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0 01:03:34

황진이


황진이(黃眞伊·1506년~1567년)

1. 개요2. 황진이 일화가 기록된 문서

1. 개요

조선 전기의 시인

본명은 '황진'이다. 성이 씨이고 이름이 '진이' 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박연 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 삼절로 불렸다.[1] 서경덕과의 일화, 그리고 백호 임제가 황진이의 묘를 보고 시조를 읊었다는[2] 등의 이야기 등으로 감안해본다면 중종 시기의 인물인 듯하다.

이매창, 김부용과 더불어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3]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이 많은데 이전 버전에서는 황진이가 이패 기생(은근짜)이었다고 나와 있으며, 기생이 일패, 이패, 삼패로 분류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라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기생 문서 참조. 이처럼 기생이라는 직업이 후대로 갈수록 변질된 데다가 화제 속 인물인 만큼 오늘날의 톱스타 연예인처럼 별의별 루머도 많았기 때문에 그녀의 남성 편력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가려내기가 어렵다. 어찌 보면 유명세가 오히려 독이 되어, 남겨진 기록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출생, 동네총각의 죽음, 등의 얘기를 보면 황진이가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이다. 1506-1567이라는 생몰년도조차도 확실하지는 않다.

대체로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황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다 한다. 하지만 기록을 계속 더듬어 올라가면 과연 사실인 것인지 의심스럽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허균의 성소부부고(1613년)에서는 황진이를 맹인의 딸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이후 10년 ~ 20년 뒤의 기록에서는 어머니 '현금'이 빨래를 하다가 지나가던 남자에게 물을 건네줬는데, 다시 받아 마신 물이 술로 변해 있었으며 곧 사랑에 빠져 진이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00년이 지난 기록에서는 한 소년이 진현금을 희롱하자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진이고, 그때 사흘 동안 향내가 가시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우리가 아는 황 진사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에서야 기록된 이야기다. 초기 기록인 17세기 기록만 확인해도 황씨라는 성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시와 서예,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15살 때 어느 동네 총각이 황진이를 보고 한눈에 반해 상사병에 걸렸고 중매를 넣었지만 황진이의 어머니가 거절하였다. 결국 동네 총각은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를 치르는 도중 상여를 옮기는데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자 황진이가 나와서 관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고 나서야 상여가 움직였다. 오...온달이냐?![4] 이 사건 이후 황진이는 자신은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기는 어렵다고 하며 기생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해 기생에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황진이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고 종모법에 따라서 황진이도 기생의 길을 가야 했다.

그 뒤 명월이라는 이름으로 기생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시, 서, 화에 모두 능통한 초특급 기생으로 명성을 날리며 저명한 문인, 학자들과 교류했고 어느 정도 사회와 남자들에 대한 반항적인 사고가 있었던 듯, 10년 동안 면벽 수행을 하며 생불이라 불리던 천마산의 지족 선사를 유혹해 파계시켜 버리고, 왕족 벽계수[5]가 한양으로 돌아가려 하자 단장을 한 뒤 말을 타고 벽계수의 가는 길 앞에 나타나서 "청산리 벽계수야~"라고 시작되는 시조를 읊자 벽계수가 놀라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벽계수와 지족 선사를 모두 무너뜨린 뒤, 송도에서 저명한 학자였던 서경덕에게 찾아가 서경덕도 유혹하려 했지만 보통 내공이 아닌 서경덕은 황진이의 유혹에도 덤덤했고, 서경덕에게 감탄한 황진이는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황진이의 유혹에 겉으로는 덤덤했다지만 사실 서경덕도 황진이를 내심으로는 좋아했다는 설이 나도는데, 황진이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는 그 시조가 서경덕 문집이 아니라 가집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후세 가객들의 희작일 가능성이 크다. 17세기 이전의 시조들은 사대부들의 문집이나 재가본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고는 위작의 가능성이 있다. 시조가 구술 전승에서 벗어나 문헌에 본격적으로 수록된 시기는 김천택, 김수장의 활동 이후인 18세기 중엽이다. 즉 야사이므로 애초에 둘은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 조선 시대 때 부터 동인지가 있었다니.

여튼 그러다가 서경덕이 세상을 떠나자, 기생 일을 접고 은둔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때는 풍악을 울릴 것이며, 살아 생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남자들을 애태우게한 죄가 있으니 관을 쓰지말고 자신을 송도 밖의 사천 모래밭에 그냥 던져서 까마귀밥이 되게 해 방탕한 여자들에게 경계로 삼으라[6]고 했다는 유언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설"일 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설이든 실제든 황진이가 까마귀밥이 되는것이 안타까웠던 송도 사람들이 시신을 고이 안장하여, 현 북한 장단 남정현 고개에 황진이의 묘가 있다. 묘비명은 한글로 "명월 황진이의 묘"라고 되어 있고, 북한엣도 일반유적으로 지정되어 묘역도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 야사에는 묘 앞에 조그마한 샘이 하나 생겨났는데, 작은 바위 두 개 사이로 물이 조금씩 솟아나왔다고 한다. 목이 마른 과객이 물을 마시려면, 우선 무릎을 꿇어야 했을 것이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이 흡사 여인의 허벅지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것과 같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흠좀무 [7]

