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6 13:24:39

계백

파일:계백장군_영정.jpg
계백 표준영정
관등 달솔(達率)
이름 계백(階伯) / 부여승(扶餘承)(?)
사망지 백제(百濟) 황산벌(黃山벌)
생몰연도 ? ~ 660.07.09[1]

1. 개요2. 생애
2.1. 출신과 초기일생2.2. 신라의 침공2.3. 황산벌 전투2.4. 죽음2.5. 사후
3. 역사적 평가4. 왜 겨우 5천 결사대만을 이끌었는가에 대한 논란5. 그 외에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백제의 마지막 영웅이자 명장, 황산벌의 전설

백제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

흔히 계백 장군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군인이란 인상이 강하지만, 원래는 백제에서 좌평에 다음 가는 관등인 달솔까지 지내는 등 정치판에서 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고대의 고위 귀족들은 정치계에서는 물론이고 전시에 군인으로써 전공을 올리는 것이 출세를 위한 필수요소였으므로, 계백이 군인 겸 정치인이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생애

계백의 생년은 알려져있지 않다.

2.1. 출신과 초기일생

대부분의 백제 인물들이 그렇듯 기록이 부족해 그 행적은 상당히 베일에 싸 여있다. 관련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적어, 황산벌 이전의 삶은 알 수 없다. 그나마 남아있는 삼국사기의 계백 열전에 따르면 계백은 벼슬길에 올라 벼슬이 달솔에 이르었다고 기록했을 뿐이다. 달솔이라는 벼슬은 백제 16관등 중에서도 2등급에 이르는 벼슬이었으니 그 신분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계백은 죽고,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황산으로 함께 출진한 장수들 중 계백보다 상위 관위인 좌평인 사람도 있음에도 이들이 아닌 계백이 지휘를 맡았다는 것은 계백이 왕족이었거나 혹은 못해도 상당한 고급 귀족 출신에 속하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한편 조선시대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 따르면 계백은 백제의 수도인 부여현 출생의 사람이며, 그 이름은 승(承)이고 성씨는 백제 왕실과 동성(同姓), 즉 부여씨였다고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계백의 본명은 부여승이며, 계백이라는 이름 자체는 또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대동지지는 계백 사후 훨씬 뒤에 적힌 기록인지라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리서라고 해서 마냥 받아들이지 않은건 아니다. 고려 말엽 이전까지 역사란 국가의 흥망성쇠를 군주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 거의 전부였고, 아주 약간을 열전이라 하여 다른 인물을 기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문에 정사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고을읍현의 옛지명이라거나 향족, 거족 등의 인물은 지리서에 주로 기록되었다.

또한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는 해동잡록(海東雜錄, 1670년 편찬)을 인용하여 계백이 백제 왕족인 부여씨 출신이며, 본래 가잠성의 성주로서 신라의 명장인 김유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부터 두각을 드러내었다고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계백을 부여씨라고 하였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본 측 기록, 금석문 등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야사라 신빙성은 매우 낮다.

2.2. 신라의 침공

660년, 신라이 각각 육지와 바다를 통하여 동시에 공격해오자 백제 조정은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본래 국경을 맞대고 투닥투닥대던 신라라면 몰라도 당나라가 고구려를 내버려둔 채 황해 바다를 횡단해서 백제를 침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신라군도 최단거리 경로가 아니라 북서쪽으로 향해 서해안가의 덕물도까지 우회해서 마치 고구려를 공격하려던 것과 같이 경로를 위장했기에 백제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달솔 벼슬을 지내던 계백은 충상, 상영 등과 함께 장군이 되어 죽음을 각오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북동쪽에서 내려오는 신라군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계백은 이미 전황이 절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나라를 지킬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살아서 적의 노예가 됨은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하다." 라고 하며 출진하기 전에 처자식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베어 죽였다.[3]

2.3. 황산벌 전투

660년 음력 7월, 좌평인 충상, 상영 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진을 친 계백은 '옛날 구천은 5천의 군사로 오나라부차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해서 승리를 쟁취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렇듯 비장한 각오 속에, 계백 휘하 5천 결사대는 그대로 황산벌에서 신라의 대영웅이자 최고의 명장이었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네 번의 전투가 이어졌고, 백제는 네 번 모두 신라군을 격퇴하는 기적에 가까운 전과를 올린다. 자세한 것은 황산벌 전투 항목을 참고하기를.

