어 왔다.
- 악녀 장희빈에 대한 일화로는 숙종의 승은을 입고 회임한 숙빈 최씨를 잔혹하게 매질했다거나[54] 하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 숙종이 숙빈 최씨를 가까이 하여 영수를 만든 1693년(숙종 19년) 정월, 당시 왕비였던 장씨는 어린 아들인 왕세자의 볼에 난 종기로 노심초사하다가 왕세자가 완치된 직후 <동의보감>에서 목숨이 위태롭지만 치료가 어렵기로 꼽은 뇌후절[55]이 발병하여 집중 치료를 받게 된 중환자 신세였으며 이로 인한 체력 약화와 스트레스로 오랜 지병이던 담화[56]가 재발해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이 있기 전까지 상태가 논의됐던 만큼 <수문록>에서처럼 숙종의 아이를 잉태한 숙빈 최씨를 내전으로 끌고 오게 하여 "남의 씨를 배어놓고 용종(임금의 아이)이라 속이느냐?"며 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마구 매질할 체력도 의욕도 있을 수 없었다. "남의 씨를 배어놓고 용종이라 속이느냐?" 대목은 장씨의 득남 소식을 듣고 장씨가 딸을 낳아놓고 남의 아들과 바꾸어 숙종의 아들이라 속인다는 [[유언비어가 궁중에 퍼지고 인현왕후도 이에 대하여 숙종에게 언급한 것[57]을 각색한 것으로 추정된다.
- 《숙종실록》 중 한 기사의 국역판에 언급된 ‘희롱’을 원문을 확인치 않고 현대 국어사전상의 정의 그대로 이해하여 "나 잡아봐라" 놀이로 승화시킨 것이 널리 인용되고 있는데 원문을 확인하면 국역에서 희롱으로 번역된 놀이, 즐길 희(戲) 앞에 의지미래형 한자인 하고자 할, 바랄 욕(欲)이 수식하고 있어 '어느 날 상(=숙종)이 희(戲)를 하고자 하여/바라여' 희빈 장씨가 내전으로 도망쳐 인현왕후에게 부디 살려달라고 청했을 땐 아직 희(戲)가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희롱(戲弄)·희(戲)·농(弄)은 단순 놀이나 장난에도 두루 쓰인 한자이지만 가족이 아닌 남녀 성인(간혹 동성) 사이에 쓰일 경우에는 성희롱·성관계 혹은 폭력으로 강제로 행해진 성폭행을 '남성이 가지고 놀았다/즐겼다'는 의미로 돌려 쓴 일상표현이기도 했다.[58][59]
- 마지막까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왕세자를 만나게 해달라 저항하다 왕세자를 데려다주니 "이씨 왕실의 대를 끊어버리겠다"며 왕세자의 생식기를 잡아 훼손시킨 뒤 문짝에 몸이 눌려진 채 숟가락으로 강제로 벌려진 입 사이로 쏟아진 여러 동이의 사약으로 결국 피를 쏟아내며 죽었다는 야사가 있으나[60] 이 역시 오늘날에는 실제 있었던 사실로 보지 않고 희빈 장씨 악녀화를 위해 덧붙여진 설화로 보고 있다. 이런 소문이 난 것은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노론 강경파가 빨리 경종을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후원하는 연잉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경종을 겁박하여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한 후 청나라 강희제에게 이를 보고하고 승인을 얻으려 할 때 강희제가 "너희 왕이 아직 30대 청년인데 왜 아들 낳기를 벌써 포기하고 동생을 세제로 삼느냐?" 묻자 이건명이 우리 왕이 고자여서 아들을 낳을 수 없습니다.라고 허위보고를 한 것을 후일 영조가 즉위하며 집권한 노론 측에서 아예 공식화시키기 위해 민간에 퍼트린 것으로 보인다.
