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9-22 20:38:31

효정옹주

1520년 ~ 1544년 2월

1. 개요2. 어린 시절3. 불행한 결혼생활4. 억울한 죽음5. 약한 왕권의 탓?

1. 개요

중종의 후궁 숙원 이씨(淑媛李氏)의 차녀. 조선판 막장 드라마인 불륜 치정사건의 피해자이자 비운의 왕녀 중 하나.

2. 어린 시절

중종과 숙원 이씨[1]의 슬하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동복 언니로 3살 터울인 정순옹주(貞順翁主)가 있다. 그러나 생모 숙원 이씨는 효정옹주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욕으로 숨졌다. 자녀들에게만큼은 다정한 아버지였던[2] 중종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두 옹주를 특히 아꼈다고 한다.

3. 불행한 결혼생활

효정옹주는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에게 하가하였는데, 조의정은 을 두어서는 안 되는 부마의 규율을 깨고 첩을 두어 여러 차례 중종의 꾸지람을 들었다. 그때마다 옹주는 투기하지 않고 남편을 보호하였는데, 조의정은 옹주의 몸종인 풍가이를 첩으로 삼아 풍가이를 옹주처럼 대접하고 옹주를 몸종처럼 대우하는 등 박대하였다. 친정아버지 중종은 남편을 탓하지 않는 딸이 답답해 "여자가 되어 투기도 할 줄 모르면 여자가 아니니라"며 나무라기도 했다.[3]투기를 하면 한다고, 안하면 안한다고 지랄이야!!

중종은 조의정을 여러 번 불러 꾸짖었으나, 조의정은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중종은 풍가이를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효정옹주는 중종에게 2번이나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는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보인다.

그런데 조의정은 이런 왕명에 불복하여 다른 몸종으로 바꿔치기 하고 풍가이는 자신의 고향집에 숨겨두고 모친의 집에 간다는 핑계로 꾸준히 만났다. 이는 명백히 왕명에 항명한 것이나, 효정옹주가 함구하였으므로 조의정은 중종 몰래 이렇게 할 수 있었다.

4. 억울한 죽음

1544년에 효정옹주는 난산으로 위독해졌고, 결국 출산 15일 후 숨을 거두게 된다.[4] 이때 옹주가 난산한 이후 15일 동안 조의정이 왕에게 보고하지 않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왕에게 보고하였으며, 중종은 딸을 구하기 위해 의녀를 보냈으나 조의정이 문을 제때 열어주지 않아서 옹주가 사망하면서 논란이 된다.

게다가 일전에 귀양을 보낸 풍가이가 버젓이 한양에 머무르며 조의정의 첩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더 난리가 났다. 왕명을 어기고 왕을 기만했으니 이것은 역적죄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중종은 격노하여 조의정과 풍가이에게 중벌을 내리려고 했으나 조의정은 한때 부마를 지낸 바 있었으므로 재산을 몰수한 뒤 귀양보내는 처벌을 내린다.

풍가이의 경우 11번의 국문 끝에 장 100대와 귀양형[5]을 내렸다. 사실 그녀 자신의 의도야 어쨌든 왕명을 어긴 데다 '조의정이 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정처로 앉히려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기 때문에 중종의 분노는 대단했다. 때문에 중종은 풍가이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나 풍가이가 과거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먹인 일로 신하들의 동정을 샀고[6] 때문에 그들이 왕에게 간청했기 때문에 감형된 것이었다. 그러나 풍가이는 장 100대를 맞은 직후 상궁 은대[7]에게 납치당한 뒤 10여일간 갇힌다. 이는 장 100대를 맞을 경우 즉시 치료를 받아야만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못받게 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10여일간 놔두어도 생존하자, 자신의 하인을 시켜 장 맞은 곳을 또 때리게 한다. 풍가이는 그로부터 20일 뒤 숨을 거둔다.

이에 신하들은 범행의 잔혹함과 풍가이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은대에 대한 처벌을 촉구했으나,[8] 중종은 은대의 벌을 미적미적 처리했고 겨우 '잔인한 죄인을 방치하느냐!'는 신하들의 상소로 마지못해 은대를 유배 보냈지만 중종 사후 문정왕후에 의해 방면된다.[9]

5. 약한 왕권의 탓?

당시의 조선의 부마을 두는 일이 금기시되어 있음에도 [10] 조의정은 외도를 저질렀다. 왕녀들 역시 조선의 여인들처럼 시부모를 공경하거나 검소하고 살림에 신경쓰지않고 사치스럽고 제멋대로 굴어서 문제가 많이 되었는데,[11] 효정옹주는 착하고 순종적이었다. 게다가 야사에는 박색이었다고 한다.

조의정이 왕녀인 효정옹주를 무시한 이유는 박색인 외모와 순종적인 효정옹주의 성품 탓도 있지만, 아버지 중종의 왕권이 약해서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부마의 첩인 풍가이를 처벌하는 게 당연한데, 조정 대신들은 풍가이가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는 걸 알고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모자라 풍가이를 죽인 상궁 은대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딸바보였던 중종은 특히나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딸 효정옹주가 무척이나 애틋했을 텐데, 중종은 딸의 억울한 죽음을 풀지 못한 분노와 죄책감 때문인지, 효정옹주의 죽음 이후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1] 참고로 대장금의 이연생이, 숙원 이씨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2] 출가한 자식들이 찾아오면 버선발로 달려갔다는 야사가 있다.[3] 조선시대는 여자의 투기를 금기시했지만, 반대로 여자가 너무 투기하지 않아도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기도 했다. 인현왕후: 아 어쩌라고[4] 여담이지만 생모인 숙원 이씨 역시 그녀를 낳고 산욕열로 숨졌으니, 모녀가 대를 이어 기구한 팔자였던 셈이다.[5] 단, 귀양은 여자라 하여 돈을 내고 면제받을 수 있었다.[6] 효성이 지극한 자가 자신의 상전에게 불민할 리 없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논리가 너무 비약되기는 했지만...[7] 숙원 이씨의 여동생으로서 효정옹주의 이모라는 설과 그 이전에 효정옹주의 동복 언니인 정순옹주의 남편인 여성위의 첩과 아이를 때려죽인 일로 보아서 (왕의 밀명을 받은) 궁중 내의 해결사라는 설이 있다.[8] 풍가이의 경우 조의정의 명령을 거역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조의정의 첩이 되거나 옹주가 박해받는 것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고, 때문에 조의정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신하들은 생각하였다.[9] 문정왕후는 명령을 내리는 카리스마가 다른지, 중종 때 기를 쓰고 은대를 처벌하라던 신하들이 이때는 다들 "지당하십니다!!"라고 합창. 심지어는 중종 때 자신은 은대를 처벌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소수 의견으로 묻혀버려 안타까웠다는 말을 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오오 여인천하 오오[10] 법적 금지는 숙종 때[11] 이복자매인 중종과 문정왕후의 딸들은, 효정옹주와 달리 모후의 권력이 정점을 달릴 때 사치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고 한다. 특히 의혜공주는 자신의 사가를 궁궐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며놓고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