백제군이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승리하는 바람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자, 신라의 장군 김품일이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을 홀로 적의 진으로 돌격하게 했다.[4]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혔고,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다[5]. 그러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신라의 화랑, 관창을 보며 백제의 패배를 예감했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어린 관창의 용맹한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했고,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백제군은 패퇴하였다.

2.4. 죽음

결국 계백 휘하 5천 결사대는 거의 전멸하였으며, 계백 본인 역시 이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다만 계백과 함께 전투를 지휘하였던 좌평 충상, 상영 등을 비롯한 20여 명은 살아서 포로로 붙잡혀 신라에 항복했다.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인 사비성이 당군과 신라군의 협공을 받아 함락되었고,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매국노 예식진의 배반으로 인해 사로잡히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다.

2.5. 사후

일본에서는 백제 멸망이라는 소식을 들은 사이메이 덴노가 병으로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구하라고 일본 전토에서 싹싹 긁어모아 1차 원군으로 5000명(661년)의 군대를 파견했다.[6] 2차 원군은 663년에 출정했는데 그 수가 2만 7천에 달했다.

백제 멸망 후 봉기한 백제부흥군은 한때 백제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웅진도독부를 수세로 몰기도 했지만 내부 분열과 신라군의 지원 등으로 인해 663년 2월 기점으로 열세에 밀리고 말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663년 8월, 백강에서 백제와 왜 연합군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 백강 전투(백촌강 전투)라는 결전을 치루었지만 결과는 일본군의 피로 강이 붉게 물들었다라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참혹한 패배였다. 살아남은 왜군과 백제 부흥군 수뇌부는 그대로 일본으로 도주했고 남은 임존성을 제외하면 백제부흥군들은 나당 연합군에 대거 투항한다. 임존성의 지수신이 동년 11월까지 농성을 벌였으나 끝내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백제 전역은 당과 신라의 각축장이 되어 결국 신라가 671년 당나라의 괴뢰정부인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축출하면서 완전히 신라 영역이 된다.

3. 역사적 평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계백에 대한 기록은 고작 황산벌 전투에 그치며, 그나마도 백제본기나 계백열전에 나와있는 내용보다 신라측 기록에서의 관창열전 등에서 오히려 계백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히 나와있다. 즉, 계백에 대한 기술은 철저히 신라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으로써, 신라인들 역시 비록 적대국인 백제국의 장수이지만 계백의 인품을 존중해주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7].

역사기록엔 이토록 계백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지만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에서는 해동잡록에 계백에 대한 기록이 좀더 남아있었다며 많이 인용하였는데, 정사로서 인정받지 못하긴 하나 계백은 백제 왕족인 부여씨로써[8] 가잠성의 성주로써 김유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백전백승의 전적을 자랑하던 김유신을 이긴 유일한 백제 장수가 계백이라는 것... 인데 사실은 알려진 바와 달리 김유신은 백제에 여러 번 패배를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세한 것은 김유신 항목의 비판 부분 참고.

그만큼 김유신에게 강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실을 의자왕 역시 알았기 때문에 소정방의 13만 대군을 막는 것이 아니라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막으라고 보낸 것으로 보인다. 본래 백제는 무역을 통해 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9] 신라군만 막아낼 수 있다면 당군은 협상을 통해 회군시킬 승산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던 것.[10] 이런 상상은 영화 황산벌에서 자세하게 묘사된다.[11]

짧은 일화와 황산벌 전투로 후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평가를 했는데 대체적으로 충의롭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최부와 서거정 등은 계백만이 백제의 충신이라고 극찬했다. 다만 권근은 일가족을 죽인 것을 가지고 냉혹하다며 비판했다. 안정복은 그런 권근을 역으로 비판하며 계백의 충의로움을 칭찬했다.