- 야사에서는 사약을 거부해 억지로 먹여 죽였다고 전해지는 유일한 인물로, 보통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고 언급되나 실제 희빈 장씨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1701년 10월 8일 밤에 소론이 숙종에게 자진 수단을 물었을 때 숙종이 "독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답하자 소론이 "사사는 유사의 벌이니 폐출하여 궐 밖에서 공개 집행해야 함"을 지적하며 "상께서는 희빈을 죽이고자 하시는 것일 뿐 굳이 유사의 벌로 죽여 왕세자에게 상처를 더해주고 장차 안위마저 위태롭게 하실 작정?"이라고 주장해 숙종이 "유사의 벌을 쓰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방도를 찾아오라." 명했고 소론이 덧붙여 "자진하라는 전지를 내리는 것도 유사의 형벌"임을 지적하자 즉각 "승정원에 일러 교지 쓰는 것을 멈추라"라 했다. 물론 사사가 불가능해진 숙종이 그래도 희빈의 신체를 훼손시키거나[61] 장시간 고통 속에 죽게 하기는 싫어 희빈에게 몰래 독을 전달하여 희빈이 은밀히 먹고 죽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소설이나 수문록에서처럼 감시와 집행 절차가 존재하는 사사형이 집행됐을 가능성은 없다. 심지어 희빈은 궁에서 죽어 수구문으로 관이 나갔는데 궁에선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갑작스러웠던 급사나 암살 현행범을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죽여버린 급살이 아닌 이상 오직 왕과 비, 왕세자 부부, 출합 전 어린 왕자녀만 궁중에서 죽을 수 있었고 가능하면 별궁으로 이처시켜 혼령이 법궁에 지박령으로 남는 것을 피했다. 따라서 유사의 형벌로 죽이려면 폐위하여 궐 밖으로 옮긴 후 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던 것. 그래서 희빈 장씨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현대에 고증하기가 쉽지 않으며 드라마에서는 주로 사약을 받고도 끝까지 숙종에게 패악을 부리며 저항하다가 직접 취선당에 찾아온 숙종과 내시 및 궁녀들에 의해 강제로 사약이 부어지면서 추하게 사망하는 모습으로 주로 연출되는데 희빈이 실제로도 사약을 받고 끝까지 저항했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사약 여러 사발을 강제로 마시고 죽은 직후 천벌을 받았는지 원래라면 천천히 썩어야 정상일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특유의 시체 썩는 냄새가 온 궁궐에 진동을 했고, 이에 궁궐의 모든 사람들이 불쾌감을 표하자 경악한 숙종이 “당장 시체를 궁 밖으로 버리라” 명령하여 희빈의 시체를 즉시 궁 밖으로 내다 버렸다고 한다. 생전의 아름답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썩었다가, 다음 날 뒤늦게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가보니 이미 시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는 검은 피로만 가득했다고. 다만 인현왕후전의 사료로서 가치는 매우 낮으므로 이는 야사로만 봐야 한다.
- 영조 때 신하의 언급을 보면 공식적인 사인은 사약을 받아 사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숙종은 처음부터 사약을 내리기를 희망했고 신하들의 반대로 자진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가, 희빈이 이를 거부하자 사약을 내리고 희빈이 사약마저 거부하자 직접 취선당에 찾아가 사약 여러 사발을 강제로 부어 희빈이 사망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관들도 품위와 체통이란 것이 있어서 역적들도 왕에게 절하고 스스로 마시는 사약을 무려 전직 왕비이자 왕세자의 생모가 거부하며 패악질을 부렸다고 차마 기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종 때 임금의 생모라 해서 실록을 세초하여 자진했다고 기록을 바꿨을 수도 있다. 그리고 궁 안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 수 없는 것이 원칙이라는 반박도 있는데 숙종이 처음부터 자진 명령이 아닌 사약을 내리고 싶어한 점과 숙종의 성격을 고려하면 관례고 나발이고 모두 깨부수고 궁 안에서 사약을 내려 강제로 사사형을 집행한 것이 가장 유력하다.
