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8:14:03

숙빈 임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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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 후궁 첩지가 있거나 문서가 등재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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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장조의 후궁
숙빈 임씨 | 肅嬪 林氏
출생 연대 미상
조선 경기도 김포군
(現 경기도 김포시)
사망 연대 미상[1]
조선 한성부 중부 견평방 전동 사저[2]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능묘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이패리 (실전)
재위기간 조선 양제
1752년 ~ 1801년 이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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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부안 임씨
유혜
부모 부친 - 임창주(林昌周)[4]
모친 - 김해 김씨
배우자 장조 의황제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은언군(恩彦君, 1754 ~ 1801)
차남 - 은신군(恩信君, 1755 ~ 1771)
봉작 양제(良娣) → 숙빈(肅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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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축복받지 못한 임신2.2. 은언군의 탄생2.3. 세자의 후궁이 되다2.4. 임오화변과 이후
3. 대중 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사도세자의 후궁. 《한중록》에 따르면 이름은 '유혜'이다.[5]

사도세자의 서출은언군은신군 두 아들의 생모, 훗날 철종의 증조모가 된다.

2. 생애

2.1. 축복받지 못한 임신

《한중록》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임씨의 본명은 '유혜'로 1753년 간에 사도세자가 가까이 하여 임신시켰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한때 임씨를 가까이 했을 뿐 총애하지 않으며 출산 전까지 안면몰수로 일관했고, 영조의 꾸중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도세자는 자기 아이를 임신한 임씨를 아예 낙태시키려고 했고, 영빈 이씨조차 임씨에 대해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만삭이 되도록 모두에게 투명인간 취급 당하는 그녀를 보다 못한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어쩔 수 없이 임씨를 돌봐주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말하길 임씨가 너무 박대를 당해서 질투는 커녕 동정심이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임씨는 간신히 은언군을 낳았다고 한다.

2.2. 은언군의 탄생

임씨에게서 사도세자의 서장남 은언군이 태어나자 영조는 무려 한 달이 넘게 사도세자를 꾸짖었다. 심지어 혜경궁 홍씨에게도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남들이 다 하는 투기도 아니한다"고 꾸짖는데, 혜경궁이 세자가 여자를 가까이하는 일을 알리지 않고 임씨를 돌봐준 것을 불충이라고 본 것이다.[6] 혜경궁은 "남편이 하는 일을 어찌 윗전에 일러바치냐"라고 한마디 했다가 더더욱 혼났고, 이때에 대해 "엄중한 하교가 그치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평소에 혜경궁 홍씨에게 관대한 시아버지였던 영조가 저렇게 엄히 꾸짖을 정도였으니 사도세자의 비행에 대한 영조의 분노가 대단했음을 짐작케 한다.

사실 세자가 후궁을 들이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조선 전기에 세종문종의 후궁을 간택하고, 세조의경세자의 후궁을 간택한 것처럼 세자도 후궁을 둘 수 있었다. 또한 중종도 세자 인종이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후궁을 간택하도록 한 적이 있다.[7] 하지만 세자가 후궁을 두는 건 후사를 봐야 하겠다고 임금과 조정이 판단해서 시행하는 일이었다. 사도세자처럼 자의적으로 궁녀에게 승은을 내려 임신시킨 사례는 얼마 없다.[8] 세자가 학문을 가까이하지 않고 궁녀를 건드려 자식까지 본 것이 영조 입장에서는 매우 못마땅했던 것. 그러나 사도세자는 이런 일을 겪고도 인원왕후의 침방 궁녀 빙애까지 건드려 청근옹주은전군을 얻는다.

은언군이 태어난 뒤에도 임씨에 대한 영조와 영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궁녀가 낳은 서출이라는 이유로, 영조와 영빈은 자신들의 친손자인데도 둘 다 은언군을 기꺼워 않은 것이다. 그들은 은언군 모자를 냉대하고 세자 자신도 마찬가지였다.[9]
은언군이 그것이라도 손자라 하시며, 영조나 선희궁께서 약간이라도 봐주시거나 또는 경모궁께서 이것에게 혹하시면, 내 비록 도량이 있다 해도 부녀자의 마음으로 어찌 편안하리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아서 영조와 선희궁께서 알은체 않으시고, 경모궁께서는 겁만 내셔서 어찌할 줄 모르시니, 그 와중에 나까지 투기하면 경모궁께서 황겁하신 중 근심하셔서 병환이 몇 층이나 더하실 줄 알리오.
《한중록》[10]

이뿐만 아니라 은언군이 태어나자 탯줄을 태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는 안태(安胎) 의식을 해야 하는데 영조가 허락하지 않아 바로 할 수가 없었다.[11] 왕손의 태를 묻는 일은 정해진 규례에 없는 일이라는 이유였는데, 며칠 뒤에 관상감과 영의정 김재로가 다시 청하자 그제야 허락해주었다. 영조가 세자의 서자들을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낳은 적자녀들과 철저하게 차별했음을 알 수 있다.