4. 왜 겨우 5천 결사대만을 이끌었는가에 대한 논란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해 성왕을 전사시키며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했다. 고립상태에서 위기에 처한 신라는 중국과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했는데,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원병을 이끌게 했다. 660년에 나당연합군 18만명(당군 13만명, 신라군 5만명)의 공격이 백제를 향하게 된 것이다. (관련 내용은 백제 항목의 멸망 과정 부분도 참조.)

의자왕은 병사를 모았으나 의자왕과 지방세력 간의 추락할 대로 추락한 관계[12]로 인해 백제가 모을 수 있는 병력이라곤 고작 5천 뿐이었다는 이야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내용이다.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의 오래된 역사서에선 의자왕 말년의 향락과 사치 때문에 백제가 쇠락해서 군대가 5000명 밖에 없었다고 단순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구당서 소정방전(참고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죽였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 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삼국사기》권제이십팔 백제본기 제육 의자왕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전군이 전멸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가운데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부상병, 포로, 패잔병 등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백제군의 규모는 최소 몇만 명 수준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와의 싸움에 5천명 밖에 동원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의자왕이 진짜 막장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주력이 당군을 요격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왜 이러한 다른 기록이 생겼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몇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우선 통일 이후 신라가 당나라보다는 신라의 전공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록을 누락시켰거나, 혹은 관련 기록이 남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삼국사기 수록과정에서 당서 기록을 백제본기에서 수록해주었으니 충분했다고 보는 등의 수록과정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계백이 동원한 5천은 국왕이 즉각 자신의 권한으로 빼올 수 있는 직속군대여서 바로 급파하였고, 백강 방어전은 인근 지방세력과 5천 병력을 급파한 후에 지방에서 끌어모은 병력이 꾸준히 투입되어서 보강되었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위의 지방세력과의 갈등 문제도 설명이 가능하다. 지방 병력의 동원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갈등으로 인해 동원이 지체되는 것 자체는 피할 수 없자, 의자왕은 5천이라는 적은 병력이나마 국왕 직속 부대를 빨리 보내서 일시적으로라도 신라군을 저지하고 그 사이에 동원 시간을 벌어서 당나라 군을 막는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5. 그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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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계백 동상[13]
충남 논산시에 무덤이 남아 있는데, 죽었을 당시 백제 유민들의 손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진 이후, 그냥 계백의 무덤이라는 게 구전으로만 내려오면서 동네 주민들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폭우로 봉분이 씻겨 나가고 안쪽이 노출되었는데, 이때 도굴꾼에 의해 유해는 물론이고 같이 들어 있던 물품들이 모조리 도굴당하고 말았다. 이래서 안타깝게도 진짜 계백의 무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서도 한참 뒤에서야 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어서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여담으로 전쟁을 나서기 전에 가족들을 모두 죽였기에 초기에는 냉혈한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14] 그러나 조선 시대부터는 유교의 충(忠)정신을 지켰다고 하면서 모범적인 사람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충남 논산시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 익산대로 최북단에서 이어진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계백이 황산벌 전투 이전의 역사에서 전혀 이름이 보이지 않는 부분과 의자왕에 대한 의도적 폄하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절 마지막 소절에 등장한다. 황산벌의 계백, 맞서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이 부분은 그 자체로 훌륭한 대구를 이루고, 노래 전체에서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부분이어서 강렬한 임팩트가 있다. 그래서 당시에 이 노래가 한참 보급되던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낸 국초딩들은 이 노래 소절을 대부분 기억할 정도로 인지도가 매우 높다. 덕분에 계백, 관창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것도 덤.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 삼국기에서는 그 유명한 유동근씨가 맡아 열연하였다. 마지막 황산벌에서 전사할 때는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 나오는 전위처럼 부릅 눈을 뜬 채로,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서서 전사한다.