- 외모 자체는 실록에 기록될 만큼 미인이나 드라마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머리는 좋지 않았고 정치감각도 없었으며 지성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빠인 장희재가 날뛰고 다니는 것을 중전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전혀 제어하지 못했고 아랫사람 및 자신의 집안도 통제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권력욕은 있었으나 머리는 나빴으며 자신의 세력이 날뛰고 다니는걸 전혀 제어하지도 못했다.
5. 관련 문서
- 갑술환국
- 경신대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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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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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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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
- 현종실록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희빈 장씨/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1] 음력 9월 19일.[2] 음력 10월 10일.[3]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8일 (辛酉) 8번째기사 中 "지금 나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장씨는 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라."[4] 《숙종실록》 37권, 숙종 28년(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壬午) 10월 9일 (병술) 2번째기사 中 "내일이 곧 장씨(張氏)의 초기(初朞)이므로 […\]"[5] 양주파 22세. 족보[6]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 단암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丹巖漫錄)>에 적혀 있다.[7] 중전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굿했던 장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장희빈의 호'로 불리기도 했다.[8] 나중 가서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동궁이 되기도 하였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였다.[9]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는 다르게 시호를 받지 못하였다. 옥산부대빈은 존호(尊號)이지 시호(諡號)가 아니다.[10] 책비례를 올린 1690년(숙종 16년) 음력 10월 22일부터를 왕비 재임 기간이라 책정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세자빈 출신으로 남편이 왕으로 즉위하여 왕비가 된 역대 왕후들의 책비례는 모두 선왕의 국상을 마친 후(대체로 남편의 재위 2년이 된 해)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모른 탓. 옥정은 전비였던 인현왕후가 폐출된 지 나흘째 된 날인 숙종 14년(1689년, 기사년) 음력 5월 6일에 후임 왕비로 지정되어 5월 13일에 왕비로 정호됐으며, 당시 장렬왕후의 국상 중이었기에 책비례는 원칙대로 국상을 마친 후로 미뤄져 다음해인 숙종 16년에 치러진 것이다.[11] 인현왕후 민씨의 작은오빠이자 영조의 킹메이커 3인방 중 한 명이었던 단암 민진원의 <단암만록(丹巖漫錄)>에 기록되어 있다.[12] 《경종실록》 4권, 경종 1년(1721년,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9월 29일 (정사) 3번째기사[13] 오죽하면 무고의 옥 이후, 장형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풍비박산이 났다. 장형의 5촌 항렬 내에는 거의 죽었거나 중죄수로 유배를 갔고, 7촌 항렬 내에는 나이가 모두 어려 맡길 수 없었고, 결국 사위 김지중이 그들이 장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잠시 맡기로 결정되었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1월 25일 (무신) 5번째기사[14] 1664년(현종 5) 태어나, 1684년(숙종 10) 식년시에서 의과에 합격하였다. 