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28 10:52:09

희빈 홍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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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 | 熙嬪 洪氏
희빈홍씨묘 위치
출생 1494년 5월 27일(음력 4월 14일)
사망 1581년 12월 11일(음력 11월 6일)
(향년 88세)
능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심곡리 363
재위기간 조선 숙의
1506년 ~ 1517년
조선 소의
1517년 ~ 1519년
조선 귀인
1519년 ~ 1537년
조선 희빈
1537년 ~ 1581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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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남양 홍씨
부모 부친 - 홍경주(洪景舟, ? ~ 1521)
모친 - 안동 권씨 권금성(權金成)의 딸[1]
형제자매
1남 2녀 중 차녀 [ 펼치기 · 접기 ]
오빠 - 홍우룡(洪遇龍)
언니 - 김명윤(金明胤)[2]의 처
배우자 중종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금원군(錦原君, 1513 ~ 1562)
차남 - 봉성군(鳳城君, 1528 ~ 1547)
봉작 숙의(淑儀) → 소의(昭儀)
→ 귀인(貴人) → 희빈(熙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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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반정공신의 딸2.2. 구설수2.3. 불편한 말년
3. 가계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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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종후궁. 아버지는 좌찬성, 이조 판서를 지낸 남양군 홍경주(洪景舟)이며, 어머니는 정인지의 사위인 건공장군 권금성(權金成)의 딸 안동 권씨이다.

슬하에 금원군, 봉성군을 두었다.[3]

2. 생애

2.1. 반정공신의 딸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당시 사복시[4] 첨정(僉正)으로 있었던 홍경주는 신윤무, 박영문 등과 함께 군대를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켰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국공신[5] 1등에 책록된다. 홍씨 또한 중종반정이 일어난 바로 그 해에 13세의 나이로 후궁으로 뽑혀 종2품 숙의로 입궐하였다.[6] 즉, 홍씨는 아버지 홍경주를 배경으로 두고 있었기에 중종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장경왕후의 사후에 새 왕비를 세우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조정에서 오고 갈 때 경빈 박씨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린 원자를 지키기 위한 안배로 왕비가 될 수 없었다.

2.2. 구설수

그녀의 삶은 여러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는데, 먼저 정국공신이자 훈구파인 홍경주의 딸로 사림파조광조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 홍경주는 탄핵당하여 조광조 등의 무리를 원망하고 있었으며 희빈 홍씨를 시켜다 "조정의 권세와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조광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을 밤낮으로 하면서 중종의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7]

또한, 나뭇잎에 주초위왕 네 글자를 꿀로 써서 벌레가 먹도록 하는 일을 꾸민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물론 주초위왕 자체가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모든 것은 중종의 주도하에서 벌어진 숙청이자 친위 쿠데타였으니, 사실상 중종에게는 성현으로 추앙받는 조광조의 죄를 물을 수가 없으니 사림파가 그 주변에다가 죄를 뒤집어씌울 때, 희빈 홍씨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셈.
남곤심정이, 홍경주(洪景舟)가 일찍이 찬성이 되었다가 논박을 받아 파면되어 항상 분함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드디어 서로 통하여, 홍경주로 하여금 그의 딸 희빈(熙嬪)을 시켜서,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趙氏)에게로 돌아갔다." 하고, 밤낮으로 임금께 말하여 임금의 뜻을 흔들었다. 또 산 벌레가 나무 열매의 감즙(甘汁)을 먹기 좋아하니 일부러 그 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4자를 금원(禁苑)의 나뭇 잎에 써서 산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자국이 생겼는데, 글자가 마치 부참서(符讖書)와 같았다. 이것을 따서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듣고 의혹하였다.
연려실기술》 중종조 고사본말

중종 39년(1544) 5월 29일 2번째 기사# 성균관 생원 신백령이 조광조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에서 기묘사화 당시의 조정 상황을 비판하면서 말한 "다만 그럴 틈이 없어서, 연분(緣分)을 찾고 반연을 찾아 궁중(宮中)에 길을 터"라는 부분에 "홍경주(洪景舟)의 딸 홍빈(洪嬪)을 통하여 길을 튼 것을 말한다."라고 사관이 설명해 놓는 등 이미 당대에도 홍씨가 조광조 축출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널리 퍼져 있던 것 같다.

이 뿐만 아니라 작서의 변에도 홍씨의 이름이 나오는데, 당시 홍씨는 알리바이가 증명되면서 빠져나갔고 경빈 박씨가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천만다행으로 위기를 넘긴 셈. 참고로 작서의 변 당시까지만 해도 종1품 귀인이었다.