백제 멸망기를 다루었지만 의외로 의자왕이 출연하지 않은 드라마 천년지애에서 단 한 컷 나온다. 물론 전쟁에서 전사하는 안습한 역할인데다가, 그나마도 연출의 허접함으로 인해 전혀 비장하지 않게 묘사되었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맛깔나는 전라도 사투리 연기를 보여준 박중훈이 열연하였는데(부여사람인데 충청도 사투리가 아니라 전라남도 사투리 참 아이러니하다) 대체로 무척 과묵하고 우직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 잔꾀를 잘 부리는(...) 김유신의 모습과 대조된다. 여기에서는 결전을 나설때 자기 아내, 자식을 다 죽이는 장면에서 아내가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 것이여!"라는 일갈을 듣는다. 정확히는 계백이 아내에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기는 법이여!"라고 하면서 죽음을 종용하자 아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뒈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뒈지는 것이여!! 인간아!!!"라고 일갈한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장면.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니 계백이 작전이 뭔지아나? 그냥 열심히 싸우는거데이, 형님아 니 계백이랑 싸워서 이겨본적이 있나?"라고 할 정도로 별 작전없이 상대방의 작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단순 무식하게 열심히 싸워서 이기는 전법을 구사하는 듯 하다. 이렇게 보면 그냥 무식해보일 수도 있지만 김유신과의 장기에서 통수로 이길 정도로 노련한 전략가인 것으로 보인다.

황산벌에서는 김유신이 훨씬 나이가 많고 계백이 젊은 장수로 묘사되는데, 생년이 확실치 않지만 역사가들은 대부분 최소한 김유신보다는 젊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한다. 참고로 이때 김유신 나이는 66세.[15] 환갑도 넘긴 할아버지다.

글동산에서 나온 그림으로 엮은 한국의 역사에서의 계백편에서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젊어서 불교에 귀의했다가 의자왕이 직접 부르러 와서 돌아온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이후로는 계속 중머리. 이후 신라와 고구려를 상대로 연전연승하다가, 의자왕이 사람이 변하자 이에 실망해 다시 절로 들어간다. 이 때 계백을 따르는 친위대 역시 함께 스님이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이후 5천 결사대의 중심이 된다. 그림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중머리를 한 관운장. 긴 수염에 청룡도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당시에 계백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거룩한 희생을 하는 수도승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다.
조이온(HQ Team)이 개발한 국산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천년의 신화'의 후속작이자,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게임인 천년의 신화 2 : 화랑의 혼이라는 게임에서 백제측 영웅 유닛으로 등장하였다. 두 갈래로 갈라진 검을 사용하는데, 원거리 공격이 무려 레이저(…). 특수기술을 사용할 경우 맵 전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주변에 적이 있을 경우 하늘에서 해당 적에게 번개가 내려꽂힌다. 일정 횟수를 모두 소진하면 비가 그제서야 그친다. 횟수를 강조한 이유는 이 횟수를 모두 소진하지 않으면 비가 무한대로 내리기 때문. 비가 내리는게 뭐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자원과 관련이 있다. 동사에서 개발한 게임인 임진록과 본 게임의 전작에서는 비가 내려도 자원인 쌀이 다시 자라지 않았지만 본 작에서는 주 자원인 쌀이 자연상태에서도 매우 조금씩 다시 자라며 비가 내릴 시 더욱 많이 자라게 설정이 되어있었다. 또 다른 자원인 물은 애초에 무한이라 별상관이 없었지만, 계백을 뇌우만 쓰고 구석에 박아놓으면 비가 그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자원을 채취할 수 있었다. 백제만 있으면 무한맵이 따로 필요없었…겠지만 게임은 이미 망했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 이제는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웹게임인 콜로니 오브 워에서 69레벨의 HCS 시리즈 기체 중 하나로 염동기체이다. 건곤감리코어 구현이 완료된 무휼을 토대로 강화된 기체들이며 그 중 이름을 따와 계백이며 3기체 중 가동률이 가장 짧은 편으로 대략 1시간도 안 된다.[16] 대신 마의 구간 후반기 기체인 만큼 강력한 무장들이 있으며 공유도 가능하다.[17]

두사부일체에 "계백장군이 계씨면 똘이장군은 똘씨냐??" 라는 드립개그가 나온다. 여담으로 계백 장군의 성씨는 위 항목에도 언급되어있듯 대동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부여 씨라고 기록 되어있다. 고로 계백은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많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 등의 정사에는 언급 되지 않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영걸전 시리즈의 외전 작품인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계보명으로 결사계백의 패가 유출됨으로 인해 추가 미래무장으로 등장이 확정되었다.