장희재가 유배 간 뒤, 소식이나 알고자 2~3개월에 한 번 장희재의 집을 들렀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웅천현(熊川縣)에 정배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황해도 재령(載寧)으로 이배되었다.[15] 6차례에 걸쳐 국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16] 1713년(숙종 39) 황해도 봉산(鳳山)에 유배 중이었는데, 유배지를 벗어나 '서울 집에 왕래하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등 보통 사람처럼 생활하다가 걸렸다.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906010_002|숙종실록 54권, 숙종 39년 6월 10일 을유 2번째기사][17] 두 아들 장문유, 장두유가 무과에 합격할 때, '자시하(慈侍下)'라는 기록되어있다. 당시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 무고의 옥에는 연좌되지 않았다.[18] 1675년(숙종 1) 태어나 1697년(숙종 23) 무과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흥양현(興陽縣)에 정배되었다가 임천(林川)으로 이배되었다.[19] 1697년(숙종 23) 무과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광양현(光陽縣)에 정배되었다가 홍산(鴻山)으로 이배되었다.[20] 1717년(숙종 43) 식년시 역과 1등 1위로 합격,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다. 원래 생부는 장천강인데 장천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21] 칠원현(漆原縣)에 정배되었다가 1712년(숙종 33)에 풀려났다.[22] 아명은 억기(億基)였는데, 조정에서 혼동하여 장태유와 장억기가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잡아들이려고 한 적이 있다. 하동현(河東縣)에 정배되었다가 제천(堤川)으로 이배되었다.[23] 효종 대에 궁녀로 입궁해서 상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무고의 옥 당시에 장현의 딸 '장 상궁'이 오빠 장천한과 재산을 놓고 다퉈서 사이가 안 좋다는 증언이 나왔다.[24] 변승업과 부인 영천 이씨의 큰며느리.[25] 1665년(현종 6년) 태어나서 1683년(숙종 9년) 증광시에서 의과에 합격하였다. 무고의 옥에 연좌되어 사천현(泗川縣,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북부지역)에 정배되었다가 울진(蔚珍)으로 이배되었다.[26] 1668년(현종 9년) 태어나서 1690년(숙종 16년) 증광시에서 역과에 합격하였다. 곤양군(昆陽郡,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에 정배되었다가 강릉(江陵)으로 이배되었다.[27] 1640년(인조 18년) 태어나, 1657년(효종 8년) 식년시에서 나이 18세에 역과에 합격하였다. 자는 사흠(士欽)이다.[28] 국문을 받았지만 현저하게 드러난 죄가 없다고 하여 풀려났다.[29] 장희재로부터 받아 희빈 장씨에게 전달하는 등 매흉에 참여한 죄로 군기시 앞길에서 처형에 처해졌다. #[30] 인현왕후의 상중에 희빈 장씨가 입을 상복을 물어보거나 창호를 뚫어 인현왕후가 어떤지 확인하는 등 정세를 탐문했다는 죄로 해남현(海南縣)의 노비가 되는 처분을 받았다. #[31] 새로 태어난 대군이 졸서한 후에, 정원과 옥당에서 대전과 중전, 세자궁에 안부를 묻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342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9월 16일 (계묘) 1번째기사[32] 과거에는 실록에서 미인으로 기록된 여인이 장희빈뿐이라는 말이 인터넷에 나돌아다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록에 미인으로 기록된 여인은 장희빈을 제외하면 강혜장숙여비 한씨와 어리(태종실록), 한영정의 막내 딸이자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누이인 한계란(세종실록), 순빈 봉씨(세종실록), 안평대군 이용의 계집종인 귀비(성종실록), 승평부대부인 박씨(연산군 일기), 경빈 박씨, 윤순의 아내 구씨(중종실록), 정난정(명종실록), 역관의 딸 순빈 김씨(선조실록), 소원 신씨와 소용 임씨, 효인의 아내(광해군 일기), 의순공주, 숭선군의 첩 영이(효종실록), 옥례, 오정창의 딸(숙종실록)가 있다. 장희빈은 실록에 기록된 미녀들 중에 가장 외모 칭찬이 많은 여인이지, 실록에 유일하게 기록된 미녀는 아니다.