2.3. 세자의 후궁이 되다

그래도 임씨는 세자의 아들 하나를 더 낳았는데 그가 은신군이다. 임씨는 두 아들을 두고 세자의 후궁으로서는 제일 높은 '양제'에 봉해져 양제 임씨라고 불렸다.

2.4. 임오화변과 이후

임오화변이 일어나면서 임씨도 양제의 작호를 빼앗기고 폐출되어 쫓겨났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양제로 복위된다.[12]

한편 강화도에서 잊혀진 왕족으로 살다가 왕이 된 철종이 숙빈 임씨의 증손자(장남 은언군의 손자)이다. 그녀는 고종 대에 황제의 후궁 자격으로 숙빈으로 봉해진다.

3. 대중 매체



[1] 정조실록 31권, 정조 14년(1790년) 11월 18일를 보면 정조가 은언군 인과 양제 임씨를 만나게 해주었다고 나온다.(又馳送一騎, 以便轎載䄄母, 使相見之, 夜將曙矣。한편 기병 1명을 급히 달려보내 간편한 교자로 인(䄄)의 어미를 태워오게 하여 서로 만나보게 하였는데, 밤이 곧 새게 되었다) 따라서 사망은 1773년은 될수 없다.[2] 전동(典洞) 또는 박동(磚洞)이라고 하며, 박석고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771년(영조 47) 은언군의 집을 탐문할 때 언급된다. #[3] 신유박해 때도 양제임씨가 나옴[4] 승정원일기 73책 (탈초본 1314책) 영조 47년 2월 8일 기묘 26/33 기사 1771년 乾隆(淸/高宗)36년. ○ 李壽勛, 以刑曹言啓曰, 前良娣父, 令該曹問名, 大靜縣充軍事, 命下矣。查問則前良娣父林昌周, 丙子年已爲作故云, 不得擧行之意, 敢啓。傳曰, 知道。[5] 《한중록》에 기록된 덕분에 이름이 전해지는 몇 안되는 후궁 중 한 명이다.[6] 조선 시대는 여자의 투기를 금기시 여겼지만 반대로 너무 투기하지 않아도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중종도 딸 효정옹주에게 "부녀자로서 투기가 없을 수가 없다"라고 나무랐을 정도다.[7] 중종실록 80권, 중종 30년 11월 16일 계유 3번째 기사. #[8] 문종이 세자 시절에 후궁인 승휘 권씨에게서 첫 딸 경혜공주을 낳은 바 있으나, 이는 당시 부인인 순빈 봉씨에게서 자녀를 보지 못하자 부왕인 세종이 권씨를 간택후궁으로 들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문종과 사도세자의 세자 생활은 극과 극으로 다르기 때문에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다. 만약 혜경궁 홍씨가 아예 자식을 못 낳았다면 후사를 위해서라도 후궁 간택의 필요성이 있었겠지만, 사도세자는 이미 혜경궁이 당시 세손인 정조를 낳았기에 후사 문제도 없었고, 혜경궁은 은언군 탄생 이후에도 딸 둘을 더 낳았다.[9] 사실 영빈 입장에서는 아들의 비행(非行)을 상징하는 숙빈 임씨와 은언군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또한 영빈은 나중에 영조의 뜻을 좇아 아들을 버리고 세손을 선택할 사람이니 애초에 영조의 뜻과 반대되게 손자랍시고 아들의 서자와 후궁을 예뻐할 사람도 되지 못했다.[10] 요약하자면 영조와 영빈, 사도세자가 은언군을 비롯한 이 서자들을 총애했다면 혜경궁도 질투를 했겠으나, 저 세 사람은 서자들을 총애하긴커녕 외면하기만 했으니 혜경궁 마저 사도세자의 후궁과 서자들에게 동정심이 들었다는 내용이다.[11]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2월 5일 을유 3번째 기사. #[12] 정조실록 2권, 정조 즉위년 8월 3일 임인 3번째기사. #[13] 후속작 《대원군》에서는 증손자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로 출연했다. 《한중록》의 사도세자 역은 최수종이었는데 《대원군》에서 철종 역을 맡은 배우도 역시 최수종이라 두 번에 걸쳐 부부(비록 숙빈 임씨의 경우는 세자의 후궁이었지만)로 만나는 배우 개그가 성립된다. 거기다 철종은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의 증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