오늘날에는 이 장군의 정기가 맑은 백제의 옛 터전에서 군생활을 시작하는 입영장정들도 많다.

바람의 나라에서도 황산벌 지역이 추가되면서 나오는데 여기선 아예 미청년 이미지로 나온다. 여기 가면 볼 수 있다.

6.1. 선덕여왕(드라마)의 등장인물

계백(선덕여왕) 문서로.

6.2. MBC사극 계백

줄거리는 계백(드라마) 참조.

배우 이서진이 연기했다. 당대 백제의 충신으로 유명한 성충흥수의 의형제를 맺은 걸로 나오며 은고의자왕과의 복잡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임금님보다도 백성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묘사된다. 굉장한 먼치킨으로 나오는데 신라와의 전투에서 단 1패를 겪었는데 그 1패마저 당나라에게서 정식적인 왕비조서를 받기위해 신라와 내통한 은고의 세작질로 인한 것.

주인공답게 김춘추와 김유신은 '의자는 별 거 아닌데 계백은 두렵다.' 수준.

6.3.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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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재성이 연기 했다. 최재성은 원래 김유신 역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인해 하차했다가 결국은 계백 역할로 합류하게 됐다. 이를 만회할 생각이기라도 하는지 첫 등장부터 언월도로 무쌍을 찍으며 화려하게 등장. 의자왕으로부터 김춘추를 산 채로 잡아가기 위해 좌평 흥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다수의 사극에서 여러 배우들이 연기한 계백중에서도 최재성이 연기한 계백은 위의 계백표준영정의 초상화에서 나온 계백의 모습처럼 강인하고 기품있는 눈매에 멋진 호랑이수염등의 모습 덕분에 역덕후들에게 역대 계백 배역중에서도 가장 계백의 표준초상화 모습에 근접한 외모와 인상과 느낌을 잘 묘사주었다는 호평을 받았다.[18]