[33] 애초에 외모가 못났으면 숙종에게 총애받지도, 인현왕후를 밀어내고 왕비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전까지 올라가는 데는 정치적인 이유도 컸지만 미모 덕도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34] 숙종은 1661년(현종 2년)생, 인경왕후는 숙종과 동갑인 1661년(현종 2년, =)생, 인현왕후는 1667년(현종 8년, -6)생, 희빈 장씨는 1659년(효종 10년, +2)생, 숙빈 최씨는 1670년(현종 11년, -9)생, 인원왕후는 1687년(숙종 13년, -26)생, 영빈 김씨는 1669년(현종 10년, -8)생, 귀인 김씨는 1690년(숙종 16년, -29)생이다.[35] 본관(인동 장씨)인 인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및 칠곡군 각 일부)의 별칭인 '옥산'에서 따왔다.[36] 선대왕의 3년상을 마치고 신주를 태묘(=종묘)에 부묘할 때 선대왕보다 먼저 사망하여 혼전에 모셔두었던 선대왕의 왕후들의 신주 역시 이때 함께 부묘한다. 문제는 희빈은 후궁인데 숙종이 희빈의 혼궁을 궐 밖 사제가 아닌 궁에 설치해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숙종과 선후들의 부묘례를 행할 때 희빈의 신주 역시 궐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태묘에 부묘는 할 수 없으니 새로 사당을 세워야 하는데 희빈의 명호로 세우기는 초라하여 추존이 논의된 것이다.[37] 조선시대까지의 옛 한자 문화 국가에선 태와 대를 병용했다.[38] 국대부인과 더불어 중국(위진시대~송나라)과 고려에서 제왕 혹은 태자의 생모를 봉증한 작위 중에 하나로, 적첩의 차별이 강화된 위진 시대에 창안되어 중국이 몽골(원 제국)에 강제 합방되기 전까지 두루 쓰였다.[39] 삼한국대부인은 국호를 조선의 최고 행정단위인 부로 바꾸고 앞에 연고지의 읍호를 더한 OO부부인으로 개칭, X한국대부인(X한은 삼한인 진한 마한 변한 중 하나를 사용)은 부 아래 행정단위인 군으로 바꿔 OO군부인으로 개칭. 단, 남편이 아닌 자식으로 인해 귀해진 경우엔 특별히 대를 더함.[40] 이후 정조가 인조 때의 봉원을 전례삼아 사친인 사도세자의 무덤(현륭원)을 봉원했다.[41] 폐비 윤씨는 연산군을 낳고 성격이 포악해져서 쫓겨난거고,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때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 참여에 거절해서 역적으로 몰려 죽어버리는 바람에 역적의 딸이라 하여 왕비에 오른 지 7일 만에 반정군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고 사후 복위되었다.[42] 김인의 고발했던 내용이 하나같이 지나치게 허황되어 무고라 판결된 가운데 숙빈 최씨가 한밤중에 숙종의 침소로 나아가 김인이 고발했던 것 중 자신의 외숙모 봉영이 장희재의 사주를 받고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고 눈물로 애원, 호소했다.[43] 수사 결과 숙빈의 외숙모 봉영은 외부 음식은 궁중에 들일 수 없다는 궁인들의 말에 애초 궁에 음식을 들인 적도 없었으며, 숙빈의 연잉군 출산 당시에 아예 입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사주를 받았던 숙빈이 눈엣가시였던 외숙모 일가를 더불어 제거할 목적으로 이러한 위증을 벌였던 것. 숙빈은 1695년(숙종 21년) 음력 3월 23일 스스로 복위 운동을 전개했던 인현왕후가 사제(경북 김천시 청음사)에서 전국 노론에게서 은을 모아 뇌물을 주었던 대상으로 고발됐던 인물이다. 이 당시 숙종의 폐인(嬖人: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은 숙빈이 유일했다.[44] 사실 인현왕후 역시 폐출은 반대파 남인들조차 대거 반대했을 정도로 명분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숙종이 억지로 내세운 게 칠거지악 중 일부를 저지르고 투기를 했다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전자는 칠거지악 중에서도 눈감고 그냥 넘어갈 만한 가벼운 사항이었고 투기는 폐비 윤씨 급으로 실질적인 선을 넘는 게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고 넘어가는 게 오히려 도리이자 미덕이였다. 인현왕후는 정황상 투기는 했지만 선을 크게 넘은 건 아니었고, 그나마 제일 문제가 되었던 게 시어머니 명성왕후가 꿈에 나타나서 계시를 내렸다는 것 정도인데, 이조차 숙종의 평소 성격이라면 보통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이래 보나 저래 보나 인현왕후-희빈 장씨 간의 왕비 쟁탈전과 두 사람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숙종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내명부의 질서를 제멋대로 어지럽히고 휘저은 탓이 크다.