선조 때의 문인 임제(1549년 ~ 1587년)는 황진이의 무덤이 초라하게 있던 걸 보고 안타까워하며 시를 썼는데 결국은 세월가면 아무리 먼치킨도 초라하게 남을 뿐이라는...허무한 시. 일설에 의하면 임제는 이 시를 짓고 말한 것 때문에 벼슬에서 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낸 국문학자 김두봉은 과거에 개성에 갔을 때 황진이의 무덤에 헌화하고 술을 부은 뒤에 절을 했다고 한다. 국문학자로서 황진이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행동이었지만...... 후에 김두봉이 연안파로 몰려 숙청 당할때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국의 부수상이라는 자가 기생 년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고 술을 따르고 절까지 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였다나? [8]그러나 이건 헛소리다. 김두봉이 죽은건 1961년이고 실제로 숙청된건 그 이전 인데 이때는 김정일은 아직 어릴때였고 김일성도 절대권력이 확립되기 전이었다. 황진이에게 존경을 표현했다는 것이 숙청의 결정적인 계기라는건 그냥 헛소리에 불과하다. 김두봉의 숙청은, 그가 연안파였기 때문이다. [9]

뛰어난 시의 재능으로 여러 걸작 시와 시조들을 남겼는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라는 시조라든지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같은 시조들이 유명[10]해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있고 수능에도 출제된바가 있다. 그외에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같은 시들을 남겼다.

재능과 미모를 겸비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간지라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황진이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들이 나왔고 사극 영화,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북한의 홍석중[11], 남한의 전경린, 최인호, 김탁환이 황진이를 소재로한 소설을 쓴 대표적 남북한의 작가들이고 도금봉, 김지미, 장미희, 이미숙, 하지원, 송혜교 등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황진이 역을 한 바있다.

무한도전 등지에서 박명수가 자주 우려먹는 개인기로 황진이댄스가 있다(...)

점프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나왔다.

괴물(한국 소설)에서는 자신의 전생이 황진이었다고 굳게 믿는(...) 등장 인물이 나오며 실제로도 기생의 길을 걷는다. 그것도 현대 한국에서. 하지만 말이 기생이지 사실상 지역 부흥을 위해서 뛰는 천재 여걸로 묘사되며 어두침침한 작중 배경에서 얼마 안되게 밝은 분위기의 등장 인물이다.

파일:Hwang_Jini_2_(UW5).png

대항해시대 5에서 어째서인지 항해사로 등장.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

2. 황진이 일화가 기록된 문서

중종 시대(1488년 ~ 1544년)의 인물이라고 하지만 최초의 기록은 1611년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부터 나타난다. 때문에 구전되다가 각색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즉 황진이의 실체 자체는 분명하지만 그 활약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많다는 것.
  • 허균의 《성소부부고》 〈성옹지소록〉 (1611년)
  • 유몽인의 《어우야담》 (1621년)
  • 이덕형의 《송도기이》 (1631년)
  • 임방의 《수촌만록》 (1724?년)
  • 김이재의 《중경지》 (1824년)
  • 서유영의 《금계필담》 (1871년)
  • 김택영의 《송도인물지》 (1896년)

[1] 그런데, 이 "송도 삼절"을 정한 사람이 황진이 본인이다. 스스로를 송도삼절 중 하나로 정한 것이라 신뢰도가...[2]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하는 시조. 이 시조를 읊은 것 때문에 임제는 조정에서 탄핵을 받을 정도였다[3]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김부용 대신, 홍랑, 또는 허난설헌을 넣기도 한다. 하지만 허난설헌은 표절 논란이 조선 시대부터 제기되고, 황진이는 실존하긴 했는데 실체가 불분명하다. 일단 남아있는 기록상으론 이매창이 가장 뚜렷하다.[4]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속치마를 벗어서 상여를 덮어 주었다고 한다. 몽달귀신 문서에는 이리 서술되었다.[5] 본명은 이혼원(李渾源)으로, 사림의 아버지격인 김종직의 제자기도 했다. 이혼원의 호는 벽계(碧溪)였는데, 여기에 정4품의 종친에게 주는 벼슬인 수(守)를 붙여 흔히들 벽계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진이의 시조에 나오는 벽계수(碧溪水)는 그걸 노리고 일종의 중의적 표현을 쓴 것.[6] 일부 여성 학자들 중에는 황진이가 정말 이런 소리를 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뭐 진실은 모를일이다[7] 야사는 야사일 뿐이다. 실제 무덤이 있고, 무덤 밑에는 두 개의 바위니 샘이니 이런 거 없다.[8] 사실 북한에서 '존경', '동경'은 오직 김씨일가에게만 할 수 있는 표현이다.[9] 북한에서는 1956년부터 김일성을 주축으로 한 만주파가,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등 제2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했다.[10] 황진이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황진이가 지은 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황진이 시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예로 든 시 중에도 그런 것이 있다.[11] 소설가 홍명희의 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