황산벌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백제편의 최종보스 다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전쟁 전에 김유신(김유석)과 나무 아래서 술잔을 나누는 짠한 장면을 보여주었고 역사대로 반굴관창을 죽이고 김유신 앞에서 최후의 저항을 펼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김유신은 명장의 예우로 계백을 장사지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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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7월 9일 의자왕 21년[2] 뚜렷이 기록된 부분이 아니라 확실지 않지만 명목상 황산벌 전투의 지휘관은 계백보다 관등이 더 높은 충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황산벌 전투의 직접적 지휘는 계백 주도로 된 것으로 보인다.[3]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거나 아들이 어렸을 것으로 보인다.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면 신라 측의 김품일이나 김흠순의 들처럼 전장에 데리고 나왔을 터. 이런 점과 황산벌 전투 이전의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미뤄볼 때 계백은 황산벌 전투 당시 의외로 매우 젊은 나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4] 관창 이전에 화랑반굴 역시 마찬가지로 백제군으로 닥돌해서 죽었지만 왠지 관창에 비해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5] 싸움과 전투의 경험이 없고 부족한 어린아이가 전장에 나오자 어이없고 기가막혀서 살려보냈다는 해석도 있다.[6] 이 일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던 날 사이메이 덴노는 사망했다.[7] 다만 '인품 존중'보다는, 의자왕을 정말 '막장' 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는 설명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즉 계백을 띄워주는 것만으로도, '의자왕은 이렇게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게 만든 폭군' 이라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기 때문. 물론 이에 더해, 충신이라는 점에서 추모받았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될 수는 있겠다.[8]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계백의 성이 부여씨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당시 의자왕과 귀족들 사이가 벌어질대로 벌어져 있었고 5천 결사대는 국왕 직할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 병력의 지휘관인 계백도 왕족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9] 하지만, 당나라 고위급들은 전에 백제가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 결국 고구려에 붙어버린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10] 하지만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때 신라는 당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로 군대를 보냈는데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고 정작 고구려 파병 때문에 방어체계에 구멍이 뚫린 신라를 공격한 적이 있다. 원래 당은 백제를 어르고 달래서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로 파병하라고 설득 중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외교관계에 있어 백제보다 신라를 우선시하게 된다. 특히 수나라 때부터 백제는 파병하겠다고 말로만 하고,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고구려로 파병한 적이 없는 반면 신라는 백제가 틈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김춘추의 억지로 군대를 보낸 것이라 당은 백제를 불신하고 신라를 더 신뢰하게 된다. 그렇다고 당과 백제의 국력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신라가 없었다면 모를까 당시 백제가 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확률은 낮다고 봐야 한다.[11] 작중 의자왕이 보낸 서신 중 '네가 하루 이틀만 더 거시기 해뿔면 나가 소정방이와 쇼부(…)을 쳐불텐디. 알아먹었제?' 라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작중 소정방의 모습은 'ㅎㅎㅎ 백제 땅도 먹고, 신라 땅도 먹고염 ㅋㅋㅋ' 이런 식이라 어찌됐을지는…[12] 의자왕의 왕권강화 움직임으로 인해 백제 귀족세력과 의자왕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그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치달아 있었다.[13] 논산 군사박물관에 있다.[14] 하지만 당시 신라의 백제에 대한 증오의 골은 상당히 깊었고 의자왕은 소정방과 김춘추에게 술을 따르고 많은 지배층이 당의 포로로 끌려가고 백제 출신 귀족들은 신라에서 기껏해야 계장급 대우인 4두품으로 대우를 받는 등 경멸어린 취급을 받은 것을 보면 계백 장군이 단순히 냉혈한이라 평가하기는 힘들다[15] 그래서, 김유신 배역을 맡은 정진영은 나이가 들어보이고 흰 수염을 기르고 있다.[16] 대략 50분 후반이며 김유신 장군 모티브인 유신과 을지문덕 장군 모티브인 문덕에 비하면 기름먹는 하마, 게임할 때 콜로니밖에 1시간 정도 방치하면 그야말로 우주미아다.[17] 3기 전부 슬롯이 3개고 식별이 HCS로 공유된다.[18] 멋스러운 수염에 크고 간지나는 언월도덕분에 삼국지관우가 생각난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게다가 언월도도 삼국지연의의 관우가 쓰는것과 같은 용까지 그려진 청룡언월도이기 때문에 더욱 비슷해 보인다.[19] 김유신은 계백이 적장이긴 하나 너무나도 훌륭한 인물이기에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항복을 권유했으나 계백은 호랑이가 목숨이 위태로워도 여우에게 항복하는 법은 없다고 거부하며 임금과 국가와 백성들에게 의리를 지켜 최후를 맞는다. 계백이 죽음을 앞두고 김유신에게 그대와 정정당당하게 싸우다 패하였으니 여한은 없지만5천 vs 5만이 정정당당해?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트린후 당나라가 우리민족을 모두 집어삼기려 할 것이라 예측하며 당나라의 야욕으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김유신은 눈물을 훔치며 당나라가 우리땅과 우리백성들을 더럽히는것을 용서치 않을 것이라 약속하는 감동적인 모습은 대왕의 꿈 최고의 명장면중 하나로 호평받았다. 그러나 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하고 당나라군이 저지른 방화와 약탈과 강간의 참상앞에서 초강대국인 당나라에게 의지하는 약소국이며 속국입장인 신라는 큰소리를 칠수 없었기에 김유신은 부모 잃은 아이를 안아주며 위로하면서 이런 꼴을 보려 백제와 고구려로 출전한 게 아니었다며 계백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탄식한다. 훗날 토번이 불패의 명장 가르친링의 지휘아래 크게 일어나 당나라를 위협하는 틈을 타서 김유신은 조카 문무왕과 함께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과 힘을 합쳐 한반도 땅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때까지 살아남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들을 지켜냈으니 나름대로 힘이 닫는데까지 계백과의 약속을 지킨 셈.