[45] 참고로 인현왕후가 명성왕후가 꿈에서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말한 것은 폐위되기 3년 전인 1686년이었다. 한마디로 숙종 본인도 이미 넘어간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그걸 핑계로 폐위를 한 것은 1686년 당시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살아있기 때문에 넘어간 게 큰데 그러다가 1688년 장렬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안 되어 원자정호를 무리하게 정하고 그 후 1년여 만인 1689년 여전히 국상 중인데도 3년 전 일을 트집 잡아 어거지로 폐위하는 것부터 장렬왕후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저지르는 패륜이나 다름없다.[46] 선조기는 하나 정황상 방계 조상이다. 장남 경종은 자식 없이 사망했으며 차남 성수 또한 요절하여 현재 희빈의 직계 자손은 없다.[47] 한국사 시리즈 주인공 3명 중 유일하게 생전 조상과 대화했다. 강마루의 경우는 조상의 영혼이 나타났기에 생전 조상은 아니다. 하지만 신천지가 조상 신돌석을 만났다...[48] 고모라 하면 아버지의 여자 형제를 일컫는 말이니 책 설정상 장희재의 딸이었을 듯.[49] 실제 희빈 장씨의 본명 대신 '장희빈'을 그대로 주인공의 이름으로 쓰고 있다. 또한 장희빈의 절친이자 더블 주역에 해당하는 캐릭터는 인현왕후.[50] 다만 그녀의 아들인 경종은 아라곤의 캐서린의 장녀인 메리 1세와 자주 비교된다.[51] 다른 간신들은 대중들이 왕이 싫어도 직접 비판할 수 없어서 대신 비판의 화살을 돌려 왕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면 반대로 원균은 대중들 절대 대다수가 해당 인물에 대한 진심어린 혐오 때문에 직접 비판하는 것이었는데 선조가 자신에게까지 비판의 화살이 쏠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영웅화한 존재이다. 정리하자면 다른 간신들은 국왕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었고 원균은 국왕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옹호받은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왕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왕조 시대의 기본 기조가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52] 간택후궁 출신으로는 정현왕후, 장경왕후 등이 있었다.[53] 노론의 기록에는 소론 역시 역신당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소론의 입장이 공교롭다. 대표적으로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은 영조의 승하 직후에 집필을 시작했다. 이긍익은 자신의 조부이자 경종의 충신이었던 이진검 형제 및 영조를 적대하고 노론을 잠시나마 무너트렸던 소론의 행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종 편 집필을 완전히 포기하고 숙종 편에서 왕대별을 종료했으며 숙종편에서도 노소 분당의 시기를 명확히 기록치 않고 기사환국 전후의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이 충돌하였던 내용 및 기사환국과 더불어 일시적이나마 소론 정권이 세워졌다는 사실, 인현왕후의 폐위 사건 후에도 다수의 소론이 정계에서 활동했으며 인현왕후의 복위 당시 소론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반대하며 희빈 장씨의 지지 세력으로 돌아섰던 사실 등을 전면 삭제한다. 그렇게 소론 역시 인현왕후에게 충성을 바쳤던 당파인 양 각색함으로써 훗날 자칫 재개될 수 있을 검열에서 자신의 가문과 소론이 화를 입을 것을 예방한다. 이후 이긍익의 8촌 손자인 이시원이 이 책을 참조하여 《국조문헌》을 집필하였고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이 《국조문헌》에서 당쟁 관련만 발췌하여 《당의통략》을 만들었다. 