그 이후에 홍씨의 오빠 홍우룡이 궁중에서 일하는 계집종을 강간하려고 한 일로 탄핵을 받기도 하고[8], 윤임과 얽혀 역모를 의심받고, 막내아들 봉성군을사사화로 평창에 유배되었다가 사사 당하는 일까지 겪는다.

2.3. 불편한 말년

이런 와중에도 문정왕후의 배려로 궁궐에서 살고 있었는데, 대간들이 홍씨를 궁궐에서 살게 하면 안된다고 계속 문제를 제기하였다.

다행히 명종이 "부왕의 후궁을 축출하는 것은 내 마음에만 미안할 뿐이 아니라 자전[9]께서도 항상 후궁을 대함에 있어 정의(情意)가 매우 두터우셨다"면서 보호했다. 그래도 계속된 탄핵에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인지 홍씨는 어머니의 병환을 이유 삼아 궁궐 밖으로 나갔다.[10]

1581년(선조 14) 11월 6일에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때는 이미 홍씨의 두 아들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생몰년도가 전해지는 조선시대 후궁들 중 연산군의 후궁 숙의 윤씨와 더불어 가장 오래 살았다.

3. 가계

  • 조부: 영암군수 홍임(洪任)
  • 조모: 양천 허씨(허손(許蓀)의 딸)
  • 백부: 공조판서 홍경림(洪景霖)
  • 백모: 함양 여씨(여충보(呂忠輔)의 딸)
    • 종형제: 홍안세(洪安世)
    • 종형제: 홍필세(洪弼世)
  • 부친: 남양군 홍경주
  • 모친: 안동 권씨(권금성(權金成)의 딸)[11]
    • 동생: 충훈부도사 홍우룡(洪遇龍)
      • 조카: 생원 홍택(洪澤)
    • 동생: 광평군 김명윤(金明胤)의 처
      • 조카: 김덕망(金德望)

4. 대중매체에서


파일:여인천하_희빈홍씨.jpg}}} ||
<colbgcolor=#89236A> 〈여인천하〉의 희빈 홍씨(맨 오른쪽)
2001년 ~ 2002년 SBS여인천하〉에서는 김민희가 연기했다. 후궁 중에서 경빈 박씨(도지원 분) 못지않은 야심가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홍경주(안대용 분) 사후에는 비중이 없어지고 조잡한 음모나 꾸미다가 문정왕후(전인화 분)나 경빈 박씨, 창빈 안씨(최정원 분)에게 깨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가며 계락은 꾸미지만, 큰 그림을 내다보지 못해 근시안적인 계책만을 꾸미고 경빈처럼 배짱이 두둑하지 못해 늘 문정왕후에게 혼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만 보인다. 또한 김안로(김종결 분)나 윤임(이효정 분) 같은 중신들에게 약점을 잡혀 협박당해 그들이 시키는대로 일을 꾸미는 등, 여러모로 경빈 박씨창빈 안씨의 행보와는 대조적이다.

그나마 문정왕후와 대등하게 겨루기라도 했던 경빈이나 최후의 승리자로 남은 창빈에 비하면 음흉하기만 할 뿐 실속은 전혀 없는 편. 덕분에 엄연히 빌런임에도 불구하고 개그 캐릭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빌런이라기보다는 푼수끼 많은 권력가 딸내미가 궁궐로 들어와 앉아있는 듯한 모양새다보니(...). 그래도 말년이 처참한 경빈보다는 이쪽이 낫기는 하다.

배우 김민희는 이전 드라마에서는 조신하고 여성스러운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여기서 맡은 희빈 홍씨는 야심가득한 푼수 캐릭터를 맡았다. 자녀 금원군봉성군도 등장했다.[12] 그리고 기이하게도 본래는 홍경주의 정실 소생의 차녀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소실의 소생으로 궐에 들어가기 전까진 아버지를 대감마님이라 부르는 등의 각색이 있었다.

[1] 정인지의 외손녀다.[2] 효령대군의 외고손자.[3] 본래 희빈 홍씨는 아들만 다섯을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요절하고 금원군, 봉성군만 남았다.[4] 조선시대 수레와 말, 마굿간과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청이다.[5] 반정을 통하여 연산군을 몰아낸 공로로 중종 대에 책봉된 공신으로 1등부터 4등까지 총 104명이다.[6] 당시 경빈 박씨, 장경왕후 또한 숙의로서 함께 입궐하였다.[7] 《국조보감》 제20권, 중종조3 14년(기묘년, 1519년)[8] 중종실록 70권, 중종 26년 3월 18일 계묘 2번째 기사[9] '자전'은 왕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말한다.[10] 명종실록 2권, 명종 즉위년 9월 21일 신사 5번째기사[11] 정인지의 외손녀이다.[12] 금원군은 당시 아역 배우였던 이풍운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