근대 사학계에서 《연려실기술》을 두고 소론이 쓴 책인데 노론에 대해 담담하게 썼으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책이라 착각하여 열람이 제한된 정사 대신 절대적인 고증 사료로 채택하고 추가 자료로 채택한 《당의통략》을 두고 소론이 쓴 책이니 노론이 쓴 책보다는 덜 편파적일 것이며 저자와 집필 시기가 다른데 《연려실기술》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으니 환국은 서인을 대표한 인현왕후와 남인을 대표한 희빈 장씨의 대결로 정의해 현재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애초 일부 왜곡이 들어간 사료를 바탕하여 정리한 잘못된 정의였기에 모순적 위화감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정사 기록이 일반 열람으로 전환된 후 현대 역사서가 아닌 정사를 직접 열람하여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며 정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54] 출처는 영빈 김씨의 외재종오빠였던 농수 이진정이 이문정이란 필명으로 쓴 《농수 수문록》의 내용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소문으로 들은 것을 기록했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비슷한 용례로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를 때렸을 때 용례가 있다. <숙종실록>에는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라고 국역되어 있지만 원문을 확인해보면 "一日, 內殿命撻之, 益懷怨毒,"로 한자 "撻(때릴 달)"만 쓰였을 뿐 매질할 때 쓴 수단이나 부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자 "撻(때릴 달)"은 회초리든 매든 몽둥이든 채찍이든 무겁지 않은 것을 손에 쥐고 인간이나 동물을 매우 빠른 속도로 매질할 때 쓰는 한자로 영어 단어로는 to whip에 해당된다. "撻(때릴 달)"에는 분명 훈계 목적으로 가느다란 회초리로 종아리, 손바닥, 엉덩이를 때리는 것도 포함되니 오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문서에 수단과 부위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고 스승 혹은 부모에게 엄한 교육을 받았다의 비유법으로 쓴 것이 아닌 이상 '종아리를 회초리질했다.'로 한정하여 번역해서는 안 되는 한자다.[55] 후두부인 뇌수 부근에 난 종기. 크기가 작으면 절, 크면 옹저라 함.[56] 痰火: 재발과 발작의 원인이 된 과정(경종의 절증 발병->경종의 완치 후 절증 발병->절증 치료 과정 중 외감(外感: 감기, 독감)->담화 발작)과 약재에 비추어 담천과 화천의 합병인 담화 천식으로 추정.[57] <연려실기술> 중 숙종이 인현왕후를 두고 "원자가 탄생한 뒤에 더욱 불평하고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있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여자가 쓰는 모자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남자의 모자를 쓴다니 실로 뜻밖이다.'하고 궁인들 중에도 왕자가 탄생한 것이 의외의 일이라고 말하는 자가 몇이 있으니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국본(國本)을 일찍 정한 본의가 이것이다."라고 말한 말이 전한다. 실록 열람권이 없었던 이긍익이 인현왕후의 결함을 축소, 은폐하기 위해 <숙종실록>에서 일부가 삭제되어 올려진 사실을 모르고 《기사유문(己巳遺聞)》에 실렸던 내용을 그대로 다 넣어버린 듯. <숙종실록>에 수록된 것은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실로 이는 뜻밖이다.'하였다. 일찍 국본(國本)을 정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로, 중간 부분의 내용이 생략됐다. 이 발언은 인현왕후가 폐비될 때 '원자를 모해한 죄'로 적용됐다.[58]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1427년, 정미) 9월 29일 갑인 2번째기사 中 "여달(如達)은 어두운 밤을 타서 무뢰배(無賴輩)와 결당(結黨)하여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兪甘同)이란 여인을 만나 그가 조사(朝士)의 아내인 줄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하고는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했다.[59]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1436년, 병진) 10월 26일 무자 2번째기사 中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60] 소설 《인현왕후전》에도 장씨의 최후로 비슷하게 그려졌는데 장씨가 경종의 생식기를 훼손한 내용은 없다.[61] 조선에서는 신체가 훼손된 채로 죽으면 영혼 역시 사망 전 신체가 훼손된 채로 영구히 남는다고 믿었다. 때문에 사형도 사사형>교형>참형>능지형 순. 능지형도 거열형으로 바꿨다가 이 또한 참수시킨 뒤 사체를 거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